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1 01:04
바울의 소망
1980. 3. 26. 수새
본문: 빌 3: 4- 12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에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은 사도 바울의 자기의 말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사도 바울의 소원은 바울의 소원이 아니고 성령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신데 하나님의 소원 중에도 우리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온전자를 만드실 책임을 지시고 만드시는 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소원은 우리가 가져야 할 소원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소원한 이 소원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 소원했는데 사도 바울이 소원한 구원은 전적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원한 것을 여기에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리스도를 얻을려고 애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려고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 소망하고 소원하는 이 소원을 가진 것을 여기에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라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소원을 가졌으니 사도 바울 그 사람의 단독 소원인가? 그 사도 바울 그 사람의 단독 소원인가 단독 소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사도 바울 자기 의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사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에게 와 가지고 사람을 통해서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사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사람의 말도 있고 짐승의 말도 있고 배암의 말도 있고 여러 말이 있지마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런 것을 들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저게 대해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그 종류는 여러 가지 종류의 말씀을 했지마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장로 시취 목사 시취할 때에 이 말씀이 그 성경 시험 문제에 났는데 이 문제를 옳게 답을 쓴 사람이 몇 사람 없었습니다. 늘 그렇게 말했는데도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은 어째 사람의 말도 당나귀 말도 배암 말도 이 성경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느냐? 그 이유를 답하라 이랬는데 그 답을 바로 한 사람들이 많지를 못했습니다. 몇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말이 성경에 기록 됐는데 이 모든 종류의 말을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이 배암이 이렇게 말했다 나귀가 이렇게 말했다 또 포도나무에 대해서는 뭐 이렇다 전부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다 인용하시고 그런 것들은 들어서 그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몇 가지의 말씀을 했던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듣고 또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통해서 이 빌립보서를 기록을 했지마는 바울 자기의 단독 의사는 하나도 여기에 나타내지를 못했고 다만 하나님의 의사를 전능한 능력과 구원의 사랑으로 사도 바울에게 알려주고 사도 바울이 이 하나님의 뜻 외의 것은 털끝만한 것도 단독 행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하셔 가지고 기록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바울의 소원 같으나 이 소원은 먼저 하나님의 소원이신데 하나님의 소원이 그 다음으로 바울의 소원이 되도록 성령님께서 감동시켜 가지고 바울의 소원이 되어 이 소원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을 사도 바울도 받아 바울의 소원도 되어 가지고 기록한 것이 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여러모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고 그리스도를 얻을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렇게 한 이것이 바울의 소원으로 기록된 것이나 바울의 소원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소원이, 소원이 된 하나님의 소원 이 소원이 바울에게 성령으로 감동시켜 바울의 소원이 되게 해 가지고 성경에 기록한 정확무오한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이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인데 바울이 영감 받아서 바울이 자기 소원이 되어 가지고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 구속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의 소원인 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 소원이 사도 바울이 영감 받아 자기 소원이 된 거와 같이 우리도 우리 소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 우리 소원도 바울의 소원이 된 것처럼 그만큼 정확한 소원이 될 수 있는 그것이 이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의 공로가 없이는 아무도 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또 아무리 말을 해서 들려줘도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우리가 바울이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원한 이 소원과 같은 이 소원이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 소원이 있어 이 소원으로 인하여 자기가 어떤 사람이 어떤 생활이 어떤 행동이 되기를 원한 그 소원이 성령의 소원인데 바울의 소원 된 것처럼 또 우리도 성령과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소원돼야 합니다.
