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노선의 이해


선지자선교회 1989년 5월 9일 화전집회

 

본문 : 이사야 3:1-4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 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l5장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세상에서 나왔음이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저희 것이므로 너희를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왔으므로 너희들을 핍박하는도다. 핍박하는 것은 너희들 때문에가  아니고 너희들을 나오게 한 세상에 붙지 말고 세상과 다른 자가 되어 세상에서  나오게 한 내가 너희들을 핍박받게 한 원인이요 또 나보다도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역사를 베풀게 하신 아버지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은 너희들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이요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미워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온 세상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는 길, 세상에서 나오는 그런 길을 걸을  이유가 어데 있느냐? 세상에서 살 때에 세상과 다른 도리 구원 도리가 있어 이  구원 도리로 말미암아 세상에게 핍박이나 미움을 당하는 일이 있지마는  그것보다도 이 구원 도리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저들에게 오는 그 은혜와  구원의 가치는 세상에게 핍박받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권능이 된다. 십자가의 도의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영원 무궁에  얻을 그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세의 고난을 당해도  수지 계산을 맞추어서 십자가의 도를 자기가 따라가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오는  핍박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은혜가 더욱 넘쳐서 그것을 다 메우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하나되어 살면 아무런 애로가 없을 것입니다. 뭐 쪽 믿음으로  믿는다고 아내가 갈빗대가 뿔라진다, 이혼을 당한다, 쫓겨남을 당한다 또 집안에서  다 모듬벌을 받는다, 제명을 당한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불교도 있고  온갖 이종교들이 있는데 그들과 같은 종교를 믿으면 아무 핍박 없고 다 좋아하고  하나될 터인데 왜 독특한 예수교를 믿어 가지고 그렇게 집안을 어지럽게 하느냐?  그러나 이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온 세상과 다른 자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의 목적이 있고, 그분의 목적 달성의 진행의 선택이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예정이 있고, 창조가 있고, 보존이 있고, 섭리가 있고,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이  있고, 중생된 자기 속에 지극히 큰 생명이 와서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믿는 가운데는 두 종류로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 가다 보니까  예배당에 가자 해서 끌려가 가지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이상한  보배를 발견을 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고 사람 속에 참 영생하는 생명과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친히 역사하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당해도 도를 배반치 안하고  도인으로 걸어갑니다. 아마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고, 또 진주를  찾는 자가 암만 돌아다녀도 진주를 못 찾았는데 진주를 만난 비유와 같이, 자기가  인생길을 해결해 볼라고, 이 세상과 죽음과 내세를 무엇인가 좀 그것을 궁구해  볼라고, 찾아볼라고 온갖 이종교에 돌아다니다가 암만 다녀봐도 거게서는 자기가  찾고 있는 그 실상이 없는 것을 깨닫다가 이 기독교의 구원을 깨닫고 예수 믿기  작정한 그런 사람들도 있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산다씽 같은 그런 사람도 불교의 독신자며 또 그는 인도의 왕의 아들로서  굉장한 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아무리 거게서 불교 믿어봐야  만족이 없고 인생은 허무한 것뿐이고 갈 길이 없다는 그것을 그가 깨닫고  낙망해서 자살을 할라고 기차 오는 그 시간에 레일을 베고 누웠었습니다.

그랬는데 차가 곧 올 시간이 될 때까지 이제 그는 레일에 발통이 지나가면 그만  자기 머리는 박살이 돼서 죽어 버릴 터이니까 그래 죽는 게 낫지 하고 자살을  계획하고 그렇게 누웠었는데,  그때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산다성아, 네가 왜. 이렇게 여게서 누워  낙망을 하고 있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인생 길이 없기 때문에 나는  인생을 끝마칠라고 여게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산다성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는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 시로 일어나  가지고 그는 그의 여생을 주님 주신 도를 따라서 구원을 이루어 갈 때에 그뭐  높은 지위층 그 고귀한 층에서 수많은 박해가 있었고 일생을 박해와 박해에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에서 오는 그 박해보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그 위로와 기쁨과  평강과 능력과 환하게 보이는 맺어지는 그 결과를 보고 그는 그런 어려운 걸음을  걸었으나 한번도 기쁨 없이 평강 없이, 유일한 자기가 행복된 자인 것을 깨닫고  감격해서 살지 않는 그런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안  보여서 그는 아마 산 채로 승천했는가보다 이랬는데 그 후 얼마 뒤에 발견돼  보니까 자기가 늘 자주 가는 그 깊은 히말리야 산에 가 가지고 굴에서 기도  하다가 세상을 떠나서 벌써 다 녹아지고 뼈만 좀 남았는데 그래도 그가 입고  다니던 도복이 남아 있어서 산다싱이라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분이 자기 전기에서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만일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주님에게 구해 가지고 십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 달라고 하겠다.'  하는 그 말을 자기가 간증한 것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오는 모든 어려움보다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것이 더 큼을  알았고, 또 자기에게 더 생명과 평강과 행복을 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역사하는 그 역사로 외부의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어서 그는 평생 소원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가 미련하고 우는 것이요, 슬픔 같고 고통 같지마는 그로 인하여  자기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령하고 고귀한 생명과 평강이 오는 것을  체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그는 하늘나라 가서 만일 십자가가 없으면 이런  재미의 수입과 성장과 전진이 없을 터이니까 나는 십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십자가 있는 곳에 살겠다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을 기록한 걸  봤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서 조롱받는 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도가 세상보다  낫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고 이 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이종교들이 많지마는 그 이종교들과 기독교가 비교가 안 되고,  기독교는 영원 자존하신 그분으로 인하여 원인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요, 모든  존재는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됐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원인자인데 이 원인자인 그분이, 모든 존재가 있기 전에 이 기독교의 씨가  나타났고 이 기독교의 이 씨에 하나님의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모든 것이  예정되고 창조했고 보존되고 섭리해서 우리가 아는 것 모르는 모든 존재가 다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있는 이 비밀과 모든 나타나는 이 역사들이 다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는 이 사실인 것을 알고 이 지식을 가지고, 또 자기들이 친히  측량 못 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시는 것과 자기가 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하나님과 자기가 동거동행을 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하신 그 모든 흔적을 표적을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이렇게 해서  기독자들이 다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온 세상과 달리 기독자가 됐고, 기독교라 하는, 예수교라 하는 것은 꽉  찼는데, 예수교에서 모든 예수교와 하나되지 안하고 모든 예수교에게 미움을  당하는, 핍박을 당하는 장로교 교리의 장로교가 됐고, 또 장로교에서 살면 좋을  터인데 장로교와 다른 깨달음이 있고 다른 행정이 있기 때문에 이게 다르니까  둘이 합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게 합해지면 좋지마는, 다른 것이 다  이름만 있고 행사가 없을 때에는 합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다른 행동을  하면 필연적으로 거게는 투쟁이 생겨지는 것이고 분쟁이 생겨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분열이 생겨지는 것은 필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장로교에서 성경 깨달음이 다른 점에서 또 믿는 그 신조가 다른 점에서,  같은 것도 있지마는 같은 것 가운데 다른 것이 하나 있으면 그만치 이색집니다.

이질됩니다. 하나 있을 때에는 조금 다르다고 이렇게 큰 충돌은 없지마는 둘이  달라 셋이 달라 이렇게 점점 깨달음이 다를 때에는 그는 하나될 수가 없어서  이는 부득불 울어도 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모든 교파들이  갈라지게 된 원인입니다.

 이래서, 오늘 이종교는 다 내비두고 기독교가 수많은 갈래길로 이렇게 갈라진  그것은 다 성경은 한 성경이지마는 성경 보고 깨달은 이 교리, 교리라면은  깨달음을 가리켜서 교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라고 하면은 몇  가지가 다 제정되어 있는데 그런 것은 수많은 세월을 거쳐서 사회성과 역사성 그  시간성 그것이 붙였을 때에 일반적으로 교리와 신조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것이 붙기까지는 많은 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파들이 나누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요. 하나인데, 나누어지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교리가 다르고 믿는 그  신조가 다르고, 또 이렇게 행정해 나가는 행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진 것  있고, 또 어떤 교파는 그 도를 전한 그 선교부가, 선교하는 선교 본부가 달라서  선교 본부를 따라서 갈라진 것도 약간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지역이 달라서  지방성을 띠고 갈리진 것도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런 물질이나 이런 무슨  자기네들의 인간들의 그 온갖 인적 요소, 물적 요소 이런 것 때문에 분쟁이 나  가지고 감정적으로 이렇게 나누어진 것도 있습니다.

 있는데, 총공회는 외모는 행정이 달라서 많은 투쟁 끝에, 교리와 신조가 달라서  많은 투쟁 외에 제가 제명을 당해 가지고 나 혼자 믿고 나를 따라오는 교인은  서부교인들 몇 사람 있었습니다. 거게서 이 교리와 신조를 믿음으로 이단이라  이렇게 정죄와 박해를 여간 받는 것 아닙니다. 이러니까 일반 장로교에서 오는  어려움, 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그런 데에서 오는 어려움, 세상에서 오는  어려움은 뭐 그거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거는. 그만 없어져 버렸어.

