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9 14:20
청지기 비유와 성경 존엄성
1982. 6. 9. 수새
본문:누가복음 16장 1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말의 각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와 양심이 필요합니다. 세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각도를 자기가 찾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각도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양심을 죽이는 해독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요새 뭐 항생물질이라던가 그것은 자기에게 병균이 있을 때에 그 병균을 죽이는 데 유익합니다. 병균을 죽이는 동시에 자기 몸에 유익한 그 균도 죽이기 때문에 마지막 결산을 내면, 마지막 결산을 내면 그거는 안 먹는 게 좋습니다.
이 공해 나쁘다 하는 게 내나, 공해가 내나 항생물질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급한 그 자기를 죽이는 병균이 있을 때에 다른 게 희생되어도 그 병균을 죽이기 위해서 항생물질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병의 병균 그놈에게는 하지마는 병균이 죽는 동시에 몸에 없어서는 안될 좋은 균도 동시에 죽는다 그거요. 그러니까 부득이 그 병균을 인해서 자기가 죽게 될 때에는 그 항생물질을 쓰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어쩌든지 피해야 됩니다. 이 공해 속에도 속에 수은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모든 항생물질 속에도 내나 수은 같은 그런 독소가 들어 있기 때문에 효력이 난다 그거요. 페니실린이니 모두 이런 것.
그거 모양으로 세상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그 지혜에 도움은 됩니다.
하나님 말씀 알아듣는 지혜에 도움은 되는 동시에 그 지식이 무엇을 죽입니까? 뭘 죽여요? 양심을 죽입니다.
여러분들이 벌로 들으면 안돼. 이 말이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니라. 아무나따나 자꾸 시부렁거리는 말이 아니오. 이 말을 정말로 한 마디라도 들으면 자기네들 눈이라도 날 빼 줄려 할 것이오. 몰라 그렇다 그거요. 제가 들어도 복음으로 듣지를 못해.
세상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에는 도움이 됩니다. 죽이기는 뭘 죽입니까? 양심을 죽입니다. 양심을 죽이다니? 왜 양심을 죽여? 그러면 안 믿는 사람 양심은? 있지. 무슨 양심을 죽여? 세상 지식이기 때문에,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지식을 가진 자는 그 양심이 세상 지식적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적인 양심을 죽인다 그거요.
이것도 딱 거머쥐고 있으면 천천금은보다 낫습니다. ‘아! 항생물질이라는 물질이 몸에 병균이 있을 때에는 그놈 죽이는 데는 유익하지마는 동시에 좋은 균도 죽인다. 이러니까 마지막 수지 계산을 다 맞추면 해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공해는 피하려고, 농약을 안 먹을려고 하고, 농약 속에 수은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생물질 속에 들어가 있는 내나 그게 들어가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병이 들었어도 항생물질 가지고 우선 병균 그놈을 죽여 놓고, 자기 속에 있는 좋은 균 가지고, 좋은 균을 숭상함으로 병균 그것을 이길 만한 정도가 되면 항생물질 그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되어지고 그걸 지나치게 써 버리면 몸이 약해져서 회복을 못 합니다. 그래 의사는, 유명한 의사는 그거 조절을 잘해 가지고 한계를 잘 끄는 데서 치료하고 한계를 잘못 끄는 데에서 사람이 절단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 지식도 꼭 그러해. 그러니까 세상 지식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 이용되는 지식만 가지고 있고 자기 양심을 세상 지식 그것이 지배하는 그런 지식은 없으면 좋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이 지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의 양심이 되어야 된다 그거요.
이러니 ‘아, 목사님이 가르칠 때에 이 세상 지식은 항생물질과 같다고 하더라’ 이것만 기억해서 정말로 이것을 써 먹으면 천천금은보다 낫아. 여러 수억만 되는 빌딩을 하나 차지하는 것보다 낫아. 모두 사람들이 포부가 작고 간이 작고 욕심이 적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 욕심을 품지 큰 것을 아는 그런 포부가 큰 사람, 봇장이 큰 사람은 땅에 있는 것을 대통령이고 뭐 어떤 물질이고 그런 데 욕심 품지 않습니다.
그까짓 거 헤아려 봤자 몇닢푼치 안되는데, 몇해 안되는데, 주 안에는 무궁한 것이 있는데, 그러기에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봇장이 되게 큰 사람이 되어야 예수 잘 믿습니다. 욕심이 참 무한이라서 우주를 집어 넣어도 ‘아이구, 우주 그거 다 차지하면 뭐하노?’ 우주를 집어 넣어도 차지 않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 가운데 모셔야, 제일 자존자 주권자 창조주 그분을 내 하나님 삼아야, 내걸 삼아야 만족이 되어지는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말하기를 ‘참 잘난 사람이라야 예수 믿는다.’ 그래 참 잘난 사람이 예수 믿습니다. 봇장이 큰 사람이라야 예수 믿소.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으면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예배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될 터인데 하나님 말씀의 말귀를 알아듣는 그런 지혜가 없고, 지혜있는 자는 양심이 썩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들려지지를 않고, 이러니까 밤이나 낮이나 어디 가든지 생각이 그거라. 어디 가든지 ‘어째야 나를 높일까? 어째야 나를 좀 나타낼꼬? 어째야 날 좀 알아주도록 할꼬? 어째야 내가 좀 권리를 가질꼬?’ 그놈, 그놈이 저 죽이는 놈인데 죽이는 놈 그놈만 자꾸 숭상하려고만 애를 쓰니 참 답답하고 가련하고 불쌍하다 그말이오.
