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3:46
바리새인과 세리
1986. 8. 1. 금밤
본문: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몇 시간 계속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한 것은 이 각도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증거했고 또 다른 각도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또 오늘 밤에도 다른 각도로 가르쳐 주신 것을 증거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각도로, 각도라 말은 말의 모때기라 말입니다. 요 모 조 모, 여기 진리에 대해서 이 모 저 모를 가르치는 걸 가리켜서 각도라 그렇게 말합니다.
모때기, 이 모로, 이 말씀에 대해서 이 면을 말하고 저 면을 말하는 것을 각도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모로 가르치든지 저 모를 가르치든지 그 모든 모로 가르치는 것이, 모든 면으로 가르치는 것이 다 그것이 하나여야 합니다. 거기에 요 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이치가 되지 안하고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이치가 뒤에 종합할 때에 하나가 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단절 해석을 하고 또 종합 해석을 할 때에 종합 해석이 단절 해석을 더 확고하게 하고 단절 해석이 종합 해석을 더 확고하게 하는 이런 깨달음이라야 바른 깨달음이지 단절 해석은 또 이래 했지마는서도 종합 해석과 맞지 안하고 종합 해석은 단절 해석과 맞지 안해서 이럴 때는 이리 하고 저럴 때는 저리 해서, 참 아이들 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 된다는 말과같이 그렇게 진리를 깨달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음이라는 이 깨달음은 얼마나 중요한고 하니 깨달은 그대로 자기가 행동하고 그대로 구원이 잘 이루어지든지 못 이루어지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은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해서 구원 이룰라는 투자하는 방편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명을 바칠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뭐 이리 깨달아도 되고 저리 깨달아도 되고 아무나따나 깨닫는다는, 아무나따나 깨닫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아무나따나 생명을 바친다는 말과 같은 말이요 아무나따나 자기의 몸과 소유를 바친다는 거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자기 몸과 생명을, 소유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히 깨달아야 되겠습니까? 이것을 깨닫고 내가 정확한 깨달음이 안 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성경을 연구해야 되고, 또, 성경을 연구해서 성경을 증거할 때에, 사람들은 설교할 때도 마귀가 들어옵니다. 설교할 때에 마귀가 들어오면 뭣이 마귀 들어오는 것인고 하니, 설교할 때에 주님의 뜻이야 이루어지든지 말든지 주님이야 기뻐하시든지 말든지 그 설교로써 자기 인기나 끌고 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이나 받고 이렇게 할라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그런 설교하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 그 설교하는 데에는 첫째는 듣는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거기 매여 있고 듣는 사람들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로 바치느냐 못 바치느냐 하는 그 바치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하지마는서도 이것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그 현재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기나 끌고 다른 사람이 감동이나 받고 다른 사람이 환영이나 하고 좋아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설교하는 사람이 많고, 또 사경회나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참 하룻강아지 범 모르고 덤빈다는 말과같이 하나님의 심판도 모르고 참 무지한 어리석은 그 만용의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서 깨닫는 것은, 만일 깨닫는 것이 세 가지로 깨닫는다고 하면 그 사람의 행동은 세 가지로 행동이 될 것입니다. 두 가지로 깨닫는다면은 이리도 하고 이리도 하고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래서 편리할 때는 이리 하고 이래서 편리할 때는 이리 하고 하니까 그 사람은 정함이 없는 그 행동을 가지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두 마음을 품어서 정함이 없는 자들이라.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 얻기를 바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두 마음 품는다 말은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이렇게 ‘이거다’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또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이요 두 마음을 품어 두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이 교리를 많이 말하는데, 교리, 교리, 교리가 틀렸다, 교리가 바르다, 교리에 모순되다, 인제 교리라면은 깨달음이란 말인데 이 깨달음을 자기가 참 자기 생명보다도 중하기 때문에, 왜? 생명을 내가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중합니다.
생명은 거게 투자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은 생명을 삼켜서 이용을 하는 그 깨달음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우리가 알고 바로 깨달을라고 애를 써야 되지 아무나따나 이러나 저러나 그저 성경은 해석만 하면 된다 이래 가지고 첫째 둘째 뭐 이런 숫자나 배워 가지고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 그거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깨달음은,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 둘째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깨닫는 것을 우리가 아주 조심 조심해서 바로 깨닫도록 애를 써야 되지 아무나따나 되는 대로 깨달으면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성경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경을 보고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게 깨달음이지 그냥 성경에 이거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일반이 깨달음이라 하지마는 몰라서 하는 말이지 그건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고 성경을 보고 ‘나는 요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고것을 깨달은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직신학에도 보면 교리에 대해서 조직신학 편집한 사람이나 저술한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 보면 자기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그걸 깨달음을 말하지 안하고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논리하면 된다 하는 그런 것을 말해 놓은 그것은 다 생명 없는 조직신학이요 다 지금 거짓부리인 것입니다.
여게 여러 시간 말했는데, 여기 보니까 바리새인은 아주 열심 있고 잘 믿는 정통 교인입니다. 또 세리는 그때 식민지로 있는 유대 나라에 가장 악질들이 세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리는 다 죄인이라고 같이 한 자리에서 앉아 먹지도 안하는 그런 아주 못쓸 죄인이 세리요, 바리새인은 자타가 인정하는 열심 있고 또 아주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그러한 교인들입니다.
