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21:36
영이 무엇인가
1986. 2. 15. 토새벽
본문:베드로전서 2장 1절∼2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요사이 이 말씀을 여러 시간 계속했는데, 지난 밤에 비유한 거와같이 사람은 영육으로, 영과 육으로 되어 가지고서 있는 게 사람입니다. 영은 단일체입니다.
영은 하나로 돼 가지고 있은 영입니다. 그러나 육이라고 하는 이것은, 심신을 합해서 육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데 이 심신이라는 것은 마음 하나, 몸 하나 이래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의 요소도 굉장한 많은 요소가 합해 가지고서 있는 종합체입니다. 또 마음도 수많은 요소들이 합해져 가지고서 있는 종합체입니다.
나라든지 가정이든지 회사든지 어떤 그 단체든지 자체가 자체를 잘 알지 못하면 그것은 설 수 없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체가 자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나라가, 나라 자체가 자체를 모르면 그 나라는 서지 못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 강대국에 접선이 되어있는 나라다, 또 우리나라는 어떤 섬의 나라다, 또 우리나라는 조그만한 섬의 나라다, 우리나라는 물이 많다, 우리나라는 물이 없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 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특별히 나는 특산물이 있으니 어떤 것은 많지마는 어떤 것은 전혀 없다, 또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와의 그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학은 어느 정도며, 경제는 어느 정도며, 또 일반 모든 문화는 어느 정도며, 우리나라는 지금, 왕이면 왕, 제국 정치라면 왕은 누구며, 또 민주 정치라면 대통령 누구라 그렇게 자체를 알고 있어야 되지 이 자체를 모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우리 개인도 꼭 그러합니다. 나는 어떤 지방에 살고 있으며, 또 어떤 지금 모든 정권 나라에 살고 있으며, 또 우리나라는 유엔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은 어떠하고 경제 수준은 어떠하고 사람들의 모든 인질과 인성들은 어떠하다 이런 것을 잘 알아야 되지 그걸 모르면 헛일입니다.
자체가 자체를 모르면은 벌로 덤비기 쉽습니다. 속담에 우리나라에서는 ‘제 힘을 모르고 한강을 건너려 한다’ 그러면 빠져 죽지 딴거 뭐 있습니까? ‘못 올라갈 나무에는 쳐다도 보지 말아라’ 또 난방 불립이라. `아주 어려운 그런 낭떠러지에는 가지 않는 게 좋다. 가면 떨어져 죽는다.’ 이런 말들이 모두 다 이거 사람들이 생각한 통계의 말인데 우리가 이런 것을 가리켜서 자연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자연 만물들이 우리에게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자연 계시라 그랍니다.
자연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만물과 인간의 그 모든 구조들 이래 변동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합해서 자연 계시라 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그분의 모든 법칙과 이치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또 특별 계시라는 말은 특별히 우리에게 열어 보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신구약 성경 말씀과 내재한 영감을 가리켜서 특별 계시라. 계시라 말은 열 계(啓)자, 보일 시(示)자 열어 보인다 하는 말인데, 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서 알려 주는 것이 있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알려 줘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통해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것은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된다 이랬습니다.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된다 말은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다 보는 그런 눈이 있어야 되지 육안 이것만 가지고서 살면 그거는 하나의 짐승이지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눈으로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도 영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게 2장 1절에 「그러므로」 라는 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무엇을 두고서 하는 말이냐? 「그러므로」 이렇고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너는 이래 살아야 된다 하는, 「그러므로」 하는 것은 그 위에, 이렇고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이래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훼방을 다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된다.
그래야 너희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 그러므로라 하는 것은 뭣을 말했는고 하니 그 위에 보면, 우리가 일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일반 사람들은 다 원죄와 본죄로 영원히 죽어 있습니다. 죽어 있는데, 영은 하나로 단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체가 죽으면 몇 번이나 죽으면 죽겠습니까, 단일체? 단일체는 단번에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은 단번에 죽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그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해와를 통해서 선악과 먹고 난 다음에 영은 당장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 죽어서 뭐 더 죽을 것도 없고 아주 그때부터 죽어 버렸습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끊어졌으니까 영은 기능적으로는 하나도 없는 그런 영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 육이라는 것은 종합체기 때문에 열 개로 되어 있으면은 열 개가 다 죽어야 되겠고, 백 개로 되어 있으면 백 개가 다 죽어야 되겠고, 억만 개로 되어 있으면 억만 개가 다 죽어야 됩니다. 그러면 육은 그 갯수가 우리는 모릅니다. 만 개인지 억만 개인지 모릅니다. 요새 의학적으로 말하기를 사람은 세포로 되어 있다. 뼈도 뭣도 다 세포로 되어 있는데 그 세포가 얼마나 되느냐? 그 세포로 말하면은 수억만도 넘습니다. 그러기에 이 육이라는 것은 죽는 것이 시간이 걸려서 여러 차례로 죽어서 중복적으로 죽는다. 그러면 그 육이 다 죽기까지 세상에서 꼬물꼬물거리다가서 다 죽으면 그때 끝이 나 버리고 만다. 영은 단번에 죽는다. 그러기에 사람이 장수하고 단명하고 하는 것은 육이라는 것이 그것이 일찍 죽고 늦게까지 가서 늦게 죽고 해서 인간의 육의 수명이라는 것이 장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 같은 성경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는데, 사람은 성경에 영도 말하고 육도 말하기 때문에 성경에 영이 있다고 하니 영이 있다는 말 하고 육이 있다고 하니 육이 있다고 말 하는데, 그러면 영과 육이면 사람이 어데까지가 영이며 어데까기 육이냐 하는 여게 대해서 아직까지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이것이 똑똑한 공통성 있는 그런 교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세계의 전 신학자들이 영은 어떤 게 영이며 육은 어떤 게 육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 확실한 교리가 나와 있지를 안하고 다 그저 짐작해 있고, 또 틀린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영은 뭐인가 하는데, ‘영은 뭐인가? 영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그러면 영은 뭐이 영인가? ‘양심이 영이라’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많고 `이성이 영이라’ 이렇게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칼빈은 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칼빈은 이성적 영이라 이랬습니다. 이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영이라.
이러니까, 이성은 우리가 알기로는 이성이 영입니까 육입니까? 여러분들은 뭐라고 배웠습니까? 육으로 배웠습니다. 이러니까, 이거 뭐 이 세계 지금 교리와는 이거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나가면, 그저 여게서 배우고 나가면 그대로 될 줄 알아도 배우고 나가면 정반대되는 학설들이 전부고 이대로 하는 것은 적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게서 들어서 똑똑히 깨닫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깨닫지 안하면 다 헛일하요.
어떤 사람은 여게 있는 진리를 바로 깨닫고 보니까 세계에 있는 교리와 신조, 어떤 교리와 신조도 달라들어서 ‘이것은 삐뚤어진 게 많을 것이다. 달라들어 가지고 헤쳐서 안 된 것은 집어 던져 버리고 좋은 것만 가려 먹어야 되지 이거 다 먹으면 안 된다.’ 이런 확고한 신앙의 담력을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어떤 사람은 여게서 배울 때에 확고한 신앙을 가지지 안하고, 또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배워 가지고 실행은 해 보지를 안했습니다. 실행은 해 보지 안한 사람은, 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실행을 해야 알지 실행하지 안한 사람은 모르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은 양심이 영이라, 사람의 이성이 영이라. 그러면 양심은 영에 속했습니까 육에 속했습니까? 영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육에 속한 줄로 아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녜, 육에 속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 얼마나 거리가 먼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단단히 배워 가지고서 요 사실이 맞나 안 맞나 하고서 여러분들이 배운 대로 고대로 실행을 해 보면은 확실한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난 다음에는 미혹을 받지를 않습니다.
속담에 우리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사랑방에 앉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서 ‘서울 남대문 남대문, 서울 남대문이라 하는데 그 남대문 한번 구경했으면 좋겠다.’ 이라는데 그래 하나가 떡 말하기를 ‘남대문 아직 구경 못 했나?’ ‘그라면 남대문 가 봤나?' `가봤다' 이라니까 또 저기 있는 사람도 ‘그래 가 봤어? 참 좋지. 나도 남대문을 언제 한번 가 봤다.’ 했다 말이오.
