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9 00:55
씨뿌리는 비유
1981. 2. 20. 밤(금)
본문:마태복음 13장 1절∼9절 그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인데 아주 쉽고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 믿는 데는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 믿는 사람이 심히 희귀합니다.
지난 삼일 예배에도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래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박히지를 아니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쉬운 비유로 말씀했으나 심히 깨닫기도 어려운 말씀이요 또 이 말씀이 자기에게 복음이 돼서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며칠 전에도 말했는데, 제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최상림목사님의 신앙이 참 권위 있는 신앙으로 듣고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만나서 그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권능 있는 신앙생활을 했는가 그것을 좀 알아보려고 여러 면으로 물으니까 그 목사님은 자기의 평생 소원은 옥토에 뿌린 씨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고 그렇게 말을 합디다.
그분이 가는 곳곳마다 신앙에 빛을 보였고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은 참 다른 사람이 걷지 못한 독특한 신앙 걸음을 걸었고 또 성경 깨닫는 것도 독특한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제가 진주성경학교 가서 성경을 배울 때에 여러 목사님들이 와서 가르치는데 그 목사님처럼 깨닫고 가르치는 목사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로 인해서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숨이 떨어지기 전에 그들이 위급하니까 감옥에서 메여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메여서 병원으로 가서 거기서 순교했습니다.
그분은 일생의 생활에서 모든 신앙의 승리를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 하는 이 한 성구를 당신의 요절로 삼고 승리했다는 말을 제가 처음 만났을 때에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씨뿌리는 비유를 잘 알고 계셨으리라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때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말씀을 간단하게 해석을 들었지마는 제 신앙이 어려서 그때 깨닫지를 못했고 다만 그 목사님은 옥토에 뿌린 씨가 되기를 일생 소원하는 이 한 가지로 모든 시험을 이기고 그 뒤에 순교하셨다 그것만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 이 비유는 간단합니다. 네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첫째는 「길가에 뿌린 씨」입니다. 길바닥에 뿌린 씨라 말입니다. 길바닥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흙이 다져져 있기 때문에 씨를 뿌려도 땅속에 묻혀지지를 아니하니까 새들이 와서 다 주워 먹어버려서 결실이 없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둘째는 돌이 있는 밭에다가 뿌리니까 그 씨가 흙에 묻혀져서 싹이 나기는 났지마는 밑에 돌이 배겨 있으니까, 흙이 얕아서 씨가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햇볕이 쪼이니까 그만 뿌리가 깊지를 못해서 말라 죽어버려서 결실을 못 했다 했습니다.
셋째는 가시떨기 위에 뿌려졌기 때문에 씨앗이 나 가지고 자라는 것보다도 가시가 자라는 것이 더 무성해서 곡식을 위에서 덮어서 그만 결실치 못하고 그대로 그늘 밑에서 녹아지고 말았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넷째는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이는 길바닥도 아니요, 돌짝밭도 아니요, 덤불 위도 아니요, 옥토이기 때문에 씨가 나 가지고 잘 자라서 결실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되었다 했습니다. 이것이 여기 비유입니다. 아주 쉽고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도, 예수 믿는 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씨로 비유했고, 밭은 도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 도를 받는 우리를 가리켜서 밭이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길바닥 같은 그런 우리도 되기 쉽고, 또 돌짝밭 같은 그런 우리도 되기 쉽고, 덤불 밭 같은 그런 우리도 되기 쉽고, 옥토와 같은 우리도 될 수 있는 것을 여기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길가에 뿌리웠다는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길바닥은 많은 사람이 지나다녀서 땅이 딴딴하게 다져진 것이 길바닥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별별 사람들을 많이 접했고, 별별 일들을 많이 접했고, 수많은 말들을 들었고 또 책들을 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접촉해서 지나갔습니다. 길바닥을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접촉하고 지나갔습니다. 많은 사람의 글도 읽었고, 말도 들었고, 대면도 해 봤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도 자기가 듣고 접촉한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같이 그렇게 여기기 쉽다는 것을 가리켜서 길바닥이라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말씀인데 우리가 사람을 많이 접촉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말과 같이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가운데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말씀이요, 우주보다도 이 말씀의 한 획이 더 권위 있고 큰 말씀인데 이렇게 우리에게 믿어지지를 아니합니다. 인정되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우리에게 이렇게 깨달아지지를 아니합니다.
