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길가밭,돌밭

 

1983. 5. 5. 목후집회

 

본문 : 마태복음 13장 18절∼23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음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자꾸 이 본문만 보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권태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마음에 그만 낙망되는 사람들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들은 사람들은  모두 조는 것 보니까, 조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수박 겉 핥듯이 겉만 핥고 마는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도 껍데기 신앙 생활 해요.

 여기에 옥토에 뿌린 씨것이 없이 완전 관계를 맺게 것이 없이 완전 관계를 맺게  된다.된다.는 혹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맺는다 하는 것은, 옥토는 제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를 주님이 말씀을 하셔서 옥토에 뿌린 씨라 그렇게  말씀했고, 옥토에 뿌린 씨가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결실을 한다 하신  이 말씀을 보면 백배, 육 십배, 삼십배는 아주 이상적으로 잘된 것을 말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상적으로 잘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혹 그걸 저와 같이  백배는 사람에게 대해서 영원히 심판받을 것이나 후회할 것이 없이 인인관계는  완전 관계를 맺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또 그 다음에는 악령과 사람 관계  악령에게 대해서는 뭐 유혹 안 받는 사람이 없는데, 악령과의 관계도 하나님  말씀대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이, 흠점이 없이, 심판 받을 것이 없이 완전  관계를 맺게 된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조금도  흠없이 심판 받을 것 없이 완전 관계를 맺게 된다 하는 그런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은 뭐 이의가 있습니까?  혹 그것은, 백을 사람이라, 육십을 마귀라, 삼십을 하나님이라 그래 하는  그것은 아마 어떤 사람이 '그 뭐 그렇게까지 할까' 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 이렇지마는 어쨌건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한다는 것은  최고로 신앙 결실을 잘한 것이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무도 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떻소? 그것도 이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씩이라도 꼭 따져서, 지금 평안  무사할 때에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 말해도 되고 저렇게 말해도 되고, 이래도  긍정하고 저래도 긍정하고 이렇지마는 그게 좀 다급한 때를 당해 놓으면 자기가  성경을 깨달은 그것이 자꾸만 그 다급한 현실에 걸리지 않도록 다급한 현실에서  좀 용신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깨달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깨달음도 정확한 깨달음이라, 성경은 아니지마는  성경과 같이 성경에 있는 진리라, 이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변할 수 없는 깨달음이라, 요것은 바로 이 말씀이  성경 말씀이요 성경 말씀 안에 그게 들었다 이렇게 정확무오하게 그것도 깨달은  깨달음을 가겨야 앞으로 생명을 내 놔야 될 때에도 이것은 뭐 성경 말씀이니까  내가 안 죽으면 안 죽었지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하는 그런 생각은 가질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경은 이렇다 하는 그게 결정된다 말이오. 그 결정이 되어야  힘이 있지 그 결정 안 되면 힘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저 어떤 사람은 해석은 이래 해도 되고 저래도 되고 아무래도 된다  하는 그 사람은 아직까지 환난을 당하지 않아본 사람 이오. 자기가 이리도 되고,  저리도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환난이 올 때에 이리 해석하는 것이  자기에게 그때 좀 편리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기 현실에 좀 행동하기가  쉽겠다 싶으면 그때는 그 해석 사용하고, 또 그것이 현실 만났을 때 불리할  때에는 또 저 해석을 사용하고,  이러니까 어디 진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데 이래도 저래도 해석을 된다고 그  사람이, 물론 해석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이리 저리 여러 가지 이용할 수  있지마는 거기에 대한 이치는 둘이 있을 수 없다 말이오. 이치는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치가 둘로 셋으로 자유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다 용납하는  그런 사람은 자기가 실행을 하려고 할 때에 그때는 형편에 따라서 자기가 변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해석을 해도 그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가 아니라, 물론 그 해석을  어부 가지고도 해석하고, 농부 가지고도 해석하고, 장사 가지고도 해석하고, 또  식물 가지고도 해석하고, 동물 가지고도 해석하고, 그 뭐 해석하는 데 이용하는  그런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거기에 해당된 이치는 하나뿐이라 말이오.

뭘로 하든지, 뭘로 이용해 가지고 해석을 하든지 그 이치는 하나라야 되지  이치가, 한 성구를 이 이치로도 해석하고 저 이치로도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없다 그겁니다. 거기에서부터 에누리를 안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에누리  하지 않기로 우리가 작정을 하고 그렇게 기도했었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도…….

 그러기에 어떤 학자들은 성경 해석이나 그런 걸 그저 아무것이는 이래 말했다,  아무것이는 이렇게 해석했다, 아무것이는 이렇게 해석했다, 물론 해석할 때에  거기다가 이용한 그런 이용의 것은 이런 것을 이용해 가지고도 해석하고 저런 걸  이용해 가지고도 해석을 하지마는 이치는 둘로 못 하는데, 아무것이는 이런  이치로 해석했다, 아무것이는 이런 이치로 해석했다 이래 가지고 그것만 주  늘어놓고, 그러면 주석을 쓰는 너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저 해석하는 것은 없어.

 그것은 자기는 아무 깨달음 없이 남의 것을 소개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자기는 갈 길도 없는 사람이요, 그저 깨달음도 없는 사람, 주장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깨달음에 대해서 정확한 깨달음을 가져야 되고 이리도,  저리도 변동할 수 없는 깨달음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거룩하고 잔실하사'  하는 거룩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데 거기에서, 참은 하나만 되는 그  참을 여러 가지 섞여 있는 거기에서 가리고 가리고 가려서 참인 그 하나를  자기가 딱 선출해 잡는 그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거룩.

 또 진실이라 말은 벌써 가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리도 저리도 섞지도  못하고 타지도 못하고 가감도 못하는 완전한 하나가 되어있는 하나를 가리켜서  진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성경에서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하는 그 사람은 그 진실이 없는  사람이오. 또 뭐 아무나따나 상관이 있나, 이래도 저래도 된다 하는 그 사람은  거룩이 없는 사람이오.

 우리 믿는 사람이 거룩한 성도라고 이렇게, 성도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는 활용을 하고 따지고 따져 가지고 '이거나, 저거나?'  마구 따지고 따져 가지고, 진가를 따져서 꼭 자기 마음에 잘못할 것 없이  이것이라 하는 그 하나를 결정해 내야 되는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길가에 뿌리운 씨도 결실을 못 했고, 돌밭에 뿌리운 씨도 결실을  못 했고 또 덤불 위에 뿌리운 씨도 결실을 못했습니다. 이 결실 못 햇다 하는  이것은 신앙에 구원 실패했다 그말 아닙니까? 구원 실패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도를 듣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교회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구원의 결실은 하나도 못 했다 그말이오. 구원의 결실은  하나도 못 했다 자기 이것도 무슨 해석의 에누리가 있습니까? 에누리 없습니다.

 이 셋은 다 결실 못 했고, 옥토만 구원 결실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옥토에  뿌린 씨가 되지 않으면 우리 구원은 실패다. 넷 중에 셋은 실패이고 하나는,  옥토에 떨어진 것만 성공했지 길바닥에도 돌밭에도 가시 덤불에도 다 실패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뭘 소망 합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 성공하는 것밖에 더  봅니까?  우리가 어떠한 좋은 위치에서 아주 잘 먹고 잘 입고 산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  실패라면 그까짓 것 무슨 소용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유명하게  알아주고 무엇이 어떻다 할지라도 구원 실패하면 뭐 합니까? 또 오랫동안 나이  많게 아주 장수하도록 장수로 살아도 구원 실패하면 뭐 합니까? 그저 구원  실패한다면 살아 있으면 공연히 이 세상의 것이나 허비 낭비하지, 그 뒤에  부끄러을 것이나 장만하지 살 필요도 없고 살 가치도 없고 살 이유도 없고 사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의 성과를 이루는, 성과를 거두는 구원 성공 하는 그것이  양이 많든지 적든지 그것 때문에 사는 것이지 그것 없으면 살 필요가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천국 말씀을 들어 가지고  우리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옥토가 돼야 된다. 그러면 우리는 옥토에 뿌린 씨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렇지 않습니까? 옥토에 뿌리운 씨가 그저 되어도 되고 안 되어도  되고 한 그 사람은 뭐 구원이야 이루어지든지 말든지 하는 그 사람이고, 꼭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구원의 성공을 해야  된다 하는 그 소원을 가지는 사람인 것입니다.