 이래 가지고 한 사람 두 사람 생겨졌고 한 교회 두 교회 생겨졌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예배당 가지고 교인들 데리고 넘어올라고 하는 거 허락을 안 했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달라서 이렇게 지금 제명 당했고 달리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인데 알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왔다가는 뒤에 나갈 터이니까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거기서 한 사람 두 사람 자라 가지고 전부 개척 교회  해 가지고 지금으로부터 이만치 몇 교회가 됐습니다.

 그동안에 서울에서 OOO교회니 OO교회니 하는 그런 교회는 여게서 나간  사람들이 또 서로 의견이 맞지 안해서 따로 거게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 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우리가 다른 것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여기 하나가 돼 가야 되겠다'  하고 온 교회가 몇 있지 그 외에는 전부 개척 교회로 다 돼 가지고 이 총공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총공회는 교리와 신조 행정 이것이 장로교와 꼭 같이 지내오다가  장로교보다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다른 것 때문에 분쟁이 났고 분열이 나 가지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동소이라 할까요? 많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적다. 장로교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꼭 같은 부분이 있고 거게서 새로운  움싹 같은, 얼마 되지 아니하는 그 교리와 신조가 그들과 달라서 이렇게 갈라지게  됐는데, 이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강해서 들어갈까 올까 옮길까 이렇게  신강하다가 누구든지 총공회에 있는 사람은 핍박도 외로움도, 고독 말이요,  외로움도 있고, 또 실은 활동하는 데에 불편하고 불리한 점이 많이 있지마는  이것은 다 외부에서 오는 것들이요, 이것보다 총공회 교리와 신조와 행정 그  행동에서 오는 것은 더 크고, 또 이 교리와 신조와 행정으로 행동하고 이 교리  신조를 타협하지 안하고 양보하지 안하고 이대로 고수하고 보니 고수하는,  고수한다 말은 굳게 지킨다는 말입니다. 고수하고 보니까 그 속에서 나오는 것,  이것이 밖에 이제까지의 동지 동파로 있었던 거기에서 다르다고 오는 모든  어려움보다 더 크기 때문에 수지 계산을 맞춰 보고 '내 속에서 나오는 이거와  밖에서 들어오는 것과 비교해 보자. 속에서 나오는 것 이것 가지면 되고 밖에서  오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나에게 손해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은 내가 다  감당할 수 있고 소화해서 영양을 삼을 수 있지마는 이 속에서 나오는 새로운  깨달음의 교리와 신조는 배반하고는 내가 살지 못하겠다. 살지 못하겠다.' 하는  이것 때문에 결국은 수지 계산을 많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이렇게 하다가 처져  있는 것이 총공회 산하에 있는 이 모든 성도들이요, 이 성도들 가운데서는 이런  것도 없이 그만 환경과 주위에 끌려서 뭐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가 실은 번민 가운데에서 '아무래도 이 교리와 신조 가지고는 안심이 안 되고  이것은 의문만 생기지 도무지 안심이 되지를 못한다,' 이래 가지고 찾다가 '이거라'  하는 사람은 생명을 줘도 이 교리와 신조는 바꾸지 않습니다. 뺏기지를 않습니다.

 이런데, 이 총공회 산하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 그 교리를 고수하고 자기가 그 교리와 신조를 타협하지 안하고 그대로  지켜서 나가 보는 실험과 경험이 있으면 그런 가운데서 자신이 변화가 됐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얻어지는 그 증거가 체험이 자기 몸에 있을 것이고 자기  행동에서 경험이 있을 것이고 이러니까 이것을 가져본 사람들은 천인 만인이  말해도 요동치를 않습니다.

 우스운 얘기나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지금과 옛날과는 다르요. 옛날은 참 모두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서울 남대문 문턱은 어떤 사람이 있다가 박달나무라  이라니까, 사람이 많이 남대문에는 출입을 하기 때문에 문터박이 아마 여문  나무로 돼 있을 것이다. 박달나무라 이라니까 어떤 사람이 있다가 '네가 잘못  봤다. 박달나무가 아니다. 대추 나무다.' 박달나무보다 대추나무가 더 여물거든.

그러니까 '대추나무가 옳다' 보고 온 사람은 '남대문은 문이니까 문터박이 있을  줄로 알고 있지마는 문터박이 없다.' 이라니까 '문 쳐놓고 문터막 없는 것이 어데  있겠느냐? 너는 보얀 거짓말이다. 알지도 모르는 게 자꾸 뭐라고 말하고 있노?'  이렇게 만인이 다 그를 몰아대고 한다 할지라도 실지로 가 보니까 남대문  문터박이 없는 것을 본 사람이 많은 사람이 말한다고 자기가 이제 보고 직접  만지고 체험한 확고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요동이 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총공회 교리와 신조, 예수교와 꼭 같습니다. 예수교에서  장로교가 좀 다른 거 있고,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다른 거 있고, 또 장로교에서  총공회는 또 총공회대로 다른 부분 있고, 있는 그것을 자기가 이대로 지키고  살아서 실지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거, 경험이라면은 자기가 모든 행동을 할 때에  행동에서 '과연 그러하구나' 깨달아 느낀 걸 가리켜 말하고, 체험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 안에 확실히 깨달아지는 그런 증거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  사실을 자기가 본 사람이야 천인 만인이 이단이라 한다고 거기서 요동이  되겠습니까? 모르고 말하니까 그 사람들 위해서 기도나 할 것이고 '저렇게 모든  사람이 모르고 이단이라 하는데 나같은 둔한 놈에게 어떻게 알려 주셨습니까?'  감사할 것뿐이지 거게 피동으로서 요동이 되겠습니까?  이런데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총공회 때문에 총공회로 인한 모든 핍박과 고난,  손해는 보고, 손해는 보고 이 총공회 교리와 신조 행정으로 인해서 유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거는 참 백해무익입니다. 손해만 보고 속에 유익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이 총공회 간판 붙이는 것이 부끄럽고 주저주저 하고 이거 부끄러우니까  그것은 언젠가 벗어버립니다. 부끄러운 것은 벗어버려요. 부끄러운 것은 벌써  양심상 나쁘다고 틀렸다고 추하다고 생각하는데 언제 벗어도 벗지 시간 문제지  안 벗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공연히 외부에서 오는 손해만 보고 그 손해보다 더 큰 유익이 속에서  나오는 그것을 봤으면 그것이야 손해를 보일라고 외부에서 오는 박해가 올수록이  더 고량진미같이 맛이 있고 재미있고 감사하고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셨는가? 하고 기쁘고 즐겁지마는 외부적인 손해보고 내부적인 유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은 참 안타깝고 억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에  자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런 사람은 빨리 장로교와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가 다른 게 뭐인가?  요것을 찾아 가지고 성경으로 구별해 보든지 자기가 그리 안 하면 실지로 행해  가지고 경험에서 자기가 얻은 증거를 받든지 체험에서 얻은 증거를 받든지 이  증거를 받아 가지고 확고하게 서든지, 공연히 유익은 못 보고 모든 것을 자꾸  손해만 보고 있는 사람은 손해 안 보도록 빨리 옮겨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거  내가 꼭 바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못 깨달아도 여기 붙어 있거라' 그렇게 억지로 붙들어서, 남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하고 싶은 그런 죄를 범하기는 싫습니다. 또 내가 확실히  유익을 봤고 이것이 우리가 갈 길이라 하는 것을 깨달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삐꿔  그란다고 해 가지고 '갈라면 가라' 그 소리 할 수 없고 끝까지 '이 길이 옳으니까  네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행해서 한번 깨달아 봐라.' 그렇게 권면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제가 늘 말하기를 모든 인간이 보배롭게 생각하는 모든 보배는 다  이것은 자기 몸 밖에서 다 얻은 것이고 들어온 것이다. 권세도 지식도, 박사되는  지식도, 또 모든 정권자 되는 모든 권세도 전부는 자기 몸 밖에의 그 피조물들의  혜택을 입어 가지고 그와같이 되는 것이지마는 우리 장로교 중에도 이  총공회라는 우리들은 우리의 소망이 다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안했고 다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것들이 나왔다' 처음에 나올 때는 보이지 안하지마는 얼마 안 가면 한 사람 본  것이 두 사람 보고 열 사람 보고 자꾸 보여지게 된다.

 이러기 때문에 보이는 이미 되어 있는 이 모든 피조물로 말미암아 겉어머리서  들어오는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껍데기서 들어오는 그거는 껍데기가  조석으로 변해지는 것이니까 인간도 변해지고, 뭐 학자도 변해지고, 인격자도  변해지고, 영웅도 변해지고, 도덕가도 변해지고 조석으로 변해지니 거게서 오는  것을 가지고 위로를 받을라고 생각해 보니까 조석으로 변해지니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견고성이 없습니다. 또 그 자체가 안 변해도 외나 주권자 큰 분이 위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휘떡 뒤벼뜨리면 금방 용사가 송장이 돼 버리고 금방  느부갓네살이 풀을 먹는 그런 자가 되어지니 그분이 있는 것을 알고 보니까 뭐  이 피조물 그런 것들에서 오는 것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얻는 것은 다 자기 안에서 얻습니다. 어데서 얻습니까?  생각에서 얻습니다. 자꾸 생각하면 생각에서 나옵니다. 생각에 뭐이 들었는데?  생각에 전능의 진리가 들었습니다. 진리에서 나옵니다. 진리 안에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거게서 나옵니다.

