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1 01:02
바울의 두 가지 행동
1986. 8. 16. 새벽(토)
본문:사도행전 27장 20절∼26절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지난밤에 공과를 가지고 말씀을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피조물을 상대하고 피조물을 궁구하고 접하므로 자기의 소욕을 이루고 성공을 할려고 그렇게 합니다.
왜? 세상에 있는 모든 말들이 인간들의 경험이요, 경험을 모아 놓은 것이요, 체험을 모아 놓은 것이요, 인간들의 주장을 다 모아 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거게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은 압니다. 그것은 보이는 모든 순서에서부터, 보이는 순서에서부터 나온 것은 다 그런 데서 나왔고 그것이 원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은 보이는 그런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데에서 나왔고 보이는 것들은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많은 통계를 보고 자기도 세상 인간 경험 체험을 그것을 많이 공부해 가지고 이런 저런 종류들이 있으니까 나는 이럴 때는 이래 하고 저럴 때는 저래 하자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많은 행사들을 다 열람하고 관찰하고 심사하고 자기의 생애에 참고로 이렇게 삼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보이는 그런 것들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지 못하고 원인에서부터 나온 것들인데 거게는 나와 가지고 그것이 다 파괴되어서 없어지는 것들이고, 또 보이는 것들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 거게서부터 나온 그런 것은 다 결국은 파괴되고 사망되고, 보이지 않는 데서 나온 그것이 다 생명으로 발휘하게 됩니다.
이래서, 지난밤에 말한 거와 같이 기독자들은 자기가 원치 않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어디서 나오며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 다 어데서 나오는가? 그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거기에서 모든 좋은 것도, 소원하는 모든 좋은 것도 나오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모든 멸망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모르는 뭣을 말하는가? 그것은 곧 지난밤에 열한 가지로서 말했는데 보이지 않는 영원 자존하신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그분에게 모든 원인이 있습니다. 그분이 원인인 것을 깨닫고 그분 그 원인에서 거게서 찾으면 되는데 그분을 원인 삼지 안하는 데서 멸하고, 또 그분의 모든 그 목적이 둘째로 있었으니까 그 목적을 찾아서 그 목적에 응하면 그 목적이라면 그것이 참되고 그거 위해서 모든 예정이 있고 모든 창조가 있으니까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그 원인 그것을 찾아 가지고 거게 맞추어서 살려고 하는 데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차지할 수 있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들을 다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 이런 거는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인가 하는 것을 찾아 가지고 거게서 맞출라고 애를 쓰는 사람이 그 사람이 영의 사람이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한 것을 다 차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이지 그저 보이는 이런 것들만 가지고 거게서부터 근원을 삼는 사람은 외식자요 그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보면 보이지 않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보이는 걸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보다 보이는 것들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보면 참 너무 가련한 것이 보이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그분의 하나의 뿌스러기에 억억억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그걸 의지해 가지고, 보면 돈 몇 천만 원이 앞에 얼렁거리면 그만 환장을 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변질이 돼 버려. 정신을 잊어 버립니다. 또 그런 것이 또 그것이 만일 돈이 얼마가 없어지면 그만 죽습니다.
그거는 분명히 유물주의자요 그거는 육체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자기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을 단단히 가지고 글에 써 놓고 ‘나는 과거에 대해서 요렇다, 현재에 대해 내가 요렇게 보고 있다, 미래에 대해 요렇게 보고 있다.’ 하면은 그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도 현재되고, 현재가 또 과거됩니다.
이러니까 잠깐만 겪어 보면 자기가 깨달을 수가 있는데 도무지 그거는 깨닫지 안하고 마구잡이로 제 생각 나는 대로 합니다. 제 생각 제 맘대로 합니다.
그래 가지고 육체의 불량지기는 거 그거 가지고 무슨 힘을 낼 줄 알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자들은 우리 진영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거는 하나님 앞에 아무 필요가 없는 인간입니다. 제 주관대로 하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 말고 언제든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상대해서 ‘내가 이 말하고 이 행동하고 이 뜻을 가지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 그분에 대해서 어찌 되느냐, 그분의 경영에 어찌 되느냐, 그분의 그 역사에 어찌 되느냐?’ 그분이 이런 풀 한포기에도 여기에 수천 수만의 세포로 만들어 놓은 그렇게 세밀하신 분인데, 인간들이 말하기를 한 사람의 머리에 컴퓨터를 천억을 만들어 넣어 놨다 이라는데 천억인지 뭐 몇천억인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런 세밀하신 분이 모든 걸 모를 것인가? 또, 그분이 주권하고 계시는데 그분이 뭐 물샐틈 있도록 불량자나 악한 자가 되면 그만 거게 제재를 받아 가지고 꼼짝 못 하고 그럴 것인가? 그분의 뜻은 털끝만치도 변하지 안하고 그대로 이루어져 갑니다. 이런데 그분을 항거하고 그분을 대항하고 그분에게 배치해서 배치되는 일을 해 가지고 제까짓 게 어떻게 설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도야지가 지금 흥정하러 와 가지고 사료 주니까 좋다고 터불터불 먹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와같이 도무지 보이는 이 이면 세계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게 큰 소리하고 그게 망령 부리고 패역하고 악독하고 하는 것이지 그 이면을 본다면 제가 참 기쁨을 슬픔을 해야 되겠고, 웃음을 울음을 가져야 되겠고, 또 저의 모든 담력을 비겁을 가져야 되겠고, 저의 배짱을 아주 굴해서 겸손한 사람이 돼야 될 터인데, 야고보 4장에 말씀하신 거와같이 이래야 될 터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에 자꾸 그 눈을 띄워 줘야 됩니다. 눈을 띄워, 그게 모르기 때문에 눈을 띄워서 눈이 떠지도록, 보지 못하는 그 은밀 세계, 모든 보이는 것들의 원인이 되는 그 모든 존재들 이것을 자꾸 보여 줘서 그 눈을 띄우면 그가 눈이 뜨는데 따라서 그가 자라가고, 그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어리석음이 다 회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눈을 띄워 주는 그것은 뭘로 띄워 줄 것인가? 띄워 주는 것은 우리는 지도와, 지도. 지도하는 지도와, 또 봉사와, 또 예언 이런 걸 가지고 그런 사람들의 눈을 띄워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도도 그가 지금 영감 대로의 지도를 하면 그 지도는 자기 주관과 정반대입니다. 자기 주관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지도하는 말 안 듣습니다. 네가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리 된다 하는 것을 올바른 지도를 하면 그 사람의 자기 주관에 정반대요. 정반대이기 때문에 안 듣습니다.