 구원 성공을 하려고 하면 첫째는 길바닥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갈바닥에 뿌리운 씨 그것이 되지 않으려고 하면, 길바닥에 뿌리운 씨가 되지  않으려면 길바닥 그걸 해결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쩌든지 길바닥을 해결을 해서  딴딴한 길바닥이 물씬 물씬한 옥토같은 흙이 되어야 하겠고,  또 새들이 와서 주워 먹어서 그만 결실 못하게 하니까 새들 그것도 해결을 해야  되겠고, 또 악한 자가 먹어 버려서 안 되니까 악한 자 그것도 해결해야 되겠고,  예수를 믿으려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길가밭에 대해서 이  세 가지 해결은 어떻게 지워도 이 세 가지 해결은 지워야 된다 그거요. 뭐  해결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이 세 가지 해결은 어떻게 해도 해야  된다 그것입니다.

 되든지 안 되든지 그렇게 마음을 먹는,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되는 길을  말해주면 좋아서 되는 길을 원하고 찾는 사람이라야 되지, 되든지 말든지 하는  그 사람이야, 그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봤자 들어갈 리도 없고 또 그 사람에게  듣기를 원할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바닥이라, 길바닥은 무엇으로 해석합니까? 내가 해석하는 것이 그게  틀리고 혹 다른 사람들이 달리 해석하는지 몰라도 저는 해석하기를, 깨닫기를  길바닥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 수많은 이 문화들, 이 수많은 역사들,  그 모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밟혀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받는 자기의 그 심령이 아주 단단히 굳어져서 하나님의 도를 받을  때에 그 깨달음이 없는 그런 심령이라 그렇게 해석이 됩니다.

 여기 19절에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지 못 할 때에는'  이러니까 그 깨달음은 자기 대로의 깨닫는 깨달음입니까? 또 그렇지 않으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깨달음은 바로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  깨달음입니까? 여기 깨달음은 어떤 깨달움이지요? 깨닫지 못했다 하는테 어떤  깨달음을 가지지 못했다 말입니까?  그 깨달음은 딴딴한 길바닥에 그 씨가 과묻히지 못한 것이 길바닥에 뿌린  씨인데, 그 딴딴한 길바닥에 뿌리운 것은 그 씨가 파묻히지 못한 것이 깨닫지  못한 것이니까, 이제 옳은 깨달음이면 거기에 파묻힐 수 있는 깨달음을 가져야  될 것 아니나 그말입니다.

 길바닥에 다져 있는, 다져 있는 딴딴한 것을 꿰뚫은 깨달음 그 딴딴한 그것에게  아무런 막히지 않고 제재받지 않고 그런 것을 다 능가하고 초월한 그런 도를  받을 때 깨달음이 돼야 된다 하는 그 말씀이 아닙니까? 그 해석이 맞소, 안  맞소?

 이거 뭐 이러니 어찌 보면 낙심돼요.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와 가지고 내가  증거하다가 행위가 부활된다는 그 말이 됐는데, 그것 가지고 와 가지고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됩니다' 하는 그 소리를 들으니까 내 마음에 이렇게 이  흑백을 구별하고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애터지게  말해 쌓는 것이 헛되지 않고, 그렇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거 참  희망있고 소망있다. 그래 즐겁고 보람을 느꼈어요.

 그 해석을 할 때에 그게 옳으나 틀리나 요것을 세밀히 조사를 해 가지고 고것을  가지고 구별해 가지고 '요것은 틀렸다' 이것 하나라도 이렇게 해 나가면 이 세상  모든 것에게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삭개오 모양으로 사람들 다 헤쳐 버리고  예수님 만날 수가 있다 그거요.

 이단자들도 만날 때에 그만 뭐 그 몇만 깨달아 가지고 깨달음대로, 이 깨달음  대로 껍데기 성경 읽는 것과, 성경 읽는데 여기서는 이면을 성경이 말해놨고  저면을 성경이 말해 놨지마는 저면을 말해 놓은 데에 이 면의 성경을 가지고  보면 그면이 알아지고, 모든 걸 다 종합해서 보면 거기에서 둥굴 둥굴한  하나님의 그 진리의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인데, 몇만 깨달아 그래 돼 놓으면 눈이 뜨여서 나중에는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어서 그만 오늘 그 목사님 모양으로 어디가 설교 들을 때에  '저것은 틀렸다, 맞았다' 그런 것부터 이제 눈이 열리면 그런 것도 '틀렸다,  그릇됐다' 하지마는 그 설교에 대해서는 많은 각도가 있고 많은 면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면으로 나가면 저게 결과적으로는 뭐이 되겠고 저면으로 나가면  결과적으로 뭐이 되겠고 저것은 어떻게 탈선되고 어떻게 탈선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자기도 삐뚤어진 것올 배우는 그 쑥물을 먹지 않고 또 자기가 가르치는  일도 바로 가르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거 자꾸 말해도, 이거 또 이 말 하면 그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는데, 길바닥에 받혀 가지고 씨가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그게 깨닫지 못한  것이라 말이지오. 그러면 그 깨달음이 어떤 깨달음일 것인가? 그 길바닥에 이제  묻혀서, 길바닥에, 그 길바닥 속에 심겨서, 길바닥 속에 묻혀서 싹이 나서 자랄  수 있도록 묻히어진 그것이 이제 바른 깨달음이라, 그 깨달음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어둡게 강퍅하게 이렇게 속화되게 해 가지고,  우리 마음이 강퍅해지고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고 둔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이 세상 모든 말, 모든 사람들 그것을 네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그것을 휘떡 집어 던져 버리고 그것을 다 파 내던겨 버리고 그 속예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그 깨달음을 우리가 가져야 된다 그거요.

 그 깨달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데 그만 그 과정을 가지지 않고 피상적으로  이래 가지고 말기 때문에 나중에 그 사람이 새에게도 다 빼앗겨 버리고, 또 악한  자에게도 빼앗겨 버리고 마니까, 일단 깨달을 때에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지식이나 문화나 그것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에게 막히지 않고  길바닥 딴딴한 데 막히지 않고, 그 길바닥 딴딴한 그걸 뚫고 들어가서 그 밑에  심겨진 그 깨달음이라야 되니까,  그런 것들에게 막혀지지 아니하고, 그런 것들을 궤뚫고, 그런 것들을 초월한  그런 깨달음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니까, 그 깨달음에 들어가면 이재 길바닥  그것은 상관없이 움이 나고 싹이 날 것이라 그거요.

