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

 

1987. 4. 25. 새벽(토)

 

본문:마태복음 13장 3절∼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아무 일이든지 물질에 대한 것이라면 그 물리를 바로 알고 노력을 해야 그 노력이 효과를 내지 물리를 바로 모르고 노력하는 그 노력은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하는 일에는 사람이 하는 그 인적 요소가 거게 필요하고 또 그보다도 하나님이 하시는 그 신적 요소의 역사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혼자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우주를 만드신 주님께서 그것 뭐 사람의 꼭 힘을 빌어서 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우리 구원 위해서 하시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서도 잊어버리고 망령되이 행할 때 많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하게 조성하는 데에 할수를 따진다면 전부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인간이 하는 것은 약간의 것만 섞여 가지고 있는 것이 모든 일입니다. 약간의 것 그것도 하나님이 미리 힘을 주셔 가지고 할 수 있도록 하셔 가지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창조 보존 섭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되게만 할라고 역사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물리 물질에 대한 것은 그 이치에 맞게 우리가 노력할 때에 하나님은 거게 은혜를 베푸시고 성사하게 하 시고 우리가 할 일을 하지 안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안 해 주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물리에 대한 일도 일이 되는 것을 보면은 어떤 사람은 또 어떤 때는 하나만 가해도 일이 잘 되고 어떤 때는 둘을 사람이 해도 안 되는 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가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점점 이루어 성장시켜 감에 따라서 하나님이 적당하게 조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물리에 대한 일을 하는 것도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그 은혜 역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하는 그 인적 요소의 노력이 둘째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와같이 둘이 합해 가지고 이루어질 때에 그 이루어지는 그 결과가 수학적이 아닙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게 해도 잘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능하게 해도 안 되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양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거두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거두신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어떤 사람은 준 자본이 적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적게 해도 인정을 하시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해 주시고 어떤 사람은 또 그만한 양을 해 가지고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성공은 충성에 있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하신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사람의 의는 충성이지 그 실지의 그 가치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꼭 같은 양의 일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꼭 같은 양의 일을 했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의로 인정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먼저 주신 자본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무엇이든지 이치를 알고 해야 그 이치가 성공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을 못 합니다. 그래서 세상 일은, 세상 지식은 완전히 거짓말이요 또 반거짓말이라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 구원에 대해서 인간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다 그것은 아주 거짓말이요 물리에 대한 것은 반거짓말이라.

왜? 물리에 대한 물리 자체는 옳은 지식이지마는 그것의 주격적으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의 조화성에 대해서 잘못됐기 때문에 그것은 반거짓말이라 그렇게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사람에게 대한 지식은 그 지식이 완전히 삐뚤어져 있습니다. 사람에게 대한 지식은 뭐 수많은 종교들이 말하는 인생관이 있고 또 철학가들 뭐 사상가들 정치가들이나 이런 단체 저런 단체 어떤 그 미신이든지 무엇이든지 벌써 그 단체라 하는 것이 있으면은 거게는 모두 다 자기들대로의 보는 그 관이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인생관도 있고, 정치관도 있고, 도덕관도 있고, 행복관도 있고, 뭐 멸망관도 있고 여러가지가 다 없는 그런 사상이 없고, 없는 종교가 없고, 없는 주의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없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대해서, 사람의 행복이라 구원이라 또 사람의 생명이나 그런 데 대해서는 세상 지식으로서는 바른 말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삐뚤어졌습니다. 삐뚤어지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물리와 또 인간의 이 이치, 인간 이치. 물리, 인간 이치. 인간 이치가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련된 신앙 이치인데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요것을 판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래서, 며칠 안 남아서 우리가 대구집회를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라고 하는데 이 은혜받는 데에 우리 사람으로서의 할 그 중요한 것은 뭐인가? 제일 중요한 것이 옥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옥토라는 것은 곧 우리 마음이요 또 우리 몸입니다.

그러면 심신을 다 합해서 이것을 가리켜서 옥토라, 또 길밭이라, 또 돌밭이라, 또 덤불밭이라 그렇게 세 가지로 나눠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이 잘 준비가 되지 안하면은 이번 집회에서도 우리는 자기의 심신을 돌밭으로 만드는, 길바닥, 길바닥으로 만드는 일만 될 것입니다.

길바닥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통과했음으로 말미암아 그 땅이 단단히 다져져서 씨를 뿌려도 땅속에 들어가지 안한다 이랬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닌 그것은 우리의 심령에는 이런 것을 듣고 저런 것을 보고, 듣고 보고 생각하고 읽고 한 수많은 사람들의 그 말, 지식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만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강퍅하게 해서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헛일된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여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을 옥토에 뿌린 씨는 그 씨가 지기를 먹을라고 할 때, 땅 기운을, 지기를 먹을 때에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지기 먹을라고 할 때 딴딴해서 심어지는 데, 땅속에 심어지는 데에 방해가 돼 심어지지 못하구로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또 자랄라고 할 때에 기운을 막는 방해하는 돌도 없었습니다. 또 자랄라고 할 때 방해하는 덤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없으니까 그것은 순전한 흙만 남아 있습니다. 순전한 흙만 남아 있고 방해하는 거 세 가지가 없어야 옥토가 되지 세 가지기 있으면 옥토가 안 된다 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없는 옥토, 이 세 가지가 없는 심신, 마음과 몸, 육. 이 세 가지가 없는 육은 그 씨를 뿌렸을 때에 뿌려진 그 씨가지기를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었지 지기를 먹을라고 할 때에 먹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먹고 자라지 못하게,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없었고 또 먹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없었고,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없었고 먹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없고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자라고 싶은 대로 다 자란 그것이 바로 옥토에 심기워진 씨입니다.