안 들으나 그것이 반드시 미래로 뒀기 때문에 그가 부인하고 안 듣지 그것이 차차 차차 현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현재로 다가오게 되면은 제가 현재에 닥치니까 알게 될 것이고, 현재 가도 또 눈이 어두운 사람은 모르나 그 일이 지나가 버리고 나면은 그 사람이 그것을 불 줄 압니다.
그러면 ‘네가 그 아무 때에 미래로 네가 생각한 그 생각과 내가 너에게 말한 것과 그것이 지금 세월이 지내서 현재가 되지 안했느냐? 현재가 됐으니까 네가 그때 본 그 사실과 내가 너에게 말해 준 그 사실이 같으냐 다르냐, 너는 그때 이렇게 말하지 안했느냐, 나는 그때 이렇게 말하지 안했느냐, 지금은 어찌 됐느냐?’ 현재를 닥쳤으니까 ‘아직도 이럴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면 더 기다려라' 또 그것이 지나가 버려 과거가 됩니다. ‘과거가 됐으니까 이제는 다 결정나지 안했느냐? 그러면 네가 그때에 모든 관찰 계획과 내가 너희에게 지도와 계획이 지금 이제 다 지나가 버려서 과거가 됐으니까 어떠하냐?’ 그것을 그이에게 말해 줌으로 그 사람의 눈이 띄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중에 제일 못쓰고 이거 아무짝도 못쓰고 참 고치기 힘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미래는 미래로 끊어버려 던져 버리고, 또 현재는 현재로 끊어버리고, 과거는 과거로 끊어버려서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 요 셋을 한 데에 뭉치는 일을 하지 안하고 항상 이 셋을 떼어 놓는 사람 그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참 살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안할라면, 자신이 자신을 망치지 안할라면 자기의 주관에 나오는 자기 현실 주관, 현실 주관 그대로 사람이 안 할 수 없으나 현실 주관을 제가 썼으면 현실 주관 쓴 것을 그것을 종이다가 글로 써 놓지 안해도 그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나는 요 현실에는 요렇게 생각했다. 요렇게 생각했는데 보자, 이놈을 두고 보자. 요 현실이 어찌 됐느냐?’ 좀 있으니까 현실이 과거가 돼 버리고 맙니다. 과거가 되고 나면은 틀리고 옳은 것을 그때는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도 현실이 되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더군다나 더 지나가 버렸으면, 과거가 되면 더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거게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안하고 그것을 과거는 과거대로 던져 버리고, 현재는 현재대로 가지고, 미래는 미래대로 끊어 버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똘똘 뭉쳐서 하나로 뭉쳐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하지 안하는 이런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살리는 거는 그렇습니다. ‘보라, 너는 현재 지금,’ 현재사는 벌써 지나가기 때문에 소용없어. ‘미래를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네가 앞으로 이리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라.’ 바른 지도를 이래 했을 때에 그 사람이 반드시 듣지 안합니다.
왜? 자기는 보이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 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은밀한 것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감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사람을 지도하고 그게 안 되면 나타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보이는 것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영감은 으례히 없고 성경은 부인하고 인간들이 살고 나머지기 남아 있는 이 세상 지식, 모든 역사의 것, 모든 역사적인 통계의 것들 이런 거 가지고 근원을 삼아 가지고 나가니까 그 의사가 맞지 안한다 그말이오. 의사가 하나는 하나님의 인도요 하나는 마귀의 인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맞을 리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보자, 너는 그라면 네가 지금 현재 당면한 데에 너는 이렇게 할라 하고 또 나는 이렇게 하라 하고, 그러면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라 두 가지로 말하는데 네 지금 소원과 주장과 계획과 내가 말하는 그 계획과 주장 그것이 정반대되지 않느냐?’ 반대되면 그것을 꼭 잡아 놔요.
반대되면 ‘기록하자. 너는 현재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요것을 글로 써 놓고 네 도장을 찍어라. 내 도장도 찍고 이래 놓고 앞으로 기다려 보자.’ 기다려 보면 제가 하는 그 주장이 망하고 절단이 났을 때에 그때에 그것을 내놓으면 그 사람이 ‘너는 과연 이렇지 않느냐?’ 거짓말 합니다. ‘내가 언제?’ `네가 도장 찍고 여기 쓰고 도장 찍지 안했느냐?' 딱 그라면 제가 도장 찍었는데 어짤 것입니까? 이렇게 하지 안하면은 그 사람을 살릴 수가 없어.