 그 깨달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고, 또 새떼가 와서 주워 먹는, 새떼에게 주워  먹히지 않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고, 또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아니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고, 첫째는 요 깨달음이오, 깨달음 가지고 그 세 가지를 다  방어해야 되니까,  깨달음은 어떤 깨달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말과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말과 말을 구별 할 수 있고, 비교하고  구별할 수 있고, 말한 자와 말하신 분을 이렇게 구별하는 이것이 구별이 확실히  되어 가지고 바로 정상적인 올바른 그 비판이 되고, 올바른 가치나 권위가  자기에게 판정이 되는 그 깨달음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니까 그 깨달음을 가지는  그것이 참 성신의 도우심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고,  자기도 또 그 깨달음을 가지려고 하면 얼마나 애를 써 가지고서라야 그  깨달음을 가지게 되니까 그걸 표준을 삼고 이렇게 이 새떼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인간들이 세상에 시달려서 세상으로 인해서 자기 마음이 강퍅해진 그  강퍅한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서, 세상이 나를 강퍅케, 나를 속화되게, 나를  우둔하게 만든 그런 것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그것을 표준을 잡자 그말이오, 표준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깨달음 표준을 여기다 두고, 아무나 따나 그냥 성경 말씀  천국 말씀을 하면 성경에 있는 것, 그저 자기가 거기에 있는 것 외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또 자기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그런 피상적인 그런  깨달음으로 깨달음의 표준을 삼지 말고, 그 깨달음의 표준을 삼기를 이 세상 그  어떤 것에게도, 이 세상 모든 인간 말에게도 막히지 않고, 또 모든 인간들에게도  막히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다 이기고 그 말씀을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그  깨달음……  그러면, 길바닥을 다지게 된 이 세상의 현실문화, 이 현실이라는 이 세상 세상  지식, 이런 것에게 막히지 아니하고 이 말씀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이  깨달음을 우리가 깨달음으로 삼자 고말이오. 이 깨달음을 깨달음의 표준으로  삼고 이 깨달음이 되어야 깨달음이지 그 깨달음이 아니면 깨달음이 안된다  그거요.

 그러나 우리는 깨달음을 너무 아주 헐하게 해 가지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내  깨달음이 온 세상이 다 막아도 내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그 깨달음, 또 내가  세상이 무었이 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내가 이 말씀에게 완전히 삼켜질 수  있는 깨달음, 이 말씀과 삼켜질 수 있는 깨달음, 이 깨달음을 내가 표준하고, 이  깨달음이 되기를 표준해서 노력을 해야 될 터인테, 우리가 깨달음을 백점짜리  깨달음, 원만한 백점짜리 깨달음을 가지려 하는 게 아니고 그저 백 분지 일도 안  되는 그 깨달음으로 만족하니까 그 백점짜리 백프로의 깨달음에는 근방에 가지도  못한다 그말이오.

 참 비유가 되어 놓으니까 거기에 새기면 깊이 알게도 되기는 되는 데 또 어렵고  또 복잡해집니다. 길바닥에 손해를 말이요, 길바닥에, 단단한 길바닥 손해를 이  씨가 받지 아니하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다 그거요.

 길바닥 손해를 받지 않는 이 깨달음을 가져야 된다, 이 깨달음이 우리  깨달음이라면, 그러면 길바닥에, 이 말씀이 길바닥 때문에 결실 못하는, 그렇지  않은 길바닥이야 있지만 길바닥이 방해하지 못 하는 이 말씀대로 결실하는 이  깨달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니까,  이제 이 깨달음이 온 세상이 다 달려 들어도 이 깨달음대로 실행 하려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도록, 또 옥토는 그 씨가 흙을 다 빨아 먹는, 진액을 빨아먹는  것이니까 내가 깨달은 것은 깨달은 이 진리 가 나를 솔빡 다 삼키고 나는 이  진리에게 완전히 삼켜질 수 있는 깨달음, 내가 이 진리에게 삼켜질 수 있는  깨달음  또 온세상이 방해해도 거기에 방해를 받지 않는 깨달음 이 깨달음이 우리의  깨달음의 표준이니까 이 깨달음에 도달해서 이 깨달음이 되기를 우리가 힘써야  될 터인데, 이 깨달음도 아니고 그 근방에도 가지 않는 근방에도, 비숫하지도  않는 그런 깨달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외식자요. 우리가 다 진실이 없는  사람이요, 거룩도 없고 구별도 없는 사람이라 그거요.

 또 거기에 이 씨가 결실하려고 할 때에, 내가 받은 바의 천국 말씀이 내게서  구원의 결실을 맺는, 성과를 이루는, 이 천국 말씀이 내게서 구원의 결실을  맺는, 성과를 이루는, 이 천국 복음이 성공을 하는, 승리를 하는 이 승리 하려할  때에 못 하게 하는 것이 세때니까, 새떼에게 해를 받지 아니할 수 있는 이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다 이거요. 악한 자들에게 또 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다 이거요.

 그러면 악한 자는, 이 세상 전체가 자기 중심자인테, 자기 중심자들의 수많은  뭐 억억억억만이고 뭐고 여러 수천년이고 자기 중심 인간들이 뭐라고 말을 해  놨든지, 뭐라고 역사를 써 놨든지, 무슨 사상을 기록해 놨던지, 뭐 해 놨든지  간에 그것에게 해를 보지 아니하는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또 정처없이 뿌리없이,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본 지위에서 타락한 인간,  타락한 수많은 인간의 피해를 자기가 입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 이제  있어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 깨달음을 우리가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에 대해서는 오전에도 이 말씀과 말씀을 비교해서 구별하는  것, 말씀한 수많은 자들과 말씀하신 분을 이렇게 대조해서 구별하는 그것만  정확하게 정평 정가 한다면 이제 뭐 새떼도 그것 뭐 악한 자들도 상관없이 그런  걸 다 능가할 수 있고, 또 거기 들어간다면 벌써 인간에게 받혀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방해받는 그런 방해는 다  꿰뚫고 다 초월해 들어갔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나아가야 우리가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입니다.

 뭐 자꾸 하는 말 같아서. 어쨌든지, 그만 이것은 깨달을 수 있도록, 새떼를,  이길 수 있는 깨달음을,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깨달음을, 악한 자가, 내가  복음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이 복음 생활이 악한 자들에게 피해를 받지 않도록,  이 새떼들에게 피해를 받지 않도록, 수많이 내게 다녀간 모든,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했는데,  이 세상에 내 마음에 다녀간 이 세상에 수많은 그 온 세상이, 내가 알고 있는  세상, 내게 관련돼 가지고 있는 세상, 온 세상에게 해를 받지 안할 수 있는, 온  세상을 능히 이기고 남을 수 었느 이런 깨달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고, 모든  새떼에게 손해보지 않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고, 모든 악한 자에게 손해를  보이지 않는 이런 깨달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이니까  요걸 표준을 딱 삼아 놓고 이 깨달음을 가지려고 자기가 밤에 산에 가서도 또  묵상도 하고, 길가 가면서도, 묵상도 하고, 자꾸 이렇게 해서 새떼도 생각해  보고, 악한 자도 생각해 보고, 길바닥도 생각해 보고, 모든 것 다 생각해 가지고  그만 여기에 대해서 통달이 돼 버렸어.

 그만 자다 생각해도 새떼 그까짓 거야, 새떼 아 그까짓 거야 악한 자들,  이러니까, 불쌍하고 가련하니까 그게 참 자세히 진찰해서 심사해 보니까 백지  날아서 울렁 거리지, 그걸로 비유한 그 인간들은 불쌍하고 가련하니까 그걸  동정해서 구원하기 위해서나 노력하지 그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미혹받을 것도  없고, 두려워서 협박받을 것도 없고, 또 거기 꾀임받을 것도 없고, 또 그것을  어떻게 좋게 탐낼 그런 것도 없고, 가치없는,  우리의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의 깨달음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방해하는 그 모든 것은 내 깨달음을 가지고 환하게 다 알고 보니까  그까짓 것들에게 하나도 침노를 받지 아니할 수 있는 이런 능력있는 깨달음을  우리가 가지자 그말이오.

 이 깨달음을 단번에 되는 것 아니니까 그저 묵상하고 자꾸 생각하면 그게  도통이 되어지니까, 그게 도퉁이 되면 그만 '이 사람들은 뭐이다, 문화는  뭐이다' 이러니까 그게 뭐라고 쌓아도, 그만 뭐라고 쌓아도 너는 죽은 것이라.

