2015.11.28 23:32
싹스와 쏘마
1987. 6. 10. 새벽(수)
본문: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 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장 36절∼4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성경에서 육신 생각과 육신 욕심과 또 육신을 따라서 행동한 모든 행동과 정반대로 성령의 생각과 성령의 소욕과 성령의 행위가 있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성경은 이 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래서 육신의 생각이나 소원이나 따라서 행하는 것이나 이런 것은 다 그 결과가 사망을 이루고 또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나 소욕이나 소원이나 생각이나 이것은 다 영생을 이룬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데 멸망은 전부 육신의 작용이 멸망이라 이렇게 결론으로 말하면 되어 있고 또 영생하는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행동하는 것이 다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러면 지금 육신의 행동이라는 이 육신의 행동이라 하는 것을 너무 성경에 많이 “육신의 행동은 다 멸망이라, 전부 사망이라.” 이렇게 말씀해 놓은 것이 전 성경이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것을 진리를 똑똑히 알기 전에는 여게 담대함을 가지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육신의 그 행위라 하는 것이 너무도 많고 거의 전부라고 다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다 사망이니 육신의 생각이나 육신의 소욕이나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되겠느냐?’ 해서 그 육신이라 하는 것은 다ㅡ나는 원어를 모르는데ㅡ육신이라 하는 것은 원어가 싹스다, 원어로서 싹스고. 그렇습니까, ○목사님? 육신이 싹스입니까? 녜.
‘싹스다. 몸은 쏘마다. 이러기 때문에 육신 이거 전부는 부패성을 말한다.’ 이 부패성으로 말해야, 이 전부 죄악으로 이렇게 말해야 이것이 해석이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거 전부, 왜? 죄와 그 육신의 행위와 그 결말의 심판이 꼭 같이 다 멸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체 이걸로 말하지 안하고 부패성이라 해. 왜? 그 행동이 엄청나게 전부가 전멸이니까.
전부가 전멸이니까 그것을 부패성이라 해야 되지 우리 몸이라고 하면 이거 도무지 해석이 안 되고 이해를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부패성이라 이렇게 주장한 것이, 그전에는 이런 게 없었고, 해방 전에는 우리 나라에도 교리와 신조들이 그렇게 뚜렷이 높이 깊이 들어가지를 못했고 일반적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하는 그런 정도에 아주 어린 그런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서 믿었었습니다.
믿다가 해방 후부터, 해방 전에 신사참배라는 그 큰 바람이 불었고 그뒤에 해방 후에 새로 거게서 개혁이 되면서 신학자들도 신사참배라는 그런 모든 파동이 있기 전과 있은 지 후와 모든 환경에 몰려오는 그 마찰들이 달라져서 다 견해도 또 사색하는 것도 궁구하는 것도 달라져서 그때에 많은 실은 개혁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에 우리 한국 나라에서는 고신, 고려신학교가 제일 정통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고, 그때에 박형룡 박사가 거기 와 가지고서 교장으로 시무를 하기 좀전에는 박윤선 목사님이 와서 교장으로 시무하고, 박형룡 박사가 오고 난 다음에, 자기가 와서 보니까 뭐 다 같고 오히려 은혜면이 박 목사님이 나으니까 그만 박형룡 박사가 나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해 가지고서 그분이 서울로 가 가지고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신학교입니다.
○○신학교인데 그 ○○신학교를 할라 할 때에 함부선 목사님이 그 일을 만류하고, ‘신학을 많이 하는 거는 좋기는 좋은데 자기가 신학 할라면은 벌써 신신학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신신학을 끌어들여 가지고서 신학 할라 하느냐? 할라면 정통을 해라.’ 그때 신신학을 말하는 것은 저 북미에 있는 무슨 뭐입니까? 뭣이지? 카나다, 옳지. 카나다에 있는 학자들을 끌어들여 가지고서 하는데 거기서 그때 보조를 해 줄라 하기 때문에 보조 때문에 그래 할라 해서 그것을 함부선 목사님이 신강을 많이 해 가지고 그분이 참 거게 대해서 어떻게 이 한국이 ‘신신학이 들어오면 한국은 망한다’ 그걸 가지고서 많이 고심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가 거리 다니며 외치다가 너무 거기 대해서 마음이 상해서 참 정신이상이 됐다고 할 만치 그때에 참 의의 분으로서 못견뎌서 그때 외치다가 나중에는 마지막에는 옷을 벗고 다니면서 서울 시가에서 외치니까 이 사람이 지금 정신이 돌아서 미쳤다 이래 가지고 감옥까지 갇혔습니다.