그래도 그걸 ‘이놈이 너 죽인다’ 하고 그놈을 총을 한방 놓으면 그만 평생 원수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아예 그걸 붙들어 자주 만나야 그래도 살살 좀 치료가 다가가지 한방 때려서 그만 ‘아이구’ 도망쳐 버리면 그놈이 있다가 ‘여기 있다가는, 이 목사 밑에 있다가는 나는 죽는다.’ 어떤 놈이 죽어? 옛사람이 그놈이 죽는다 말이오. ‘나는 죽는다. 이놈을 끌고 가야 되겠다.’ 자꾸 거기서 끌고 딴데로 갈 도리만 해 가지고 딴데로 그만 도망을 쳐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분명히 가면 옛사람만 기르지 새사람은 기르지 못하지. 그런 사람 많아. 불쌍해.
세상에서는 세상에 유식한 사람들은 아무 교회에 많이 있다 하지마는 하나님의 사람이 볼 때에는 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많이 모입니다.
옛사람만 기르고 있지 옛사람을 죽이지를 못해. 옛사람 길러.
교역자들도 옛사람 기르는, 옛사람 기르는 그놈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며칠 전에도 아침에 누가 와 가지고 ‘아, 이거 항상 인본주의로 이러고 있으니 기가 찹니다’ 하는, 그 교역자에게 대해서 탄식을 하면서 그래. ‘그렇다고 해 가지고 밥맛 없고 낙심하고 근심되고 하면 하나님이 너 미워한다. 네나 바른 길 걸어가라. 뭣 때문에 네가 월권해 가지고, 네가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없는데, 그저 기도나 하고 그로 인해서 생각하는’-‘소돔 고모라성의 죄악을 인해서 롯의 의로운 마음이 상했다.’ 아주 상했으니까 값있는 줄 알지만 상한 것 값 한 내끼도 없습니다. 롯의 의인의 마음이 상했다고 그 가치가 있었습니까? 상이 있었소? 상 하나도 없습니다. 상 하나도 없었어! 상이 있었어? 하나도 없었어! 성경 아니면 우리가 바로 갈길을 몰라.
그거야 다른 사람 나쁜 것 보고 마음이 상했으니까, 의인의 마음이 상했으니까 대단히 귀하고 아름답고 참 그 가치가 있겠습니까? 가치 하나도 없어. 말귀를 알아들어야 되는데, 말귀를 알아들으면 서부교회에서 발길로 찬다 해도 절대 가지 않습니다. 말귀 알아들으면 발길로 찬다 해도 그 교역자가 딴데 안 갑니다.
가는 것은 그게 가짜라 그말이오.
그러면 다른 데 있는 사람도 가짜냐? 다른 데 있는 사람은 가짜가 아니지마는 여기 있으면서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에서 무슨 감정이나 뭐 절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가는 것은 그거 옛사람으로 가기 때문에 그거 다 가짜이지.
여기서 진리를 배우고 가는 것은 진리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가짜라 그말이오.
여기서 나간 자는 가짜라 하는 그 말은, 딴데 있는 사람은 그러면 다 가짜인가? 그렇게 도매금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은 아니야. 그 사람들은 아니로되 여기서 이 진리를 배우고 가는 것은 진리가 나빠 그런 게 아니라 제게 무엇인가 감정 문제, 인간 감정 문제로 가고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다가 갔기 때문에 그게 가짜라 그거요. 그건 틀림없어.
우리가 말하는 건 하늘나라 가서 심판을 다 받아. 심판을 받기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든지 상급이든지 말에 대해서는 꼭 둘이 있습니다. 상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어. 말에 심판을 받을 자로 알고 하라 했어.
본문을 잘 들어요.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청지기를 읽으면 다 알지요? 청지기가 뭐인지? 부자의 총무, 부자의 총무라 말이오. 부자는 누구요? 하나님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총무입니다.
자기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이 지식 가지고 있고 믿는 사람이 지식 가지고 있다고 그것도 아닌 것 아니오. 믿는 사람 그 지식 세상 지식 그것 다 소유입니다. 그거 다 부자의 것이라. 우리 자신과 몸과 마음, 생각, 뜻, 재산, 총명, 지식 다 피로 구속하신 주님의 것이라 그말이오. 주님의 것, 부자 주님의 것.
그런데 우리는 부자의 청지기라. 내게 대해서는, 내가 주님의 소유의 총무라 말이오, 총무. 내가 내게 대해서는 제일 권리를 많이 가지고 있어. 무슨 권리를? 주님에게 제일 큰 권리를 맡아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총무 이거 하나만 해도 못 알아듣는데 알아듣는 사람은 다, 깨닫는 사람은 깨달을 때에는 다 놀란 것입니다. 깨달을 때에는 그냥 깨달은 게 아니고 깨달을 때에는 다 밥도 굶고 산에 가서 하루 이틀 참 감사해서 견디지 못하는, 다 깨달았을 때에는 그런 결과가 다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한꺼번에 우 들고 녹음기, 그게 녹음기인가 목사지? 녹음기인가? 목사는 아니고 녹음기라. 녹음기 모양으로 그냥 기억해 가지고 딴데 그대로 전하니까 된 줄 아니 이거 참 기 차요.
청지기 비유 이런 비유도 스스로 깨달은 사람, 체험해서 생활해서 깨달은 사람들은 다 깨닫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어. 다 금식도 하고 마음에 발동도 하고, 참 기뻐 감사해서 견디지 못해서 마구 불덩어리 같은 그 힘을 가지고 나서도 얼마 가면 또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냥 억지로 전대에 돈 집어 넣듯이 그 안에 주입을 시키니까 그게 줄줄 나오니까 그것 가지고 제가 목사가 된 줄로 알고 ‘이것만 하면 내가 목회 되리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이거 비유라 말이오. 그러면 자기가 자꾸 새겨 가며 읽어야 돼. “부자에게” 이것은 주님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기 때문에 성경은 암만 읽어도 까끌 까끌하게 이래 내려가는데, 성경 위에 대면 대통 모양 좌르르 읽어 버렸는데 ‘그 안에 무슨 말이 있노?’ 아무것도 몰라. 그것 참, 미끄러지게 하는 것 그것 참 아주 나쁜 관습입니다. 성경은 읽을 때에, 읽으면 벌써 그 안에 뜻이 다 파악돼 나가면서 이렇게 읽도록 노력해서, 평생 읽어도 새로 읽는 말씀이라. 평생 읽어도 줄줄 내려가지 않고 새로 읽는 말씀으로 까끌까끌하게 그래 되어지는 이것이 큰 축복이요, 위에 대면 끝까지 주르르 내려가 버려서, 내려가고 난 다음에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거요.