했는데, 그래 이라니까 말하기를 ‘그러면, 남대문은 그렇게 서울 남대문이니까 사람이 그렇게 많이 출입을 하니 그 문터막을 뭘로 해 놨더냐?’ 하나가 있다가 ‘문터막이 대추나무라’ 이래 놨다 말이오. `대추나무라' 이라니까 또 인제 하나는 있다가서 ‘문터막이 뭘로 돼 있더냐?’ `문터막이 없더라' 이라니까 그 사랑방에 앉아서 ‘문터막이 없더란 말이, 문 쳐 놓고 문터막 없는 문이 어데 있노?’ 그렇게 말했다 그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 지식이라 하는 것은 다 문터막이 있는, 문턱, 문턱 이거, 문턱 있는 문만 봤지 문턱 없는 문을 못 봤기 때문에 ‘문턱 없는 문이 어데 있노?’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만 그 방면은 그 사람이 이겼다 그거요. ‘문턱 없는 문이 어데 있노? 너는 남대문 문턱 없다 하는 것 보니까 가 보지도 않은 것이 공연히 그 말한다.’ 문턱 있다 하는 사람에게 ‘너는 문턱이 있으면은 그 문턱은 무슨 나무로 했더냐?.’ 밸가이 달아 가지고 있는데 그거는 대추나무더라’ ‘야, 네 말이 맞다. 나무 중에는 대추나무가 제일 여물기 때문에 대추나무로 문터막을 했다는 말이 맞다. 나는 문터막이 없다 하니까 그거는 틀렸다.’ 이렇게 말하는 거와같이 그러면 그 사실이 틀렸다 말이요, 사실과는. 없다 말이 맞다 그거요. 이렇게 이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또, 꽁꼬리 철학이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꽁꼬리 철학이라는 말은 뭐인고 하니 사람들이 산에 갔다가서 털을 주워 가지고 왔습니다. 털을 주워 가지고 왔는데 꽁털을 주워 가지고 왔다 말이오. 꽁털을 주워 가지고 왔는데 이 사람들이 동리에서 모여 가지고 ‘야, 사람들아 이게 무슨 털이냐?’ 이라니까 이 동리 사람이 말하기를 ‘그거는 코끼리 털이다.’ 코끼리가 털 있습니까? 코끼리 털 있소? 털이 없다 말이오. 이런데 코끼리 털이라. ‘이게 어찌 코끼리 털이냐?’ ‘짐승 쳐놓고 제일 큰 짐승이 코끼리다. 코끼리는 다리로 말하면 이거 큰 기둥만 하게 큰 코끼리는 한아름 다리가 된다. 코끼리는 그렇게 아주 제일 큰 짐승이기 때문에 이 털이 이렇게 길고 큰 거 보니까 큰 짐승의 털이 아니겠느냐?’ 이러니까 그 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마는서도 하나는 있다가서 ‘코끼리 털이라’ 하나는 또 `사자가 짐승 중에는 왕이니까 이거는 사자 털이다’ 또 ‘이거는 범 털이라' 이렇게 논단이 났다 그말이오.
났는데, 또 하나는 있다가서 ‘이거는 그런 게 아니고 꽁이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털이라. 이라니까 그 방 안에서는 모두 다 지식이 통일되기를 ‘네가 틀렸다.
짐승 쳐놓고는 코끼리가 제일 크지. 이러니까 이 털은 코끼리 털이다.’ 그때 또 그것으로 통일이 됐더라. ‘코끼리 털이다’ 이렇게 통일이 됐더라 그말이오.
됐었는데, 그 뒤에,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너희들이 코끼리를 보지 못해 그렇지 코끼리는 털이 없다. 멀건히 털이 하나도 없고 그래 돼 있다.’ 이래 참 코끼리를 보니까 털이 하나도 없거든. ‘이거는 틀렸다. 이거 이 털이 코끼리 털이라 하는 말은 이거 틀렸다.’ 이게 그 뒤에 세월이 지나가니까 발명이 돼서 그게 틀린 줄 알았다 그말이오.
또, 그다음에는 ‘그러면 이게 뉘 털이냐?’ `이거는 사자 털이다' 이랬는데 또 사자를 못 봤지마는서도 어째 오래 세월이 지나가니까 사자를 봤다 말이오.
사자를 보니까 ‘사자는 머리털같은 그런 털만 있지 그렇게 꿋꿋한 이런 털은 없더라. 이러니까 사자 털이 아니라.’ 이게 또 이제 틀린 게 또 정죄가 됐다 그말이오.
또, 그 뒤에 있다가서는 ‘이거는 뭐 범털이라’ 이렇게 말하다가 그게 또 한 때는 승리를 했다가 마지막에는 이거는 꽁이라는 그런 새가 있는데 새털이라.
나중에 꽁을 보니까 참으로 꽁에 그 털이 박혀 가지고 있어서 그 꽁털이 됐더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 지식이라 하는 거는 갈 지(之)자 지식이라 그말이오.
갈지는 어째 쓰느냐 하면 요래 가지고 요랬다가 요랬다가 요라면 요게 갈 지(之)자입니다. 요게 갈 지(之)자. 이러니까, 세상 지식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는 이렇게 주장을 하다가 또 이렇게 주장하다가 이렇게 주장하다가, 세상 지식이라는 것은 일관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이 물리에 대한 물리 지식은 그것이 일관되어 있고 그것이 차차차차 더 알아져 들어가고 깊이 들어가지 그것이 아주 틀리지는 안하지마는서도 다른 무슨, 인간에 대한 지식이라 하는 것은 갈 지(之)자 지식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많은 도덕가들이 있지마는서도 사람에 대한 지식은 맞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틀렸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맞은 것이 없어. 그러기에 세상에 배암의 지식, 배암의 지식이 사람에게 대한 지식을 말했는데, 사람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이 다 틀렸고, 다만 물질에 대한 지식만은 맞아 있다.
그러면 물질에 대한 지식은 맞아 있으나 물질에 대한 지식이 반거짓말로 되어 있다. 반거짓말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물리에, 물리에 대해서는 고것이 맞지마는서도,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 된다. 또 이것은 뭐 이 물질하고 이 물질하고 둘이 합하면 뭐이 된다. 나무하고 흙하고 이래 둘이 합하면 집을 만들 수가 있다. 이런 물리의 이치는 맞지마는서도 그것과 사람과의 조화 관계, 이 물리와 사람과의 조화 관계의 요 지식이 다 틀렸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다 틀렸다.
그러면, 아주 틀린 거 있으니까 사람에 대한 지식은 아주 틀렸고, 물질에 대한 지식은 반거짓말로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반 맞은 것은 뭐이냐? 물질 자체에 대한 지식은 맞았지마는서도 물질과 사람과의 조화성, 사람이 이 물질을 어떻게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사용하여야 되느냐? 이 물질과 사람과의 그 관계성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물질의 지식은 반은 맞고 반은 안 맞았기 때문에 그게 반거짓말이니까 아주 틀린 것보다도 반은 틀리고 반은 맞은 고것이 사람에게 해독을 더 많이 주고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전거짓말이 사람에게 해를 많이 줍니까 반거짓말이 사람에게 해를 많이 줍니까? 반거짓말에게 많이 꼬여 들어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물리라 하는 이 과학은 반거짓말이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꼬와서 많이 상우고, 인간에 대한 지식은 이것은 아주 틀렸기 때문에 거기 대해서는 미혹을 적게 받는다. 그래, 기독자들이 제일 반거짓말 이 과학에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손해를 많이 봤지, 인간만에 대한 지식이 뭐 세상 도덕이라든지 사상이라든지 또 철학이라든지 이런 데에는 별로이 손해를 보지를 아니합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이것이 벌써 기독교가 처음부터 생긴 걸로 말하면 지금 육천 년이 다 돼 가고 또 이 신약 교회가 시작된 것이, 벌써 신령한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은 이천 년이 다 돼 갑니다. 이 성경을 우리가, 인류가 이 구약 성경을 받은 것을 이것은 사천여 년이 돼 가고 신약 성경 받은 것은 근 이천 년이 갔지마는서도 내나 그 성경 보고 예수를 믿지마는 깨달은 게 달라 가지고서 예수 믿는 주장이 다 다르다 말이오.
