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무궁은 종자에서 결정된다

 

1988. 6. 4. 토새.

 

본문: 고전 15:36-38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여게 씨로 비유한 것은 우리들의 행위를 가리켜 씨로 비유한 것입니다. 또 씨가  심어지는 것은 심어지는 땅은 자기가 만난 현실을 가리켜 비유한 것이고 땅에  심어진 것은 자기 현실에서 자기 행위를 해서 끝낸 것을 말합니다. 자기 행위를  한 것을 말합니다.

 또 37절에는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알갱이 뿐이로되’ 그러면 뿌리는 씨의 형체는 장래 형체와 다르다. 장래  형체는 부활해 가지고서 영생하는 그 형체를 말합니다. 영생하는 형체를 말하고  또 뿌리는 씨의 형체는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그 형체 행동하는 그  형체 그것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형체 사는 형체 그 모양 그거와  부활한 뒤의 그 형체는 다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심으는 씨의 형체와 또 장래 그것이 나는 형체는 다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그 생활의 형체와 부활해서 영생하는 그 생활의  형체는 다르다. ‘형체라고 이렇게 말을 표시한 것은 그 형체라면 삶의 형체라,  삶의 형체라 하면은 삶의 모양이라, 삶의 성질이라, 삶의 가치라, 삶의 대우라,  삶의 평가라, 삶에 대한 모든 좋은 거 고락간 그런 것을 다 포함해서 여게는  종자로 말하기 때문에 형체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심으는 종자의 형체’ 하는 이 형체 속에는 사람들이 수많은 종류의 행위  생애를 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생애하는 생활하는 행동하는 그것에 모든 가치나  형편이나 또 대우나 사정이나 권위나 영광이나 존귀나 천대나 그것의 전부 형편  그것을 총칭해서 요거 형체라 말했습니다.

 이런데, 요것이 이해가 안 되면 안 됩니다. 요 형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다 현실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실을 가지고 사는 그 세상에서 현실에서 사는 그 살이와 또  이 다음 부활해 가지고서 사는 그 살이 와는, 아주 다르다. 또 부활해 가지고서  사는 그것이 장래 형체지요. 부활한 것이 장래 형체입니다.

 그런데, 또 부활 못한 사람의 장래는 그거는 장래 형체 속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OOO 장래 형체 속에 안 들어갔습니까? 이 씨를 심으는데 씨를  심을 때의 그 씨의 형체와 또 뒤에 보응으로 그 다음에 보응으로 이루어지는 그  형체, 심으는 씨의 형체와 장래의 형체라고 하면 장래의 형체라는 그것은 그  부활한 형체만 들어갔습니까? 거게서 영멸하는 그 형체도 들어갔습니까? 거게는  어떤 것이 들어 가지고 있습니까?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이러니까 이 뿌리는  것의 형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 형체가 있다 말이요 없다 말이요? 있다  말 아니요? 뿌리는 그 종자의 형체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종자의 형체와  또 장래의 형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 행동 해 가지고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 장래라면 앞으로 영원무궁에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영원무궁에  나타나는 것, 그러면 이 세상에서 행동한 것은 영원무궁에 나타납니다.

 영원무궁에 나타나는데 이 세상에서 행동한 그 형체와 무궁에서 살아난  무궁에서 나타난 형체, 무궁에서 나타난 그 형체와 같지 안하고 다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게 뿌리는 이 씨의 형체는 인간의 모든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행동  전부를 다 포함해서 말한 것입니까? 요것은 믿는 사람의 것만 포함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이 세상 생활 이 세상 행동하는 그 전체를 포함해서 여게 말을  해 놨습니까? 전체를 포함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형체와 장래의 형체는 무궁 세계에서 나타나는 그 형체를 말하는  것인데 무궁세계에서 나타나는 그 형체는 그 신자의 형체만 나타납니까 불신자의  형체도 나타납니까? 불신자의 형체도 나타납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것 다  총칭해서 여게 장래의 형체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요 형체로 말을 했는데 요 형체라면은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형체라  생활하는 형체라, 행동하는 형체라 생활하는 형체라 그 말이 다른 말입니까?  같은 말입니까? 생활하는 형체라 또 행동하는 형체라 삶의 형체라 그렇게 하는  삶이라 행동이라 생활이라 이렇게 그 말은 다른 말인데 뜻은 같은 뜻입니까?  다른 뜻입니까? 같은 뜻입니다. 같은 뜻.

 그런데, 그러면 고 삶의 형체라 이라면 삶의 형체 속에는 뭣뭣이 들어  있습니까? 삶의 형체의 삶의 가치가 고 형체 속에 들었습니까? 안들었습니까?  삶의 가치가 형체 속에 들었습니까? 안 들였습니까? 삶의 가치가 어떤 삶은 아주  가치가 아주 없고 어떤 삶은 가치가 지극히 높고 어떤 삶은 아주 수치스럽고  어떤 삶은 아주 영광스럽고 어떤 삶은 평안하고 어떤 삶은 고통스럽고 어떤 삶은  매장을 당하고 어떤 삶은 아주 찬양을 받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이 삶의 형체라  하는 이 형체 속에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포함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포함됐습니다.