그저 임시치기로, 뭐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거짓말 이것이 중요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했습니다. 거짓말 하지 안 하고 거짓말 회개해야 자기가 말한 데 대해서 책임을 져 봐야 그 어려운 걸 알 수가 있고 또 그 성공과 실패를 알 수가 있지, 그만 거짓말 하는 사람은 형편 되는 대로 이래 둘러 붙여서 맞춰 버리면 그것이 다 된 줄 알고 그 실상과 자기 말과 자기 행동과 이루어지는 모든 성사의 실상과를 이것을 결합시키지 안하면 그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망한다는 걸 예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망한다는 말을 다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말하지 안하지마는 ‘네가 요런 행동은 망한다’ 그런 것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 전부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실상과, 실상과 자기의 생각과, 이 실상과 자기의 감정과, 이 실상과 자기의 행동, 하나님과 자기와의 이 실상을 상대하지 안하고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두고서 말이면 다인 줄 알고 이렇게 말로만 생각하고 또 말은 얼마든지 변동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이 뭐이냐? 죽고 또 죽고 뿌리까지 뽑혀서 열매 없는 가을 나무입니다, 이거.
살아날라 하면 얼마나 살아나야 될런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24절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것은 바울에게 안심을 주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가이사 앞에 그 앞에 가서 지금 판단 받겠다고 송사했기 때문에 그때에 가이사 앞에 지금 그 법관들이 끌고서 백부장이 지켜 가지고 가는 걸음입니다. “앞에 서야 하겠고” 하는 이거는 네가 이 지중해에서 죽지 안하고 이 지중해를 건너서 무사이 가이사 앞에 가 가지고 네가 지금 진정하는 그 진정의 판단을 받게 되리라 하는 그 바울에게 안심을 주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면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배 안에 있는 사람이 이백칠십육 인인데 이백칠십육 인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 네게 다 주었다” 네게 주었다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네게 주었다 말은 바울 네 사람 만들었다 그말입니다. 바울 네 사람 만들었다 그말은 바울 네가 이백칠십육 인을 다 구원해서 이제는 그리스도인을 다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네게 주었다, 네 사람이 됐다, 네가 다 구원했다.’ 하는 그것을 여게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네게 주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얻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 이 사람은 네게 줬다.’ 그러면 예를 든다고 하면은 그 사람이 목회를 하는데 목회에 교인이 몇 사람 안 됐습니다. 몇 사람 안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사람이 몇 사람 안 된 것이고, 많으면 많은 사람을 준 것이고, 모두 다 교계에서는 지금 ○○○○○교회를 훼방하고 있지마는 내가 이번에 가서 오십만 명이라 했더니마는 거기 있는 교인들이 말하기를 ‘오십오만 명입니다’ 이라는데 오만 명이 그 동안에 또 더 불었더래요. 그 내가 와서 테이프 들어보니까 한 달에 만 명 씩이 붇는답니다, 한 달에 만 명씩이 불어. 그러고 내가 이십억을 말한 그것은 테이프에 녹음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들어서 말한 대로 그대로입니다. 그 사람이 아마 몰랐거나 그런 거라.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에게 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그의 사람이 되고 그의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 하나님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 바울에게 주셨는가? 바울은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어떻게 해서 시일이 열나흘밖에 안 걸렸는데 열나흘 동안에 생전 만나지도 못했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요 모르는 사람들인데 모르는 사람 이백칠십육 인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고 자기는 자기의 사람을 만들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여게서 방편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있는데, 그것은 단지 행동으로 말하면, 그 행동으로 말하면 두 가지 행동뿐이었습니다, 두 가지 행동. 행동인데, 하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에게 받은 영감 인도를 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영감 인도를. 그 사람들을 대할 때에 아무나따나 말하지 안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는 대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거는 뭐이냐? ‘그레데 해안에 있는 미항이라는 그 항구에서 떠나지 말고 여게서 과동을 하자. 너희들이 여게를 떠나면은 가다가 큰 풍랑 만나 가지고 물건도 다 손해볼 것이고, 배도 다 손해볼 것이고, 너희들의 생명도 다 손해를 보게 될 터이니까 너희들이 이 미항이라는 이 항구에서 월동을 하도록 하자.’ 거게는 얼음이 얼면 가지 못해, 겨울에 못가니까 겨울이면 월동을 해야, 해동이 돼야 배가 떠나는 것입니다.
‘하자’ 이라니까 그때에 바울의 지도를 다 반대했습니다. 거게 있는 경험 많고 체험 많은, 수십 년 경험했고 수십 년 체험했고 그것으로서 항상 전공을 삼고 있는 배 주인 선주와 사공은ㅡ사공은 배를 부리는 기술자요 선주는 배 주인인데ㅡ선주와 사공들은 ‘그렇지 않다. 여게서 떠나 가지고 우리가 그 월동하기 좋은 그곳으로 가 가지고 월동을 하자.’ 하고 이 바울은 ‘여게서 월동해야 된다’ 이라니까 지도가 정 반대됐습니다.