깨달은 게 다른 것 중에도 사람 자체가 어떻게 생겼느냐? 사람에 대한 인생관이 영 틀렸다 그말이오. 인생관이 틀려서 사람은 영육으로 돼 있다 하는 것은 성경에 영육으로 돼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영육을 말하지마는서도 그 영은 뭐이냐? 영은 보이지 않는다 말이오. 영은 보이지 안하니까 영을 가리켜서 양심이 영이다, 이성이 영이다, 마음이 영이다, 육이라 하는 거는 순전히 고기덩어리다 이렇게 해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게 틀린 게 어마어마하게 틀린 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배워 가지고 나가면은 이것이 이렇게 틀렸기 때문에 나가 가지고 미혹을 많이 받기 쉽다 말이오.
이러니까, 백 목사는 국민학교 오학년까지밖에 안 했습니다. 안 했어. 그런데, 이 박사, 뭐 박사가 이 사람은 열 둘이라. 어떤 박사 내가 잠깐 그때 한번 어째 라디오를 그때 틀고 싶어서 뻐뜩 트니까 마침 불교 사람인데 그 박사가 어떤 박사냐 하면 서른 둘이 박사라. 논문 박사가 열 서인가 되고, 또 명예 박사가 열 아홉인가 돼서 박사가 서른 둘이라. 서른 둘인데 인제 자기네들이 이 좌담을 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렇게 이 박사를 서른 둘이나 하도록 착안을 했습니까? 그라니까 그 사람이 자기 착안한 동기를 말하는데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내가 나 가지고서 온 세상을 돌아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이거 다 차지했고 저거 다 차지했고 다 차지해서 차지할 것이 없더라. 무엇이 좀 내 이름을 날리고 이와같이 유명해질까 해서 유명해질라고 유명해지는 그런 길을 찾을라고 해 봐도 다 전부 이거는 이 사람이 유명했고 저거는 저 사람이 유명했기 때문에 유명 다 따먹어 버리고ㅡ내 말입니다, 요거는. 따먹었다는 말은 내 말이오. 그런 뜻이라 말이오ㅡ유명 다 따먹어 버렸고 이제 유명해질래야 유명해질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박사라면 다 학자로 알고 유식하게 알기 때문에 나는 박사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이것을 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그때부터 박사 제일 많이 할려고 착수해 가지고 어쨌든지 박사 따기만 애를 써 가지고서 이제까지 서른 둘을 땄다.’ 박사로는 세계에 박사로서는 그 사람이 제일 많답니다. 박사가 제일 많대요. 그거 그러면 제일 많으면 그거 뭐라 합니까? 그걸 뭘 한다 합니까? 뭐 한다 합니까, 뭐? 토우 한다 하더나? 예? 톱한다 하나? 그래 톱. 그래 그 사람이 톱이래요. 박사 톱.
그걸 볼 때에 나는 큰 지식을 얻었습니다. ‘이것도 내나 뿌럭지를 보니까 우리가 죽여라, 죽여라, 자기 중심 자기 위주를 죽여라, 자기 중심 자기 위주를 죽여라 했는데 이게 전부 내나 이것도 보니까 원죄가 들어서 이 짓 했구나.’ 그걸 봤다 말이오. 뭐 그러니까, 수많은 것이 발 아래 밟혀 버렸다 말이오. 수많은 것이 발 아래 밟혔어. 하나님이 고렇게 하실라고, 라디오가 있어도 뭐 몇 달 가도 한번도 안 틉니다. 안 트는데, 그때 어째 라디오가 이상하게 틀고 싶어서 딱 트니까 고게 나와서 그것으로서 이 세계에 많은 문제를 발 아래 또 밟아 버렸습니다. ‘이 세계가 이런 것이로구나.’ 이와같이 이 세상에 성경 한 권이지마는서도 보는 것이 그렇게 아주 각각 달라서 복잡해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영이 중생했는데 중생된 영이 죄 안 짓는다 해 가지고서 마구 온 세계가 지금, 서양에서는 지금 이게 설설 뻗쳐 나가니까 ‘동양에서는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단다.’ 이렇게 말하니까 뭐인가 이래 생각하는 것도 있고, 또 한국에서는 ‘중생된 영이 죄 안 짓는다 하는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이래 가지고 ‘이거는 이단이다' 정죄를 했다 말이오. ○○노회에서 정죄했습니다.
○○노회에서 정죄를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거는 이단이다.
중생된 영도 범죄한다.’ 이래 가지고서 이단으로 정죄를 해 가지고서 노회에서 결의를 했는데, ○○노회라면 온 한국에 노회 쳐놓고 제일 큰 것이 ○○노회입니다.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차차차차 좀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자꾸 ‘뭣 때문에 이거 중생된 영을 범죄한다고 너희들이 주장을 하느냐?’ 이것을 많이 말했으면은 갑론 을박으로 막 이래 가지고 그 두 편이 돼 가지고서 이럴 터이면 내가 수가 적으니까 당할 수가 있습니까? 당할 수 없는데, 이기기는 이겼다 그말이오. 이랬지마는, 그래서 가만히 냅두니까, 시비를 하지 안하고 그러니까 설설 배어 들어오니까 자기네들이 양심을 찾아 가지고 자꾸 연구하다 보니까 ‘중생된 것이 성경에는 중생된 것은 영생으로 중생됐다 했는데, 중생된 영이 영생으로 중생했는데 영생으로 중생한 그 영이 만일 죄를 짓는다고 그래 하면은 다시 그거는 죽어야 되지 않느냐? 죄는 죽는 것인데. 그러면 영이 죽으면, 중생됐다가 영생으로 살았다가 또 범죄해서 또 죽고, 그라면 영도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자꾸 몇십 번이든지 자꾸 이렇게 하게 된다고 하면은 영생이라 하는 거는 거짓말이 아니냐? 그러면 다,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하니까 어데 영생이 있으며 확고 불변의 영원이 어데 있느냐?’ 이런 것만 좀 생각하면 알 것인데 하나님이 딱 가뤄 놓으니까 모른다 말이오. 가뤄 놓으니까 몰라서, 이거는 뭐 이래도 가뤄 놓으니까 전연히 그걸 모르고 있어요.
이래서, 인제 지금 차차차차 배어 들어가니까 모든 사람이 ‘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영만 살아났다. 로마서 또 8장에도 말하기를, 영은 의를 인해서 산 것이나 이 육은 죄로 인해서 죽어 있다.’ 영에 대한 것을 자꾸 눈을 뜨고서 성경을 보니까 ‘영은 이것은 단일체로 돼 가지고 있어서 단번에 죽고 단번에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을 성경을 다 읽어 보면은 알게 되고, 이러니까 이제 영에 대해서, 한 군데는 말하기를 ‘성령과 물로 중생했다’ 한 군데는 또 ‘피로 중생했다' 이렇게 해서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것이 다 통계가 돼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이렇게 중생했고, 또 요한1서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그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만지지도 못한다.
가까이 오지도 못한다. 이는 하나님께로 나신 자가 지키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하지 못한다. 죄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악이 가까이 오지도 못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난 자가 지키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난 자가 우리에게 몇이 왔습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 하나님께로 난 자를 말해 봅시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몇입니까? 셋. 뭣 뭣이요, 그러면? 녜, 그라면 됐어. 피는 성자요, 또 성령이요, 또 진리는 신격성이나 인격성은 가지지 안한 하나의 이치인데 그는 전능의 이치입니다.