너는 죽은 것이라. 절대자에게 끊어졌어, 너는 무책임한 것이라 정신없이  그러니까 거기에서 말하기를 마치 닭이 살았는데 닭의 모가지를 싹 끊어  버리니까 이게 지금 피를 내면서 막 출출 내면서 마구 이래 뛰어 가니까 그놈  용기있지, 막 있는 힘 다해 뛰지. 그것은 아무 것도, 죽을 힘을 다 가지고 벌로  뛰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이러니까 볼때에 저게 큰 소리 하고 마구잡이로, 막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떠들어 쌓는 그것이 모가지 끊긴 닭과 같이 아무 영원에 대한 비판과 평가도  없고, 심판도 모르고, 영원 대한 지식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계획이나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은 그저 생명 끊어진 자가 생명 끊어지니까 뛰고 굴리고 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이다.

 이러니까 그게 부러울 것도 없고 블쌍하고 가련하지 뭐 아무 그럴 것이 아무  가치로 여길 것이 하나도 없다 말이오. 그런 것이 우리에게 깨달음으로 생겨져야  된다 그거요.

 아직도 하나님 말씀과 세상에 많은 인간들의 말과 그 가치가 거의 아마  비슷비슷하다, 또 우리에게 성경 말씀하신, 이 말씀하신 그분과 이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들과 그 가치와 거리가 비슷비슷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거요.

 그러므로 길가밭 씨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이제 이만하면, 이만하면  알고싶은 사람은 자꾸 연구하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만하면 알려면 알 수  있어요. 그래도 가 가지고 마귀라는 놈이 그만 이렇게 깨닫지 못하도록 하면  복잡한 가운데서 깨닫지 못하고 그만 그냥 지나가 버리면 또 뒤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악령은 우리를 이렇게 깨닫지 못하도록 어떻게 하는데 우리 깨달음으로 가지고  세상을 바로 깨닫자 그말이오. 세상을 바로 깨닫고, 세상 문화를 바로 깨닫고,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말들과 지식들을 바로 깨달아서 그걸 바로 정평 정가해서  요것은 몇닢푼어치다, 요것은 가치가 얼마다, 하나님 말씀은 또 가치가 얼마다.

요것을 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대해서 정평정가한 바른 깨달음 이게 없으면 예수  못 믿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 정평 정가의 깨달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다 그말이오. 전부는 배암의 것을 다 좋다고 그걸 더  좋아하지, 거기에는 대가리 싸 잡아매고 힘을 써도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는 그래  힘쓰는 사람이 없어. 아마 거기에 어학 공부하는 것만치 힘을 쓰면 신구약 성경  말씀 다 외울 것이오. 그 애쓰지 않는다 그거요.

 이러니까 참으로 가보면 괴상하고 우스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세상에 어학 그렇츰 많은 단어를 외우는 사람이  신구약 성경을 외웠으면 신구약 성경 다 외웠을 것이오. 또 그 사람 재주 있는  사람들이, 재주 있는 사람들이 그 짓 하거든. 이런데, 다 외웠을 것인데 거기에  더해서는 뭐 몇해를 머리를 싸잡아 매고 해도 할 가치가 있는 걸로 알지만  신구약 성경을 말씀을 읽거나 외우기 위허 그래 하는 것은 가치없는 미친 짓이라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오. 이러기에 무엇이 믿는 사람이오?

 이러니까, 이 말을 자꾸 하나 알아 듣는 사람이 지금도 많이 없다 그거요.

길가에 뿌린 씨 이 씨가 결실을 백배, 육십배, 삼십배를 맺으려고 하면 길바닥의  해를 받지 않아야 되고, 악한 자의 해를 받지 않아야 되고, 새떼의 해를 받지  않아야 되니까, 이거 해를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게 싸워 가지고 해를 받지  않습니까? 뭘로 가지고 해를 받지 않습니까? 깨달음 가지고 해를 받지 않는다  그말이오, 깨달음 가지고. 깨달음 가지고 해를 받지 않으니까 그 깨달음이  그것은 뭐 이라? 지금이라. 세상을 바로,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 그말이오.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 인간을 바로 알아야 된다. 또 하나님께서 떨어져  타락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재연결 가지지 아니한 그  사람들이 어떤 것이냐? 바로 알아야 된다 말이오.

 새떼라고 말해 놨는데 사람이라 말해 놨으면 굉장할 것입니다. 이렇지만  새떼라고 말해서 비유해 놨는데 그게 새떼라 그말이오. 인간이 하나님의  지어놓은 본 지위에서 타락해 가지고 하나님과 떨어져 가지고 예수님으로도  재연결 가지지 못한 그것은 다 새떼라. 재연결 가지지 않고 제가 왕이 돼 가지고  제 중심으로 날뛰면 그것은 다 악한 자들이라.

 우리가 세상을 바로 아는, 그저 뭐인지도 모르고 세상을 알려고만 하고 자꾸 파  들어가니까, 세상에 파고 들어가니까, 세상에 파고 들어가서 이 구석에  들어가니까 몇십년씩이나 세월 지내고, 또 저 구석에 들어가니까 몇십 년 세월  지내고, 또 저 구석에 들어 가니까 몇십 년 세월 지내고 고만 늙어서 죽는다 그  말이오.

 그 안에 파묻혀 자꾸 이래 들어 가니까, 이 세상에 들어가니 대단히 제 딴애는  여기다가 만나고 싶고, 뭐이든지 제 짠에는 많이 본 것 같지마는 '야이 등신아,  통털어서 그것은 사망 아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끊어져 있고, 그것은 악령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면 다  돼 버렸어. 그게 뭐 아주 어리석은 소리 같지마는 그게 영원히 가도 틀림없는  소리라 그말이오. 이 모든 것을 바로 알아야 돼요.

 제가 왜정 말년에 어떤 의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아주 좀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와서 말하기를, 내가 슬그머니 물었소. 그때 이차대전 때인데,  '이번에 이 전쟁이 어찌 되겠느냐?' 이러니까 '틀림없이 이깁니다.' '뭘 보고  하느냐?' 이러니까 뭐 말해. '가보면 어디 그만 군대가 어떻고 뭐 무기가 어떻고  굉장합니다.'  제딴에는 일본에 아마, 일본의 친일파니까 돌아다니며 그래도 그 때의 의사라  하면 좀 귀한 사람들인데 이래 속을, 내부의 일본 그 국내에 다 준비돼 가지고  있는 그것을 다 봤다 말이오. 보니까 ,'아이구, 여기도 아이구. 아이구 아이구'  이러니까 틀림없이 세계는 일본이 점령한다 이렇게 봤는데,  나는 그 속을 그걸 보지 않고 밖에서, 그것도 껍데기에서 이래 멀리 보고 또  미국도 껍데기에서 멀리 보고 이럴 때에 나는 보니까 미국이 그것하고 싸워서  그게 패전하고 미국이 이긴다는 것은 백프로 인정이 되는데 그 사람 또 그렇게  말해요.

 내가 있다가 웃으면서 '자기가 우물 안의 개구리라. 그것만 봤지 그외에 딴것  보지 못해 그렇다. 지금 조만간에 일본이 손 든다' 이렇게 말했었는데,  그것 모양으로 세상에게 들어가니까, 세상에 들어가서 이 철학에 들어가니까,  철학에 들어가니까 뭐 몇십 년 들어가도 '아이구 철학이다.' 막막해서 '여기에  뭐 있다.' 또 자기는 과학에 들어가니까 그 소망은 여기 있다 이러지마는 그것을  속에 들어가면 그만 파 묻혀 가지고 모릅니다.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세상이 뭐인고?' 다고 이 세상을 똑 그 계란 한 개  모양으로 도굴 도굴 구불려서 요래도 뒤비고 저리도 다 뒤벼보면 '아, 그것이  속하기는 어디 속했으며, 장래는 어찌 되겠으며, 가치는 얼마나 있는 것이며,  권력은 얼마나 있는 것이다.' 다 이래 보면 절대자에게서 떨어져 있으니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거요.