‘온 천하가 나를 멸하려고 하는 그것보다 이 말씀이 나를 멸하려고 하면 더 무섭다. 온 천하가 나를 돕는 것보다 이 말씀이 나를 도우면 더 권위 있다.’ 해서, 이 말씀은 천하보다, 우주보다 이 말씀의 한 획이 더 권위 있고 능력 있고 무섭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지마는 이렇게 인정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믿어지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길가에 뿌린 씨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접촉했는데 그 말들이 전부 거짓말들이요, 무책임한 말들이요, 속이는 말들이요, 쓸데없는 그런 말들인데 그런 말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그저 그런 말과 같이 여깁니다. 그렇게 안 여긴다고 해도 실은 그런 말과 같이 그렇게 여겨집니다.
이 말씀이 참 천지보다 능력이 커서, 이 말씀 한 마디는 내 몸보다 생명보다 더 크고 귀중하기 때문에 내 생명을 내 줬으면 내 줬지 이 말씀은 내 줄 수가 없고, 온 천하 인간을 다 대항했으면 대항했지 이 말씀은 대항할 수가 없고, 온 세계를 까뭉갰으면 까뭉갰지 이 말씀은 까뭉갤 수 없는 말씀인데 이렇게 권위 있는 이 말씀으로 인정이 되지 아니하는 그것이 길가에 뿌린 씨입니다.
이러니까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사건 하나 만나면 그 말씀은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사람 한번 만나면 말씀은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이런 저런 물건 하나 만나면 말씀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그 생각이 말씀 읽고 듣고 나면 그만 없어집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없어졌든지, 사건으로 인해서 없어졌든지, 물건으로 인해서 없어졌든지, 무엇으로 인해 없어졌든지 없어집니다. 그것을 비유해서 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청산해야 됩니다. 길가에 뿌린 씨는 옥토가 안 됩니다. 옥토에 뿌린 씨가 안 됩니다. 길가에 뿌린 씨가 된 이것을 파헤치든지 어쨌든지 해 가지고 옥토로 만들어야 됩니다. 옥토에 뿌린 씨가 돼야 되지 길가에 뿌린 씨가 되어 있으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들어도 설교를 암만 해도 외워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 말씀이 권위가 얼마나 있는지, 또 얼마나 실질적인 그런 실효가 있는 말씀인지, 권능이 있는 말씀인지 이 말씀의 권위의 실상대로 사실대로 그대로 느껴야 되겠고, 그대로 알아야 되겠고, 그대로 인정이 되어져야 될 터인데 이것이 안 됩니다. 이것이 되어져야 길가에 뿌린 씨가 안 됩니다. 이게 되어져야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길가에 뿌린 씨와 같이 그렇게 받는 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안 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최상림목사님은 자기가 길가에 뿌리운 씨가 안 되려고 일생을 노력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자기에게 생명보다 귀중하고, 천하보다 무섭고, 천하보다 크고, 공산주의가 와도, 왜정 말년 일본 사람의 세력이 커도 이 말씀의 능력만큼 크지 못하다는 것을 자기는 인식하려고, 그렇게 인정하려고, 믿으려고 애쓴 것이 일생 동안의 노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믿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의 권위를 이렇게 말씀했는데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 이것을 고쳐야 됩니다. 이것을 고쳐야 되지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를 받되 길바닥에 뿌린 씨와 같이 받는 사람이 안 돼야 구원이 있지 이것을 가지고는 구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이 많은 돈보다 더 권위 있게 인정이 됩니까? 이 말씀이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도 더 인정이 됩니까? 이 말씀이 내 생명을 죽이고 살리고, 우주를 부수고 세우고, 없는 가운데서 만들고 있는 것을 깨뜨리고 없앨 수 있는 이런 권능을 가진 말씀으로 믿어집니까?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길가 뿌린 씨이기 때문에 도를 암만 받아서 외우고 기억하고 증거하고 알아도 구원은 안 됩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길가 뿌린 씨와 같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길가 뿌린 씨가 돼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봐도 이 말씀이 천하의 보배보다도 더 귀하고, 천하의 권세보다도 더 무섭고, 천하가 나를 살리는 것보다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죽일 수가 있고, 이 말씀이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만드셨고, 지금도 이 말씀은 하나님과 꼭 같은 권능을 가지고 역사하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자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길가에 뿌린 씨와 같이 하나님의 도를 받고 있다.’ 하는 요것부터 먼저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이 되어 있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벗어버려서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은 도인이 되려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공이 많이 듭니다.