이렇게 성자가 대속으로 지키시고, 또 성령이 하나님이신데 중생시켜서 지키고, 또 진리가 지키고 이 우리가 중생된 이 영은 영생을 가졌는데 그 생명력이 뭐입니까? 중생된 영의 생명력이 몇이 중생된 영의 생명의 힘인지? 무슨 힘으로 영생이 됐는지? 이 영생하는 생명력이 몇 가지로 되어 있습니까? 한 힘입니까 두 힘입니까 세 힘입니까 네 힘입니까 열 힘입니까? 중생된 그 생명력이 몇 힘으로 되어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손가락으로. 뻐뜩 들어서 가리켜야지, 저 뒤에도. 높이 들어 봐. 이래 한번 해 봐요. 이래 하지 말고, 이래 한번 해 봐. 이래 이래. 그래 이 셋. 셋 힘입니다.
셋 힘은 무슨 힘이냐?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완성. 예수님의 대속은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요, 또 범죄한 것을 율법이 죄 없다. 하나님의 전지 입법이 이는 죄 없다 한 것이 우리 사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의 율법이 이는 의롭다 한 것이 칭의입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나와 하나 됐다 하는 이 결합이 이제 화목의 제물로써 화친의 생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력입니다.
이게 영생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이 세 가지, 하나님께로서 나왔다 말이오.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한 분에게서 나왔다 그말이오. 그러면 나온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는데 아버지가 먼저 있었던 아니라. 아버지가 하나님의 본체요, 거게서 성자가 나왔는데 성자는 뭐입니까? 성자는 그라면 하나님의 지체입니까 본체입니까? 지체입니까 본체입니까? 지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본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본체. 주님의 신성, 성자도 하나님의 본체시요, 성령도 하나님의 본체시요, 성부도 하나님의 본체시요, 그러면 다 각각 본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성부의 본체, 성자의 본체, 성령의 본체, 이 본체가, 그러면 이 본체가 세 본체입니까 한 본체입니까? 세 본체인데 한 본체입니다.
요것이 인간의 지식으로써 해석할 수 없는 것인데, 요것을 깨닫고 발견하기는 했지마는서도 요 말이 틀려 가지고서 지금 세계의 신학들이 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부 성자의 그 관계가 어찌 되느냐?’ 이것이 아직까지도 이것이 바로 되어 있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니케야 회의에서 그것을 밝혔고, 콘스탄틴노불 회의에서 그것을 밝혔고, 또 에베소 회의에서 밝혔고, 칼세톤 회의에서 밝혀서 성자에 대한 것은 바로 지금 세계, 이거 사대 회의라 하는 것은 이게 사대 회의입니다. 네 큰 회의.
여게서 밝혔는데 됐지마는서도, 이거는 밝혀졌지마는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일체에 대해서, 삼위 일체에 대한 이 교리가 아직까지도 통일되지를 안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위 일체에 대해서 아무래도 인간이 알 수 없는 그런 이치기 때문에, 그거는 초자연의, 본체에 대한 연구기 때문에 그거는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가 없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그 카브넌트 신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 둘이 저한테 편지가 오기를 ‘이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이거 목사님에게 배운 거와는 정 아주, 아주 뭐 얼토당토 안 합니다.’ 그것을 말해서 보내 왔어. 그래 보니까 ‘이 얼떨떨한가?’ 하니까 이 배운 게 옳다고는 이렇게 생각하기는 생각했지마는서도 거기서 그런 게 나오니까 어떻게 틀렸다 하는 데 대해서 확고한 그런 강한 그런 견고성이 없어서 제가 그때 전화 번호를 알아 가지고서, 뭐 영어 모르면 못 한대요. 이래서, ‘그러면 거게 있는 전화 번호를 하면서 전화 요금은 한국에다 부담을 시키고 그래 가지고 전화를 해라. 그라면 내가 그걸 좀 전화를 할 수가 있겠다.’ 저거는 뭐 돈 없는 유학생이니까 할 수 없고, 그래서 그랬더니마는 그래 전화가 왔어. 그래 가지고 그 전화로써 거게 대한 교리를 간단하게 다 말을 해 줬습니다. 지금은 좀 확고할 것인데 그래도 또 여기 와 더 배워야 되지요.
그래서, 사람의 영육이라 하는 거 아직까지 해결을 지금 못 보고 있고, 또삼위 일체에 대해서도 그 의논이 다 분분하고, 또 하나 어려운 문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라면 하나님의 절대 예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성이라 하는 이거와의 그 조화가 어찌 되느냐 하는 이것이 또 난제가 돼 가지고서 그것을 그렇게 문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는 것, 그래서 나는 늘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내가 이걸 뭐 성경 보고 연구한 게 아니고 이와같이 그저 성경을 보고 뭐인고 하는 것은 어떨 때는 길 가다가도 나타내 주셔서 알게 됐고, 어떤 거는 또 화장실에 가 가지고서도 알게 됐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다가도 알게 됐고, 알고 나서 성경을 보면은 성경이 똑똑해서 알아져서 그래 가지고서 안 것입니다. 제가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이것이 핍박을 많이 받았지마는서도 그 말이 옳습니다. 기본구원 건설구원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옳고, 중생된 영은 영원히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영이 뭐인지를 몰라서 그랬더라 그말이오.
우리 마음은 그라면 영에 속했느냐 이 마음은 육에 속했느냐? 마음은 육에 속한 것이 그것이 성경대로 바로 된 것인데 아직도 그것을 얼떨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짐승은 혼과 몸이 있습니다. 짐승도 혼이 있습니다. 짐승도 혼이 있고 사람도 혼이 있습니다. 혼이 있는데, 영과 혼과 이 몸 이 셋으로 성경에 말해 놓은 데도 있고, 영육이라 이렇게 말해 놓은 데도 있는데, 짐승도 혼이 있다 해 놨기 때문에 짐승도 뭐이 있느냐 하면은 각혼이 있다 말이오. 말하자면 깨닫는 각혼, 우리 마음과 같은 것이 짐승도 있다 말이오. 짐승도 우리 마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영은 없습니다. 짐승은 영은 없습니다. 마음과 같은 혼은 있어요. 그것이 마음이라, 혼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짐승도 그런 것이 있어요. 짐승에 무슨 마음이 있나? 우리와 같은 이성도 있고, 추억성도 있고, 기억성도 있고, 연구성도 있고, 궁구성도 있고 그런 거 다 있습니다. 짐승도 있는데, 사람보다는 좀 저급이라 말이지 있기는 다 있습니다.
‘짐승에게 무슨 연구성이 있으며 무슨 계산성이 있느냐?’ 없는 것 아니오. 그게 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랬다 말이오. 어릴 때 보니까, 시골에서 자랐는데,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이 새끼를 낳아 가지고서 큰 개가 고만 도랑을 훌쩍 건너뛰니까 이거 그 새끼들이 보니까 강건한 놈은 막 용을 써서 훌쩍 건너뛴다 말이오. 이 작은 놈 이놈은 깽깽거리고 건너뛰지를 못하고, 이라니까 큰 놈이 애가 터져서 왔다가 또 와서 또 그래도 또, 가니까 또 따라갈라고 막 짖기만 하고 깽깽거리지 못 가더라 그말이오. 못 가. 그놈은 가면 물에 빠져 버립니다.
물에 빠질 줄 알고 안 간다 말이오. 자기 힘을 알아 가지고 자기 힘으로서 물에 빠질 터이니까 안 건너가고, 자꾸 이래 가지고 있다가서 나중에 안 되니까 막 아래로 위로 돌아다니고 자꾸 이래 쌓다가, 돌아다니다가 어째 고 건너는 노지가 있으니까 노지 그리 또 건너고 건너고 건너 가지자고서 저기 가는 걸 보고 따라가더라 그말이오.
이것을 보면, 우리는 그걸 몰랐지마는서도 저 방목하는 그 몽고 같은 데 그 소떼, 소 떼도 보면은 소가 여러 수천 두 여러 수천 두가 한 떼가 돼 가지고 있고 양도 그러고, 사슴들도 여러 수천 두가 한 떼가 돼 가지고 있는데 이거 뭐 이래 갈 때는 합해서 선두로 쭈욱 가면 그만 뒤에 따라서 막 가는데 가다가 보면은 그만 금방 새끼 낳은 거 있으면 그런 거는 물에 다 빠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일 년에 새끼가 빠져 죽는 것이 수없이 빠져 죽고 또 나는 것도 수없이 나기 때문에 그 떼가 살고 있는 것인데.
