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09:43
최고, 최종,최정이냐?
1987. 6. 12. 지권찰회
본문: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회개인데, 회개의 순서는 먼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 첫 순서고,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 첫째 순서고, 그다음에는 옳고 그른 대로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고쳐서 옳은 것으로 확립되는 것이 그것이 회개입니다.
진리 지식이 없으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 지식이 있어 그 지식대로 하지 못한 것을 고쳐서 그대로 할라고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리 지식이 있어서 사람들이 행하지 못할 것을 자꾸 알기만 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 그렇게 말해서 ‘자기의 현 자기 생활과 또 자기의 믿음의 힘과 일치되는 것만이 필요 있지 그 이상이 무슨 필요 있나? 또 가까운 것만 필요하지 너무 거리 멀면 필요가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유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들이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은,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서 가는 사람들인데, 하늘나라 가는 그 길을 아는 것은 곧 지식이고, 또 길을 알고 그 길에 삐뚤어진 것을 고쳐서 바로 들어서는 것은 회개고, 또 바로 들어서서 걸어가는 것은 믿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너무 사람들에게 자기의 현 생활에 부합되는 거, 거리가 멀지 안한 거 그런 것만 해도 모자라는데 그 이상 너무 자꾸 궁극적으로 연구해서 깊이 높이 뭐 이렇게 들어가는 그것은 도리어 그게 폐단이다. 이러니까 마치 일학년에는 일학년 과정만 가르치지 뭐 대학이니 이런 것 가르치면 그 아이들에게는 아무 해당되지도 안하고 소용이 없다.’ 그런 것을 말을 하면서, ‘진리 해석을 자꾸 깊이 길게 그렇게 하는 것은 필요가 없다. 또 너무 생활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진리를 말하는 것은 다 지나친 것이고 외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로 잡을듯 말듯, 내가 걸어갈듯 말듯, 좀 힘쓰면 걸어갈 수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가르칠 때에 이미 그 학생들의 그 정도를 맞춰서 자꾸 이렇게 교육해 나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들도 그렇다.’ 이것이 많이 주장이 돼 가지고 사람들은 다 이 이치에 맞추어서 할라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교회들이 자꾸 진리를 연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까운 정도가 좋지 너무 인간과, 인간에 거리 먼 그런 것은 해당치 않다.’ 이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진리를 배우고 알아 나가는 것이 자꾸 인간들이 제한을 해 가지고 가르치고 배워 나가니까 시대가 점점 어두워져서 나중에는 그만 그 교인들이 ‘어디로 걸어가야 되겠나?’ 갈 길을 알지 못해서 거게서 방황해 가지고 뭐 방언파 지시파 또 신유파 또 신비파 계시파 불파 뭐 이런 걸로 가지고 자꾸 이게 사람들이 앞으로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좌우로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쳐 가지고 자꾸, 마치 말하자면 군대를 인도할 때에 그만 그 군대를 앞길로 인도해서 갈 길이 앞길이 확실하고 갈 길이 많이 있으면 군인들을 때려 몰아서 뭐 암만 간다 해도 힘이 모자라지 갈 길이 모자라는 그런 것은 없는 그런 길이 있겠고, 또 이거는 군대는 지금 이래 서 가지고 있으니까 가야 되고 앞으로 전진해야 될 군대인데 전진할 길을 모르니까 좌우로 이리 저리 그만,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가기는 가야 될 군대인데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방황해 가지고 흩어져서 지금 얼마 전까지 하나님의 교회들이 이리 탈선 저리 탈선 해 가지고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모르고 이리 저리 탈선 방황하는 것으로서 나왔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리를 자꾸 깨달아서 더 깨닫고 또 더 바르고 더 좁고 더 옳고, 더 옳고 더 좁고 더 바르고 더 곧고 이렇게 하려는, 이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한 거게까지를 목표를 두고서 달릴라 하는 그런 것을 하지 안하고 사람들이 자꾸 인간에게 맞춰서 하자는 그 제한을 하는, 이러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사람이 교인들이 걸어가든지 말든지 신앙 걸음에는 이 길로 가야 된다 하는 제일 좋은 길, 제일 좋은 길을 찾을라고 애를 쓰고 또 좋은 길 찾아 가지고는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곧은 길이 없느냐 이렇게 자꾸 찾아가는 그 방식이 하나 있고, ‘그거는 가지도 못할 길이니까 자꾸 이보다 좋은 것을 찾을라고 하지 말고, 이보다 좋은 걸 찾을라고 하지 말고 이 길로서 만족해 이 길을 걸어가도록 자꾸 만들어라, 이미 아는 것을 확고히 알도록 만들고 이미 아는 것을 실행하도록 만들어라.’ 이래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제재하고 제한하고 이래 가지고 실은 모든 교계들이 다 어두워져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식은 망하는 식이니까 어짜든지 못 걸어가도 옳은 것을 알기부터 해 놓고, 알기부터 해 놓고 그래 하다가 못 하면 또 힘쓰고 기도하고 이래 노력하고 이래 해서, 못 걸어가도 아는 것이 유익되다 하는 것은 왜 그러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가 지금은 뭐 회개할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고, 이제는 숨이 깔딱깔딱거리니까 마지막 시간이니까 뭐 언제 행할 것이나 그런 지금 여유가 없는데도 알면 회개합니다. 