반대되니까 그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조롱을 하면서 ‘뭐, 네가 뭘 안다고 자꾸 하고 있느냐? 여게 모든 경험 체험 많은 선주와 사공들이 있는데 그러냐?’고 아주 바울의 말을 멸시를 하고서 출항했습니다. 그 출항을 하니까 바람이 순풍이 불어 가지고 아주 목적하는 곳에 잘 갑니다. 순풍이 부니까 목적하는 곳에 그 배가 잘 가는데, 그러니까 바울은 납짝 눌려졌습니다. ‘너 말하더니만 낭파커녕 배만 잘 간다’ 이랬는데, 그 바다 한 가운데 가 가지고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 바다 한 가운데에 유라굴로라는 그런, 폭풍 이름이 그때는 유라굴로라 하는 그 폭풍인데 그 대풍이 일어나 가지고 그만 모든 사람들이 견디지를 못해서 물건을 다 바다에 저거 손으로 다 던졌고, 기계도 다 뽑아서 던져 버렸고, 또 배가 갈라지려 하니까 있는 밧줄로 가지고 배를 동여 맸고, 살 기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제 그러니까 그때에, 그 모든 사람들이 지금 놀래서 살 기망이 없이 됐을 때에 바울이 거게 나서 가지고 또 말했습니다. 그때에 한번 자기 지도한 것이 모든 사람이 부인했고, 또 부인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이 닥쳐졌고, 이러니까 바울이 그만 ‘아이고,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알려 주신 그 예언 영감, 예비 영감으로 주님이 나에게 주신 그 영감이 틀렸구나?’ 하고서 하나님 믿는 것이 요동됐거나, 또 예언한 데 대해서 신앙이 흔들렸거나 하면은 저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예비적으로 알려 주신 예비 영감은 이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대로 믿고 있고 지금 순풍이 오니까 바울은 의심하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안하고 그들은 좋다고 조롱했고 했지마는 바울은 지금 그때부터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 요런 거 다 어려운 말인데. 현재에 사공들과 선주들이 말한 말과 또 모든 그 선객들이 말하는 그 여론과 바울을 지금 보호해 가지고 있는 그 군인들의 모든 말과 이 셋과 현재에 닥쳐 있는 그 현실 순풍이 닥친 것과 요 넷이 딱 들어맞습니다. 요 넷은 한 덩어리입니다.
요 넷이 딱 들어맞고 그 바울이 받은 예비적 영감으로 그들에게 인도한 이것은 완전히 정반대로 틀려 닥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예고해서 말해 준 그 예언한 말과 하나님의 역사와는 완전히 거기서 매장을 당하고, 이 둘은 모든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고 이 넷은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득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예언하신 그 예언,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하나님의 예언하신 예언을 믿는 그 믿음이 그것이 없어지고 이 넷을 따라서 왔다고 하면은 바울은 그때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때에 낙망한 사람이 되겠고, 의심한 사람이 되겠고, 그때에 그들에게 다 압도된 사람이 되겠고, 그들에게 완전히 억압을 당하는 그런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됐는데, 바울은 이 넷이 아무리 현재 합작돼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신 그 말씀은, 지도는 틀림이 없는 이 사실을 믿는 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됐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이 이래 가지고 멸시하는 그 멸시에 대해서 대항하는 것보다도 이 사람들이 지금 알지 못해서 미련한 마음을 가지고 미항에서 떠났는데 이들이 다 바다에서 다 매장되고 몰살을 할 터인데 주님 이것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때부터 지금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에게 간구를 하고 있으니까 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울이 볼 때에 ‘저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의 말이 옳다.’ 우러러 높여 보는 걸로 이래, 높여 보는 게 아니고 바울이 볼 때 이거 전부 시체로 봅니다. 이 전부 시체로 보입니다. 바울이 볼 때에는 전부 시체로 보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한 것만이 지금 권위로 인정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려서 하나님에게 이 사람들을 위해서 살려 달라고 간구하는 이런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현실을 닥쳐서 견해한 것과, 또 사상한 것과, 그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과, 그가 또 간구하고 있는 것이 도무지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런 세계에서 하나님하고 하나님의 말씀하고만 절대성을 믿기 때문에 여게만 맞춰 가지고 바울은 역사하고 있고 이 사람들은 이 보이는 이 나타난 네 가지, 선주들과 모든 그 사공, 또 선객들과 그 모든 순풍과 모든 군인들 이 전부 이것들을 보고서 그들은 전 사상이 여게 끌려서 이와 같이 됐고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예언에 속해서, 여게는 삼각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 바울 여게는 이 삼각이 똘똘 뭉쳐서 하나 됐고, 여게서는 넷이 똘똘 뭉쳐 가지고 하나되고 됐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나갈 때에 그 어떤 사람은 이 넷을 인정하고 믿어서 넷에 속해 가지고 하나된 요런 사람도 있고, 또 전적 이 넷은 반대하고 부인했는데, ‘봐라, 봐라.’ 부인됐는데, 부인되는 그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 셋이 삼각이 하나돼 가지고 이래 가지고 지금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인제 이것이 차차 차차 미래가 현재로 다가옵니다. 다가왔을 때에 그 대풍이 일어나 가지고 그들이 살 기망이 없을 만치 다 모든 거 다 버리고 지금 죽을 지경이 됐을 때에 비로소 바울이 이제까지 바울이 관계 가진 이 삼각은 이제 이것이 차차 차차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됐고 저들이 지금 주장하고 있던 그 세력은 차차 차차 까무러져서 완전히 배와 배에 있는 곡식과 모든 그 기계와 모든 것을 다 바다에 집어 던지고 그 줄로 가지고 배를 둥기고 할 그럴 때는 벌써 이 넷은 바다 속에 완전히 매몰돼 버려서 완전히 전멸이 됐습니다.
