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11:16
영광
본문 : 벧후 3:14-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영광은 능력에만 있는 게 아니고 영광은 사랑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능력이 역사함으로 그 사랑과 능력의 혜택을 입은 것들이 은혜를 입힌 자에게 돌리는 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 자존하시고 홀로 계셨을 때에 영광이 있었느냐? 영광이 있으나 영광으로 나타나지를 못했습니다. 비로소 모든 것을 뜻하시고 창조하셨을 때에 지음을 받은 것들이 그분의 혜택을 입은 지 후 피조물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떤 마을에 모든 것이 뛰어나서 그 동리에서 모든 면이 머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광된 게 아니고 그럼으로 인하여 영광 반대의 그 수치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그 사람의 큼을 인해서 그 동리의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것보다 해를 당했으면 그는 영광있는 사람이 아니고 수치있는 사람이겠습니다.
그 동리에 아주 제일 빈약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심히 빈약하지마는 그 사람으로 인하여 그 동리의 모든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유익을 보았다 하면 온 동리 사람은 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 와서 물으면 그 부강한 자를 말할 때에 모두 입술이 비쭉거리고, '그 사람이 대단히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요 참 귀한 사람이라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비쪽거리고 승인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정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영광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주 그 동리에 제일 허무한 사람인데 다른 데 사람들이 가 가지고 '그 사람은 아주 허무한 사람이요 못쓸 사람이지?' 하면 동리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분발해서 변증을 할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그 사람은 참 귀한 사람이요 그럴 수 없는 아주 우리가 존경하고 귀하게 여겨서 사모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빈약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영광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광은 자기로 인하여 유익을 보고 덕을 입은 사람들이 그 덕을 입힌 상대방에게 대해서 영광을 돌리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그러면 이 영광은 하늘에 있는 자들만이 영광을 돌리지 않고 저 유황불 구렁텅이에 있는 자들도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때는 '하늘나라 가서 있는 자들은 행복스럽기 때문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겠지마는 지옥에 있는 자들은 무엇이 그와 같이 영원 사망 속에 있으면서 영광을 돌릴 건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래서 빌립보 2장 9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을 한다고 했습니다.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은 자기의 자체라는 그 주관에 근거해서, 자기 자체라는 그 주관을 근거해서 할 때에는 자기 주관에 맞지 않는 것은 다 반대할 것이고 자기 주관을 돕지 않는 것은 다 해를 주는 것이라고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관이, 주관이라는 것이 생겨진 것이 객관으로 말미암아 생겨졌습니다.
객관과 주관 둘이 있겠는데 피조물마다 객관 주관 둘이 있어 객관은 자존하신 하나님의 것이요 주관은 하나님께 지음받은 그것이 객관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때부터 주관이라는 것이 생겨졌습니다.
그러기에 주관은 객관과 서로 대립적의 것인데 무궁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 주관으로 날뛰었던 그 모든 주관이 생겨진 이후부터 우리로 말하면 객관이신 자존하신 이 하나님과 대립이 되어 모든 견해를 사고 방식을 했다가 무궁세계에 가면 그 모든 어두움이 다 제거됩니다. 어두움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환하게 보여집니다. 어두운 것이 다 대낮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자체의 정체와 정질과 정명과 모든 그 실존이 환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드러나고 보니, 자기 주관적으로서는 '나는 지옥 갔다 하늘나라 갔다 해서 하늘나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영광을 돌리지마는 지옥 간 것들은 다 하늘나라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겠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조부라운 주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관이 객관에서 나와서 생겨진 이것을 자기가 다 깨닫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하늘나라와 지옥을 만들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인식시켜 당신의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이 하나님을 모든 것을 