감옥에 가 가지고는 자기 대변을 가지고서 전부 자기 몸에다 막 바르고 전체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이제 더러워져서 다 썩어졌다.’ 이라면서 참 그래 가지고 오래 있다가 진정을 해 가지고서 자기가 다시 나와 가지고 그만 그거 다 포기해 버리고 뭐 하나님이 하시는 거 어짤 수 없다 하고서 신신학 들어오는 것을, 총신에 카나다에 있는 선교사들이 선교 그 신신학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지고서 가르치기를 시작해서, 왜정 말년에 완전히 개혁이 돼서 신신학은 있기는 있었지마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그분이 청해 가지고 힘을 썼었습니다. 그전에 있는 데는, 내가 오래 돼서. 김재, 무슨 교수니라? 신신학 지금 제일 큰 학자가 뭐입니까? 김재준, 예. 김재준. 김재준씨가 그때에 신학자, 신신학 신학자로서는 제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우리는 그때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하고 한 강단에서 둘을 모셔 놓고서 우리가 거기서 강의를 들으면서 질문도 하고 이래 하다가 김재준씨의 가진 교리와 신조가 성경적이 아닌 것을 우리가 보고서 그때에 밑에서 말을 해서 ‘이것은 틀렸다. 성경적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거게서 신학적으로는 갈라졌고, 또 그때에 채필근 박사니 송창근 목사니 그분들이 평양 신학교를 그때 왜정 말년에 이제 신사참배 하는 그때에 그들이 신신학이 세력을 잡고 일본 정부하고 한짝이 돼 가지고서 그렇게 했었습니다. 내가 뭘 말하다 이리 나갔지? 녜, 그때 그 고신이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타가 다 인정해서 진리라고 했었습니다.
했는데 고려신학교에 이 싹스 쏘마니 하는 이것이 퍼져 가지고서 싹스는 다 부패성이라 이래서 그 신학교 전부 그렇게 다 인정하고 또 그분들은 원어를 알고 학자들이니까 제가 전부 깨닫고 해석한 것은 나는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고 성경 보고 내가 실지로 신앙 생활 하면서 깨달아져서 나는 그것을 순전히 부패성으로 보지 안하고 이거는 육체라, 영이 아닌 영감 받지 안한 육체의 행동이 이렇다 이렇게 보고 이라니까 정반대가 돼 가지고서 그만 제가 성경을 깨달은 것은 전부 다 정죄를 받게 됐습니다, 그때.
이라다가 아무래도 그 안 됐어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가 이러면 고쳐야 되겠고 이라다가 내게 퍼뜩 떠오르기를 이거는 그러면 나는 원어를 모르니까 싹스의 원어가 참말로 부패성인가, 이걸 그냥 물어 가지고는 모를 거고 이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한 그 육신이라는 그게 내나 원어가 어찌되는고 보자.
그래 여기 ○○○목사한테 그걸, 다른 사람은 뭐 나와 다 이래 반대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묻고. 그래 물으니까 ‘그게 원어로 싹스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거게서 육신이 부패성이 아니고 이거는 내나 이 몸이라 하는 것을 그때 발견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는 거게 대해서 신강이 많이 있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발견하고 이래 가지고 그때에 그만 고려신학교서는 육신은 부패성이라 하는 말은 그 한 마디에서 완전히 그 신학교에서는 완전히 그거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뭘 할려고 이 말을 했는지 모르러세. 뭐할라고 내가 이말 하지? 자, 그만 내비두고.
우리가 진리를 바로 찾는 것이나 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나 이 일은 부패했던 사람으로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쉽게 생각하면은 안 됩니다. 로마서 12장에는 보면은 자기가 산 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바쳐서 이제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쓰여지고 하나님만 쓰시지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양이 잡아서 제물됐으니까 살았을 때에 자기 주관이라 하는 건 완전히 죽여버리고 하나님이 쓸 수 있는 그것이 된 그것을 제물이라, 산 제물은 살아 있으나 완전히 자기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돼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했고, 또 우리가 아는 대로 실행을 하는 가운데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고 또 완전히 자기를 부인해야 이 도리를 깨닫는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 부인이라 하는 그것이 그렇게 쉽지를 안하고 자기를 바꾼다는 게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다. 다 자기가 주체가 있고 주권이 있고 주장도 있고 자존도 있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올바른 교리와 신조는 우리의 금생과 내세를, 금생도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축복을 준다고 하셨고 또 영원한 내세도 올바른 교리와 신조대로 산 그것이라야 구원이 돼지지 그게 아니면 구원이 안 돼지기 때문에 영육과 금생 내세의 전부 흥망성쇠가 전부 올바른 깨달음에 있습니다,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깨달음에 있고, 또 우리의 남은 시간이나 내라는 전부를 어데다가 바쳐 살 것이냐? 