우리가 이거 쉬운 것 같지마는, 이것은 뭐 이 해석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여러분들이 벌써 해석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석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실지로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이것은 수많은 그런 연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것이 그저 자기 이성 비판이나 무슨 연구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실지로 연습하는 가운데서 자꾸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는 것 가지고는 그것이 아무 효력이 없고 실지로 이 일이 이루어져야만 되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할라고 생각해 보면 누구든지 해 본 사람마다 그게 뭐 수십 번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수백 번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수천 번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됐는데 또 안 되고 됐는데 또 안 되고 또 하면 되고, 그렇기에 뭐 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또. 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어렵지 않고 그와 같이 잘 얼마 동안 했으니까 이거는 잘 됐지 싶으지마는 또 바로 하다가 삐뚤어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삐뚤어지는 것도 그렇게 뭐 삐뚤어지는 무슨 그런 표시가 뭐 있어 가지고 삐뚤어지는 게 아니고 삐뚤어지는 것도 참 삐뚤어지는 그 일 같지 않게 삐뚤어지고 또 그것이 바로 되는 것도 힘 안 들고 바로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지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안하고 또 잘되던 것이 삐뚤어지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아주 힘들지 안하는데 이 일을 이루어 가지고 옥토가 되게 한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게 대한 것을 얼마나 쉽고 어렵다, 아주 어렵고, 하기도 어렵고 삐뚤어지기도 어렵고, 그런 것 같으면은 할 때 힘을 써서 하면은 되겠는데 이 하는 것도 누구든지 하면은 당장 됩니다, 뭐 힘드는 게 아니고. 이 세 가지를 제해 버릴라 하면은 대번 되고 또 옥토가 이렇게 돼서 씨가 다 먹게 하는 것도 대번 됩니다. 그러나 대번 되는 그렇게 쉬운 것인데 또 삐뚤어지는 것도 쉽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는 된 줄 아나 되지 안하는 그런 속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따져야 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따져서 결과를 봐서 그 원인이 됐다 안 됐다 이래 판단해야 되지 결과를 상대하지 안하고 원인을 상대하면은 다 된 줄 알고 스스로 속는 사람 되기 쉽겠습니다.

이래서 제일 결과로 볼 것은 옥토에 심기운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그러면 결과가 제일 뭐입니까? 결과가 제일 결과가 뭐이냐? 제일 결과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거 귀가 있어야 되겠는데 그러면 귀가 있나 없나 그것부터, 귀가 있으면 되고 귀가 없으면 아예 이 일에 대해서는 상관도 없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 귀는 뭐겠습니까? 이 귀는 우리가 다 공통 해석이 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이 귀는 곧 우리의 자연의 빛, 우리 사람에게 있는 내 빛, 자기 빛, “너희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운 것이 얼마나 크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그 양심의 빛, 양심의 빛 그것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양심의 빛이 있나 없나 이걸 봐서 양심의 빛이 없으면 나는 이 도를 무시하고 반대하고 멸시하는 자기 때문에 이 도와는 상관이 없다 그거요.

그러면 양심은 뭐 어떤 것인가? 이것도 아주 물씬물씬해서 가지기도 쉽고 또 버려지기도 쉽고, 아주 가질라면 가지기 쉬워서 아무라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또 그 양심을 잊어버리고 양심 없이 양심을 버리고 사는 것, 양심을 뺏기는 것, 뺏기는 것도 아주 쉽습니다. 뺏기는 줄도 모르고 또 찾은 줄도 모르고 이렇게 쉬운 것입니다.

나는 의학을 공부 안 했지마는 말 들어보면 이 간 그 역할이 많이 한다 하는데 그 짐승 잡아보면 간 보면 간 그거는 물씬물씬하는 것이 그뭐 무슨 작용할 거 아닌 것 같애요. 손 이런 게 억세게 이래 콱콱 이래 좀 작용하지 간 그까짓 거야 그거 뭐 물씬한 거 그거, 나는 처음에 볼 때에 ‘간 이런 것은 이것은 그저 짐이나 되고 이래 뭘 그렇지 이게 뭐 역할을 하겠나? 이까짓 이렇게 물렁물렁한 게 무슨 역할 하겠나?’ 이렇게 보이지마는 간 그거 역할이 심히 많은 것을 자꾸 살아가면서 이래 들어보니까 크다 그말이오.

그것 모양으로 우리에게는 힘들지 아니하는 거, 물씬물씬한 거, 하기도 쉽고 또 잊어버리기도 쉽고 성공도 쉽고 실패도 쉬운 거 아주 그렇게 쉬운 거 그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중대한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것을 두고 말했는데 지극히 작은 거기에 모든 큰 거는 거기 달렸고 지극히 작은 그것이 종자요 그게 원동력이라.