이랬는데, 이 두 사람을 주님이 비유로 대조해서 말씀해 놨습니다.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들과 같지 안합니다’ 하고서 자기는 그 사람들과 같이 섞이지 안할라고 따로 가 가지고 기도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고 하는 사람들이요, 그런데 자기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안하고 토색도 안 하고, 불의도 하지 안하고, 간음도 하지 안하고, 또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고, 또 두 번씩 일주일에 금식하고 또 자기의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고 이렇게 아주 모든 면이 참 아주 훌륭하고 깨끗한 신자요, 이 세리는 뭐 자타가 알기를 아주 흉측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하는 그런 못쓸 죄인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었다. 갔었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기도를 하고, 한 사람 이 세리는 여게 보니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건 세리를 말합니다. 「이 사람이 저보다」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너무 그 속에 알이 깊고 이래 있어 놔서 그만 잘못하면 껍데기만 보고서 이래 대강 생각하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런 일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첫시간에 배운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네 가지를 배웠는데, 첫째는 이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이라. 영원 무궁한 하늘나라에 가서 살 그 준비를 하는 준비하는 세상이라 하는 것을 첫째로 여게서 배웠습니다.
그러면, 준비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 어데서 끌어 나왔는가 그것을 여러분들이 또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본문 어데서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그 뜻이 나왔는가? 이 바리새인이 자기의 잘된 그런 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기의 잘된 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멸시하고 그렇게 자기의 잘된 그점을 세상에서 참 써먹고 또 아주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자랑을 하고 아주 세상에서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그것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자기의 좋은 점을, 좋은 점 그것을 지금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은 이용하고 이 세상에서 그것을 영광으로 가지고 그 영광을 누리고 또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하는 고게서 이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이라 하는 고 진리가 나왔다 그거요. 요 무슨 고것 못 깨닫고 하면 안 돼.
어떻게 그것이 거게서 나왔는가? 그 사람이 이 세상은 영원 무궁을 준비하는 세상이요 준비된 것은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그 영광을 누리고 그 가치를 누리고 하늘나라에서 써먹고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는 준비만 하는 세상이요 옳은 것을 누리는 세상이 아니고 옳은 것을, 옳은 것에 영광을 받는 그런 세상이 아닌데 이 사람은 옳은 일 했지마는서도 전부 옳은 일 하는 것을 세상에서 다 써먹어 버리니까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는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 그거요. 받을 것이 없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구제할 때에 다른 사람이 모르게 구제하라. 만일 다른 사람들이 구제한 것을 보고서 너를 칭찬하든지 기도하는 것을 보고 너를 칭찬하든지 하면은 너는 하늘에서 상급 받을 것이 없다. 왜? 이 세상에서 다 칭찬받고 상급받고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받을 것이 없다 하는 것을 그것을 주님이 마태복음 6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은 순전히 세상이 준비하는 날이요 저의 의로운 점을 하늘나라 가 가지고서 써먹고 그때 가서 지금 참 영광도 대우도 받는, 하늘나라의 준비를 하나도 생각지 안하고 이 세상에서 경건이나 의로운 행위를 다 써먹을 세상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바리새인은 무궁을 준비하는 세상이요 준비한 것은 하늘나라 가 가지고 써먹지 이 세상에서 써먹을 것이 아니라는 요것을 통통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말이오. 바리새인이 이걸 잊어버리고 있어.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은 영원을 준비하는 세상인데 이 바리새인은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준비하는 세상으로 살지 안하고 세상 모든 행위를 세상에서 그것 다 누리고 써먹고 하는 그 세상으로 세상 위주, 세상 자기, 세상을 자기의 거주처로 알았지 세상은 준비 세상이요 좋은 거 써먹는 세상 아니고 뭐 고칠 거나 고치고 준비나 할 일이지 그 세상은 자기의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여게서 발견해 가지고서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요 해석이 본문에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까? 본문에 이 세상은 영원을 향하여 준비하는 세상이라 하는 것을 여게서 말한 것이 엉뚱한 소리를 끌어다가 한 말입니까, 요 본문에 그것이 깊은 속에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어때요? 들어 있어요 안 들어 있어요? 그걸 모르면 소용 없어. 그거 모르면 말해야 아무나따나 자꾸 주 대서 이래도 저래도 그저 대서 자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자꾸 그렇게 지금 그저 복잡하게 자꾸 성경을 이리 저리 아무나따나로 풀이만 하면 된다 하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된다 그거요.
이거는 이 성경이 이렇게 가르쳤다. 요 성구가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인데 이 바리새인은 준비하는 세상으로 살지 못했다. 바리새인의 정반대의 세리로, 세리를 정대립자로 세워 놨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세상을 준비하는 세상으로 삼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 반대인 세리는 세상을 준비하는 세상으로 삼고 있었다 하는 것을 요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해석은 이래도 저래도 되는 것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해석이 둘이면 그 사람 생활은 이라고 저라고 양쪽 갈래길로 가지고 이라고 저라고 그 이중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꼭 하나로만 깨달아야 됩니다.
깨닫는데 얼마나 그 깨달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깨달을 것인가? 자기 생명을 바칠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도 귀중하게 가치를 삼아서 신중히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성경 보고 깨닫는 데 대해서 너무 헐하고 값싸고 나무나따나 하고서 정확성과 이 가치성과 이 아주 중요성, 생사가 여게 달렸다는 것을 그렇게 느끼지 안하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이 흐려 있다 그거요.
그래서, 첫날 우리가 배울 때에 여게서 첫째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이 바리새인은 이는 이 세상을 영원 무궁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지 안하고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 세상이라고 이렇게 바리새인은 생각했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불의하다고서, 아주 못쓸 사람이라고 버림을 당하고 나왔습니다.
그랬는데, 이 세리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반대인 이 세리는 그는 모든 것을 현재 이 세상만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영원 무궁을 향하여 준비하는데 자기의 준비된 것이 모두가 다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고통을 느끼고 하고 있는 것이라 그거요.
뭐 세리면 그때는 경제로 말하면 유태인 중에 세리가 제일 경제가 풍부했습니다.
