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3:47
바리새인과 세리
1986. 7. 30. 수밤
본문: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열심 있는 바리새인과 또 세리에 대한 것을 예수님이 비유를 해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 가장 정통 신앙을 가진 열심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 세리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기를 죄인이라 그렇게 다 인식하고 있는 그런 죄인입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에서 바리새 교인은 모든 계명을 잘 지켰고 또 십일조를 잘 냈고 또 금식도 하고 신앙 생활을 아주 대단히 구비하게 잘 했습니다. 이 세리는 두말 할 것 없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의인과 죄인 두 사람을 여게다 두고서 우리에게 비유로 교훈해 주신 그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간단하게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자타가 다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이요 세리는 자타가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인정을 하시고 기뻐하셨느냐? 의인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못쓸 사람이라고 이렇게 판정을 해서 보냈고 이 세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 이렇게 판단해서 보냈습니다.
모든 신앙 생활에나 인간 생활에 있어서 의로운 바리새인 그 사람은 오히려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희망 없는 사람으로 이렇게 판정해서 보내셨고 자타가 다 죄인으로 아는 그 세리는 아주 유망한 사람이라 이렇게 판정해서 보냈습니다.
여게 대해서 우리는 잘못하면 삐뚤어지게 깨닫기 쉽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깨닫는 대로 바리새인은 의인이요 열심 있는 사람인데 희망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돌려 보냈고 세리 이 죄인은 희망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돌려 보냈습니다. 이것이 아무래도 좀 이해하기가 좀 힘드는 일일 것입니다.
십일조 잘 드려, 금식도 자주 해, 또 십계명을 다 잘 지켜, 이랬는데 이 사람은 희망 없는 사람이라 해서 보냈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그 세리는 유망한 사람이라 그렇게 인정하고 보냈으니까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 궁금합니다.
오늘 저녁에 설교는 간단합니다. 그걸 기억하십시오.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토색도 안 하고 남에게 무슨 물질에 부정한 일 안 하고 불의도 행하지 안하고 간음도 하지 안하고 또 세리들과 같이 그렇게 그런 일도 하지 안하고 이렇게 깨끗하게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립니다.’ 이랬는데 이 사람에게 대해서 뭐이 잘못됐다고 주님이 그렇게 뭐 아주 책망하는 말 했습니까? 자, 토색 안 해, 토색 안 한다 말은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억울한 일을 하지 안한다 그말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하지 안한다.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또 불의를 행하지 안한다. 의롭지 안한 일 하지 안하고 언제든지 의롭게 한다. 또 남녀 이성면에 깨끗하게 지낸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안하다.
그렇게 자기 깨끗한 생활 한 것, 깨끗한 생활 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했으니까 하나님이 깨끗한 생활한 생활을 하게 해 준 줄 알기 때문에 감사했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 토색 안 했어, 불의 안 했어, 간음 안 했어, 또 세리들과 같지 안해, 또 감사했어, 또 일주간에 두 번씩 금식해, 또 십일조 드려 뭐, 이는 만고에 암만 봐도 의인입니다. 뭣 때문에 이걸 주님이 책망을 하시고, 뒤에 보니까 10절에, 「이 사람이 저보다」 이 사람이라 말은 세리를 말합니다.