 그러기에, 이 말씀은 세상을 많이 배워 가지고 세상을 구경 많이 한 사람은  세상을 그게 그게 자꾸 그러면서 '아이구, 아이구!' 깜짝 깜짝 놀라게 되는 그  사람은 그만 거기에 놀래고 다 거기에 벌써 다 충격을 받아 가지고 강하게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아야 감동이나 충격에 받아지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게 내나 길가 뿌린 씨라.

 또 돌밭에 뿌린 씨라, 돌밭에 뿌린 씨. 보니까 돌 때문에 이 말씀이 천국  말씀이, 씨가 결실을 못 합니다. 돌 때문에 결실 못 한다고 있지 않소? 돌  때문에 결실을 못 하는데, 또 해석에는 '핍박과 환난이 있으니까 그만 이 말씀을  저버린다' 핍박 환난 때문에 .이제 이 말씀이 결실을 못 한다, 돌 때문에 못  했는데 그 돌이 뭐이냐? 핍박 받으니까 '이 말씀 저버려 버려서 결실 못 한다'  이러니까 핍박은 누가 받았소? 그러니까 그게 버려서 결실 못 했는데, 돌 때문에  결실 못했으니까 돌을 뭘로 해석을 해야 되겠습니까? 자기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에 틀림없이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런 것도 다 성경대로 해석해서, 여기 돌은 곧 자기라 하는 걸  확정을 짓고 그 다음부터 해결해 나가야 된다 그거요. 이것도 해결 못 하고 이래  해석도 하고 저래 해석도 하면 그 다음이 다 풀려 나가지도 아니하고 헛일하고  맙니다.

 그러면 이제 이 돌이라는 것은 자기라, 그러면 자기에게 핍박과 환난이 오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도를 자기 때문에 저버린다 그것 아닙니까? 자기 때문에  저버리니까 이것을 우리가 연구해 깨달아 가지고, 자기 때문에. 이 말씀이  결실을 못 하는데, 이 말씀이 결실을 하려고 하면 뭘 해야 됩니까? 어째야  됩니까?  돌만 파 들어내 버리면 되지 않소? 단순하지 않습니까? 돌만 파 들어내 버리면  되어지니까 돌만 파자. 돌만 파 들어내면 누구를 파 들어 낸다 말이오? 자기를  파 들어내 버리니까 자기 파 들어내면 어찌 됩니까? 자기가 없으면, 자기 없는데  하나님의 복음이 무슨 상관 있습니까?  이러니까, 여기 대해서 우리가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다 그거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살려고 할 때에 핍박과 환난을 만날 때에 그  핍박과 환난이 자기에게 고통이 되어지고 자기에게 괴로움이 되어지는, 그  핍박과 환난의 약발을 받는, 핍박과 환난의 피해를 받는 그자가 어떤 자인가?  이제는 그 자기를 무조건 들어내 버리면 자살해야 될 것 아니오? 돌을 들어내야  되니까, 자기가 없으면 결실한다 하니까 자기 없애려면 자살하든지 없애야 될 것  아니겠소? 이러니까 어떻게 자기가 없으면 무슨 또 구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러니까 이거 자기 연구를 또 잘 해야 되겠다 그말이오. 자기 연구. 자기  연구를 잘 해 가지고, 분명히 이 비유에 보니까 돌만 파서 집어내 던져 버리면  결실함이 있겠는데, 이제 이 돌, 틀림없는 자기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니  자기를, 자기를 파 들어내 버린 그 밭이면 옥토가 돼 가지고 잘 결실이 된다  그거요. 자기를 파 들어내는, 자기를 파 들어낸 자기라면 이제 거기에서는  결실이 있을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파 들어낼 자기가 어떤 자기이냐? 그것이 우리에게, 자기는 옛사람  자기도 있고 새사람 자기도 있고 둘이 있습니다. 옛사람 자기도 있고 새사람  자기도 있는데, 우리의 영은, 우리 영은 참 주격으로 되어 있는 주격이고, 지금  말하는 것은 육체를 구원하는, 심신을 구원하는 심신 문제를 두고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 심신은 이것은 내가 둘입니다. 심신에는 내가 둘이오.

 심신에 내가 둘인데 그 둘을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는 옛사람 자기라 하나는  새사람 자기라 그렇게 성경에 구분해서 말씀을 했는데, 옛사람 자기는 그것이  어떤 자기인고 하니, 그 자기라는 그것이 악령, 또 세상, 죄, 또 사망 이  네가지로 뭉쳐 있는 것이 옛사람 자기입니다.

 이러니까 악령아 하나 들었고, 악성이 들었고, 악습이 들었고, 이제 그것이 다  합해서 죄요. 그것들이 머물고 사는 곳이 곧 세상이라. 그러면 세상에서만 있지  세상을 떠나 버리면 죽습니다. 이러니까 옛사람 자기는 세상과 악령과 사망과 죄  이 네 가지로 되어 있는 자기인데, 이 자기는 참 자기가 아니고 참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라 그거요. 참 자기는 이것은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는,  그게 육체의 자기인데,  이 자기는, 이것은 하나의 도구가, 이것이 쓰면 이 도구가 되고 저것이 쓰면 저  도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심신이라는 이것은 참 죄 없고 깨끗하고 좋은  것인데, 이것을 이 악령이 와 가지고 이 심신의 주인 영은 죽여 버리고 이 심신  이것을 제가 차지 했다 말이오.

 심신 이것을 악령이 차지했고, 세상이 차지했고, 또 죄가 차지했고, 사망이  차지해 가지고 이와 같이 있으니까 이 심신이라는 이것은 자기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영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제 이것이 와 가지고 영을 죽여 버리고, 영을  누가 죽였소? 악령이 죽였습니다. 악령이 죄로 가지고 죽였소. 그것이 세상을  보이는 그것입니다.

 그랬는데, 참 자기인 영을 죽여 버리고 이 네 가지로 되어 있는, 자기를 죽인,  영을 죽였고, 영을 죽이고 난 다음에는 이제 이 심신에게 썩 나타나 가지고 영이  주격하던 것과 같이, 이것이 그 심신의 주격이 돼 가지고 나타나서 말하니까 이  심신이라는 것은 어리석어 가지고, 실은 참 자기를 죽인 원수가 죽여 놓고 '내가  너희 주인이다' 하는 격으로 이와 같이 나타나니까 이 심신은 어리석어서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그것을 애끼고 그것에게 복종해야 살 줄 알고 그것으로 하나돼야  살 줄로 이렇게 아는 이런 어두움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거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은 살아났지마는, 영은 살아났지마는 영과 이 육이  너무 오래동안 나뉘어 있었고, 영은 완전히 죽어서 기능적으로는 없는 것과 같이  아무 완전히 입어서 기능적으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능적인 기능 작용은  하나도 없었어. 기능 작용이 없었으니까 육이 볼 때에는 눈에 보여지지도  않아요. 육이 볼 때에는 영이 보이지도 않지, 기능 작용도 아무 것도 없지  하니까 영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됐소.

