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12:18
더 확실한 예언과 샛별
본문 :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또 우리에게' 우리에게라는 말은 택함을 입고 중생된 모든 성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더 확실하다, 더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구원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에 구원 도리를 알려 주시는 그 계시 방편이, 알려 주시는 방편이 몇몇 종류가 있습니다.
환상으로도 알려 주신 일이 있고, 또 음성으로도, 꿈으로도, 또 어떤 지시로도 이렇게 알려 주신 일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모든 것을 통틀어 말하면 하나는 문서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도리를 알려 준 것을 가리켜서 문서 계시라 그렇게 말하고, 또 이런 저런 여러 가지 형식을 가지고 알려 주시는 걸 가리켜서 형식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꿈이나 환상이나 소리나 어떤 지시나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지시나 그런 것을 다 총칭해서 형식 계시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계시에 사용한 그 계시 기관이 문서 계시 형식 계시 이래 두가지로 나눠서 말을 할 수 있는데 더 확실한 예언이라 그 말은 어떤 형식계시든지 그것보다 문서 계시가 더 확고하고 정확하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위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실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여러 가지 재앙으로 또 광야를 통과하실 때에 여러가지 능력으로 그렇게 나타내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반석을 쳐서 반석에 물이 나오게 한 그런 것 다 하나님의 구원 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한 방식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모세 엘리야 또 공중에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 들은 것, 또 요셉에게 꿈 꾸인 것 그런 것 다 하나 형식 계시입니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하는 그 말은 형식 계시보다 이 문서로 기록된 계시는 더 확고하고 확실하고 우리에게 정확 무오한, 모든 형식계시보다 문서 계시가 더욱 우리에게 정확하게 알려 주시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합니다.
그러기에, 말세가 돼 갈수록 이 문서 계시가 아닌 이 형식 계시 이것을 하나님이 계시 방편으로 이렇게 알려 준 그 계시를 문서로 기록해줬으니까 문서로 보고서 그 계시에서 우리의 구원 도리를 깨닫는 요것으로 끝나야 되는데 그 형식을 제가 지금도 할라고 하는 거기에서 유혹들이 많고 또 시험에 많이 듭니다. 마귀란 놈이 이것을 가지고서상당히 큰 수입을 봅니다.
이러니까, 여기에 그 중에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나타난 사실과 또 공중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 형식 계시가 계시 중에는 제일 왕 계시입니다. 제일 중요합니다. 세례받을 때도 음성도 나타나고 했지마는 그 줄에 제일 중요한 것을 들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보다,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요 정확하지마는 이보다 문서 계시가 더 확실하다 그것은 비중을 말합니다. 물론 거기에야 하나님이 하신 것은 다 완전이요 온전이요 참이지마는 우리에게 구원의 효력에 있어서 이 문서 계시가 더 확실하고 확고하고 우리가 위험성 없는 튼튼한 이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방편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런 형식을 취했는데 그런 형식은 하나님이 취하신 것입니다. 그런 형식은 하나님이 취하신 것인데 하나님이 취하신 그 형식에서 우리는 구원의 이치, 구원의 이치를 깨닫는 그것이 우리 할 일인데 제가 하나님이 계시의 형식으로 사용하신 이 형식을 제가 할라고 날뛰는 이런 일을 하기 쉽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이 당신만이 하시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뭘 받을 것이냐? 그 문서로 또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문서에 기록되지 안한 것은 구약 시대에 어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설이 온다할지라도, 전설에 하나님이 이리이리 하셨다 한다 할지라도 문서로 재차로 기록하지 안한 그런 것은 우리는 다 부인해 버려야 되지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안해야 되고, 또, 형식 계시를 문서로 다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도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생각해야 되느냐? 