제가 진주 성경고등학교 가 가지고, 그때 거기는 세례 받은 지 3년이 되어야 입학하는 건데 저는 그때 세례도 받지 않았어. 세례 받지 않았는데 그 선교사가 와 가지고 와서 보고 추천해서 가 가지고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을 했는데 ‘규정상 이러니까, 그 학기 끝을 다 채우면 안 되니까 외과만 하고 끝은 채우지 말고 갔다가 때를 기다려 주십시오.’ 이래서 그때 한번 가 가지고 두 달 동안 공부하고는 다시는 안 갔었습니다. 갈 기회 없고 이랬는데.
그때에 권이함목사라고, 권이함목사님이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호주 사람인데 그 목사님이 박사 학위를 하나도 가지지 않았는데 말하기를, 선교사가 그래 말합디다. 저분이 박사 학위를 가질려면 일곱 개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말합디다. 일곱 개.
‘일곱 개 학위의 실력이 훨씬 초월한 분인데 그분은 학위를 받지 않는다’ 이랬는데, 그분이 성경 읽을 때마다 보면 떨어. 우리 모양으로 이래 읽지 않아요. ‘또 한 제 자 들 에 게’ 보면, 옆에서 보면 마치 괭이 앞에 쥐 모양으로 벌벌벌 떠는, 자기는 안 그럴려고 해도 그만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언제든지 읽을 때에 까끌까끌하게, 처음으로 볼 때에는 ‘아, 저 사람이 왜 성경을 저렇게 읽을 줄 모르노? 어디 저렇게 무식한 사람이 있노?’ 그래 여길 만치 성경 읽는 것이 까끌까끌 하더라 말이오.
그분은 강의실에 강의할 때 내가 보니까, 나는 그분의 하는 태도만 그때 보고 이래 있는데, 보니까 어떤 사람이 강의 시간에 수강하면서 조는 사람이 있으면 강의를 하면서 그 사람만 딱 보고 있어요. 그 사람만 눈을 딱 쳐다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얼른 눈을 돌려 가지고, 그래 눈으로 밑에 있는 제자들을 깨우는 것을 나는 유심히 봤습니다.
또 그 사람이 우리 같은 경거망동 하지 않아요. 제가 거창읍에 시장에 그때, 어째 그날 그 권목사님이, 내가 뒤에서 보니까 걸어가는데 그분은 이래 가지고 가지 않아. 언제든지 이래 숙여 가지고 가는데 보니까 권목사님 같애. 뒤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어떻게 빨리 가는지 뭐 뒤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따라가니까 돌아 보지 않아. ‘권목사님! 권목사님!’ 고함을 질러도 안 돌아 봐. 안 돌아 보고 걸음을 살살살 멈춰. 살살 이래 가는 걸음을 멈추며 살살 이래 가. 가 가지고 옆에서, 내가 옆에 가 가지고 딱 대서, 손은 내가 감히 잡지를 못하고 ‘목사님!’ 이러니까 그래 돌아보더니 날 보고 아이구 어짠 일이냐고. 그분이 날 참 좋아했어요. 반가워 이러면서 이러는데 거기서 내가 또 그분에게 크게 배우고 올라왔어.
우리는 뭐 뒤에서 부르면, 다른 사람 부르는데 부르면 저인 줄 알고 ‘응’ 이런 실수를 하는데 안 해. 또 옆에 가 가지고 뒤에 가까이 와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아. 옆에 딱 가까이 와 가지고 자기를 부를 때에 걸음을 멈추면서 이래 가지고 부르니까 대답하기를 ‘아이구 어쩐 일이십니까?’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왜 성경학교 안 오냐고. 오라고. ‘네, 갈 기회 있으면 가겠습니다.’ 그분이 그때 그래 공부해도 제게 대한 것을 선교사들에게 계속해서 소개를 했어요. 그분은 참 겸손하고 진실된데 그 성경을 보는 것을 나는 또 보고 놀랬어.
제가 다른 사람에게 비해서는 그때는 성경을, 신구약 성경을 거의 다 외웠었는데, 그러니까 잘잘잘 하는 그걸 내가 회개했어. 잘잘잘 읽으니까, 그래도 좀 신중히 생각해 읽었는데 성경 읽으면서 그 뜻을 생각지 못하고 읽기주의로 읽었더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러나 거기서 내가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공부를 하다 보니, 나는 그때 통신과를 해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통신과 했는데 통신과 한 것이 초등강은 통신과를 해 가지고 보내서 채점을 받는 것이고 고등강은 교역자가, 신임할 만한 교역자가 강을 받아 가지고 그 문제를 두고 시험을 쳐 가지고 보내면 그 점수를 주는데 그때에 백점을 다 받았어.
이러니까, 그러면 99 짜리가 뭐 두 개인가 한 개인가 있고는 다 받았는데, 그러니까 고등강 하기 위해서는 거기 있는 성경을 다 외워야 그게 되어지지 안되면 안된다 그거요. 이렇게 하니까 아무나따나 줄줄줄 읽지는 않고 뜻을 생각하면서 이래 읽기는 읽었지마는 그 권이함목사님 만났을 때에 내가 회개를 했습니다.
