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가치 네 가지

 

1982. 6. 26. 토새

 

본문:누가복음 1장 30절~38절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세례요한은 구약교회의 끝이요 신약교회를 소개한 사람입니다. 신약교회는  마리아로부터 시작된 것이 신약교회입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이 마리아의 사실은 신약교회가 탄생되는 시작이요  신약교회가 이루어지는 종자적인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에 속한 모든 은혜 역사는 오늘 아침에 봉독한 이 사실과 같은  이 사실을, 이런 방편과 같은 이런 방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인고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만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또 다윗왕이라고 하면 그는 참  이스라엘이 하나님 다음으로 존대하는 왕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 가지고 ‘네가 아들을 낳되 다윗을 계대할,  다윗의 위에 앉아 무궁토록 왕 노릇 할 이런 존귀한 자를 네가 출생할 수 있다.

이 아이가 너에게 지금 잉태되리라’ 고 말을 전한 이 전한 말은 마리아에게는  한없는 기쁨이요, 영광이요, 참 행복된 소식입니다. 다윗의 위를 계대할 이런  존귀한 자손을 낳는다는 것도 측량 못할 행복이요, 또 천사를 만난 것도  그러합니다.

현재도 영광스럽고 결과도 영광스러운 결과이지마는 그 오는 방편이 좋게 왔으면  마리아는 한없이 기뻐했을 터인데 그렇게 영광되고 존귀한 행복이, 마리아에게  오는 그 방편이 아주 잘못됐기 때문에 마리아는 기쁨 반대로 거부하고 크게  고통했습니다.

왜 방편이 그렇게 잘못된 방편을 통해서 왔던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동정녀 마리아 탄생으로 구주가 나실 것을 미리부터 예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처녀가 잉태하는 이런 범죄를 하면 그 사람은 사형을  시키되 가깝게 가서 더러워 사형시키지 못하고 돌을 던져서 사형시키는 이런  형벌이 있었습니다.

족속이 모두 모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가지고, 그저 어떤  사람이든지 할 수 있는데 의무적으로 모든 족속이 다 모여 가지고 돌을 던져서  죽이니까 그 돌로서 산이 되니, 조산, 돌조산이 이렇게 되면 그것이 뭐 몇백년도  나갈 수 있는 것인데, 그게 나갈 때마다 명패가 붙습니다. ‘이는 어느 족속,  누구의 손자, 또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뭐 이름 아무 것이 그가 이런 죄를  범해 가지고 이렇게 됐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형을 받는, 사형받는  이런 방편을 가지고 왔고, 또 아주 대대토록 매장되고 수치되는 이런 못할 일을,  못할 방편을 통해서 왔고, 또 시집도 안 가고 이랬는데 남자없이 당장 아이가  밴다고 하니 도무지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이런 방편을 통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는 그참 천사를 만난다는 것이라든지, 또 이렇게 다윗 같은  위대한 자손을 낳는다는 것이라든지 대단히 좋은 소망이요, 희망있는  소식이지마는 저들의, 유대인들의 그 인간 법을 비추어 본다면, 인간 법을  비추어 보면 이치에 안 맞는 소식이지, 또 대대손손이 수치를 당하는 그런  방편이지, 또 당장 죽임을 당할 그런 방편이지 이러니까 마리아가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이거 무슨 인사냐고 이랬을 때에 가브리엘  천사는 다시 그에게, 이런 모든 비합리적이며 또 모든 것이 매장적이며 사형적인  이런 방편을 통해서 지극히 큰 영광스러운 일이 이루어질 터인데 이 마리아가  거부하면 안된다 그거요. 마리아가 거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강제로 이렇게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인간과 관련된 것은 선포도 하고  의논도 하고 이래서 인간의 그 자유의지가 인정을 할 때에, 순종을 할 때에 이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마리아가 이런 일로 인해서 아무리 소망은 좋지마는 그 방편이, 아무리  존귀하게 되는 일이지마는 그 방편이 인간 법으로 생각할 때에 비합리적이며  수치적이며 사망적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이 거부를 가브리엘 천사가 설화를  합니다.