이래서 삭개오는 그 세리노릇 했기 때문에 큰 부자라고 말했습니다. 세리는 그때 뭐 착취를 얼마든지 마음 놓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다 부자였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리는 세상 것으로 말하면 그리운 것이 없고 모두 다 물질 풍부로써 황금 만능이라 유전이면 사귀신이라고 할 만치 돈이 많으니까 그 사람 만족할 터인데 가슴을 치면서 지금 고통한 것은 이것은 이 세상을 무궁을 준비하는 준비 세상으로 이 세리가 여겼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정반대로 그런 생각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은 그 사람을 못쓸 사람이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은 것이 성경적이냐, 성경 안에 요 도리가 있느냐 없느냐 고걸 깨달아서 성경적이라야 되지 성경적이 아닌데 생명을 바칠 이유가 뭐입니까? 그래서, 첫째는 이 세상은 무궁을 향하여서 준비하는 세상이요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옳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옳은 것을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줄어진다 이랬습니다. 옳은 것을 칭찬 받으면 상급이 줄어진다 했는데 옳은 것을 칭찬받을라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줄어지지마는서도 그 대신 또 상급을 마련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기의 옳은 것을 다른 사람이 칭찬할 때에 그 칭찬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빛을 보여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가 있고, 또 자기 옳은 일 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그 갑이라는 사람의 옳은 일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옳은 행실을 본받아 가지고 옳은 사람들이 많이 되어지면은 자기에게 그 손해 보충이 됩니다.
손해 보충이 되고, 그 칭찬을 안 받을라고 하는 것으로써 손해 보충이 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많은 사람이 본을 떠서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됐으면 그것으로써 손해 보충이 되는 것이지마는서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받고, 칭찬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저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면 좋아하고 칭찬 안 해 주면 섭섭해 하는 그거는 자살 행위입니다. 어리석은 자요, 아주 자살 행위요. 그래도 그거 안 하면 안 돼.
이거 늑막염을 치료할 때에 고름을 한목 빼, 고름은 빼야 치료가 되기는 되는 건데 한목 빼면은 그 사람 죽을 터이기 때문에 고름을 조금씩 빼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사람을 옳은 일을 시켜 놓고서 그 사람 옳은 일을 했는데 분명히 상급에 대해서는 그것을 말해 주지 안하는 것이 좋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그라면 그만 안 알아 주니까 자기가 섭섭해 가지고서 ‘내가 이렇게 해도 알아 주지 안하고, 에, 그까짓 거 안 한다.’ 그만 낙심하고 말 터이니까 부득이 손해가 가지마는 또 칭찬을 해서 이렇고 이러니까 사기를 돋궈 가지고 ‘잘 했다’ 그 칭찬해 가지고서 그래 그 사람을 앞으로 좀 더 그 선한 일을 계속해서 잘 하도록 하는, 잘 하도록 하는 고것과, 고 유익과 또 칭찬해 줘서 손해 간 손해와 수지 계산을 맞춰 가지고서 그 사람이 그 일을 용기를 내 가지고 하도록 하는 그 유익이 많으면 하지마는서도 그것도 없고 칭찬을 함으로써 교만해져 가지고 게을해져서 오히려 이 바리새인같이 될 그런 사람에게는 칭찬해 주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꾸 깊이 해석을 해 가지고서 우리가 깨달아져야 한다 그거요. 껍데기 생활 하지 말고.
모두 설교도 껍데기 생활, 행동도 껍데기 행동, 다 그라기 때문에 다 헛일이라.
이거 배우면 사람들이 될 터인데 내가 그런 전화를 어데서 받았어요. 서부교회는 말씀은 좋고 교훈은 좋은데 행동들은 보면은 엉망이라 하는 이 말을 욕을 얼마나 듣는지? 또 무슨 욕을 얻어먹었느냐 하면은, 설교한 녹음 테이프를 이것을 가지고서 이제 이 사람한테 가서 전도할라고 그걸 가지고서 이 녹음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하고서 가 가지고 공을 들이고 공을 들여 가지고 그 사람 시간 없다 하는 것을 좀 이 녹음 좀 들어 보라고 이렇게 말해 가지고서 그러면 그거 한번 들어보자 하니 떡 들을라고 트니까 좀 가더니마는서도 디디디디 이라더니마는 나중에 가서 그만 확 뭉캐져 버려 가지고 소리가 나와야지? 이라니까 이 사람이 자, 전도할라고 그 녹음 테이프 가져갔다가 복사한 걸 가져갔다가 그 사람이 얼마나 낯이 깎였겠소? 영 기가 찬다 말이오. 기가 차는데, 그러니까 저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또 고다음에 좀 넘겨 좀 틀어보지’ 또 넘겨 틀어보니까 또 몇 마디 나오더니마는서도, 고 말씀이 나와 가지고 고 한 마디 깨달을 수 있겠다 싶어서 좋아서 고 귀를 기울이고 듣는데 고럴 때 탁 끊어져 가지고서 그만 안 된다 그말이오. 이 죽을 지경이라.
이래 가지고 하도 기가 차 가지고 전화를 하니까 전화 전화 연락 전화가 돼 가지고 자꾸 온다 말이오. 나 같으면 말이오. 그 테이프 말이지. 요래 들어 가지고서 막 돌에 콕콕 찍겠어. 찍으면서 누구를 욕하겠어? ‘백 목사 그놈 나쁜 놈 뭐 이런 테이프를 가지고 사람을 지금, 사람을 애만 터지고 이래 고생을 주느냐?’ 욕 그렇게 많이 했을 거라. ‘그것들이 뭐 복사기도 더러운 것 가지고, 그리 안 하면 하든지 이래 가지고서 테이프도 이 더러운 걸 가지고 이래 가지고서, 야야 듣기 싫다. 서부교회는 말뿐이지 행동은 이것 봐.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이거 전부 외식자 아니냐?’ 욕을 얼마나 들어먹었는지 몰라요.