전멸이 되고 이 셋은 지금 살아서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 바울은 이 셋이 삼각이 하나 돼 가지고 이 사람들이 지금 배 안에서 죽을 지경이 되는 그걸 그들은 모르고 미련을 부렸지마는 그이들이 지금 득세했다고 할 그때에 득세한 걸 득세한 것으로 보지 안하고 득세한 것을 그 죽음 속에 깊이 파고 자꾸 들어간 것, 그 자꾸 배가 지금 바다 지중해 가운데로, 지중해 한 가운데 자꾸 이래 들어가니까 죽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 참 시체로 봤기 때문에 시체로 상대하고 행동했고 거게 있는 사람들은 그 득세한 것으로 이래 보고 행동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목회하는 것도,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이 삼각에 속해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 있고, 넷에 속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 있고, 목회자가 이 삼각으로 했다가 이 넷은 득세했으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집어 던져 버리고 이 넷에 속해 가지고 목회하는 이런 외식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보이는 거 위주로 하요. 뭐 교인이 조금 많이 오는 상바르면 그만 배짱 나오고 안 나오면 그러하고, 또 무슨 일이 순풍에 돛단 것같이 일이 잘 되면 돼지고, 일이 잘 되나 그 잘된 일에 그 결과가 어찌 되느냐? 자꾸 보이는 데에서 보이지 않는 미래가 어찌 되느냐? 미래는 하나님만이 알지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적 영감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미래를 가르쳐 주는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여야 될 터인데 거게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항상 나타난 그 현실에는 보이는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외식이요 그 멸망을 멸망으로 모르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지도할 때에 그 지도가 인정되지 안했으나 예언적인 지도를 했습니다. 예언적인 지도를 하니까 그다음에 어떤 그 과정을 경과했느냐? 바울이 예언적인 교훈과 지도를 하고 난 다음에 한 예언과 지도를 자기가 후회할 만한, 후회를 할 만한, 낙망을 할 만한, 그들에게 바짝 눌려서 조롱을 받을 만한 이런 과정을 통과했지마는 바울이 거게서 요동치 안했습니다.
요동치 안하고 저거 지금 저거가 죽을라고 자살하는 저 발동치는 것으로 봤지 ‘아, 저들이 옳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하지 안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도록 현실이 돼지니까 이 현실을 보고 현실에 따라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여게 따라서 속해지는 그런 자가 되지 안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 지도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여기에서 자기는 여기를 확신하니까 이 사람들은 자살하는 행위되고 여게 따라가면은, 여게 따라가면 이 삼각은 바보같은 벌소리 한 미치괭이 말한 것으로 되어지고 이렇게 양극이 됐을 때에 바울이 요동치를 안했습니다.
바울이 요동치를 안하고, 이 바로 요동치 안하고 이 사람들을 자살하는 사람으로 가련하게 본 것은 뭐이냐 하면 하나님을 의심치 안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심치 않는 그 확신에서 생겨졌습니다. 이 확신을 버리면 이 사람도 이 사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하신 이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내가 믿는 것과 하나님은 완전자이신 것을 내가 믿는 거게서 우리 지혜도, 능력도, 올바른 지혜도, 올바른 능력도, 올바른 담력도, 올바른 주장도, 올바른 걸음도, 올바른 성공도 우리가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거게서 자기의 공작은 뭐 보고 했느냐? 공작은 이 사람들이 자살하고 지금 자살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자기네들이 알지 못해서 저 죽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날뛰고 있는 것이니까 그들을 갋지 말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꾸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이 부르짖음을 하니까 이 바울이 그들에게 저자세 되지를 안하고 낙망하지 안하고 이 믿음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말이오.
기도했는데, 열나흘이 지나갔어. 열나흘이 지나가니까 바울은 그때에 만일 여게 따라갔으면, 여게 따라갔으면 꼼짝을 못 할 터인데 열나흘 될 때에 그때에 바울이 일어서 가지고 말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들에게 그레데 해안에서 거게서 과동하자 할 때에 떠나지 안하고 거게서 과동을 했더라면 물건도 손해 안 보고, 배도 손해보지 안하고, 생명도 이렇게 고생도 안 하고 위태하지 안할 터인데 듣지 안해 그렇지 안하냐?’ 이라니까 그들이 그때는 달라졌습니다. 달라져서 배에 사람들이 ‘그래, 그렇다.’ 이렇게 말을 하고도 말은 했습니다. 말은 하고, ‘참 저 사람 그 말하는 것이 그때 안 떠났으면 좋을 뻔했다.’ 다소 긍정이 갔다 그말이오.
긍정이 갔는데, 말하기를 ‘지난밤에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너에게 줬다, 너에게 주었다, 다 네게 주었다.’ 아마 그 말할 때는 바울이 굉장한 용기를 가지고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힘있게 ‘배 안에 있는 이백칠십육 명을 다 내게 주었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전능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요대로 될 줄을 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안심하라. 생명은 하나도 위험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런 말을 하면서 그 모두 다 떡을 떼서 주고 이렇게 하면서 이제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 기도하자 하니까 그들이 다 한목 기도하고 벌써 사람 다 됐어.