 말도 같잖은 소리, 무슨 속에서,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나오느냐고. 생각하고  보니까 담대함도 나오고, 평안도 나오고, 바른 옳고 그른 것도 나오고 정평 정가도  나오고, 모든 것이 환하게 나오고 '그라면 그거는 네 주관적인 모든 역사가  아니냐?' 주관적인 역사만 아니라 그 나오는데 객관 역사가 와 가지고 내 주관을  통해서 나타나서 내가 평생 처음으로 보는 기적과 모든 표적들이 자꾸 나오는  것을 이와같이 체험해서, 내가 무슨 일을 아무리 할라고 해도 안 되는데 그분에게,  생각해 보니까 그분에게 맡겨 놓고 그분 시키는 대로 하라.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도하고 시키는 것은 그것은 곧 실상이라, 하라는 대로 해  보니까 돈도 되고, 권세도 되고, 목회도 되고, 평강도 되고, 송사에 승리도 되고,  내 사람의 변화도 되고 모두가 되는 것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천치 바보 같은 그런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라 한다고 해서 그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은 피조물의 요소가 아닙니다. 피조물의 요소는  그것은 다 절단날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요소는 우리 구원의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만 피조물의 요소가 되는 첫째 아담의 자손인 내가 신적 요소가  되는, 완전 요소가 되는 둘째 아담의 자손이 된 이것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성경에서 깨달았고 이대로 행해 보니까 실상이 나타났고 이렇게  경험한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 안에서 해결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일 두려운 분도 자기 몸 밖에 있지 안하고 자기 안에 있고, 제일  나에게 유익이 있는 필요있는 분도 내 안에 있고, 참 나를 옳고 바르게 참되게  교훈하고 지도하고 지식을 주는 이도 내 안에 있고, 큰 분도 좋은 분도 두려운  분도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분도 내 안에 있어. 이러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모든  행복을 구하여 찾으라. 그렇게 깨닫고 믿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은 하나라 이렇게 봤습니다. 구원은 하나로 봤는데 구원을  얻은 것은 '회개하고 구원얻으라. 회개하고 구원얻으라.' 이렇게 말하니 이제는,  어떤 사람이, 내가 김천 지방에 가 가지고 집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아주  설교를 하니까 그 뜻뜻한 남자인데 좀 세상적으로 실력이 있는 사람 같애요. 아,  설교하는데 양반질을 딱 하고 동개 앉더니마는, 앉아 가지고는 눈을 딱 부릅뜨고  천상 뭐 내게 대해서 무엇인가 지금 '저 도둑놈' 하는 것같이 그렇게 막 가지고,  얼굴에 그 모든 피부가 그래 돼 가지고 양반질을 딱 하고 있습니다. 그래 설교  하니까 비쭉비쭉하며 그라고 있어. 그때 마침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한 육칠 년 전입니다. 이라면서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 암아 얻는데 영은 얻었고 우리는 심신의 지금 성화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이런 것은 성화구원이요 이런 것은 기본구원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는 것은 이것은 회개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은 건설구원  성화구원이지 기본구원은 아니다.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요, 인간의 행위는 하나도 거게 조그마치도 붙이면 더러워져서 이  구원은 깨진다. 기본구원을 얘기 하니까 이 사람이 얼굴이 환해지더니마는 딱  무릎을 꿇고 그만 앉아 가지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뭐 거기서 그라고 있어. 저  사람이 어짠 일인지 나는 몰랐지.

 설교 딱 마치고 나니까 강사방에 뛰어 들어왔어. 무릎을 꿇고, '내가 이제  살았습니다. 내가 이 OO교파인데 내가 OO교파에 이런 강사 저런 강사 양사방  돌아다녀도 회개하면 구원 얻는다 해서 나는 구원이 소원이라' 회개를 하고  이제는 구원 됐다 생각하고 딴 집회 가면 또 죄가 나오니까 또 회개할 것 있으니  이거 끝이 없고 이래서, 그것은 간증을 안 해 그렇다. 간증을 해야 된다 이래서 뭐  내가 뭐 남한테 말 못 할 그런 오만 죄 우사를 무릅쓰고 전부 오만 죄를 전부  자복 다 하고 간증 다 했습니다. 이래도 또 뒤에 다른 집회 가서 또 나오니까  이거는 이 기독교라 하는 것은 이 거짓말 모두 궤변가들이 기만자들이 돈 뺏들어  먹을라고 꾀워 가지고 하는 이 모든 사기 협잡꾼이다 해 가지고 내가 전부 예수  믿는 목사는 전부 도둑놈이라 이래 가지고 내가 지금 속으로 분해서 이래 가지고  있는데 언젠가 이게 해결이 되면 막 나 죽을 요량하고 막 죽여 버리고 나도 지금  죽을라고 이렇게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내가 해결이 됐습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 없으면 그것은 다 거짓말이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분리해야 그 성경에 해석이 되어 지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해석 안 될 그런 성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반대하고 '구원이면 구원이고 하나지 뭘 둘 가지고  말하는가?' 하는 그 사람들이 그 성구를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나는 의문입니다.

분명히 해석을 못 할 것이고 거게는 뒤숭뒤숭해 가지고 '뭐 이거는 이렇게도 말한  게 이 가정적으로 이래 말한 것이다. 또 그렇게 말만 한 것이다.' 말만 하면,  행하지 못할 것 말만 하면 하나님보다도 더 협잡군이 어데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오. 말한 것은 꼭 할 수 있기 때문에 했고 해야 되고 안 하면  심판이 있습니다. 건설구원이니 기본구원이니,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 중생된 사람은 범죄해도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중생된 사람은  심신의 육이 있기 때문에 범죄하는 것이지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

이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영생으로 중생을 했다고 성경에 말했다. 범죄하면  어찌 안 죽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면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해서,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 데 대해서 OO교과에서 다  정죄했습니다. 전체가 이단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노회적으로 정죄하고 정죄해서  다 가결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전언해 말 들으니까 여기 박복달 선생님이라는 그분은 내가  존경하는 분이요 참 신앙이 좋은 분인데 그분이 말하기를, '지금도 우리  OO교파에서 그라면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는다고 그렇게 말하느냐? 이거는  틀렸다. 틀렸기 때문에 이거는 고쳐야 되고, 고치도록 하라.' 고치기야 우리가 뭐  고칠 필요가 있는가? 자기네들이 고치면 고치지. 이 OO노회서만 그렇지  OO교파에서는 안 그렇다 하니까 '아니, OO교파에도 그래 했다.' 그런 거 하나만  해도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맞은데 어떻게 되겠소? 시비가 나는데.