「이 사람이 저보다」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거 도무지 그냥 자꾸 이래 얼풋 이해를 할라 하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아무도 자꾸 죄는 마음대로 짓고, 죄는 짓고 ‘아이고 죄 지어 나는 죄송합니다. 죄 지어 죄송합니다.’ 끙끙 울기나 하고 죄 짓고, 죄 짓고 울고 죄 짓고 울고 ‘잘못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 짓고 울고 죄 짓고 울고 또 죄 짓고 머리 숙이고 약꾸가 푹 죽어 가지고서 죄 지어 가지고서 그저 기가 턱 죽어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은 의롭다고 하시고, 또 일곱 가지가 참 온전한데, 인인 관계에 토색 안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또 불의 안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며, 남녀 이성간에 깨끗하게 지낸다는 게 얼마나 힘들며, 또 이 바리새인과 같이 않게 그렇게 깨끗하게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들며, 또 하나님에게 이 은혜를 감사하고, 또 금식하고, 십일조 드리고, 뭣 때문에 이 사람을 이걸 예수님은 밉상으로, 예수님께 밉상으로 보여 가지고서 「이보다」 이 바리새인보다 「저가」 세리가 ‘더 의롭다’ 그렇게 칭찬을 해 주시고 그렇게 했다 하는 것 이것 참 좀 알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9절에 보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다른 사람 무시하는 그거는 나쁘지요. 다른 사람 무시한 거는 나쁘지마는서도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무시하는 거야 나쁘지요. 나쁘고,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하는 그만치 행하니까 행한 것만치 의롭지 뭐 딴게 뭐 있어? 행한 것만치, 일곱 가지 했으니까 행한 것만치 의롭지 않소? 행한 것만치 의롭지 뭐 딴거 어데 뭐 무한히 의롭다 하는 거 아니고 행한 거 그걸 말하면서 요거 의롭다 한다 했는데 그거 뭐이 잘못 돼? 내가 아무래도 참 이거 참 이해 못 해요. 그렇지 안해요? 이 바리새인이 남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뭐 이렇게 한다고 여기 기록했지마는서도 그저 자기 의롭게 산 것 보고 나는 이렇게 의롭게 살아서 참 이거 감사합니다 하면서 일곱 가지 깨끗한 생활했어. 토색을 안 해, 불의를 안 해, 간음을 안 해, 세리와 같지 안해, 하나님에게 감사 생활했어, 일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했어, 또 십일조 착착 드려, 이거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서 도와 주셔서 그 생활한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안해요? 자기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의롭다 하게 하는 그것도 또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 감사했으니까 하나님이 의롭게 해 줬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지 그리 아니면 감사할 턱이 있는가? 암만 봐야 이거는 흠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왜 이 사람을 왜 밉상스레 봐 가지고 자꾸 그렇게 희망 없다 이래서 그만 그렇게 돌려 보내고, 세리는 남의 토색, 오만 죄, 거기 보니까 이 사람과 같지 않다 한 것 보니까, 거기 보니까 뭐 토색도 하고 불의도 행하고 간음도 하고 뭐 어짜고 이렇게 지금 뭐 하고 지낸 그 막살이 지낸 그 세리라 말이오. 그 사람이 옆에 증거하지 안했어요, 바리새 교인이? ‘이런 사람이라’ 이라니까, 이랬는데, 이 사람은 찍해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츰 죄를 지었으니까 부끄러울밖에는, 뭐. 죄인이로소이다 하고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숙이고 이래 가지고 지금 머리를 쿡 숙이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감히, 죄 짓고 나면 뭐 그 낯빤대기 들 수가 있습니까, 아무라도? 다른 사람 안 봐도 죄를 지으면 그만, 다른 사람이 안 본 사람 앞이야 죄 지어도 뭐 안 지은 척 하지마는서도 속에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건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그렇게 낯을, 낯짜구를 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으례히 그런 건데, 그런데 세리는 그렇게 칭찬을 하고 바리새인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불의하다고 그렇게 희망 없게 보시고 이란데 여게 대해서는 좀 이상한 감이 안 생깁니까? 여러분들 뭐 이해가 돼져요? 이해가 됩니까? 암만 봐야 거기 대해서 예수님이 그 세리편을 들고 바리새인을 미워하고 이래 불의하게 이래 보시고 이라는 것 보면 어째 생각하면 말이지 예수님도 당신 앞에 머리나 숙이고 자꾸 이렇게 자꾸 하면 좋아하시는가? 이거 왜 의롭게 한 사람을 이래 자꾸 미워할까? 왜 그럴까?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뭣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까 하는 그것이 오랫 동안 의문이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랫 동안 의문이 됐었어요. 됐었는데 이제 그럴 수 있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을 꼭 하나 깨달았어. 하나 깨달았기 때문에 그면에서 그러하다 하는 그걸 깨닫고 보니까 예수님의 그 비판과 평가가 옳다 해서 이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이 설교를 아마 수백 번 했을 겁니다.
수백 번 했는데, 여러분들도 되나 안 되나 그만 예수님이 미워했으니까 미워했다 그만 희망 없다고 생각해 희망 없다 이렇게 보고 누구든지 그만 죄는 마구 물 먹듯이 먹고 짓고 얼마든지 죄는 짓고, 죄는 마구잡이 짓고 부끄러워서 낯빤대기 들지 못하고 쿡 숙이고만 있으면 그만 그게 제일이로구만. 그게 제일입니까? 나는 밉상으로 보겠습니다.