 이걸 하나라도 모르면, 이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걸 모르면  헛일이라. 아는 것 같아도 물어보면 몰라. 이게 포함됐습니다. 그러면, 또  장래의 형체라 하면 씨를 심어 가지고서 다시 그 다음에 심은 후의 형체, 장래  형체라 말은 심은 후에 나타나는 형체 아닙니까? 장래 형체라 말은 심은 후에  나타나는 형체 아닙니까? 심은 후에 나타나는 형체라면은 그 형체는 심은 후에  나타나는 형체이라 말이요 생애라 말이요 삶이라 말이요 가치라는 말이요 그  존비귀천이라는 말이요 또 그것의 실력이란 말이요 그런 것이 다 여게 장래의  형체속에 포함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이 학생, 이 학생, 포함이 됐다  그거요.

 포함이 됐으면, 그러면 요것을 꼭 잡아야 되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 행동한 그  행동과 이 다음 나타나는 그 보응의 형체, 그러면 이 세상에 삶의 형체와  요다음에 다시 고대로 보응되는 그 보응의 형체, 그 보응의 형편, 보응의 모든  가치, 보응의 대우, 보응의 존비귀천, 보응의 모든 희로애락, 보응의 아주 그 힘  그 모든 것이 다 장래 형체 속에 포함이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포함이 됐지요.

이거는 뭐 종자만 생각하면 알 수가 있어.

 포함이 됐는데, 그러면 씨종자의 형체와 장래 형체가 같다고 했습니까?  다르다고 했습니까? 다릅니다.

 그러면 다른데, 다르다 말은 이 세상에서 삶의 그 형체와 삶의 그 모든 형체  사정 이거 전부 다 포함된 건데 이걸 몰라 놓으면 암만 말해봐야 또 헛말이 된다  그말이오. 삶의 그 모든 삶의 형체 하면은 이 세상에서 현실에서 살고 있는데 그  삶의 형체라 하면은 삶의 뭐뭣이라 말이요? 한번 말해 봐요. 삶의 뭐뭣이라  말이요?  삶의? 가치, 또? 크게 말해 봐. 가치 또? 여러분들이 아는가 모르는가 싶어서  내가 지금, 못 알아들으면 말해 봐야 소용없다 그거요. 이 무식해도 상관없어.

대대학을 졸업해도 소용이 없어. 이러니까 요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로  들을라고 애쓰는 자라야 하나님이 들려주셔야 되지 안 들려 주시면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면 삶의 그 형체라 하면은 삶의 뭣뭣인지 그 포함된 거 대개, 다 말할라면  천도 만도 넘기 때문에 못 하지마는 말해 봐요. 삶의 그 형체라 말에는 삶의  뭐이라 말이요? 삶의 형편이라 말이지요. 삶의 모양이라 말이지요. 삶의  모양이라 말이지요. 삶의 형편이라 말이지요. 삶을 사람 보기에 어떻다 하는 거  보기에 말이지요.

 그러면 그게 삶의, 이 세상 사는 것은 심으는 것입니다. 사는 거는 심으는  것이오. 자기가 행동하는 건 심으는 것이요. 행동하는 것은 심으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심으는 것입니다. 그 심으는 것인데 사는 것의 행동하는 것의 그것의  존비귀천 희로애락 또 모든 실력 그런 것이다 다르지요.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삶의 그 사람은 이런 삶의 저런 삶의 다 있는데 그것의 형체와, 그 형체 속에는  억만도 더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걸 말할라 하면 다 못 해. 이러니까 그  뜻만 말하면 알아야 돼.

 삶의 형체, 삶의 모양, 삶의 형편, 삶의 그 종류, 그런데 삶의, 살 때, 사는  행동할 때의 그 모든 그 형태와 형편과 가치와 이 다음에 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보응으로 이루어지는, 그 다음에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그 이루어지는 그  형편과 그 모양 그 모든 것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고 했습니다. 요  다르다고 했어.

 다르다고 했는데, 다른데, 그러니까 그 씨종자에 대해 종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보는 사람은, 그 종자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 그 종자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은  이 종자는 심으면 무슨 모양으로 이 다음에 나오느냐 무슨 모양으로 나오느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전연히 모릅니다.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씨종자를 택할 때에 사람들은 모두 좋은 걸 택한다고  애를 쓰는데 그 씨종자를 보고서 이 씨종자는 나는 이 씨종자가 제일 크게 되는  아주 키가 큰 그런 씨종자를 나는 구할란다 하고서 그 사람은 씨종자를 구하는데  또 이 사람은 아주 참 보기에 제일 잎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걸 구할란다, 또  나는 꽃이 그렇게 아름답게 피는 걸 구할란다 하면은 그 사람이 씨를 보고  그것을 구할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씨를 보고 자기 소원대로의 것을 구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저 저분. 구할 수가 있습니까? 씨를 보고  그것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또 몰라. 영 이러니까 이래  놓으니 그 아는 것이, 이것을 죽자껏 가르쳐서 알고 나면은, 생전 암만 물어도  모르는데 알고 나면은 알고 난 다음에는 ‘내나 그거 부활 말하는구만’ 그래  버리고 말기 때문에 그런 것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 그라면 씨종자를 보고 장래 이거는 크게 키가 큰 것을 나는이 씨종자를  심으면은 아주 키 큰 그런 것이 나도록 그렇게 나는 그런 씨를 구할란다. 너는  씨 한 개 해라. 어느 거 할래? 그 사람이 아주 키 큰 걸, 장래 키 큰 것으로  나올 그걸, 날 것을 그 사람이 가릴라고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키가  나지막하게 아름다운 것을 가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의 소원을 하고  있으면 그 씨 보고 가릴라면은 가릴 수가 쉽습니까? 없습니까?  씨가 심어져 가지고서, 심어져 가지고 나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씨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그것을 씨 모양 보고서 가리면 그것이 그대로 맞을까요 안  맞을까요? 안 맞습니다. 안 맞습니다. 안 맞아. 맞을리가 있습니까? 안  맞습니다.