그래서 양심이 있어야 되는데 양심 없으면 하나님의 도에는 상관없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월달 집회에 가는 것도 귀가 없으면, 귀 없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거기 가서든지. 이거 귀는 육신의 귀가 먹었으면 거기 가 있어봐야 무슨 말을 한 마디나 듣겠습니까? 이거 모양으로, 가면 거게서는 뭐 다른 것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주실 때에 다 말씀으로 주시지 딴걸로는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주시고 영감으로 주시는데 영감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뜻으로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들에 주신 것은 다 선지자를 통해서 줬지 선지자를 통하지 안하고 그렇게 준 일은 없습니다.

말씀 가지고 주시는데 귀가 어두워서 귀가 없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집회에 여러가지로 준비하느라고 모두 수고도 하고 각자들이 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다 이것을 힘껏 해결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집회에 참석할라고 하는데 귀 없으면 안 된다, 요것이 제일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귀 없으면 안 된다 하는 요것이 제일 마지막에 결론입니다. 귀 없으면 안 된다.

귀 없으면 안 된다 말은 양심 없으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양심은 뭐이 양심인가? 양심이라는 것은 종류가 많아서, 종류가 많게 되는 그 이유는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그 지식에 지배를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이 인정하는 그 지식, 무슨 지식이든지 ‘요게 바른 지식이요 요거 바른 이치다, 요 참 바른 이치다.’ 자기가 바른 이치라고 인정하는 그 지식대로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자기가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대로 하도록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릴라고 이렇게 하는 것, 어짜든지 자기가 아는 대로의 자기 아는 지식대로의 제일 올바른 것, ‘요게 옳다.’ 지식대로 옳다 하는 그 지식대로 할려고 하는 그 마음이 양심입니다. 다른 마음이 양심 아니고 그 마음이 양심이오.

그러면 양심을 가꾸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요 바로 되겠느냐?’ 자기가 아는 지식을 이렇게 활용해 가지고 ‘바로 되는 그게 뭐 어떻게 하는 게 바로 되는가?’ 바로 되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그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기르는 것은 그대로 바로 알고 난 다음에는 여러가지 지장이 있어도 그대로 실행을 하는 것이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기르는 데에도 아주 적게 길러지고, 조그매씩 기르는 거, 조그매씩 자라는 것 있고 아주 뭉텅 자라는 거 있습니다. 이래 우리가 식물을 보면은 어떤 데는 다른 데에 심어진 곡식은 이렇게 한 길 되구로 컸는데 거게 심어지는 것이 찍해야 요 한뼘도 안 되게 그렇게됐다 말이오. 그거는 밑에 거름이 없어 그래. 거름이 없으면 잘 안 자라고 거름이 있으면 잘 자랍니다.

이것 모양으로 우리 양심은 어데서 자라는가? 자기가 ‘옳다. 요게 바르다.’ 하고서 그대로 할라고 할 때에 그때에 하기 어려운 거 있고 쉬운 거 있어. 하기 어려운 거. 자기 양심대로 하기 어려운 거 있고 쉬운 것이 있으니까 쉬운 데는 방해하는 것이 적고 아주 어려운 것이 많은 데는 방해하는 것 많은 것인데 방해하는 것 그게 막바로 비료입니다. 그게 거름이오.

거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양심대로 할라 하니까 좀 처음에는 무슨 그저 일반사 그런 것이 좀 지장이 있다가, 또 물질에 대한 지장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생명에 대한 지장이 있다가 최고로 지장되는 어려운 지장되는 그럴 때에 그 양심 생활 하면은 그럴 때는 양심이 발칵 자라 버립니다.

이래서 양심대로 할라고 자기 생명에 방해를 할 때에 방해받지 안하고 양심대로 했으면은 생명에 방해, 생명적인 방해 그 방해를 양심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아주 속성의 무성하게 확 자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생활할라고 양심이 생명을 삼킬라 하는 그런 위협의 대적에서도 양심 생활을 양보하지 안하고 양심 생활 한 것은 생명을 초월한 사선을 초월한 양심인데 그러면 그럴 때 양심은 되게 자랐습니다.

자랐으면서도, 자랐으니까 뭐 ‘그만치 자랐으니까 이거야 물질이나 이런 뭐 사소한 일 이런 데 대해서야 양심을 대항하는 것은 굽히지 안하고 양심대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겠는데 그렇게 사선을 초월한 양심 생활 하는 그 양심이 강건한 사람도 아주 일같지 않은 거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사소한 일에 또 양심을 그만 꺾어서 양심의 생활 하지 안하고 양심을 꺾어서 아주 파묻는 그런 실수를 하기 쉽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모든 신앙 생활에는 보면은 하기도 쉽고 실패하기도 쉽고, 삐뚤어지기도 쉽고 또 하기도 쉬워.