그는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구원 도리를 깨달아야 되지, 예를 들어서 무슨 나면서 앉은뱅이가 어떻게 낫았다 하면 그것은 나면서 앉은뱅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서 구원의 우리가 길로 알고 복종을 해야 되지 '나면서 앉은뱅이 그랬 으니까 나도 나면서 앉은뱅이를 낫우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권능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서 앉은뱅이 일어납니다. 나면서 앉은뱅이를 제가 일으킬라고 하는 그런것은 월권이요 아주 참람이요 방탕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기 때문에 무슨 나면서 병신이든지 나 가지고서 병신된것이든지 할 때에 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은 예수님께서 택자들의 모든 질고를 다 짊어지셨다 이랬기 때문에 택자들에게는, 그 질고는 무슨 질고냐? 죄값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질고 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 저주의 질고요 다 심판의 질고입니다. 심판의 그 모든 병들 이런 병들은 예수님께서 다 대신 죄도 담당하셨고 죄의 댓가로 온것도 다 담당했습니다. 죄만 담당한 게 아니라. 그 죄를 담당했으니 죄값으로 온 것 담당하지 안했습니까? 다 담당했기 때문에 택자들에게는 죄의 값이 없고 또 죄값의 그 어떤 벌이나 이런 것도 없다 그 말입니다. 요거 알기 어려워요, 이거 지금 이렇게 말하면 다른 데 모순된 점이 많기 때문에 잘못하면 꺼꾸로 생각하고 그 해석이 이단이라 이렇게 망령된 소리를 하기 쉬우니까 그라면 죄를 짓는 것이라 그거요.
그래 요걸 알면 됩니다. 기독자에게는 벌은 없다. 징계는 있다. 징계와 벌이 다른 것은 벌은 멸망시키는 것이요 징계는 사랑으로 그것을 희망을 두고 고쳐서 유익되게 하려는 것이 벌과 징계가 다릅니다.
또, 기독자에게서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심판은 없습니다. 심판은 없고 항상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는 것. 권하는 것, 그러기에 건설에 관한 것만 있지 파괴에 관한 것은 없다 하는 요것을 기억하면 좀 알 수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대로 이 모든 질병이 없기 때문에 어떤 좋지 못한 게 있든지, 무슨 몸에 좋지 못한 게 있든지 경제적으로 좋지 못한 게 있든지 자기 활동적으로 좋지 못한 게 있든지 어떤 좋지 못한게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망치기 위함이 아니고 이것은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아이가 너무 과식해서 밥에 상해서 병이 나게 됐든지 났으면 그 아이에게는 밥을 절식을 시켜서 덜 먹이는 것이 그것이 방편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게는 채찍으로 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로 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사기를 돋궈 주는 거로오고 그 사람 자체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꼭 같지마는 그 사랑이 이렇게 와서 역사할 때도 있고 저렇게 와서 역사할 때도 있는 그것이 다른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라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 도리를 보고 말씀대로 행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비유컨대 요렇게 가기를, 요래 가기를 원하시면 고렇게 가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섭리의 방편을 행하시니까 그럴 때는 자기는 요렇게 되기를 원할 그것보다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당신이 필요한 대로 요렇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주관으로는 꼭 요렇게 돼야좋겠는데 싶지만 하나님 보실 때에 요렇게 돼야 좋은 수도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고대로 실행을 하면 우리 생각보다 무한히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로써, 우리에게 필요한데 우리는 '하나님 나를 요렇게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라는데 하나님은 보실 때는 고거보다 요게 좋으면 요렇게 해 주신다 그 말이오.
그러면, 자기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나는 망씀대로 해서 요병이 나았으면 좋겠다' 요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거 일방적이라. 나아야 좋을는지 더해야 좋을는지 몰라.
내가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요 병에 너는 하나 병을 더 가해서 둘을 해야 지금 네 구원 이룰 때는 하나에다가 하나 보태 가지고 둘을 준다 그 말이오. 그 둘 줄 때는 사람들은 '말씀대로 생하면 성이 없어진다 하더니마는 하나 더 생겼다' 이렇게 말하나 전지하신 사랑의 주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 보다 둘 있는 것이 낫기 때문에 하신다 말이오.
