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1 01:06
바쳐서 사는 방편
1981. 3. 22. 주일오후
본문: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교훈도 있고, 또 예언도 있고, 계시도 있고, 축복도 있고, 여러 가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어떤 것이든지 다 계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계약을 성도가 지키고 안 지키는 데 따라서 하나님도 계약 안 지키는 자에게는 안 지키는 대로, 지키는 자에게는 지키는 대로 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어떤 종류의 것과 어떤 성질의 것이 있는지 그 내용을 아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아는 대로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확실히 알고 확실히 인정하고 확실히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금생과 내세에 두 번 있는데, 세상에서도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마다 가치도 권위도 영광도 힘도 다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의 차이는 잠깐이요 유한하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하고 무궁한 차이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과거를 참고해서 현재에서 미래를 예비하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영원한 내세를 위해서 금생을 살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확정하고 확신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전에 말씀하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람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도 계약입니다.
‘다하라’는 것은 마음도 다 거기에 쓰고, 힘도 거기에 다 쓰고, 뜻도 거기에 다 쓰고, 지정의 모든 심신을 거기에 다 쓰라는 말이요, 그렇게 해야 영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계약으로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아무리 아껴도 제한된 시기를 넘길 수 없고, 또 아무리 붙들어도 붙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유나 몸이나 마음의 어떤 요소도 영멸 될 수도 있고 영생이 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자기의 마음을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하는 마음으로 만들 수도 있고, 늙어지고 쇠해지는 심신의 기능을 영원히 죽지 않고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기능으로 만들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육체의 청청한 정력을 하나도 죽는 데 이르지 않고 영생하게 할 수도 있는 세상이요, 또 이것들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는 영원한 사망을 만들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자율을 가진 자, 이 세상 반거짓말, 마귀의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이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독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공로로 주신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파에서는 잘못 깨달아서 예수님의 공로로 주신 영생의 길이 아닌, 원죄와 본죄로 정죄 받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방편은 알지도 못하고 미혹 받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썩어질 것으로 심으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영생하고, 약한 것으로 심으면 강한 것으로 영생하고, 모든 혈육의 것으로 심으면 신령한 것으로 영생하고, 더러운 것으로 심으면 영광스러운 것으로 영생한다」고 했습니다.
심는 것도 일단 내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는 것은 불살라서 없어지고 먹어서 없어지는 것과 다릅니다. 땅에 심어도 외부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썩는 그 속에는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서 생명으로 자랍니다. 이것이 식물의 이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미 저주받았지만 저주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신 그 계약에 심을 때, 그 진리에 심을 때, 신실하시고 계약 이행에 불변하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용할 때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바꾸어지고,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노쇠할 것이 영원히 소생할 것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는 이치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영멸과 영생 길이 있습니다. 영은 영생을 가졌으나 심신은 아직까지 영생의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영생의 구원으로 나갈 수도 있고 멸망에 빠질 수도 있는 갈래길로 되어있습니다.
영생되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때, 온전을 위하고 온전에게 사용될 때, 진리를 위하고 진리에게 사용될 때, 영원 불변의 무한에게 이용되고 무한의 것이 될 때, 참의 것이 될 때 영생화되어 썩지 않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더라도 죽으면 그 사람의 영과 혼은 낙원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같이 오고,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영계에 갈 수 없고 어떤 요소에 처하든지 원소로 머물러 있습니다.
화장이든 토장이든 수장이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느 원소로 됐다고 해도 각 사람의 영과 혼이 예수님과 같이 재림할 때 각 원소에서 그 몸을 살려내서 입게 됩니다.
이렇게 살려내는 것은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됩니다.
하나님이 원소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각인의 지체와 몸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1차 창조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재창조해서 날마다 모든 것이 다 재창조로 보존되고 유지되도록 하시는 것과 같이 죽은 자를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그 능력으로 변화함을 받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각양 원소에서 그 사람의 몸이 다시 그 사람의 몸으로 부활하는데, 그때는 지금과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공간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말이니 우주와 물질계만이 아니라 영계나 물질계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또 시간에 제한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원 무궁토록 쇠해지거나 낡아지거나 늙거나 죽는 일이 없고 영원히 청청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각 종별에 대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어느 종류든지 자기가 준비한 것만큼 자유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세상에서 준비한 그것만큼 자유할 수 있고, 또 하나님 안에도 자유로이 출입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준비한 그대로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는 물에서 죽은 자들을, 땅에서 죽은 자들을, 음부에서 죽은 자들을 내어줄 때 안 믿는 사람들도 부활하고 믿는 사람들도 부활하는데, 하나님 앞에 행동록이라는 책이 있으니 모든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뜻이나 행동에 다른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그런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 책에 다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기록대로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고, 또 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자는 그 심판을 면제받습니다. 그러나 공심판은 면제받지만 구속받은 자들이 받는 심판이 따로 있으니 곧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라고 한 것은 그 심판은 사랑 심판이며, 지혜 지식 심판이며, 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본질과 본성이, 그의 지혜와 능력이 세상에서 어떻게 산 것을 심판 받기 때문에 이 심판은 곧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 심판인 것입니다.