 그러나, 그 씨종자가 이 씨는 심으면 키가 커진다, 이것은 넝쿨이 난다, 이것은  좋은 꽃이 핀다, 이거는 꽃은 볼 것 없고 열매가 좋다. 뭐 씨종자가 한없는 많은  종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아는 그 씨종자에 대해서 공부를 한 사람  바로 배운 사람 자기가 또 경험한사람 이런 사람은 씨종자 보고 그 장래 형체라  어떤 것을 자기가 원한다면은 그 원하는 씨종자를 자기가 구할 수가, 씨종자를  자기가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못 구하지요. 배워서 알든지 그것을 농부가 돼 가지고 몇 번  심어서 봐서 나온 것을 보면은 씨만 봐도 알 수가 있지요. 씨만 보면 알 수가  있지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이 생활 결과는 이 생활은  무엇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이 생활은 영원한 세계에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을 그것을 사람으로서 경험하고 체험해 가지고서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으로서 이 행위는 영원, 세계에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 화가? 저  화가지? ‘화가’ 저거 아버지. ‘누가’ 저거 아버지인가? 그거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없어, 그때. 없어.

 저 화가가 묘하고 기이한 길을 걸어왔는데 요새 지금 잘못하면 시험드는 것  같은데. 안 볼 걸 보고 안 생각할 걸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라면은 망해  버립니다. 함부레 이 말을 듣고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답은 바로 했어.

 귀하게 아름답게 살아서 지금까지는 좋은 것을 건설해서 하나님이 참 같이  하시는 축복 받는 길을 걸었는데 앞으로 축복받는 길을 걷다가 망합니다.

성공하다가 실패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렇게 내가 살면 삶의 영원은 어거 된다 하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다 말이 대답이 맞았어.

 또 그러면 이렇게 살면 영원에는 어찌 된다, 이렇게 살면 영원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살면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살면 영원이 있다, 거게 대한 보응인 영원이 있다 하는  영원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살면 삶의  영원한 장래가 있다, 삶의 영원한 장래가 있다 하는 것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성경 보지 안한 사람으로서 세상 지식 속에 그것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살면 이 삶의 영원한 장래는 어떻게 된다 하는 그것을 가르치는 지식이  세상 지식 속에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요것도 요 망령된 자는, 이  씨를 심으면 이 씨가 난다. 이 씨가 심고 난 다음에 인간이 행동하고 난 다음에  그 행동이 어데서 납니까? 세상에서 납니까 영원에서 납니까? 세상에서는 그게  나는 게 아니라 고거 보고 하나님께서 줍니다. 고 씨 심은 그걸 보고서  하나님께서 다시 심을 수 있는 씨를 주시고 그씨를 심었는데 씨 심은 그것이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납니까 영원에서 납니까?  영원에서 나는 걸 뮐로 가지고서 확정을 지워?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물질 생활  연보하면은 연보한 그 댓가로 연보하면 하나님께서 또 연보한 것을 그 댓가로 이  세상에서 받는다고 했습니까? 그 댓가는 받지 안하고 심으는 자에게 또 씨를  준다고 했습니까?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어떤 생활이든지 행동한 그  행동의 댓가는 그것은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은 사람들이 지금  이해를 안 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댓가는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은 전부 세상에서 받는 것으로 다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파고 보면은 세상에서 삶의 댓가는 받는 게 아니라. 옳게 삶의  댓가는 그것은 영원한 댓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삶의  댓가를 잘 살면 좋은 거 주고 나쁘게 살면 나쁜 거 주고 하는 그것은 삶의  댓가가 아니라 옳게 사는 자에게는 옳게 살 수 있는 씨를 주는 것이요. 자료를  주는 것이오. 이해가 됩니까? 이런 것도 얼마나 이게 어려운 말인지. 그거는  성경 만 독을 읽어도 제가 영감이 아니면 몰라.