그러기 때문에 이 간이라는 이거는 융화성 요동성 활동성 그런 것이 이거 뭐 그게 굉장히 많이, 눈에 우리 보이지 안해 그렇지 활동을 하는 거니까 그놈이 손같이, 손은 이거 아무리 이 여물게 됐다 해도 이거는 일 초 동안에 이래 버리면 손 다 뭐 뿔라져 버리고 대번 못쓸 겁니다. 이 견고할수록이 이거는 빠른 작용을 할 수가 없는 건데 간 그거는 물씬물씬하기 때문에 뭐 일 초 동안에 그 작용이 굉장히 많지만 이거 물렁물렁하기 때문에 그걸 감당하고 있다 이거요. 그거 모양으로 우리 신앙 생활에는 꼭 그와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나는 이번에 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그 깨달은 대로, 깨달은 그대로 죽어도 행하겠고 살아도 행하겠다. 깨달은 그대로 행하겠다. 이제 내가 옳다 인정한 그것은 양보 없이 하겠다.’ 하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옳다 인정하는 그것은 양보 없이 그대로 행하겠다 하는 그 양심이 없으면 참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에 가서 무슨 이상한 말이나 할까? 또 말이 나올까? 그러면 그거 말 그걸 들어 가지고 내가 목회하는 데에 또 필요로 써먹어서 상품을 많이 받아 가지고 가 가지고 그것을 필요 있게 써서 그걸 팔면, 잘 팔면은 밥도 되고 떡도 되고 고기도 되고 또 돈도 되고 이렇게 모두 환영도 되고 존귀도 되고 대우도 되고 영광도 되니까 참 가치는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을 가서 사 가지고 어떻게 좀 가서 내게 없는 것을 사 가지고 이걸 잘 가공을 해 가지고 팔면 아주 가치가 있을 터이니까 이거 팔도록 그리 한번 할라 하는 그런 자는 필요가 없습니다.

꼭 우리가 오월 요 집회에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 없는 자는 필요 없습니다. 양심을 가지지 못한 자는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은 뭐이 양심이냐? 양심은 쉽습니다. 양심은 쉬우면서도 이 양심관이 일치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선교사로 온 사람 쳐놓고는 제가 이렇게 많은 참석은 못 했지마는 더러 참석했는데 제가 참석한 가운데서는 그 선교사들이 교리와 신조에 똑똑하지를 못해요. 좁지를 못해요. 이 한국 사람은 이거 굉장한 이상한 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못되기도 제일 못됐고 그뭐 그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죄악도 있고 또 상상도 못할 명철도 있고 모두 있어.

이런데, 와 가지고 설교하는 데에 제가 대한 대로는 스톡 박사라고 미국에 뭐 칼빈신학의 윤리학 교수라든가 이런데 그분이 와서 설교할 때에 제일 제가 보는 대로는 제일 높은 설교를 했고 제일 깊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뭐 고신에서 와 가지고 했는데 야단이 났었습니다, 모두.

이랬는데 그분은 양심관이 ‘인적 요소가 아니고 인적 요소도 아니고 신적 요소도 아니고 이것은 신인 사이에, 신인 사이에 거게 들어 가지고 공평되게 역사하고 있는 그런 어떤 존재의 한 기관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마다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그 관계에는 양심이라는 그 속에 그것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그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의 사자라, 하나님의 사신이라, 하나님이 부리는 하나님의 사자라, 이거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것을 전달하고 고하는 것이라.’ 이라기 때문에 그 말을 할 때에 제가 전체를 파악해서 논평을 할 때에 이분은 양심은 신적 요소로 본다 그렇게 보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이 양심이라 하는 것 알기가 어려워. 양심이라 하는 것을 만일 그것을 잘못 들어가 가지고 찾을라 하면은 일생 동안 찾아봤자 양심이 뭐인지 찾지 못합니다. 못 하는데, 양심은 간단합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 하는 그 말이 아주 견고하게 잡아야 됩니다.

이래서 불교인은 불교인의 양심은 뭐인가? 불경의 지식을 보고 자기는 모든 지식, 종교 지식 모든 것보다도 이 종교 중에 불교의 이 지식이 옳다, 그 사람이 불교인이라 말이오. 불교 지식이 제일 옳다. 이 불교대로 해야 되지 종교를 믿으면 불교를 믿어야 된다, 종교를 믿을라면 예수를 믿어야 된다, 종교를 믿으면 회회교를 믿어야 된다. 이 하는 것은 거게 대한 경전이 있는 그 지식을 보고 요 지식이 제일 옳고 바르다 그렇게 인정이 되기 때문에 그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물론 따라가는 것도 있지마는.

그저 그 따라가는 뭐 출물꾼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로서는 이 종교가 제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바른 길이다 이렇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 종교를 믿는 것인데, 그러면 그 종교마다 양심이 다른 것은 자기가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대로 양보 없이 그대로 하려고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양심 해석은 그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로 말하면 자기가 성경에 보고 ‘이것은 옳다’ 뭣이든지 옳다 인정한 교리 신조라면 그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옳다 인정하는 것을 딴데 뺏기지 안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그것이 기독자의 양심입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자기가 인정하는 말씀대로 그대로 자기 그 마음에게 몸에게 강행하는 강행을 시키는, 기어코라도 시키는, 시키다 안 되면 제가 죽어버리고, 양심이 죽든지 그리 안 하면 그거 하든지 둘입니다.