창조하심으로 나타내고 창조하신 것을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이 운영하시고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지극히 큰 완전에서 이것을 경영해 가지고 나온 것인 유일하신 이 일원, 유일하신 일원에 그 근원을 알고 완전하신 그분의 목적을 알게 될 때에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돌리고 자기 있는 데에서 자기의 직책을 감당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거를 하는 것이 피조물들인데 어떤 자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복종하면 이렇게 된다 하는 복종으로 복된 것을 증거하고, 어떤 자는 하나님을 거슬리면 이렇게 화가 된다 하는 화로써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큰 범위의 이 근원의 전체를 모든 것이 다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럴 때는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찬양하고, 그분의 완전하신 그 예정을 찬양하고, 그분의 창조와 섭리와 모든 보존을 찬양하게 되는 그 때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광이 저에게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그때가 오고 거기에 도달할 때에 그것이 자기의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고, 또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고, 이 모든 존재로서 하나이신 완전자를 나타내는 이 큰 범위가 넓고 큰 하나를 알게 될 때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영원한 날까지 영광이 있을지어다" 하는 것은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영광이 있도록 이렇게 찬양을 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에게 진정코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그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 그것이 살아난 때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자들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영광을 돌리고, 또 어떤 자는 이해 못할 불평을 가지나 죽어서 부활하고 난 다음에 그 심령이 열릴 때에 영광을 돌리고, 어떤 자는 무궁세계에서 영광을 돌리고, 어떤 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 가운데서는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가 그 고통 그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분의 완전한 범위 내에서 완전에서부터 시작된 완전의 하나의, 완전 단일의 이 하나를 달성하는 데에 자기는 이런 요소 저런 요소, 이런 분자 저런 분자, 이런 세포 저런 세포로 되어 있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그 때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영광을 돌릴지어다" 하는 것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그때가 사는 때요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영광을 돌리면 당신이 커지고 높아짐으로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서 영광을 돌리는 그것을 말한 게 아니고 피조물들이 그에게 영광 돌려 이 크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여기에 도달하기를 성령이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서 이렇게 소원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것이 그것이 지옥의 고통이니 불만을 품을 그때는 그것이 객관화되지를 못하고 주관화되어 있는 그것입니다. 객관화 되어서 하나님이 영원 자존하신 분이 자존하신 지능으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셔서 그대로 이루어 자존하신 이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나타내고 피조물들이 그 어떠하심을 아는 그것이 구원이요, 또 그것이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게 비유가 잘 안되지마는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의 한 가정을 완전히 이루려고 하면 거기에는 별별 필수의 것을 만들 것입니다. 어떤 것은 방안에 가만히 놓여 있는 것도 만들 것이고, 또 아무것도 안하는데 그것을 만날 때마다 만져보고, 또 좋아하고 웃고, 가지고 놀고 이렇게 그저 손 위에 얹어 놓고 기뻐하고 또 좋아하고 사랑하고 이렇게 가지고 노는 그런 것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저 불 속에서 타서 없어지는 항상 불 속에, 벌건 불 속에 집어넣는 연탄 집게도 만들 것입니다. 또 거기에서 달아서 굽혀서 없어지는 것도 만들 것이고, 또 저 변소간에 가 가지고 대변을 푸는 그런 기구도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구가 주인으로 인한 지식이 아닐 때에는 '왜 나는 통박지기를 만들었는가? 나는 불 속에서 타는 불집게를 만들었는가? 또 아무것이 저것은 만날 가만히 농 안에 좋은 보자기 속에 첩첩이 싸서 위해서 앉혀놓고 만날 때마다 그것 보면 온 식구들이 보고 가지고 놀면서 좋아하고 기뻐하고 우리는 방 안에 한 번도 들어 가지 않고 바깥에 있을 뿐 아니라 불 가운데 넣어서 타서 녹아지도록, 또 변소간에 넣어 가지고 항상 똥 속에 똥이 묻어 가지고 있도록 이렇게 하는가?' 할 것이나 그것이 한 분 주인을 근원으로 하는 지식은 아니고 그 피조물, 지음을 받은 그것들이 그것 주관대로의 하는 지식이지 주인을 표준한 지식은 아닐 것입니다.
