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

 

1987. 4. 26. 주일오전

 

본문:마태복음 13장 3절∼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지막 9절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말씀하셨는데 여게 귀는 이 육으로 된 이 귀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마음의 귀 곧 양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학교에서 양심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양심은 수많은 죽은 양심이 있고 산 양심은 참된 기독자의 양심뿐입니다.

양심은 그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옳다 인정한 그대로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지식의 종류가 심히 많으므로 자기 지식에 따라서 옳다 인정되는 그대로  할라고 하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지식의 종류가 열이라면 양심도 열이 되겠고 지식의 종류가 만이라면 양심도 만 양심이 되겠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인정하는 그 지식대로 할려고 자기 온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인간에게 있는 자연의 빛이 양심입니다.

오늘 여게 9절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은 양심이 있는 자는 들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없는 자는 들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양심이 있는 자 없는 자는 무엇에서 구별되는가? 기독자의 양심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해 가지고 이것이 옳다 인정되는 그대로 행할려고 노력하고 행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 없는 자는 들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고 옳다 인정될 때에 고대로 행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듣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고 또 읽는다 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행사를 할려고 성경을 읽고 들으면 읽을 때도 깨달을 수 있고 들을 때도 깨달을 수가 있지마는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해서 바로 깨닫고 그대로 살란다 하는 요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읽어도 모르고 들어도 모릅니다.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다른 것은 세상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요 인간들이 말해 놓은 지식이기 때문에 인간도 죽고 지식도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지식은 생명이 없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의 지식은 하나님과 연결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연결 없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연결 그것이 곧 생명입니다. 사망이 무엇인가? 창조주와 피조물이 끊어진 그것이 사망이니 끊어진 것은 시간 문제지 반드시 마지막은 다 망하고 죽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산 지식이므로 전능의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분이 지극히 크시니 말씀한 그 말도 지극히 크다 그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능력 있는 것도 있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 말씀 자체가 진리기 때문에 독자적 권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진리기 때문에 이 진리는 하나님도 호리도 범하지 못합니다. 범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이 말씀을 어기지 못하는, 이 말씀은 독자적으로 전지 전능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제가 세상 말을 인용하는 거와 같이 그렇게 인용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벌써 어두움에 사로잡혀서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지도 아니하고 이용을 당치도 아니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복종하면 이 말씀이 그 사람을 돕고 복종치 않는 자는 이 말씀이 그를 돕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들을 때에 이 말씀만이 참되고 옳으니 이 말씀을 읽고 듣는 데서 옳고 바른 것을 내가 알겠다 하는 것이 첫째 중요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바른 것을 안 그대로 내가 행하겠다, 그대로 살겠다 하는 그것이 둘째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은 평생 이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해도 저는 실은 이 말씀은 한 마디도 듣지를 못합니다. 듣지 못한다 말은 알지 못한다 말입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들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내가 옳게 바르게 사는  것은 성경 말씀만이 나에게 옳게 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는 그것을 먼저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들을 때에 듣는 목적이 읽는 목적이 옳게 바르게 사는 도리를 알기 위해서 읽고 듣는 그자에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그 자격이 있습니다.

또 옳고 바르게 알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그 아는, 옳고 바른 것을 아는 지식으로만 가질라 하는 자는 그자는 스스로 이 말씀에게 저주받아 가지고 교만해져서 망하고 맙니다. 그 사람은 이 말씀을 가지고 제가 행하여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씀 가지고 제가 하나님 자리 앉아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할려고 하기 때문에 벌써 지위를 떠난 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망합니다. 그 결과로서는 교만이요 교만은 하나님께 물리침 받아 가지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읽든지 들을 때에 옳게 바르게 내가 살아야 하겠는데, 이래야 내 구원이 이루어지겠는데 ‘어떻게 하면 옳게 바르게 사는가 하는 이것을 아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데서밖에는 없다.’ 고게까지만 알고 옳게 바르게 알고 들을라고 하면 이 말씀은 그이에게 무슨 결과를 맺게 하느냐 하면 죽은 소원이 되기 때문에, 죽은 소원, 죽은 믿음 죽은 소원이 되기 때문에 알므로 그 사람은 교만이라는 그 결과를 맺어 가지고 멸망받습니다.

하나님께 물리침을 받습니다.