죄를 안 지을라고 애쓰는 그게 예쁘지 죄는 마음대로 짓고 난 다음에 그만 죄 짓고 난 다음에 그만 쿡 숙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낯빤대기 들지 못하는 그게 더 밉상이야. 낯빤대기를 대갈빼기를 거머쥐고 뒤로 확 그거 재끼면서 ‘낯빤데기 들어 봐. 좀.’ 이라면 싶으지 그뭐 그렇게 칭찬하고 동정해 주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어.
없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비판 잘못하지는 안했을 것이고 바로 하기는 했을 터인데 뭣 때문에 이랬는고 하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공연히 예수님이 미워하고 하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그거야 양심의 가책한 일 없으면 자기 잘못된 일 없으면 드는 것 아닙니까? 공장장이 저 오는데 자기 할 일 딱 다 해 놨으면은 공장장이 올 때에, 그거야 공장장이 오니까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공장장 오거나 말거나 두려울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공장장이 와도 ‘오십니까?’ 뒤로 저뻥하이, 일 다 잘해 놨고 자기는 책임을 완전하게 했으니까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할 일 하나도 안 하고 저 바깥에 술 먹고 있다가 일은 하나도 안 해 놨지 공장장 오면은 그 으례히 고만 쥐구멍을 어째 이래 가지고서 그거 그만 와 가지고 ‘이거 뭐이야?’ 이러면 `아이구 그만 잘못했습니다.' 자꾸 이거 그만 대가리 숙일 것 아니라? 잘못하고 대가리 숙이는 그게 좋습니까, 잘해 놓고 난 다음에 이렇게 이래 지금 뻔뻔하게 있는 게 좋습니까? 자, 자기 할 일 다 착실히 다 잘하고 뻔뻔스레 있는 사람이 좋습니까 자기 할 일 하지도 안하고서 대갈빼기 숙이고 ‘헤, 나는 잘못했습니다.’ 이라는 게 좋습니까? 그저 자기 일 하나도 안 하고 자꾸 대가리 숙이고 잘못됐다고만 하고 쿡 숙이고 있는 그 사람 좋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아무라도 손 안 들 거라. 그 이상하지.
자기 할 일 다 해 놓고, 양심의 가책 될 거 없이 할 일 다 해 놓고 난 다음에는 뭐 그렇게 그럴 게 있어야지? 할 일 다 했으니까 마음에 이렇게 뻔뻔하게 있는, 할 일 다 해 놓고 뻔뻔하게 있는 그런 사람 그 사람이 괜찮다고 보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나도 괜찮다고 봐요. 여러분은 괜찮다고 안 봅니까? 그게 괜찮지.
회사서도 다 그럴 거라.
○○○집사님, 버스 회사에서 어때요? 그래 일일랑 다 안 해 놓고 어찌 됐든간에 장 자꾸 이래 숙이는 그라면 그 사람 좋아서 자꾸 월급 올려 주겠소 자기 할 일 딱 해 놓고 그래 뒤로 뻔뻔하게 남한테 머리 안 숙이고 뭐 뻔뻔하게 할 일 착착 다 하는 사람을 좋아하요? 어떤 사람 좋아합니까? 뻔뻔한 그 사람 좋아하지.
월급도 자꾸 오를 거 아니라? 이런데, 이거 왜 그런가? 이걸 좀 잘 알아야 되겠는데, 이것은 여게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세상에서 있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불택자들은 말할 게 없지마는서도 우리 믿는 사람들로 말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의 그 준비를 세상에서 하느라고 살고 있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준비를 하는데 표준이 어떠한가? 하늘나라 준비를 하는데 표준이 어떠한가? 하늘나라 준비는 행위 준비, 실력 준비, 또 하나님과의 관계 준비 이 세 가지입니다. 준비는 이 세 가지만 하면 돼요.
자기 행위를, 어떤 표준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그 온전을 표준으로 하고 우리는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 표준은 바울만치 하는 게 아니고 어떤 이 세상에 어떤 도덕가나 그런 사람만치 하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 우리 행위 표준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자체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체는 ‘주의 깨끗하심과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라’ 우리 자체에 대해서는 주님과 꼭 같은 이 성결자, 주님과 같은 이 성결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우리의 표준. 우리의 표준은 그것이오.
또,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하고 친멸한 이 친밀은 어느 정도 친밀이 우리의 표준인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어, 나는 하나님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이라니까 하나님과 나와 상호 내주하는 한덩어리입니다. 하나님하고 한덩어리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표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표준.