그 무슨 뭐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어떤 이런 철학이나 어떤 문학이나 그런 자들의 그 사상과 지식을 따라서 내 바칠 것이 아니고 우리는 순전히 구원을 이루는 진리와 영감의 인도를 받아서 거게 바쳐 가지고 살아야 구원이 된다는 걸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남은 생활은 이래 살아야 되느냐 저래 살아야 되느냐 자기의 남은 생활을 사는 그 길을 찾는 것이 그것이 교리와 신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교리와 신조는 자기 생명을 거게다 투자할 그 길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알아야 되겠다는 여게 대해서 이 귀중성을 이걸 느껴야 될 터인데 여게 대해서 생각지 안하고 뭐 이런 교리나 저런 신조나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여게 대해서 별로이 여게 가치성을 높이 두지 안하고, 오히려 어떻게 해 가지고 일시 사람들에게 인기나 끌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인정만 하면 된다, 자기와 접하고 있는 그때에 있는 모든 현 그 당시대에 사람들만 점령해서 인정하면 된다, 이것만으로서 족한 줄로 이래 여기는 우리가 소경 같은 이런 생활 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구원은 그 심사가 많은 그 대중들의 여론대로 심사되는 것이 아니고 또 어느 시대대로 그렇게 심사되는 게 아니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한 분이신 자존자이신 주재자이신 그분이 심사할 터이니까 그분의 뜻에 맞아야 되지 그분의 뜻에 안 맞으면 온 천하가 인정한다고 그까짓 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또 천하에 있는 전 신학자들이 옳다 한다고 그것도 참 안심은 안 됩니다. ‘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신 받아서 깨달은 사람들이 이래 하니까 이게 나는 요게까지는 왔으니까 여게까지는 안심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이것이 다가 아니고 아직까지, 모든 걸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서 심사를 받아야 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검사가 어찌 되느냐?” 여게 대해서 아직까지 미확실한 이런 자리에서 두려워하면서 거게 만일 걸리면 안 되겠는데 하고서 갈 때까지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서 이게 틀렸나 옳으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찾는 것이 정상이고, 성경에 명문되어 있는 그런 것은 명문되어 있는 것을 명문대로 했으면 내가 변호할 수 있는 걸 변증할 수 있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이 법규에 이러니까 그 성구를 가지고서 변호해서, 하나님이 ‘틀렸다’ 할지라도 ‘당신이 이걸 지금 법규에 이래 놨기 때문에 이 법에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이라면 우리가 그때 변호할 수도 있고, 됐으니까 ‘그거는 그게 잘못 깨달았다. 그거는 네가 범위를 좁게 봤다. 이렇다.’ 어떻게 해서 좀 그때 가서 뭐, 물론 틀리면 정죄는 받지마는 변호할 수도 있지마는, 이 피조물의 다소 수에 거게 따라서 우리의 구원 이루는 이 신앙 생활에 시비가 결정되는 거 아닙니다. 이 옳다 그르다 결정되는 거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줄 알고 여게다가 우리는 종점을 두고 여게다가 심판을 두고 이렇게 모든 것을 사색하고 연구해야 될 터인데 그저 몇몇 사람 그까짓 거 뭐 코에 호흡이 있는 거 거게 가치가 없습니다.
가치가 없는 것은 인간대로는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까짓 거 가치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하 인간 호흡 다 뭉쳐 해 봤자 뭐 하나님께 대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까짓 거. 일시에 멸할라면 멸하고 없앨 수 있습니다. 당신의 뜻에 합하면 그것은 우주보다 크기 때문에 우주를 상속받을 자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의 그 뜻과 하나님과 연결돼서 하나된 그것인데, 이래서 이 깨달음의 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이 중요성을 좀 강하게 느끼면 좋겠고 또 이 중요성에 판정은 주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게 된다고서 안심하지 말고 주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그분에게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되겠다, 그분에게 인정함을 받아야 되는데 우선 그분을 향하여 가면서는 이 성경을 가지고 성경에서 정죄받지 안하고 우선 성경에 인정받고, 성경에 인정받는다 해도 내가 잘못 깨달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인정받고 난 다음에는 그분에 가서 인정받고 난 다음에라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교리와 신조를 자기 교리와 신조로 정하는 데에 이것을 돈만치도 가치로 삼지 안하고, 뭐 자기 직장만치도 가치로 삼지 안하고, 교인들 부흥되는 부흥만치도 가치로 삼지 안하고, 의식주만치도 가치로 삼지 안하고, 자기 현재에 동지만치도 가치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깊이 회개를 해야 될 것입니다, 이거. 회개 안 하면 안 됩니다. 이거 회개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리 신조는 자기 생명보다 귀중히, 왜? 생명을 거게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크고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거기 투자하지.