첫째는 이 말씀이 믿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우리가 수없이 해야 됩니다. 이것을 암만 말해도 거리가 멀어서 안 들려집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밑에 해석에 「깨닫지 못한다」 하신 말씀은 이 말씀의 이치를 모르는 것을 두고 말한 것 아닙니다. 이 말씀이 영생이요 이 말씀이 전능이요 이 말씀이 우주보다 능력 있는 큰 말씀인데 요것을 알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길가 뿌린 씨는 하나님의 도를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그 비유다.’ 천하의 인간들이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말씀이며, 어떤 권위를 가진 말씀이며, 어떤 능력을 가진 말씀이며, 이 말씀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 또 이 말씀이 지금은 구원하는 말씀이지마는 이 다음에 이 말씀이 심판할 때에는 아무도 어떤 것도 그 심판을 대항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것같이 그렇게 나는 인정되지 않는 그것이 길가에 뿌린 씨입니다. 이런 권위를 깨닫지 못하는 그것이 길가 뿌린 씨요.
그러기에 이 말씀이 인정되기 위해서 첫째는 하나님 앞에 수없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신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자꾸 합니다. 기도하고, 이 말씀대로 행해보고 기도하고, 행해보고 기도하고, 행해보고 할 때에 이 말씀이 자기에게 차차 차차 믿어지고 인정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집 안에서 기도해서 안 되면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고, 한 시간 해서 안 되면 두 시간 기도하고, 안 되면 철야하고, 안 되면 밥을 굶고, 산에 가서 기도하고, 무인지경에 가서 기도하고… 이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에 차차차차 이 말씀이 자기에게 믿어집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천지보다 크다. 내가 이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에 피난을 하고 말씀을 떠나지 않으면 온 세계가 다 달려들어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지킨다. 내가 이 말씀을 떠나지 않으면, 이 말씀의 능력은 전능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내가 떠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 슬하에, 이 말씀 나래 아래 있으면 내가 죽을 시간이 되기 전에는 천하의 만물이 달려들어도 못 죽인다. 나를 범죄케도 못 한다. 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 속에서 생겨집니다. 평소에 없던 확신이 강하게 생겨집니다. 과연 이 말씀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이 되어집니다.
확신이 되어집니다.
확신이 되어졌다가 또 눈뜨고 세상에 나가서 얼마 살다 보면 그만 확신했던 것이 또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또 확신을 가지도록 기도하고 하나씩 실행해서 다시 확신을 가집니다. 이렇게 해서, 다 같은 사람 같지마는 이 말씀은 천지보다 중량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 거역하는 것은 온 천하를 거역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며 더 큰 화를 받는 일이라는 이것을 깨닫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뺏겨도 이 말씀은 거역하지 못하고, 일본 나라의 그 강한 세력을 대항해도 이 말씀은 대항하지를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이 말씀에게 복종하고 이 말씀을 모시고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교를 얼마든지 하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마는 그게 다 소용 없습니다.
설교 암만 잘해도, 이 말씀대로 행동한다 해도 그것도 가치 없습니다. 반대가 없을 때에 이 말씀대로 행동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불경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상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습니다.
행하는 게 큰 것 아닙니다. 설교하는 게 큰 것 아니오.
이 말씀의 권위를, 이 말씀의 신실성을, 이 말씀의 불변성을, 이 말씀이 깨뜨리고 건설하고 이 말씀이 지키고 던지고 하는 이 말씀의 능력이 무한한 이 사실을 믿는 그것이 자기 변화입니다. 믿는 그것이 자기 변화요. 이것이 자기 구원입니다.