‘마리아야 너거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에 대해서 네가 잘 알지  않느냐? 그는 본래 수태를 못하는 여인이요 또 나이가 늙어서 벌써 노인이 되어  있는 그런 여인이지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가 잉태해서 여섯달이 되었다’  하는 이 사실을 들어서 증거할 때에 마리아에게는 믿음이 생겨졌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된다면 되지  인간의 이치에, 인간들의 조건에, 인간들의 그 모든 법칙에 거슬린다고,  피조물들에게 거슬린다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런 제한적인 말씀인  줄 아느냐? 능치 못하심이 없다. 다만 그 본인이 거부할 때에는 하나님이  자유성을 허락했기 때문에 안된다’ 하는 이 논증을 할 때에 마리아가 이해하고  ‘주여!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헌신하고 수락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잉태돼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약교회의 모든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온갖 행복은 다 이런  방편으로 온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비합리적의 방편으로 오고, 모든 것이 다  수치 매장되어지는 이런 방편으로 오고, 망하고 죽는 이런 방편으로 온다. 이런  방편으로 오는 것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생각이나 그 모든 것은 다  사망의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있는 것은 전부 죽는 역사다. 역사에 있는 것은  죽는 역사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뱀 만난 이후에 대대손손이 수천년동안  인간들이 내려오면서 움직이는 움직임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달려가는 그  움직임이지 삶이 되는 움직임은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의 법칙과 삶의  법칙이 어찌 일치될 수가 있겠느냐? 죽음의 법칙의 정반대라면 삶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러기 때문에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려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한번 시달려서 시험을 하려고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는 생명의 법칙이요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망의 법칙에 거슬리고  사망의 역사에 거슬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이치에 맞지 않게 오는 것이  이것이 사는 법칙이다.

그러기에 ‘네가 지혜로운 줄로 알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 그래야 지혜가  되리라.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다 헛것으로 여기셨느니라’ 그런고로  지혜있는 자는 오히려 어리석은 자이고 어리석은 그자가 지혜로운 걸음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작고 크고 한 모든 구원에 속한 은혜, 하나님의 축복에 속한  은혜, 금생과 내세에 있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 찾아올 때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  모순된 방편을 통해 가지고 너희에게 온다. 이럴 때에 네가 믿어야 한다.

너에게 올 때에 반드시 비합리적으로 온다.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갈 때에  분명히, 그들이 풍랑 만나 가지고 죽을 지경인데 그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  오실 때에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물위로 걸어올 수 있는 분이라야 풍랑에서  저희들을 구출할 수가 있지 물위로 걸어오지 않고 배를 타고 건너오는 그런  분으로서는 그 풍랑에 와 봤자 그때 배는 다 같은 배들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할 수 있는 그 실력가가 물위로 걸어오는데 그들에게 보일 때에는  ‘물귀신이라, 이는 유령이라. 이제는 완전히 우리는 참 희망없다. 물귀신에게  완전히 죽는다.’ 이렇게 모순되게 오는 그분이 구주요, 그분을 만나고 나니까  해결돼. 모든 성경은 이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래서 ‘너를 부인해라. 너를 부인하기 전에는 이 구원이 너희에게 가지  못한다. 너를 부인하고, 또 하나는 네가 네 생각으로, 네 비판 네 통계로서는  네가 죽어라. 네가 희생되어라.’ 이치에 맞지 않고 희생되는 이것을 통해서 참  이치, 맞는 이치가 나오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기에 기독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패가 된 재산을 다시 복귀하는 데에도,  자기가 매장된 매장에서 일어서는 것도, 이 썩어질 모든 데에서 영생이  이루어지는 것도 전부가 다 인간 이치로 볼 때에 인간 역사로 볼 때에는  비합리적이며 매장적이며 사망적인, 비합리적이요 매장적이요 사망적인, 전체가  희생적인 이 방편을 통해서 온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이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받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 인정이 됩니다.