이렇게 알아야 되겠고 또 옳고 그른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것보다도 암만 말해 봤자 성경이 아니면 그거는 그뭐 사람들의 많은 사람 말하는 것은 성경 이하에 증거로 내가 받아 둬야 될 것이고, 성경대로의 증거라 할지라도 이 성경을 내가 또 잘못 깨달을 수 있고, 성경은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 범위를 정하는 데 따라서 자꾸 해석이 달라지고 가르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성경을 자기가 보고서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은 이것이 과연 맞나 안 맞나 항상 염려하는 거기에서, 죽을 때까지라도 ‘주님, 만일 잘못된 게 있거든 이것을 가르쳐 줘 가지고서 지금이라도 가르쳐 줘서 알아 가지고 잘못된 것을 수정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이런 겸손으로 하나님께 묻는 마음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렇지 안하고, 아는 것도, 삐뚤어졌다고 하는 것도 자기 명예와 또 자기 입장과 오늘까지 자기 해 나온 권위라는 자기 위신과 이런 거와 대립이 되면은 그만 이거 버려버립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그들이 주님을 버린 것은 주님을 옳다 몰라서 버린 것이 아니고 알았지마는 자기가 이미 건설해 놓은 자기 위신, 자기 처지, 자기 권위, 자기 땅위에서 의식주의 모든 관련 그런 것이, 옳은 줄 알지마는 옳은 것인 예수님보다 그게 더 중요해서 그리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이런 것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걸 말하자면 교리와 신조인데,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자기 소유보다 귀하게 여겨서 암만 자기 소유가 다 절단나고, 이리 하면은 절단나고 저 옳은 걸 저걸 틀렸다 하면 자기 소유가 다 유지되고 옳은 것을 옳다 인정하면은 자기 소유가 다 절단나도 자기 소유보다 이 가치를 옳은 것을 크게 여기는 이것이 돼져야 이제 진리를 하나님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또 옳은 것이면 자기가 이제까지 건설해 놓은 것이 뭐 아무리 건설해 놓은 것이 어떻게 됐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옳은 것이 크다 하는 이것을 자기 이제까지 건설해 놓은 모든 자기 공적보다 옳은 것이 크다는 이 가치를 이렇게 여게 둬야 옳은 걸 찾을 수가 있을 것이고 또 자기의 몸이나 자기 생명보다 이 옳은 것이 크다, 생명과 관련이 될 때라도 옳은 것이면 생명을 돌보지 안하고 옳은 걸 취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돼야 되겠고, 그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참 자존심이라든지 자기라는 그게 문제입니다.
그것보다도 자기라는 것이 완전히 바싹 부숴지고 깨져도 옳은 것이면 자기를 깨고 들어가야 제가 살지, 저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옳은 것을 옳은 줄 알면서도 옳은 것을 지지하면 자기가 깨지겠고 또 자기가 안 깨질라고 하면은 옳은 것을 부정할 때에 그때에 그게 이거냐 저거냐 판정되는 것인데, 옳은 것을 자기보다 귀중히 여기고 크게 여겨서 내가 이제까지 주장하고 건설해 놓은 모든 내 일생 생애의 건설이 막 깨진다 할지라도, 그 바리새교인 서기관들이 막 깨져도 옳은 것이, 예수님 하시는 것이 옳은 것이면 옳은 것을 자기네들이 이제까지 건설해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고 있는 명예나 그런 것도 다 있는데 그것보다 옳은 것을 귀중히 평가했더라면 그들이 살았을 터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다 지옥 가? 지옥 갔다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건설구원은 다 절단났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건설구원은 다 절난 안 났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는데 그거 지옥 갈 사람들이라 나는 그렇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담대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가치를 평가를 바로 해야 된다 하는 그말이 알기 쉬워서 뭐, 평가를 바로 해, 평가를 바로 해야 된다 말은 평가라 말은 이 모든 거와 비교해서 모든 전 존재를 다 비교해 가지고서 이것보다는 이게 가치가 낫다, 이것보다는 이게 가치가 낫다 이래 가지고서 최고의 가치 그걸 도달해서 아는 그것이 정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데 말로는 이래 하지마는 여게 대해서 뭐 아무리 진리라도, 진리라도 제 감정에 좀 걸리면 소용 없소. 무슨 진리가 있소, 있기를? 암만 진리가 절단나고 제게 떡 한 개만 줘도, 달콤한 빵 하나만 줘도, 한번만 굽신거려 한번 존경만 해 줘도, 칭찬만 해 줘도, 제편만 돼 줘도, 말 한 마디 제 응원해도, 일시만 제 사람이 돼 줘도, 이러니까 도둑놈은 전부 자기입니다. 요거 원수인 줄 알아야 되지 요거 모르면 절대로 그 건설구원은 안 돼집니다. 안 이루어집니다.
이러고 여게서 모두 다 “지옥 간다” 하는 요것을 바로 해서 이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자기를 죽일 자 없고, 자기를 원수라고 인정될 자 없고, 자기를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것도 내가 지금 또 보는데, 어짜든지 우리가 궁구 연구해서, 연구를 할라고 하면은 자기를 내놔야 연구가 돼지지 자기가 살라고, 항상 하면은 자기 살 궁리, 자기 위하는 그놈이 앞서 있는데 무슨 진리 알겠습니까? 자기를 내놓고 냉정스럽게 이렇게 해야 바른 길 알 수가 있지 자기가 주체가 돼 가지고서 자기를 중심으로 위주로 하는데 무슨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의 진리가 알아지겠습니까? 알아질 리는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자, 가라지 비유 한번 합시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그다음에 해석할 때에 좋은 씨를 뿌린 이는 인자라, 예수님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밭은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믿는 사람이 천 명이나 만 명이나 억만 명이라도 우리가 다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있는데 세상에 있는 동안의 것을 지금 말해서 이 밭에 있으니까 밭이라는 건 세상에 있는 동안입니다.
“사람과 같으니”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먼저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먼저 뿌렸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밤에 사람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 가지고서 곡식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덧뿌렸다, 뿌린 위에다 뿌렸다 그말입니다. 뿌린 위에 뿌렸다.