 이렇게, 자기가 삶의 그 형체, 이거 삶의 형체라 하니 저거 뮐 말하는 것이다  이걸 자기가 알아야 되지 그 새의 형체라 하는 거는 말로 할라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할라면 한 억만 마디나 해야 다 합니다. 삶의 형체, 삶의 형체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삶의 형체, 다른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행동의 형체, 그러면 행동의 형체라면은 행동의 형체라는 것은 그  형체라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형체라 하는 것은?  행동의 형체라 삶의 형체라, 삶의 형체라면은 형체라 하는 건 뭐뭐 삶의 뭣을  가리킵니까? 삶의 모양. 모양이면 또 뭐입니까? 삶의 모양이면 뭐입니까? 삶의  모양이면 뭐입니까?, 그거? 뭐 또 거기 들었습니까? 형편. 삶의 형편, 또? 또  삶의 뭐 있습니까? 삶의 뭐이 들었어, 거게? 예? 삶의 가치. 가치가 거기  들었습니다. 또? 거기 뭣 들었습니까?.

 삶의 대우는 거기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삶의 대우는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삶의 대우가 들었습니다. 그 삶의 천대는 거기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천대도 들었습니다. 삶의 그 가치는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들었습니다. 삶의 권위는 거기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들었습니다. 다  들었습니다.

 이것을 포함해서 여기 비유로 말했기 때문에 그 씨의 형체라 장래의 형체라  말한 것은 장래의 형체라 말은 영원으로 나타날 때에 어떤 게 나타나느냐 하는  그것을 장래의 형체라 말했다 말이오.

 그러면, 씨의 형체와 영원으로 나타나는 그 형체가 같다 했습니까? 다르다  했습니까? 다르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삶의 그 영광과 영원히 나타나는 그  영광이 같다 했습니까? 다르다 했습니까? 그러면 삶의 가치가 높으면 영원으로  나타나는 그 가치도 높습니까? 낮습니까? OOO씨.

 삶의 가치가 높으면 이 세상애 삶을 모든 사람이 가치 있다고 그 참 아주  존귀한 가치 있는 생활한다고 삶의 가치를 그렇게 모든 사람이 높이 평가하면  무궁세계에서 나타나는 그 가치도 내나 그 가치가 높습니까? 낮습니까? 다르다  했기 때문에 몰라. 높은지 낮은지 몰라.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자기 보기에 제일 가치  있고 좋고 재미있고 복 있는 그것을 택합니다. 택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지위를 차지해서. 지금 높은 지위를 차지해 가지고서 이  지위 차지하는 삶을 했습니다. 그 지위 제일 높아서 한국에서 제일 높은 지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지위 그 지위를 차지하는 그 행동 그 생애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궁세계에 나타날 때에는 제일 높은 것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낮은 것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천한 것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세상에서 존귀한  것은 무궁세세에서는 낮은 걸로 나타납니다 아주 좋은 걸로 나타납니까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주 제일 권세 있고 존귀한 생애를 이 사람이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존귀한 생애 이 생애를 했습니다. 아주 노벨상을 얼마든지 받은  그 생애를 했습니다. 또 권세가 제일 있는 권세를 차지했습니다. 뭐  권세적으로나 모든 거나 세상에 제일 되는 이 지위의 생활을 했습니다.

 생활 했으면은 그 생활이 무궁세제에 나타날 때에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저 O조사님? 잘 모르겠습니다?  OOO 장로님,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 말과 고거 어떻소? 다르요 같소? 같은  말이야. 바로 대답했어. 고거 좀 알아 듣는 것 같애, 가만히 보니까. 못  알아들으면 소용없어.

 그것 몰라. 몰라. 그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는 지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쳐 주는 지식이 하나도 없어. 뭐  불경에서 자기네들 추측적으로 이라면 극락간다 이라면 뭐 어짠다 하는, 그거 다  거짓말이오.

 자기네들 추측이지 외나 농부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요 행위에는 내가  요렇게 요런 장래를 준다 조 행위에는 조런 장래를 준다 하는 이거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인데 어떤 인간이 알아? 석가모니가? 어림도 없소. 조물주 창조주  주재자 주권자 이 분만이 아십니다. 알겠습니까? 이 분만이 알아.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삶의 형체와 무궁세계에 나타나는 그 보응의 형체는  다르다. 다르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세상 지식에  여러 억억만 권 척이 있어도 그 속에는 없다. 모른다. 모르는데 누구는. 이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알 수 있습니까? 예? 그 씨종자에 대해서 그것을  지금 형체와 장래 형체를 씨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농부는 거게 대한 경험이 있는 농부는 알 수 있습니다. 경험이 있는 농부는 알  수 있습니다. 거게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게 대한 경험 있는 것이 농부인데 거게 대한 경험 있는 사람이  땅위에 몇이나 있습니까? 몇이나 있습니까? 둘이 있습니까? 하나 있습니까? 백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요거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이  알겠어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게 대한 것을 배워서 아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배워서 아는  사람은 있습니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있습니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  배워서 알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 배워서? 고 농부에게 배우면 알 수 있지요.

경험한 농부에게 배우면 알 수 있지요. 고것을 똑똑히 아는 바로 아는 농부에게  배우면 알 수가 있지요.

 이 솔씨는 솔씨는 싸래기만 합니다. 아주 작습니다. 싸래기만한 솔씨가 있고 이  호박씨는, 여기 복숭씨는 크지 않습니까? 호박씨는 큰데. 호박씨가 크니까 이  호박씨 이거는 크니까 아마 이거는 되게 큰 게 나오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조그만한 솔씨는 뭐 여남은 아름 아름이 열 아름도’ 더 되는 그렇게 큰  소나무가 될 수가 있고 낙락 장송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호박씨는 그렇게  크지마는 그런 제대로 두면 땅에 찍 깔려 가지고서 뻗어 나가다 맙니다.