그래서 요렇게 강행하는 양심, 그 양심이 요 죽은 양심 말하는 게 아니고 산 양심인데 강행할 수 있는 그 양심 그 마음이 없는 사람, 강행시키는 그 마음이 없는 사람은 듣지도 못한다, 소용이 없다 그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옳다 인정이 안 되는 그것은 또 딴 문제고 옳다 인정이 되는 그것은 죽었으면 죽었지 양보 없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양심을 가꾸고 길러야 되는데 가꾸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무슨 일을 볼 때에 자기가 표준하고 있는, 자기가 표준하고 신앙하고 있는 지식은 신구약 성경 지식으로 삼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대로 해야 되겠다. 요 일은 성경대로 해야 되겠다, 성경에 뭐라고 그랬느냐? 어떻게 하면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되겠느냐?’ 요것을 찾을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양심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그 양심을 가꾸는 거라 말이오. 양심을 대우하는 거라.

뭐 그럴 때에 성경에 뭐라 했거나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물질에 대해서 손해 안 보겠느냐?’ 이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물질의 이해에 대해서, 물질 이해를 준해 가지고 표준해 가지고 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 어떤 사람은 또 자기 가정 표준하고 있는 사람, 자기는 또 정치 운동하는 사람은 정권 잡는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모든 걸 비판하는 사람, 그런 것을 다 가리켜서 양심이 화인맞았다, 화인맞은 건 쇠도장을 불에 달궈 꾹 찍어버리면 그만 그 물건은 그 도장찍은 것의 것이 됐다 그말이오.

저는 어릴 때에 화인 보니까 우리 집에 소를 먹이는데 언제든지 소 가면은 소 뿔따귀에 도장을 꾹 찍어 가지고 옵니다. 이거 뭐이냐 하면 그 군내에서 이 소가 제일 좋은 소다 이래 가지고 이거는 그러면 잘 못 팔아요. 축산에 벌써 합격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소는 팔라 하면 신청해야 되고, 거기서 자꾸 새끼를 길러 이래 거석할라 하기 때문에. 찍으면 벌써 인찍은 거기 권리가 있다 그말이오.

이거 모양으로 양심에 화인맞아서 벌써 양심이 자유하지 못하고 이것에나 저것에나 아무데도 걸리지 안하고 아무데도 속하지 안하고, 양심은 아무데도 속하지 안하고, 기독자 양심은, 기독자 양심은 아무데도 속하지 안하고 기독자의 지식이 뭐냐 하면 기독자의 지식이 진리요 영감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요 영감이기 때문에 기독자의 양심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과 영감에게만 속해 가지고 있고 딴데는 속하지 안한 것이 기독자 양심이요 불교인의 양심은 불경에만 마음이 속해 가지고 있고 딴데 속하지 안했으면 불교인의 양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자의 양심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 요게만 속해 가지고 요대로만 움직이지 요 외에 딴것 아무데도 속하지 안하고, 자기에게 속하면 벌써 자기라는 그 화인을 맞았다 말이오.

무슨 일이든지 비판하면은 ‘내게 유익하느냐?’ 자기 표준으로서 자기를 표준해 가지고 모든 비판하면 자기라는 화인을 맞아버려. 그러면 양심이 자기라는 자기 양심이 돼 버려. 자기 양심이 돼 버렸지 양심은 이것은 기독자 양심이라면 영감과 진리에게만 속한 것이 그게 양심인데 딴데 속하면 화인맞은 것이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양심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진리와 영감에게 속한, 속해서 변동하지 못하고 진리대로 영감대로 이해 불구하고 그대로만 행할라 하는 그 마음이 있는 사람,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서 옳다 인정하면 나는 그대로 행하겠다. 그대로 하겠다.’ 하는 요 마음이 없으면 다 헛일이라. 요게 제일 중요합니다.

m 그러기 때문에 귀가 있나 없나? 귀 없으면 아예 참여할 필요도 없어. 귀 없으면 참여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고 그다음에 이제 제일 결과 말고 그다음 결과는 뭐이냐 하면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나는 이것을 그전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거는 좀 거석하다 해서 내치 그랬는데 작년 집회인가 언제 여게 대해서 확정을 지웠습니다.

이 결실이라 하는 것은 사람은 인인 관계, 또 신인 관계, 또 악령 관계 이 세 관계만 바로 되면 바로 되는 것입니다, 세 관계만. 바로 되는데 인인 관계에 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만수를 만수한 것이 백이요 이게 제일 많애. 우리 활동하는 가운데에 인인 관계가 제일 많아. 그다음에는 마귀와의 관계가 둘째로 많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게 변동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제일 근본이요 또 변동이 적다말이오.

이런데, 나는 해석을 그래 합니다. 백 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인간과의 관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 결과를 맺을 수 있다. 인인 관계에 조금도 흠과 점과 주름잡힘과 티가 없는 요런 그 인인 관계를 할 수 있는 것이 이 하나님 말씀이다.

또 둘째로는 ‘육백육십육’ 이 악령과의 관계, 악령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심판에 갈 때 너는 악령에게 대해서 악령을 배척할 때는 배척하고, 이용할 때는 이용하고, 또 꺾을 때는 꺾고, 그것을 정죄할 때는 정죄하고 악령에게 대한 이 악령에 대한 그 모든 언행심사의 생활이 하나도 흠점이 없이 완전했다. 악령 관계가 완전이라, 그러면 육수에다 만수를 인간 만수를 가하면은 그거 또 육십이 되겠습니다.