무슨 교만? 하나님만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데 제가 인간을 논평 심판해 가지고 심판자의 위치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저는 상당한 저주로서 교만의 결과 받아 가지고 하나님에게 물리침을 당하니까 앎을 인해서 더 하나님과 끊어지고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데에서 내가 바로 깨달아 바로 살겠다 하는 요게 있는 자는 들릴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거 없는 자는 들을 수도 없고 깨닫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선천과 후천이 많이 차이 있습니다. 나기 전에 명철한 사람도 있고 둔한 사람도 있고 나고 난 다음에 여러가지 수양에서 명철을 마련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사람은 많은 차이를 가졌습니다.

선후천으로 명철하고 유식한 사람은 굉장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통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이미 있는 명철과 가진 지식으로 어떤 지식이든지 대하면 다 그 진의를, 속에 있는 참뜻을 파악할 수가 있고 다 이해할 수가 있고 또 거게 대해서 논평을 할 수도 있고 시비곡직도 가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 지식에 대한 인간들의 생활이요 결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구약 성경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라 산 지식이라 하고 그 외에 거는 다 배암의 지식이다 죽은 지식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지식도 내게 대해서는 정복을 당한다. 정복을 당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는 이 성구를 해석하기를 백 목사는 하나님의 지식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그대로 행하고자 하는 신앙 양심을 쓰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도 들을 수가 없다, 하나도 깨달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이 부당한 증거라 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여 주겠다.’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세상 모든 지식을 다 통달하였으니 신구약 성경을 가져오라.’ 신구약 성경을 내놓고 마구 읽고 연구를 합니다. 읽고 연구를 합니다. 연구를 하면서 ‘내 앞에는 어떤 지식이라도 파헤치지 못할 지식이 없고 파악하지 못할 지식이 없고 내가 완전히 그것을 통달하지 못할 지식이 없다. 그런데 기독자는 말하기를 이 지식은 양심이 없는 자는 통달도 파악도 이해도 못 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하니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이렇게 모든 학자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몰랐습니다. 몇백 독 몇천 독을 하고 외워도 ‘내가 요 말씀만이 참되니 요 말씀대로 살겠다’ 하는 요 양심이 속에 없으면 절대로 요 진리 속에 있는 생명은 모릅니다.  모릅니다. 능력도 못 받습니다.

‘내가 이렇게 위대한데’ 말씀이 말하기를, “너는 내가 창조한 거 가운데 먼지와 같은 존재다. 오늘도 불면 날아간다! 네가 뭐이냐!! 진리는 너를 지었고 진리는 너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하여 스스로 멸망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 가운데도 ‘나는 기독자 중에 진리 지식을 아는 유식한 사람 통달한 사람 이 성경 지식에 으뜸가는 사람이 되겠다’ 해 가지고 일찍부터 준비를 하고 대학을 마치고 또 외국에 가서 온갖 신학을 전공으로 공부를 하고 또 신학을 공부하는 데는 과학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해 가지고 과학 공부도 하고 철학 공부도 하고 이렇게 많이 구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가 요 말씀을 뭣 때문에 보느냐, 내가 영원을 마련하고 있는 육의 한 토막 짧은 기간을 조물주에게 대해서 올바른 생활 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사망으로 걸리지 안하고 다 영생이 되도록 옳게 바르게 깨닫고 옳게 바르게 깨달은 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 연구 한다.’ 하는 그것이 없이 지식에 소망만 가지고 했다고 하면은 그자는 하나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계에 유명한 대신학자들이 성경 진리를 하나도 모릅니다! 그들이 아는 건 다 껍데기입니다! 이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학자 가운데도 바로 깨달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몰랐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되다 인정하고 아는 대로 그대로 살려고 하는 그 양심이 속에 있는 것만치 바로 깨달았지 양심 없는 자는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식은 독자적 전능성을 가졌는데 이 지식이 피조물인 인간의 대학자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양심 있는 자는 들으라. 양심은 뭐인데? 양심은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읽고 듣고 배워 가지고 자기가 옳고 그른 것을 배워서 그른 것은 자기에게서 제해 버리고 옳은 것은 자기가 그대로 행해서 살겠다 하는 요것이 양심입니다.

요 말씀만이 참되니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다 심판받을 터이니까 말씀에 위반되는 거는 다 제거해 버리고, 또 말씀대로의 것은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대로 행해서 말씀대로 내가 살고 말씀에 위반된 거는 다 회개해서 버리고 요 말씀대로 살겠다 하는 요게 양심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울 때에 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자만 듣지 요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없는 자는 한 자리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듣지 못한다는 말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요대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다 영생인데 암만 저가 외우고 알아봤자 영생이 실상인데 실상이 이루어지지 안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저는 심판받고 멸망받을 것뿐이지.

