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9 00:53
씨뿌리는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3장 3절∼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게 귀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 귀는 사람의 마음의 귀를 말하는데 마음의 귀는 모든 마음을 다 해야 무엇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마음이 없이 듣는 사람에게는 귀에 들리지도 아니합니다. 또 마음에 다른 잡된 생각을, 가지고 들으면 그 말이 바로 들려지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없이 들어도 안 되고 마음에 무엇을 가지고 들어도 안 되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마음이 빈자가 복이 있다 그말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가지고 들어도 안 되고 또 마음 없이 들어도 안 되고, 마음에 참됨을 가지고 들어야 된다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귀 있는 자라 그 말은 양심을 써서 들으라 그말입니다. 양심을 쓰지 않고 들으면 안 됩니다. 양심을 쓰고 들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안하고 양심을 가지지 안하고 이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 자기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마음에 다른 것을 가지고 들어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는 마음에 아무 것도 두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바로 들어 깨달을라고 전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라고 애쓰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들을라고. 또 바로 들어 가지고 고대로 실행해서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그것이 곧 선한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옥토가 된 것은 그 결실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맺었습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백 배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만수의 만을 가한 것을 가리켜서 백이라 그렇게.
계산하면 나오는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대한 원만한 만점을 이룰 수 있다. 인인 관계에 대해서 올바른 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인 관계에 올바른 성과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의 여수 관계도 있겠고, 또 서로 노동하는, 노력하는 노력의 관계도 있겠고, 또 예의도 있겠고, 체면도 있겠고, 도덕도 있겠고, 자기의 의무와 책임도 있겠고, 봉사도 있겠고 서로 사람으로 더불어 이렇게 교제하는 그 모든 교제도 있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 관계는 크게 나누면 그것을 윤리성이라, 무슨 사가간이나 또 그렇지 않으면 혹은 친척이나 그런 모든 척이 있는 관계를 가리켜서 윤리라고 말하고, 또 이렇게, 저렇게 활동하는 그런 모든 관계를 가리켜서 사회성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사람들에게 대해서 내가 좋은 본을 보이느냐, 유익을 끼치느냐 해를 끼치느냐, 해를 끼치느냐 하는 그런 면에 대해서 도덕성이라 그렇게 말을 하고, 사람으로 더불어 사는 물질에 대한 물질면에 대해서 모든 경제성이라 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우리가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면에 백 배를 맺는다 그말은 인간의 만수에 만수를 한 것이 백 배이기 때문에 인인 관계에 대해서 원만한 그런 결실을 맺게 된다, 원만한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 인인 관계에 대해서 참 온전타고 하는 그런 좋은 관계를 맺는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여기 백 배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만 대인 관계만 애를 쓰는 사람은 또 그리 치우쳐 가지고 안 된 사람입니다. 대인 관계만 힘을 쓰는 사람은 그리 치우쳐서 안 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대인 관계를 해도 저만 알지 다른 사람은 생각지 안하고 제 주장대로 제 고집대로 제 욕심대로 제 성질대로 제게 대한 모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도 저만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지 안하고 저만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지 아니하고 그렇게 자기 한 사람으로 치우치는 사람도 그 사람은 일생을 살아도 헛일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으로만 치우쳐 가지고 가정만 알지 가정 밖에 있는 사람들을 몰라도 안 됩니다. 가정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정 밖 가리켜서 가깝게 자기의 친척들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것을 그 사람은 윤리성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는 참 원만한 사람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자기 친척에만 조심할 것이 아니라 저거 친척끼리는 잘 하고 조심해서 이래 하지만 친척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안하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그 사람은 윤리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도무지 사회적으로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그렇게 평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밖에, 자기 친척 밖에 모든 사람을 가리켜서 사회인이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또 자기가 주의를 하지 안하면 그 사람은 사회성이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사회에 대해서도 조심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도덕성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저 임시 사람들에게, 이 사회 사람들에게 관계를 가지는 것은 잘할라고 애를 쓰지만 그 사람이 아무런 덕면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받을 만한, 모본을 할 만한 그런 무슨 좋은 면이 없고 그저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사람 대 사람으로 아주 잘 들어붙어 가지고 그렇게 사는 그런 무슨 기생들 모양으로 사람으로 더불어 잘 들어붙어 가지고 그렇게 사람들을 아주 재미있게 이래 사는 사람은 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무슨 덕면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모본을 끼칠 만한 그런 것이 없다,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뭐 다른 사람이 기념할 만한 그런 좋은 점이 없다 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덕면이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그 경제 문제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이 깨끗지를 못하다. 또 그 사람에게는 봉사가 없다.