이 욕은 ○○○조사님이 다 책임져야 돼. ○○○조사님 손 들어 봐요.
○○○조사님 어데 있어? 저 엠프실 있거든 손 들어, 엠프실에서. 엠프실에서 손 들어, ○○○조사님. 어데 있노? 거게 없나? ○기사 거기 있어요? 손 들어야지 왜 손 안 들어? 그래. ○○○조사님 책임져. 복사하는 사람 그 사람, 서부교회 욕 얻어먹이고 목사 욕 얻어먹이고 그래 되겠어? 못써, 그라면 안 돼.
사람들이 이 세상 생활이 영원 무궁을 준비하는 세상이라 하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썩어지면 막 썩어집니다. 교회라는 것은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안하는 그게 교회라고 이래 생각하지 이래 놓으니까 모두 신사라.
잘못해도 ‘사람이 그럴 수 안 있습니까?’ 그라니까 좋아합니다. `왜 그랬노?’ 이래 하면 ‘에이구, 너무 딱딱해서 싫어.' 그러기 때문에 딱딱한 사람은 이름도 듣기를 싫어합니다. 딱딱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라 말은 하나님처럼 콩 팥을 가리라 그말이오. 이 뭐입니까? 그래 놓으니까 어짜든지 그저 잘못된 것도 고만 관용, 또 사람 부드럽고 유하고 순한 것만 좋아, 이것만 좋아하니까 이 무리들이 뚤뚤 뭉쳐, 뚤뚤 뭉쳐봤자 그까짓 거 지옥이나 가 버리지 하나도 하늘나라 가지 못해. 영이 못 간다 말 아니고 심신의 기능은 다 지옥이지 하늘나라 못 가요.
그러기 때문에, 옳은 거 그런 거, 자, 옳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뭐 무시하는 것입니까? 진리 무시하는 거, 옳은 것이 진리 아닙니까? 진리 무시하는 거.
그러면 사람 대우하기 위해서 옳은 것을 무시하고 틀린 걸 그만 관용한다고 틀린 걸 뭐 그럴 수도 안 있나 이래 하는 그거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이러니까 이 서부교회 축복받도록 할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축복이 안 와. 이놈의 축복이 왜 안 오노? 이 뭣 때문에 안 오노? 이거 뭐 어데 고장이고 짜증이 나고 이런데 뒤벼보니까 속이 막 썩었어. 편집실은 편집실대로 썩었지 행정실은 행정실대로 썩었지 이 권찰들은 권찰들대로 썩어서 안 믿는 사람 전도 할라고는 애를 안 쓰고 믿는 그 교인을 식구 뺏들어 저거 식구 만들라고 연줄만 있으면 그만 친척 연줄이 있든지 뭐 사업적 연줄이 있으면은 자꾸 식구를 뺏들어다 제 식구 만들라고 요런 행동만 하고 있으니까 여게서 썩어서 부글부글 괴지 저게도 썩어서 부글부글 괴지 이러니까 설교만 하니까 하나님 보면 우스울 거라. ‘야, 네가 설교만 하지 지금 설교 듣는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아나? 그걸 좀 조사해 봐.’ 이럴 거라. 하나가 잘못 되면 모든 사람이 복을 못 받습니다. 우리는 단체 생활 아닙니까? 하나가 나쁘면, 이 손가락 이게 손가락 이거 하나 문둥병 들었으면 온 전신이 문둥이입니다. 결국은 문둥이되고 말아요.
이게 다 어데서 나왔느냐? 이 세상을 준비하는 세상인 줄을 모르고 세상을 영광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인 줄 알기 때문에 어짜든지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그런 말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그라다가 진리를 밝히지 안하고 주님의 피를 피 역사를 삐뚤어지게 만들어서 하늘나라 가서 심판받을 것은 생각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 그런 행동합니다.
우리는 부드럽기가 뭐 명주 옷고름같이 그렇게 부드럽기는 부드러워야 되지마는서도 콩 팥을 가리는 것은 비수검 같아야 돼, 비수검. 아주 좌우에 날선 칼 모양으로 그렇게 날카로워야 됩니다. 불의를 용납하면 안 돼요.
편집실에 편집실장은 이제 그 밑에 있는 사람 있으면 어짜든지 처음에 말을 해서 그런 거 하나만 보면 막 밤잠을 못 자고 이리 해야 될 터인데 이 바리새인 되기 때문에 그래. 바리새인이 돼서 그래. 잘된 것만 자꾸 보고 잘된 것만 보고 지금 장점만 보고 좋아하고 장점만 보고 안심하고 있는 거라. 단점을 보지 안해.
못씁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옳은 것은 아예, 옳은 것의 그 효력은 세상에서는 보만 그만 헛일입니다. 없어질 세상에서 보면 뭐 할겁니까? 영원한 세상에서 효력을 봐야 돼지지. 이러니까 옳은 것은 효력을 세상에서 보지 안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잘못된 것의 욕은 세상에서, 잘못된 것의 욕은 얻어먹어야 됩니까 안 얻어먹어야 됩니까? 잘못된 것의 욕은 얻어먹는 게 좋습니까 안 얻어먹는 게 좋습니까? 얻어먹는 게 좋습니다. 얻어먹으면은 욕을 얻어먹었으니까 욕 한 거니까 하늘나라서 욕 얻어먹을 게 없어. 영원한 나라에 가서 욕 얻어먹을 게 없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좋은 거 아닙니까? 또, 욕 얻어먹을 게 있는데 욕 얻어먹었으면 욕을 하니까 고치기가 쉽지 안해요? 고치기 쉬우니까 또 유익이지. 욕 얻어먹고, 욕 얻어먹으니까 하늘나라 가서 욕 안 얻어먹을 터이니까 또 유익이지. 고칠 거 없는데 욕 얻어먹으면 가만히 참고 있으면 이거 참 놀고 복덩이 받습니다. 가만히 입만 다물뜨리고 암말도 안하고 그저 욕을 해도 가만히만 있으면은 하늘나라의 상급이 크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욕 얻어먹는 데에는 이래도 유익 저래도 유익 유익이지마는서도 칭찬받는 거는 이래도 저래도 다 손해지 아무리 성자라도 칭찬받는 거는 손해지 유익은 없습니다.