이것을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된 새사람으로 이렇게 해석을 안 하고 일반인으로 해석한다면은 그러면 일반인으로 가라지는 전부 지옥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해석한다면은 그 가라지가 먼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먼저 있지 우리 중생이 먼저입니까? 우리 중생이 먼저 아니고 안 믿는 첫째 아담 그게 다 옛사람이고 가라지에 속한 것 아닙니까? 이래 성경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라” 했는데 이 뿌린 순서를 보면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뿌리고 난 다음에 그위에 원수가 와 가지고서 덧뿌렸다.
우리 실지로 우리가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다 대속함을 받아서 과거와 현재 미래에 모든 대속을 받아서 완전히 대속받아 가지고, 완전히 대속받지 안하면은 우리에게는 새생명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자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자시기 때문에 전지자는 미래를 몰라서, 미래를 모르고 현재에 할 때는 ‘미래를 모르니까 미래 일은 미래 처리하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나기 전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이 우리 죄를 나기도 전에 걸 다 대신 담당한 걸 우리가 믿는 것인데 그렇지 안하면 그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고 난 다음에 된다면 안 되지. 하나님의 전지로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새생명을 받을 때에는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이라야 의의 문제가 해결되고, 의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이라야 이 새생명이 오지 죄 문제도 의의 문제도 해결되지 안하고는 새생명이 올 수가 없고, 그러면 우리가 새생명을 얻을 때에는 그러면 현재 과거 것만 그렇다면은, 과거 것만 그렇고 미래 것 안 되면은 전지자가 다 미래 걸 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정죄를 안 할 수가 있으며 그 죄를 그냥 두고, 그러면 죄를 두고 했으면은, 죄를 두고 이거는 생명이 왔다 만일 그래 해석한다면은 또 그 죄가 발견되면 그 생명은 죽어야 되는 생명입니다. 이거 좀 어려워, 자기 양심을 쓰면 알 것입니다.
이래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정리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중생함을 받아서 새사람 된 것, 새사람 될 때에는 영도 새사람됐고 또 이 심신도 새사람 됐으나마 영은 다시 대속을 벗지 안할 자로 됐지마는 이 심신 이거는 대속을 자꾸 벗기 때문에 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위에 덧뿌렸다, 먼저 중생되고 난 다음에 악령 악성 악습의 것은 이것은 다시 들어와서 우리를 유혹시킨다. 유혹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하셔서, 유혹을 받아 가지고 대속된 거 그 유혹이 아니라 다 대속받고 대속받은 데에 다 포함된 것 말고 새로 유혹받아 가지고 우리는 둘째 사망의 해, 예수님이 대속을 하지 안한 것,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된다” 두 번 못박혀야 되고 그렇지 안하면 대속할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그는 “다시 죄를 범해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에 포함되지 안한 그 죄가 우리를 사망시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게 큰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는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그러면 이거 불신자로 말하면 불신자 없다고 신자가 신앙 생활 못 하겠습니까? 하늘나라는 불신자가 없으니까 천국입니다. 이 마귀 자식들 이거 멸망할 자식들이 없다고 신자가 죽는 것 아니오. 또 이 세상에도 그러면 세상에 그거 없다고 우리가 뭐 뽑혀서 상할 것 뭐 있겠습니까? 요거는 똑 한 몸뚱이 속에 있고, 크게 넓게 말하면 이 세상에 택불택자가 있고 또 좁게 말하면 한 사람 속에, 한 사람 속에 중생된 사람 외, 그 후에 미혹받아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이 사람이 침노해 가지고서 다시 원치 안하는 그 일을 하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새로 범죄하는 이것이 있고, 뽑힌다, 다 상한다 하는 이것도 또 문제고, 그러면 또, 그라면 이 불택자로 말하면은 먼저 거두어서,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서 다 불에 사르고 이제 곡식은 뒤에 거둔다” 이렇게 말했는데 성경 전부는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이 땅위에서 다 심판받아서 올라가든지 뭐이든지 없어지고 나머지기 남은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이 남아 가지고서 칠년 대환난 가운데에 환난을 받는다 하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거둠을 받고 그다음에 남은 포도는 그다음에 거둔다고 말했습니까? 그리 안 했습니까? 그거 요한계시 몇 장에 있습니까? “포도를 거둬서 포도즙틀에 넣으니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흐르더라” 요한계시 몇 장? 14장 아니요? 14장 아닙니까? 14장 끝절에 있는데 그 먼저, 먼저 곡식은, 곡식은 성도를 가리키는데 거두고 뒤에 포도를 거둔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이런데 여기는 그라면 먼저 거뒀는 게 뭐이냐? 먼저 거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사람의 추수 때가 개인 추수도 있고 우주 추수도 있는데 개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떠나게 되면은 멸망받을 심신의 기능도 있고 구원얻을 심신의 기능도 있고 이러니까 그걸 하늘나라를 데리고 갈라 하면은 멸망받을 심신의 기능부터 처단을 먼저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거 하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리 못 믿어도 자기가 범죄하던 그거는 그때 다 원통히 여기고 회개를 하고 원통히 여기고 또렷이 하늘나라 갈 사람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못 믿어도. 이제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후회하고. 그 사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살면 하루의 정력이 그것이, 하루 살면 하루 정력은 그건 소모됩니다. 하루 살았으면 하루 산 정력은 다시 못 찾습니다. 없어졌습니다.