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절대의 그 지능을 믿고 '내가 말씀대로 사니까 하나 있던 게 둘 있으니까 소용이 없다' 이거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게 해 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성경의 근본 도리를 깨닫고 또 말씀대로 행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면은 그것이 서이가 될는지, 하나 있던 게 둘이 돼가지고 말씀대로 행하니 그게 확 없어질는지, 하나돼 가지고 없어지는 것보다 둘 돼 없어져 가지고서 당신이 또 당신에게 필요하고, 우리 구원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니까 하나님의 그 광대하신 사랑과 전능하신 그 지혜를 우리는 측량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에 이 모든 형식으로 하나님이 하신 그 형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그런 일 중에도 성경에 기록되지 안한 것도 있을 수 있어.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가리켜서 전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그런 전설이 있다. 전설이 있다 하는데 전설 그런 것을 다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서로 성경에 육십 육 권 도리 안에 기록되지 안한 것은 다 그런 것은 우리가 부인해 버리고, 그러면, 문서에 기록된 이런 것도, 형식도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도리를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그 형식을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문자로 기록한 그 형식은 구원 도리기 때문에 거기에서 구원의 이치를 깨달을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 가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대로, 살면 당신이 이런 역사를 하든지 저런 역사를 하든지 그것은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그렇게 역사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형식 계시로 쓰신 그 일을 우리가 그형식을 만들라고 하나님께 그 형식을 달라고 하는 그런 것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 나은 것, 대개 보면 자기가 하나님의 도리를 깨닫고 그만 감사하고 기뻐서 하나님에게 대한 소망이 견고히 생겨질 때에, 뭐 병은 생각도 안 했는데 생겨질 때에 그때에 나은 병이 백에 구십이라면 자기가 그것을 소원하고 할 때에 그만 그래 나았다하는 그것은 백에 한 십이나 될까, 십 되는 그것도 그 못쓸 것이, 자기가 그걸 원하고 그래 되기를 원한다는 그런 것은 못쓸 것을 자기가 생각, 할때에 하나님이 그것 보고 준 게 아니고 그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필요 있는 것을 하나님이 믿음 보고 주셨지 그거 주신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우리가 가질 것이 뭐인가? 우리는 땅위에서 하나님의 도리를 어짜든지 어떻게 마음으로는 인정하고 소원하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또 우리 몸으로는 어떻게 순종하나? 믿음가지는 것. 하나님의 도리에서 믿음 가지는 것이 우리 할 의무입니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 몸으로 행하는 것 믿음 가지는 것이 우리의의무요 책임이요,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계시대로 알고 인정하고 행할 때에 당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십니다.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종류와 그 양을 정확하게 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니까 그래 가지고 우리가 신앙생활해서 받는 것이 그것이 정확하지 그렇지 않고 자꾸 하나님이 형식으로 주신 그 구원의 도리로 주신 것을 제가 그렇게 한 번 해 볼라고서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실패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때려서 물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도 반석을 믿음으로만 치면 물이 나온다 이래 가지고서 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있습니다. 만일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채가 반석 쳐서 물 나온다고, 물 나오면 물 나오게 할 수 있다 믿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당신의 주관 역사에 뜻이 있어. 그런 것이지 거기에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것을 사람이 보고서 '내가 이렇게 하니까 이리 되더라' 고걸 거머쥐고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고태부터 망합니다. 고때부터 자기는 그런 일을 힘쓰게 되고 그 힘쓰는 그에게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해 주지 안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 아주 구별이 많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안 하시느냐? 성경에 있는 걸 다 하십니다. 당신이 다 하시나 그것을 우리에게 권세를 줘 가지고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당신이 들어서 이루시는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 하는 것은 계시에서 구원 이루는 그것만이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요, 구원 이루는 그 일을 깨닫고 그대로 순종할 때에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은혜를 베푸시는 고 방편을 가지고 나가야만 우리가 실수가 없습니다. 이거 너무 복잡한 것이 돼 놔서, 그러고,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그런 모든 환상, 그러면 기적, 신유의 은혜를 지금 말하고 있는데 신유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은, 신유의 은혜를 그것을 주장하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뒤가 실패가 되고 맙니다. 망하지 안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새 여기에 ○집사라 하는 사람이 뭐 어데 있다 하는데 그 사람 끝이 반드시 실수하고 맙니다. 실수하고 말고 나중에 억설이 되고 맙니다. 이러니까, 어데 뭐 내가 어뜩 들었는데 뭐 뚜드려 패서 사람이 뭐 어쨌다든가 뭐 어짜고 이째 하는 그게 무례한 일입니다.