어떤 사람은 봉사성은 또 있어 가지고 뭐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 주는 것이라든지 또 아픈 데가 있으면 방문하는 것이라든지 병원 이런 데는 방문 자주하고, 그 사람은 그거 하나만 해 가지고 되는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없고 자기에게는 그게 있으니까 그것만 비교해 가지고 아무라도 그만 그거 없으면 사람을 못쓸 사람으로 알고 그것만 있으면 제일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그런 봉사면으로만 치우쳐 가지고 아무짝도 못쓰는 그런 기형이 있습니다. 사람이 팔이 좋지만, 손이 좋지만 손도 손만침 커야 되지 손만 크고 손이 몸뚱이보다도 크면 그거는 병신이지 아무짝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형적인 사람이 되면 안 되는데. 백 배 결실을 맺는다 이 말은 인인 관계에 원만한 그런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또, 육십 배를 맺는다 그말은, 악령이 우리 사람들에게 별별 장난을 합니다.
악령이 눈에 보이지 안하지만 보이지 않는 악령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 가지고 사람들을 아주 악용해 가지고 그렇게 별별 일을 합니다. 간교한 일도 하고, 불량한 일도 하고. 월권하는 일도 하고, 또 남을 가해하는 일도 하고, 자기가 간섭 안 해야 되고 참관 안 해야 될 일도 하고 마귀가 이렇게 자꾸 사람들을 삐뚤어지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정신이상으로 그렇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악령들인데, 그 악령이 와 가지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올릴 때도 있고, 나를 낮출 때도 있고, 나를 공연히 위할 때도 있고 해칠 때도 있고, 나를 대적할 때도 있고 환영할 때도 있고 별별 마귀란 놈이 방편을 쓰지만 어떤 마귀의 방편이 가까운 친척을 통해서 오든지 원수를 통해서 오든지 또 높은 사람을 통해 오든지 낮은 사람은 통해 오든지 뭐 어떤 사람을 통해 올지라도 악령이 오는 그 일에 대해서 자기가 패전하지 안하고 다 승리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육십 배 결실을 맺는다, 그렇게 말씀을 하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백 배 열매 맺는다는 이 말씀은 사람과의 관계는 흠이 없이 할 수 있다. 또 육십 배라 말은 마귀의 그 장난에 대해서는 어떤 그 방편을 써도 거게 대해서는 하나도 실족하지 안하고 원만한 그런 승리를 할 수가 있다 하는 것이요.
또, 삼십 배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흠 없이 그렇게 관계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는 어떤 것이 하나님과 관계인고 하니.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관계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흠이 없는 믿음을 가진다 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바라봄이 흠없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실지로 당하면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는다 그거야. 또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다 하지만 실지로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인정치 않는다 그거요.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또 하나님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맡겨 놓고 사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이 다 하나님에게 대한 관계인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삼십 배라 말은 삼에 인간의 만수를 하면 삼십 배인데 하나님께 대해서도 인간으로서는 그 이상 할 수 없는 원만한 그런 행위를 가지게 됐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삼십 배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는 사람으로서는 흠없는 원만한 생활을 했다, 원만한 인간의 결실을 했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으로서의 사람 대, 악령 대. 하나님 대 이 세 가지면 다 들었습니다. 여게 빠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게 대해서 원만한 결실을 이루었다 하는 것인데, 이 결실을 이루는 데에는 옥토가 돼야 된다 이랬습니다.