없어져 버렸고 또 남아 있는 것은 또 새 날 살 정력 새 정력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제 산 그 정력이 그러면 오늘 남아 있습니까, 어제 산 정력은 어제로서 끝났습니까? 어때요? 남아 있어요 끝이 났어요? 끝이 난 거 이거는 과학적이라. 그 힘은 아니라. 이거는 이 과학이기 때문에 환하게 다 알 수가 있어.
그런데 내가 오늘 하루 살 때에 내 육체의 이 정력이 말이요, 육체의 정력이 내가 오늘 하루 살면서 종일 영어를 공부하는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해서 뭐 몇백 단어를 외우든지 몇천 단어를 외우든지 외워서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했으면, 그러면 공부했으면 정력은 없어졌습니까 안 없어졌습니까? 정력 없어졌소 안 없어졌소? 정력은 없어졌는데 정력이 만들어 놓은 것 뭣 만들었습니까? 정력이 뭣 만들었지? 영어, 영어 만들었지. 그걸 몰라? 정력이 만든 거는 영어 단어 만들지 안했소? 영어 지식 만들었소. 정력은 없지만 영어 지식은 있습니다. 그게 기능이라, 그게 기능.
그러니까 그 기능은 두 가지 있는데,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은 “육신으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영생을 거둔다” 했으니까 자기가 하루 정력에서 그 정력이 기능을 만드는데, 썩어진 것이라 하는 것은 땅에 속한 걸 다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밖에 것, 영생성 완전성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다 썩을 것이라고 말했고, 영생을 거두는 것은 영생성을 가리켜서 말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하루 종일 거석하면서 예수님의 구속대로, 영감대로 진리대로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자로서 이렇게 살았으면 그날 정력이 그래 살았는데 정력이 뭣 만들었겠소? 이 사람은 하루 종일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을 입고 구속의 생활, 구속 노릇을 했어. 구속 생활을 했어. 구속의 생활 했으면 그날 만들기는 정력은 없어져 버렸는데 그 없어진 정력은 뭘 만들었습니까? 뭘 만들었습니까? 뭘 만들었소? 열한 가지 구속을 만들지 안했소? 그러니까 정력은 없어졌지만 내라는 남은 것이,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살아서 보니까 힘은 하나도 없이 지금 골케골케하고 있습니다. 그 죽을라고 지금 골케골케 한 뭐 칠십이나 팔십이 돼 골케골케하고 있는데 힘은 하나도 없소.
그러나 자기가 국민학교 때부터 영어 공부한 그 영어 실력은 자기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게 기능입니다. 그렇지 않소? 그 사람이 어떤 과학을 공부했으면 또 과학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 사람은 그러니까 땅의 것을 위해서 심었기 때문에 썩어진 걸 거둬. 그걸 지금 그것만 가지고 있소. 그러면 그 사람은 죽을 때에, 아무리 죽을 그 골케골케 하고 있지마는 그 땅에 속한 기능은 자기가 정력으로 다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기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령으로 구속을 위해서 구속으로 인해서 살았으니까 구속의 그 기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구속의 기능이, 그러면 진리로 살았으니까 진리의 기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정력은 없어졌지마는 그 진리는 제 진리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그날 하루 종일 진리로 살아 진리로 살았으니까 정력은 없어졌지마는 진리로 산 그 진리는 자기 것이 돼 가지고 있다는 거 이게 믿어집니까? 그것이 영생의 기능입니다.
이래 일생 동안 살았는데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가 되니까 자, 이거 육체를 위해서 산 땅에 속한 기능이나 또 하늘에 속한 기능이나 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땅에 속한 이 기능이 뭘로 가지고 됐습니까? 이것이 정력 가지고 됐습니다.
정력이 기능화된 것입니다. 정력보다 이거 고차원의 것이오.