기도하고, 또 떼어 주면서 이래 먹이고 이라니까 모두 바울의 말을 안심하고 먹고 이라니까 그 광경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은 바울이 의심이나 낙심하지 안하고 절대 신앙을 가지고 영감을 가지고 한 그 일이 암흑에 그런 순서를 거쳤으나 그 암흑에서 요동치 안한 그 신앙 행위는 얼마 안 가서 그들에게 그만 어린아이,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와 같이 됐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임하고 바울에게 다 순종하는 어머니와 같은 그런 신임 얻었습니다.
그런 데에는 미래적 영감으로 예언해서 그들을 바로 지도하고, 지도하고 난 다음에 그 지도를 의심치 안하고 꾸준히 믿고, 그 지도를 어기고 가는 그 사람의 비참하고 가련한 자살 행위를 마음에 안타까와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봉사, 그거는 기도하는 건 봉사 아닙니까? 기도하는 봉사를 했고, 또 그들의 생명을 염려를 했고, 또 그들을 그런 다 같은 풍랑 속에서 견디지 못할 터인데 거게서 그들에게 공궤할 수 있는 그 식물을 예비를 했고, 이렇게 기도와 봉사, 기도와 봉사, 이 지도, 기도, 봉사, 이러면 이 기도도 봉사인데, 지도와 봉사, 봉사는 어떤 봉사했느냐? 기도의 봉사를 했고, 또 그들에게 음식물로 돕는 봉사를 했고, 그들에게 마음에 안심과 위로를 주는 그런 봉사를 했고 이렇게 이 두 봉사가 이렇게 나갔을 때에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내가 다 네게 주었다.’ 하나님 앞에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네게 주었다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이 네게 주었다고 네게 주지 안할 수 없는, 네게 주지 안할 수 없는 그 원인이 어데 있었느냐?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이 바울에게 천사를 보내 가지고 ‘바울아, 안심하라. 배 안에 있는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하나님께서 네게 주셨다.’ 할 수 있는, 네게 주실 수 있는 그 원인이 뭐이냐? 네게 주실 수 있는 그 원인이 뭐였더냐? 네게 주실 수 있는 그 원인이 무엇이기에 어떤 방편을 쓰고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바울에게 줬다고 바울에게 안심을 하고 바울을 위로를 했느냐? 바울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위로를 하고 하나님께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위로를 하면서 안심하라고 했는가? 그러면, 바울이 볼 수 있는 행동은 무슨 행동을 했느냐 하면은 그들에게 지도한 거 행동 하나 있었고, 또 그들에게 안심하라는 위로하는 행동, 음식 먹이는 행동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무슨 행동이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말할 수 없는 그들이 자살 행위를 하고 나가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와서 견디지 못하는 간곡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그 봉사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바울아, 안심하라.’ 소리 안 하면은 그 바울이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 죽을 줄 모르고 너무 하나님한테 그냥 견딜 수 없으니까 이 바울에게 천사를 보내 가지고 바울아 안심하라는 그 안심, 하나님이 바울에게 어떻게 해서 그 바울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어떤 심정이 되어졌기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 바울에게 안심하라고 그렇게 위로를 주는 그 소식을 전했을까? 그러면 바울의 심정이 어땠으며 바울이 자기의 전력을 기울여서 하는 그 전력 기울임이 어떻게 했으며 그가 소원한 것이 어떻게 됐던가? 그 가 지도하는 말이 그가 어떤 지도를 했으며, 또 지도 받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믿고 소망을 가졌으며, 그 자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 사랑했으며, 불쌍히 여겼으며,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동정한 마음을 가졌으며,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노력을 하고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그저 둬 둘 수 없고, 오래 둬 둘 수 없기 때문에 ‘바울아, 바울아, 안심하라. 네가 그만 안심하라. 이제 이 모든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너에게 다 줬고, 한 사람의 생명도 손상이 없고 네게 다 줬고, 또 네가 가이사 앞에 설 것이고 하니까 염려하지 말아라.’ 그분이 그렇게 어떻게 그 바울의 행동에서 감동이 됐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요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그 바울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돼서 견디지 못해서 ‘바울아, 바울아 안심하라. 이제 네가 가이사 앞에 설 터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또 이백일흔여섯 사람은 네게 하나님이 다 주셨다고 했다.’ 