그저 자기를 통해서 어데까지 어떤 일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할 일이 아니요. 말씀대로 행할 때에 필요한 데에 나옵니다.
이러기에, 제일 표적과 이적을 탄이 볼라거든 하나님을 전연히 알지 못하는 그런 아주 암흑 지방에 가 가지고서 복음을 전하면 하는 일에 거의가 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거는 그게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전함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자기에게도 그런 혹 기적이 나타날 때에는, 늘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이 필요해서 그렇게 하나의 당신을 증거하는 계시로 그렇게. 나타내기 때문에 이 모든 기적이라 하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안하고 안 믿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이랬어 믿는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고 안 믿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러면 그런 걸 다 부정하느냐? 부정하는 게 아니고 그거는 하나님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 할 일은 말씀을 듣고 바로 전하고 바로 깨닫고 고렇게 행할라고 해 때에 된것입니다.
지난번에 대구 집회 때에 그렇게 많은 기적이 나타난 것도 녹음을 여러분들이 들어보면 알지마는 전부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병을 고쳐 주는 것, 우리에게 이런 것 저런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시는 것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고치기 위하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치 안하니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육백여 명에게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기적 나타낸 그 기적을 나타낸 목적이 뭐이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는, 주님이 어떤 주님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는 것을 그 사람에게 인정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베푸신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인정되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반드시 낫고 난 다음에 그 계시 말씀을 인정하고 고대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나가면 그보여 준 그것이 그대로 계속해서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되고, 보여 준 것을 자기는 보여 준 것 그것만 자기가 수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는 소원됐으니까, 소원이 됐으니까, 그 주신 것은 그것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고 이제 이런 하나님이니 네가 이렇게 이렇게 믿고 구원 이루라 하는데 그거는 하지 안하고 인제 나았으니까 됐다 하고서 그 다음부터 말씀대로 행하지 안하고 나가면은 더 큰 증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예수 믿는 게 쭈욱 이렇게 그만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도 가치가 있는 것일수록이 그 내용이 복잡합니다.
우리가 농촌에 있을 때에 타작하는 기계를, 그때 제가 어릴 때에 농사잘 지었다고서 아주 상장으로 주는데 그때 타작하는 것은 홅개, 쇠로 이래 만들어 가지고, 쇠로 가지고 만들어서 홅개 그걸 타왔어요. 타왔는데 그거야 뭐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 뒤에는 이 공상이라고 빙빙빙빙 돌아가면서 이래 툴툴 털어 가지고 또 인제 타작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홅개보다는 그게 복잡해요, 또 그후에는 지금은 뭐, 이래 나는 보지는 안했는데 이럴게 가을이 되면 익은 벼 논에 가 가지고서 기계를 들이대면은 이래 가지고 뭐 한쪽머리로는 잡단이 묶여 나오고 한쪽머리로는 또 등겨가 나오고 한쪽으로는 쌀가마니가 나와 가지고서 그래 묶어낸다 하는 기계, 그러면 그 기계는 더 복잡할 것 아니겠소? 가치가 있고 실력이 있을수록이 복잡합니다. 이 구루마보다는 차가, 이 자동차 하는데 요새는 뭐뭐 이거 버스니 하는데, 차가 더 기계가 복잡하고, 조그만치라도 틀리면 안 돼. 그것보다는 비행기가 더 복잡합니다. 또 비행기보다는 이 원자의 무슨 이 역사, 원자에 속한 것이 더 세밀하고 복잡해서 조금만 틀리면 큰 낭파를 당하고 그게 정확해야 될것입니다.