이렇게 오는데 마리아는 거기에서 이 세상법으로 세상 역사로 저들에게 가지고  있는 온갖 종교법이나 모든 것을 인용될 때에 ‘이는 도무지 좋기야 좋지마는  좋기 전에 다 죽고 망해 버리는데 뭐 필요가 있는가?’ 해서 거부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믿음을 주는 그 방편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준 방편이 ‘보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이런 이런 아이 밴 이런  증거가 있다’ 이 모든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역사를 인용해다가 증거를 댈 때에  그 증거로 인해서 마리아에게는 모든 염려와 두려움과 의심이 물러가고 이제  신앙이 생겨져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 귀한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에게 반드시 육적 축복이나 영적 축복이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은 이런 이 모든 모순성, 이렇게 모든  사망성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일을 인정치 못해서  거부해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고기 못 잡는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얘, 그러나 쉬어 가지고 오늘  밤에 또 그물 쳐 가지고 잡아라’ 하면 말하나 안 하나 저거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예,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에 그물 쳐 가지고 고기를 잡겠습니다.’  이렇지마는 대낮에 무슨 그물 쳐 가지고 고기 잡는 사람 없습니다. 대낮에는 안  잡힙니다. 아침에 가 가지고 그물 뜯어 와 가지고 오후 늦게 다 그물 쳐 가지고  밤에 걸리면 이제 아침에 떼 오는 것이 그것이 어부들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당장 대낮에 ‘그물 더 던져라. 그물을 던지되 하필 깊은 데 던져라? 참  무식하다. 낮에 무슨 고기가 잡히며, 그물을 칠 때는 변두리에다가 쳐야 되고  가에다 쳐야 되지, 이렇게 깊은 데다 칠려면 그만치 그물이 커야 되는 것인데  던지는 이 그물 가지고 무슨, 이 투망 그물 가지고 깊은 데 던져 가지고 될  것이라고, 그물 내려가기 전에 고기들은 벌써 도망 다 쳐버리는데 뭐이  되겠다고’ 이렇게 모순되게 하니까 말하기를 ‘우리 법칙으로는 안됩니다. 이거  선생님이 오셔 가지고 하니까 대접으로 하는 것이지, 주님이 말씀하셨사오니,  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한번 던져 보지요.” 던져 가지고, 낙심한 때이니까 잡혀지지 않으면 ‘안 잡혔습니다. 이거 헛일  아닙니까?’ 조롱하려고 지금, 배척을 하려고 요렇게 단단한 지금, ‘예수  따라다니며 몇해나 헛일했다’ 하는 요 마음을 가지고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니  한번 던져 보지요.’ 거기에 주라 말은 뭐 구주라 말 아니오. 그저 선생님이라  그말이오.

따라다니다가 재미 없으니까 지금 돌아간 때이니까, 낙심하고 돌아간 때이니까  어쩌든지 안 믿을 증거만 지금 잡으려고 하는 때인데 떡 말하니까 ‘그래  보지요’ 이랬는데, 이거 모순된,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모순된 방편의 지도에  고기가 잡혔으니까 베드로의 가슴이 뜨끔했다 그말이오. ‘아, 과연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데 나는 이제까지 주의 말씀을 부인했구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는 회개를 이루었다 그말이오.

이런 말씀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육의 은혜가 우리에게 올 때에는 이 세 가지  성질의 이거 모순성, 이 패망성 이런 방편을 통해서 오는 것이 이것이 축복하는  바른 옳은 진리의 법칙입니다.

이래 오는데 우리가 이 세상 지식 인간 지식 가지고, 인간 경험, 인간 모든  통계를 가지고 인정치 않기 때문에 이 일이 중단되는 것이니까, 이제 이렇게 올  때에 우리는 속단해서, 이는 암만 봐도, 모든 통계를 봐도 이번에는 순종하면  망한다. 이번에는 말씀대로 했다가는 이제는 가정이 망한다, 내 직장이  절단난다, 내 사업이 망한다. 이번에는 이 순종을 하면 나는 매장된다. 이번에는  순종하면 죽고 망한다.’  이렇게 할 때에 순전히 인본의 주관 가지고 부인할 것이 아니라 이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인증하는, 인용해서 증거하는, 인증하는 이 인증을 받아 가지고  모든 의심을 깨뜨리고 믿음을 가졌던 거와 같이 성경에 있는 모든 성경적 역사,  ‘아, 어떤 선지는 이런 형편에 어떻게 됐지? 어떤 사도는 이런 형편에 어찌  됐지? 성경 인물들이 다 이런 형편 사정에서 어찌 됐지?’ 하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이 모든 증거를 제가 인용해서 증거받을 때에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다 이런 모순을 통해서 와 가지고 성공했다. 요셉을 보라.