그리되면 성령님이 원하시고 이루시는 그 역사가 바울에게 이루어짐 같이 우리에게도 이뤄져서 바울 같은 그런 온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원한 것을 지금 말합니다. 4절 이하에 있는 것은 육체를 신뢰 할 만하니 그 말은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말입니다.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따질려고 하면 바울보다 이상 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따질려고 하면 바울보다 더 이상 구비한 사람이 없는 것을 여기에 가르쳐서 말합니다. 왜? 다른 사람이 자기가 육체를 신뢰 할 만 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더욱 그러하다 무엇이 잘 나서 그러해 이제 5절에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서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만 구원할려고 했지 이방인은 짐승같이 취급해서 구원줄기를 주지 안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주지 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는 약속을 그때에 나타내지를 아니하셨고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는 섭리하지 안 했습니다. 손을 떼고 이방인에게는 손을 대지를 안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은 짐승같이 취급을 했고 또 하나님도 짐승이라고 이렇게 늘 말씀을 했고 이방인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아무 소망이 없고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알려줄 자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완전히 소망이 없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원수로 그대로 돼 가지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때에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손을 잡고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삼 일만에 할례를 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이야 얼마든지 더러워지거나 말거나 내뒀는데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의 자손만은 깨끗케 하실려고 애를 써서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와 같은 이런 세례를 줬습니다.
할례라는 이 할례를 줬습니다. 할례는 양피를 그어서 자기에게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모든 더러운 것을 제해 버리라는 그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하나도 이 할례를 하나님이 시키지도 안 했고 받을 줄도 몰랐고 또 받아 봤자 소용도 없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케 하시는 그 의식으로 할례라는 그 할례를 줬습니다.
오늘 기독교에만 세례가 있는데 세례나, 침례나 다 같은 말인데 세례가 있고 다른 데에는 이방인에게는 이종교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종교도 앞으로 그것들이 기독교를 미혹시키기 위해 있는 잡초이기 때문에 그들도 이제 앞으로는 아마 세례 주는 일을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이 기독교를 모방해 가지고서 기독교에서 끌어다가 하는 것이요 기독교는 그들의 것을 끌어온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하나님이 천하만민 가운데에 하나님이 손을 대시고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한 백성은 이스라엘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족속이요 이러니까 천하에 뛰어난 족속입니다. 그 역사에도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대적하기는 대적해도 왜 대적했느냐? 이스라엘 족속이 특수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족을 항상 시기하고 질투해 가지고서 대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때는 이방족속이 얼마나 되든지 이방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과는 항상 대립적이요 이방족속은 전부가 다 이스라엘 족속이 부럽고 탐스럽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그 율법시대에도 비록 민족은 작은 민족이고 나라는 작은 나라이었지마는 세계에 있는 민족은 다 그 민족을 우러러 봤고 그 민족에게서 뭣이 새것이 흘러 나와 가지고서 이방인들이 다 갈라먹고 갈라 살고 이래 살았습니다.
왜정 말년 때도 제가 어떤 그 서면에서 봤는데 일본 사람들이 미국나라는 자기네들이 능히 맛있는 밥먹듯이 그까짓 것 미국나라야 다 능히 먹을 수 있다 해서 미국이라는 그 미(美)자를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지 않고 쌀 미(米)자를 썼습니다. 쌀과 같이 먹을 수 있다해서 미국이라는 그 미(美)자를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지 안하고 쌀 미(米)자를 썼습니다. 쌀과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그런 뜻과 또 그런 지금 욕망에서 한 것입니다.
그라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으로 아주 천대하고 멸시하고 보잘것없이 그까짓 거야 다 우리가 뭐 음식 먹듯이 잡아먹어 버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는 그 일본 사람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이라 그들이 제일 부러워하고 존대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에는 세계가 좁아지고 아주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언제든지 이 유태인은 어떤 그 이방인을 만나도 뒤로 저뻥합니다. 저뻥하면서 첫 인사가 나는 유태인이라 나는 유태인이라 그걸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그걸 말합니다.
왜? 그거는 아주 짐승과 사람같이 너는 짐승이고 나는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나는 사람이라 그만큼 모든 지능이 탁월했고 도덕이 탁월했고 또 그 사람들의 그 인격이, 인품이 탁월했습니다. 그만 따라 갈 수 없는 그런 족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팔 일만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나는 깨끗해진다 하는 하나님의 그 결례 하나님의 그 성결시 나는 참여를 해서 하나님이 성결케 하는 성결을 받은 사람이라, 천하에 민족 중에 제일 탁월한 이스라엘 민족이라.