주인을 표준한 지식이라면 통박지기는 통박지기 저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저의 존재의 가치요, 똥바가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어데 물을 거르는 채로나 쓸까 통박지기로는 못 쓰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집어던져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영원 자존하신 분이 자존하신 사랑으로 자존하신 기쁨으로 자존하신 뜻으로 자존하신 지혜 능력 진실 거룩 의 이렇게 자존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이 자존하신 분이, -자존하기 때문에 권위가 제일 큰데 -이분이 그 속성이 완전자시요 또 영원자시요 불변자시요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이분은 참 완전한 분이시요 좋은 분이시요 깨끗한 분이시요 모든 건설만 하시고, 의만 하시고, 또 사랑만 하시고, 유익되게만 하시는 이런 하나님은 좋은 분이신데 이분은, 성경에 나타낸 대로 여러가지 속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속성을 가졌지마는, 우리 인간들은 이런 속성 가졌고 저런 속성 가졌으면 이 속성과 저 속성이 반대되고 이 속성들이 다 개별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개별성으로 되어 있지마는 하나님은 그 개별성으로 되어 있지 않고 단일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지혜요, 능력이요, 완전이요, 불변이요, 자존이요, 영원이요, 진실이요, 의요. 또 그분의 지혜가, 지혜가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완전이요, 거룩이요, 진실이요, 의요, 불변이요, 영원이요, 자존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하나님은 그분은 이 물체도, 물형, 물형도 없습니다. 물체도 없고 영체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만일 물체나 영체나 있다고 하면, 영체나 실체가 이렇게 물질이나 신령한 것으로나 있다고 하면 그 안에 갇혀 있는 자요 그 범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완전자가 되지 못하고 무한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물체나 영체가 없는 것은 그분이 크시기 때문에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것이지 그분이 존재가 허무하거나 그렇게 그래서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이 속성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런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좋은 것만 나오고 나쁜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만 나오고 나쁜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옥의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그것을 예정하셨고 조성하셨고 하나님의 완전이, 하나님의 거룩이, 하나님의 불변이, 하나님의 선이, 하나님의 진실이,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긍휼이 하신 이 근본의 하나님의 단일성이신 이 유일하신 이 뜻을 깨달을 때에 모든 존재는 그분의 속성을 찬양하고, 그분의 경영을 찬양하고, 그분의 존재를 찬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그것을 가리켜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다" 그말은 표현을 못 해도 물 속에 있는 무슨 이 지구 땅덩어리 에만 되는 그런 게 아니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하늘을 말한 것은 영계를 말하고,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은 음부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계 하늘나라, 이 세상, 이 세상 밑에 유황불 구렁텅이 지옥 이것을 이 세 종류로 나눠서 표현한 것인데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랬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때는 자기의 주관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졌고 그분의 완전으로 말미암아 생겨졌기 때문에 이것이 피조물의 모든 지식이 제한되고 또 이것이 다 편벽돼서 이 큰 하나의 유일의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의 모든 착각과 오해와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잘못하면 조부라와서 감사도 주관으로 감사하는 그 감사, 또 기쁨도 주관으로 기뻐하는 기쁨 이런, 모든 평가도 주관으로 평가하는 이런 평가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범위에서는 감사하지마는 그다음 범위에 나가면 원망 불평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를 넓혀 모든 것이 자존하신 이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자기요, 이 한 분의 소원에서 소원대로 된 자기요, 이 한 분에게 필요하게 되어 있는 자기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한 분이 실수로 나를 존재케 한 것이 아니고, 이 한 분이 악으로 나를 존재케 한 것이 아니고, 미움으로 나를 존재케 한 게 아니고 이분이 완전하신 사랑의 영원 불변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존재케 했기 때문에 그 존재의 말단에 음부의 제일 그 깊은 속에 있는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있게 했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그렇게 있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으로서 존재치 않으면 안되고 그것의 존재가, 그 존재가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나를 만들어 나는 여기에서 나의 사명이 있고 여기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 뜻을 성취하는 한 존재 중에 존재로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의 존재다'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될 때에 그때가 완전에 도달한 때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풍파 심한 저 깊은 바다 속에 서서 있는 그 등대가 인간 생각으로 가진다면, 떳떳하게 육지에 살고 있는 인간 생각으로 가진다면 그는 참 우리가 그곳에 가서 있다 하면, 그 깊은 바다 속에 거기에 가서 있다고 하면 그렇츰 불행한 곳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고통스러움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원망스러을 수 있는 위치가 없지마는 그 등대가, 등대가 제가 무엇 때문에 생겨졌느냐? 무엇 때문에 존재하게 됐느냐? 자기의 자체가 존재하게 된 그 존재와 존재의 목적을 그것을 밝히 깨달았을 때에는 자기는 바다에 있는 것이 가치가 있고, 그걸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거기에서 자기는 누가 알아 주든지 말든지 반짝거리면서 빛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자체의 본분인 것을 알게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조부라움에서 살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차차 차차 아는, 알아가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이 지극히 큰 분의 지극히 큰 뜻, 지극히 큰 목적, 지극히 큰 무한의 사랑이 이 사랑을 완성시키고, 지혜와 능력을 완성시키고,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완전을 이루시기 위한 이 지극히 큰 뜻을 우리는 알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 조부라움에서 거기에서 그 다음 넓은 범위에서 한 일을 자기가 그보다 좁은 범위에서 생각해 가지고 착각이나 오해나 오산이 돼 가지고 불만 불평을 품지 말고 하나님의 절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조그만한 불행스러운 일이 닥치면 그만 자기는 낙망하고 불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하는가?' 이렇게 조부라운 생각을 가지나 자기의 불만 품은 그 불만을 자기는 품지마는 그 자기에 닥쳐진 그것이 없어서는 안될, 전체면을 생각할 때에 없어서는 안될 그 순서요 자기는 그것을 하나 불행스러운 그 한 순서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전체에게 필요있고 쓰여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필요있는 한 순위인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왜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 지금 불만 불평할 수 있는 불평스러운 일을 예정을 하셔 가지고 창조하셔서 나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가?' 하는 원망한다면 그는 생각이 조부라왔습니다.