이게 성화요.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이 말씀이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에게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이 되어 있는 이 면을 깨닫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참 간절한 소원의 통곡을 하는 여기에서 확신이 조금씩 생겨집니다. 오늘밤에도 기도할 때 그래 보십시오. ‘주여, 주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주옵소서. 정말로 주의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주의 말씀이 신실하면 어느 정도 신실합니까? 권위가 어느 정도 있습니까? 무엇만큼 권위가 있습니까? 이 말씀이 참으로 완전성을 가졌습니까? 불변성을 가졌습니까? 영원성을 가졌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과 권능이 동등입니까?’ 자기가 부인도 해 보고 인정도 해 보고 이렇게 발동을 치는 가운데에서 성령이 오셔서 기도하게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도 생각지 아니한 성령의 도우심의 감동이 와 가지고 기도하게 합니다. 성령이 기도하게 합니다.
성령이 기도하게 할 때는 다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확신을 달라고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이렇게 노력함으로 성령이 오셔서 이 말씀에 대해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는 영감의 기도가 다릅니다. 자기가 압니다. 다른 사람도 들으면 압니다. 알아서 힘이 와서 자기에게 확신을 줍니다. ‘주여, 확신합니다.
확신합니다.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자기에게 되어지고 되어지고 되어지는 데에서 자기는 변화를 받습니다.
그러면 다 됐습니까? 그러고 나서 또 얼마 지나고 나면 성화된 것은 얼마 안 되고 부패성과 죄악이 있기 때문에 성화된 것은 파묻어 버리고 또 믿음이 없습니다. 또 믿어지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뜨거워지지를 아니합니다.
이 말씀이 믿어질 때에 여기가 피난처요, 여기가 소망이요, 여기가 전능입니다. 이 전능에 내가 의지하고 있는데 뭘 두려워하며, 뭘 부러워하며, 원할 것이 뭐 있으며, 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불만이나 불평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오겠습니까?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그때에 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질 때는 그런 게 안 옵니다.
그러기에 최상림목사님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기를 일생 동안 노력한다 하는 이 말씀이 자꾸 살아 갈수록 깨달아집니다. 그 어른은 자기가 길가에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이 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은 도인이 되려고 일생 동안 노력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세상에 어떤 사람의 말이든지, 어떤 권세의 말이든지, 어떤 사건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내가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을 흐리게 하고, 믿음을 손해가게 하고, 이 말씀의 지극히 큼에 대한, 이 말씀의 지극히 큼에 대해서 내가 인정되는, 이 말씀의 크고 능력 있는 여기 대한 내 인정이 흐리게 만드는 어떤 것도 없도록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세상에 어떤 말로도, 어떤 사람으로도, 어떤 사건으로도 이 말씀이 나에게 확신이 되어지는, 이 말씀은 내게 대해서 생명보다 귀한 영생을 나에게 주는 말씀이요, 전능한 말씀이요, 이 말씀에 대한 주님이 깨달아서 인정하심같이 내가 인정해야 될 터인데, 이렇게 믿어야 될 터인데 이 믿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요 믿음을 흐리게 만드는 요 세상 모든 것인 것을 발견하고 요것을 대적하는 것이 길바닥에 뿌린 씨라는 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요, 이것을 대항해서 이 말씀과 세상에 어떤 말과 서로 대립이 돼서 이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이 말씀을 흐리게 만들면 그것을 다 부인해 버리고 그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이것이 길가 뿌린 씨에서 옥토에 뿌린 씨로 변화돼 가려고 애를 쓰는 것인데 이 노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지금도 이것 껍데기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66권 도리를 내가 믿는데, 이 말씀을 확신하는 확신을 흐리게 하는 학문이라면 다 원수로 집어던지고, 흐리게 하는 인간의 말이라면 다 부인해야 합니다. 세상에 지식이나 학문이나 어떤 것이든지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흐리게 만드는, 이 확신을 줄어지게 만드는 이런 것을 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길바닥이 되어 있는 것을 옥토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말들을 자꾸 듣는 가운데서 그 모든 말과 성경 말씀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말로, 모든 지식으로, 모든 책으로, 모든 사람으로 인해서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손해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도가 왔는데, 이 도는 획 하나가 천지보다 중량이 무겁고 권위가 큰 말씀인데 이 말씀을 내가 이대로 믿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말들과 지식들과 모든 책들과 모든 인간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이 확신에 손해본다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길가 뿌린 씨라는 이 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손해를 당하지 아니하도록 그것을 물리치든지 능가하든지 이해하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이 말씀에 대한 확신하는 이 확신이 하나도 침해를 받지 않고 이 말씀을 믿어야 할 정도대로 믿는 그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된 것입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이것은 성신의 감동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이러기에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귀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신앙양심이 있는 자는 들으라 하는 말입니다.