 '하늘나라는 구원을 얻었으면 꼭 같은 영광의 구원이지 하늘나라 구원얻은 자의  구원에 차이가 있다. 천국 가 가지고서도 구원의 영광의 차이가 있다.' 하는  이것도 이단으로 정죄돼 가지고 시비가 났던 것입니다. 지금은 벌써 그래도 한쪽  구석에서 말해도 옳은 것은 결국은 지붕 위에서 외쳐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늘나라의 기본구원은 차이가 없지마는 건설구원의 영광은 차이 있다 하는 것이  이것이 거의 다 일반화되도록 알아졌습니다. 이라는 데는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그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라 한다고 해 가지고 한창 또 이단으로서 많은  정죄가 됐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지마는 인성은 피조물이라 하는  데 대해서 많은 말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은 이제 예수님의 인성을  피조물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마 지금은 별로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뭐 다른 그 교리와 신조 때문에 우리가 애로를 당하는 일이  많아서, 지금 믿는 사람들이야 벌써 백여 교회가 됐으니까 지금은 벌써 총공회라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정죄하고 이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오는 문서는 전부 총공회에 있는 것을 다 기록하고 언론 기관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교계에서든지 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는데 인정하기 전까지, 여기  처음에 지금 칠십 세 이상, 칠십 세 이상 되는 교역자들 이분들은 욕 많이  얻어먹고 애로 많이 당했습니다. 핍박 많이 받았습니다.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것이 곳곳에서 이단이라고 정죄받지 안했습니까? 정죄받으면 그거 가지고 가  가지고 '이렇고 이런데 어떻게 이런가?' '그러면 이단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다  그걸 설명을 해서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이 '그라면 잘못 알고 했다.' 이렇게 해서  고쳐진 것이 많아서 지금은 총공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아주 무식한  사람, 저 심심 골짝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말하지 일반으로 지금 좀 기독교  사회성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총공회가 이름을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을 잘못 하면  욕이 돌아와서 박살이 날 것이고 행동을 잘해서 잘하면 유명해서 상급이 돌아올  것이고 이러니까 총공회서 행동하는 거 나쁜 것도 물론 많지마는 좋은 것도  있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아까 그런 말을 해요. '이제 총공회는 조금만  있으면 총공회 이 간판의 덕을 보지, 덕을 보지 손해볼 거는 다 지나갔다. 이제는  덕볼 때다. 조금만 있으면 덕본다.' 그 말이 맞아요? 이 총공회가 이제까지만 똘똘  뭉쳐서 하나가 돼 가지고 이 총공회 교리와 신조 행정대로 했으면 세계  제일입니다. 내가 큰소리 합니다. 이렇게 나가면은 '야, 총공회가 그거 참, 예수  믿으면 총공회 예수 믿어라, 총공회 교리 신조가 제일이다.' 이렇게 될 터인데, 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귀로만 들어 가지고 앵무새  모양으로 입으로만 가서 말을 하니까 교인들은 듣고 좋아하지마는 제 속에  증거가 없고 제 속에 확신이 없어. 이래 놓으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뭐 하나가  되지 않고 뒤죽박죽 이래 가지고 서로 찌덩찌덩 이래 쌓고 자꾸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모두 총공회를 지금 주목해 보고 있습니다. '야, 저것들도 가보니까  내부를 보니까 찌덩찌덩거리고 서로 왕될라고 하고, 서로 머리될라고 하고, 서로  감투 다툼을 하고 있더라. 내나 그것도 뭐 별것 뭐 있느냐? 그뭐 다 그거다.'  이래 가지고 이 총공회, 하나님이 모처럼 깨닫게 해 주시는 그 독특한 교리와  신조, 행정, 전교회는 종다수 가결인데, '종다수 가결은 안 된다. 진리 가결이어야  된다.' 이거는 세계 교회에 하나뿐입니다. 자, 세계 교회에 회와 모아 가지고  종다수 가결 안 하는 회의가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종다수 가결을 하는  회의는 회의가 생겼으면 생긴 지 일 년 되면 그만치 타락하고 이 년 되면 그만치  타락하고, 왜? 다수 가결했으니까 다수가 다 끌어 나가고 있으니까 바로 깨달은  게 다수가 될 리는 없는 것이고 바로 깨달은 게 소수지 다수가 되겠습니까?  다수를 따라가니까 진리 안 따라가니까 그거는 타락하기 마련 아닙니까? 어떤  단체든지 단체가 존재하고 난 다음에 그 역사를 통해서 타락되지 안하는 그  단체가 어데 있습니까? 그 회의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단연코 말합니다.

이런데 이 안에서 직빡직깍 해 가지고 이러니까 '야, 별수 없다.'  '그 뭐 좋은 게 뭐 있는가?' 모두 들으며 갈급해 모두 찾고 있으며 '이 어데로  가야 참 길을 갈까?' 이라고 있는데 가 보니까 '아이구, 그것도 내나 가 들어  보니까 뭐 거기도 감투 싸움하고, 거기도 지금 그뭐 다 같은 줄 알아도 보니까  속에 내용은 다 다르고. 겉어머리 말은 그렇지만 다 깨달은 교리와 신조는 다  다르더라. 이 사람 생각하는 거와 저 사람 생각이 다르더라.' 이래 가지고  총공회에 하나님이 주신 이 교리와 신조의 독특함을 이걸 가루고 있는 그자가  누구냐? 그자들이 누구냐? 그자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하겠소 진노하겠소!!  진노하겠소 축복하겠소! 이거 깨닫고 살아야 돼. 아직 다 산 것 아니야. 세월이  청청해. 내일이 어찌 될지 몰라. 모레가 어찌 될지 몰라. 그때, 공연히 총공회  때문에 욕은 얻어먹고 유익은 보지 못하니까 안타깝습니다. 이 유익을 보면은 욕  얻어먹는 것보다 몇백 배 더 유익이 있으니까 욕 얻어먹는 그걸 다 삭제하고도  수지 계산 맞춰 놓으니까 훨씬 유익이 있기 때문에. 이제 핍박도 심하지마는  핍박보다 주님의 위로는 더 넘쳐서 그것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다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3장 l절 어제 말씀했는데, 요것도 우리가 성경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왜 성경을 마구 도마 위에 놓고 난도질을  하는가?' 이 말을 하는 소리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저와 거기 있을 때에 같이  있던 목사님들이 '왜?'-그때 내가 조사인데-조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마 위에  갖다 놓고 막 칼로 난도질을 해 재낍니까? 이게 죄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실을 다 기록할라 하면 온 세상에도 둘 곳이 없을 만한 그런 많은  양을 간추려서 신구약 육십육 권에다가 축소해서 가르쳤기 때문에 이 속에는 그  많은 양이 들어 있고, 또 실상은 한 절에는 모든 다른 성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절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성경은 말하지 안할 수 없고 말을 해야 그 한  가지로 표현하는 그 성구에 대한 뜻을 알고 알아야 우리가 행하고 행해야 구원이  되기 때문에 이거는 부득이 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을 해 나온 지가 벌써  수십 년입니다.

 이러니까 첫 시간에 말한 대로, 여러분들이 어떻게 믿을 것이냐? 어떻게 믿을  것이냐? 여게서 배워서, '이 교리와 신조는 이 깨달음은 일반 교회와 같다. 이  깨달음은 일반 교회와 다르다. 이 깨달음은 역사에 있는 깨달음이다. 이제까지는  이 깨달음은 역사에 없는 새로운 깨달음이다.' 이것을 구별해야 하겠고, 구별해서  다른 걸 말하면 넙죽 받아 먹을 게 아니라 그것이 죽고 사는 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 생사가 거기에 기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치 중요한 것이니 벌로 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심신을 기울여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바로 구별  하도록 노력할 것이고, 구별했으면 생명도 바쳐야 되고 생명 안 바칠 것으로  구별한 것은 잘못이지. 생명을 바칠 것으로 구별해도 생명을 바칠 만한 옳은 것은  옳은 것이지마는 '나는 약해서 못 바친다'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성구가  어데 있소? 이 성구가 어데 있어? 마태복음 l0장에 있어, 마태복음 l0장에.

 '저 사람의 말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 옳다. 바르다.' 인정은 해도  저는 살지는 못합니다. '옳은 것을 이거는 참된 옳은 교리요 신조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행하지는 못해도 인정하는 자를 가리켜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행하지 못해도 그 사람은 교리와 신조를 알았기  때문에 못 행했으니까 '내가 이거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사유함을 받아서라도  달성을 합니다. 행하지 못하고 사유함을 받아서라도.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그자는 제가 그 것을 틀린 것을 만족히 여기고 잘됐다 하는 것이지 틀린 것에  대해서 사죄를 받을 기회가 있습니까, 받을 지혜가 있겠습니까?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 대접한 거, 제가 의인이 못 돼도 '저는 참 의인이다. 저  사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올바른 걸음을 걷고 옳게 바로 하는 것이다.' 옳게  하는 것을 옳다고 인정을 하고, 행하지 못해도 인정하는 그자는 의인의 상에  동참한다 그 말이오! 알고 여러분들이 사십시오!! 공연히 창기 모양으로 여게 저게  그저 팔방 미인으로 이 사람 좋게 하고 저 사람 좋게 하고 똑 창기 모양으로  이렇게 행동하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비참해지지 말고.

 그러니까 옳고 바른 것을 찾도록 애를 쓸 것이고, 찾으면, 옳고 그른 걸 어떻게  찾을 것인가? 못 찾아. 찾는 길이 뭐? 옳고 바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찾을라면 어떻게 돼야 돼요? 몇 가지 해야 돼? 세 가지 순서를  거쳐야 돼. 하나는 산 제물이 돼야 돼.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돼요.