그런 것도 그런데 예수 믿어서 하나님과 같은 사람되는 것, 하나님과 같은 그 인격자 되는 것, 완전자 되어지는 것, 완전자가 되어지는 것이 '믿으면 된다' 세상에. 일 중에 쉬운 것이 이것이고 뚝한데 이렇게 뚝뚝한게 아니라.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신 일을 다 기록할라 하면은 그 책은 온 세상에 둬도 다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런 복잡한 일인데 간단한 육십 육권에 기록한 것은 그 몇가지 됩니까? 외워 봤자 몇 가지 안 돼. 이런데 이 안에는 무한함이 들어 있어.
이 성경 안에는 그 무한함을 어떻게 기록해 놨느냐? 무한함은 무한하신 성령님이 성경 안에 내주해 계셔 가지고서 이 사람이 보이는 성경을 제가 진실한 마음으로 깨닫고 요대로 믿어서 행해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의 사람이 되어질라고 하는 사람은 요대로 행하면 사람이 변화가 되고 변화가 되면 변화된 것만치 또 새로운 깨달음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믿은 유대인들에게' 믿었다 말은 과거사 아닙니까?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주님 말씀대로 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처음에 행한 그 진리를 새로 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마음으로 연구할 때에 알아지는 것과 자기가 실행할 때에 또 알아지는 것과 자기가 그만치 장성할 새 알아지는 것과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깨닫는 것이 자꾸 달라지고 느껴지는 것이 달라지고 이렇게 점점 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마음을 기울여 연구하는데 따라서 차차 더 폭폭히 정확하게 더 확실히 구비하게 알게 되고 그 사람이 변화가, 자체가 변화가 될 때에 더 구비하게 알아진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의 변화가 십 년 됐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아니요. 자기가 죽는 그 시간까지 우리가 변화가 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고 이러니까 자꾸 달라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세상 떠나는 그 시간까지 우리의 이 십신으로 되어있는 심신 성화가 그때까지 계속해서 성화가 됩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성화가 됩니다.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그거 신앙생활하지 안하는 사람은 그 성화가 성장되지 안하고, 그걸 또 성장이라 이라는데. 성화가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이 제일 바로 깨닫고 또 구비하게 깨닫고 하는 이 깨달음에 제일 장성한 시기는 언제겠습니까? 한창때요 늙어서요 마지막에 죽음이 임박할 때입니까, 언제 제일 확실히 깨닫습니까, 더 많이 깨닫습니까? 죽음이 임박할 그때가 제일 확실히 광대하게 깨닫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깨달음도 계속 자라갑니다. 계속 자라가요.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간단하게-여러 날 아침 말하기는 말했는데 -이 형식 계시에 대한 이 계시관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지금 이런 형식 계시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정관, 형식 계시관을 바로 가지는 것이 내가 아직까지는 듣지도 못했고 또 어떤 책에 이거 내가 많이는 읽지는 안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이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 하나님의 그 충만한, 성령에 충만한 종들이 깨달은 것과 또 지금 깨닫는 것과 아주 판이합니다. 그때보다 더 확고히 더 많이 보고 구비하게 보고 정확하게 보고 있다 그거요.
그러나, 성경은 그때 초기에 기록한 것이지만 그거는 하나님의 성령이 기록했기 때문에 그거는 정확 무오한 기록으로 기록. 이 된 것입니다. 이러기에 어짜든지 바로 알지 못하면 안 돼요.
이제 그건 그만하고,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예언이라면 한문 글자로는 미리 예(豫)자 말씀 언(言)자이기 때문에 미래사를 말하는 것을 그걸 예언이라 이렇게 사람들은 한문 글자대로 알면 그래 알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예언이라 말은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가리켜서 전부 다 예언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예언이라 말은 '확실한 예언이 있어' 하는 예언이라 말은 신구약 성경 이 문서 계시의 말씀을 예언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요런걸 확고히 모르면, 자꾸 하나라도 잘못 알면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자꾸 유혹을 준다 그 말이오.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가하다 말은 옳다 그 말입니다.