길가는 많은 사람이 밟은 곳입니다. 한 사람이 밟으니까 그만큼 다져졌고, 두 사람이 밟으니까 그만큼 다져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말, 수많은 사람들의 글, 수많은 사람들의 주장, 수많은 사람들의 교제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확신에 손해를 본 것을 네 양심으로 생각해 봐라. 손해를 봤나 안 봤나?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양심이 있는 자는 손해본 것을 깨달아라 하는 말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양심이 있는 자는 양심으로 비판해 봐라. 양심으로 판단해 봐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를 만들 권능을 가진 말씀이고 만들어 놓은 우주를 전멸시킬 권능을 가진 말씀인데, 이 말씀은 이 말씀을 인정하고 이 말씀에 피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영원히 피난시켜 줄 수 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어느 정도 믿는지 양심으로 생각해 보라. 이 말씀을 주님이 말씀하신 이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 돈으로 말하면 어느 액수 정도로 이 말씀을 믿는지? 사람의 어느 권세만큼 믿는지?
옥토에 뿌린 씨는 어떤 게 옥토에 뿌린 씨냐? 씨가 떨어지면 씨가 그 옥토를 다 먹습니다. 그 흙에 있는 지기를 다 먹소. 씨가 그 흙의 지기를 다 먹어도 방해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돌도 방해 안 하지, 덤불도 방해 안 하지, 딴딴한 것도 없지 퍼석퍼석하니까 다 빨아먹어요.
이 말씀이 내 마음을 다 삼킬 수 있고, 내 뜻을 다 삼킬 수 있고, 내 힘을 삼킬 수 있고, 내 목숨을 다 삼킬 수 있도록, 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전부를 이 말씀에게 기울여 바칠 수 있도록 믿느냐 안 믿느냐? 양심이 있으면 믿는지 안 믿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옥토에 뿌린 씨는 이 씨앗이 그 땅에 있는 지기를 마음대로 다 빨아먹되 방해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실이 있지요. 이 말씀을 깨달을 때에 ‘이 말씀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시간을 다하고, 소유를 다하고 전부 다해서 이 말씀을 모시고 살아야 되겠고 이 말씀 지켜야 되겠고 이 말씀 떠나면 안 된다. 이 말씀은 우주보다 귀하다. 우주보다 능력이 크다. 우주를 만드신 것이 이 말씀의 능력 가지고 만드셨다. 온 천지보다 이 말씀의 한 획이 권위가 크다.’ 이렇게 믿어지는지? 이 말씀이 믿어지는 것만큼 자기는 이 말씀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만큼 이 말씀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돈 천 원보다 이 말씀이 더 권위 있고 가치 있다고 아는 사람은 돈 천 원을 버렸으면 버렸지 이 말씀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기 목숨보다 더 권위 있게 가치 있게, 필요 있고 보배롭고 유익되게 여기는 사람은 목숨을 버렸지 이 말씀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우리가 믿느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양심이 있는 자야 너를 판단해 봐라. 어느 정도 믿느냐?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느냐? 그 이유는 귀신이 말해 놓은 인간의 말을, 인간의 지식을, 인간의 주장을 들어서 우리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거짓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도 그와 같이 여겨집니다.
이것을 우리의 병으로 알고 ‘나는 길바닥과 같은 도인이다.’ 이렇게 양심으로 자기를 판단하고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최상림목사님 그분은 일생을 이걸로만 노력했는데 우리는 이것이 병인 줄 알고나 있습니까! 병든 줄 압니까! 이 말씀을 믿는 줄 압니까! 정말로 믿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더웁든지 차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안 믿으면 안 믿는 줄 알아야지요. 믿는 줄 알면 참 믿어야지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줄 알고, 안 믿으면서도 믿는 줄 알고, 안 믿지 않는 줄 알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이러기 때문에 주님 앞에는 토해 내쳐집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내 심령에 지나갔고 나를 접촉해 지나갔기 때문에, 수많은 사이비한, 거짓된, 무책임한, 되는 대로 지껄인! 되는 대로 글을 써놓은! 내 심령을 다져서 하나님의 이 무한한 말씀이 믿어지지 않게 만든 이 세상이 원수라는 것을 발견을 하는지? 지금도 그것 많으면 잘살 줄 알고, 그것이 자기에게 확신을 멸해버리는, 자기를 멸망시키는 무서운 해독이 있는 것이요, 이 해독이 있는 줄 알고 믿음으로 그걸 정복하면 내 보배가 되지마는 믿음으로 그걸 정복하지 못하고 그것에게 해독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이 세상은 나를 전멸시키는 세상입니다.