세상 따라가지 안해야 돼. 안 믿는 게 세상 아니라 속화된 교회도 세상이라. 세상  안 따라가야 돼. 마음에 변화받는다, 변화가 무슨 변화인데? 일편단심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찾으려는 그 단일심 그것이 변화된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져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찾지, 여기 와 가지고 '이제 교회 가  가지고 또 무슨 설교를 할까?' 여게 지금 상품 받으러 온 사람 많습니다. 상품  받으러. '요거는 됐다. 요거 가 가지고 할 때는 주먹 한번 쾅 뚜드리고 어떻게  하고 했으면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 가지고 며칠 동안은 나를 대접하겠다.' 요래  가지고 상품 받으러 온 사람 있고, 또 이제 예수 믿는 오묘한 뭐 지혜 있는 그런  말을 배워 가지고 할라고 하는 사람들, 네 소유와 몸과 생명을 어데다가  바치겠느냐? 네 소유와 몸과 생명을 어디다가 바치겠느냐? 세상 학문에  바치겠느냐?' '안 된다. 그까짓 거 거게 내 생명 바치기는 싫다.' '그라면 애민족에  바치겠느냐?' '안 한다' '애국에 바치겠느냐?' '안 한다' '이십세기의 문화  공로자에게 바치겠느냐?' '안 하겠다. 나는, 인생이 조물주가 인정하는 옳고 바르고  참된 길, 영원 무궁의 모든 것이 벌거 벗은거와 같이 나타날 때에 그때에  하나님도 칭찬하고 모든 피조물도 다 칭찬해서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 길을 나는 찾고 싶다.'  이 길은 올바른 교리와 신조대로 들어가는 것 외에 딴 길은 없습니다. 이 길을  찾으려고 여게다가 가치를 둔 사람들은 산 제물로 자기를 드려놓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함을 받은 마음 이 마음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다 알 수 있습니다. 다 알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기독자가 어데까지 노력을 하든지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짜배기 은혜를 공으로 받는 노력이지 그것을 조성하는 노력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목숨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교리와 신조, 올바른  행정에는 부모도 없어! 형제간도 없어! 생명도 없어!  옳고 바른 것이면 거게다가 기울여 살기 때문에 인민군의 총칼 앞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고, 온 세상이 다 배반하는 데도 당당히  신사참배를 죄라고 정죄하고 거게서 신앙을 지켜 나갔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지 않는 교리 거게다가 자기 생명을 바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이것이 개죽음 하는 것인지, 속는 죽음인지, 참 죽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는 그 교리와 신조에다가 생명 바칠 사람 있소? 바칠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요것은 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에 이 생명, 예를  들면은 백 원짜리 생명 바쳐서 억억만 원도 더 수익이 되는 이 교리 신조를  지키는 것이라고 이렇게 수지 계산에 유익이 된다고 깨달을 때에 생명 안 바칠  사람 있습니까? 생명 바칠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다 바치지. 그런고로  우리는 아무리 친해도 교리와 신조에는 에누리 못 하겠습니다. 아무리 친밀해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단일 행정에는 우리는 위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도 깨달음이 다른 것을 알아야 되겠어. '요, 해석이 이거 너무  지나치다. 너무 지나치다. 일방적이다.' 그러면 '그라는가보다' 하고 지나  보내겠습니까? 자기로서는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왜? 내 여생이 거게다 바쳐  가지고 살 이것을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기 때문에. 내가 생명을 어데다가  기울일랍니까? 내 소유와 몸을 어디다가 기울일랍니까? 내 소유와 몸을 어데다가  투자하겠습니까 하는 투자할 곳을 찾는 것이 우리가 지금 교리와 신조를 배우는  것인데 이 자기의 전부를 투자할 이 교리와 신조를 아무것이나따나, 아무데나따나  그만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쳐요, 투자해요?  그 아이를 좀 서늘하게 부쳐 주고 좀 달래요. 그래 울어서 그라면 아이도 은혜  안 되고 다른 사람들도 또 은혜 받는데 지장되고 이러니까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젖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다' 했어, 잘못하면 화가 있어. 또  말하기를 '여인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렇게 말했어. 이러니까 꼭  젖 안 먹이는 것같이 해야 돼. 젖먹이는 아이가 없는 것같이 돼야 돼. 어데 있노,  어데? 그러니까 아마 이 말 하니까 어머니가 '이놈의 새끼 때문에 또 나 지금  꾸중 듣는다' 해 가지고 마귀 놀음 더 하는 모양이로구만.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얘, 이거 너도 복받고 나도 복받구로 어짜든지 고요히 해라.' 하고 기도하고 이래  주면은 괜찮지. 그 아이가 어데 있어? 그 아이가? 그 아이가 그래? 좀 부쳐 줘,  그래. 좀 부쳐 주니까 가만 있네. 아이에게 마귀 들어갔을 때에 어머니가 딱 끊어  버리면 아이의 마귀가 달아나 버립니다. 아이 마귀가 어머니에게도 들어가면 큰일  나.

 요것을 요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이름을 가리켜서 성도라 이랬습니다.

성도라. 성도라 말은 구별하는 무리라. 이거는 뭐이든지 자꾸 따지고 구별합니다.

이런가 저런가 자꾸 구별해. 구별하는 그것이 우리 성도라. 그러기에 레위기 l  l장에 보면은 새김질 하지 않는 짐승은 부정하기 때문에 거룩한 자들이 먹을 수가  없어 뭣이든지 구별하지 안하고 바로 듣고, 구별하지 안하고 접하고, 구별하지  안하고 받고, 구별하지 안하고 던지고 구별 없는 행동은 다 그것은 부정합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위에서부터 죽 읽어내려 보면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하는 것을 위에 다 기록했는데 여게 와서는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요렇게 해 놨습니다. 여게 주라 말은, 우리를 일차 창조도 내가 없는 데에서 나를  있게 하신 분이요, 또 타락한 것을 이차 창조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를 이제  온전자로 있게 하신 분이요 두 가지, 두 가지 하신 분이 우리 주라. 이 두 가지  하신 분이 우리 주라. 두 가지로 주라. 우리를 책임 맡으신 주, 우리에게 있어야  될 모든 지도나 은혜나 필요한 것을 다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게 주시는 주, 나를  안보해 주신 주, 이분이 이렇게 하셨는데 이렇게 하셨는데 이분이 만군으로  나타난 것은 뭐입니까? 만군으로. 만군으로 나타난 것은 싸움쟁이로 나타났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만군으로 나타났다 말은 전투할 하나님으로 나타낫습니다.

이 주가 전투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대적해서 '너 한번 싸워 보자' 하는 우리를  원수로 삼아 가지고 우리를 대적하시는 이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꿔졌습니다. 주가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꾸어졌어.

 이렇던 주가 이런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꿔졌는데 그분이 또 여호와께서 말했어.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라 말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으로 모든 계약을 선포해  놓고 이 계약대로 처리하시는 불변의 하나님이라 그 말이오. 어떻습니까? 주,  만군, 여호와께서. 우리가 이 주님이 우리에게 한없는 긍휼과 은혜의 사랑의  주님으로 나타나 역사하신 주님이 하다 하다가 안 들으면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만치 미워하고, 열심을 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던 거와 정반대로 우리를  멸하시는 일에, 우리를 대적해서 멸하시는 일에 그전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은혜  베풀 때의 열심과 같이 정반대로 우리를 멸하시는 데 열심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하는 것을 다른 성경에 많이 말해 놨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우리의 전부가 되신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는 만군으로 나타났으며 만군으로 나타나 가지고 이 계약서를  가지고 자꾸 따져댑니다. '네가 계약에 이렇고 이렇고' 자꾸 계약을 가지고  따져대요. 계약을 가지고 따져서 계약대로 처리하겠다 하는 그것이 여호와라 그  말이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것을 이렇게 깨닫고 믿는 것이 우리 총공회  교리입니다. 이렇게 깨닫고 믿을라고 하는 것이, 못해도 우리가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 믿을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라. 이러니까 이것을 깨달은 자는 배반할  수가 없고 깨닫지 못한 자는 이 까다로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 그런데 성경에  없는 것을 지나치게 해석했으면 그거 정죄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정죄받아.

정죄받아. 이제 정죄받아 심판받아서 구원이 다 절단날 것인데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한테 묘한 말 하기 위해서 하면은 미친 인간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하는  이 말은 '내가 너에게 이런 은혜를 베푼 나인데 이제는 내가 너를 대적하겠다.

대적하되 내가 벌로 무조증으로 대적하지 않겠다. 너희에게 계약을 선포해 놓고  계약대로 이행하는 그거 계약을 준해 가지고 너에게 내가 심판하고 대적하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되'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말기에는 이것뿐입니다.

예루살렘 유다뿐이오. 거게서 열 지파는 다 도망 가 버렸고 이제 베냐민 유다  지파 둘 있었는데 예루살렘은 중앙청이요 그 다음에 거게 소속한 그 지방은  유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선포한 계약은 진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고, 개인에게도 해당되고, 단체에게도 해당되고,  시대에도 해당되고 다 해당됩니다. 요 심판하는 이치를 말했기 때문에 이치는 그  이치에 맞은 일이 있는 데는 그 이치는 따라가는 것이고 그 이치를 범해서 벌할  때에는 그 따라가는 것이, 이치는 지역에 제한 받지 않습니다. 국경에 막혀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막혀지지 딴습니다. 사회에도 막히지 않소. 어데든지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검이라,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이한 날선 검이라'  못 들어갈 데가 없어. 적용 안 될 데가 없어. 다 적응 돼. 어데서든지 다 적응 돼.

 여게서 의뢰하며 의지하는, 다른 것들을 의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분개하셨습니다. 의뢰한다 말은 의지한다 말과 다릅니다. 의뢰한다 말은  그것에게 내가 받았다 그 말이오. 의뢰한다 말은 내가 그것에게 받았고 또 앞으로  배울라고 지금 소망하고 있는 그 작용사를 가리켜서 의뢰라 그렇게 말합니다.

의뢰. 그에게서 내가 받았고 그를 의지하고 하는 것을 의뢰라 하는 것이요,  의지라는 것은 내가 받은 것은 말하지 안하고 내가 지금 모든 대외를 상대할  때에 뭘 배경으로 삼느냐 하는 배경으로 삼는 것을 가리켜서 의지라 그렇게 말  합니다.