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데,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우리들이오.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우리들입니다. 천국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행위가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우리가 사는 데에 필요하고 또 우리 자체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체가 우리 자체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거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잘 준비할라고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준비를 하면은 어느 정도 준비할까? 다니엘만치 준비할까, 사도 바울만치 준비할까, 아브라함만치 준비할까, 우리 준비의 표준이 누굽니까? 준비의 표준이 뭐이요? 자, 행위 준비는 표준이 뭐입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 했으니까 이거 우리 표준입니다.
또 우리 자체는?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자체는 깨끗, 피조물이지마는 흠이 없는 깨끗.
또, ‘우리가 와서 너와 거처를 같이 하겠다’ ‘나는 너희 안에 너는 내 안에 또 아버지 안에' 이렇게 하나님과 상호 내주로서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하나님 있으니까 하나님하고 한덩어리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있지 하나님이 내 안에 있지 그러면 한덩어리 아닙니까, 한덩어리? 하나님과 한덩어리 된 이것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준비 표준이요.
이러니까, 이 표준이니 이 표준을 달성하는 데에는, 이 표준을 달성하는 데에는 그 방편 무슨 방편이 제일 좋겠습니까? 이 표준을 달성하는 데에는 어떤 방편이 제일 좋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좀 가르쳤는데, 제일 좋은 방편 말했는데 제일 좋은 방편이 몇 가지라고 말했습니까? 새벽에 나온 사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녜, 모두 이 두 가지를 가리켜. 이 두 가지, 이 두 가지.
우리가 하나님과 주님을 표준하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한덩어리가 되는 이것을 표준을 하는 데에는, 표준을 달성시켜서 표준 달성을 시키는 데에는 제일 좋은 방편이 두 가지라. 두 가지.
하나는 뭐이냐? 잘못된 것 깨닫는 거.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데 나는 이렇다’ 잘못된 것, 인제 과거로 현재까지에는 잘못된 것 깨닫는 것. 그러면 잘못된 것만 깨달으면 가룟유다에 속해. 잘못된 것. 잘못된 것 깨닫는 동시에 ‘요렇게 고치면 되겠구나’ 앞으로 고칠 것 깨닫는 것, ‘요렇게 고치면 되겠다’ 잘못된 것 깨닫고 요렇게 고치면 되겠다 하는 것 고거 깨달아서 그 두 가지, 잘못된 것 깨닫고 요렇게 고치면 되겠다 하는 그 고칠 것 깨닫고 그 두 가지 방편이 성도들이 천국 준비하는 데에 요것이 제일 올바른 준비의 길입니다.
준비의 길.
그랬는데, 바리새인은 지금 이 표준을 향하여 자꾸 달리고 있는데 잘된 것 그것만 보고 있으니 잘못된 걸 찾지 못했으니까 고칠 수가 없는 것, 또 잘된 게 아니라 ‘앞으로 요렇게 하면 잘되겠다’ 앞으로 잘할 것, 잘할 것을 발견 못 했지, 잘못된 것을 발견 못 했지, 그라니까 이 바리새인 신앙 생활이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 없습니다, 희망 없어.
없는데, 이 세리는 자기에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하, 요거 잘못됐다.’ 이러니까 하늘 우러러 보지를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가 자기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내가 요렇게 했더라면 좋은데 요렇게 하지 못하고 요렇게 했다. 요렇게 했더라면 좋은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리 했다.’ 자기의 잘못된 것 깨닫고 어떻게 했으면 잘되는 것인데, 잘하는 그거, 그렇게 하면 잘했을 건데 잘되는 그것을 발견하고 하지 못하고, 잘될 것, 잘하는 그것은 잘하는 그것을 발견은 하고 하지는 못했고 잘못된 그것은 잘못된 것 한 것을 발견하고, 그러면 잘못된 걸 발견했고 요렇게 하면 잘된다는 것 잘될 것 발견했고, 잘할 것 발견했고 잘못된 것 발견하고 요 둘을 발견했습니다.