모든 성도가 여기서 죽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여기서 망쳤습니다.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이 되어 있으면서 입술로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이 권위를 깨달은 게 깨달은 건데, 이 말씀의 권위를 깨달으면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안 바칠 수가 없어요! 소유와 몸이 어디 가서 피난해요? 이 말씀에 피난하지! 최상림목사님은 일생 동안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이 되어 있는 것을 벗으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애쓴다는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순교했습니다.
귀가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양심으로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에 들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이 말씀을 믿는지? 어느 정도 믿습니까? 자기 전 재산만큼 믿습니까? 자기 몸뚱이보다 크다고 믿습니까? 자기 몸뚱이보다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믿습니까? 자기의 생명보다 이 말씀이 필요하다고 믿습니까? 자기를 공산주의 앞에서 이 말씀이 능히 구원할 줄로 믿습니까? 다니엘은 믿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다리오 왕이 하루 종일 말하고 사자구덩이에 집어던진다고 해도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어기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권능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권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줄로 알고 있으니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지? 이 말씀만 우리가 가지고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길가에 뿌린 씨라는 이 말씀이 첫째로 깨달아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의 권위성이 내게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영생인데 이 영생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원수 앞에서 능히 보호할 수 있는 말씀인데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내 소유보다 몸보다 생명보다 내게 필요 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 떠나면 내가 죽는데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이것이 첫째입니다. 이게 해결돼야 됩니다. 이것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헛일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 헛일이오. 이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 이것으로 더불어 싸웁니다.
내가 어떤 사람 보니까 기도하는 것을 봤습니다. 보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저 혼자 기도하는 게 아니고 영감으로 기도를 합니다. ‘주여, 확신을 주시옵소서.’ 자기도 모르게 확신을 달하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기도하니까 자꾸 확신이 들어가요. 기도하니 자꾸 확신으로 들어가.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확신합니다! 확신합니다!’ 하는데 그때는 이 말씀이 자기 몸과 생명보다도 더 크고 이 말씀에 대한 권능을 확신해요.
그렇게 성화된 그것으로써 이 말씀을 저버리고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소한 평소 생활에 대한 그런 말씀도 있고 생명에 관한 말씀도 있는데, 그저 보통 생활에서 하나님이 허용도 하시고 하는 일반적인 사소한 일에 되는 그런 말씀을 혹 어길지라도 생명되는 그 말씀을 어기고는 살기 위해서 가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려는 이 확신을 세상 모든 지식에게 빼앗겼고, 인간들의 무책임한 말의 해독에서 빼앗겼고, 모든 인간 접촉 만물 접촉에서 빼앗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속화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속화되고 낡아졌습니다.
세상의 많은 인간들을 접촉하는 거기서 속화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를 아니하는 길바닥과 같이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확신이 안 됩니다. 이 모든 세상의 인간 말, 인간의 지식으로 인한 해독을 받은 이 해독을 우리가 벗어야 우리 구원이 있지 이 해독을 벗기 전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믿는 것만큼 우리에게는 권능이 나옵니다. 믿는 것만큼 평안해집니다. 믿는 것만큼 의지합니다. 믿는 것만큼 기쁩니다. 믿는 것만큼 행해집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이런 도인,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내 믿음이 손해를 봐서 확신이 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해졌다는 이것을 깨닫고 이 병을 고치려고, 이것에게 손해본 것을 알고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달리는 고치는 도리 없습니다. 기도로, 성신의 감동으로 믿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믿음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한 사람은 그 말씀에 생명도 아낌없이 맡겨버리는데 왜 한 사람은 그 말씀을 백 번 읽어도 돈 천 원만큼도 귀중히 여기지 않습니까? 길바닥으로 인해서, 세상 모든 인간들의 접촉, 사상, 말, 글, 주장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말씀을 그와 같은 걸로 여깁니다.