이래서 여게서 첫째는 이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인 것인 것을 알고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준비하는 세상. 그런데 준비를 하는데 어떻게 몇 가지로 준비해야 된다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 준비해야 된다 했습니까? 세 가지. 행위, 자체, 하나님과의 관계 요 삼면으로 준비를 해야 됩니다.
준비를 해야 되는데 준비하는 데에 그 표준, 기준은 뭣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준비해야 된다 했습니까? 기준은 뭐입니까? 사도 바울? 다니엘? 스데반? 아브라함? 우리가 그러면 준비하면은 자기 행위 준비하고, 자체 준비하고, 하나님과 관계 준비하는데 그 준비는 뭣을 기준으로 하고 뭐와 같이 하면 됩니까? 뭣을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 준비해야 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뭐 닮으라고 불렀다고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뭐라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스도는 원형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꼭 같은 모형적 우리가 되도록 그렇게 여게다가 기준을 두고서 우리가 준비를 해야 됩니다.
해야 되는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다가 기준을 두지 안하고 옆에 사람에게다 기준을 뒀소. 이 사람하고 자기하고 둘이 비교했어. 이 사람하고 자기하고 비교해 보니까 자기가 낫거든. 그러니까 교만해졌지.
우리는 어떤 일로든지 사람을 상대할 때에 그 사람과 나와의 비교하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했는데 나는 이렇게 하지 안했느냐?’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값 주고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지체요,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나라요, 예수님의 제사장이요, 예수님의 선지자요, 전부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행한 것같이 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것은 자기가 모를지라도 자기에게 행한 것 알 수 있으니까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대로 그대로 해야 됩니다. 이러면 사람하고 대할 때에 이 사람은 ‘너는 내게 이랬는데 나는 네게 이래 하지 안했느냐?’ 그렇게 하면 벌써 그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벗은 사람이라.
‘너는 나한테 이랬는데 나는 너한테 이렇게 하지 안했느냐? 네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안했느냐?’ 그 사람과 나와의 둘을 상대해서 비교하면은 이거는 예수님의 대속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세상 사람이지 예수님의 대속에는 상관 없어.
우리는 사람을 상대할 때에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는 어떻게 하고’ 사람 비교할 게 아니라, 그러면 그 사람이야 나에게 어떻게 했든지 예수님이 내게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한 그대로 자기가 그 사람에게 하는 것이 그것이 자기가 비교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비교해야 되고 사람과의 자기 행위를 비교해 가지고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에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이제 예수님의 대속에 상관 있는 사람은 사람과 자기와 비교하지 안하고 주님과 자기와 비교해서 ‘주님은 이렇게 했는데 나는 이렇게 했다’ 자기 행위와 주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거 이것을 비교해 보니까 아무리 해 봤자 자기는 참 만삭되지 못한 자요 또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는 그런 결론이 나게 됐던 것입니다.
이래서, 이 바리새인은 ‘이 사람은 이런데 나는 이렇습니다’ 그 사람하고 자기하고 비교를 하니까, 비교를 하니까 거게서 제가 교만이 나오고 멸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고것이 틀렸어.
그래서, 우리는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사 건건의 모든 언행심사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언행심사는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이신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내 언행심사가 예수님대로 됐나 안 됐나, 예수님같이 내가 말을 했나 안 했나, 예수님같이 됐나 안 됐나, 내 마음을 예수님같이 가졌나 안 가졌나, 내가 이 사람에게 대해서 예수님이 행한 거와같이 그렇게 했나 안 했나? 여게다가 기준을 예수님에게 두는 데에서 주님 앞에 칭찬을 받았고, 바리새인은 기준을 사람에게다 두고 하나님께 두지 안했기 때문에 거게서 교만하고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이러면, 이것도 여기 본문에 어데 나왔느냐? 이 기준은, 둘째로 우리가 배워서 깨달은 것은 뭐이냐 하면 기준은 하나님에게 두라, 표준을 하나님에게 두라 했는데 표준을 하나님에게 두라는 것이 이 본문 성경에서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이 사람과같이 나는 토색하지 안하고 불의를 행치 안하고 간음하지 안하고’ 이제,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사람과 자기와 비교했기 때문에 사람을 기준으로 했지, 사람으로 기준을 하니까, 사람을 기준하다 보니까 자기는 훌떡 올라갔거든. 너무 많이 올라갔다 그말이오. 하나님을 기준하면 푹 내려왔을 건데. 이것이 본문에서 나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 깨달음을 이렇게 깊이 넓게 깨달아 가지고서 바로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 껍데기만 수박 겉핥듯이 하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되지를 안해. 암만 가르쳐도 속에 진리를 깨닫지 못해요. 교역자들도 깨달을라고 애를 쓰지는 안하고 그저 앵무새 모양으로 자꾸 녹음 테이프 모양으로 전달만 하다 보니까 아무 변화가 되지 안해? 하나만 깨달아도 사람이 변화가 될 터인데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가 되지를 안합니다.