‘아, 저 어른은 저렇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한 말씀 한 말씀 거기서 자기의 복음으로 받고, 책임으로 받고, 명령으로 받고, 법으로 받으니까 떨면서 저렇게 신중히 읽는데 나는 개 머루 먹듯이 줄줄줄 읽었다.’ 그때 내가 그걸 회개했소.
회개를 하고 그때부터 더 유심히 뜻을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성경을 읽으면 그 안에 있는 뜻을 거의 다 생각을 하면서 읽어져.
이러니까, 제가 내원사 앞에 있는 산장여관이라는 그 여관에 가 가지고, 별실이 있었는데 그 별실에 가 가지고, 한 채만 저 숲속에 가 있는 게 있는데 별실에 가 가지고 한 달 동안 거기 있으면서 내가 한 것은 성경을 ‘내가 이번에는 한 달 동안에 신구약 성경을 한번이든지 두 번이든지 읽고 오겠다.’이랬는데 가 가지고 성경을 몇 장 못 읽었어. 읽으니까 거기 대한 그 진리가 생각이 나지니 내가 거기 대해서 회개할 게 있기 때문에 또 읽다가 또 깨닫고 또 기도하고 또 마음에 감격해서 참 읽다가 울다가 기도하다가 또 자꾸 이러다 보니까 성경 몇 장을 못 읽었다 그거요. 그래서 그 시간이 그래 가지고 한 2, 3년 가 가지고 좀 그래 있으면 싶어도 내게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해서 못 가 있고 그렇다 그거요.
성경에 대해서 뜻을 생각지 않고 줄줄줄 읽고 그저 외우기나 기억이나 하고, 이 말씀을 자기가 책임지고, 이 말씀이 법인데, 이 말씀대로 안 하면 정죄받는데, 심판받는데, 상벌이 여기 있는데, 생사가 여기 있는데, 이렇게 중대한 일을 자기네들이, 사업하는 사람이 신문에 ‘정부 정책이 이번에는 그 허가 냈던 것을 거둔다. 취소한다. 어떤 융자하는 것은 그거는 끊는다. 어떤 물품은 그 수출을 금한다’ 이런 말 한 마디가 신문에 있으면 자기의 생활과 직접 사업과 관련이 있으면 그만 쫓아와서 ‘이거 금지되면 어찌 되나?’ 그말 듣고 ‘됐다.’ 우쭐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말 들으면 기가 착 차 가지고 꺼꾸러지고, 그런 말도 그럴 건데 이 말씀을 사실로 들으면 한 말씀 한 말씀 그렇게 될 것인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고 도무지 변화가 안 된다 그말이오.
이래서 어제 아침인가 아침에도 어떤 분이 와 가지고 탄식을 하면서 ‘이 일을 어째야 됩니까?’ 자기 아들의 신앙에 대해 가지고 ‘이러니 내가 말하는 데마다 도무지 이것이 깨지지 않으니’ ‘그게 공부시킨 죄 아니가? 공부시킨 죄 아니가? 그게 보배이지마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가지고 있으니까, 그 술에 취해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니까 그렇지 않느냐?’ 그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으면 해야 되지 억지로 거슬려서 자녀 공부 시키기 위해 가지고 지금 ‘이거 내가 있으니까 앞으로 내가 어찌 될 때 자녀 공부시킬려면, 이것 가지고 인간 구원에 쓰지도 못할 것이고 저축해 둬야 되겠다.’ 아이 배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이 낳아 가지고 키울 똥보자기 같은 것도 다 장만하지, 또 아이 배지도 않았는데 낳아 가지고 뒤에 대학 공부 시킬 것까지 다 예산하지 그따위 생각을 가지고 무슨 지금 제가 신앙생활 할 거냐 그말이오.
그건 제 생명이 제 자유에 있는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현실 현실에 자기에게 신앙양심을 통해서 영감시켜 주시는 대로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대로, 그대로 살고 그대로 쓰고 그대로 일하고 그대로 저축하고 그대로 시키는 대로 해야 성전 건축이 됩니다.
“그 주인의 소유를” 주인의 소유가 뭐인데? 청지기는 부자의 총무, 내 자신에게 대해 내 전부는 주님의 것인데 내게 대해서는 내가 총무라, 내게 대해서는 내가 총무.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나는 내 모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든 게 주님의 것인데 나는 내게 대해서는 내가 청지기라, 총무.
“그 주인이” 그 주인은 피로 값주고 구속하신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라. 우리는 그분의 소유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라.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이니라.’ 이것도 자기가 느끼기만 느끼면 뭐 하루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리고 얼마든지 걸릴 수 있습니다. 주의 것이라, 정말로 주님이 나 위해서 대속하셔서, 대속하신 분이 나 위해서 했고 대속해 놓은 그 공로가 내것 됐으니까 나는 당신의 것 된 거는 정한 이치 아니겠소? 그 사람들 상점에 물건을 내가 가지고 왔으니까 그 물건값만한 돈은, 내게 있는 돈은 물건 주인의 돈이 아니오? 그게 정당한 이치 아닙니까?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의 소유를” 구속으로 주님의 것 된 이 내게 있는, 내가 맡아 가지고 있는 이것을 “허비한다는 말이” 허비는 당신 시키는 대로 썼으면 허비가 됩니까? 잘 쓴 게 되지. 당신이 쓰지 말라는데 내 마음대로 썼으니까 허비지. 이거 하나만 해도 녹아집니다.
다 이런 것 가지고 산에 가 가지고 어떨 때는 하루도 기도하고 뭐 열흘도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또 녹아지기도 하고 그렇게 결심하고 결심해도 그것이 실지에 세상에 나와 가지고 살 때에는 참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닌 이 어려운 것인데 이런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이런 아무런 고비도 없이 그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것이 세상에 돈 욕심에서 일하는 것처럼 내나 땅에 있는 그런 세상적인 욕심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변질이라 그말이오, 변질. 정상이 아니라 그말이오. “어찜이뇨” 정상이 아니라 그말이오. 우리가 나와 내 소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이라 그말이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그러면 자기가 한 일 다 계산, 셈하는 것은 계산 아닙니까? 셈이라는 말은 계산이라는 말인데 계산하라 말이오. 우리 배울 때, 우리 있을 때는 그 말이, 셈이라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지금 나온 말이 돼 놔서, 셈하는 것은 계산대라 그말이오. 계산대라. 셈하라 그런 것 낱낱이 계산대라.