성경에 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행한 대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했습니다. 선은 하나님 중심을 말한 것인데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았더라도 그 질과 양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영생으로 보응을 받고, 또 악으로 보응 받는다는 말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중심이나 어떤 인류 중심이나 어떤 운동 중심으로 살았으면 영벌로 멸망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미래와 과거에 대해서 몰랐었는데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이 계시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앞에는 사망과 생명의 갈림길이 있고, 이미 구속받은 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심신의 기능과 요소를 영벌로 멸망시키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자기 현실에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영생과 영벌은 어떻게 되느냐? 영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 지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니 이것은 영생이 되고,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이 중심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발원된 것은 다 영벌 받는 행위가 됩니다.
아무리 크고 위대해도 다 때가 있습니다. 홍수라는 한 형식계시로 방주 밖에 굉장한 이력들이, 유명인들이, 구비들이, 찬란한 것들이 완전히 몰사, 몰멸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롱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노아의 여덟 식구와 방주 안에 있는 것만 구원받은 것은, 홍수 전에는 피조물들이 각각 제 중심으로 했으니까 그 중에 강한 자가 왕이었지만, 자존자요 주권자요 창조주 하나님을 능가할 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청종한 그것이 지혜의 권능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들을 청종한 것은 홍수가 오기 전까지는 지혜 있었지만 자기와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부터 미워하는 자까지 순서적으로 다 속여서 멸망을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로서 지혜 있는 사람은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모든 것을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를 위해서 쓰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다 바쳐 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공중에 합장하고 빌다가 죽으면 되는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죽으면 되는가? 밥을 해놓고 하나님에게 빌면 될까? 자기 몸을 받아달라고 하면서 자살하면 될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은 다 영생이 되고 멸망치 않는다고 말씀했으니, 이것만이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에 대해서 가장 슬기롭고 유익되고 복되게 하는 길은 길인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천하에 예수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는 길이 없다고 했으니 별별 방식을 가지고 위해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며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쓸까? 내 소유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어떻게 쓰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될까?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오늘 봉독한 이 말씀입니다. 똑똑히 말씀했습니다.
40절「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임금은 예수님인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내 형제 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거기에 있는 형제들이기 때문에 택한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택한 자에게 행한 것이 주님에게 행한 것이라 했습니다. 택한 자 중에 제일 작고 못나고 볼 것 없는 자, 계명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제 욕심대로 산 못된 자, 천국은 갔으나 건설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무가치한 그런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라는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그런 자에게 행한 것도 주님에게 행한 것이니, 그런 자보다 큰 자는 하나님에게 더 필요 있는 자요, 그자보다 큰 자에게 행한 것은 으레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밝혔습니다.
45절「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것은 인생에게 하지 않은 것, 택한 자에게 하지 않은 그것은 주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성경에 명문했으니 이것을 우리가 둘째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어떻게 하면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보약을 먹을까요, 불사약을 먹을까요, 불로초를 먹을까요, 내 소유를 은행이나 정부에 맡길까요, 어떤 권세가나 신실한 자에게 맡길까요, 창고에 잘 보관해서 도둑 맞지 않게 할까요? 어떻게 해야 내 청청한 심신의 기능이 사망하지 않고 영생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네 마음이나 뜻이나 힘이나 목숨을 주님과 형제 사랑하는 데 쓴 것은 다 영생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미 가지고 있는 그것을 멸망시키지 않는 길은 주님을 위해서 쓰고 형제를 위해서 쓰는 것 외에는 달리는 없습니다.
그 밑에 이웃을 말한 것도 마태복음 25장 말씀과 같은 말씀이니 주님을 위한 것만이 영생이요, 주님을 위했으면, 주께 바쳤으면 주의 것이 됩니다.