"베냐민 지파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열두 지파가 있었는데 열두 지파 중에 제일 애호를 받고 있는 베냐민 족속이라, 유다 족속이 하나님 앞에 약속은 있었지마는 제일 귀여움을 받고 산 족속이 베냐민 족속입니다.
내나 라헬이 낳은 요셉의 바로 그 동태 형제인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하는 그 말은 그 당시 문화가 히브리 문화가 제일 높았습니다.
이러기에 그 구약을 기록할 때에는 히브리어로 기록했습니다. 왜 히브리 그 어가 제일 세밀하고 제일 발달되었고 제일 그 범위가 넓고 히브리 그 문화를 따라온 문화가 세계에 없기 때문에 그 당시의 문화로서는 히브리어가 제일 널리 공통어가 되어졌고 가치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구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또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할 때 그 당시는 헬라의 그 문화가 세계에 제일 앞섰습니다. 그래서 그 헬라어로 성경을 성경원본을 하나님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 세계의 문화에 제일 가는 그 문화의 족속 문화민족 문화 국민으로서는 세계에 제일 앞질러 간 그 히브리 문화 족속 중에도 그 중에도 탁월한 자기란 걸 말합니다. 탁월한 것, 이 바울은 문화의 그 세계에 제일 일선을 걷고 있다 할만한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러면 히브리인 중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중에 제일 잘 지키는 그 유대인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파라 하는 그 파가 이스라엘 중에도 하나님 율법을 제일 잘 지킨 그 교파입니다.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교회를 핍박하고" 열심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 이스라엘 종교인 유대교인 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되 이렇게 공경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공경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바울은 성경대로 공경하지 안 한다 하면 그 사람을 그저 둬 두는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립니다. 이런 열심쟁이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데 예수님께서 와서 하시는 일을 보니까 아무래도 자기네들 깨달은 대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있고 이러기 때문에 마구 단합을 꾸며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못박았으면 이제 다 죽어 버렸으니까 없다 싶었는데 그 뒤에 사도들이 나서 가지고서 또 다시 예수 믿는 사람이 시작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7장에 보면 그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그때에 사도들 다음으로서는 제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다음에는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을 가려 가지고 집사를 내자 해 가지고 사도들이 명령해서 사도들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서 집사들을 선택했는데 집사 중에 제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스데반을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고 하나님의 도에 위반된 도를 전한다 해 가지고서 뭐 말로 핍박을 할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막 잡아죽여 버립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어지럽히고 하나님 섬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율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그냥 '너 그것 고쳐라 그래하지 말아라' 이라는 게 아니고 그만 가 가지고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고 하나님의 율법 지키는 그 열심으로서는 그 교회를 어짜든지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지럽게 한다고 해서 죽이던 그런 자라 말입니다. 핍박한다 말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 구약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은 호리라도 한 성구라도 지키지 안한 성구가 없었고 하나도 흠이 없는 자라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는 그 말입니다.
이렇지마는 이렇게 세상적을 인간적으로 또 구약적으로 말한 사도 이 바울, 바울 사도 되기 전에 사도 되기 전에 이 바울 그 이상 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마는 이것이 지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 헛일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았다. 하는 걸 여기에 말합니다.
"없는 자로다"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에게 유익 되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는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라 되고 또 하나님의 법도대로 이 결례의 그 의식을 행한 자라야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또 하나님의 도를 어지럽게 하는 그런 모든 것을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멸해야 되고 하는 이것이 다 자기 구원에 유익이 되고 자기가 하늘 나라에 가 가지고 영광스러워지려고 또 자기가 하나님을 어짜든지 그 선조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을 때에 망하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조들이 하나님을 잘 믿을 때에는 나라가 잘 됐고 잘못 믿을 때에는 나라가 망하고 하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이 잘 되기 위해서 국가가 잘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또 내세에 천국에 잘 되기 위해서 모두다 자기가 잘 되는데 필요한 것은 누구보다도 제일 구비하게 갖추어 가지고서 했었다.