그런 걸 보면은, 이것이 뭐 강을 만나면 막 이리저리 막 돌아다니다가서 나중에 그리 들어가서 빠져 죽는 것도 안 빠져 죽고, 저리이리 돌아다니다가 이제 그 물이 갈라지고 세 갈래 네 갈래 갈라졌으면 그런 데로 또 이래 가 가지고서 그래 가는 것도 있고 하나님이 이 자연으로 돼 가지고 이거 자연으로 이것이 자연과 필연적으로 살고 유지하고 번식하고 하는 것이 그 속에 다 이치가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거, 여러분들이 이 테레비도 문화 테레비 그런 거는 보면은 아주 필요한 게 많이 있어요. 나는, 며칠 전에 내가 얘기했지마는서도 저녁을 먹으니까 그 조그만한 학생이 하나 와 가지고서 ‘테레비 좀 보이소.’ 이래서 ‘테레비에 뭐이 나오는데?' `좋은 거 나옵니다' 이래서 테레비를 보니까 기계 체조를 하고 있어. 기계 체조를 하는데 뭐 이 뭐 하는데 보니까 그 사람은 하나밖에는 못 해요. 다 보니까 하나씩밖에는 못 해. 그 기술 평생. 저걸 몇 해나 공부를 했느냐 하면은 한 열 살 미만 때부터 공부해 가지고서 벌써 한 스무 살이 다 되기까지 이렇게, 스무나문 살 되기까지 공부를 했는데 하나 고것만 해. 그래 거기서 일등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하나 있는데 그거는 보니까 어째 하느냐 하면은 이래 훅 뛰어 가지고서, 뛰어 가지고 이래, 꼿꼿잽이로 이래 뛰어 가지고 이래 이래 넘는데 세 바퀴를 넘는 사람이 그거 하나뿐이라. 다른 사람은 두 바퀴는 다 넘어요. 두 바퀴는 넘고 이놈이 툭 뛰어 가지고 요 옆으로 요래 도는, 요래 가지고 도르르르르르 요래 도는 것는 세 바퀴 넘는 사람이 많이 있어 그걸 보니까, 저것이 저 연습으로 돼 가지고 있는데, 그래 내게 떡 성령이 가르쳐 주기를 ‘육체의 연습은 유익이 적고 경건 연습은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느니라.’ 유익이 많다 이랬다 말이오. 그러기에, 그때 그걸 보고 나서 내가 경건 연습이라 하는 데 대해서 착안을 해서 여러 날 동안 이 설교한 것이 경건에 대해서 설교했어. ‘경건도 연습을 해야 된다. 경건도 연습을 해야 된다.’ 그러면, 경건은 어떤 것이 경건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망하는 그 소망을 이제 진리와 영감에서 지식을 얻어 가지고, 진리와 영감에게 지식을 얻어 가지고서 그 지식을 또 믿어야 돼. 안 믿으면 안 돼. 그 지식을 믿어야 되고, 그 지식을 믿어야 되는데 우리 몸이 또 그 지식을 믿는 일을 한 번, 두 번, 백 번, 천 번 연습을 하면은 그 일이 숙달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연습을 해서 백 세에 얻은 독생자를 번제로 드리라 이래 해도 아브라함이 놀라지 안하고 그라고 나니까 얼마나 좋던지, 좋아서 밤새껏 잠을 못 잤어. 잠을 못 자고 지금, 번제 드리라고 하니까 ‘번제를 드리는 데는 솔가지가 있어야 되겠으니까’ 장작은 그뭐 모리아 산이면 그때 산중이니까 뭐 나무가 여러 수백 짐 꽉 차 가지고 있는데 그 나무 해 가지고 갈 게 뭐 있겠소? 그렇지만 자꾸 밤새도록 생각하다 보니까 ‘집에서 바짝 마른 나무를 이래 해 가지고 가야 되지 거게서 나무하고 어짜고 하면 안 되겠다’ 밤새껏 쪼개 가지고 나무 만들고 뭐 기뻐 못 견뎠다 말이오.
백 세에 얻은 독생자를, 번제라 말은 불에 태워서 바짝 재가 되구로 만들라 그말이오. 그말인데, 이 소리를 듣고 왜 그리 기뻤을까? 기쁜 그것이 하나님에게 순종 연습을 많이 했다 말이오. 순종 연습 또 하니까, 순종 연습하니까, 이제 절단난다 했는데, 절단났는가 보니까 절단나지 안하고 더 좋고, 순종 연습하니까 더 좋고 더 좋고 하니까 순종 연습을 여러 수백 번 수천 번 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하라 하는 그 순종해 가지고서 손해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순종하기 어려운 일은 더 유익이 많았고 또 순종해 가지고서 큰 낭파라 하는 거는 더 유익이 많으니까 자기로서는 백 세에 얻은 독자를 번제로 드리는 그것이 이제, 독자가 불에 타 없어져 버리면 그게 더 큰 손해고 더 큰 낭파고, 큰 낭파될 일을 시키니까, 이제까지 경험하고 체험하고 연습한 대로는 큰 낭파될 일을, 제일 큰 낭파될 일을 하나님이 시키실 때에는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을 그가 체험했습니다.
제일 큰 낭파요 제일 큰 손해가 가는 그 일을 주님이 시키시니까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되겠다고 그가 경험과 체험을 가졌습니까? 연습한 대로는, 이제까지 연습에는 어찌 됐습니까? ○○○목사님. 이제까지 주께 순종하는데 요만한 손해 보는 것은 나중에 보니까 주먹덩이만한 것이 나오고 주먹덩이만한 손해 본 것은 내가 손해는 절대 없고 주먹덩이만 것은 이만한 유익이 있고 이제 제일 큰 것이 희생되는 큰 낭파를 명령해서 이걸 순종하면은 뭐이 옵니까? 제일 큰 것이 온다 하니까 이제까지 평생 못 본 큰 유익이 오니까 벙긋거려서 밤이 새도록 못 견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뭐이냐? 경건 연습이라 말이오. 경건 연습.
하나님에게 대한 모든 지식을 자기가 고대로 실천해서 이래 가지고 하는 실천하는 요것이 경건 연습인데, 이게 자꾸 연습으로 말미암아 됐다 말이오.
그래 나는 그걸, 테레비를 보면서 거기서 놀래 깼어, 내가. 이거 참 내나 말은 하기는 했지마는 내가 그때 느낀 것만치 느끼지는 못했어. 이런 것도 다 연습을 해 가지고 이래 되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과같이 온전히 되어지는 이 참 어려운 문제를, 입술로만 말하고 연습 하나도 안 하고 입술로만 말하고, 그 묘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라면 된다’ 하는 논리적으로 자기 지식적으로 알고 기억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 가지고 그게 되어지느냐? 만일 기억적으로 요래요래 하면 된다 하고서 그 사람이 묘기 연습을 일생 동안 한 사람과같이 논리적으로 알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요래 요래 하면 된다. 그라면 한번 해 봐라. 요래요래 하다가는 어찌 됩니까, 그 사람? 어찌 돼요? 높은 데 올라가 가지고 요래 조래 하면 어찌 됩니까? 어찌 돼? 단단히 알고 있고, 지식으로 알고 있고 또 기억으로 단단히 외우고 있는데 지식과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그렇다 이거 뭐 천 번 만 번 말해 쌓았는데 그거 가지고 실상을 제가 해 보지 안했는데, 그라면 다 된다고, ‘왜 못해? 이래이래 하면 되지.’ ‘해 봐라.' 그 사람이 해 볼라고 높은 데 올라 가서 이래 버리면 어찌 되겠지요? 어찌 되겠소? 예? 머리가 깨져? 박살이 되지. 머리만 깨지는가, 몸뚱이도 깨지지, 박살돼 버리지, 박살되지. 그러기 때문에 이 지식과 기억이 소용없다 말이오. 지식과 기억이 소용없어. 실제로 이거 연습 안 하면 안 된다 연습 안 하면 안 된다.