셈하라 말은 계산대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 몸둥이를 내가, 내 몸둥이를 내 마음 가지고 하고 내 몸둥이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 물건 내 마음대로 하는데 아니오. 그거 다 주님하고 계산을 댑니다. 낱낱이 계산을 대요.
제 마음대로가 아니라 계산 대.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이렇게 정선해 가지고 가기 때문에 거기는 사망이 없지. 영생뿐이지 아무나따나 예수 믿어 가지고 그래 믿어 가지고 하늘나라 저축이 되겠다고? 건설구원이 되겠다고? 온전한 행위가 아니면 건설구원 안됩니다.
이러니까 ‘까다롭다’ 안 까다로와도, 까다로워도 구원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복이지 쉽게 말해 가지고 구원 안되도록 하는 그거는 저 속이는 것밖에 더 되는가? 어리석어. 진리를 배우고 나서 세상 이 모든 교회들을 보면 구원이 됐는가, 저 사람 행동이 구원이 됐는가 안됐는가 환하게 볼 수가 있어.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 사무, 이 일을 언제든지 세상에서 영원토록 있으면서, 주님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 이 대리로 피로 값주고 산 이것을 내가 지금, 주님이 주인인데 주님 대리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할 권리가 언제든지 계속되는 것 아닙니다. 오늘로 끝날지 모르요. 오늘로 끝날지 몰라.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이 끝날지 몰라. 내 몸둥이를 내 몸둥이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오늘로 끝날지 몰라 내 건강을 내 건강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것이 오늘이 끝날지 몰라. 내 젊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이 끝날지 몰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끝나는 시간이 있다는 것. 이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혔고 좌우편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가 있습니다. 그 강도가 누구요? 그 강도가, 한편 강도는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을 상징했고 한편 강도는 구속받지 못한 불택자를 상징한 것입니다. 이 둘을 상징한 형식계시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벌써 사형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어. 달려 있는 그것이 살아 봤자 몇 시간 살겠소? 우리는 다 달린 사람이라. 달린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 받아 놨어.
이러니까 죄값으로 다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다 고통 중에 있어. 고통 중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너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줄 알아라.’ 나만 고통당할, 왜? 원죄와 본죄 값으로 다 고통당해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있어. 달려 가지고 이미 죽는 거는 왼편 강도도 고통 중에 죽고 오른편 강도도 고통 중에 죽는데, 고통 중에 죽으면서 주님을 바라본 자 그날 낙원에 갔고 또 주님을 바라지 아니하고 밑에 있는 그 못박은 그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이라도 저분들이 혹 용서하고 놔 줄까? 날 놔 줄까?’ 이래 가지고 동정을 거기서 구했어. 거기서 구해서 십자가 못박힌 주님 욕하면, 욕하면 그들이 좋아할 줄 알고 주님 욕하다가 숨 떨어졌고 한편 강도는 이미 죽어 가면서 ‘내가, 내가 죄값으로,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죄값으로 당연하다.’ 자기가 고통당하는 것을 당연한 줄 알고 거기서 ‘이분은 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이분이 인간 구원하러 왔다’ 하는 것을 그때사 자기가 그때 말했다 말이오.
‘나라로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당신은 죄 없이 못박혔으니까, 당신은 당신 죄값으로 못박힌 게 아니고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나라로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못박혀서, 인간에게 못박혀 죽임당하는, 그 무능하고 죽임당하는, 죽임당하는 예수니까 ‘떠들어 쌓더니만 못박혀 뒈진다.
공연히 큰소리 뻥뻥 해 쌓더니마는 소용없다.’ 이렇게 하기 쉬울 건데 죽어가는 그 주님에게 자기를 부탁하는 그것이 순교자입니다. 그게 성도요.
교회가 부흥되고 교회가 전성시기에, 아주 교회가 전성시기 그때는 ‘주여 주여’ 떠들어 쌓지마는 예수교가 다 핍박당해서 예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여 버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볼 수 없고 예수교가 완전히 박멸당하는 그때에 ‘주여! 나는 주님은 내 주님이라’ 고 찾아가는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달린 그 오른편 한편 강도의 그 신앙입니다.
알아듣겠소? 들려집니까? 이것을 설교를 해 놨더니마는 ○○신학교 교장되는 분들과 그분들이 막 그래 가지고 이단이라고 야단입니다. 야단이 났는데, 내가 말 들으니까 그래. 올라오며 소문을 들으니까 한상동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이게 전체를 가르친 건데 이 깨달음의 진리가 옳다. 이 십자가의 강도 이 사람의 그 신앙생활의 그것이 바로 순교다.’ 내가 순교라 한다고 이래 그분이 변명을 하니까, 변증을 하니까 다른 사람이 말이 없었어. 그것도 이단이라고 정죄함을 한번 받았어. 왜? 그것이 깊이 깊이 자기가 신앙으로 주님과 연결하면서 생각해 보는 가운데에서, 실행 생활 하는 가운데에서 그런 것도 깨달아진 것입니다. 쉽게 깨달아지는 것 아니오.
쉽게 먹을려 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양심을 쓰지 않으니까 말씀이 재미가 없어.
여기 설교 강론 재론하는 것, 녹음 가지고 재론하는 그거는 테이프에다가 거석해 가지고 재독하라 이러니까 재독하는 시간은 중간반 반사들이 제일 싫은 시간 중에 한시간이랍니다. 재독하는 시간은 싫어하는 시간 중에 한시간. 듣기 싫고 잠 오고 ‘아이구’ 귀찮은 시간 중에, 제일 귀찮은 시간 중에 하나래요.