옥토에 뿌린 씨는 이런 결실을 이루었다 했어. 옥토에 뿌린 씨는 이런 결실을 이루었다 했는데 옥토에 뿌린 씨가 될라고 하면 세 가지를 부인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제 아침인가 언제 이 말씀을 증거했는데 다시 증거하는 것은 좀 굳게 잡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부인하는 잣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여게 씨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거게 밭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이 세 가지를 부인하고 세 가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이 세 가지 지극히 큰 성과를 이루도록 하신다 그말입니다.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도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받되 어떨 때는 하나님 말씀을 아주 자기가 믿는다고 또 두려워도 하고 이 말씀에 진실함도 느끼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환영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환영을 하지만 어떨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 그말이오. 하나님 말씀을 멸시해서 뭐 평소에는 하나님 말씀을 잘 믿는 척 하다가서 무슨 이런 것이 생겨지면 그만 그것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인정치 안하고 저버리는 그런 행위를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와서 역사할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어떤 역사를 할 수 있느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그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는 이 인인 관계나 또 악령에 대해서나 하나님에게 대해서 원만한 그런 결실을 맺을 만한 실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실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그 진리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붙들고 역사하시면 이렇게 모든 면에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이런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 가지고 이 세 가지 면으로 완성을 이룹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 가지고는 이 말씀이 인인 관계면에, 또 악령 관계면에. 하나님 관계면에 이 세 가지 면이라면 우리 생활은, 다입니다. 이 세 가지 외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이 세 가지 안에 다 포함됐습니다. 이 세 가지만 완성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의인이요,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능의 능력을 가졌고 전지의 지혜를 가졌고 완전한 사랑을 가졌기 때문에 이 말씀의 능력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못 할 것이 없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가 가지고 그 사람에게 이렇게 귀중한 역사를 해서 이 세 가지 면으로 완성을 이룬다 그말이오. 그러면 완성이면 인간 완성이요 그 사람은 인간 성공입니다.
인간 성공 할 수 있는 이렇게 완성을 이루는데 어떤 사람에게 가 가지고는 하나도 이 말씀이 일하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서 이렇게 참 지극히 큰 역사를 할 수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 가지고 이 말씀이 뭐 조그만한 일도 못 합니다.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 가 가지고는 돈 천 원짜리만치도 일 못 합니다. 어린 아이만치도 일을 못 합니다. 병신만치도 일을 못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게 아니고 이 말씀은 지극히 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것 이 이 말씀의 능력인데,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성과로서 인간으로서 완성할 수 있는. 인간 완성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왜 조그만한 역사도 하지 못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가는 말씀은 다르고 어떤 사람에게 가는 말씀은 말씀이 달라 그런 것이 아니고, 요거 잘 알 아야 됩니다. 말씀이 달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것이 대우가 다릅니다. 대우가 다르기 때문에 이게 안 된다 그거요. 이 말씀을 여게 간단한 이 비유로 세 가지로 표현했는데. 이 세 가지를 부인한 만치, 세 가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권위 있게 대우하면 이 세 가지보다 하나님 말씀을 대우하면 이 말씀은 와 가지고 얼마든지 역사할 수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 세 가지만치 대우를 하지 안하고 그것이 닥치면 그것을 대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져버려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역사 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세 가지를 비유해서 길바닥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길바닥은 그거 비유인데.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그것이 길바닥입니다. 많은 사람이 밟은 것이 길바닥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와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인간살이를 하고 갔는데, 인간 생활, 인간의 걸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걸음 걸은 그 걸음 걸은 것을 주 모아 가지고 뭐이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그 모든 역사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역사라. 인간들이 육천 년 동안에 어떻게 걸어왔느냐 하는 인간들의 걸음에, 그것을 종합해서 그 책을 기록해 놓고 역사 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온 그런 것을 기록한 것을 가리켜서 인간 지식이라 그랍니다. 육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살고 간 말이요. 살아온 그것을 종합해서 그것을 인간 역사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그렇게 육천 년 동안 살아간 그 것을 종합해서 기록해 놓은 것을 인간 지식이라 또 그렇게 말합니다. 또 인간들이 살고 간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해서 문화라 그렇게 말합니다. 문화. 그러면 '이 역사는 몇천 년 역사?' '아, 육천 년, 사천 년 역사다, 또 이것 은 이 문화는 천 년 전부터 시작한 그 문화다, 이 문화는 육천 년 걸려서 나온 문화다 그렇게 문화의 연령이 있고 지식의 연령이 있고 모든 역사 의 연령이 있습니다.