다윗을 보라. 네가 인간이 너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형제가 다 알아  주지 않고 그까짓 거야 했지마는 하나님은 알고 깊은 산골에 있는 다윗을 불러서  기어코라도 기름을 붓지 않았느냐?’ 이 모든 이 성경적 증거를 자기가 받아  가지고 이 성경 증거로 자기에게 증거할 때에 의심이 깨어지고 모든 인본의 것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주여,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믿지  않는 자,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 교만한 자는 받지 못합니다.

이 일이 또 성숙해 나갈 때에는 어떻게 됩니까? 성숙해 나갈 때에는, 이제 이  아이를 낳아 가지고 길러서 장성할 때까지 마리아는 고통입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 종말까지 고통입니다. 이래 고통 저래 고통,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기 속을, 자기를 통해서 나타난 구주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과 관련된 관련에는 고통이 없는 일이 없었습니다. 항상  고통이오.

그러기에 ‘백배나 얻되 핍박을 겸하여 얻으리라’ 하는 그 핍박이 뭐인가? 그  핍박이 인간 자기 주관 때문에 공연히 핍박이요, 주관 때문에 공연히 고통이지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고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꾸 배가 불러져 가니까, ‘핍박을 겸하여 오리라’ 배가 불러지니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서도 옆에서 마귀는 쉬지 않는 의심을  자꾸 갖다 주니까 ‘배가 불러지니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내가 아이 배었다고  하겠으니 이제 우리나라 법에는 내가 지금 사형을 받고 돌조산 속에 들어간다.

요러면 돌조산 속에 나는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내가 믿을 때에 ‘이제 안심이 된다.’ 죽었다가 살았다가, 의심했다가  믿었다가, 고통됐다가 기뻤다가 이렇게 이 양 모순 속에, 자기 주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면 죽을 지경이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해석하면 평안이고,  이런 가운데에서 길러 가다가 마지막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에는 하필,  탄생해도 먼 족속 가운데서 탄생하면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어떻게 알  것입니까? 이런데 자기 바로 가까운 친척 가운데서 탄생하게 되어 놨으니,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가 족속 가운데서 아이를 낳아 놨으니 이것은 뚜렷한  일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것도 죽을 짓, 최고로 죽을 짓, 물론 배가 거석할 때는 됐을 것이오.

배가 부를 때에는 뭐 참 곱사 노릇도 많이 했을 것이고 또 절름발이 노릇도 많이  했을 것이오. 이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이구, 누가 볼라’ 해 가지고, 요새  잉태된 잉모들 이렇게 구부려 가지고 이래 가지고 안 보일려 하는 것처럼 이래  구부려 가지고 다녔을 것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모든  증거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면 무슨 문제라?’ 배를 불룩하이 이래 냈을 것이고, 이러다가 불룩하다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기독자들이 나아가는 신앙걸음입니다.

이 기독교의 성공이라는 걸음은 인간 지식으로 해석을 하면 당장 죽고 망하는  해석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석을 하면 성공과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찌 됐느냐?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낳는데도, 아이 낳는데도  말구유에서 아이 낳았지, 아이 낳았다고 성문 밖에 있는 그 목자들이 와 가지고  야단을 지기지, 또 동방에서 박사들이-그들이 박사 하나를 보면 놀라는데-이  놀랄 만한 그런 위대한 박사들이 와 가지고 아이 보고 야단을 지기지. 이러니까  이 소문은 자꾸 퍼져 나갈수록 점점 심해진다.

또 이러니까 이제 현몽하기를, 헤롯왕이 잡아 죽이러 올려고 지금 하는 걸  천사가 ‘이 아이를 죽이러 오니까 피난가라’ 이러니까 이거 뭐 환란 환란,  모순 모순, 모든 비합리 비합리 이 사망의 이 역사가 계속됐습니다. 그렇지마는  잘 길러서 순산했고, 잘 길러서 구주가 됐습니다. 애굽에 가 가지고 피난했을  때에도 껍데기는 인간으로 생각하면 조마조마해서 계속해서 죽는 일입니다.

이러나 믿음으로 생각할 때에는 평강입니다.

이래 가지고 기를 때에도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현 유대교에게 다 대적이 됐고,  또 그들에게 모순되었고 이러니까 사생활 할 때에도 항상 그 형제간들에게  거슬려졌고, 이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편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가정에서도 항상 대립적이오.

대립된 여기에서 그 일을 감싸고 늘 예수님과 한편에서 핍박을 당하다가 나중에  공생활에 나선, 30년 지나고 3년 4개월 공생활 할 때에도 말씀하는 것마다 모두  다 모순되고 대립이 되어지니까 이것 전체의 대립이라.