 이놈은 아마 씨가 크니까 이거는 여러 수천 년 살겠다 조그만한 씨 이거는 그만  나 가지고 한 몇 달 살다가 며칠 살다가 죽겠다 이라는데 이것은 지금 오륙백 년  칠팔백 년까지 사는 나무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이렇게 살지마는 그 호박씨  그거는 몇 해나 삽니까? 몇 해 사요? 찍해야 몇 달밖에는 못 산다 그거요.

이러니까 씨 보고 그 장래를 몰라. 이 씨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이 행위는,  행위를 씨로 비유했는데 이 행위의 그 형체와 이 다음에 영원무궁에 그것이  나타나는 그 형세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씨종자를 심어보고 뭐 하고 한 거게 대해서 경험 있는 사람은 그  씨종자 보고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씨종자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수 있지. 알 수 있어.

 이러기 때문에, 저 시장에 가 가지고서 씨종자가 있는데 그 씨종자 보고서  요것은 요거는 아주 먕운 것이 여는 고추가 여는 씨로구나, 요거는 이거 열면은  픽 그거는 먹을 수도 없고 뿌리 먹는 무씨로구나 그걸 알아서 씨를 보고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인간의 삶과, 인간의 살이와 영원한 무궁세계 거게 대한 보응을 인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이 없고 바로 아는 척이 한 권도 없습니다. 이것도  여러분들이 알아야 돼요. 신구약 성경 하나님이 가르친 거 외에는 다 거짓말이고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는데, 옳게 바르게 참되게 알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분이 계시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우리에게 바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을 가지가 잘 공부해 가지고 이렇게 그 연구하고 아는  사람은 삶에 대해서 이 삶은 영원에는 이렇게 나타난다 저 삶은 영원에 저렇게  나타난다 하는 그것을 성경을 보고 아는 사람은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수가 있어.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걸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몰라.

 이런데 대개는 말이요, 대개는 아까 대답하기를 삶의 좋은 것은 무궁세계에  나타남에 나쁜 것이냐 이렇게 말할 때에 삶에 좋은 것은 무궁세계에는 나쁘다.

삶에 아주 험하고 나쁜 것은 무궁세계에서는 좋은 걸로 나타난다. 그러면 고  가르침이 그것이 발라요 틀려요? 발라요 틀려요? 저 O집사님. 발라요 틀려요?  암만 해도 요걸 깨닫지를 못하는 것 같은데. 깨닫지를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거  지금 아주 맛이 없는데, 자꾸 잠을 안 잘라고는 애를 쓰지마는.

 이 세상에서 삶에 아주 그 고귀한 형체를 가지고 있는 그것은 무궁세계에서는  아주 험한 형체로 나타난다 그렇게 하는 주장은 맞아요 안 맞아요, 저 화가? 안  맞아. 저 지혜가 있어, 보니까. 안 맞아.

 그러면, 삶에 나쁘면 무궁에 쫓고 삶에 좋으면 무궁에 나쁘다 그렇게 해도 그게  일방적 지식이지 그거는 안 맞다 그말이오.

 그러면, 삶에 좋은 것이 무궁에 좋은 것도 있고 삶에 나쁜 것이 무궁에 좋은  것도 있고 그 삶에 따라서 ‘씨마다 장래의 형체는 하나님이 주시느니라’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형체가 있다 말이오. 요 삶에는 요건 무궁이다 조  삶에는 조건 무궁이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 놨기 때문에 그분의 정한 대로  된다 그거요. 정찬 대로 돼.

 이러니까, 우리는 이 삶은, 이 현재에 내가 살고 있는 삶은 무궁에 어쩐 것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그것을 알라고 하면은 이 세상에 좋은 거는 무궁에는 나쁘다,  이 세상에 나쁜 거는 무궁에는 좋다 이렇게만, 이렇게 정반대로만 생각하고  현재에 삶에 대해서 무궁을 준비할라고 삶에 대해서 이 삶을 선택하도록 하면은  삶에 이 세상 삶에 좋은 거는 무궁에 나쁘고 이 삶에 나쁜 거는 무궁에 좋다  이렇게 정반대로만 생각해 가지고서 그 무궁에 좋은 것을 택할라고 이 세상에서  삶의 종류를 택할 때에 그러면 그렇게 택하면 그 사람은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는데, 잘못하면 홍포 입은 부자에게 대해서 아브라함이 ‘너는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좋은 걸 꺼하고 저는 고난을 받았느니라’ 하는 그 말에 대한  해석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 그거요.

 모르는 것이 깨달아 알고 난 다음에는 ‘내나 그 말이 그말이구만’ 실컷  부흥회에서 예수 잘 믿는 거 가르치고 나면 나중에 가서 ‘그뭐 뭐 배웠노? 내나  예수 잘 믿으라 그말이네.’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기는 그자는 희망이 없어.