뭐 저거끼리 찌글찌글 웃으면서 테레비나 보고 이렇게 망할 일 노는 것 이런 거는 그만 말하면 잠이 오다가도 또 눈이 똑 뜨여서 잠이 깨지고 재미있고, 망할 거는 재미있고 행복된 것은 제일 싫으니 그 형편이 어찌 되겠는가? 그 결과가 어찌 되겠는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여러분들 망할 것을 알아야, 망할 것을 망한다 하면 일어서야지. 듣기 싫으면 제가 망해 버리지 어쩔 거라.
말귀를 들어 깨달아지면 그만 정신이 없을 터인데, 이러니까, 그래도 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을 때에 밥 먹을 줄 모르고 행할 때에 밥 먹을 줄 모르고, 깨달은 대로 실행할 때에 살림살이가 가나 오나, 남한테 조롱을 받나 안 받나, 자기 지위나 권세나 모든 것이, 가정이 어찌 되나 저리 되나 그런 것 다 돌보지 않고 신앙생활에 도취되어 가지고 하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다 그렇게들 신앙생활 하고, 이러다가 그만 그게 안되면, 나는 부산 와 가지고 완전히 이거 망했다 싶어요. 왜? 내가 거창서 신앙생활 할 때에는 얼마든지 시간 있었는데 여기 와 가지고 생전 기도할래야 기도할 시간 있나 성경 볼래야 성경 볼 수가 있나, 밥 먹을 때도 적어도 아마 열 번 이상은 전화 받소. ‘그뭐 꺼 버리지’ 꺼도 안돼. 그거는 또 가 보면 모처럼 그것이 벌써 한 달이나 1년이나 3년이나 별러 가지고 전화하는 것이니까 그 한 마디 들어 주는 데에서 사는데 그걸 또 냉정스럽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끊어 버려라. 식사할 때는 그때는 모든 것 다 끊어 버리고 하자’ 이러고도, 결심하고도 또 못하고 못하고 이러니까 무슨 구원을 이루겠소? 이러니까 전도해서 사람들은 많아졌고 제자들은 많아졌고 많아졌지마는 뭐 내 수입은 없어요. 또 그때 내가 ○○교파에 있을 때에는 ○○교파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모든 사람 나 이렇게 하고 좋아했습니다. 나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때 비하면 숫자는 그때보다 좀 더 되겠소. 그때는 ○○교파가 다 해 봤자 지금 우리 숫자의 반도 안됐으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되고 말귀를 알아들어야 됩니다. 그걸 들어야 돼요. 거기서 양심을 써서 녹아져야 돼요.
그러기에 뭐 육물이 사람들이 죽는 것 보고 그만 옆에 사람들이 그만, 출상예배 보러 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울고 어쩌고 이러면 그만 눈물 흘립니다.
눈물 흘려요. 그것도 다 실은 썩은 눈물이오. 우리에게는 감사의 눈물 이것이 늘 있어야 되고, 마음에 참 인생이 불쌍하다는 그 불쌍한 마음에 신앙적으로 그런 게 가끔 가다 있어도, 깨달음에 대한 이 감사, 자기를 행하게 해 주신 감사 여기 대해 감사의 눈물이 있고 그 외에는 간혹 필요한 것이 있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이걸 하면서 청지기 비유에서 앞으로 여기 말이오. 3절에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일을 알았도다” 이 할일 연구한 것, 할일 연구하는 데에는, 자기 할일 연구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어, 할일 연구하는 데에는 몇 가지를 계산해야 됩니까? 자기가 집을 건축하는 데에, 건축하는, 집을 건축하는 예산을 할려면, 예산을 하려고 하면 예산하는 데에는 무엇 무엇 그 비용을 계산해야 됩니까? 뭣 뭣 비용 계산해야 됩니까? 저 건축업 많이 한 사람들한테 물으면 알 건데, 대충 아마 비용을 계산하면 그걸 비용 계산할 건데.
첫째는 이걸 만들어 가지고 팔면 얼마 가느냐? 매매대금을 첫째 생각을 가져야 될 것이고, 그러면 이런 건물을 지어 내는 데에는 터값이 얼마 재료값이 얼마 관서에 허가받는 값이 얼마 또 노임이 얼마, 자, ○장로님, 그 외에 또 뭣 듭니까? 또 뭐 들어야 됩니까? 허허, 저 봐. 계산이 딱 만나거든. 세금이 들어야 된답니다.
그러니까 거기 있는 걸 다 계산해 가지고 예산을 해야 되지, 제딴에는, 다른 것 다 예산만 하고, 팔 것도 예산 안 하고 세금 하나만 빼 놓고 ‘됐다. 수지계산 맞는다.’ 해 버렸으면 헛일이오. 재료값도, 어떤 자는 재료값도 하나도 계산도 안 대고 ‘아, 돈 남겠다.’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소? 여러분들, 그거 바보 아니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내가 알았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예산할 때에 거기 들어야 될 것을 하나라도 빼 놓으면 어찌 되겠소? 빼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하는 이것을 연구할 때에 거기 계산을 대야 될 것을 계산을 안 넣고 계산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기 계산을 대는데, 자 그 계산.
(저 목수 말이오. 저 목수, 왜 요새 안 나와요? 어제 나왔어요? 나왔어? 왜? 나오지 말라 해서? 계속해 나와요. 장사하던 사람이 지금 이거 하려고, 그분도 나오고 먼저 ○목수하고 하던 이 그분 알지요? ○목수입니까? ○○○씨하고 같이 한데 다닌 사람, ○목수가? ○목수 말고 또 하나 있지 왜? 낯이 납작하이, ○목수지? 그 세 사람은 꼭 나와야 돼요. 다른 사람들은 통통 몰라요. 지금 새로, 새로 놓으니까 뭐 엉망이라. 몰라. 도무지, 어제 건축가들을 전부 다 불러 놓고 이래 이야기해 보니까 다 건축을 그래 해 놨다 말이오.