이러다가 마지막에 잡혀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니 마리아는 눈물을 흘렸을  거라 말이오. 기가 찼을 거라.

이런 역리, 사망의 이치에 전 모순되는 이런 이치로 시작되고 이런 이치로  성장되고 이런 이치로 완성의 성공이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들. 이게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이 신약교회 종자가 이리 됐소. 이러기 때문에 성장이  다 이렇게 됩니다. 이런고로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하기 전에는 안됩니다.

이러기에 지난밤에 말씀하신 대로 두 가지를 바꾸어야 됩니다. 바꾸어야 되는  것, 두 가지 바꾸고 네 가지 오는 절망을 주님으로 인해서 이것을 다 극복해서  소망으로 바꾸어야 됩니다. 실은 인간 생각으로 절망했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많은 환자 가운데 38년 된 병자에게 갔던가? 이 네 가지, 네 가지 좋지 못한  조건 때문에 예수님은 갔습니다, 좋지 못한 조건 때문에. 이것이 주님으로  더불어 가까워지는 조건이지마는 인간들이 볼 때에, 인간 생각으로 볼 때에는 안  될 조건이지마는 예수님 편에서는 보면 잘될 그 조건들이라 그말이오. 이런  모순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걸 모르고 언제든지 인본주의로, 자기의 썩을 욕심 그놈 하자 하는 대로,  옛사람 자기 죽이는 그놈 위해 주면 좋다고, 그놈을 총을 놔서 죽이려고 하면  원수가 당장 됩니다. 여기에서 나간 자들이 뭣 때문에 나갔느냐? 그를 살리려고  말하는, 새사람을 살리고 옛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을 인해서 원수가 되어서  나갔습니다. 그걸 돌이키지 않으면 절대 구원은 안됩니다. 건설구원은 없습니다.

‘아! 그때에 그분이 말할 때에 듣기 싫어하는 요놈이 옛놈이로구나? 요놈이 날  죽이는 놈이구나’ 고것을 발견해서 나한테 오지 못하면 혼자 회개해도 회개해야  구원이 이루어지지 절대 되는 것 아닙니다. 천성 가는 길은 두 길 아니오. 한  길뿐입니다.

이러고 세 가지 순종하니까 됐어. 우리가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은 평생 살지  못하던 새 생활입니다. 말씀대로. 누운뱅이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걸음이라  그말이오.

이렇게 말씀대로 실행하는 일을 시작하고, 말씀대로 실행하는 일을 시작을 하고,  시작한 그 일을 장소가 바뀌고 시간이 바뀌어도 계속하는 것이 걸어가는 것이라  그말이오. 내가 일어섰는데 일어선 자가 만일 저 한 평 밖에 갔으면 내가 그  만침은 다른 사람이 날 들어다 줬든지 그리 안 하면 안 들어 줬으면 내가 걸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이 걸어가는 것은 계속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환경이 어떻게 되든지 네가 변동없이 걸어가라, 자리를 들어라, 네가 현실을  다스리라, 네 현실을 다스리라. 현실에 얹혀 살지 말고, 현실에게 붙어 살지  말고, 현실에 짐이 되지 말고, 거기에 붙어 살지 말고 현실을 네가 들어라. 네가  동산을 다스리라. 네 현실을 다스리라. 자유 자재하라.’  인민군이 와 가지고 어떻게 한다 해도 그들에게 피동되어 그들이 두렵게 하니까,  두렵게 하니까 두려워하고 그들이 방해하니까 방해당하고, 그들이 와 가지고  이제 강제로 금지하니까 금지당하고 이런 게 아니라 하거나 말거나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전하라 하면 전하고, 그들이 암만 말해도 안 한다  거부하면 거부하고, 그들이 죽인다 해도 예배보면 예배보고 하는 이것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네가 시작하라. 시작한 것을 계속 순종하라. 네가 네 현실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통치해라. 다스리라.’ 이러면 시간이 얼마 걸리든지 반드시  네가 아는 네 사회에서, 네가 아는 민족 속에서, 교회 속에서, 국가에서, 네가  아는 시대에서 가장 네가 행복스러운 사람, 무슨 행복스러운 것? 많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예수님의 권능으로 성한 사람 된 것, 예수님의 권능으로 온전한  사람 된 것.