셋째로, 그러면 우리가 이와같이 지금 하나님을 기준해서 영원을 준비한다고 하면은 준비하는 데에 그 법칙, 준비하는 도리는 뭘로 삼아야 될 것인가? 준비하는 도리는 뭘로 삼아야만 이 준비하는 도리가 바로 될 것인가? 보니까 바리새인도 그 삼기를 구약 성경을 도리로 삼아서 했고 세리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자복했고 그들 두 분들이 다 도리는 하나님의 구약 성경, 그때는 구약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이 말씀을 도리로 삼기는 삼았지마는서도 실지로 저희들이 이 도리에 복종하지를 안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들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로 삼았다 그말이오. 이것도 이 본문에서 나온 해석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그 이치는 유일한 법칙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서 구원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일호는 성도들은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세상, 불신자들은 세상이 자기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 자, 준비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은 됩니까 수월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리고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세상이 수월하고 편하고 좋은 세상이고, 우리는 준비하는 세상이니까 준비에는 좋은 준비 큰 준비일수록 준비하는 데에 준비하기가 고생스럽습니까 평안합니까? 준비하는 게 고생스럽습니까 평안합니까? 고생스러워. 성도들은 세상에 고생하는 성도라. 왜? 준비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성도라. 이러니까 준비 고생은 괴로운 게 아닙니다. 준비를 알고 고생하는 것은 괴롭지 않소. 괴롭지 안해.
내가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 만나니까 말하기를, 그 오뉴월 이 더운 때에도 하루 네 시간 자고, 스물 네 시간인데 네 시간 자고 밥은 먹는가 마는가 이라고 스무 시간을 마구 이 깡깡 쬐운 더운 데서도 들리 막 조아대고 이래 가지고서 매일 스무 시간씩을 들이 조아대고 네 시간만 자고 스무 시간은 뭐 밥도 먹는둥 마는둥 이래 가지고서 막 조아대는 이것이 이 세계에서 지금 세상 모든 사람들이고 선진국들의 사람들이라. 그 준비는 그렇게 뭐.
일본 나라에서는 얼마 전에는, 지금은 그런 말은 좀 없어졌는데 얼마 전에 그 대학생들이 모여 가지고서 입학 시험을 치는 데에, 시험치는 데 시험치는 데에서 합격을 하지 못하고 그만 낙제를 했어. 낙제한 그 학생들을 모든 학생들이 우 모아 가지고 세워 놓고 총을 놔 쏴 죽여 버렸어, 전 학생들이.
왜? 너 같은 놈은 우리 일본 나라에 살지 못한다. 우리가 이 이차 대전에서 이렇게 온 세계의 똥이 되고 이렇게 패전했겠는데 이런 지금 압제받고 천대받아 가지고 있는 이때에 네가 뭐 놀고 평안하게 뭐 하느라고 이놈아 준비 안 해 가지고서 낙제 했노? 낙제 점 먹었노? 이래 가지고 학생들이 주 모여 가지고 쏴 죽여 버렸대요. 그게 신문에 났어.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렇게 패전해서 패국된 뒤 몇 해 후에, 몇 해 만인데 이 세계에서 지금 부자로서 몇째 부국입니까? ○ 장로님 몇째 부국이라 합니까? 이 모두 다 예수 믿는 사람 다 됐네. 예수 믿는 사람 다 됐어. 뭐 몇째 부자? 미국이 일등인데 미국이 제일 부자인데 미국보다 지금 나을라고 하는데, 미국보다 낫지는 지금 못 하지마는 미국보다 나을라고 애를 쓸만치 그만치 비교가 돼요.
그렇게 준비 안 하면 안 되는 거라.
이런데, 이 준비하는 세상인데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라 하는 사람은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래.
준비가 무슨 준비인데? 행위 준비니까 행위 준비니 행위에 고생을 당해야지. 사람 준비니까, 사람이 고생을 당해야지. 하나님과 교제 하나님과 결합 준비니까 그 결합에 고생을 당해야지. 고생 없는데 무슨 좋은 성과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세상을 뭐인지 모르고 착각하는 데에서 불만 불평이 다 오고 있다 그말이오.
세상이 뭐인지? 준비하는 세상.
준비하는 데 기준은 뭐입니까? 자, 큰 소리로 한번 해요, 다. 학생이 돼 버려요.
여기 뭐 아무리 박사가 있어도 학생이 돼 버려요. 박사도 대답해요. 세상은 뭐 하는 세상입니까? 저 뒤에도. 세상은 뭐 하는 세상입니까? (준비하는 세상) 둘째로 기준은 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 셋째로 법칙은 뭐입니까? (신구약 성경) 예.
그런데, 이제 방편을 배웠는데 방편은 실제 시공하는 방편을 배웠는데 방편이 몇 가지라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뻐뜩 들어, 저 뒤에 안 보는 사람도 새벽 기도 안 나온 사람도 알도록. 뻐뜩 들어 봐요. 새벽 기도 안 나온 사람은 몰라, 암만 그래 쌓아도. 새벽 기도 나온 사람 알지. 들어 봐요, 들어 봐. 이 넷, 네 가지.
네 가지인데 두 가지라, 두 가지인데 네 가지라. 두 가지라니? 두 가지인데 뭐이 두 가지인가? 회, 후회하고 고치는 거 그게 회하고 개하고 두 가지라.
그러니까, 회가 자기가 이미 언행심사에 해 놓은 거, 이미 언행심사에 해 놓은 거, 설교를 했든지 뭘 했든지 자기 해 놓은 것 중에 잘된 것은 볼 필요가 없어. 해 놓은 것 중에 잘못된 거 고것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 아무리 설교를 부흥사가 잘해서 온 교인들이 막 은혜를 받아 야단을 지기도 그 부흥사가 ‘하, 오늘 설교야 멋지게 했다. 오늘 설교는 참 잘했다.’ 했으면 부흥사 죽었습니다. 고다음부터 죽었소, 벌써 그 시간에 죽었어. 송장이라 희망이 없어. ‘내가 오늘 설교한 가운데에 요거 잘못됐다. 요거 잘못됐다.’ 잘못된 거 발견하고 고다음에 하나는 뭐이야? ‘요렇게 할 걸' 잘할 거 발견하고, 그러면 잘할 것은 아직까지 미래의 소망입니다. ‘요렇게 고쳐서 잘 할 걸’ 요거 잘못된 거, 잘못된 거 발견하고 어떻게 잘 고칠 거 발견하고 고거 두 가지.