이래서, 상고사라 뭐 중고사라 현대사라 근대사라 이렇게 역사책도 말을 하고, 또 이 지식은 현대 지식이라, 이거는 몇천 년 전부터 이런 지식은 이 지식은 내려 왔었다, 이 지식은 한 백 년밖에는 안 됐다, 이 원자니 하는 그런 것은 백 년 미만입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렇지만 그거는 미만이오. 그래서, 그러면 세상 지식 또 세상 역사, 이 모든 인간의 통계 또 그걸 전부 똘똘 뭉쳐서 말하자면 세상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그래 길가에 뿌린 씨는 무슨 씨인고 하니, 세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상대할 때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의지하지 못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맡기지 못하게. 복종하지 못하게 할 때에는 그만 그 사람이 아, 육천 년 인간 통계가, 인간 지식이, 인간 역사가. 온 세상이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바라볼 수가 없다, 맡길 수가 없다, 의지할 수가 없다. 순종할 수가 없다. 이래서 그럴 때는 한 말로 말하면 여러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도 필요가 있다 그말이오. 세상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보다 높이 여기기 때문에 탈이지 세상 지식이라 하는 그것이 세상을 발표하는 그런 거는 좋습니다. 한 말로 말하면 세상인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많은 소리를 여러분들에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안 할 때에는 잘 믿는데,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할 때는 그만 세상 그놈을 더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 말한다고 해도. 왜 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느냐? 못 하는 것은 자기는 몰라도 세상의 지식이 들어서 믿지 못하게 하든지 세상 통계가 들어서 믿지 못하게 하든지 이 세상 모든 그 역사가 들어서 믿지 못하게 하든지 그런 게 들어서 믿지 못하게 한다 그말이오.
믿지 못하게 한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 맡기지 못하는 사람.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 말씀보다도 권위 있게 여겨서 그 말씀을 신청하고 그 말씀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부인한 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에게 가 가지고 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 세상보다 이 말씀을 권위 있게 인정하고 영접하고 대우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일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돌밭에 뿌린 씨라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말씀대로 실행 하다가 그만 원죄 자기 중심 말이오. 자기 중심 위주, 원죄 그것을 가리켜서 돌밭으로 이렇게, 돌로 비유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가 믿고 바라보고 또 맡기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행동하다가 자기에게 거리끼면 안 된다 말이오. 자기에게 거리끼면 자기 성질에 거리끼든지 자기 비위에 거리끼든지 자기 지식에 거리끼든지 자기 욕심에 거리끼든지 자기 가정에 거리끼든지 자기 몸에 거리끼든지 자기 쾌락에 무슨 취미에 거리끼든지 그만 자기에게 거리끼면 그만 이 말씀대로 실행하다가 딱 중단해 버린다 말이오.
그러니까 중단하는 것은 그것을 이 말씀보다 더 낫게 여기기 때문에 중단하는 것인고로 그 사람은 자기를 이 말씀보다 더 생각하고 권위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가서 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들어서 이 말씀을 영접해서 믿고 바라보고 맡기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이 말씀으로 대우하는 것인데, 이 말씀을 대우하는 데 대해서 자기 때문에 대우 못 하면 그 사람은 자기보다 이 말씀을 천하게 여기고. 인정하지 안하고. 이 말씀을 더 사랑하지 안하고, 존중히 여기지 안하고, 높여 섬기지 안하고 이 말씀을 버려도 자기를 취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가서 일 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자기보다 이 말씀을 더 높이 대우하고 자기가 죽었으면 죽었고 절단나면 절단나고 감옥에 가면 갇히고 뭐 거지가 되면 거지가 되고 고생해야 되면 고생하고 병 들었으면 병들었지 이 말씀을 어길 수 없다, 이렇게 자기 보다 이 말씀을 권위 있게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가서 일할 수 있다 그거요.