그거 또 하나님이 삼위일체에 대한 수를 삼은 하나님의 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게 대해서 이런 결과가 있는가? 이런 결과가 과거에 있었으며 또 이런 결과가 있는가? 그러면 이 결과를 봐서 그것이 없다고 봐야 되겠는데, 자기에게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이 결과가 없으면 그는 옥토 뿌린 씨가 안 됐다 그말이오.

옥토 뿌린 씨가 됐는지 안 됐는지 뭘 보고 알 건가? “나무를 모르거든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라” 이랬으니까 자기가 옥토가 됐는지, 자기가 받은 바의 하나님의 도리는 옥토로 받은 것이 되는지 혹은 잘못 받은 것이 되는지, 옥토로 받은 증거는 뭐이냐? 속기 쉽다 말이오. ‘나는 옥토로 받았다 안 받았다, 내가 그 도를 받는 데 내가 내 심신이 옥토가 돼 있다 안 됐다.’ 하는 그것은 뭘 보고 알겠느냐? 그것은 열매를 보아서 알라.

네가 이 도를 받고 난 다음에 인간에 대해서 흠점이 없고 악령에 대해서 흠점이 없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흠점이 없는 완전 관계를 가졌나? 그걸 봐서, 그 관계 가지지 못한 것이 뭐냐 하면은 옥토가 되지 안한 연고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목적하고 제일 소원하는 것은 뭐이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받는 이것이 우리의 제일 소원입니다. 그것만 하면 다 성공 아닙니까? 우리의 성공은 어데 있느냐? 우리의 성공은 옥토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걸 예사로 여겼는데 최상림 목사라고 아주 신앙에 독실한 분, 지금 한국에 재건교회라고 있는 그 교회가 최상림 목사님 밑에서 배우던 그 사람들이 지금 재건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재건교회 하고 있는데 거게서 좀 자기네들이 그만치 실행으로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논리적으로만 깨달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만 깨달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다 해 가지고 재건파가 됐습니다.

최상림 목사님은 그렇게 치우친 그런 재건파가 아닙니다.

아닌데 그분이 시찰하고 있는, 그분이 시찰하고 있는 그 시찰구역 내에 있는 신자들이 다 신앙이 살았어, 제가 보니까. 딴데서 온 사람들은 이거 뭐인가 전부 인본주의고 이거 뭐 속화주의인데 그 사람들은 까랑까랑하게 살았어. 그래서 내가 그분을 만나보기를 참 원했습니다. 그분이 요번에 인제 가르치러 온다, 그래 출애굽기 가르치러 온다 이랬는데, 왔어요.

와서 내가 왔다 소리 듣고서 그 배우지도 안하고 그만 바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가지고 만나 가지고, 뭐 간단한 시간에 여러 시간 말할 수 없으니까 ‘목사님, 목사님이 지금 정하고 있는 표어는 뭐입니까?’ 표어를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성구를 표어로 삼고 있습니까?' 이라니까 그 어른이 말해.

‘예,ㅡ웃으면서ㅡ저는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하는 그것이 저의 표어입니다.

옥토에 뿌린 씨.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했는데 옥토에 뿌린 씨가 저의 표어입니다.’ 요렇게 그래 말을 친절히 해 줘요. 친절히 하는데 그래 나는 그러냐 하고서 그래 인사하고 나왔는데 자꾸 갈수록이 이 표어가 참 큰 표어요 아주 중요한 표어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를 봐서 자꾸 찾아 들어가야 되겠어. 내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이 없으면 내 심신은 옥토가 아니다. 이거 판단해야 되겠고, 옥토가 아니다 이걸 판단해야 되겠고, 옥토 같으면 그렇게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겠는데 옥토가 아닌 것이 판명되겠고, 그러면 옥토가 안 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잘못돼 가지고 있느냐? 그것은 이 가시밭, 또 돌밭, 길밭 이게 들어 가지고 옥토가 안 돼 있다. 옥토 되는 데는 이 셋을 개간해서 없애버려야 된다. 길바닥이면 자꾸 파 가지고 흐분흐분한 무른 땅을 만들어야 되겠고, 또 돌밭이면 돌을 뽑아서 다 버려버려야 되겠고, 또 덤불이면 덤불 다 쳐서 없애버려야 되겠다 말이오. 이런데 그 밑에 주님이 또 해석도 하셨는데 그러면 요 세 가지, 제일 중요한 것이 귀가 있어야 되겠고, 또 둘째로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 이 도를 받아야 되겠고, 이 도가 되는 데에는 옥토가 돼야 되겠고, 옥토가 되는 데에는 이 세 가지를 개간해서 개간해야 되겠다.

개간해야 되겠는데 그러면 이 세 가지 중에 제일 첫째 길가 뿌린 것은 뭐이냐? 이 많은 지식에게 다져 가지고 이와같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둘이 있는데, 둘이 있는데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의 평가를 동등으로 하는 요것을 우리가 회개해야 되겠다 말이오.

인간 지식, 인간 지식은 피조물의 지식이요 이 성경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인데 처음에도 없는 가운데 우주를 창조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셔 가지고 진리가 창조했어. 말씀하신, “제이 성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이 진리의 말을 해 가지고 창조했다” 그랬다 말이오.