그러나 유익하던 것을 이런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 좋도록 그리스도 좋도록 그 말이 아닙니다. 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요 말을 잘못 해석하면 뜻이 아주 거꾸로 돼 가지고 잘못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말은 그리스도를 위한다 그 말은 그리스도를 좋도록 위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기에게 오는 이 은혜 이 구원 이것을 위하여 이거 크고 이것이 좋고 이것이 참되기 때문에 딴 것은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것을 위하여 이것 외에는 다 헛되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 다 자기가 과거에는 필요로 느꼈던 모든 것은 이제는 다 버려버렸고 다 그것은 뽑고 어리석은 것을 자기가 사도가 되고 난 다음에는 깨달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그리스도의 이 구원 이것을 위하여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이것이 전부 나를 해하였던 것 자기가 족속 자랑하고 또 문벌 자랑하고 또 학벌 자랑하고 또 자기 세상에 지위 자랑하고 또 과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유대교적인 그 종교를 자랑으로 했던 그런 것들이 유익이 적다 하는 것보다도 그것이 자기를 전적해하였던 것을 이제 깨달았다 그게 전부 사망 아래에 있는 것인데 사망아래 있는 그것이 사망을 초월한 완전의 구원에 이르는 것인 줄 알고 속아 살았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전적 해하였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이제 해하였다는 것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해로 여길 뿐 아니라 "해로 여길뿐더러" 이 말은 해로 여길 뿐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해가 되었다는 그것을 자기가 지금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이것이 나를 해롭게 한 것뿐이었다 하는 것을 이제 내가 깨달았고 이제는 그것을 나를 해하는 것으로 내가 인정하는 것은 나를 해하였다는 나를 해하였다는 나를 해하였다는 나를 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제는 그것을 해로 여김은 그것을 내가 그것이 나를 지금 현재 직접 해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 전부가 나를 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그러면 안다는 말은 여기에 자기가 인식한다는 그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를 안다 그 말은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돈만 아는 인간이다. 저 사람은 권세만 아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없이 항상 저만 아는 사람이다.
그런 앎을 말합니다. 그런 앎을.
그 사람은 뭐 그 사람에게 가 가지고서 그 무엇을 타협을 할려고 하니까 아니다. 타협을 해도 소용없다 그 사람은 예의도 체면도 인정도 도의 뭐 혈육도 사회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돈만 아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이게 아는 것이라 그 말이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내가 이제는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만 아는 그리스도만 아는 요것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주로 한다는 말이요 그리스도와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이제 다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그 말입니다.
고것을 나타내서 안다고 이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돈만 알고 사는 것보다도 전 인류를 아주 박애하는 인류를 박애하는 노벨상 안 받습니까.
인류가 제가 인류를 아는 것, 국가를 아는 것, 민족을 아는 것, 뭐 명예를 아는 것, 이 세상에 도덕을 아는 것 뭣을 자기는 이게 이것이 나는 위주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만 알고 살지마는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만 알고 살지마는 어떤 사람은 저만 알고 살지마는 아는 것이 많지마는 천하인간이 모두다 자기는 그것만 알고 그것만 본다고 안다 말은 그것만 귀중하게 평가하고 그것만 좋다고 비판하고 그것만 위주로 그것만 중심으로 그것만 소원으로 그것만 가치로 알아서 산다는 그 말인데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이 많지마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리스도 예수만을 아는 그리스도, 저 사람은 죽는 것도 몰라 그리스도 밖에는 몰라 저 사람은 사는 것도 몰라 예수 밖에는 몰라 뭐 수치고 뭐 매맞고 죽고 갇히고 부자 되고 가난하고 그런 거는 그 사람 모르는 모양이라. 그만 예수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라 그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이렇게 그리스도와 예수만을 아는 이것이 가장 이것이 완전하고 영원하고 고귀하고 이게 가장 참되고 옳다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는 것입니다.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누구 좋아라고 누구를 위한다는 말입니까? 그를 위한다 말은 그리스도를 좋도록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위한다는 말입니까? 요것 무슨 말입니까? 그를 위하여. 잘못 생각하면 내가 아무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좀 많이 위해주지 안 했느냐 부모가 아들 자녀를 위해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서 형이 동생을 위해서 동생이 형을 위해서 요런 말로 듣기 쉽다 그 말이오. 요런 말로 듣기 쉽습니다.