 그라면, 삶에서 영원무궁에 어떤 것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삶을 가지고 삶에서 작정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종자에는 종자는 벌써 그거  종자는 뒤에 나는 것은 변동 못 하요. 콩 심으면 콩이 나지 딴 게 납니까?  종자에서 벌써 영원무궁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씨 영원무궁이 결정이 돼.

결정이 되나 이 종자가 장래 형체와 다르기 때문에 이 삶에는 무궁에, 삶에는  무궁이 벌써 결정이 가지고 변동을 못 해요. 삶과 무궁은 달라질 수가,  달라지지를 못해요. 그 삶에는 그 무궁 저 삶에는 저 무궁 그게 결정이 돼  가지고 변동할 수가 없지마는 이 삶이라는 이 세상에 사는 이거 가지고는 이거  형체와 무궁에 나타나는 형체는 다르기 때문에 이 삶의 이 형체를 가지고서  무궁에 좋은 형체를 선택하기가, 선택하지를 못한다 그거요. 선택하지를 못해.

 그러니까, 이 선택할라고, 하면 정반대로 이 세상에 좋은 거는 무궁에는 나쁘다  이 세상에 나쁜 거는 무궁에 좋다 이렇게 정반대로만 생각해 가지고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쁜 것만 취하는 그 방편을 취하면 될까 그 취하면 그것을 그린 나쁜  거 하잖은 것만 취하면은 무궁에 좋은 것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예?  안 나와. 그것을 가리켜서 이 세상에서 무슨 주의라 말합니까? 고행주의라  말합니다. 고행주의.

 이 세상에서 고행주의라는 그 주의가 아주 큰 주의입니다. 고행주의가 그것이  고행주의라고 뚜렷이 나타나 가지고 있는 건 없지만 고행주의가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고행주의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고행주의가 많아.

어찌 됐든간에 세상에서 배를 곯아야 무궁세계에서 배부르지. 이 세상에서  천하게 살아야 무궁세계에 존대해지지, 이 세상에 고통으로 살아야 무궁세계는  평안하게 살지, 이렇게 정반대로 이렇게 해석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거요.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 고행주의, 이 사람 뭐 이 사람 신앙생활에는 고행주의  빼고 또 정반대주의 빼고 또 그 사람은 뭐 그런 종류가 많이 있는데 그런 것 다  이래 빼고 나면 나중에 보면은 신앙으로 남아 있는 거는 없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분석하니까 얼마 안 남았어. 자기 기분으로 한 것, 감정으로 한  것, 또 시기로 한 것, 땅위에 이런 것 저건 것 욕심을 내가지고 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금 한 것,  그러면 집사노릇을 잘했는데 집사노릇 잘한 걸 분석을 하니까 그 사람이  명예심으로 한 것, 또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한 것, 그 사람이 집사노릇  잘 하는 거는 다른 사람에게 장사하면서 저 사람이 신앙 좋으니까 물건도 아마  잘 팔 거다 하고서 장사하기 위해서 집사노릇 잘한 것, 또 그 집사노릇 잘한  것이 아직까지 총각이면은 시집 잘 가기 위해서 장가 잘 가기 위해서 집사노릇  잘한 것, 또 남자면은 집사노릇 잘한 것은 그 예쁜 그 교인이 있으니까 그 교인  노려 가지고서 그 교인으로 더불어 칠계 범할라고 또 그런 야욕으로 잘하는 것  나중에 보니까 집사노릇을 잘하는데 분석 분석해 보니까 나중에 참으로  무궁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엉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거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살이를 우리가 이 살이 할라면 이  살이 하고 저 살이 할라면 저 살이 하고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살이에서 무궁세계에 어떤 것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무궁세계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그 세상살이를 할라고  하면은 그러면 이 세상살이에 모든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그것으로서 우리가  평가해야 되겠습니까? 어떤 이 세상 그 석가모니한테 풀어야 되겠습니까? 모든  철학가들에게 물어야 되겠습니까? 박사들에게 물어야 되겠습니까? 누구에 물어야  세상살이와 영원무궁에 나타나는 것을 바로 알아,  이 세상살이와 무궁세계, 세상살이와 무궁세계 속에 담이 막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자도 말하기를 나는 것도 모른다, 죽는 것도 모른다, 이 죽은 다음에  어찌 되는지 모른다 하는 그것이 공자가 말한 정직한 말이고 석가모니는 ‘그럴  것이다’ 한 것을 요새는 말하기를 그렇다 이렇게 말해, 그 자손들이 거짓말로  말이오. 석가모니는 아마 추측컨대는 그럴 것이다 한 것을 자꾸 자손들이  그렇다, 그렇다 지금 성경에서. 그렇다 말하니까 성경을 따라서 그렇다고 저거도  우리도 그렇단다 우리도 이래 믿는다 이렇게 조작배기로 꾸며서 거짓말합니다.