이렇게 말씀했으니 하나님을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되도록 바울이 했는가,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감동시켰던가, 감동시킨 바울의 마음 그게 뭐인가?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그 사람들을 얻는 유일한 방편이 아닌가, 유일한 방편이 아닌가? 이래서, 바울이 그 뒤에 그것을 말하고 또 자꾸 이제는 말을 들으니까 자꾸 지도를 합니다. 깨어 있습니다. 그뭐 다 같이 그 풍랑에서 열나흘 동안을 구불었으니까 바울도 사람이지 뭐 별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물론 성령의 사람이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이상합니다. 욕심이 나면은 무서운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 욕심을 내서 사지를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또 자기 권력 욕심을 내 가지고 생명을 아끼지 안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의 애정의 욕심을 해서 죽음을 아끼지 안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말이오. 돈을 사랑하든지 뭐 사랑하는, 그러면 그 바울은 그때 자신이 그 모든 데에서 다른 사람은 다 죽을 지경인데 바울은 뭐 때문에 그렇게 그뭐 음식 장만하고 또 그들에게 살펴서 다른 사람은 정신 없는데, 이 가다가 사공들이 보니까 아무래도 이 풍랑이 이렇게 쉬지는 안할 것이고 이런 큰 대풍인데 우리가 내가 이들 하고 같이 가다가는 죽을 터이니까 아예 이것을 버리고 지금 거루라 하는 조그만한 배인데 그 조그마한 배 나룻배 달아 가지고 다니다 급하면 그거 타고서 이 도망가는 것인데 이 거루를 바다에 내리는 걸 밧줄을 내리는 척 하고서 내리니까 다른 사람은 그걸 못 본다 말이요, 봐도 정신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 전체를 다 살펴 가지고 이 전체 환경과 그 전부 분위기를 다 살펴 가지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들이 지금 딴 데로 도망할라고 이 거루를 닻줄 내리는 척하고 거루를 내리고 있으니까 이들이 여게 없으면 너희들이 다 죽고 구원 얻지 못한다. 빨리 이걸 너희들이 조치하라.’ 이러니까 군인들이 우 달라들어 가지고 그 거루의 줄을 끊어서 버리고 사공들 붙들어 가지고 못 내려가도록 해 가지고 그래 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뭐 바울이 그만침 벌써 됐으니까, 그만침 됐으니까 바울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완전히 바울의 사람을 만들었어. 바울의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멜리데 섬 근방에 와 가지고는 ‘자, 이제는 너희들이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나가 가지고 저 섬이 무슨 섬인지 저 섬으로 건너가라.’ 그 바울 시키는 대로 건너가고, 또 나머지기는 또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나무 조각이나 뭐 물건을 다 타고서 그래 건너가고, 또 못 건너가는 저 가는 사람들이 줄로 서 가지고 팔을 이래 엮어 가지고 그래 끌어 당겨 가지고 다 건너가. 싹 다 건너갔다 말이요.
이러니까 이거 그만 바울의, 암만 내가 여기 삼십여 년을 여기 서부교회에서 목회, 내가 몇 해 됐지? 아무도 모르나요? 삼십사 년? 삼십칠 년, 내가? 삼십사 년일 것인데. 몰라, 삼십칠 년 됐는가? 어짜든지 삼십여 년이라. 삼십여 년을 이래 해도 이 교인들이 제 말을 그렇게 듣지 않습니다.
이런데 바울은 거게서 그만 열나흘 만에 완전히 정복을 해 가지고 하나님께서도 ‘이 이백일흔여섯 사람은 네게 줬다’ 또 그들도 마치 아이들이 자기 낳은 어머니께 전적 맡겨 놓고 의지하는 것처럼 맡기고 의지하는 이렇게 신임받아서 사람들이 됐습니다.
또, 그래 가지고 이 섬에 갔는데 섬에 가니까 그 모두 풍랑 만냈으니까 추워서 지금 뭐 목숨만 붙어 있지 발발 떨고 죽을 지경인데, 섬 사람들이 불을 놓고서 모두 불을 쬐우라 하는데 바울이 거게서 ‘참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도 되게 추우니까 불 쬐우고 그랄 게 아니고 불 쬐우지 안하고 막 나무를 열심히 자꾸 놓으면서 이렇게 지금 봉사합니다. 그 바울이 거게서 그 배 안에서 해 나온 것과 그가 끝까지 나무를 갖다 들어다 놓으면서 봉사하는 것과 그의 봉사와 그의 지도와 그의 신앙이라는 것이 어떻게 했기에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네게 주노라’ 했으며, 이렇게 하니까, 이래 나무 갖다 놓는데 거기는 열대 지방이라서 독사가, 그 독사라는 그 짐승이, 거기는 모두 다 짐승이라 했어. 이 물면 그만 즉사하는 거라.
이랬는데 독사가 그 사람을 손을 물어 가지고 이래 거게 달려 가지고 있으니까 모두 섬 사람들이 보고 도망을 치면서 ‘저 사람이 지금 풍랑에서는 살았지마는 분명히 저 사람이 큰 죄인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그 공평된 하나님이 저 사람을 짐승으로 물어 가지고 죽이도록 했다.’ 곧 죽는 것만 지금 보고 있다 말이오.
멀리 피해 가지고 죽는 것만 보고 있으니까 이 털털 털어서 불에 넣어 버리고 또 나무 자꾸 이래 봉사를 하고, 이러니까 그 독사 문 것이 아주 불행이오. 독사 문 것이 그 사람 섬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인정을 받았으니까 ‘이 사람들은 손을 대면 안 된다, 이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라.’ 섬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가까이 안 하면 거기뭐 뭘 먹고 살겠습니까? 그 죽을 것 아닙니까? 배는 없어져 버렸지.