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직인데 직책인데 직명인데 직분의 이름인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말은 그리스도가 역사 하시는 그 구원을 위하여 그 은혜를 위하여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역사 하시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말은 그리스도 그분 좋도록 하라는 그 말이 한다는 그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좋도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이런 구원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 구원을 그 구원받기 위해서 그 구원받기 위해서 그 은혜 받기 위해서 그것을 가르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말입니다. 요걸 잘못 들으면 안돼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손해보고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다는 말은 다 그것을 좋아하고 그걸 귀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과 잃어 버렸다는 말이 좀 다릅니다. 그 버렸다는 것은 혹 그것은 싫어서 더러워서 안돼서 버렸다 하는 그 말이오.
잃어 버렸다는 말은 그것도 좋고 아깝고 좋지마는 유익하고 좋은 것이지마는 그것보다 이게 좋기 때문에 더 큰걸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렸다 손해봤다.
여기에는 잃어 버렸다 말은 손해봤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을 다 손해 봤다 왜 그것보다 그리스도 얻는 것이 비교 못할 만치 높고 크고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도 필요하지마는 내가 그런 것을 잃어버렸다 손해봤다 그 말입니다.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지마는 그만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의 유익이지마는 그와 그리스도 예수를 예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예수를 얻기 위해서 부득이 둘이 있을 때에는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지마는 그것이 싫어서 더러워서 똥 같아서 더러워서 버린 게 아니고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지마는 그리스도 예수도 좋고 그것도 좋지마는 비교할 때에 그와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놓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그를 던져 버렸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 그것을 못 쓸 것이라고 그거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배설물로 여김은 그것을 찌끼로 여김은 배설물로 여김은 찌끼로 여김은 그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명예 지위 권세 지식 또 그 물질 모두 가정 또 뭐 전부 육체 육의 생명 이런 거, 이런 것이 좋은 것이지마는 그것을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그게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그 깨로 말하면 그것이 깻묵인 것을 깨달았다. 깻묵 그 찌끼가 깻묵이면 그 속에 알맹이는 뭐입니까 알맹이는 뭐이지요 알맹이는 기름이지요 이제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이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찌끼라니? 이제 눈에 보이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이것 속에 그리스도를 얻는 그 기름 같은 알맹이가 있고 이것 속에 영원무궁의 완전 무결의 그것이 있는 것을 깨달아서 이것 속에 그게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찌끼 이것을 탐하지 안하고 찌끼 이 속에 알맹이 있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제는 노력하게 됐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죽음 속에 영생이 있습니다. 죽음 속에 영생이 있고 변하는 세상 속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고 날마다 죄악이 관영해져 가고 있는 죄악 속에 영원히 더럽지 않는 완전 성결이 들어 있고 또 모두다 가득 찬 물욕 속에 성령의 소욕이 있고 날마다 변하는 세상의 속에 변치 않는 것이 있다 그 말이오.