 잊어 버리고 이제 중생됐으니까 자기 주인이 살아났지마는 이 심신은 참 자기의  주인인, 주격인 영이 살아났으니까, 참 심신 저의 책임자요 저의 주인이요, 저의  근본인 이 영이 살아났지마는 영은 만나니까 서먹서먹하게 닷이 설고 아주 정  떨어지고,  이제 그 영을 죽인 자기 아닌, 악령과 세상과 사망과 죄 이것이 와 가지고 내라  하니까 이 심신은 거기에 붙어 가지고 그것이 자기 인 줄로 알고 지금 한  덩어리가 돼 되어 가지고, 참 자기를 죽인 놈이고 지금 마음도 죽이려고, 또 이  몸뚱이도 죽이려고 완전히 사망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것인 줄 모르고  속아 가지고 그저 그 놈에게 술술 따라서 순종하고, 그놈에게 해가 되면 제 해인  줄 안다 말이오. 사망이 사망이 해되면 제 해 되는 줄 알고, 악령이 해가 되면  제 해 되는 줄 알고, 제가 해가 되면 제가 해 되는 줄 알고,  이렇게 어리석게 이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은 우리 심신이 어리석어서 자기  아닌 옛사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자기, 거짓 자기 이것을 성경에  겉사람이라 이렇게도 말했는데, 겉사람 자기 이것에게 심신이 속아 가지고 그게  제인 줄 알고 한통돼 그래 죄 이놈이 '나 죽는다' 하면 심신 이것도 '내가  죽다니!' 이러고, 악령이 '나 죽는다' 하면 '내가 죽다니!' 이러고, 사망이 '나  죽는다' '내가 죽다니!' 이러고, 세상이 죽으면 '내가 죽다니!' 이러고, 이래  가지고 요렇츰 왕창 속아 지금 이것이 하나가 되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을 들은 것은, 복음을 들은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하면  그 목적은 이 심신이 자기 아닌 자기에게 미혹 받아 그것에게 속해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이렇게 있는 이것을 거기에서 건져 가지고 껍데기 그놈,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을  벗겨내 버려 버리고, 그놈은 벗겨 쫓아내 없애 버리고 이제 그 심신을 이것을  건져 가지고 이 심신이 중생된 영에게 속해서, 중생된 영에게 속하면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요 진리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것이  영이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에게 속하는 것인고로 진리와 영감에 속한, 곧 영에  속한, 영에 속한 곧 진리와 영감에게 속한 심신을 만들려고 이 복음이 왔다  그거요.

 이 복음이 왔는데, 이 복음이 오니까 못 오도록 지금 길바닥에서 방해를 하고  막지 않았습니까? 이러다가 이 말씀을 들어 깨달아 가지고 이 복음대로 살려고  한다 말이오. 이 복음대로 살려고 하니까, 이 복음대로 살면 마귀가 거기에서  자꾸 평안해집니까, 마귀가 불리 해집니까? 마귀가 불리해집니다. 또 그렇게  살면 죄가 불리해집니까, 유리해집니까? 불리해집니다. 또 사망이라는 사망이  불리해집니까 유리해집니까? 또 불리해진다 그말입니다. 또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불리해지느냐, 유리해지느냐? 세상이 불리해져서 깨져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이제 성경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라 이제 이 세상이  몇이 있다 했지요? 세상이 몇이 있어요? 또 잊어 버렸네. 세상이 몇이 있어요?  세상이 둘, 세상이 둘. 또 임금은 몇이 있어요? 임금은 몇이오? 둘.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뭇박히기 전에는 온 세상은 마귀 그놈이 임금 노릇  하고 제 세상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시비를 해 가지고 마귀한테 이겨  버렸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마귀는, 예수님이 대신  싸워서 마귀를 이겨 대신하기를 누구를 대신하느냐 하면 택한 자들만 대신했다  그말이오. 택한 자들만 대신해서 이제, 택한 자들도 대신해 택한 자들도  마귀에게서 뺏들어 버렸고, 또 택한 자들에게 해당된 그 세상도 뺏들어 버렸기  때문에 택한 자들의 세상은 예수님이 왕이요 또 불택자의 세상은 마귀가 왕이라  그거요.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는 세상 임금이 왔지마는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을 이기시고 난 다음에는 택한 자의 세상은 속에 알맹이로 이 세상이  막바로 영생하는 그 세상과 연결돼 가지고 천국과 연결돼 있는 것이고, 또 이  껍데기 세상은 악령의 세상이 되어 있는데 악령의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악령의 세상은 녹아지고 죽어지고 없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이 세상이 나타나고, 이 세상이 나타나고, 그 세상은 껍데기라 다 무너져  버리고 다 절단이 나 버린다 그말이오.

 믿는 사람이 복음을 들어 가지고 이 복음의 말씀대로 이떻게 살면 믿지 아니할  때의 세상, 죄안에 있는 세상, 또 마귀의 지배받는 세상, 이 사망하는 세상,  멸하는 세상 이 세상이 하나님의 복음대로 사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점령한 그  세상이 자꾸 나옵니다. 그 세상이, 파묻혀 있던 그 세상이 나와서 그 세상에  살게 되고 껍데기 세상은 자꾸 벗게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도 어떤 사람은 멸망할 세상에 살고 어떤  사람은 이제 영원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말이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가지고  밭을 산 것과 같다 한 그 밭 그것이 세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자가 가진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입니다.

 이러니까, 같이 있지마는 이제 생명에 속한 세상에서 살고 또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이러니까 그 세상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진리가  지배하고 사망이 없는 세상이니까 이 껍데기 사망하는 세상은 다 옛사람에게  속한 세상이요, 또 하나님을 거슬리는 세상은 심판받을 세상 그것이오.

 벌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심판 받아 가지고 자꾸 시비해서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에게 통치받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나님에재 속해서  하나님과 연결된 이 세상은 이것은 새세상이라 그말이오. 새 하늘이요 새땅이라.

 내가 이 땅에 있지마는 새하늘과 새땅이라. 이것은 이 껍데기 벗겨버리면  없어지고 껍데기 벗겨버리면 순전히 새하늘과 새땅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우리들이 실은 대속을 입었지마는 이 대속을 실상으로 우리가  입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 가지고 이 대속을 입으려고 해서 이  말씀대로 사니까 차차 차차 이 대속을 입게 되니까 이 사탄이 왕노릇하는 세상은  내게서 자꾸 제거가 되어지고 하나님이 왕노릇하는 이 세상만 되어지고 사망은  내게서 자꾸 벗겨져 나가고 생명으로만 자꾸 충만해지고,  이러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이래 할 때에 핍박이 오고 이렇게 환난이 옵니다.

핍박이 오고 환난이 올 때에 그 핍박은 왜 오느냐? 핍박은 누가 주느냐? 핍박을  주는 것이 악령과 세상과 사망과 죄 이 네 가지가 핍박을 줍니다. 핍박을 주고  또 환난도 이 네 가지에게 마찰이 돼 가지고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와 같이 계속해서 살게 되면 이 핍박을 세상이  그렇게 주는데, 그러면 세상이 핍박하는 그 핍박을 받을 때에 그 핍박을 받는  것은 누가 받는고 하니, 핍박을 받는 것은 누가 받는고 하니 옛사람 자기 그  사람이 받습니다. 자기의 세상이 받고 있고, 자기의 악령이 받고 있고, 죄가  받고 있고 이래 받는데,  그러면 그 받으면 속에 알맹이, 알맹이, 심신이라는 알맹이가 핍박을 받고  있느냐, 껍데기 그것이 받고 있느냐? 껍데기 그게 받고 있는데, 껍데기가 받고  있는 이 알맹이가 껍데기하고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장 같이 뭉쳐 돌아다니면서  야단을 치기 때문에 떼놓을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다가 하나님 말씀을 자꾸 계속해서 지키면 그 핍박을 인해서 껍데기는 차차  이것이 죽어지고 멸해지고 절단해지고, 속에 있는 새 사람 자기, 천국으로 되어  있는 그 자기는 자꾸 튼튼해지고 바로 되어 진다 그거요.