그러기 때문에, 왜 이 말씀을 강조하느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이 옳은 도리를 자기가 깨닫고 바로 깨닫고 ‘바로 깨달은 요대로 살란다’ 하는 요 살고자 하는 요게 없는 자는 예수교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뭐 간판 위주로 해 가지고 지금도 총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신학자니 뭣이니 하는 유명한 그런 감투만 모두 원하고 다니지마는 거게 알맹이도 있지마는 껍데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 역사에 보면 그 감투 위주로, 감투의 소욕으로 감투 싸움하고 감투는 다 두터쓰고 이래 한 자들이 환난 시대 오면 하나님의 도와 하나님을 배반해서 천추 만대가 아니라 영원토록 무궁세계에서 부끄러운 그 수치의 그 욕을 영원히 입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왜정 하에 있는 그 조선 교회 시대에 신사참배가 왔을 때에 총회장들이 다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노회장들이 시찰장들이 당회장들이 신사참배를 주장해서 다 우상 숭배를 하도록 했으니까 그 형벌이 영원 무궁토록 굉장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그 감투를 원하고 있는 그런 모든 사람들이, 입고 있던 사람들이 죄 지은 그 형벌이 굉장히 클 것입니다.

왜? 노회장이면 그 노회에서 제일 으뜸으로서 바로 살아야 되겠고 총회장이면 그 나라에서 제일 으뜸으로 바로 신앙을 지켜야 될 터인데 왜 바로 신앙을 지키지 못했는가? 그들은 뭣 때문입니까? 양심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듣고 설교를 하면서도 자기는 하나도 받지를 못했으니 능력을 받지 못했습니다. 능력을 받지 못했어. 그래 예수 믿어도 되는 줄 아는 그것이 깨닫지를 못해 그래. 깨달은 거 같으나 깨닫지 못했어. 실행 안 하면 구원은 안 된다 요렇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설교를 해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설교했지 아는 게 아니라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없으면 못 듣는다. 오늘 오전에도 귀 없으면 못 듣는다. 대구에서, 오월 사일입니까? 오월 사일부터 시작되는 집회에도 귀 없으면 못 듣는다. 귀가 없는데 어찌 들을 수 있겠소? 양심 없는 자는 못 듣는다 그말입니다. 양심 없는 자는 못 듣는다.

양심 없다니? ‘이번에 하나님의 말씀에 옳고 바르고 삐뚤어진 것을 배워 가지고 모든 삐뚤어진 건 다 제거해서 회개해 버리고 옳은 것은 내가 고쳐서 실행하겠다’ 요 회개하고자 하는 소원 욕심 요거 없는 자는 하나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늘 씨뿌리는 설교를 하면서 ‘옥토를 만들자’ 말했습니다. 옥토는 이 좋은 땅이라 말인데, 비옥한 땅이라 말인데 땅은 무엇을 가리켰는가? 우리의 육을 가리켰습니다. 우리의 심신의 육을 가리켜서 땅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신의 종류를 여게 말하기를 길바닥이라고 길가라고 말했고 돌밭이라고 말했고 덤불땅이라고, 덤불땅 돌땅 길가땅 이렇게 여게 비유로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뜻은 범위가 넓으나 하나만 알면 생각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돌밭에 떨어뜨리워진 씨는,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그 말씀대로 살려고 시작을 했으나 흙이 얕아서 뿌리가 조금 들어가니까 그만 돌이 받쳐서 뿌리가 못 내리니까 해가 돋으니 타져서 말라 버립니다. 흙이 얕아서.

제가 농사 지을 때에 논을 한번 샀는데 좋은 논을 샀는데 가운데 요만치, 벼를 심었는데 안 됩니다. 노랗더니마는 나중에 그만 안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 일꾼만 시키고 나는 못 봤거든. 그래 내가 역부러 들어가서 파 봤습니다. 파 보니까 논 가운데 바위가 이래 있는데 흙이 요만밖에 안 돼. 이런데 이 사람들이 그걸 그냥 꽂아 놨어. 꽂아 놓으니까 그게 흙이 얕으니까 뿌리가 되겠습니까? 흙을 누가 차지하고? 돌이 다 차지했어. 돌이 다 차지하고 그 씨가 흙을 차지한 것은 얼마 안 돼. 흙이 얕다 말은 씨가 차지할 흙이 적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할 육이 적다 그말입니다.

이래서, 길가라고 말하는 것은 길가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감으로써 그 땅이 다진 그것이 길바닥입니다. 거게는 심어지지도 안 합니다. 그 땅을 누가 차지했어? 오고 가는 행인들이 다 차지했습니다. 바로 다 길로 삼아 버렸어. 이 사람이 밟고 지나가고 저 사람이 밟고 지나가서 그 땅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다 차지했어.