 그러면 의뢰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절단을 내겠다 그 말은  우리들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얻어 가진 것이 아닌 다른  데에서 얻어 가졌다. 이것은 다론 데에서 받아 가졌다. 다른 데에서 얻어 가졌다.

이렇게 하나님 외에 딴데에서 받아 가졌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의뢰하는 것들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첫시간에 말하지 안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제 자기의 실력으로 했다, 어느 인간의  배경으로 했다, 협조로 했다, 뭐 과학의 해택으로 했다, 정권의 해택으로 했다,  시대의 혜택으로 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결론에 말하기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데 있느뇨'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의뢰하는 것,  의뢰하는 것. '나는 이거는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했다. 내 지혜와 총명으로 했다.

내 열심으로 했다. 내 명철로 했다. 내 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했다. 머리 싸짜매고  대학에 공부한 이 지식으로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유별히 특수한 그런 은혜를  입었다. 후천적으로 모든 것이 조건 좋아서 수양 잘했다.' 어쨌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 한 분이 했습니다. 그분 한 분이 없는 가운데서 만드셨고 그분 한  분이 모든 것을 운영하시고 주권하십니다.

 따라합시다. 주권! 개별 섭리! 주권 개별 섭리!  이것을 요렇게 믿는 교리와 신조도 우리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입니다. 뭐  공부하는 사람들 많이 있으니까 다 알 것이오. 하나님의 주권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의 개별, 개미 수염 하나를 요리 하고 요리 한다. 먼지 하나가  날아간다. 지극히 작은 그런 것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까지 다 주님께서  주권하셔서 그런 것을 섭리하신다.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 교파가, 주권은  믿지마는 이 교파가 별로이 나는 못 봤습니다. 나는 들어 보지 못했어. 이것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예정론은 다릅니다. 모든 신학자들 에정론 한 것 내가 다는  안 읽어도 간단하게 조금 봤는데 모두 다 예정론 말한 것은, 우리 한국의 유력한  학자들의, 신학자들의 예정론 말한 것은 기독자의 구원에 대한 강령적인 그런  것은 다 예정했지마는 불신자에게 대한 모든 것은 예정되지 안했다. 예정돼도  강령적으로만 예정됐다.' 하는 것이 오늘까지에 다 에정론이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는 그래 믿지 않습니다. '무신론자 김일성이의 그의 한 마디 행동하고 안 하는  그 모든 것 그것도 다 주님께서 시정한 범위 내에서 예정대로 제가 움직이지  예정을 탈피해서 예정을 벗어나서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도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분의 주권에 따라서 피동으로 되어지지 제 능동으로 하는 거 하나도 없다.'  요렇게 믿는 게 우리 믿는 것입니다. 우리 예정입니다. 우리 예정론과 일반 교계  예정론과 다르기 때문에 일이 났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이 성구도 해석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받아 가진 거, 내가 나 되어 있는 거, 내게 모든 머물고 있는 모든 소유, 형편,  사정, 모든 것 좋은 것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시지 안한 것 하나도  없다. 내가 싫어하고 못 마땅히 여기는 것 모든 것 그런 것 주님이 주시지 안한  것 하나도 없다. 내가 좋아해서 달게 여기는 것도 주님, 내가 몰라서 쓰게 여기는  것도 주님, 모든 것이 합동하여서 하나님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 소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니고 당신의 소원의 그 뜻 당신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도 하나님이 안 하신 것 없고 어떻게 우리가 이해되지 안해도 내  구원을 위해서 있지 않는 세 하나도 없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있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는 이것을 믿는 것이 유리  교리와 신조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리요.

 이러기 때문에, 이 교리를 제가 알아서 요대로 믿고 요대로 행하면 거게서 꿀이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능력이 나와서 세상이 아무리 욕하고 '이거는 이단이다'  해서 교인들 못 오구로 하는 그 소리보다도 억억만 배도 더 되는 수입이 있기  때문에 이걸 버릴 수 없습니다. 그자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자에게 목회가 되고  하나님께서 양떼를 보내 주십니다 이것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무슨 목회하겠소?  암만 제가 한다고 해도 너는, 너는 그 속에 초자연의 능력은 오지 않는다. 다른  일반적인 하나님 은혜와 능력은 오지마는 독특한 총공회 교리와 신조대로의  은혜와 능력은 네게는 안 온다. 그라면 장로교에 가 있으면은 그냥 잘 지내고  좋을 것이고 다 협동받을 터인데 뭣 때문에 특별한 은혜도 받지 못하면서  핍박받는 그런 고독의 걸음을 걸을 이유가 뭐이냐? 고독의 걸음을 걷는 것은  고독보다도 더 유익된 것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것도 안  나오는데 그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이래서, 의뢰하는 것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은 '주님 한 분이 나에게 주신  것이니 필요 있어서 주셨다. 어데다가 쓰라고 주셨을까? 이분이 나에게 한 분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나에게 주셨다.' 주셨으면 그 다음에는 이분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주셨으니까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거는 암만 해도 소용이  없는데?' 내가 좀 더 생각해서, 소용없는 거 없고,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내가 어떻게 활용을 해야 하나님이 나에게 모처럼 선물을 주셨는데 이 선물을  바로 이용해 가지고 그 선물의 효력을 내가 보고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기쁘게  만족케 할까? 어떻게 활용할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라면 이것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그분에게 나 혼자 하고 말까 그분에 같이 나눠  할까?'  여러분들, 어떤 부자든지 그, 부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가난한 모든 자의  모가치를 그에게 건서 그가 혼자 담당해 가지고는 나눠주기 때문에 저는  나눠줌으로 제 본분을 감당하는 것이지 제것 가지고 주는 것 아닌 것입니다. 안  하면 도적질이 되고야 맙니다. 제것으로 주는 줄 알면 교만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이게 맡기신 그분의 목적이 있고 소원이  계시니까 거게 응하지 못하면 큰일났다.' 하는 그자는 필연적으로 겸손해지는  것이고 진실해지는 것이고 자기는 모든 행위가 삼가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우리들이 이 의뢰하는 것 이 하나님 외에,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되는데,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거는 '내가 것을 받았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다.'  하는 것이 하나님 의뢰하는 것이요, 하나님 외에 '그렇지마는 나는 이 직장이  들어서, 내 배경에 어떤 권력가가 들어서, 내 명철이 들어서, 내 노력이 들어서, 내  열심이 들어서,' 하나님 한 분을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을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주가 만군이 됐고 만군이 계약 가지고 지금 달라듭니다. 계약  가지고 판단할라고 달라듭니다.

 이러니까, 주님 한 분만을 의뢰하지 안하고 무슨 양식을 의뢰하든지, 물을  의뢰하든지, 무슨 법률가를 의뢰하든지, 전쟁에 용사를 의뢰하든지, 무슨 예술가를  의뢰하든지, 복술가를 의뢰하든지, 요술가를 의뢰하든지? 배짱 있는 자를  의뢰하든지, 도둑놈을 의뢰하든지 뭘 의뢰하든지 어떤 것을 의뢰하고 의지하든지  주님 외에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행동이라 하는 요것을 단정  지우십시오. 주님 외에 어떤 것이든지 의뢰하는 것은 요것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가 되는 이 무서운 자멸을 취하는 행동이라. 이라니까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9절에.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요것을 우리가 알아서,  그러면 주님 외에 내가 의뢰하는 것이 뭐인가? 이것은 불택자와 택자가  다릅니다. 불택자는 죽는 날까지 고생도 없고 죽음도 평안하게 죽고 소득은  생각보다 넘치고 모든 것이 풍부하다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을 분깃으로  줬기 때문에 제 맘대로, 죄에 대해서 너무 죄가 지나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제재하지마는 제 마음대로 죄짓고 마음대로 삽니다. 성도들이 그거 보고  '왜 저런 사람은 저런데 우리는 이런가?' 해 가지고 탄식을 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하나님의 성결의 약속이 이거 적응되지 않는다.' 이래 가지고 불만 불평  품다가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분이 참으로 영계에 들어가서 신령한 눈이 환하게  열려 가지고 금생과 내세를 일관해 가지고, 막힌 장벽이 없이 금생과 내세에  이제와 영원 장래를 일관되는, 일통되는 이 눈이 열리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는 그 시간까지 반성하고 돌아오고 한번 머물 것도 없이 쭉 미끄러져  가지고 그만 풍덩 해 가지고 멸망받도록 그들에게 했다.' 그보다도 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만일 그걸 깨닫지 못했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구원 이룰 시대를 다 이와같이 지금 오해할 뻔 했다, 속을 뻔 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여게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의뢰하는 것, 의뢰하는 것은 그분 외에  빅에게 '어데서 어데서 받았다,' 그에게 받아서 그분을 든든히 의지하고 있는 것을  의뢰라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요 죄를 어짜든지 회개해야 됩니다. '내가 뭐 지식이  이만치 있고, 이만치 활동이 있고, 젊고 기운이 있고, 구변 있고 이러니까,' '네가  뭐이냐? 네 젊음을 의뢰하는구나, 네 지식을 의뢰하는구나, 우리 동지자들, 동지를  의뢰하는구나.' 요것이 자멸 행위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의뢰하지 마십시오.