이런데 이걸 하나님께서 구원시킬라 하니까 이거 하늘나라 데려갈라 하니까 이거는 데리고 갈 수가 없어. 이거는 데려갈 수 없으니까 이거는 제거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거 제거해야 이거 가지고 가지. 그러니 이걸 먼저 제거할 것 아닙니까? 순서가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제거를 할 때에 이 제거가 되니까 이것이 뭐이냐? 정력이 모아서 그게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술이, 기술에다가 일생 정력을 기울여서 기술을 만들었는데 한국에서 못 하는 것 기술을 만들어 그 사람은 하루를 청해 올라 하면은 뭐 몇억이나 줘야 청하지 안 올 수 있는 그런 높은 기술을 만들었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그 기능이, 그 기능이 있어 가지고서 그런데 그 기능 그것이,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정력이, 정력이 그것이 승격화돼 가지고, 정력이 승격화돼 가지고 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정력은 그 사람이 기술을 그걸 가지고서 이래 있는데, 그러면 그것이 만일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처분해 버릴란지? 그거는 하나님이 그것을, 자, 어떻게, 세상 기능으로 된 것은 어떻게 처분을 할란지? 하늘나라 기능된 거는 하늘나라 데리고 가지마는 그거는 어떻게 처분할란지 그것이 문제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은 그대로 그것은 갈라서 처분을 해서 그것은, 그것은 그것대로 처분해서 따로 가르고 또 하늘의 기능은 하늘의 기능 따로 가르고 둘로 하나님이 가를라고 하면은, 하나님이 가를라고 하면 못 가르겠습니까? 그 가르면 그 기능이 말이지, 그런 기능이, 그런 기능이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있으면 그 기능이 아픈 감을 느끼고 또 불만한 감을 느껴서 그게 그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느낄 만한 그런 감각을 가질 만한 그런 무슨 감각의 실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 기능인데, 한국에 제일가는 과학자거나 기술자의 기능인데 그 기능이 그때 아무 감각이 없어요? 만일 하나님이 그걸 없애버리면 없지. 없애버리면 또 없을 수 있지. 없애면 없지마는 하나님이 공평되게 그대로 해서 그거는 이를 갈며 있으라고서 말했으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나눌라면 나눌 수 있지 않겠소? 전능자니까 나눌라면 나눌 수 있지 않겠소? 나누면, 나누는 걸 이것은 하늘나라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이 작용할 수가 있고 그것은 이 사람이 주격이 하늘나라 가기 때문에 영은 그것 가져가지 못하고 그거는 그것대로 따로 분리해 가지고서 그거는 지옥에 가 가지고서 형벌받도록 그래 할라면은 할 수 있지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데 이걸 왜 부인하는지? 그러니까 돌아가서 연구해서 이것이 확정되지 안하면 여러분들의 건설구원은 헛일입니다. 미안하지마는 헛일입니다.
왜? 이게 안 되면 성경에 여러분들 공연히 벌로 껍데기로 해 그렇지, 그거 자, 열 처녀로 말하면은 처녀도 처녀라, 신랑 바라는 것도 다 같이 바랐어, 등도 가졌어, 하루 종일 기다렸어, 밤중까지 기다렸어, 또 신랑으로 맞이할라고 해서 등도 처음에는 불을 켰어. 이라다가, 다른 거는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조사해 봐야 다른 거는 내가 보니까 없습디다. 기름 준비 하고 안 한 그뿐이라.
나중에는 그 사람이 기름 준비할 필요성 느껴 가지고서 기름 사러 가지 안했소? 사 가지고 왔는지 안 왔는지는 모르지마는 때는 지나갔어. 기름 파는 집에 가 사라 하니까 기름 파는 집으로 가지 안했습니까? 먼저 그 처녀들도 내나 기름 파는 집에서 샀지 딴데서 사지 안했어.
그런데 먼저 미리 준비하고 준비 안 한 요것만 다르지 딴것이 다르지 안한데 미리 준비 안 한 그것은 지옥 가 버렸고 이건 천국 갔다. 그러면 지옥 가면은 또 성경에 말하기를 “그 공적이 불타면은 해를 보고 공적이 남아 있으면 상을 받으리라. 그 공적이 불타면 구원을 얻으나 저는 불 가운데서 구원 얻는다.” 이건 성구 아닙니까? 여러분들, 성경에 백 번 말한다고 권위 있게 보고 한 번 말한다고 권위 없게 보는 것 그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믿음이 잘못된 사람이오. 성경에는 한 번 말한 것이나 천 번 말한 것이나 꼭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도 거석한 사람이면 한 번 말이나 두 번 말이나 같은 말이지 ‘한 번 말하니까 안 됐다. 한 번밖에 말 안 했는데.’ 그럴 사람 어데 있습니까? 한 번 말해도 제가 책임져야 되고 두 번 말해도 책임지고, 백 번 말했으나 한 번 말했으나 책임은 같지, 다릅니까? 우리 천한 인간들도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그거 한 번 말했으니까 권위가 다르고 여러 번 말하니까 권위가 다르다.’한 번이나 여러 번이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여기 때문에 지금 우리, 왜? 우리 진영에 지금 미혹이 많이 들어와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때문에 지금 분망해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듣기를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에 그래 말한다고서, 그런 놈은 잡아죽어야 된다고서 어떤 노회서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을 누가 나한테 편지를 했습디다. 설교록 보고 이라니까 이래 죽이겠다 하는데 이렇다고 그래 말해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는 게 순교자요. 진리대로 삶으로서 그 생활에 마찰이 돼 가지고 죽는 것이 순교자요. 그 가는 길이 그거요.
또 진리를 깨달아 자꾸 더 깨달아 갈수록이 동지는 적어집니다. 많아지는 게 아니오. 그거 어떻게 많은 사람이 다 바로 깨닫겠소? 최고로 바로 깨달은 사람은 숫자가 적어지지.