이거 지하실 할 때에 바닥 공굴 다 해 놓고 위에 옹벽 공굴 하니까 바닥 공굴하고 옹벽 이놈이 다 이래 접촉이 안돼. 접촉이 안되어 가지고 그래 해 놨어. 그러면 안돼. 바닥에는 시다지만 넣어 놓고 위에 옹벽 넣는 그 공굴이 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이래 밑에 깔려져야 돼. 이러니까 밖에 합판은 여기 끄트머리 밑에 붓고, 안에 것은 세치 할려면 세치, 두치 할려면 두치, 다섯치 할려면 다섯치 더 올려 가지고 합판을 붙여 가지고 안에 놓으면 이놈이 들어와 가지고 이놈이 밑에 다 깔려지고 바닥이 되어져야 박지기 모양으로 이래 밖에 물이 안 새도록 이래 되어지는 것인데, 보니까 다 건축을 다 그래 하고 있었어.
이러니까 오랫동안 가르친 사람들 그 사람들이라야 되지 지금 그 사람들이 쓰는 신출내기 가지고는 안돼요. 그 목수들은 나와서 계속해서 해야 돼요. 오늘 나와 가지고 이제 여기 하니까 미리 삿보도 준비도 다 하고 다 해야 돼.)
자, 내가 뭘 하다가 말았지? 할일을, 봐. 집 짓는 데도 세금 하나만 빼 놓고 계산해도 헛일 아니오? 재료 하나 빼 놓고 하면 영 헛일 아니오? 인부 노임 빼 놓고 계산하면, 노임 빼 놓고 계산하니까 ‘유익이 있다. 돈 당장 부자 되겠다.’ 뜻밖에 노임이 나오네. 그 사람 시작했으면 헛일 아니오. 이거 모양으로 ‘어떻게 할일을 알았도다.’ 4절에 “내가 내 할일을 알았도다” “내가 내 할일을 알았도다” 우리도 할일을 알아야 되겠어. 이 청지기가 ‘할일을 알았도다’ 말했는데, ‘할일을 알았도다’ 했는데 무엇 무엇을 생각하니까 이래야 되겠다, 이 청지기가 ‘할일을 알았도다’ 했는데 무엇 무엇을 계산해 가지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 내가 이래야 되겠다 하는 걸 알았던가 그것을 오늘 아침에 말할려 하다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여러분들, 여기서 일곱 가지를 찾으십시오. 일곱 가지. 일곱 가지를 무엇 무엇을,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래야 되겠다. 이렇고 이렇고 이러기 때문에 이래야 되겠다.’ 이래야 되겠다 했는데 저게 있으니 ‘아, 그래 해도 안되겠다.’ 하나만 가지고 하다가 할일 알았다 하면 둘이 나오면 ‘아이구 그러니까 안됐더라. 안됐다.’ 이래 가지고 자기는 ‘야, 이래 가지고 집 한 채 만일 백만원씩 받는다 해도, 한 천만원씩 받는다 해도 백 채면 돈이 얼마고? 햐, 부자 되겠다.’ 이거는 파는 것만 생각하고 천만원 받는 것만 생각했지, 그 비용은 안 드는가? ‘내가 당장에 몇십억을 벌 수 있다.’ 이러니까 ‘어째서?’ ‘집 한 채 천만원씩이라도 열 채면 1억, 서른 채면 3억, 백 채면’ 얼마입니까? 얼마? 10억 되나?’ 이래. 떡 이러니까 ‘야, 그런 데는 공중에서 떨어지나? 건축비가 안 나오나?’ ‘건축비? 건축비? 아! 팔면 되는 줄 알았는데 건축비가 있나?’ ‘그래 건축비는 대지값이 있다. 대지를 사야 될 것 아닌가?’ ‘그래?’ 대지값을 떡 제하니까 ‘어이구, 대지값을 제해?’ 대지값을 제하니까 주머니가 푹 들어가 버려. 또 말하기를 ‘그러는 데는 야, 재료가 들어야 돼.’ ‘재료? 재료가 뭐이라?’ ‘거기에는 세멘도 사야 되고 철근도 사야 되고 재료가 들어가야 돼.’ 재료값을 툭 떼니까 푹 쭈그러집니다.
‘아이구, 남는 게 별로 없구만 뭐.’ ‘또 거기에는, 다 들어간 줄 알아? 노임이 들어가야 돼’ ‘다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는데 뭐.’ 노임 뚝 떼 버리고 나니까 또 없다 그말이오. ‘또 거기는 세금이 들어가야 돼’ 이러니까 ‘이것도 모자라는데 뭐 세금은 누가 주노?’ 당장 부자가 거지가 됐소.
‘안됐다. 이래서 안됐다. 봐라. 이 바보야, 건축가로서 성공을 할려 하면 이래 지어 가지고 이런 집을 만들어서 팔면 돈이 얼마 되겠다 하는 매도 대금을 딱 계산을 대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걸 건축할려 하면 건축비가 얼마가 든다는 것 그거 계산 다 대고’ 다 됐습니까? 하나 남았어. 당장 이것이 매매가 안된다면 여기 대해서 이자가 나갈 터이니까 몇달 동안이면 이것이 되어지겠느냐? 그 계산을 거기 빠짐없이 다 계산을 대 가지고 수지계산을 딱 맞춰 가지고 계산을 댄 사람이라야 실패없이 성공하는 것이지 그거 다 빼놓고 이래 한 자가 헛일 아니겠소? 여러분들! 우리가 이 신앙생할 하면서, 우리는 무궁세계를 바라보고 사는데 여기 대해서, 무궁세계를 향하여 사는 사람들이니까 이게 있고 저게 있고 모든 조건들이 있으니까 이것을 생각지 않고 어쩌든지 ‘우선 좋게만 살면 된다.