 이러니까, 세상에서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살이를 택할 때에 세상살이를 택하는  것은 뭣을 택하는 것입니까? 세상살이를 택하는 것은 영원무궁에 장래를 택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세상살이를 택하는 것은 영원무궁 장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의 그 모든 형편의 존비귀천 그 평안 이 가치와 무궁에  나타나는 가치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정 아주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정반대 되는 것도 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뭘로  짐작할 수가 도무지 없어  없는데, 그러면은 이 세상살이 세상 행동을 이것을 만일 무궁세계에 나쁜  것으로 자기가 무궁세계에 나쁜 것으로 나타날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데서 결정이 됩니까? OOO씨. 세상에서 결정돼? 세상에서  결정돼. 왜 졸고? 안 졸아? 눈을 동그라게 뜨고 받아.

 그러면 무궁에서, 무궁한 장래, 무궁한 장래가 결정되는 것은 무궁한 장래 그때  결정이 됩니까 결정되는 게 지금 결정됩니까? 지금 결정됩니다. 그래 지금 뭘로  결정되느냐? 지금 제가 행동으로 결정되고 생활로 결정됩니다.

 그러면, 생활로 결정되고 행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생활과 행동을 잘 선택해야  된다 그거요.

 선택해야 되는데 그러면 이 세상 생활의 형체와 무궁의 형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 생활 세상 행동에 그 형체의 아름답다 귀하다,  형체의 아름답다 귀하다 나쁘다 천하다 이것을 가지고 무궁에 나타나는 것도  나쁘다 좋다 귀하다 천하다 하는 그것이 같지 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무궁에 좋은 걸로 나타나는가 그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모르고 있는데 우리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인간  생각대로 인간 뜻대로 하는 것은 다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알라고 하면은  뭣으로 하면은 알 수 있습니까? 뭣으로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예? 특별 계시로?  그 말도, 특별 계시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그 말도 맞아요. 저 목발이 말이지  그래도 지금 저 보면 복을 막 자꾸하는가 뭐 좀 아는 모양이라.

 이 세상에서 생활에 그걸 가지고서 모르기 때문에 알라고 하면은 특별 계시  보면 안다는 건 신구약 성경 보면 안다 말인데 그런 데에는 이제 주님에게  물어서 알아야 됩니다. 주님에게 풀어서.

 주님에게 묻는 것이 뭐 물어 아는 게 뭐 성경에 묻는 것이 주님에게 묻는  것이오 성경에 묻는 거는 대충 짐작으로만 가르치는데 성경에 묻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물을라면은 어데다 물으면 됩니까? 영감에 물으면 된다 말이오. 영감에  물으면 돼.

 이러니까, 우리가 영원무궁이 뭐 좇다 나쁘다 천태만상의 것이 있는데  천태만상의 것이 있고 수많은 종류들이 있는데 무궁에 좋은 것을 내가 받아  가질라면, 영원무궁에 좋을라면은 좋은 것을 언제 결정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결정됩니다.세상 생활에서 결정됩니다. 세상 항동에서 무궁에 좋은 거  나쁜 것이 세상 생활에서 결정됩니다. 세상 생활에서 결정되면은 세상 생활에  좋은 것을 택하면 무궁세계에 좋은 것이 될까 이것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세상에서 좋은 생활을 택하면은,  세상에서 좋다 하면 또 이거 사람의 지식이 자꾸 하나님 지식하고 인간  지식하고 혼돈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거 안 돼. 그러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 좋다 하는 그 생활을 택하면 무궁세계에 좋은 것을 택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택하는 사람은 바로, 택하는 방법을 취했습니까? 못  취했습니까? 못 취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살이를 볼 때에 그거는 아주 불쌍하고 가련하다  하는 이 생활 종류를 택하면서 이렇게 세상에 가련하고 나쁘고 천하고 불쌍한  이걸 택하면 무궁세계에 좋다, 정반대로 세상 반대 무궁이다 이래 가지고서  반대적으로 세상에 나쁜 것만 택하는 그 사람의 선택법은 그게 바로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바로 못 됐고,  그러면, 세상에서 이 생활에는 무궁에 뭘로 나타나나 이 생활은 무궁에 뭘로  나타나나 하는 것은 씨종자를 만드신, 씨종자를 만들고 이 다음에 보응시키는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이 씨는 키가 크다, 이씨는 넝쿨이다 이 씨는 열매만  맺는다, 이 씨는 꽃만 피고 열매 없다, 이 씨는 꽃도 없고 잎사귀만 좋다 하는  그것을 아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십니다. 주님 외에는 아는 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 세상에서 무궁에 좋고 나쁜 것을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세상에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상에서  선택하면 세상 뭣에서 선택합니까 세상 상점에 가서 선택합니까 세상 뭐 회사서  선택합니까 세상 자기의 행동 살이를 선택하는 것이 그거 선택하는 것입니까?  살이와 행동 선택하는 것이 그거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행동에는 무궁에 어떤 것이 된다 이 행동에는 무궁에 어떤 것이  된다 하는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야 바로 가르칠 수 있습니까? 주님에게 물어야  바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 물어야 바로 가르치는데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안 합니까? 물으면 대답을 합니까 안 합니까? 어데다, 주님에게  물으려면 어데다 물어야 됩니까? 신구약 성경에 물어야 됩니다.

 신구약 성경에 물으면 다 물었습니까? 다 배웠습니까? 신구약 성경에 묻는 것은  그저 중매쟁이로 대충만 알지 속에 알맹이는 진짜는 알지 못한다 그말이오.

대충만 알지.