여기에 어두움은 밤이요, 밤과 낮을 여기에 말했습니다. 이거는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문서로 기록해 주면서 이런 것들을 다 상징적으로 이런 형상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도리를 가르켰습니다. 낮이라 밤이라.
'날이 새면은' 날이 샌다 말은 거기에는 밤도 있고 낮도 있다 말 아닙니까? 여기에는 지금은 이제 날이 새기를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날이 새기를 시작하고 있지? 시작하고 있는데 또 초저녁에는 밤이 자꾸 더 밤이 점점 더 깊어져 가기를 그때 시작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데 이런 형상을 이것을 우리에게 인용해 가지고 구원도리를 가르켰다 그 말이오.
그러면, 여기에서 낮이니 밤이니 했는데 우리의 신앙에 낮과 밤이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낮과 밤이 있습니다. 낮은 차차차차 밝아졌다가 차차차차 어두워진다 말이오. 그게 낮입니다. 차차차차 밝아졌다가 차차차차 밝음이 없어지는 그게 낮이요, 밤은 차차차차 어두워지다가 더 깊이 어두워졌다가 또 차차 밝아지는 것이 그 어두움아 차차 사라지는 것이 그것이 밤이라 말이오.
낮도 밝아지기 시작하다가 최고로 밝아졌다가 또 차차차 밝아짐이 또 없어졌다가 밤은 또 조그만치씩 밤이 시작했다가 차차차차 밤이 짙어갔다가 또 차차차차 밤이 옅어져 가고 이와같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낮과 밤이라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낮과 밤이 있다. 그 낮과 밤이 있는 이것은 모든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주관하셨는데 낮에는 낮에 그것이 자라고 낮이 필요 하기 때문에 낮을 만들어 주셨고 밤이 필요 하기 때문에 밤을 만들어 주셔서 낮에 자랄 거는 낮에 자라고 밤에 자랄 거는 밤에 자랍니다.
밤낮이 없으면 그것이 밤낮 주야로 자라는 것만 못해요. 밤낮 줌야를 두고서 자라는 그런 지방에서는 밤낮 주야로 자라야 그게 정상적인 식물이 돼지지 그게 없으면 그게 정상적의 것이 안 돼.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것도 다 하나님이 당신의 전지한 지혜로써 창조하신 분이 관리하시기를 그렇게 관리함같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그렇게 관리하시기 때문에 이것을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낮과 밤을 여기에 인용을 하셨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낮과 밤이 있다. 그러면 우리구원이 차차차차 구원이 더 밝아지고 구원이 더 열심도, 한낮이라 하면 제일 밝을 때 아니겠소? 이 중은 것으로서도, 옳고좋은 것이 시작되다가 이게 절정이 있어.
시작돼 가지고 차차차차 더 좋아졌다가 또장 이래 좋아지기만 하느냐 하면은 또 좋아졌던 게 차차차차 이래 또 기어내려가요, 또 기어내려가요.
또, 어두운 것은 그게. 좋지 못한 건데 좋지 못한 게 또 시작했다가 좋지 못한 것도 최고 절정으로 자꾸 올라가요, 좋지 못한 게 자꾸.
올라가도 올라가면 이제 낙망하지 말라 말이오. 올라갔다가는 또 좋지 못한 게 차차 차차 희미해져 가지고서 이제 환한 날이 새는 일이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신앙도 주야가 있다. 주야가 있는 것은, 낮이 있어야 필요한 것은 낮에 자랄 것은 낮에 자라고 밤에 자랄 것은 밤에 자라고 낮에 거기에서 익숙해실 거는 낮에 익숙해지고 밤에 익숙해질 거는 밤에 익숙해지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신앙에도 주야가 있다.