이러니까 이게 그거냐 이거냐 해 가지고서 여러분들 생사를 결정을 해 버리십시오. 이게 만일 내가 말한 것이 틀리면 이거 나를 배반하고 바른 데로 가야 될 것이고 이게 만일 맞다고 하면은 이거 틀렸다 하는 것은 다 배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이거는 뭐 변동 못 하는 것이고 건설구원 여게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라도 빼고 지킨 자는 천국에서 작고 또 빼지 안하고 다 지킨 자는 천국에 크다고서 그렇게 자꾸 층어리를 말했는데 이건 성구 아닙니까? 13장에 여기 비유 말한 것은 전부가 건설구원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 전부가 왜? 전부 행위에 대해서 말했지, 행위에 대해서 지금 심판받는 걸 말했지 거기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행위에 대해 말했지.
이러니까 대속받은 사람들이, 대속받은 사람들이 자기가 행위 여하에 따라서 구원되는 것이 그거 건설구원이지 뭐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짜든지 바로 배우고 바로 깨닫는 데에 이 육체의 생명보다 중하다, 귀중하다 이렇게 가치를 높이 두지 안하면은 자기는 바로 깨닫는 그런 것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 원수 자기, 자기 헛된 걸 생각하고 욕심하는 원수가 꽉 찼는데 그 원수를 배척해야 주님 만날 수 있는데 그 원수를 배척하지 않고, 그 원수가 자기를 주관하고 있고 그게 저인데, 바로. 그게 저인데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공연히 명예니 뭐이니 교인들 숫자 뭐 늘궈뜨리는 그것 다 외식하지 마십시오.
교인들 수가 암만 많아도 제 구원 멸망하면 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 많이 하면은 상급은 있을지 몰라도 헛일이고 또 자기가 많은 사람을 구원해도 기본구원 얻게 하는 것이지 뭐 건설구원은 하나님의 법대로 건설구원이 돼야 건설구원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작아도 금집을 짓고, 작아도 금집 짓는 것이야, 풀과 나무로 집을 지어서 이 예배당만치 이래 짓는 것이 힘이 더 들겠습니까? 주먹덩이만한 금집 짓는 것이, 보석집 짓는 것이 힘이 더 들겠습니까? 아마 이 주먹덩이만한 것이 돈이 이보다 더 많을란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러니까 외부에 형체 큰 그것도 소용 없고 어쨌든지 자기는 건설 행위구원은,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되고 건설구원은 영감과 진리에 딱 들어맞아 심판에 옳다 통과가 돼야 되지 그리 안 하면 건설구원은 안 된다는 요것을 명심하고 요렇게 건설구원을 이루는 이 표준을 이렇게 잡아야 되지 그냥 ‘야 예수 믿으면 다 된다’ 이것 가지고서 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성경을 그 나머지기 정죄하는 그 성구를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누가 감당할 것입니까? 누가 빼내 줄 겁니까? 어리석지 맙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또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고, 자기 구주로 믿고 믿다가서 낙심을 해도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었으면 택한 자라 하는 우리는 그래 봅니다. 왜? 성신의 감동이 아니면 그 사람이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자기 구주라고 믿을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성경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다가서 마지막에 최후에 밤중에 기름 없어서 실패했다고 그 사람이 지옥을 가요? 그 사람 지옥 가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무책임한 소리 그렇게, 그렇게 아무, 여게 생사냐? 하나님의 심판에 구원이 어찌 되느냐? 이 구원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세상 이거 돈벌이 같으면 세밀히 연구했지마는 여게는 가치를 안 두니까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이런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데는 따라오는 사람 가운데에서 ‘듣기 싫다, 어서 없어버리고 죽어버리면 좋겠다.’ 또 ‘뭐 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느냐?’ 또 `이거 좀' 편이 둘이오. ‘틀렸으면 좋겠다 어서 그만 틀렸으면 좋겠다. 없으면 좋겠다.’ 깊이 분석하면 둘뿐입니다. ‘틀렸으면, 지금 백 목사 가르치는 게 틀렸으면 좋겠다. 없으면 좋겠다. 그게 끝났면 좋겠다.’ ‘옳았으면 좋겠다.
있으면 좋겠다. 그대로 유지가 돼야 좋겠다.’ 이 둘입니다. 이 둘이오. 이 가루지 못합니다. 이 둘이라요. 둘이니까 자기는 어떠한 사람인지? 여게 있다고 멸망은 아니고, 그러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그거는 단지 무슨 차별이냐? 택한 자라도 옛사람이 강하냐 새사람이 강하냐 그 중량 관계인데 옛사람이 강하면 그거는 아무리 중생된 사람이라도 들으면서도 자꾸 진리를 들을 때에 자꾸, 이성적으로 이거 들어야 되고 이거 하는데 자기 본능적으로는 싫습니다. 이성적으로 이거 배워야 되겠고 ‘백 목사가 살아 있어야 내가 배워야 되겠다’ 하는데 본능적으로는 그게 배울 때도 싫고 자꾸 그런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그 자기 속에 자기를 이리 저리 심사해 가지고서 내 옛사람 이놈을 잡아 죽일라고 애를 써야 되지 자꾸 이거 심사도 안 하고 마구 그대로 덮어 놓고 가면 우리가 옛사람을 찾을 그런 기회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