그러면 우리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처음에는 우주를 창조했지만 지금은 진동되지 아니할 완전 영원 무궁한 것을 창조할라고 나타난 것이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말이오. 그러면 이 말씀 한 성구와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지식 전부 다 뚜드려 뭉친 이거와 중량의 비교해서 비중을 달면 이거 비교할 수 없는 여게 우리 지금 성공이 있다 말이오. 그러면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의 비중을 이거 바로 아는 여게 성공이 있어. 요거 쉬운 것 같지마는 요거 어렵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천하 인간 지식 다 뚜드려 뭉쳐도 하나님의 지식의 한 성구와 중량이 비교가 되는 게 아니고 어림도 없이 그거는 뭐 비교할 수 없는, 하늘과 땅 같은 그거 무한한 차이가 있다 말이오.

이런데 요것을 우리가 갖추는 것이 요거 길바닥을 개간해 가지고 옥토에 심으는 옥토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요게 얼마나, 요거 어려운 것은 논리로야 쉽지마는 자기가 많은 연습 가운데서 실상으로 요렇게 자기에게 인정돼서 자기 행동에 요 사실이 지금 돼 가지고 있어야 옥토가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요것은 우리의 노력이요 연습이요 자꾸 일생동안 해 가지고 이제 일생동안 하는 것이 길바닥 개간해 가지고 옥토 만드는 이 일 하다가, 이것도 일생 사업이라. 이거 일생 작업이라. 일생 작업이지 어데까지 되고 난 다음에 다 됐다 할 게 아니라, 일생 작업.

또 둘째로는 뭐이냐? 자기 문제라. 자기를 초월해야 되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라고 할 때에 방해하는 자기가 있는데 방해하는 것이 자기 몸 밖에도 많이 있지마는 첫째 문제가 자기 안에 방해하는 것이 문제라, 하나님 말씀대로 할라고 할 때에 방해하는 것이 자기 안에 것이 문제니까 그게 바로 돌밭이라. 씨 나면 돌이 밑에 받쳐 가지고 안 되는 돌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라 할 때에 방해하는 그것이 뭐인가? 방해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으니까 뭐입니까? 그게 내나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이라.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자기 부인하기 전에 하나님의 도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도를 받으면 자기 부인되고 자기 부인되면 하나님의 도 받고 이거는 자기도 하나님도 둘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하지 않고는 구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하는데 우리는 자기 부인한다 하면은 그러면 자기는 소중한 것인데 부인하겠습니까? 자기가 둘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둘이라.

둘이니까 하나님의 도대로 행할라고 할 때에, 양심이 지도할 때에, 하나님의 도가 오고 그 도를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주고 우리 마음에 주는데 마음에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줄 때에 우리 이 육의 요소, 육의 요소가 그 도를 받아야 되는데 받을 때에 제일 받는 자가 누굽니까? 받는 자가 누구요? 그 도를 제일 처음에는 도를 받을 수 있는 중생된 영과 이 마음이 연결되는 연결에는 뭘로 연결이 됩니까? 뭘로 연결이 돼요? 양심으로 연결된다 말이오.

양심이 연결되기 때문에 양심 없으면 연결이 못 돼. 양심 없으면 연결이 될 수가 없어. 양심이 있어야 되지 양심이 없으면 연결이 안 됩니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행할라고 할 때에 뭐이 방해하느냐? 돌이 밑에 있어 가지고 뿌리 났지마는 안 된다 했어. 이러니까 말씀대로 실행할라고 시작은 했지마는 나중에 가면은 ‘이거 내 가정에, 내 경제에, 내 사업에, 내 명예에, 내 지위에, 권세에,’ 전부 자기에게 다 받쳐 가지고 다 헛일해. 자기에게 받치는 요것을 해결을 해서, 요걸 개간해서, 자기에게 받치면 뭐 받치는 대로 요 돌이 있으면 또 받치면 들어내 버리고 또 받치면 들어내고 큰 거는 깨내고 어떻게 하든지 이걸 돌을 끌어내야 옥토가 되지 돌이 있는 건 옥토가 아니다. 이러니까 이것도 일생 작업입니다. 일생동안 작업이니까 이걸 해야 되어지는 것이지 하지 안하면 구원이 헛일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다 믿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지금 벌써 우리는 단군신사 그런 데 대해서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쳤습니다. 가르쳤으니까 반사가 지금 자기 학생에게 앞으로 국기 배례 한다, 뭐 단군신사, 그거 곧 나옵니다, 이제. 나와서, 그뭐 지금 뭐 가슴에 대고, 아니오. 그거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그만 가슴이 아니고 꼭 절을 해야 되도록 그렇게 만든다 그말이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역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귀를 부려서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그래서 7장 찬송에 ‘마귀를 이기신 성부여 오셔서’ 하는 그것을, “이거 마귀하고 아버지하고 서로 대립한 것은 없는데 그라면 성자하고는 서로 싸웠지만 성부하고는 그 싸울 수가 없는 건데 ‘마귀를 이기신 성부여 오셔서’ 이라니까 이 성부 성자 성령 찬송인데 이게 좀 맞지 안하니까 어째야 되노?” 이래서 아직까지 판정을 못 했는데 오늘 아침에 여기 기도할 때 내가 그걸 판정했습니다.