또 하나는, 자기가 해 놓은 것을 검사하고 조사해 보니까 미비된 거, 준비된 거는 볼 필요가 없어, 준비된 거는. 미비점을, 갖추지 못한 미비점, 갖추지 못한 거, 부족점 미비점을 발견하고, 미비점만 발견하면 사람 죽어요. 미비점 발견하고 고다음에는 보충할 점을 발견해. ‘요게 미비됐는데 요러면 보충된다’ 미비점을 발견하고 그렇게 어째 보충할 점을 발견하고 그라면 몇입니까? 몇입니까? 자, 그라면 인간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소망하고 그래야 되고 우리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그래야 되고, 어쨌든지 세상에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성장되는 것은, 성장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네 가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는 대로 네 가지. 요 네 가지가 없으면 성장은 못 하는 것입니다. 전진은 못합니다. 네 가지가 없으면 개량은 없습니다. 네 가지가 없으면 새로운 발명은 없습니다. 새로운 건설은 없습니다. 요 네 가지가 있는 데에서만 성공은 있고 성장도 있고 발전도 있고 전진도 있고 발명도 있고 개량도 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없으면 헛일이라, 이 네 가지.
이랬는데, 요게다가 주님이 기록하기를 그래 기록했습니다.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요렇게 주님이 비유를 하시면서 기록해 놨습니다.
그러면, 이 기록해 놓은 것은, 기록해 놓은 것은 고 두 가지, 두 가지를 인해서 가슴을 치는 이 뜨거움이 있는 것을 주님이 칭찬했습니다. 이 가슴치는 건 두 가지에 대한 이 가슴입니다. 잘못된 거 갖추지 못한 거, 미비점과 잘못된 점 이 두 가지를 인해서 가슴치는 그 뜨거운 뜨거움, 가슴치는 이 뜨거움. 이것을 주님이 보고 ‘너는 희망 있다, 너는 의롭다, 너는 희망 있다, 유망하다.’ 만족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데 대해서 잘못됐다 하면은 피하이 웃고 ‘잘못했습니다’ 뭐라 하면,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 소리가 죽기보다 힘들지마는서도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안 할 수 없어서 잘못됐다 할 때는, 잘못됐다 할 때에는 잘못된 자기를 칼로 찌르면서 이 잘못된 데 대해서 마음에 이제 ‘잘못된 요놈을 우사를 시켜야지. 녜, 잘못 됐습니다. 뭐 똥이라도 두터쓰라면 두터쓰겠습니다.
잘못됐습니다.’ 그거는 자기가 자기에게 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분해서 자기를 망친 악령 악성 악습 요 옛사람 자기 고놈이 분해서 고놈을 죽이는 칼을 들고서 지금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됨에 대해서 가슴을 치는 이게 있어야 되고 또 자기의 미비점에 대해서 가슴을 치는 이게 있어야 되고, 그라면서 그는 낙망만 하고 있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이제 내가 이 잘못된 거 요렇게 고치겠습니다. 도와 주시면 요렇게 고치겠습니다.’ 고칠 이 소망에 대해서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에게 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는, 자기 미비점을 ‘요렇게 내가 구비하겠습니다’ 미비점을 구비할라고 하나님이여 도와 달라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그 은혜를 간구하는 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만족했습니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성장은 없고 희망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어데까지라도 이 두 가지, 미비점 잘못된 점 요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 필요가 없어. 그 사람은 한 시간 살면 산 것만치 하늘에 만들어 놓은 상급도, 상급 삭제되지 아무 효력이 없어. 이거 없는 시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도 손해보고 자꾸 망하는 것뿐이지 유익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거 없으면 살 필요가 없어. 이거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죽고 있는 것이라, 이 두 가지가 없으면.
또, 이 두 가지로써 가슴을 치는 이 뜨거움을 우리가 가져야 되고, 이 두 가지 성장시킬, 이거 성취시킬 이거 구비하고서 앞으로 개량 개조할 여게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도우시면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렇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어 하나님께서 만족해서 ‘이제 가거라. 안심하고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마’ 하는 이 하나님의 응낙을 받는 이게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이래서, 내가 어떤 새벽에 보니까 저 오층에 들으니까 주일학교 인도하는 어떤 반사가 설교하면서 그런 말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과부의 기도를 말하면서 원한 품는, 이거 속에 밤낮 잠이 오지 안하고 견디지 못하는 원한, 원한적인 기도가 있어야지 원한이 없는 그런 기도 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흐리멍덩한 그런 기도는 소용 없습니다. 여게 가슴을 치는 원한적인 기도, 요 원한적인 기도를 18장 1절 이하에부터 말해 놓고 난 다음에 고다음에 9절로부터 요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일호, 이호, 삼호, 요것을 깊이 깨닫고, 요 하나만 해도 사요.