재미있게만 살면 된다. 기쁘게만 살면 된다. 잘 먹으면 된다. 내 욕심대로, 사람 욕심 나면 사람, 돈 욕심 나면 돈 욕심, 옷 욕심 나면 옷 욕심, 권세 욕심 나면 권세 욕심, 내 욕심대로 만족히 살면 됐다.’ 얼마나 어리석소? “내 할일을 알았도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할일 알아 가지고 할일 안 것을 주님이 칭찬했습니까 어리석다 했소? ○○씨, 칭찬했지! 칭찬했지! 주님이 칭찬할 수 있는 할일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해 놨다 그말이오.
어리석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들으면 안돼요. 어제 내가 한 마디를 들었어. ○○○집사님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일하는 것은 이번에는 내가 이제 건축도 모든 것 다 목사님께 새로 배워서 새로 이제 건축가가 새로 되고 새로 배우고 일하는 것도 새로 배우고 인부 쓰는 것도 새로 배우고, 내가 건축사업 하면서 사람도 새로 배우고 모든 것 내가 새로 배워 가지고 살려고 지금 달려들었습니다. 이러니까 어쩌든지 무엇이든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 말이 맞지. 그래서 어제 당장 내가 새로 말했지. ‘네가 책임을 전가시키는 걸 하지 말고, 같이 하는 사람은 책임을 제가 짊어져야 되지 잘못된 게 있으면 ‘이거는 내가 이래 하자 소리 안 했는데, 나는 이래 하자 했는데 이래 해서 그래 돼 버렸다.’ 이것이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되면 일이 안된다. 그걸 깊이 생각하면 ‘왜, 그때 내가 그거 잡고 이래 하면 되는 것이고, 암만 쎄워 대도 그런 것은 높은 사람 있으니까 나한테 연락하면 내가 아 그래 안된다 이래 될 것 아닌가?’ 자기가 책임지려면 책임질 수 있다 말이오. ‘그리 해라’ 그 큰 것 배웠지, 큰 것 배웠어.
또 나는 어제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또 그래 말했지. 그래 말해서 ‘그것은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버릇을 고쳐 줘야 된다.
고쳐 줘야 된다. 이렇고 이러니까 고쳐 줘야 되지 않느냐?’ 이럴 때에 보니까 ○○○집사님은 거기 대해서 깨달음이 없고 ○장로님은 보니까 깨달음이 있다 말이오. 속에 느껴. 그러면 자기에게 생명이 되어졌지.
여러분들! 모든 것을 가르쳐서 배워서 살리려 하면 살아나야 돼. 공연히 우쭐해 가지고 안돼. 얼마든지 배워 가지고 나그네 세상을 잘 지내야 되지.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왜 두려움으로? 뭣 때문에 두려움으로? 나그네로 사는 생활이 무궁세계에 손해되고 무궁세계에 수입 없는 실패 생활 할까 싶어서 그래 두려워하는 거라. 그까짓 욕심대로 살 때야 얼마든지 뭐이든지 할 수 있지.
그리고 봉사할 사람들 딱 준비해 가지고 오라 하면 해야 됩니다. 여기 ○○○집사님은 자기는 이 건축을 시작하는 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자기는 봉사하겠다고 작정 딱 하고 양성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다 놔두고 그날부터 와 가지고 매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이가 50세가 되도록까지 막 배타고 다니면서 생명 내놓고 짜다라 돈벌이하고 가족들하고 이래 했지마는 그분의 일생동안 산 생활에 아마 이 토막 생활이 제일 값있는 생활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오. 어리석지를 말아야 됩니다.
뭐꼬? 양복쟁이 그 이름 뭐이라 했지? 뭐? 성낙구씨, 저 먼저 성낙구씨 장로가 됐어. 나한테 한번 찾아왔어. 왔기 때문에 ‘성장로님, 성장로님이 한 달에 6천5백원씩 내어서 개척교회 했는데 남천교회 지금 천 몇백 명 주일학생까지 다 하면 근 2천 명이 모입니다.’ 모이는데 자기 일생동안 돈 쓴 것 중에 그 돈이 제일 알차게 썼을 것이오. 6천5백원씩 여섯달 냈습니다.
그게 자기 돈으로서는 일생동안에 쓴 돈보다도 그게 제일 가치있는 돈이고 그것만치, 그만치 자기는 돈을 옳게 못 썼어. 일생동안 주를 위해서 썼다고 해도 다 뭉쳐도 이 6개월동안 뭉쳐 놓은 이것만 못할 것입니다. 내가 자기 돈 허비시키지 않았어. 자기 돈 이렇게 알뜰히 값있게 써 줬어. 내가 큰소리 했어.
이러니까 ‘아이구, 예’ 이러지마는 뭐 장로 감투 써 놓으니까 올 수 있습니까? 다들 이 감투에 붙들리고 저 감투에 붙들리고, 이 줄에 붙들리고 저 줄에 붙들리고, 참 불쌍하고 가련해. 자유하십시오. 양심에 옳은 대로 얼마든지 자유해. 신앙 자유,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 그래도 상관없이 순종할 수 있는 신앙 자유 양심 자유 이걸 가져야 돼.
오늘도 봉사할 분들이 아침 먹고 오면 여반도 남반도 필요합니다. 남반은 또 한번 쓴 재료에 못을 빼야 새로 쓰니 못 빼는 그런 도구를 가져와서 못 빼는 분도 오고, 또 여기 자갈을 운반해 가지고 내야 될 그런 것도 할 분들은 오고, 그래 오고 또 목수 이제 내가 말한 분들은 와 가지고 준비도 해야 되고 이러니까 그래 하십시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