 요거 우리가 회개를 해서 요거 하나 고치면 다른 것을 의뢰함으로 그것도  망하고 자기에게 망해지는 그 모든 결과를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  있고, 의뢰하고 의지함으로 필연적으로 망하는 걸 그 밑에 말해 놨고, 이제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 외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멸망시키는 것을 그 밑에 말해  놨어. 필연적으로 자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집니다.

하나님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에서 받았다. '내가 그래도 뭐 어째 대가리 싸매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내가 이런 현실을 누리고 있지.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어떻게  됐지' 그런 걸 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뢰하는 자에게  첫째 보응으로 오는 게 무엇인가? 보응으로 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것 아니고 피조물에게 받았고 이랬기 때문에 피조물에게는  겸손하지마는 하나님 앞에서야 교만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그 결과로 필연성으로 교만해지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 밑에  보니까 모든 조직과 질서가 문란해집니다. 조직과 질서가 문란해집니다. 그분에게,  그분이 주고 받으니까 그분 비위 서끌리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  그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고 그분이 모든 것 능치 못하심이 없고 그분이 정확하고  무오하고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거룩해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공의로워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깨끗해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추려면, 쉽게 말해서 죄를 범하지 안해야 될 거고 거짓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겼다는 요거 하나에서 모든  일이 해결 됩니다. 겸손이 여게서 나옵니다. 조심이 여게서 나옵니다. 자기 성결이  여게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학대하지 안하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두려움이 여게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 여게서 나옵니다. 모든  질서와 조직과 모든 것들이 다 상하 대소 이것들이 질서 정연하게 되어지는 것이,  그분에게 모든 게 달린 줄 알기 때문에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을 자꾸 바라보니까  그분이 그런 분이니 그분 비위 맞추고 그분 생각하다 보니까 모든 것이  되어집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자기 힘으로, 어떤 인간 힘으로 뭐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 쳐놓고 교만하지 안하는 자 없고, 타락하지 안 하는 자  없고, 그는 월권하지 안하는 자 없고, 남용하지 안하는 자 없고, 사치하지 안하는  자 없고, 자기 욕심대로 날뛰지 안하는 자 없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지은  죄값으로써 본능적으로 이거는 필연적으로 멸망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때에는 나중에 자기의 하체로 드라나게 하시리라  이러니까 요새는 하도 세상이 얄궂어서 아랫도리 하체가 드러난다 하니까 이거  뭐 아주 자기 몸 자랑할라고 뭐 코리아인가 뭐인가 막 모두 발가벗고 자꾸 이래  가지고, 하는데 그거 모양으로 그런 건 줄 알아도 그게 아니고 가룰 것이 없어서,  하체를 가룰 것이 없어, 부끄러운 줄 알지마는 가룰 것이 없다 그 말이오 지금은  그걸 몰라요. 우리가 클 때도, 우리가 클 때도 그때 일본 나라와 합병 전과 합병  후가 달랐습니다. 일본 나라 모두 뭐 적이라고 이래 쌓지마는 일본 나라 하고  합병된 그로 인해서 우리가 평생 숨을 쉬고 나아졌습니다. 그 사람들 백지 욕하고  지금 뭐 정권자들이 정치가들이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지마는 그분들이 와  가지고 이 철로 놔 줬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가르쳐 쉽고 많은  선물을 줘서 그때에 우리가 일차적으로 숨을 쉬었어.

 그전에는 이거 없는 사람들 명은 입을 수가 없고 찍해야 만만한 게 삼베인데  삼베 이거는 겨울에는 그만 뿌사져 버립니다. 이러니까 삼베 꼬장중우 삼베 치마  이런 것 입고 있는데 이 겨울이 되니까 다 뿌사져 버리고 줄기만 남소. 실밥 있는  거 줄기 그것만 남으니까 뭐 궁둥이 살이 불근불근 많이 나오지요. 여자들도  궁둥이 살이 나와요. 그 가룰 게 있어야지, 뭐? 가룰 게 뭐 있어야지?  그래서 무슨 하나 우스운 얘기가 하도 배가 고파서 양푼에 보니까 물은 한  양푼인데 거게 밥티기가 하나 있어서 그 밥티기 그거 먹을라고 그 물을 다  마시며, 그것만 가려 먹을 수는 없고, 그때 또 예의와 체면은 어떻게 있어 놨는지?  체면이라 하는 그거는 그게 뭐 좋은 게 아니고 어느 정도 지나가면 못쓸  것입니다. 이랬는데 체면상 예의상 양반이 그 밥티기 하나 주워 먹을라 할 수  없고 욕심은 그거뿐이고 물을 한 그릇 다 둘러마시고 나중에 가서 보니까  밥티기는 아무것도 없더라고. 나중에 보니까 자기 눈에 백내장이 와 가지고 명시  박힌 것이 거기 비쳐서 그 쌀내끼로 보였더라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시동생이 형수 집에서 붙어 있는데 그거 부엌에  거석하니까 형수가 들어온다고 주걱을 가지고 뺨을 때려 주니까 그때 밥티기가  몇 개 붙었다 말이오. 이래 뜯어먹고 '하, 이래 참 살 길이 생겼다.' 싶어 또 가  가지고 뚜드려 줄까 이래 가니까 그 다음에는 주걱으로 때리지 안하고  부지깽이로 때리더랍니다.

 그런 것이 거튼거튼 있지마는 그때에 경제 형편이 어땠으며 동양 예의지국이라  하지마는 윤리와 도리가 얼마나 썩어졌는가? 뭐 뼉다구만 남아 가지고 참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들 시어머니 노릇 한 것 그때 형수들 형수 노릇  한 것 가증스러웠소. 그것을 없앨라 하면 가정에 큰 분쟁이 나는데 어짭니까?  이렇게 어려운 때인데 일본 사람하고 합병되고 난 다음에 그때에 비로소 아주 좀  숨을 쉬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욕을 하고 있지마는, 해방 후도 곤고했어요. 해방해서  미국하고 손 잡은 뒤에 좀 숨을 쉬었어. 그라고 난 다음에 일차 군정 박 정권  때에 우리가 조금 허기를 면하고 밥을 먹었어. O정권 때에 우리가 막 배가  불러서 요새는 밥이 썩어 남아 나갑니다. 이랬는에 요새 군정 이놈들 막 군정을  욕을 하고 지금 이래 가지고 모두 하는데 잘못한 거야 있기야 있지마는 나는 그  사람 O정권 잘 했다고 나는 그거 말합니다. 주장합니다. 왜? 나는 딴거는 몰라요.

그렇게 공산주의가 밀라고 이래 했지마는 공산주의 못 들어오구로 반공을 하는  이 국방했기 때문에 잘했고, 그때는 우리나라에 치안이 얼마나 잘됐든지 그뭐,  무슨 뭐이라, 교육대라 했나 뭐라 하더노? 어? 옳지. 삼청교육대라 하는 거 있고  난 다음에 부량한 놈들 다 끌고 들어가서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는지, 그놈들도 가  가지고 거기서 뚜드려 맞고 하니까 사람 회개하고 올 때 돈을 모두 한 주먹씩 다  가지고 나왔어. 우리나라 치안이 다 잘됐지만 요새는 지금 신문에 안 나 그렇지  암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뭐 골목마다 전부 암살이오. 대낮에  봉고차로 한 여남은씩 와 가지고 묶어 놓고 이래 가지고 돈 떨어 가지고 가고  추행하고 뭐 오만 거 다 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누가 막소? 데모하는 사람은 하나  죽으면 마흔둘인가 서른두 번인가 위령제라고 지내지마는 경관 그까짓 거야 암만  죽어봤자 뭐 백 명 죽으면 말이나 합니까? 그거는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모르지마는 나 할일이 아니니까 그거는 뭐 행정에서 할 일이지마는, 이렇고.

 이래서 자, 국방 잘했어. 국내에 치안 잘했어, 배부르게 밥을 먹어서, 세계에서  모두 놀랄 만한 초일반적인 경제 성장이 됐다고 다 배불러서 다 부국이 됐어.

그만하면 잘됐지 정치가가 이 서이만 잘했으면 됐지 우리 예수 믿는 데 방해하는  거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잘했다고 보요. 이랬는데 그후에는, 뭐 이래 하지마는  마음에 잘했다고 지금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불안해서 못 살아요. 여게도 데모  저게도 데모 뭐 여게도 노사분규 저게도 노사분규, 학교는 그 교장들 전부 이거  다 잡아 끌어내고, 죽도록 사업한다고 연구하고 밤낮으로 잠 못 자고 머리 쓰는  사장을 포크레인 위에다가 달아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그 사람은 죽었을 거야,  아마. 지금은 모두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로 알고 멀리 보고 멀리 알고  이렇게 해야 되지 사람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유혹에 빠지면 안 돼. 보면  그것도 안다 말이오. '저 사람은 누구를 접촉하는데 그 사람의 유혹에 빠져 가지고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 됐구나.' 우리는 근시자가 되면 안 됩니다. 멀리 널리 봐야  돼요.