여러분들, 어떤 사람을 상대해서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할 때에는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는 불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고 ‘천인 만인이 다 이런데 내가 뭐 혼자 고집 세워서 할 게 뭐 있겠느냐?’ 이 사람 되고 맙니다. 아무리 위인이라도 낙망하고 불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마지막에는 사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준을 사람에게 두지 안하고 하나님께 둬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는 이제, 주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내게 대해서 행하는 일, 주님이 이 사람에게 대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 그것과 주님이 내게 대해 어떻게 하는 고것을 상대하면 주님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요것을 상대하면 아무리 잘 해 놓은 사람이라도 자기는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연약한 인간이요, 자기는 또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는 자기의 단점 그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단점 나오지 ‘요렇게 할 걸’ 새로운 새로 개조할 점 나오지 새로 구비할 점 나오지 이것이 사는 생활이오. 이것이 어데서라도 만족하고 평안한 생활이오.
그런고로, 이렇게 주님을 기준해서 사는 사람은 어데서든지 ‘이거 내가 잘못했다 요렇게 할 걸’ 잘못됐다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거게서 교만이 다 깨져 버리고 원망 불만 불평 지옥이 다 깨지고, 잘못된 것을 발견할 때에 지옥이 다 깨져 버리고, 요렇게 하겠다 하는 소망을 자기가 생각할 때에 모든 용기가 거게서 다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자만이 걷고 있는 행복의 천국 생활이요, 시온의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일호, 이호, 삼호, 사호는 자, 사호는 방편인데 방편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방편은 몇 가지요, 손가락으로? 넷 요래 들어요, 넷. 방편은 네 가지라, 네 가지.
네 가지인데, 하나는 잘못된 거 깨달은 거. ‘요거 잘못 됐다’ 또 앞으로 내가 ‘요래 하겠다’ 깨달은 거. 또 하나는 `요면은 부족하다. 구비하지 못했다. 요게 지금 미비하다.’ ‘요렇게 해서 다 모든 걸 구비하겠다.' 요래 가지고 했는데 이 네 가지 요것이 방편입니다. 네 가지 방편인데 네 가지 방편은, 잘못됐다, 앞으로 요래 하겠다. 요렇게 미비돼 있다, 요렇게 구비하겠다.
요라는데, 요 넷을 말이요, 구비 개조, 또 잘못된 또 미비, 요 두 가지가 합해 가지고서, 요 두 가지가 합해 가지고서 현실에서 하나가 되어지는, 요 두 가지를 합해서 하나되는 것은 고게 뭐이냐? 잘못됨하고 앞으로 요래 하겠다 하는 거 하고 고거 둘이 합하면 고거 뭐이냐? 둘이 합하면 고게 잘못됨이 됩니까, 앞으로 요래 하겠다 함이 됩니까? 어떻습니까? 고 둘을 합하면 뭐이 나옵니까? 잘못됨도 아니요 앞으로 요래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고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된 것이 있으니 고것이 뭐이냐? 우리 현실에서 만들어 낸, 현실에서 만들어 놓은 회, 개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회개가 한테 붙어야 돼요. 회개가 한테 붙어 가지고서 고것이 회개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참 하나만 배워도, 인인 관계에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천국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누군가? 기준을 하나님에게 두는 사람이오. 또 세상을 만족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누구냐? 세상을 준비하는 세상으로 사는 사람이요, 또 자기의 살 법칙을 신구약 성경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할 일이 생깁니다, 실직이 안 돼. 항상 할 일이 생겨.
이러니까, 뭐 원망을 해도 자기에게 있지 딴 사람에게 할 것이 없는 거고 이 법칙을 생각해 보니까 또 하나님이 충성하면 해 주마 했기 때문에 요거 발견하니까 요대로 하면 또 될 거고 될 거고 또 되고 전체가, 기독자가 바로 사는 사람은 소망에서 풍성하고 희망에서 넘치고, 자, 희망 있는 고생은 그 고생이 고생이 됩니까 뭣 됩니까? 제가 일본 나라 가 있을 때에는, 일본 가 있을 때에는 나는 돈이 없어서 공부는 못하고 뭐 밤으로 이래 어째 하다가 공부하는데 어떻게 부러운 일이 있느냐? 사각 모자가 참 부러워요. 그때 거기 사람들은 모두 사각 모자 쓰고, 사각 모자 쓴 사람들은 낮에 해걸음판에 떡 나오는 거 보면은 이제 공부하다가 나왔다고서, 그 속으로 모르지마는. 그 사각 모자 쓴 사람이 그때 대학생들도 쓰고 또 고보도, 고등 보통학교라 하는 고보도 쓰고 이래 쓰는데 그 쓰는 사람들은 모자를 말이요, 모자를 이거 뜯어서 써요. 모자를 쥐뜯어 가지고 모자를 막 뒤 얽어서 집어서 이래 쓰고, 또 옷도 전부, 옷을 사 가지고, 나중에 들어 보니까 옷을 사 가지고 막 째요. 째 가지고 뭐 막 두덕두덕하이 집어서 그래 집은 옷 입고 또 집은 모자 쓰고 또 게다라고 있는데, 나막신, 게다라 하는 것은 다까게다라고 굽이 이만치 높아요. 이만치 높은 다까게다 신고 질질 끌고 그라면 막 거지라요. 모자도 거지, 옷도 거지인데 이제 그 사각 모자 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지나가면 다 우러러 봅니다. 왜? 희망이 있는 거짓노릇 하기 때문에 희망 때문에 거지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이가 이래 우러러 봐요.
이러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고생하고, 소망 가지고 배 곯고, 소망 가지고 어려움 당하고, 소망 가지고 수고하는 것은 기쁘고 즐겁지, 소망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지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자가 하늘의 소망을 이걸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항상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주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이 뭣 하는 세상이며 어떻게 살아야 되며 무엇을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며 어떤 법칙이 우리의 법칙이며 어떤 것이 우리의 성공하는 방편인 것을 가르쳐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대로 실행 실천하여 다 실상을 이루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또, 주님 앞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하기로 약속하고 작정하였사오니 주께서 용기를 주시고 담력을 주시고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다 실행의 결과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