변하는 속에 변치 않는 그것이 알맹이요 진짜요 기름과 같고 이제 변하는 세상 죽음의 소산이 보이는 세상 이거는 찌끼 이와 같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비유에 마태복음 13: 44에 보면은 '자기 보화를 발견한 다음에는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밭을 샀다' 뭐할려고 밭 속에 보화가 묻혔거든. 밭을 사야 그 보화가 제 밭이 되지요. 있는 것 다 팔아서 그 밭이 세상에 있는 찌끼를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세상 이것을 왜 귀하게 여기느냐 세상 이걸 왜 귀하게 여기느냐 '세상에 있는 것 다 팔아서 샀다' 그 말은 자기 몸과 생명을 다해서 세상을 제 세상으로 살았지 세상의 것이 자기가 안됐다 그 말이요. 자기가 세상 것이 되느냐 세상이 자기 것이 되느냐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세상 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서 사는 자가 세상 것이 되고 세상에게 졌으면 내가 세상 것이 되고 세상이 나 따라 왔으면 내 것 됐고 세상은 나한테 졌으면 세상이 내 것 됐지요.
이러니까 세상의 것이 되지 안하고 세상을 내 맘대로 내 주장대로 내 소원대로 내 자유대로 하기 위해서는 몸과 생명 아끼지 안 해야 되지 그래 아니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있는 걸 다 팔아서 밭을 샀다 세상을 샀다 왜? 그 속에 보화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에 귀중히 여겼던 그것을 다 이제는 찌끼로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과거에 좋다고 하던 그거 그것은 과거에 좋다고 생각하던 그것은 그것만 가지고 살 줄 알고 그게 제일인줄 알고 그것만 가지고 살면 잘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용을 해 가지고서 보배의 구원을 이루도록 이것을 사용해서 연습도 해 보고 연성도 해 보고 또 한번 이리저리 한번 모든 것을 시험하고 경험해서 지식도 배우고 잠깐 그것을 이용해 가지고 구원을 이루게 한 이용물로 이루어 가지고 이루어 놓은 구원만 가져가고 이루는데 이용된 것들은 또 한번 사용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여 여기 있습니다.' 다 두고 간다.
그러기에 그게 찌끼인 것을 깨달았다 찌끼인 것을 그것이 그 기름 알맹이는 짜내고 깻묵과 같이 그 세상 속에서 자기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구원을 거기에서 짜내기 위해서 세상살이를 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그것이 찌끼인 것을 내가 깨달았다.
그러면 그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그거는 찌끼라면 찌끼 이 속에 찌끼 알맹이 빼고 나면 찌끼 아닙니까? 찌끼 이 속에 알맹이는 뭘 말하지요? 저 OOO씨 말해 봐 기름 참기름 배설물 속에는 뭐인데 그 찌끼 속에는 뭐 자, 여기에 찌끼 배설물이란 말은 찌끼란 말이요. 찌끼 이 배설물은 사람 몸에서 영양 취하고 나면은 똥, 오줌 나오는 그거는 내나 찌끼란 그 말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찌끼라는 말인데 알맹이 빼고 못 쓸 것 여기에 배설물이라고 말했는데 배설물 속에 알맹이는 뭘 말하지요? 여반에 한번 대답해 봐요 뭐입니까 뭐요? 알면 누구든지 말해요 영생 영양질 내가 지금 식물 강의하고 있구먼 지금 기름 강의하고 있고 그것은 하나 비유로 들어서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이요 여기 배설물 속에 알맹이는 뭐입니까? 남반에 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이 찌끼 속에서 얻어 이 눈에 보이는 자기가 과거에 예수를 믿기 전에 예수를 알기 전에 유대교회에 있을 때에 막 보배로 힘쓰는 이 모든 것은 찌끼와 같고 이 속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이게 알맹이라는 것을 여기에 발견했다는 그 말입니다.
다음으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터이니까 와서 잘 배워야 됩니다.
안 배우면 몰라요 목사라고 다 아는 줄 압니까? 아니요 예 교파로 한 교파로서도 그 교파 전체가 하나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런 교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배울 수 있는 기회에 배워야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