그래, 지난 밤에도 거게서 깨달은 것을 또 내가 지금 엊저녁에 말한 것입니다. 이 몸에는 여러 가지 지성도 있고 기억성도 있고 요 모든 감각성도 있고 또 행동성도 있고 총지휘성도 있고 이 모두 또 거기에 소속성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있는데 이것을 실상으로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말이오.
그 사람이 지식과 그 기억으로 알았으니까 그거야 알지. 뭐 이라니까 ‘그거 이리이리이리 하면 되는 거야.’ 이러니까 그 사람에게 말하니까 일등으로 강의를 합니다. 이리이리이리 하면 된다 했는데, 실상 ‘그라면 이렇게 선생님은 잘하시겠네요. 한번 해 보십시오.’ ‘그거야 잘하고 말고.' 이 높은 데 올라가 가지고 잘할라고 툭 하다가 박살이 돼 버리고 만다 말이오. 박살.
그것은 자꾸 지성 가지고 아니고 이것을 연습하고 연습해 가지고서 사람들이 분석할 수 없는, 온갖 이 몸에, 몸에 모든 요소 그 전체 또 신경, 신경도 여러 백도 천도 넘습니다. 그러면, 연습한다 하는 것이 이 신경이, 다 연습이라는 거는 다 그렇습니다. 씨름도 그렇고 뭐이든지 연습이 다 그렇소. 그 신경이 몸에, 예를 들면 백 가지 신경이 있는데 이 백 가지 신경이 이거 할 때는 이 백 가지 신경이 이리 쫙 모이고 이거 할 때는 이리 모이고, 신경도 이리 집합하고 또 거게 근육의 그 모든 힘도 다 이리 집합하고 이라니까 조그만한 아이지마는서도 그게 신경이나 그 모든 근육이나 모든 힘이라는 것이 한테로 모여 가지고 하니까 아무리 장사라도 절단나. 뭐 아무리 장사라도 훈련 없는 사람은 이 힘이 여러 천 가지 만 가지로 나뉘어 가지고서 이래 이 전체가 이래 움직여지는데 한테로 집중을 하지 못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체면술이니 그건 거 다 집중시키는 것이라. 사람들, 뭐꼬? 무슨 술이라 하노? 기합술이라 하나? 기합술 거석하면 그 사람이, 벌거벗고 이래 누웠는데 큰 추럭에다가 짐을 막 가뿍 싣고 그리 지나가도 꼼짝도 안 합니다.
조금도 상관없어. 추럭이 지나가도 그 배가 터지지 안한다 그말이오. 그걸 모두 다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니까 그거 구경하고 모두 신기하다 하는데, 그걸 기합술이라 하는데 그 기합술이라는 거 뭐이냐 하면 자기 기운을 한 군데로 압축했다 말이오. 기합을 한테 딱 모으니까 고거 차가 지나갈 때에는 전신의 힘을 딱 거기다가 딱 모으니까 그 큰 추럭이 짐을 한 짐 싣고 지나가지마는 상관이 없다 말이오. 또 기합술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 배를 이래 가지고 있는데 거기다 전 힘을 다 주고 있으니까 칼로 가지고 쿡 찔러도 칼이 안 들어간다 그말이오.
그건 그 힘을 요리 모을 줄 알고 조리 모을 줄 알고 다 이렇게 모을 줄 알아야 되는 것인데, 그런 게 연습으로 되지는 것이지 자기 논리를 가지고는 그것을 발표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몸에 사람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굉장한 요소의 신경들이 다 생겨져 가지고 그것으로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는 실지로 연습을 해야 거게 대한 그것들이 다 자꾸 연단이 되고 연습이 돼 가지고 되는 것이지 연습 없으면 안 된다 그말이오.
경건을 연습해야 되는데, 우리가, 사자가 와 가지고 엉크리는데, 다니엘처럼 사자가 와 엉크리는데 이 가운데 집어 던진다 할 때도 다니엘이 두려운 마음이 없고, 이 피부에 근심되는 마음이 없고, 이 피부가 기쁘고 즐거운 피부로 충만하고, 또 집어던질 때에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충만하고 그 가운데 툭 떨어지는 데에도, 이제 거기 훅 던지면은 사자한테 안 물려도 뼈가 부러지든지 뭐 떨어지면 낙상하든지 한 건데, 하나님이 순종하는 데는 전능이요 만능이기 때문에 만 길인 데서 떨어뜨린다 해도 ‘깨지면 어짤꼬?’ 그런 것이 없다 그말이오.
전능자가 다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전능자가 깨져 필요하면 깨지구로 하지마는서도 전능자가 깨지지 않게 할 때에는 깰 자가 없다. 암만 사자구덩이 집어 넣지마는서도 ‘사자에게 먹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사자에게 먹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뜻이 먹히지 안하게 하면은 먹히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전부가 내게 다 해서 유익되도록 이래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모든 개별 섭리의 주권 개별 섭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 염려가, 떨어져서 상할 것도 염려가 없고, 불 가운데 집어던졌는데 불이 와서 막 화닥화닥하니까 ‘불이 그만 태우겠다.
이상하다. 불이 날 태우지 않는다.’ 이상하다 했으면 어찌 됩니까? ‘이상하다.
내가 불 속에 있다.’ 했으면은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에 타겠소 안 타겠소? 예? 탄다 말이오. 뭘 보고 아는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가면서 이래 걸어가다가 ‘하나님이신 주님이 걸어오라 했으니까, 그분이 주권 개별 섭리자니까 걸어오라 했으니까 책임지고 걸어오라 했기 때문에 그분에게 순종하는 거는 변동이 없다.’ 이거 하나 가지고 쭉쭉 걸어갔는데, 가다가서 그분일랑 보지 안하고 엉뚱한, 바람을 보니까 그만 빠지지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말하기를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적게 믿는다 말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적다. ‘왜 의심하였느냐?’ 그것이 끊어졌다. 그게 끊어졌기 때문에 물에 빠진다, 그걸 주님이 밝히시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불에 들어가지마는서도, 불이 암만 태운다 해도 ‘불이 탄다, 태운다, 너 굽혀 죽는다, 새카마이 탄다.’ 암만 해도. 고것보다 탄다는 고것, 불 속에 들갔으니까 불이 나를 구워서 바짝 탄다는 고 지식보다 이제까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경험한 지식은 어떤 지식이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만을 보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순종해서 피동되는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긴 자는 주님이 그를 총책임지기 때문에 손 못 대고 사자도 손 못 대고 아무것도 손 못 댄다. 요렇게 주님에게 모든 걸 맡겨 놓고 주님만 바라보고 믿고 그에게만 피동되는 자는 하나님만이 그에게 대해서 크고 작은 것을 주권하고 관계할 수가 있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손 못 댄다.
요것을 믿는 것이 불에 들어가면 탄다는 고 지식보다도 연습으로써 강하게 됐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것이 변동이 없었다 그말이오. 이게 다 연습으로 된다 그말이오. 연습으로 되는 거.
나는 그날 밤에 그 기계 체조하는 걸 보고서, 연습, 경건 연습을 우리가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 경건 연습을 안 했기 때문에 알고만 있었지, 기억하고만 있었지 실상 못 했기 때문에 ‘너 불에 집어 던진다’ 하면은 그만 두말 할 것 없이 ‘아이구 불에 들어가면 타죽는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다는 그런 마음으로 들어갔으면 믿음 아닙니다. 그 사람 타죽고 절단나.
사자구덩이에 사자가 잡아 삼킨다. 하면은 잡아 삼킨다 나는 이제 생명 내놓고 죽을 각오하고 들어간다.’ 그러면 ‘이제는 사자구덩이에 죽어도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는 그칠 수 없다.’ 죽을 각오하고 들어갔고 이제 죽을 줄 알고 들어갔고 했으면 다니엘이 믿음입니까 믿음이 아닙니까? ○○○목사님, 믿음 아닙니다. 믿음 아니오. 믿음 아니오.