 예를 들어서 서울 갈라면 어디로 가느냐? 서울 갈라면 여기서는 북쪽으로 간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정도로 성경이 가르치지 성경이 세밀히 똑똑히는  가르치지를 못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심령이 열려 가지고서 그 심령이 열려집니다. 심령이 열려지면은 그  다음에는 누가 가르쳐줍니까 성령이 가르쳐 줍니다.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해야 바른 행위로서 무궁을 바른 것을 좋은 것을 자기가 선택해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님에게 대번 배우면 좋지 않는가? 성령님에게 대번 배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을 어떻게 하라 했어? 이 말씀을 자꾸 사모하기를  주의하기를 어떻게, 이 말씀을 주의하기를 어떻게 되기까지 주의하라 했어,  OO이. ‘날이 새묘’ 똑똑히,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르기까지라고 안 했나?  초절로 가 버리면 되는가?  이 계시의 말씀을 주의해서 자꾸 생각하면은 첫째 뭐이 돼요? 첫째 뭣 돼?  말씀을 자꾸 생각하면 뭐이 된다 했어? 날이 새날이 새. 심령이 밝아. 심령이  밝아지고 난 다음에는 뭐이 떠올라? 샛별이 떠올라. 샛별은 뭐이라? 영감.

 마음이 밝아져야 영감이 내게 알려 줄 수 있고 영감을 받으면 ‘샛별이  떠오른다’ 영감 받으면 영감은 누구를 보여 줍니까? 영감은 누구를 보여  줍니까? 해. 태양. 햇빛. 태양. 해는 누구를 비유했소? 해는 누굽니까? OOO.

예수님.

 성경 말씀을 자꾸 사모해야 내 마음이 밝아지고 내 마음이 밝아져야 성령을  영접할 수가 있고 성령을 영접해야 예수님하고 딱 들어붙을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기름 준비한 자는 그 신랑 맞이한다는 그 기름 준비가 내나 성령의  은혜라. 성령의 은혜.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신랑을 맞이하는데 신랑 맞이하는 거 성령의 은혜 받아  가지고서 워 하다가 신랑 맞이했소? 뭐 하다가 신랑 맞이했소? 다른 처녀는 신랑  맞이 못 했는데 기름은 성령인데 성령가지고서 뭘 하는 가운데서 신랑 맞이했소?  등불 들고 신랑 맞이하지 안했어요? 등불 들고. 세상은 깜깜한데 깜깜한 세상에  정반대인 하나님의 진리대로 온 세상이 깜깜해지는 데도 혼자 하나님의 진리대로  사는 거기 주님 만나게 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세상 따라서 형편 사정 따라서 사회 따라서, 이 요새 교회들이  전부 세상이 나가는 대로 세상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 따라서 움직이는 그 형체는 그  물체는 생명이 있소 없소? 생명이 없어. 생명이 있는 거는 물 따라서 움직이지  안해. 물이 돌아가면 저는 안 돌아가요. 물이 내려가면 저는 올라가요. 제  맘대로, 속에 생명 제 맘대로 자유 해.

 이렇게 이러니까 세상에 따라서 요새 교회들이 세상 따라서 막 가속도로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가속도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법을 배워 가지고서 성경 법을 배워  가지고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배워 가지고 사는 게 아니고 전부 이  세상법도 배우고 세상 따라갑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전부이 세상 따라가고 있어.

교회는 세상이 지금 지배를 하고 있지 교회가 세상에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짜 교회는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서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에 양심이요 세상에  생명인데 이래야. 될 터인데 이제 팩 돌아서 가지고서 하나님과 성경은 다  냅두고서 이 인간들 이사회서 뭐라 하나, 여론이 뭐라 하나, 이 모든 이 세상이  어떻게 되나 거게 따라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 요새 교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회 하나만 봐도 그거는 속화 교회고 뭐이고 환하게 다 알 수 있어.

 이러니까, 요것을 알아서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이러니까, 이 진리가 또 요것만치 배워 놓고 잊어버리지 말고 자꾸 가서  생각하고 생각하면 알아지는데 안 생각하면 울라. 여게서 용기 얻어서 여게서  죽일 거는 죽이고 살릴 거는 살릴 수도 있고 여게서 강하고 담대해서 죽어도  다툴 것은 다투고 용서할 거는 용서하고,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그저 무저항으로 그 대항하지 안하고 그냥 그저 사람  좋다 하도록만 자꾸 무저항으로 대항하지 안하고 자꾸 이래 나가면 잘 믿는  사람이요 못 믿는 사람이요? 못 믿는 사람이라. 저거 바로 대답했어. 못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삐뚤어진 데는 모가지가 달아나도 그대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삐뚤어졌으면 가정을 바로 이래 할라 하다가 안 되면 죽어도 가정이  깨져도 바싹 부숴서 부숴져도 양보하지 안하고 꼭 하나님의 진리대로 요래 해  나가는 고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오. 사회생활도 그렇고 직장 생활도 그렇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그렇게 뭐 타협주의 이 세상 환경에 주위에  따라서 그저 화합주의로 나가는 그게 예수 믿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화평이  좋지마는 거룩이 속에 알맹이 없으면 안 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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