죽은 고기를 산 사람이 먹으면 산 사람의 피와 살이 되는 것처럼, 성령의 사람들이 근심하고 탄식하고 염려하면서 노력하는 것도 이렇게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 생명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생명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해서 죽을 내 심신, 이미 죽은 심신이 지금 죽어 가는데 이 죽어 가는 심신과 없어져 가는 소유가 영생하는 생명의 곡간 안에, 생명의 능력 안에서 생명의 것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영생을 원하고, 영존을 원하고, 자기 소유를 무궁세계에서 자기 것으로 쓰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리 오늘은 부동산이나 동산이나 기능이나 지체의 힘이 필요해도 그런 것은 차차 쇠해지고 낡아져서 세상을 떠날 때는 다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영원히 자기에게 필요하게 만드는 방편은 주를 사랑함으로 주께 바쳐서 쓰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죽는 데 던지거나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삼으려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데 쓰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데 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형제를 사랑함에 쓰는 것이니 형제가 배고플 때에, 목마를 때에, 벗었을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을 가졌는데 영은 주격이요 육은 소유격입니다. 육은 가치가 적고 영은 가치가 큽니다. 사람은 영육으로 되었기 때문에 육의 배고픔이 있는 동시에 영의 배고픔도 있고, 육의 목마름이 있는 동시에 영의 목마름도 있고, 육의 벗음이 있는 동시에 영의 헐벗음도 있습니다.
또 육의 나그네 됨과 영이 고독할 때가 있고, 육의 병과 영의 병이 있고, 육이 갇히는 것과 영이 갇히는 것이 있으니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육도 영도 자기의 요소를 영생시키기 위해서, 형제가 그렇게 되어있을 때에 구출하기 위해서 내 것을 쓰면 영생입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영생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께 바쳐 쓰는 것인데, 주께 바쳐 쓰는 것은 형제를 구출하는 데에 쓰는 것이라고 명문되어 있으니 의심 없이 확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다시 덧붙여서 말씀을 하기를 「네가 없어질 것으로 형제를 대접하면 영원한 세계에서 그 대접으로 인해서 너를 영접한다」 했습니다.
(보물을 인간 구원 위해 하늘에 쌓아두면) 또 「네 보물을 하나님에게 바치면, 곧 인간 구원에 바치면 거기는 좀도 동록도 도적도 없으니 영원히 도적 맞지 않는다」 했습니다. 억억만 년 가도 좀먹지 않는다, 어떤 죄악을 인해서라도 상함을 받지 않는다, 어떤 자도 가져갈 수가 없고 빼앗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했습니다.
또 「저가 있는 것을 흩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으니 그 의가 영원토록 있도다」 하셨습니다. 네 소유와 몸의 각양 각종의 기능과 생명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 곧 당신이 원하시는 인간 구원에 바쳤으니 너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 영원토록 있다는 것은 그 결과가 영원토록 있다는 말입니다.
또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어 하나님께서 더 의의 열매가 풍성하게 하시나니 너희들의 연보가 그들의 구제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했습니다. 이것은 연보를 말했습니다. 자기 소유와 몸의 온갖 기능과 목숨을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쓸 때 하나님이 그것을 영생시키실 뿐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주시겠다 했습니다.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주실 때 다시 받아서 쓰면 또 다시 주시고, 썩을 것 하나를 영생으로 바꾼 자에게는 둘을 주셔서 영생으로 바꾸게 하시고, 둘을 바꾼 자에게 셋을, 열을… 백 배도 주신다고 했으니 이것이 계약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정한 생명이 있는데 생명 있는 동안에는 몸도 소유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영생시키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쓰면, 하나님께서 씀으로 끝나도록 결정하셨다면 그 사람은 끝나고 죽지만 끝날 기한이 차지 않았으면 더 많은 것으로 다시 준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함으로 복음을 위해서 생명 바쳐도 그 생명이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기한이 안 됐으면 생명 바쳐도 배나 영광스럽고 권위 있는 생명을 줍니다.