이런데, 그 불행인데 하나님의 권능이, 그 독사가 무는 거와 같은 그런 불행이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같이 하니까 툴툴 털어서 그 불에 던져 버리고 아무 뒤에 후유증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분명히 이거는 사람이 아니다, 이 신이라.’ 이래. ‘신이라. 이거 하나님이지 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들 토인들은 다 야만들이기 때문에 신이다 이래 가지고 와 가지고 그만 그 앞에 절을 하고 이렇게 이래 섬기고 이라는데, 그 섬에 제일 왕 되는 사람이 저거 아버지가 염병과 이질로 가지고 지금 죽을 지경인데 고생한다 소리 듣고서 ‘그라면 너거 아버지를 데리고 오너라’ 메어 가지고 오는데 기도하니까 썩 낫아 버렸지. 이러니까 그 섬에 있는 사람들 병자들은 다 데리고 왔는데 병자들 다 낫아 줬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만 그 사람들이 다 전부 바울을 신으로 알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있는 걸 다 해서 석 달 동안 머물었는데 석 달 동안 어떻게 대접을 잘 하고 나중에 떠날 때에도 또 로마에게 갈 때까지 먹고 쓸 것을 다 전부 다 준비해 가지고 다 넣어 줬어.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깊이 27장, 28장을 연구하라고 이랬는데 가서 지금 대충 지금 지금 말도 잘 되지도 안합니다, 이거. 여기 저기 너무 뜨금뜨금 띄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지금 알라고만 하니까.
요것을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27장과 28장을 읽어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이백일흔여섯 명을 ‘바울아 안심하라, 이 사람들 너에게 줬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 그렇게 바울이 어떤 행동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감화 감동을 받아 가지고 못 견뎌서 바울에게 그렇게 위로의 말을 다급하게 천사를 보내서 그렇게 했을까, 또 거게서 닥쳐진 그런 모든 순서들이 어떤 순서인가? 그 순서가 우리가 목회하는 우리에게 다 닥쳐지는 모든 현실들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러기에 여기서 며칠 전에는 그걸 말했는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그것이 곧 한 말로 말해서 생명의 도입니다. 생명의 도리라. 우리가 걸어갈 길이라 그말이오. 뭐든지 그 역사로 보고 보지 말고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길을 가르쳤기 때문에 여게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우리 말의 길, 우리 생각의 길, 우리 마음의 길, 우리 뜻의 길, 우리 욕심의 길, 우리 감정의 길, 우리 행동의 길, 우리 성질의 길, 모든 내가 성질은 이리이리 가야 된다, 마음은 이리이리 가야 된다, 뜻은 이리이리 가야 된다, 우리의 욕심은 이리이리 가야 된다. 그 꼭 바른 전체의 길로써 우리에게 줬는데 그 길을 가지 안하고 탈선만 되면, 탈선만 되면 저는 다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이 말씀은 우리의 각양의 마음의 모든 길, 마음에는 우리의 욕심도 있지 않습니까? 욕심의 길을 어데서 찾겠느냐? ‘내가 욕심이, 내 욕심이라는 것을 어디로 가야 되겠느냐?’ 네 욕심, 네 욕심이 사는 길을 갈라면은 성경에서 물어라.
또 네가 지금 ‘공부 잘하는 게 제일 좋다, 권세 잡은 게 좋다.’ 이런 게 아니라 네가 이 욕심을 권세 따라가고, 권세 따라가고, 네 마음이 권세 따라가고 돈 따라가고, 이 땅위에 피조물로서는 네 마음의 수백 수천 가지의 요소를 바로 인도할 수 있는 그 인도자는 없다. 땅위에 어떤 것으로, 어떤 사람은 돈 따라가다 뒈지고, 어떤 사람은 권세 따라가다 뒈지고, 어떤 사람은 학문 따라가다 뒈지고 그것은 우리를 인도하는 거 아니라 미혹의 선악과입니다.
이러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요 길에서 자기가 ‘내 성질은 어째 써야 되겠느냐, 내 뜻은 어째 써야 되겠느냐, 내가 지금 사건을 닥쳤는데 이 사건은 어데로 가야 되느냐?’ 그 사건의 길, 물질의 길, 소유의 길, ‘내가 권세를 가졌다, 이 권세는 어데로 가느냐?’ 이 권세의 길.
이 권세도, 이 권세도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권세는 어데로 가느냐? 성경이 ‘오냐, 네 권세는 요리 가라, 요리 틀어라, 요리 틀어라.’ 성경이 말하니까 이 성경 말씀은 이것이 우리에게 천천 보배로만 알 게 아니라 곧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성공이요, 영광이요, 승리요, 완전이신 것입니다. 이런 보배로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그냥 지식으로 저버려 버리고 이제 헛된 것을 탐하여서 돌아다니니 비참하고 가련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껍데기는 요렇게 한 마디지마는 그 한 마디 속에는 한없는 우주보다 큰 그런 것이 그 안에 다 내포됐기 때문에 들어가면 또 너르고, 들어가면 너르고, 들어가면 너르고, 들어가면 더 참되고 참되고, 완전하고 완전하고, 그 끝이 없는 이 완전이 있는데 이걸 찾지 안하고 이걸 집어던져 버리고 이 나타난 이 세상의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이 세상에 거게다가 근거를 삼을라고 그것을 자기의 푯대를 삼고 기준을 삼아 가지고 거게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얼마나 외식자며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자인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암만 말해야 안 들려. 암만 말해야 들리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십시다.
지난밤에도 재독에 참석한 사람이 몇 명 되지 안해. 팔십칠 명밖에 안 됐으니까 다른 데 오는 사람 많으면 본 교인은 참석 안 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이 가치성을 이렇게 여기면 망합니다. 이 가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가운데서 엿새 동안에 이까짓 거 다 만든 거요. 엿새 동안에 만들어진 게 큰 것입니까 엿새 동안에 만든 그 능력이 큽니까? 너무 사람들이 심령이 어두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