발견해 가지고서 그만 그 일에 대해서 얼마나 느끼는가? 자기의 잘못된 점에 대한 느낀 것이나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잘하는, ‘요렇게 하면 잘되는데’ 하는 잘할 것을 발견한 것과 잘못한 것을 발견한 것과 그 두 가지 발견에 대해서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자기는 그 두 가지에 심히 애통하는 그 일이 세리에게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자, 그 사람이 자기 행위에 잘못된 것 그것을 발견하고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잘했어야 될 터인데, 요렇게 하면 잘했을 건데 자기가 하지 못한 그 잘하는 것, 하지 못한 잘할 것, 하지 못한 잘할 것 그것을 발견해 가지고서 마음에 고통스럽게 그렇게 여겼으니까 이미 잘못된 것 잘못된 점에 대해서 원통히 생각하지 자기가 앞으로 잘할 수 있는 그 일에 대해서 과거에는 하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기지, 잘하는 그것은 과거에 하지 못한 걸 원통히 여기지, 그라면 잘할 수 있는 잘하는 그것을 알기만 알고 하지 못한 걸 원통히 여기지 잘못된 것 원통히 여기지, 잘못된 것 원통히 여기고 자기가 하지 못하는 그 잘하는 것, 그것을 하지 못하는 그 점을 가지고서 원통히 여기고 고통스러이 여기고 하니까 요 사람은 바리새인과 정반대입니다.
자기의 그 잘못된 것 그것을 발견해서 잘못된 그것을 원통히 여기고 앞으로 또 요렇게 고쳐 요렇게 하면 되는데 한번 앞으로 바로 할 것 그것을 발견해 가지고서 고통히 여기고 요렇게 이 두 가지 고통을 가진 그 사람은 유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그말은 나는 삐뚤어진 자 중에 삐뚤어진 게 제일 많은 자이다 그말입니다. 삐뚤어진 자 중에 삐뚤어진 게 제일 많은 자이다. 그러면 바울이 삐뚤어진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삐뚤어진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눈이 밝아 그렇습니까? 녜, 눈이 밝아 그렇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표준은 이 세 가지를 지금 준비하는 것이 우리 준비인데 이 세 가지는 전부 완전이 표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할 수 있습니다.
온전할 수 없는데 온전하라 하면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 시켰으면 하나님이 무례한 하나님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온전하라 했으니 온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전하라 한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같이 자신을 깨끗이 하라 하니까 또 깨끗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깨끗이 하라 한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하라 하는 거 거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내 계명을 지켜서 노력을 하면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는 거와같이 그렇게 같이 거할 것이다. 또 우리가 와 가지고서 거처를 우리가 같이 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너, 넷이 거처를 같이 할 것이다. 또 너를 통해서 나를 나타내겠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 면으로 완전을 목표로 표준으로 삼고 날마다 건설하고 준비해 가는 사람이니까 날마다 고치고 또 건설하고, 준비해 가는 사람이니까 고치는 것도 고칠 것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고 고칠 것을 발견을 해도 어떻게 고칠 줄 모르면 또 소용 없습니다. 고칠 것 발견하고 어떻게 고치면 된다는 것 발견하고 이 두 가지만 발견하면 하면 돼.
또 자기에게 무엇이 모자라는 게 있는데 모자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 안 돼. 모자라는 게 뭐이 모자란다 하는 것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면 모자라는 것 이것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느냐 하는 걸 모르면 소용 없어요, 모자라는 것 암만 발견 해도. 보충할 수 있는 걸 알면, 모자라는 것 알고 보충할 수 있는 길 알면은 노력만 하면 보충할 수 있어.
이러니까, 우리가 하늘나라 가는 데에는 이 세리와 같이 요 두 가지가 우리 구원 이루는 데에 제일 중요합니다. 잘못된 것 깨달아 또 고칠 것 깨달아, 잘못된 것 깨닫고 어떻게 고치면 된다는 것 고칠 것 깨닫고, 잘못된 것 깨닫고 고칠 것 깨닫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 깨닫고 어떻게 충족 보충하면 된다는 것 보충 깨닫고, 부족 깨닫고 보충 깨닫고, 잘못된 것 깨닫고 고칠 것 깨닫고 요 두 가지가 주님이 유망하게 보시고 기뻐하시고, 의롭다 그말은 너는 유망하다 그말이 돼, 여기는. 세리, 세리를 너는 완전히 됐다 말이 아니고 너는 유망하다, 의롭다 말은 너는 유망하다 하는 걸 여게 말합니다.
여게 의롭다는 요 말씀은 유망하다, 너는 희망이 있다, 너는 된다 그말입니다.