'이것도 절대자의 예정대로 된 것이요 절대자의 능력대로 된 것이니 이것이 어떻게 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이 존재로 있게 했는가? 있게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주권적 능력으로 성취하시는데 이것을 어떻게 없앨 수가 있겠는가? 있게 하신 그분이 어떻게 해서 있게 하겼는가?' 자기대로는, 자기 나름대로 그걸 해석을 해서 깨달으면 참 복이 있고, 깨닫지 못하면 '나는 이거는 이해 못한다. 이해 못하나 절대자가 이것을 이루시기 때문에 절대성을 가진 절대적의 것이다. 사랑이 이 일을, 사랑이신 그분이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랑의 것이다. 이것이 그분에게 영광되고 피조물들에게 복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대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행복된 것이다. 그러니까 참아 기다려 보자' 하고 기다리는 그것이 자기가 본분을 다 행하는 것이며 얼마 후에 지식이 열려지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에 별별 감사하고 불평하고 한 그것을 만일 자기 일기에다 써서 이와같이 해 놓은 지 10년 후에 신앙생활에 그것을 다시 들추어 보면 감사한 그것도 다 주관적이어서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 자기 사욕대로의 감사했고 불평도 사욕대로의 불평했고 이것이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그게 다 착각 착오에서 줬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게 될 것이고 또 미래적으로는 그럴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이 광대하심과 지대하심을 우리가 깨달아 여기에 근거하고 여기에 준하여 그를 바라봄으로써, 그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앞에, 아브라함같이 자기 앞에 이해 못 할, 자기 앞에 이해 못할 수십 년, 가나안을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너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 약속했는데, 또 아들 이삭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약속해도 아브라함이 살았을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기는 있었지만 나그네로 있었지 그곳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업으로 주신다 했는데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항상 객지에 우거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에게 약속을 하시고 약속을 선포해 놓으시고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오늘이나 이루어질까? 이 가나안을 나에게 기업으로 주실 건가? 명년이나 줄런가?' 또 일 년 기다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주셔.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안 주시고 자기는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럴 때에 그분이 그때까지 낙망 원망 불평하지 않고, 이제 죽을 때까지 안 줬으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짓말 하셨다.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이루어 주지 않는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말하고 가지 않고 '주님께서 가나안을 나에게 허락하셨는데 이것을 주시지 아니하는 것은 터가 있는 영원한 가나안을 나에게, 변동없는 그 가나안을 나에게 주시려고 약속했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여기에 있는 요것만으로 말했구나. 이것은 그것을 하나 표현하는, 표현하는 모형 하는 이것으로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그것을 믿고 떠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의인이라, 믿음의 조상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조부라운 그 견해에서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지 않았다' 원망 불평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에 '그분이 나에게 약속한 것은 절대적이요 신실하신데 이것을 주시지 않는 것 보니까 이게 아닌 영원 불변의 완전의 가나안을 나에게 주시기로 했는데 나는 이것으로 기다렸구나' 하고 믿고 떠났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궁세계의 하늘나라는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허락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그의 완전성 불변성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이해에 맞지 않고 자기 주관에 맞지 아니할 때에 자기 주관을 그것을 다시 변화시키고 그분의 완전성에 대해서는 요동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고 커지고 모든 이 세상에서, 세상에서 지나갈 때에 아브라함은 아주 건너뛰기가 힘듭니다. 그는 약속을 받은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이 닥치지 않아도 그 거리가 얼마나 멀지마는 그 거리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 신망에서 그 암흑의 거리를 어려움없이 섭쩍 건너뛰어 가지고 저 언덕에 섰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크다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모든,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인간의 주관을 초월한 이 초월한 큰 것을 그에게 줄 수 있었고 그는 받을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조부라운 여기에서 자기를 키워 나가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은 그 통계를 맞춰 가지고 하는 말이 '인간 만사가 북마옹이라' 인간의 일만 일이 북방에 말 먹이는 첨지의 일이라.