왜정말년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복음과 진리를 위해서 생명 바쳤다고 다 죽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에 그 생명이 다시 나타나니까 이전의 생명보다도 백 배 천 배 더 권위 있고 존귀했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계명 지키는 것으로 빛을 나타내려고 할 때 자기는 생명을 바쳤으나 죽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자굴에서 구출되고 나니까 그 생명은 천 배 만 배 더 가치 있고 중량 있는 생명이 됐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준다는 말은 다시 세상에서 계속 의를 맺는 그 역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에베소 4장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말고 돌이켜 빈곤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도록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를 알기 전에는 사람들과 싸워 뺏으면 내 것이요, 그 사람이 약해져야 내가 강해지고, 가난해져야 부자가 되는 줄 알아서 그 방편을 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싸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도적 심리를 버리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재물을 구하는 것이나 건강을 구하는 것이나 지혜와 총명을 구하는 것이나 권위와 지위를 구하는 것이나 온갖 실력을 구하는 것이 형제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려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구하라는 말씀은 앞에 두 성구를 전제로 결론만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소자를 사랑하는 것이요, 소자에게 행한 것이 하나님에게 행한 것이니, 네가 하나님이 소원하셔서 피 흘리기까지 하신 인간 구원에 쓰기 위해서 구하라, 이 일에 쓰기 위해서 노력해라. 그러면 얼마든지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성도가 무엇 때문에 맛 잃은 소금으로 세상에 밟히고 있는가? 세상 것으로도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고, 남에게 빌려줄지라도 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왜 찌꺼기가 되고 천하게 됐는가? 싸우고, 욕심대로 살인하고, 다투고 속이고, 꾀를 내고, 악과 독을 부리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뺏는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은 한없는 고생을 취하는 것인데 그런 다툼이 어디서 왔느냐? 네 속에 잘못된 욕심에서 나왔다. 정욕에서 나왔다.
다시 말하면 네 속에 새사람의 지혜로 사는 것은 없고 옛사람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네 소원대로 되더냐? 취해지더냐? 안 된다. 택한 자들은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안 된다! 안 되는 이유는 네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다. 천하 인간이 다 도와도 헛일이고, 천하 인간이 다 방해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그 사람들의 생명도 당신이 주권하시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만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으니 그분에게 구하려면 그분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고, 그분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될 것이고, 그분을 대항해서는 안 될 것이고 그분의 속성을 따라서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대해서 조심해서 확정 짓고 구하면 그분이 다 주시는데, 이렇게 구해도 안 되는 것은 또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냐? 만물보다 거짓된 독사와 시랑이 같은 네 욕심대로 하기 때문이다. 네 욕심대로 하니까 하나님이 그걸 주시면 한 사람 죽이던 자가 열 사람을 죽이고, 점점 다른 사람을 더 해칠 것이니 줄 수가 있겠느냐? 네가 성령의 소욕, 하나님의 소욕, 하나님의 욕심,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안타까움에 입각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데 쓰려고 하면 너희들이 구하는 대로 다 주고, 구하는 그 이상으로 충만케 해주겠다고 에베소서에 계약했습니다.
형제를 위하는 것은 무엇인데? 또 여기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의롭고 병들고 옥에 갇힌 원인이 무엇인데? 원인은 죄입니다. 인간이 평안하고 존영치 못한 것은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 돋는 죽순 같이 청청하던 자가 몇 해 안 가서 파김치가 되고 곯고 송장이 된 것은 하나님과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인간에게 봉사하고 인간을 구제하는 것은 사람을 죄에서 구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봉사요, 의로운 사람으로 성화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구제요, 하나님과 원수된 데서 하나님으로 화친하도록 만들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만이 인간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요 인간 사랑이라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네 언행심사가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출하는 데, 불의에서 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지옥과 천국을 모르는 자에게 천국을 알려주는 데, 하나님 부인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데, 죽으면 그만이고 부활도 심판도 소망도 없는 인간에게 소망을 보여주는 데 과연 도움이 됐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심판을 기억하고, 내세를 기억하고, 죄와 의를 참으로 생각하고 중대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언행심사로 보여줬느냐? 그것을 위해서 모은 것을 다 쓰는 자가 되었느냐? 이렇게 자기를 주장하고 조심하면서 이 소원을 인해서 주님에게 돈을 구해봐라.
얼마든지 돈을 주리라! 권세를 구해봐라. 얼마든지 권세를 주리라! 몸의 병 낫기를 구해봐라. 얼마든지 낫게 해주시리라! 진리와 영감과 권능을 구해봐라.
얼마든지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나 네가 구해서 얻게 되면 너를 높이고 모든 영광을 네가 따먹는 강도와 절도가 되고 네 정욕대로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에게 구해도 얻지 못한다. 또 네가 피조물 중에 어떤 것으로 성도의 소원을 이루려는 그 사상을 버려야 된다.
그것 때문에 안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계약을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 시간마다 내가 좋아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영벌로 죽이고, 영생으로 영원히 내 것 삼는 길이 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도는 거짓 도가 아닙니다. 획 하나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가감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대로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심는 자에게 자꾸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