그거야 암만 자랑을 해도 바리새인의 그 의와 세리의 의와는 그거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어림이나 있어? 암만 자랑을 해도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게 의롭다 하는 요 말씀은 유망을 말합니다. 희망이 있다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모든 일도 그러하지마는 우리는 그것은 다 풀과 같은 육체에 속한 것이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는 말씀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니라 말씀하신 거와같이 이 세상 것은 잘해도 잘못해도 그것은 잠깐이지마는 우리가 이 세 가지 준비는 이것은 참 잘해야 됩니다.
잘해야 되는데, 행위 온전, 자체 온전, 하나님과의 관계 온전 이 세 가지 온전만 이루면 우리의 구원은 다 완성이 되는 것인데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이 세리와 같이 자기의 삐뚤어진 것 발견하고 어떻게 고치면 된다는 것 발견하고, 그러면 둘 아닙니까? 또 자기에게 불구비한 것 모자라는 것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보충할 수 있다는 것 보충할 것 발견하고, 모자라는 것 발견하고 보충할 것 발견하고 요렇게 요 네 가지, 말하자면 두 가지 종류인데 요 네 가지. 요것이 주님이 유망하게 봤습니다. 희망 있게 봤습니다.
이 비유로 가르치는 것은 어데까지, 어데까지 준비를 해서 어데까지 성자가 되고 어데까지 성녀가 되고 어데까지 대부흥사가 되고 대목회자가 되고 대성공자가 돼도 요 세리가 가진 요 네 가지가 없으면 볼일 다 봤습니다. 그 사람은 땅위에 사는 것이 자꾸 자기의 화만 마련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오.
어데까지 위대한 사람이라도 요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부흥사로서 대설교를 아주 큰 설교를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요 네 가지 없으면 볼일 다 봤습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라도 요 네 가지, ‘아이구 요거 잘못됐다. 요거 설교 한 것 요거 잘못됐다.’ 인간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요거 잘못됐다.' 자기 해 놓은 설교에서 잘못된 것 고거 발견하고 ‘요렇게 고칠 걸. 요렇게 고치면 되는데.
요거 잘못됐다.’ 잘못된 것 발견하고 고칠 것 발견하고, ‘요렇게 고치면 되는데’ 그라니까 `내가 다음 시간 또 새로 설교해야 되겠다. 요거 잘못됐다.
요렇게 설교해야 되겠다.’ 잘못된 것 발견하고 고칠 것 발견하고 자기 설교한 데에 불충분한 것 결핍된 것 미비된 것 발견하고 고다음에는 ‘요라면 구비 되겠다.’ 구비할 것 발견하고, 요 네 가지가 우리에게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요것이 생명입니다. 요것이 있으면 자꾸 자라갑니다. 이것 있으면 자꾸 성장해 갑니다. 이게 있으면 자꾸 향상해 갑니다. 이거 있으면 자꾸 전진해 나갑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요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요 네 가지를 정말로 소유하고 요 네 가지를 거머쥐고 항상 요 네 가지가 저의 생활이 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뭐 자기 생활하는 것이 몇 종류의 생활, 이 세 가지뿐 아니고 몇 종류 생활하든지 요 네 가지를 가진 사람은 어떤 면에든지 그면에 네 가지를 가졌으면 그 사람은 그면에 점점 성장해서 일 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들이 놀랄 것이고 십 년 지나면 놀랄 것이고, 사람 참 이거 이상합니다. 사람은 순응성을 있도록 하나님이 그래 만들어 놨어.
이거 대번에, 연탄 가스를 처음에 안 맡은 사람 맡으면 그만 머리가 뜅해 못 견딥니다. 한참 몇 시간 맡고 나면 그만 거기 순응성이 있어서 모릅니다. 가스 내음이 나는지 안 나는지 모르요.
그렇게 자꾸 따라서 그대로 가도록 하나님이 지어 놨다 말이요. 요거는 뭐이냐 하면 하나님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렇게 만들 때에 순응성 있는, 특수 순응성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다 그거요.
이랬는데, 우리가 자기에게 어떤 면에서든지 요 네 가지가, 요거 없으면 나는 거게서부터 고만 송장이라. 거게서부터 송장이라. 요 네 가지가 없으면 그 시간부터 썩습니다, 알겠습니까? 요 네 가지가 없으면 그 시간부터 생명이 떠났습니다. 요 네 가지가 없으면 고만 썩습니다. 요 네 가지가 없이 하루 살았으면 하루는 썩었고, 요 네 가지가 없이 한 달 살았으면 한 달 썩었고, 요 네 가지가 없이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썩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회개보다 더 기쁜 것 없습니다. 회개는 뭐이 회개인가? 회개는 잘못된 것 발견하고 요렇게 고치면 된다 고거 발견하고, 잘못된 것 발견하고 요러면 고치면 된다 하는 고거 발견하고 요 두 가지 발견하고, 그러면 이 두 가지 속에 네 가지가 다 들었습니다.