간단하게 말하면 참 아주 좀 영광있는 그런 위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말이 한 마리 그만 나가버렸어. 잊어버렸어. 잊어버렸는데 옆에 사람이 와 가지고 '영감님, 말을 잊어버리게 됐지요? 큰 손해가 갔습니다.' '말 잊어버린 것이 손해인지 유익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다음에 좀 있으니까 말 이놈이 한 마리가 나가 가지고 말을 여러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참 그 한 마리 -저 북쪽에서는 산에 말이 많이 있으니까, 남의 것 임자가 아니라도 -말 한 마리가 나간 것을 어떻게 손해인 줄 아느냐, 유익이 아닌 줄 아느냐 이러더니마는 과연 여러 마리를 데리고 왔으니까 참 유익입니다.' 이러니까 '여러 마리가 들어왔으니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고 어떻게 알겠느냐?' 좀 있으니까 그 말을 타고 아들이 외동 아들이 돌아다니다. 그만 떨어져 가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말이오. '하, 그것 참 말하는 게 그것이 손해가 아닌 줄, 우리는 유익이라 했는데 손해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느냐 하더니 마는 참 자제분이 다리가 부러졌으니 참 그것이 유익이 아니고 그것 손해입니다.' 또 말하기를 '아들 다리 부러진 것이 너거는 손해라고 하는데 그게 유익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다리가 부러졌으니까 손해지 뭐 유익일 게 있습니까?' 좀 있으니까 전쟁이 나 가지고 전부 강제로 아들들은 전부 다 가서 전쟁에 전사했는데 전쟁에 가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하, 그것 참 다리 부러진 게 참 유익입니다.'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나 비유 예화를 가진 것인데.
그런 사람들은 여기서 보니까 손해가 그다음에 보니까 유익이 되고, 그다음에 유익이 보니까 좀 있다가 보니까 손해가 되어지고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난, 그 명철한 사람은 그 통계를 맞춰서 볼 때에 천국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렇게 무엇을 가지고 조부랍게 생각해서 유익이다 해다 그렇게 하겠느냐?' 그들은 세상통계를 보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것을 필요한 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신구약 성경에 다 모아서 이 모든 근원을 말씀했고 근원에서 떠난 모든 존재를 말씀해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다음으로 크게 살 수 있고 하나님 다음으로 권위있는 위치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며 그들에게 넉넉히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이런 자로 자라갈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부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조부랍게. 조부람게 생각하는 그건 다 자기 주관이오. 이래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만 하라 이에서 지나면 모든 것이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악으로 좇아난다 말은 자기중심으로 났다 그말이오.
네가 슬퍼하는 것이 누구의 중심으로 네가 슬퍼하며 네가 기뻐하는 것이 누구의 중심으로 기뻐 하느냐? 절대자이신 그분의, 절대자인 그분의 예정대로 절대자의 능력이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을 중심해서 모든 것을 우리가 평가하고 비판하고 경영하고 하는 이것이 되어 근본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래 말했어.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으로 돌아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 우리의 구원이 지체없이 될 것이며 우리 앞에 짧은 짧은 토막에서 쓴 것도 오고 단 것도 오는데 쓴 것이 그것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쓴 것이 왔고 단 것이 그것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단 것이 왔기 때문에 대계획이신 완전이신 이분이 경영한 이 큰 구원을 내가 바라보면서 가면서 자기의 조부라운, 시간적으로 좁고 공간적으로 좁고 종별적으로 좁은 요런, 그런 데에서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탈피하고 무궁한 하나님의 이 구원에 우리는 소망을 달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현실을 만들어 주실 때에 이런 저런 모든 우리의 희로애락이 발동되도록 만드십니다. 발동되도록 만드나 만드는 그것은 희로애락의 하는 그것을 성장케 하는 게 아니라 희로애락 그것이 그 현실을 당할 때에 나타나지 않아.