우리는 이렇게 신앙 생활 보면은 우리 신앙 생활이 어떻게 껍데기로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죽을 각오한다는 그것도 ‘나는 이제 주를 위해서 죽을 요량한다.’ 껍데기 말이고 아직까지 입문의 말이지 참으로 외나 바로 거석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 자기 물론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할 수 있지마는서도, 자기가 다 사랑해서 생명까지 다 바쳐서 주를 위해서 살 수 있기는 있지마는서도 세상에 어떤 주위 환경이 들어서 죽인다는 것은 믿지 안해야 됩니다.
‘죽인다. 너는 이라면 사형 받는다. 사형 받는다.’ 온 천하가, 이 역사 통계에 그거는 억억만이라도 다 그거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통계가 나와 있다 할지라도 그 통계를 발 아래 밟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말이오. ‘아니다.
억억만 명이 죽어도 나는 주님만이 내게 대해서 생사를 주권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죽게 하셔야 죽지 죽게 하시지 않으면 안 죽는다.’ 하는 요것을 연습을 해 가지고서 고것이 달성이 돼서 숙달이 돼야 된다 그말이오.
뭐 시간이 다 가서 안 됐는데, 오늘 아침에 이걸 좀 오묘한 도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칠라고 했는데, 인제, 가서 연구를 하십시오. 우리 자체가 어떤 것인데 어떻다는 것을 이것을 모르고 살면 헛일입니다. 고 위에 보면은 우리는 중생됐습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기 때문에 우리는 썩지 안하고 영생을 가진 자들입니다. 영생을 가졌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씨와 성령과 주의 피공로로 중생된 너희들이기 때문에 너희들의 생활은 어떻게 생활해야 되느냐?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말은 이제 이 세 가지로 뜨겁게 살라 그말이오.
사랑하는 게 뭐이냐? 이웃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입니까? ○조사님 녜, 피와 성령과 진리로 내가 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와같이 요것으로 사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살면서 이 사는 것을 보여 줘 가지고 다른 사람도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도록 그래 하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뜨겁게 사랑하라 말은 이 생활을 뜨겁게 해라. 요동치 안하고 강하게 해라 그말이오. 해라.
이것이 네다. 이것이 너인데 내가 미혹을 받고 있는 것은 무슨 미혹을 받고 있느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하는 것이 곧 너희에게 전한 말씀이라’ 이러니까 네가 이 세상에 번쩍거리는 육의, 육의 것이라 하는 거는 이 세상 모든 있다가 없어지는 게 육의 것 아닙니까? 육의 것, 육의 것 이것, 박사도 육의 것이요, 대통령도 육의 것이요, 이 세상에 노벨상 받은 것도 육의 것이요, 또 그것도 다 영광의 꽃, 영광 그게 다 풀과 꽃과 같은 것이니까 이거 마르고 떨어지고 잠시 후면 없어진다 말이오.
그러나, 이제 너희들에게 전한 이 복음의 말씀,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살아라 하는 이 말씀은 살기만 살면은 다 영생이 되어진다. 이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렇게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고 이제 세 가지 생명력으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에 이 풀과 꽃과 같은 그런 것을 네 소망으로 상대하고 살 자들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2장 1절에 「그러므로」 이러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은 이러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그러므로라 말하면 ‘너는 이리이리 이렇기 때문에 너에 있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면 이 말씀을 사모하면 구원이 되는데, 고것을 오늘 아침에 말씀을 해 줄 터인데 시간이 다 가서 안 됐습니다.
어쨌든지, 젖을 먹으면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내게 자꾸 이 말씀을 자꾸 품고 있으면서, 이 말씀을 품고 있으면서 자기가 지식하고 있는 것과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만 하지 말고, 이 말씀을 품고 있으면서 내가 고대로 살라고 할 때에, 행동할라고 할 때에 이 몸과 마음에 있는 굉장한 많은 신경들이 동원됩니다. 자기가 단, 지식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신경 가운데 아주 극소의 한 일부분, 아주 일부분만 하고 있고 내가 실행할라 할 때에 이 마음과 몸에 있는 모든 요소가 총동원이 됩니다. 총동원이 되고, 이래 가지고, 총동원이 되는데 실행할라고 할 때에 환경에서 방해해서 하지 못하게 하는 불 같은 시험이 올 때에 그 시험에 지지 안하고 이럴 때도 내가 실행을 계속할 때는 내 심신에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다 동원이 돼 가지고 이와같이 하므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이렇게 하고 이래 하면은 말씀을 자기 속에 넣고 또 말씀대로 살다 보면은 영감이 옵니다. 말씀대로 살면은 자꾸 믿어집니다.
말씀대로 살면은 말씀으로 살 때보다 살고 보니까 더 믿어지고, 말씀대로 살아보니까 확고한 지식이 되어지고, 더 믿어지고 더 알게 되는 그것이 무슨 역사입니까? 그게 무슨 역사요? 내가 이 감각을 가지고서 성경을 보고 깨달았는데, 깨닫고 나서 내가 믿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 아닙니까? 깨닫고 믿고 실행하니까 믿고 실행을 함으로써 더 알게 되고 더 깨닫게 되고 더 확고하게 믿어지게 되고 하는, 더 알게, 더 깨닫게, 더 믿어지게 하는 그게 뭐입니까? 그게 영감입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거라야 되지 뭐 성령을 뜨거우니 뭐이니, 뜨거움을 받았느냐 뭐이냐, 그게 전부 잡탱이고 다, 아직 성령을 편벽되게 알았지 똑똑히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하면, 진리를 알고 실행할라고 하면은 성령 영접하고, 진리를 알고 제가 암만 해도 영접 못 합니다. 성령을 영접 못 해. 진리를 알고 실행할라 하면 성령을 영접하게 되고 성령을 영접하면은 그 성령은 우리를 어데로인도하십니까? 성령은 우리를 어데로 인도하지요? 예수님의 피로 인도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오면은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갈급하고 더 알아지고 더 감사하고 더 믿어지고 하니까 그만 예수님의 피 하나로 다 돼 버렸어. 피 하나로 다 되고, 딴걸 원할 게 하나도 없어. 예수 한 분으로 족한 사람이 자꾸 돼진다 말이오.
그러면은, 어린 아이가 젖을 먹으면 자꾸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 하는 것은,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말은 순전은 뭘 가리켰느냐 하면은 이 문서 계시의 이 진리를 가리켜 말했고, 신령한 젖이라 하는 것은 영감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자꾸 사모하라는 것은, 사모하라는 건 자꾸 갈급해 사모하면은, 사모하는 자는 배척하지 안할 거 아닙니까? 제가 갈급해서 사모하니까 사모하면 영접하게 되고 영접하게 되면은 또 사모하니까 그대로 접촉하고 싶고 실행하고 싶고 자꾸 이렇게, 사모라 말은 이거는 거기에 전가치와 중량을 두고서 자꾸 이렇게 갈급하고 실행하라 그말이오. 이라면은 그게 젖이라, 젖. 어린 아기가 나 가지고 젖 먹으면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라면 우리 인격성이 자꾸 자란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어떤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데, 요거 하나만 더 말해 주겠소. 그러면 우리가 지금 구원 이루는 것은 영의 구원을 이룹니까, 육의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까, 뭐입니까? 육의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의 구원은 이루지 않습니까? 영의 구원도 이루고 있습니다. 영의 구원은 뭐이냐? 영의 권위성이 자꾸 올라갑니다. 영의 권위성. 영의 권위성은 뭣이 영의 권위성입니까? 영의 권위성이라 하는 것은 그 영이 자기의 심신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이 권위성입니다. 어떤 영은 다 같이 중생했지마는서도 자기 심신을 통치할 권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신 다 죽여 버렸습니다. 다 죽이고, 어떤 영은 중생 후 자기 심신의 기능을 다 통치해서 완전 복종을 시켰다 말이오.
그러면, 예수님은 인성을 가졌는데, 예수님의 신성이 있고 영이 있고 또 육이 있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랬는데, 예수님의 그 영은ㅡ신성 말고ㅡ예수님의 영은 그 심신을 얼마나 통치했습니까? 예수님의 심신은 그 영에게 완전 복종입니다.