 또 영생으로 되어 있는 그것은 자꾸 튼튼해지고 바로 되어지고, 또 이 의로  되어 있는 튼튼하고 바로 되어지고, 이러니까 이 세상이, 저희 것이, 이제 저희  것이 빼앗겨지니까, 빼앗겨진다고 못 빼앗겨지도록 위협한다는 것이 이 껍데기  세상을 두고 위협을 하니까 속에 알맹이 심신 이것이 같이 따라 가지고 저  위협인 줄 알고, 저 놀래는 줄 알고 저 손해인 줄 알고 이렇게 날뛰나 도로 이  둘을 껍데기가 완전히 딱 갈라져 버리면 그놈은, 껍데기 죽음은 죽음으로 들어  가 버리고, 원수는 꺼버리고, 원수에게 사로잡혀서 그것이 주인공인 줄 알았던  그것이 그런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에서 참 중쟁된 영이 자기 주격이요 자기는 참  주인을 찾아서 하나가 되어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자기는 튼튼해지고 저것은  이렇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핍박을 받아서, 그러면 핍박을 받아서, 그러면 처음에는 이  심신하고 심신의 주인공이 아닌 그것하고 찰떡같이 들어 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그걸 이렇게 치면 심신 이것이, 그놈은 그것이나 칠 줄 알지  옛사람 이놈은 치지 못해요. 그걸 치면 속에 있는 심신 이게 울려 가지고  아프다고 야단을 지기고 이러나 되게 때려서 쭉 갈라 그것만 없어져 버려면,  이것만 따로 떨어지면 딴 게 된다 말이오.

 그래서 우리 심신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세상을 탈피를 하고 또 죄를 탈피하고,  악령을 탈피하고, 사망을 탈피하는 이 심신으로 되어져야 이것이 성공이  되어지는 것인데, 이 작용을 하기 위해 가지고 공작을 하니까 저희가 안 뺏기기  위해서 야단을 지기는데, 야단을 지겨서 해를 지워도 이제 없어질 것, 옛사람의  것, 나와는 상관 없는 그것이 떨어질수록 좋고, 그게 떨어질수록 좋고,  없어질수록 좋고 제거될수록 좋아질 좋은 것 그게 떨어지지 참 내가 상하는 것은  아니라 그거요.

 이러니까 자기에게 대해서 확실히 바로 아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고, 이래  가지고 이제 새로 된 새사람으로 된, 영에게 속하고 진리에게 속한 이것이  영에게 속한 데로, 진리에게 속한 데로 이대로 살려고 하니까 살려고 하니까  저것들은 자꾸 합해서, 세상하고 사망하고 죄하고 이 악령하고는 너희가 한  뭉덩이가 되어 가지고서 지금 자꾸 지옥을 향해서 내려가는데, 지옥을 향해서  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그것을 이제 그것을 이별하고 거기에서 하늘  천국을 향해서 올라가니까 자연히 내려가고 올라가니까 거기에 마찰이 돼 가지고  충돌이 된다 말이오. 그것이 이제 환난입니다.

 그 환란은 없을 수 없고, 환난이 있으나 자꾸 말씀대로 계속을 하면 하늘나라로  나는 향해가고, 이러니까 세상과 죄악과 사망 그것을 이제 처음에는 여기에서  마찰되다가 그 다음에 위에서 차차 차차 다 해서 이제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다해서 마찰되는 그 역류를 거슬려, 역류를 이래 해 나가다가 마지막에 그런 것  다 지내보내 버리고 완전히 하늘나라에 들어가 버리면 완성이 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핍박은 저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지금 껍데기 야단친다  말이오. 참 요거 좀, 마귀는, 마귀는 하늘나라는 해하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는  손을 못 대요. 손을 못 대고, 마귀는 세상만 제것이기 때문에 지금 손을 댈 수  있습니다.

 이런데 우리를, 참 우리의 심신을 참 손해 보이면, 우리의 천국을 손해보이면  우리 손해지마는 이 세상을 손해 보이는 것은 우리 손해가 아닌데 이 옛사람에게  속한 이것들이 이 세상을, 자꾸 세상을 지금 깨트리고 세상을 흔들고 세상을  이거 좀 상처를 주고 깨고 이 좀 세상을 좀 박살을 내니까, 세상 박살내니,  그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지킴으로 말미암아 내 세상,  그러면 내가 내 세상이라면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세상, 마귀에게 속해서 사는  세상, 또 죄로 속해서 사는 세상, 사망을 향해서 사망을 이루어가는 세상 그  세상은 깨어지는 것이 좋으나 그 세상은 보존되는 것이 좋으나? 어서 그 세상은  벗어내 버리는 게 좋다 그 말이오. 그게 모이면, 여기에 돈이니 물질이니 하는  그게 세상이 아니고, 그 세상도 악령과 죄와 사망 이런 것들이 세상을 점령해  가지고 있고 우리 심신도 점령해 가지고 있어요.

 이러니까, 이 악령과 죄와 사망과 이 세상이 합해 가지고 점령해 가지고 있는,  그 점령하고 있는 그것이 다 인격 존재들이 다 점령하고 이치에 그 권위들이 다  점령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살펴서 빼앗겨 버리면 이재 이세상을 천국이  점령하고, 성령이 점령하고, 의가 점령하고, 영원한 생명이 점령하는 이 세상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성취하려고 복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서 살면 이것이 이제 거기에서 해방을 받아서 될 것인 것이니까 저희들이  손해가지 않기 위해서 핍박을 하는 것이고,  또 구별된 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고 하니까 마찰이 되어서 환난이 있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그때에 자기에게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는 그 이유가 뭐이냐? 그 이유가 뭐이냐? 그러면 그것을, 핍박과  환난을 일으키는 그 존재들이 어떤 것이냐? 그 목적이 무엇이냐? 그러면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리 나가면 어찌 되며 그리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면 어찌 되느냐?  그리 나가면 내게는 사망이 튼튼하고, 이제 죄가 튼튼하고, 악령과의 관계가  튼튼하고, 이 껍데기 세상과 나와 튼튼해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서 나가면  차차 차차 이 속에 파묻혀 있는 내 심신이 거기에서 탈피가 되어서, 죄에 드려서  불의의 병기가 된 것이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병기가 되어짐으로 자꾸 거기에서  벗어져 나오니까 악령과는 관계가 멀어져서 이제 천국이 이루어지고, 또 영생이  이루어지고,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자꾸 이루어지는 그 결과를 맺게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핍박 있는 것은 필연한 것이고 환난 있는 것도 필연한  것이니, 환난 있는 것은 그것은 필연적으로 있는 것이고 핍박 있는 그것은 어느  정도 있다가 그것이 나중에 갈라지면 그 핍박은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거기에서 수술하는 수술하는 역사요.

 이것이 이제 보자기 같은 것을 쓰고 있다가 그 보자기를 벗는 역사요, 자기가  자기로서 완전히 탈피하고 나타나는 그 역사를 일으키는 그 역사이기 때문에  놀랄 것이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면그 결과가 완전히 분리가  된다 이거요. 참 좀 알기 어렵지마는 자꾸 이래 놓으면 여러분들 속에 성령이  역사해서 마지막에는 알 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받고 환난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는 그것이 자기인데, 자기,  껍데기 자기고 속 자기가 아니라 그 말이오. 속 자기가 껍데기 자기하고 너무  연결이 딱 들어 붙어가지고 이것을 수술을 해 가지고 둘로 딱 분리 시키기가  어렵다 그 말이오. 껍데기 자기에게 오는데 알맹이 자기와 함께 동하고 정하니까  이게 문제라.