이러기 때문에 주야가 있는 것은, 사람이 무슨 시작을 해도, 하나 비유를 든다면은 그 사람이 새벽기도를 나오기를 시작했으면 새벽기도 나오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뭐 제일 앞에 와서 앉고, 벌써 네시 반에 새벽기도인데 그 사람이 네시 돼서 나오고 어떤 사람은 '어라 자면 안되겠다' 하고서 세시에 나와 가지고서 한 시간 반 기다리다가 새벽예배보고 그래도 피곤치 안하고 그렇게 열심 있던 그 열심이 차차차차 나중에 쇠해져 가지고서 나중에는 네시 반에 오다가 그 다음에는 그만 다섯시에 오다가 그 다음에는 또 하루도 빼다가 자꾸 이렇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 그 말이오.! 이렇게 자꾸 이렇게 낮에는, 예를 들면 낮에는 좋은 것으로 이렇게 비하면 좋은 것도 시작했다가 자꾸 쇠해져 가지고 낡아집니다. 낡아지고 낡아졌다가 또 낡아진 그 밤에는 암흑을 만나, 신앙에 암흑을 만나. 암흑을 만나면 낙망하나 암흑을 만나면 낙망할 게 아니고 암흑을 만나는 그 암흑이 필요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암흑할 그때는 또 어짜든지 밤이 오든지 낮이 오든지 자기 힘 있는 대로 말씀대로 믿음 지키는 그것만이 할 일이라. 이렇게하고 보면은 언제는 낮이 될 때는 하 밝다 좋아하고 밤중이 을 때는 하이런 뭐 그만 낙망도 돼지고 근심도 돼지고 아무 뭐 용기가 안 나고그랬다가 또 하나님이 낮을 주면은 차차차 낮이 돼 가지고서 이렇게 와진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도 낮과 밤이 있으니 네 신앙이 차차 밝아지는태도 있고 차차 어두워진는 때도 있고 이래 있으니까, 차차 어두워지는거는 어두워지지 안할라고 해도 어두쇠져요. 어두워지지 안할라고 해도 어두워지는데 밝아지는 것도, 실은 밝아지는 것도 하나님이 밝아지게 하셔서 밝아지지 제가 밝아지는 것 아니지마는 성경세 말하기를 밝아지는 것은, 너는 어두워지는 거는 안 어두워질라고 허도 어두워지는 그 현상이 네게 을 것이고 네가 밝아지는 것은 네가 밝아질라고 애를써서 밝아져야 된다 고걸 요게 가리켜 말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거는 암만 제가 안 어두워질라고 애를써도 어두움이 옵니다. 신앙생활을 자기가 진실되게 해본 사람은 이 주야가 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밤이 와도 다른 사람은 요동하지만 요동치 않습니다. '밤이 오니까 또 밤이 오는갑다. 하나님께서 또 좀 있으면 낮을 주실것 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어데까지 궁지에 떨어져서 깊은 궁지에 빠져도 비웃고 있습니다.
그저 보니까 저 사탄과 세상이 보고서 헤, 저게 어찌 된다 이렇게 해도웃고 있는 것은 왜 그러냐? 이렇게 암만 궁지에 빠져도 하나님이 당신의 전지전능의 사랑의 작용이기 때문에 너는 나를 빠진 걸 보고서 네가 이제 조롱하고 멸시하지마는 좀 있으면 나중에 높이 버뜩 들어서 네가 깜짝 놀랠 일이 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빠져 내려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또 이렇게 내려가는 것도 당신의 사랑의 능력이요 또 여기에서 올리는 것도 사랑의 능력이라. 당신이 또 올리는 그때가 있으리라 하는 것을 그것을 생각하고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여기에 말씀하신 것은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이것은 이 어두움이 올 때에, 밤이 올 때에, 밤이 올 때에 네가 벌로 날뛰면 구렁텅이 빠져서 네가 죽는다. 함정에 빠져서 죽는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에는 뭐 수십 길 되는 그런 언덕이 없는 데가 어데 있습니까? 다 있지요. 또 깊은 물이 없는 데가 어데 있습니까? 이런데 깜깜해 놓고 벌로 발자욱만 떼 놓고 가면은 물에 빠져 죽는 수도 있고 언덕에 떨어져서 깨어지는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밤이 올 때. 왜, 밤이 올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다른 데는 '발에 등불 같으니' 이래 놨다 말이오.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 그러면 어두운 데에서 한 자욱 내가 한 자욱 떼 놓기를 어렇게 떼 놓느냐? 이 등불을 가지고서,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있으니까 이 어두움이 올수록 이 성경 말씀 가지고 제가 일보 일보 한 자욱씩 내 디뎌 놔야 뒤에 후회가 없고 실수가 없지 그럴 때 어두움에 삼켜 가지고 이래 하면 실패 된다. 그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이다. 이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이 예언은 등불이다.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고거는 끝났고,