한 것은 ‘마귀를 이기신 성부여 오셔서’ 그리 안 하고서 하나님의 뭐, 뭐라고 했다고 했어, ○○○목사님? 하나님의 영광 뭐라던가? ‘영광과 권능의 성부여 오셔서’ `마귀를 이기신 성부여 오셔서'가 아니고 ‘영광과 권능의 성부여 오셔서’ 그래 하는 것이 그게 옳습니다. 옳아서 우리는 그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라는 문제, 자기라는 문제 이것이, 내가 옥토가 돼야 승리가 있는데, 옥토가 돼야 승리가 있는데 승리가 있을라면은 옥토가 돼야 되니까 옥토가 될라고 하면은 첫째 문제는 지식 문제, 첫째 문제는 지식 문제, 모든 그 인간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 지식을 비교할 수 없는 요 지식관이 바로 돼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 지식을 비중을 같다고 생각할 때에, 인간의, 인간의 말 말이요, 인간의 말 천명 만명이 말하는 것과 성경 말씀이 말하는 것과 요 말할 때에는 그 비중을 거석해서 요걸 깨뜨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요것이 길바닥을 옥토 만드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그 걸음 걸었다 말이오.

가족이 그렇게 ‘이라는 게 좋습니다’ 가족들의 여론이 있었지마는 하나님의 그 뜻만 찾아 가지고 행했고 롯은 인간의 뜻을 버무려 가지고 인간의 뜻이 많으니 다수니까 중해졌다 말이오. 우리도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요거 비교하는 거 요거 아주 중요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라 할 때에 방해하는 요것은 깨뜨려 버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기냐? 참자기가 누가 참자기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행하면 죽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고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이 제것되어 있는 그게 참자기입니다. 열한 가지 구속 그것이 자기 것 되어 있는 것이 참자기요 열한 가지 구속을 입고 사는 것이 자기인데 열한 가지 구속을 벗고 살게 하는 그거는 자기 같으나 자기가 아니라. 거게서 우리는 잘 구별해야 되겠어.

그러면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열한 가지 구속, 택함에서부터 마지막에 왕되는 데까지 이렇게 열한 가지 하나님의 구속을 가진 줄로, 우리는 과거에 죽었는데, 죄와 허물로 죽어버렸는데 이제는 열한 가지 구속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났다 말이오. 열한 가지 구속을 가진 이것이 자기기 때문에 열한 가지 구속으로 사는 그 자기가 자기인데, 열한 가지 구속 곧 열한 가지 구속, 신구약 성경 영감은 열한 가지 구속을 우리에게 입게 하는 것이요 벗지 말라는 걸 말해 놨고 ‘이라면 벗는다, 벗지 말고 입고 살아라.’ 하는 이것을 가르친 것이 곧 신구약 성경인데 이를 방해하는 요것을 정리해야 돼. 요거 정리해야 우리가 옥토가 되지 그러면 정리 안 하면 옥토 안 됩니다.

이런데 그러면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돌맹이를 자기인 줄 알고 말이요, 돌맹이를 자기인 줄 알고 이렇게 원수를 자기인 줄 알고 이래 구별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제일 첫째 중요한 것이 지식의 적이고, 지식의 적이고 둘째에 적은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적이고 셋째로 적은 뭐입니까? 셋째로 적은 모든 세상 염려와 재리, 이 세상이 적이라 말이오. 몸 밖에 있는 적이라, 몸 밖에 있는 적.

이것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에, 살라고 할 때에 이것이 방해해서 가다가 그만 덤불에 막혀 가지고 못 가는 것처럼 그만 이것들이 방해해 가지고 성공을 못 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세 가지 문제가 완전히 해결해서 이것이 방해하는 것이 없어야 옥토가 되지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옥토 안 되니까 요 방해하는 걸 뽑아버려야 돼요. 요거 뽑아버리는 것이 일시 뽑아버렸으면 되는 게 아니라 이거는 일생동안 계속 뽑아버려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지 다른 걸로 안 됩니다. 연습으로 되는 거.

이러기 때문에 연습으로 되는 것이니까 이 연습이 언제까지나 일생 동안 죽을 때까지는 계속돼야 되지 다 개간했는데 싹 다 들어와 버렸어. 또 들어왔다가 또 개간하면 당장 깨져. 힘드는 게 아니라. 쫓아내는 것도 힘들지 안하고 옥토 만드는 것도 힘들지 안하고 옥토가 이 못쓸 박토가 되는 것도 힘들지 안하고, 언제 박토가 되는지 언제 옥토가 됐는지 몰라.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인격성의 작용이요 역사의 기관들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이번에는 옥토되기를 힘을 써 가지고 우리가 해야 되겠어. 옥토가 되는 것은 옥토되는 것보다 먼저 있을 건 뭐입니까? 양심을 쓰는 거. 그거 없으면 헛일이라. 양심 쓰는 거 없으면 안 되고 양심을 써 가지고 듣고 목적이 뭐이냐? 옥토되는 것이 목적이요 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이 옥토되는 데는 세 가지가 정리가 돼야 된다 하는 그것을 저 며칠 전에도 말했습니다. 또 오늘도 또 이와같이 지금 아무래도 이거 준비해야 되겠다 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하는 거 이거 빼지 말고 꼭 계속해서, 기도야 삼십 분만 하겠습니까?  하루 종일 기도하지요. 이런데 특별히 자타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를 매일 삼십 분 하라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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