천하의 말을 다 뭉쳐도 이 말씀의 획 하나 중량의 억억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왜 세상 인간의 말과 하나님 말씀을 같이 봅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말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 강퍅하게 길가와 같이 다져져 있는 마음을 아는지? 모든 이 세상을 접하는 가운데서 자기 마음이 강퍅해진 것을 아는지? 완패해진 것을 아는지? 믿음이 생겨지지 않는 것을 아는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양심이 있는 자는 생각해 보라. 내게 이 깨달음이 있는지? 깨달았으면 이 말씀을 새가 와서 주워 먹지 못하지요. 이 말씀대로 깨닫고 요대로 살아야 영생이요 이것이 보배요 이것이 행복이요 이것이 성공이요 승리요 기쁨이요 가장 유일한 행복인데 이 말씀을 새에게 뺏기지 않지요. 이 말씀을 돈으로 인해서 손해보지 않지요. 목숨으로 인해서 손해보지 않지요.
우리가 이것저것으로 인해서 말씀대로 살려는 이것이 흐려지고 없어지고 하는 것은 이 도가 우리에게 없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돌밭에 뿌린 씨입니다. 돌밭에 뿌린 씨라 말은,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자기가 거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자기가 방해가 됩니다.
자기가 방해가 되는데 방해되는 자기를 던집니다. 자기 목숨이 방해되니까 목숨을 던지고 말씀대로 살고, 몸이 방해되면 몸을 던지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사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라면 자기 생각이나 욕심이나 성품이나 주장이나 몸이나 생명이나 자기라는 이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을 방해할 때는 그것을 아낌없이 집어던져 버릴 수 있는 이것이 돌짝밭에 뿌린 씨가 옥토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권위가 주님이 인정하신 것같이 이렇게 믿어지는 것만큼 자기 구원은 이루어지고, 믿어지는 대로 실행할 때에 방해하는 자기 그것을 캐서 던져버린 것만큼 뿌리는 내립니다.
그 다음에 덤불 밑에 뿌린 씨는 세상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길가밭에 뿌린 씨가 옥토 되는 것이 제일 어렵고, 돌짝밭이 옥토 되는 것이 그 다음 어렵고, 덤불 밑에 뿌린 씨가 옥토 되는 것은 쉽습니다.
덤불 밑에 뿌린 씨는 세상을 말합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세상이 방해하면 세상을 던져버립니다. 세상을 이별해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걸 아끼지 아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다 뺏기고, 세상을 다 뺏기고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제거되는, 세상을 다 뺏기고 세상에 있는 걸 다 뺏겨도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양보 없는 그것이 덤불 밑에 뿌린 씨가 옥토에 뿌린 씨 되는 것입니다.
옥토에 뿌린 씨는 이 말씀이 나에게 자유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자유해요. 이 말씀은 나에게 마음대로 합니다. 이 말씀이 나를 죽이고 살리고 마음대로 합니다. 왜? 이 말씀에게 모든 것을 다 기울여 바쳐서 이 말씀 지키는 데에 모든 걸 다 투자하니까.
그러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리 되면, 하나를 지켜 행하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 지켜 행하면 하나 지켜 행함으로써 한없이 행해지는 것이요, 나 한 사람이 이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배수로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되면 지극히 큰 데도 충성합니다. 요렇게 한 진리를, 한 부분을 요대로 해서 지키면 그것으로 인해서 수많은 진리를 지킬 수 있다, 요렇게 해서 일부분이 성화되면 수많은 부분이 성화된다, 너 한 사람이 구원됨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양심이 없으면 이것을 모릅니다. 여기 비유 중에 씨뿌리는 비유가 제일 처음에 있는데 제일 어려운 비유입니다. 제일 중요한 비유요. 이 비유 중에도 길가에 뿌리운 씨 요것이, 요 도인, 길가 뿌린 씨와 같은 요 도인된 여기서 이 해독을 벗어나서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은 요런 도인이 되려는 요것을 우리가 일생 동안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