알면은 ‘이거는 틀렸다. 이거는 잘못했습니다. 이거 내가 주님 앞에 고합니다.’ 알면 회개할 수 있지마는 모르는 거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종말 시간에도 아는 게 좋고, 또 우리가 걸어가는 것은 어데 똑 일학년에서 이학년되는 그런 순서로 걸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그뭐 순식간에 얼마든지 신앙으로 자라갈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성장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방편으로 제한해 가지고 그래 하는 것은 그거는 좋지 못합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세상을 떠날 때에 모르는 회개는 못 합니다. 모르는 회개는 못 하니까 회개하면 그것이 사유함을 받을 터인데 사유함을 못 받으면 사유함을 못 받는 거게 관련돼 있는 그 모든 심신의 기능은 다 멸망하고 맙니다. 이제 그거 회개하면, 회개를 하면은 자기가 행하지 못했으니까 기능을 마련하지는 못해도 있는 기능이 저주받아 멸망하지는 안할 수 있는 것인데,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두 사람이 지금 세상을 뜨는데 그뭐 임종시니까 거기서 여유 시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예수 믿는 이치를 다 알기는 다 알고 한 사람은 모릅니다. 한 사람은 뭐 등한히 하고 게을하고 이래서 모르고 이라는데, 그러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어찌 되겠느냐?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면 고하여 사유함을 받는데, 아는 사람은 사유함을 받으니까 그것이 거게 얽매이지 안하니 멸망에서 벗어나올 수가 있고, 모르는 사람은 고해서 사유함을 받지 못하니까 멸망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러면 멸망에서 나와 가지고 여유 시간이 있으면 그때 뭣을 행해 가지고 이렇게 의를 건설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인데 의를 건설하는 데도 많이 아는 게 좋고 또 깊이 아는 게 좋고 또 회개하는 데도 그게 좋고 이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 주시는 그때에 앎에 대해서 스스로 제재하지 말고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건 파고, 얼마든지 좁은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찾고, 곧은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찾고 이래 가는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지 ‘내가 이 이상 더 하지 말고 그 이상 더 좁을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더 깊게 알 필요도 없고,’ 이래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데 스스로 제재해 가지고 중단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죽는 날까지 알라고 애를 쓰고, 또 아는 대로 행해 볼라고 애를 쓰고, 또 그 안 대로 못 한 것은 하나님 앞에 고해서 사유함 받고, 또 그대로 실행해서 의를 건설하고 이렇게 자꾸 노력하는 이게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제가 제한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얼마든지 이렇게 자꾸 달음질을 쳐야 하는데 이 달음질을 이것을 인간들의 그 정도에 따라서 달음질을 다 제한하고 마는 그것이 마치 일반 교회들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게 뭐 알아듣도록 동화나 뭐이니 이런 걸로 가르쳐야 되지 어찌 성경 그것만 진짜배기만 이래 가르쳐 가지고 되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그래 하는 거와, ‘어린아이더라도 이거는 성경은 깨닫는 것이 성령으로만 깨닫지 인간의 그 지능으로는 깨닫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오히려 성령에 더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이래서 학생들도 진리를 가르치되 가르치는 제가 어느 정도에 있든지 가르칠 때는 자기로서 최고의 진리를 가르치고, 최고의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곧은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좁은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옳고, 제일 곧고, 제일 바르고, 제일 속하고, 제일 쉬운 그것을 자기는 아는 대로 가르치는 것이 옳다.’ 왜? 그날 죽을란지도 모르니까 네가 요거는 아는데 ‘내일 가르치고 요거는 명년에 가르치고 요거는 아주 어리니까 후명년에 가르치자.’ 그게 네가 네 교만에서 나온 것이지 네 생명도 언제인지 모르니까 어짜든지 네가 이 시간 설교하면 이 시간에 너로서는 최고의 설교라고, 최종의 설교라고, 최정, 제일 가장 곧은 설교 하고, 바른 설교 하고, 제일 깊은 설교 하고, 제일 옳은 설교 하고, 그 설교 해라.
그러면 이 시간 네가 설교 하나 할라고 하면은 뭐 하고 가겠느냐? 그래서 ‘내가 하나만 하면 요 설교 하겠다’ 하는 그 설교를 하고 또 네가 아는 것 증거할라 하면 어느 것이 너로서는 제일 최고고 또 최종이고 최정이냐? 그것을 가르치라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지혜요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찰님들이 교인들을 ‘이것 뭐 가르쳐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자꾸 가르쳐 가지고는 소용 없다. 못 행하는 것 자꾸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그래 가지고 배움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연구함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익히는 데 제한을 하고 하는 그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요새 지금 세계에 이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걸로 다 교회가 썩었는데 우리 총공회도 얼마 전에는 어짜든지 ‘아! 그것보다 그게 진리다. 요것보다 그게 곧다.