그 다음에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떨기를 주님이 해석하기를 세상 염려와 재리의 염려로써 그랬다 했어. 세상 염려와 재리의 염려로써 그 사람이 그만 말씀을 받으나 그대로 계속하지를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마지막에 말하는 것은 이것은 물질, 모든 자기의 일어나는 사건 자기에게 당면된 사건, 자기에게 당면된 모든 경제. 물질보다 자기에게 닥친 모든 문제보다 이 말씀을 권위 있게 여겨서 어떤 문제가 와도 이 말씀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노하지는 못하고. 자기에게 경제면으로 어떤 무슨 일이 부딪친다 할지라도 이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조금도 요동치 않는 사람이면 이 사람은.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세상보다 권위있게 대우하는 사람이 말씀을 자기보다 권위 있게 대우하는 사람, 이 말씀을 세상 물질이나, 자기에게 봉착된 모든 난제보다도 더 권위 있게 대우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가 가지고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실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의 권위를 뭐 믿는 척 해도 조그만한 사건만 닥치면, 세상 염려가 그거 아닙니까? 조그만한 사건만 닥쳐도 이 말씀은 저버려 버립니다. 또 물질 관계만 좀 있어도 이 말씀 저 버려 버립니다. 이 말을 지키다가서 자기에게 무슨 자기 감정만 하나 찔러도. 자기의 위신만 하나 찔려도, 암만 좋다고 열심히 해도 자기를 알아 주지 안하면. 또 이래 또 그라면 아 위로 해 주고 알아 주고, 아, 날 좀 알아 주는가 보다 하면 새벽 기도 잘 나오고 이렇지만 그거 조금만 알지요. 모르는 게 아닙니다. '요 전화로 한번 했으면 이제 당장 계속할 거다' 하고 계속하라고 전화 안 해 줍니다. 안 해줘.
고걸 죽여야 되기 때문에. 고거 알기 때문에. 안하고 얼마 나가면 제가 스스로 반성해 가지고 '아. 내가 이래서 안 되겠다.' 이래 가지고 자기에게 거리끼면 이 말씀 저버려 버리고. 또 이 세상이라는 모든 세상 지식에게 거리끼면, 세상 지식이 인정하면 하고 인정 안하면 안 한다 그말이오. 이 세상 역사에게, 모든 인간들의 이 모든 경험과 체험 그런 것들에게 인간 통계에게 그걸 권위 있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여기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런 거에 거리끼면 그만 내 놓습니다.
그러기에. 세상보다 말씀을 더 대우하고 인정하는 사람. 자기보다 말씀을 더 인정하고 대우하는 사람, 물질보다 이 말씀을 더 대우하고 인정하는 사람, 자기에게 어떤 벼락, 산벼락 같은 일이 있어도 그 사건보다 이 말씀을 더 대우해서 그 사건에게 따라서 내가 피동되지 안하고 그 어떤 사건이 와도 이 말씀에게 따라서 피동되는 것이 요동치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성경이 믿음으로만 됩니다. 전능이기 때문에 무식해도 좋소. 무식해도 좋고, 또 병신이라도 줘습니다. 누운뱅이라도 좋습니다.
상관없어. 누운뱅이가 전인류 가운데에 제일 높은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을란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깜짝 놀랠 일이 있습니다. 왜? 이는 상상도 못했던 그 영원이 딱 결정되어 있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거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데에는 적이 몇입니까? 적이 셋입니다. 셋인 줄 알고 이 적이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케 할 때에 그때에 이 적을 죽여서 없애 버리고 이 말씀을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가서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