길로 사용했어.  발바닥으로 사용했어. 이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예 딴딴해 사용하지도 못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 것이 뭐인가? 이것이 곧 세상 말로 하면 건설된 역사입니다, 역사. 세월이 지나가는 데 따라서 일 년 지나가면 그만치 많은 이 세상의 역사라 하는 것이 생겨지고 십 년 지나가면 그만한 역사가 생겨지고 지금은 일천구백팔십칠년입니까? 그러면 예수님 탄생한 이후 일천구백팔십칠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 세월 가운데에서 이런 거 저런 거 있는 그것이 뭐이냐? 건설된 역사입니다, 건설된 역사.

또 거게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이런 놀음하고 저런 놀음하고 이런 주장하고 저런 주장하고 했는데 그런 것을 가리켜서 세상이 말하기를 문화라 그렇게 말합니다.

일천구백팔십칠 년을 계속해서 쌓아 놓은 문화, 쌓아 놓은 역사, 창조 이후로 말하면 근 육천 년 동안 쌓인, 역사라 말은 세월이라 말입니다. 쌓인 세월, 또 쌓인 모든 문화 그것이 땅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말씀은 심기워지지도 안했습니다.

이 역사와 문화가 자기 심신을 다 차지한 자는 진리는 차지할 것이 하나도 없어.

세상에서 광문다학으로 넓게 듣고 많이 읽으면 좋은 줄 알지마는 그것이 막바로 자기 심신은 그것들이 다 차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안해.

무식한 사람들은 하지마는 ‘공자도 이런 말 했다, 석가모니도 이런 말 했다, 어떤 정치가도 이런 말했다.’ 하니까 그런 말보다 오히려 성경 말씀이 더 묘하지 안하고 매력이 적거든. 뚝뚝하거든.

이러니까 옥토를 만들라면 네 심신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역사와 문화를 다 개간해 버려라!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문화를 다 차지하고 역사를 다 차지해서 네 소원대로 했다 할지라도 그 결국은 사망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한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다 헛되도다.” 이러기 때문에 네 심신이 긴 역사, 긴 세월 역사와 긴 문화 건설이 차지하고 있는 데서 해방을 받아라. 그런 것을 부인해 버리라! 세상 문화 다 차지하여도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역사에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자 없다. 나를 죄 아래서 해탈시켜서 죄를 완전히 이기고 벗어나지 못하게 못 한다. 옥토를 만들어라. 길바닥을 개간해서 옥토를 만들어라. 길바닥의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라.

“돌짝밭에 뿌린 씨” 네가 예수 믿는다고 말하지마는 네 심신은 네가 다 차지하고 하나님 말씀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옅다.

껍데기뿐이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라고 시작했지마는 조금 시작하니까 ‘내 가족에게 걸리는데, 내 욕심에 걸리는데, 내 마음에 걸리는데, 내 명예에 걸리는데, 내 지위에 걸리는데, 내 계획에 걸리는데, 내 사업에 걸리는데.’ 뭐 자기란 놈들이 바글바글하게 꽉 찼습니다.

이러니까 말씀대로 살다가 뿌리가, 흙이 얕아서 뿌리가 박지 못해서 그 진리가 차지할 심신이 없으니까 차지할 거 없으니까 그 진리는 말라야지. 진리는 행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심신을 네가 차지하고 있는 그것을 개간해라. 심신을 네가 차지하면 사망이다. 네 심신은 진리와 하나님이 차지해야 생명이지 네 심신을 네가 차지하면 사망이다. 네 심신을 차지한 너는 네가 아니다. 너 아닌 원수다.

너를 죽인 원수다. 너 아닌 것이 너라고 가장하고 있는 그걸 한 말로 말하면은 옛사람이다! 그놈을 완전히 죽여서 개간해서 옥토를 만들어라. 네 심신을 네가 차지한 데서 완전히 회개해서 진리와 하나님이 차지하도록 하나님에게 바쳐라.

그래야 영생이 되지.

“덤불밭에 뿌린 씨” 세상 재리와 염려, 세상입니다. 네 심신을 세상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듣고 네가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마는 세상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너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세상이 더 많이 차지하니까 세상이 커지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신앙은 커질 수가 없다.