 그저 어쨌든지 우리 믿는 사람이 요번에 이 회개할 것, 우리 주님 외에 딴것은  의뢰하지 맙시다. 의뢰하면 자체적으로 자동적으로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망하게  돼 있는 것이, 첫째로 교만해지고, 하나님 모르니까 장관 배경으로 부자된  사람이라도 장관 하나만 비위 맞추면 되는 것이지, 장관이 도덕가입니까?  완전자입니까? 장관 저만 좋게 하면 되는 것이지 모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요  이런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소? 자연히 그 사람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이 월권할 수밖에 없고 방탕할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 멸시하고 천대하고  압제할 수밖에 없고, 남용 할 수밖에 없고, 사치할 수밖에 없고, 그라니까  음란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고 이거 필연성이라. 이것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안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결과의 소생입니다. 거게서 나오는 생산품이오.

 그라고 하나님께서 이제 치셔 놓으니까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다닌다. 벌거벗고  다닌다. 입을 게 있어야 안 벗지. 내가 조그만하게 어릴 때에 그때 그때는 일본  나라와 합병이 돼도 그 혜택이 없어요. 없을 때인데 보면 그뭐 부인들 아무리  예의를 차리고 그분들이 다 알뜰히 하지마는 삼베옷 이놈 지어 입으니까 줄거리,  실밥 줄거리, 줄기 그것만 남아 있지 나머지기는 다 뿌사져 버렸어요. 이래  놓으니까 궁둥이도 나오고 뭐 아랫도리도 나오고 앞도 다 나오는데 그거 뭘로  가룰 도리가 있어야지? '꿰매지?' 실이 있어야지? '실은 삼으면 되지' 삼아 만드는  그것도 잘 안 됐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저 뽕나무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이걸  여게 떨어졌으니까 또 거머쥐고 또 주렁주렁 또 짜매고 또 저기 짜매고 자꾸  그래 가지고 자꾸 짜매 놓으니까 이래서 그 사람이 입은 옷에는 비둘기 머리가  주렁주렁 달렸다고. 이래 가지고 이래 가지고 그래 가지고 산 것처럼 이렇게  비참하게 가난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 l8장에도 말하지 안했습니까? 신부와 신랑들이 그 결혼의 첫사랑에서  사랑하는 것도 당신의 혜택이 있어야 되지 당신이 내몰라라 하면 비참해집니다.

비참해져. 비참해지지 안할 것이 하나도 없어. '내야 하나님 멀리 해도, 하나님이  안 도와 줘도 나는 살 수 있다.' 하는 자가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봐요.

 이래서, 나중에는 나머지기는 전쟁으로 다 쓸어서 없애 죽이기 때문에 요  간단하게 실례를 하나 들어 가지고 말하기를 여자 일곱이 들어서, 남자가  있어야지? 다 죽어 버렸으니까. 그저 혼자 저거는 옛날은 시집 못 갔다 하면  그것은 참 천물이고 수치기 때문에 한 남자에게 일곱 여자가 일곱 여자면 일곱만  아니라 그거 하나님의 만수를 말한 것이니까 몇이 와 가지고 이름만, 내 떡 내 옷  입을 터이니까 그저 이름만 내 남편이라는 그 이름만 갈아 줘서 수치를 면케 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도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래서, 어쨌든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을 의뢰하면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합니다. 요걸 우리가 깨닫고 요 시간에 요것을  고칩시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 의뢰가 뭐입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이 주셔서 내게 있는 거. 내가 앞으로도 가질 것은 그분이 주셔서 가질  것. 요것이 의뢰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부터 하나님만을 의뢰하기로 확정짓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이거 하나를 고치면 당신이 대구집회서 딴거 안  해도 요거 하나를 우리가 정말로 고친다면 당신이 만족하시고 우리 이  대구집회에 대해서, 이거 뭐 지금 요새는 부동산이 조금 부지만 넓으면 이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 전부 다 국가에서 다 압수를 한다 하는데 이거 뭐 요거 하나만  하면은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우리 기도원에 이거 뭐 부지를 아무도 손 못  댑니다. 우리가 밉상스럽게 하면 소용이 없어. 하나씩 고칩시다. 고쳐서  이제부터는, 이 거짓말 같아도 고쳐봐요. 고쳐보면 뭐이 나와요? 고쳐보면 뭐이  나와요, OOO조사님? 또 저래 모른다 말이오. 고쳐보면 경험이 나옵니다.

고쳐보면 자기 하는 일에 '과연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 이거야 하나님이 같이  하셨지, 같이 안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는  체험 나와요. 자기 몸에 증거가 있어요. 이거 고쳐봐야 됩니다.

 그러면 고치면 자연히 겸손한 사람 되어지고, 조심하는 사람 되어지고,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사람 되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기를 힘쓰는 사람  되어지고, 하나님께 남을 위해서 구하는 사람 되어지고 점점 깨끗한 사람  되어집니다. 하나님 축복으로 넘치게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귀하게 할 때에 누가 천하게 만들겠습니까? 이래서  첫시간부터 이 말씀을 했는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가 안 되면  자기 행동으로 스스로 자멸을 취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를 멸하십니다. 요걸  가만히 연구를 집에 가서 해 봐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뭘로  말미암았다고, 어떤 것으로든지 뭘로 말미암았다고 이렇게 하면 과연 그러면  방종해지겠나 교만해지겠나? 그라면 더러워지겠나? 윌권하고 남용하고 이  사치스럽게 그렇게 점점 자체가 부패해지겠느냐? 그분 한 분이 줬다는 이 사실을  깨달으면 정말로 그거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이 점점 옳아지고 온전해지고  깨끗해지겠느냐?' 요거 회개합시다. 지금 전부 이래 가지고 다른 걸 의뢰하는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우상이오.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인데 하나님은 우상을  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회개 안 하고 그라면은 좋은 날은 없습니다. 골만  빠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그분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이렇게 살면 헛된  정력을 부릴 수가 없어. 그분을 의뢰하니까 그분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못해 또  그분이 하라는 거야 안 할 수가 없어.

 이러니까 모든 사람이 절제되어지지, 행동이 절제되어지지, 욕심이 절제되어지지,  모든 것이 사욕이 절제되어지지, 인간 모든 관계가 절제되어지지 모든 게 절제  되어지는데 모든 마지막에 나머지기는 온전이라, 완전이라, 축복이라, 하나님의  기쁨이라 이것밖에는 딴거는 될 도리가 없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을 지웁시다. 내가 의뢰하는 것은 몇이나 되는지? 오늘 어찌될지 내일  어찌될지 모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요렇게  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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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96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0절/ 1984. 4. 12. 목새벽 선지자 2015.12.29
795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0절/ 1984. 4. 10. 화새벽 선지자 2015.12.29
794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0절/ 1988. 2. 7.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9
793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1977년 21공과 선지자 2015.12.29
792 청지기 비유와 성경 존엄성/ 누가복음 16장 1절/ 1982. 6. 9. 수새벽 선지자 2015.12.29
791 청지기 직책과 사직동 교회 문제/ 마태복음 5장 38절-42절/ 1988. 4. 13. 수새벽 선지자 2015.12.29
790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신앙/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1981. 8. 5. 수저녁 선지자 2015.12.29
789 체계적인 신앙/ 베드로전서 5장 5절-9절/ 1981. 7. 28. 화새벽 선지자 2015.12.29
788 체계적인 신앙/ 마태복음 23장 23절-24절/ 1981. 7. 27.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787 체계적인 신앙생활/ 시편 1장 1절-4절/ 1984. 8. 14. 화새벽 선지자 2015.12.29
786 초림, 재림/ 이사야 1장 18절-20절/ 1988. 12. 2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9
785 초월신앙과 초절신앙/ 창세기 8장 20절/ 1981. 5. 21. 목새벽 선지자 2015.12.29
784 초절신앙-초월신앙/ 히브리서 11장 5절-6절/ 1987. 2. 6. 금새벽 선지자 2015.12.29
783 총공회 교리 변증/ 디모데후서 3장 12절-17절/ 1983. 9. 24.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 총공회 노선의 이해/ 이사야 3장 1절-4절/ 1989. 5. 9. 화전집회 선지자 2015.12.29
781 총공회 명칭/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1989. 8. 11. 금새집회 선지자 2015.12.29
780 총공회 정관/ 요한계시록 3장 18절/ 1987. 10. 25.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30
779 총공회-시발,명칭,교리/ 1989. 5. 25. 목새벽 선지자 2015.12.30
778 총공회-행정-노원소원/ 고린도전서 11장 26절-32절/ 1989. 3. 8. 수새벽 선지자 2015.12.30
777 최고, 최종,최정이냐/ 마태복음 4장 17절/ 1987. 6. 1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