다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슬퍼하는 그 현실을 당할 때에 이 사람은 슬퍼하지 않아. 이 사람은 기뻐하는 그 현실에 또 기뻐하지 않아. 기쁨 슬픔 이 모든 것이 그것이 절대자로 말미암아 생겨졌기 때문에. 생겨졌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바라보면서, 기쁨 올 때에 기쁨에 피동되지 않고 슬픔 올 때에 슬픔에 피동되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기쁨에도 피동되지 않고 기뻐도 그분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이제 기쁨에 피동되지 않아서 자기 현실이라는 환경에 피동되지 않고 절대자이신 그분에게 피동되어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되게 하려는 이것이 하나님의 크나큰 유일하신 목적이요, 우리를 당신의 목적을 정하신 그 속에 내서 달성하려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를 이 목적 안에서 나게 하시고 이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령이 보증했고, 진리가 보증했고, 예수님의 이 대속이 보증했고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가 이 구원을 위해서 지음받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어떤 한 물질을 만났을 때, 한 공간 만났을 때, 한 공간 이 자리를 만났을 때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한 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쓰여지려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산에 가서 바욋돌 한 개 턱 만나 가지고 바윗돌에 턱 걸쳐 앉으면서 거기에서 기도하니까 그 돌이 있다가 '이제 오십니까? 태초에 나는 지음받은 돌인데 하나님의 목적이신 당신이 여기에 오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기를 내가 이제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존재가 여기 가니까 이것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저기 가니까 저것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제가 금정산 상봉을 가려고 가니까, 금정산 상봉을 가니까 바윗돌들이 많은 풍우에 시달려서 허여이 늙어 있어. 그 바윗돌이 허여이 늙어 있어. 늙어 있는 그 바윗돌에 가 가지고 '얘, 네가 나이가 얼마나 많기에 이렇게 됐느냐?' '육천 살이 못 됩니다.' '뭣 하려고 네가 여기 기다리고 있느냐?' '하나님의 목적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 영원히 내 주인공 될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거기에서 한번 찬송하고 한번 기도하니까 '이제까지 기다렸던 소망 중에 한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면서 감사를 했습니다.
내가 또 묻기를 네가 몇 천 년이나 네가 살겠느냐? 네 수명이 얼마나 되겠느냐?' '네, 내 수명이 아마 몇 만 년은 살 것입니다.' '그래 나는 몇 해나 살 줄 아느냐?' '당신은 영생이 아닙니까?' '그러면 나보다, 나만치 못 살겠느냐?' '네, 당신은 영생이요 나는 영생은 아닙니다.' 하면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내가 봤습니다.
조부랍지 맙시다. 조부랍게 이렇게 그런 조부라움으로, 조부라운 그거는 항상 자기 주관이오. 자기 주관. 자기 주관에게 갇혀 가지고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주관을 탈피해서 하나님에게로 귀속 돼서 당신에게 귀속될 때에 우리는 만물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위치에서 영생하려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165) 주일학교공과 본문 : 고린도전서 10장 1절-13절 제목 : 믿음 요절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1. 성도의 길은 파란과 곡절과 많은 험한 길이다. 인간으로서는 뚫고 나갈 수 없는 길들이다. 이 길을 사람으로나 자연으로나 만물로 만드신 분은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이시다. 피상으로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 성도들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과 신망과 복종력이 점점 온전함에 도달하기까지 성장을 원하신다. 이런 진로가 아니면 성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인간 뚫지 못할 어려움을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순종만 하면 그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되도록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 이 점점 한 두 경험 체험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2. 그런고로 우리는 어떠한 닥쳐오는 현실이든지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큰 수입이 있고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수입이 있다. 그 수입은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과 약속의 신실을 바라보면서 순종함으로 다소 대소를 막론하고 전체가 생명 평강으로 화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은 역경을 더욱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다. 믿음 있는 데에 하나님은 힘껏 역사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3. 믿음이 없을 때에는 원망 시험 우상숭배 간음 등이 역사하게 된다. 자기에게 이 네 가지가 있을 때에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니 이 네 가지를 빨리 믿음과 바꾸어야 한다. 바꾸지 아니하고 네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자타를 사망케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전능이요 천국을 가는 첩첩이 쌓여 있는 문들의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