네 심신을 세상과 물질이 차지하고 있으면 네 심신은 죽는다. 네 심신은 진리가 차지해야 영생이 되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영생이 된다. 이해가 됩니까? 심신을 진리와 하나님이 차지하지 안하고 딴것이 차지해도 살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것은 다 멸망할 원수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해방되어 내 심신을 역사와 문화의 모든 세상 지식에게서, 그걸 다 회개해서 캐 던져 버리고, 갈아 뒤벼서 일깨워서 옥토를 만들고, 네가 차지하고 있는 너 차지하고 있는 그놈도 죽여버리고, 역사와 문화가 차지한 그놈도 너는 죽여버리고, 네게 있는 너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는 완전히 부인해 버리고, 너를 차지하고 있는 세상과 물질도 완전히 부인해 버리고, 이제는 옥토에 뿌린 씨는 그 씨가, 씨가 흙을 다 차지하지 씨 외에는 차지할 게 없어.

진리 외에는 네 마음을 차지할 것이 없고 진리 외에는 네 몸을 차지할 게  없어.

진리와 영감과 주의 피가 네 마음과 네 몸을 차지하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는다.

“백 배” 인간의 만수의 만수니 인간으로서는 만만한  완전한 인간 행위 할 수 있다. “육십 배” 육은 마귀 수인데 마귀에게 대해서도 완전 생애를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인간으로서 완전 행위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대, 마귀 대, 하나님 대에 완전한 네가 될 수 있다. 완전 무결한 네가 될 수 있다. 하나님 같은 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완전히 될 수 있다. 하나님 한 분 밑에 모든 피조물 위에 천군 천사 위에 하나님의 상속자 후계자로서, 상속자 후계자로서 모든 피조물을 영원 무궁토록 위임 통치할 제사장, 선지, 왕직으로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보다 더 큰 소망 있습니까? 네가 신구약 성경에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이 말씀을 한 말씀도 빼지 않고 이 말씀이 네 심신을 완전히 차지하고, 네 심신을 인간 문화와 역사와 인간 지식에게도 양보 없이 하나님의 진리 영감이 다 차지하고, 네라는 이 모든 옛사람 악령 악성, 네 중심 네 위주라는 그 모든 원죄 본죄도 네 심신을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고 진리가 차지하고, 세상과 물질의 이 모든 것도 네 마음과 몸을 차지하지 못하고 영감과 진리가 차지하게 되면 너는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예수님이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계약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이 시간 주님이 말씀하였사오니 이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이 완전히 옥토로 성화되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샀사오니 아무 것에게도 뺏기지 말으시고 주님이 홀로 주의 것 삼으사 주님의 성전 삼으시고 주의 영감과 진리가 우리 위에 영원토록 무성하게 영생으로 자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금번 대구집회에 다 옥토 같은 심령을 마련해서 하나님의 지극히 큰 생명의 은혜를 받아 주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은혜 받게 하여 주옵소서.

많은 형제를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험하고 사나웁고 사이비한 미혹많은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사옴을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속량한 주의 백성들이오니 순간도 놓지 마시고 장중에 잡으시고 품어 주셔서 마귀가 일체 침노하지 못하게 하시고 범사에 주님에게 구할 때에 시정하여 생명과 평강과 축복이 이루어지게 하사 염려 없이 평강 가운데서 세상 생활 하다가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 맞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많은 기도와 수많은 걸음과 수많은 애타하던 그 사랑하는 종들에게 주의 심장의 은혜로 더욱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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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596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850529수야 선지자 2015.11.28
2595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850528화새 선지자 2015.11.28
2594 십자가의 도/ 신명기 28장 1절-6절/ 850526주후 선지자 2015.11.28
2593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850526주전 선지자 2015.11.28
2592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1985. 5. 26.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1.28
2591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870306금새 선지자 2015.11.28
2590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870305목새 선지자 2015.11.28
2589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70304수야 선지자 2015.11.28
2588 십자가의 도/ 히브리서 12장 1절-8절/ 801123주후 선지자 2015.11.28
2587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70211수야 선지자 2015.11.28
2586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1985년 12공과 선지자 2015.11.28
2585 십자가의 도/ 히브리서 12장 1절-2절/ 1980년 48공과 선지자 2015.11.28
2584 십자가의 비밀/ 사도행전 1장 4절-11절/ 820411주후 선지자 2015.11.28
2583 십자가의 원수/ 빌립보서 3장 17절-21절/ 800815금야 선지자 2015.11.28
2582 십자가의 평가/ 고린도전서 1장 18절-19절/ 820413화새 선지자 2015.11.28
2581 싸움 준비/ 에베소서 6장 10절-20절/ 851013주후 선지자 2015.11.28
2580 싹스와 쏘마/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870610수새 선지자 2015.11.28
2579 쓴뿌리/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85071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8
» 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70426주전 선지자 2015.11.28
2577 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41027토새 선지자 201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