요것보다 더 그게 바르다. 요것보다 그게 더 의롭다.’ 자꾸 요렇게 자꾸 보다보다 나은 걸 자꾸 이랄라고 하는데, 이제는 무슨 운동이 나왔느냐 하면은 ‘그거는 너무 초절적이라서 안 됐다.
그러니까 우리 정도에 맞춰서 그만 보편화하자.’ 이 보편으로 이래 가지고 이래 하자 하고서 그 지금 교훈의 특수성을 완전히 죽이기로 그래 하는 운동이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게 다 어데 나왔느냐? 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단단히 정신차리지 안하면은 나중에 가서 그말 들으면 ‘참 그렇다. 이러기 때문에 그만 중간이 어중간이 가다가 엔간히 이래 보통 해 놓지 뭐 그 이상 자꾸 좁게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이 그래 걸어가지도 못하는데 너무 과격해서 그거는 도로 그것이 이익이 없다.’ 이라는 그런 유혹이 많습니다.
지금 내가 간단한 시간에 말하지마는.
그래 가지고 우리 진영에도 그런 운동이 지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어나고 있으니까 ‘어짜든지 나는 바른 길 곧은 길 좁은 길 갈란다. 제일 좋은 길 갈란다. 진리를 이리도 말하고 이리도 말하고 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중에 제일 올바른 걸 나는 차지하겠다.’ 이게 있고 ‘그뭐 그 올바로, 엔간히 가다가는 그만 중간에 서이 너이 갈 때 그만 중단하자. 서이 너이 있을 때 중단하자.’ 하나는 ‘아니다. 서이 너이 가운데서 어느 게 옳은고 더 옳은 걸 찾자.’ 그러니까 ‘서이 너이 되던 것이 둘이 됐다. 둘이면 이제 엔간하지 않느냐?’ `아니다. 둘인데도 또 찾아 가지고 둘 중에서 그총중에 옳은 거 하나, 나은 거 하나니까 그걸 찾자.’ 요렇게 하는 자와 또 이렇게 그만 일반화해서 널펑하게 하는 자와 우리 진영에도 이게 둘입니다.
일반 교계는 그건 없습니다. 옳은 것을 가지겠다 하는 그거는 없고 어짜든지 인화주의로 이래 가지고 그만 일반화되는 그걸 하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배운 진리를 다른데 가 가지고서 목회하면은 당장 쫓겨나고 뭐 거기서, 목회하면 뭐 뒤비지고 야단이 날 것이고 또 그들에게 다 이단으로 정죄받습니다.
이러니까 하나가 되는 하나에 도달하기까지 ‘하나를 찾자. 여럿을 찾지 말고 하나를 찾자.’ 하는 그 신앙 사상과 ‘하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만 한 열이나 있는데 열 가운데 간추리고 간추려 가지고 한 서넛 되거들랑 그만 서너 가지 되는 데 거기서 그만 중단하자. 많은 가운데 너이 찾았으면 너이되는 거기 중단하자.’ 하나 되는 데까지 나아가는 사람보다 둘 되는 데 중단하는 사람을 세상이 좋아하고, 둘 되는 데 중단하는 것보다 서이 되는 데서 중단하는 사람을 세상이 더 좋아하고, 그보다 열이 되는 데 중단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백이 되는 데 중단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세상하고 다른 것이 별로 없는 그 자리 가는 사람은 더 좋아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냐 저거냐, 저는 견해하기를 하나는 멸망이요 하나는 구원이라.
하나는 성전 밖마당이요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라 이렇게 하는데, 성경이 그래 말했는데.
그라면 성전 제단 경배하는 자는 뭐이냐? 또 진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뿐인데 이 둘이면 어느 걸 찾느냐? 이 성경은 하나를 찾으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그게 문제이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에 얼마든지 제한받지 안하고 알도록 이렇게 죽는 날까지 알기를 제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알도록 노력하고 또 끝까지 행하도록 노력해야지 제가 ‘요만하면 됐다’ 제가 그것을 제한해 가지고 하는 것은 그거는 망령된 것이요 아직까지 참 안다고 해도 모르는 그 관계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너무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갈래길이 많고 모양도 많고 형틀도 많고 주장도 많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지 안하시면 주님의 인도하시는 하나만 되는 좁은 곧은 길을 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주님이 인도하시는 주님에게 피동되는 요것만이 사는 것이지 이래도 저래도가 아닌데 너무도 복잡하고 오묘하게 미혹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들도 다 실패됩니다. 아는 데도 실패하고 행하는 데도 실패하오니 우리를 붙드시사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