 그러니까 이 껍데기 자기를 벗겨내야 이걸 사망이 벗겨지고, 이 모든 멸망할,  심판받을 세상이 벗겨지고, 마귀가 벗겨지고, 죄가 벗겨지고 이래 벗겨지는데,  이것 벗기려고 지금 이렇게 하니까 저쪽에서, 껍데기 이 껍데기를 치니까 속에  알맹이가 울려 가지고 아프게 되니까 속에 알맹이가 저 때리는 줄 알고 야단  지긴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제 구속받은 자의 심신이라는 것은 아무도 멸할 자가 없고 하나님  말씀대로 향하여 거기에 속해 있으면은 아무도 멸할 자가 없고 영생이 되고,  하나님 말씀을 저버릴 때 그때 사망이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마치 뭐 비유가 잘 안 돼요. 손 여기에는 손 바닥이고 여기는 손등이  되겠는데 이게 옛사람 자기, 자기 아닌 자기와 자기의 심신과 둘이 들어 붙어  있기를 얼마나 민첩하게 들어 붙어 있었든지 이제 이 심신을 갈라내려고  하나님이 하시면 이 마귀라는 놈이 술책 있기 때문에 옛사람 자기 껍데기를  두드리면 알맹이 제가 아프다고 알맹이가 저 때리는 줄 알고 야단을 지겨 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배척하고 말씀을 배척한다 그말이오.

 그때에 요것을 깨닫고 이 껍데기를 때릴 때에 제게 아픈 그 충격이 오는 것은  그것은 거기에서 분리 시키기 위해서 그래 하는 것이니까 그럴 때에, 자기는  그럴수록 하나님 말씀을 거머쥐고 단단히 달라붙으면 저기 나중에 때리다가 안  되면 때리지 않고, 여기 달라 붙어 가지고 안 떨어지려고만 애를 써요. 그러든지  어짜든지 하나님 말씀을 놓지만 않으면 마지막에 그것은 떨어져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신 이것도 자기인데, 우리 심신이 자기이고 자기의  주인은 영이고 이 심신이 자기인데, 심신으로 된 이 자기, 이 자기하고 또 자기  아닌 세상, 악령, 또 죄, 사망, 이 악성, 악습은 그 안에 든 것인데, 이것하고  내 심신하고 둘이 딱 들어 붙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악령은 우리의 그  속량받은 심신은 해하지 못해요. 속량받은 심신은 속량받은 심신이 속량을 벗지  않고 있으면 속량받은 심신을 때리면 상급되고 죽이면 더 영광되고 해하지를  못합니다.

 해하지를 못하는 것인데, 이 껍데기 이것을 때리면 제것인 줄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핍박이 오면 그 핍박은 내가 내 손해가는 핍박이 아니고 내 아닌 내게 보자기  같이 쓰여 가지고 있는 내 원수 그것이 깨어지고 떨어져가고 그게 없어지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이 말씀을 버리지 않고 계속만 하면 이제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좀 여러분들이 그래도 자꾸 듣고 이래 하면 나중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  뒤에나 모두 교역자들은 그걸 들어서 자기가 자꾸 연구를 해서, 이 돌밭에 뿌린  씨가 핍박과 환난이 오니까 말씀을 버렸다. 핍박과 환난이 오니까 말씀을  버리는데, 말씀을 버리는 데에는 이 껍데기 자기가 말씀을 버리고, 껍데기  자기가 말씀을 버려야 제가 좋지, 알맹이 자기는 우리의 심신이라.

 이것은 이 말씀을 버리면 손해가는데 백지 따라서 껍데기 이게 지금, 이것을,  네가 말씀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매를 때리련다. 말씀 버리지 않으면 감옥에  가둔다 이러니까 이것은 공연히 알맹이 자기가 따라 가지고 자기에게 손해올 줄  알고 저놈이 하니 같이 따라다니니까 이걸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 말이오.

껍데기 자기가 한테 돌아다니니까 이걸 갈라트릴 수가 없어. 갈라트려야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만 지키면 갈라집니다. 갈라지면 우리의 심신, 우리의 마음과  몸이라는 것은 이것은 죄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해석하기를 마음과 몸이라는 이것이 죄가 있는 줄 알지마는 마음과  몸은 죄가 없는 것이라. 마음과 몸 이것은 주격이 아니고 피소유격이기 때문에  이것을 오늘까지 마귀가 가지고 있으면 이게 죄악의 것이 되는데, 이제 거기에서  당장 하나님의 성신에게 가서 성신이 붙들면 이 의의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러니까 지금 요는 이 심신 구원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이 판 에 있어서  심신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이 복음의 말씀을 줘 가지고 구원해서 이  껍데기밖에는 이상 안돼. 자기에게 자기를 죽이는 꺼풀 이놈을 벗겨서 자유하게  하고 살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꺼풀 벗기려고 하니까 이 마귀라는 놈은 한수  넘어 가지고 꺼풀 벗기려고 하니까 '네가 이 복음 안 내 버리면 내가 때린다'  꺼풀을 두드리니까 속에 알맹이가 울려지니까 알맹이 그게 저인 줄 알고 지금  달아나. 저 인줄 알고. 그것은 제게 오는 매가 아니오. 그 매는 와야 좋소. 매가  오면 껍데기 그놈만 깨지고 그놈만 죽어지고 그놈만 없어지고 절단나지 자기는  생생한 새로운 것으로 나오게 된다 그거요.

 자 그러면 그만 또 오후에는 그만하고, 또 배운 데까지 배우고 그래 가지고  지금 교역자들이 마 집에 가서 교회 가서 잘 가르칠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세상으로 말미암아 우둔해졌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소원하는 것이 다 세상적인, 사망적인, 마귀적인 이것이  와서 우리의 본성이 됐고 본능이 돼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출한다는 것이 심히 힘들어서 착각되어 구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나 아닌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내가 당하는 것인 줄 알아 구별할 바를 구별하지  못하는 여기에서 많은 지장있는 것을 오늘도 주님이 말씀으로 이렇게 갈라  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구속받은 자는 주님과 말씀과 결합하는 데에서만 살고,  결합하는 데서만 성공하고, 결합하는 데서만 평안하고 결합하는 데서만 좋지,  주의 말씀을 떠나면 다 옛사람 사망 그리로 돌아가고 마는 이 사실을 굳게 잡게  하사, 셩령으로 감동시켜 깨달아 어디까지 이르든지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는 여기서만 산다는 이것을 굳게 잡고 무슨 일이 있어 깨닫지 못할지라도  말씀을 떠나지 않고 영감을 떠나지 않고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또 이번에 이 집회에 깨닫게 해 주시고 또 은혜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지금  헌금하겠사오니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님이, 이 연보에 또  주님의 뜻이 있사오니 이 주님의 뜻을 찾아서 명중하는 이것을 여기에서 한번  실험해서 주의 뜻에 명중되는 그 연보를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사 이것도  여기에서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어려서 주님의 무한하신 생명의 말씀을 들으나 잘  구별하지 못하는 너무도 어린 저희들입니다. 성신의 감화 감동이 아니면 어떻게  무한하신 전능의 주의 말씀을 저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들에게  성령으로 감동시켜 이 모든 자기를 이길 만한, 자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대로 능히 살 수 있는, 이 자기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바로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사, 세상을 주님이 아신 그대로 바로 알고,  우리에게는 뭐 이중 삼중 이렇게 꺼풀되어 있는 이 자기를 주님이 아신 대로  바로 알아 이 악령이 우리의 깨닫지 못하는 것올 이용해서 유혹하는 이 모든  유혹을 벗고 어디서나 우리를 구속시키는 주의 말씀대로 그대로만 복종해 나갈  수 있는 이런 넉넉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이제 또 주께서 저들을 사랑하사 이렇게 은혜를 감사하는 표로 또 앞으로  은혜를 기다리는 소망에서 헌금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 헌금한 주의 종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 주셔서 주님의 복음 운동을 위해서 힘쓰는 일이 끝까지 더  충성되게 하시고 쇠잔하지 아니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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