완전 복종이오. 완전 복종이고, 그러면 영육으로 된 인성은, 인성은 신성과 하나되어 움직이는데 궁극적으로 말하면은 그 인성은 신성에게 절대 복종입니다.
복종으로. 이래 가지고, 그라면, 몸은 마음에 복종, 마음은 영에 복종, 영은 신성에 복종, 신성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복종, 이 순전히 복종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구원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라 하는 거는 기독교가 아니오. 기독교는 민주주의다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성경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 껍데기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있다 말이오.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알겠습니까? 한 분이 옳은 그것을 그대로 단행할 때 그대로 따라서 쭉 따라가는 것이지 뭐 의논해 보고 하는 게 아니라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는 그게 민주주의입니까 독재주의입니까? ○○○목사님, ○조사님, 예? 독재주의요.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말이오. 민주주의 같으면은, 아버지가 말할 때에 아들이 ‘한번 연구해 보고요, 의논해 보고요, 한번 생각해 보고요.’ 이렇지마는서도 ‘자기를 비웠다.' 자기를 부인하고 절대 그에게 복종했어. 이것이 기독교인데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기독교라고 떠들어 쌓고 이거, 이 껍데기로 이래 말해도 사람들이 자꾸 그리 유혹을 받고 있다 말이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은 착실히 진실되게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이 마음 구원을 하는 데 이 마음에 총 사령장관이 누구입니까? 이 마음의 사령장관이 누구요? 양심입니다. 이 마음 세계의 대통령이 누구입니까? 양심이오. 이 마음 세계의 왕이 누구입니까? 양심이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이렇게 요 구조로 만들었는데, 양심이라는 그 양심이 온 마음 속에 있는 요소를 다 통치를 하고 모든 요소들은 양심에게 복종을 하고, 또 이 몸이라 하는 것은 모든 마음들에게 복종을 하고, 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강건합니다.
그 사람은 강건한 사람이 되고, 이 벌써 내란이 나 가지고서, 지금 데모가 자꾸 일어나 가지고서, ○대통령이 데모에 끌려 가지고 하야하지 안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양심이 세도를 부리지 못하고 양심이 아닌 욕심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시기심이라든지 또 투기심이라든지 훼방심이라든지 무슨 정서라든지 뭐 이거 또 행락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마음의 왕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 많다 말이오. 마음의 왕이 돼 가지고 있어.
알겠습니까? 마음의 왕이 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을 여러분들이 접촉할 때에 벌써 그 사람의 자체라 하는 것이 바로 되어 있나 안 되어 있나 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의 왕인, 마음의 총 사령장관인, 지배자인 양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대인이요, 위인이요, 아무도 해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죽은 양심 산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산 말씀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는고로 하나님의 말씀의 이 지식에게 지배받는 양심이, 그 양심이 자기 마음을 다 통치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성자요 완전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룰라고 하고 있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시간 없으니까 어짜든지 여러분들이 이 마음의 통치자, 총 사령장관, 총 지휘자, 총 감독자, 주권 주장자 이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양심을 길러야, 양심은 누구하고 접촉합니까? 양심은 누구와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양심입니까? 영, 중생된 영하고 접선됩니다. 양심 외에는 중생된 영하고 접선을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욕심 그런 것은 중생된 영하고 접선을 못 해, 거기가 멀어서.
양심을 통해서, 양심하고 단합이 돼 가지고, 양심이라는 도장을 찍고 양심이 거기서 인도를 해야 중생된 영과 연결이 되지 그리 안 하면 연결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양심을 가꾸어서, 양심이 자기 마음을 다 통치해서 하나님 말씀을 닥칠 때에 그 말씀을 먼저 양심이 한번 단행을 하고 단행한 걸 자기 모든 그 마음의 요소들에게 시행을 시켜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죽은 자는 기독자의 건설구윈이라 하는 거는 절대 못 이룹니다. 절대 못 이뤄. 혹 양심을 통하지 안하고도 이룰 수가 있느냐? 못 이룹니다. 양심이 살아 가지고 양심으로 비로소 중생된 영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그 마음의 책임자라, 총 관할자라, 또 주권자라,마음의 왕이라, 마음의 아주 정치의 권리면 정권자라. 요걸 알고 양심을 가꾸기를 힘을 써서 양심이 가꾸어져서 양심이 강해져야 됩니다. 양심이, 그 마음에 아무리 욕심이 ‘저 돈이 욕심 난다’ 이랄 때에 양심이 `이놈, 그거 보지 마라.’ 하면 안 볼 수 있게. 이러니까, 죽을 데라도 ‘저기 가면 죽는데.' 양심이 ‘가라’ 하면은 그 마음과 몸뚱이가 갈 수 있는 이렇게, 그 양심이 그 심신을 다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양심은 이 중생된 영에게 지배를 받고 이렇게 통치돼 가지고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거는 연습으로만 되지 연습 안 하면 안 돼. 실행 연습이라야 되지 연습 안 하면 안 돼요.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말할라 하면 시간이 많은데 요거 좀 시간이 다 가서 안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요 순전한 젖 신령한 젖을 자기 마음에 자꾸, 이 사모하라 말은 고대로 자기가 실행할 때에는, 실행을 해도 사람이 양심이 실행하는 것 있고, 욕심이 실행하는 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되 양심이 실행하는 것 있고 욕심이 실행하는 것 있어. 하나님 말씀대로 하되 ‘내가 이걸 해야 복을 받아서 돈벌이가 되겠다’ 그것은 물욕이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자라 놓으면은 양심 쳐박아 버리고 그놈이 왕이 돼 가지고 그거 큰일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서, 이것이 옳고 바르고 참된 도니 옳기 때문에 내가 실행한다. 바르기 때문에 실행한다. 이것이 중생된 자의 마땅한 길이고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에 합당하기 때문에, 평가적으로 자기가 옳다 해 가지고 실행하는 것과 ‘이래야 돈벌이 되고 내가 축복받아서 돈 많이 벌지’ 하는 거와 영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꼭 양심이 요것을 실행을 하고 그 다음에 양심에 따라서 모든 것 실행하고 하는 요것을 자꾸 우리가 만들어야 돼.
우리 마음은 막 바글바글바글하이 이래 막 전부 자갈 모양으로 바글바글 이래 가지고 하나도 통일돼 있지 않습니다. 통일돼 있지 않기 때문에 찬송을 해도 이제 일절 부르는 가운데도 이놈이 쏙 들어오고 저놈이 쏙 들어오니까 일절 부를 때에도 그 마음에 오만 잡놈이 다 들어온다 말이오. 이 잡탱이가 다 들어오니까 일절 부를 때도 그것들이 들어와 가지고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저거 마음대로 하고, 이러니까 입으로는 찬송하지마는서도 그 마음의 요소는 지금 미국 갔다가, 서울 갔다가, 뭐 상점에 갔다가 장사하러 갔다가, 양사방 돌아다니고 이게 도무지 집합이 안 된다 그말이오. 이것은 연습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논리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자꾸 연습해서 그놈은 죽이고 자꾸 통일을 해야 된다 말이오.
이렇게 통일해 가지고서 이것이 이제 전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맡겨 놓고 의지하고 복종할 수 있는 요것으로서 이렇게 단체가 될 때에 요것이 성화요 요것이 나중에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안하게까지 되어졌을 때를 요것을 가리켜서 뭐라 합니까? 영화되는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십시오.
매일 삼십 분 기도 이거 빠지면 안 됩니다. 기독자가 양심 안 쓰면 헛일입니다.
제가 양심에 가책되는 고놈이 들어서 양심을 죽이는데 가책되는 것 고것을 두고서 암만 제가, 순교해도 소용없습니다. 순교해도 저는 헛일입니다. 아무리 순생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양심을 살리고 가꿔 가지고서 우리 구원을 이루지 그렇지 않으면, 양심에 가책되는 그놈을 거석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축복은 절대 안 옵니다. 우리가 모두 기적과 축복을 받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