모자라는 것 발견하고 요라면 보충할 것 발견하고 요 두 가지를 발견하는 그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요 두 가지나 네 가지나 한가지 말이요. 두 가지 속에 두 가지가 또 다 들어갈 수가 있어.
자, 요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앞으로 희망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장이 났습니까? 예? 끝장 났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앞으로 조그마치라도 성장이나 전진이나 향상이나 조금이라도 오늘 현재보다 조그매라도 나을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진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는 게 희망입니다. 그 사람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 없어.
요거 여러분들, 오늘 밤에 예사롭게 생각할 게 아니고 네 가지가 없으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네 가지가 없이 한 시간 네 가지가 없었으면 그 사람은 한 시간은 저는 썩었습니다. 멀거니 살고 있기는 있지만 썩었습니다. 일생을 네 가지 없이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날마다 썩는 대로 썩고 썩는 대로 썩지, 그러고, 늙은이 신앙이라 하는 그 신앙, 젊은이 신앙 늙은이 신앙 하는데, 늙은이 신앙 제일 못쓰는 신앙이라는 것은 늙은이는 아무 발전이 없고 과거에 젊을 때, 젊을 때 한 것 그거 자랑합니다, 젊을 때. 옛날 것 자랑하는 것이오. 젊은 사람은 현상 유지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 종은 순종하니까 하나님 시키는 데로 하니까 자꾸 발전이 있지. 아이는 발전이 있지, 자, 늙은이 신앙, 젊은이 신앙, 종의 신앙, 아이 신앙, 그런데 늙은이 신앙은 이 네 가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젊은이 신앙은 이 네 가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인제 네 가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젊은이 신앙. 젊은이 신앙은 이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젊은이 신앙.
아이 신앙에는 이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아이 신앙은 자꾸 자라가지 안해요? 그러니까 이 네 가지가 있는 것은 아이 신앙입니다. 또, 종은 주인 시키는 대로 자꾸 하니까 그건 자꾸 발전 돼 나가.
그것도 종의 신앙과 아이의 신앙은 전부 예언했어. 예언했어. 젊은이 신앙과 늙은이 신앙은 아무 희망이 없어.
이러니까, 이 말씀을 예사로 듣지 말고 요걸 기억해서, 아주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이걸 예사로 여러분들이 가치를 여기면 안 돼. 아주 정금으로 비할 수 없는 아주 우주 같은 보배로운 말씀을 주셨어. 이걸 알아야 돼요.
그저 공연히 뭐 바리새인 세리 별별 말로 설교가 꽉 찼지마는서도, 꽉 찼지마는 다 아니야. 요거라, 네 가지. 네 가지 요거 보고 주님은 세리를 희망 있는 사람으로 봤고 바리새인은 다 끝장났어. 희망이 없는 자라. 거게 의라는 것은 희망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감정이 돋아지구로, 감정이 돋아지구로 이제, 뭘 알아야 되니까 알고 난 다음에는 이제 감정이 일어나구로 설교할 때에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네 가지 하나를 말하면서 이런 무슨 있는데 이걸 아느냐, 또 이거 고칠 마음이 있느냐 그런 걸 이래 강조하면 되지마는 강조할 것 없이 여러분들에게 지금, 알았으니까.
알고, 강조는 여게서 내가 강조할 게 아니고, 알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 그리 안 하면 밤에든지 기도하면서 고요히 네 가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과거에 과거에 이래 가지고 네 가지를 생각할 때에 참 이 세리와 같은 그 심정으로 이 네 가지 대해 원통스러운 그 마음이 새김질하면 나올 것이요. 나오면, 나오면 고게서, 있다가도, 자기 혼자 있다가도 속에 불이 나고, 불이 나고 강한 힘이 솟아납니다.
그 힘이 환난도 이기고 다 이깁니다. 모든 것 다 승리 다 하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 네 가지 없으면 죽습니다. 네 가지 없는 그 시간은 썩었어. 네 가지가 있는 그 시간은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