예수님의 권능으로 온전한 사람 되고 보니까 자기 주관적인 행복, 한없는 소망이  넘치지, 한없는 기쁨이 넘치지, 한없는 만족이 넘치지, 주관 행복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어. 객관 행복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인기가 거의  다 그이로 다 기울어지지,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지, 모든 사람이 부러워보지,  모든 사람이 다 주목의 대상이 되어지지, 객관의 축복이 임하네. 자기 주관의  축복이 임하네. 자기 실상의 축복이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 병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졌어. 온전한 행위가 되어졌어. 이 이상 복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표적을 가지고 가르친 것은 그 실상은 우리인데 왜 여기 우리는  실상을 가지지 못하느냐 그거요. 어리석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지혜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잘난 것, 자기 똑똑한 것, 자기 지혜, 자기 세계 다  죽여버리시오. 버리고 주의 말씀으로만 자기 지식 삼아 가지고 말씀대로 요대로  해석하면 세상은 평안해. 해할 자가 하나도 없어.

무엇 때문에 제자들이 주님이 ‘강 건너 가라. 바다를 건너 가라’ 했는데,  천지가 반대해도 주님이 건너가라 했으면 건너가질 것인데 왜 그들이 놀라고  지금 기절하기까지 그와같이 됐던가? 저들이 바다 위에 있는 인간 상식, 인간  지식, 인간 지식 가지고 자기네들이 놀랐고 고통만 당했지 유익 준 것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말씀 그 지식만 가졌으면 물에 빠지면 ‘야 빠졌다가 건너가는가  보자. 우리가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건너가는가 보자.’ 당신이 절대자시니까,  믿었으면 물이 출렁거릴수록 참 기쁘고 즐거워 ‘더 풍랑 더 일었으면 좋겠다’  풍랑을 능가하는 주님을 믿었다면 거기에서 염려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들의  모든 고통 근심하는 것은 믿지 않는 죄값입니다, 믿지 않는 죄값. 인간 자기  지식으로 하는 고 죄값이오. 그것이 사망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276 영생의 말씀/ 요한복음 12장 44절-50절/ 791209주전 선지자 2015.12.09
2275 영생하는 도리/ 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870913주전 선지자 2015.12.09
2274 영생하는 방법/ 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870726주새 선지자 2015.12.09
2273 영생하는 방편/ 로마서 8장 1절-8절/ 820115금새 선지자 2015.12.09
2272 영생하는 방편/ 신명기 28장 13절-15절/ 820116토새 선지자 2015.12.09
2271 영원 무궁은 종자에서 결정된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38절/ 880604토새 선지자 2015.12.09
2270 영원무궁의 준비/ 시편 73장 11절-28절/ 830306주전 선지자 2015.12.09
2269 영원무궁의 준비/ 요한계시록 13장 1절-18절/ 821007목새 선지자 2015.12.09
» 영원한 가치 네 가지/ 누가복음 1장 30절-38절/ 820626토새 선지자 2015.12.09
2267 영원한 실력-다섯가지/ 요한계시록 3장 10절-13절/ 860918목새 선지자 2015.12.09
2266 영원한 집/ 고린도후서 5장 1절-7절/ 820224수새 선지자 2015.12.09
2265 영육 구원관/ 로마서 8장 10절-11절/ 791228금새 선지자 2015.12.09
2264 영육관/ 에베소서 4장 17절-24절/ 860323주전 선지자 2015.12.09
2263 영육으로 된 구원/ 창세기 2장 7절-9절/ 1988. 8. 10. 새벽집회 선지자 2015.12.09
2262 영육이 복을 받아 복의 기관이 되자/ 에베소서 5장 15절/ 85110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09
2261 영육이 축복 받는 길/ 창세기 13장 5절-18절/ 840524목새 선지자 2015.12.09
2260 영육이 축복 받는 길/ 창세기 13장 1절-18절/ 840523수야 선지자 2015.12.09
2259 영육이 축복받는 길/ 디모데전서 6장 17절-18절/ 1983. 11. 27.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09
2258 영육이 축복받는 길/ 디모데전서 6장 17절-19절/ 1983년 48공과 선지자 2015.12.09
2257 영이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2장 1절-2절/ 860215토새 선지자 201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