그 다음에는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이것을 뭐? 이것을 하면 뭐입니까? 이것은 뭐입니까!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여기에는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렇게 원어를 보고서, 다 같은 원어를 보고서 이렇게 번역했는데 또 어떤 성경에는 '살피는 것이 가하니라' '살피는 것이 가하니라' 사모하는 것이 가하니라 그러니까, 이제 '이것을' 하는 거는 뭘 말합니까? 낮이니 밤이니 그걸 말하는 것입니까 이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하는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이 예언은 어두움에도 네가 이렇게 중요하다. 어두움에도 네가 죽고 사는 것이 여기에 있다. 잘못 떼 놓으면 죽지 쌀습니까? 이러니까, 예언이 있는데 어두운 데 네 발에 등불 같기 때문에 필요하고, 또 이 말씀으로써-꺼꾸로 됐다 말이오-이것을, 이 말씀을 네가 주의해서 살펴서 살펴서 날이 새고, 살피기를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살피라. 살피기를 이렇게 살펴야 된다. 이런데 살피야 된다 주의해야 된다 말을 끄트머리 붙여 놨기 때문에 그 위에 말을 딴말로 보기 쉽다 말이오.
이러니까, 어두운 데 비취는데도 중요하고 또 이 말씀을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면 날이 샌다. 날이 샌다. 이 생각을 하면은 하나님께서 밤을 주고 낮을 주시는데 신앙의 낮이 차차 돌아오게 된다. 이 말씀을 자꾸 생각하면 너희 마음이 밝아져 온다 그 말입니다. 너희 마음이 밝아져온다. '날이 새면' 마음이 밝아져 온다.
이래서, 영감론에 있어서 이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무슨 영감을 우리 안에 역사해 주시느냐 하면은 조명의 영감이라 이랍니다. 조명의 영감이라. 비출 조(照) 자 밝을 명(明)자, 우리 마음을 환하게 밝게 하는 영감이 있습니다.
조명의 영감.
또, 그 다음에는 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 들여서 수락하는 인정케 하는 영감이 있어. 인정케 하는 영감.
이래서, 이 일반 신학에서 가지기를 조명의 영감이라, 또 그 안에 그래 가지고 환하게 받아 들여서 인정케 하는 인정 영감이라, 그 다음에는 고대로 행하기 위해서 역사케 하는 역사 영감이라.
조명의 영감이니 인정 영감이니 역사 영감이니 우리 마음 안에 그렇게 영감이 역사하고 있다. 성경 안에서도 이 문서뿐 아니라 그 안에서는 그 내주해서, 영감이 내주해 가지고 역사하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이 예언의 말씀을 네가 자꾸 살피고, 살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네가 살피고 생각하고 주의해서 이 말씀에 대 해. 서 네가자꾸 생각하면 날이 새게 된다. 네 심령이 밝아오게 된다. 네 심령이 환하게 밝아진다.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른다' 날이 새면은 샛별이 떠오릅니다. 날이 부움하게 동이 터서 새게 되면은 새벽별, 샛별이라는 게 새벽별인데 새벽별이 떠올라요. 새벽별이 떠오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뭐이 옵니까? 해가 돋아요. 해가 와요. 이래서 해는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고 새벽별은 성령을 상징한 것입니다.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너희 마음에 날이 새기까지,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너희 마음에 햇빛이 환하게 돋기까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사모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것을 살피는 것이 가하니라' 살핀다 말은 궁구한다 말이오. '살피는 것이 가하니라' '주의 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거 다 같은 뜻인데 요각도로 말해 놓고 저 각도로 말해 놨기 때문에 그 내용은 다 같은 뜻이라서 하나만 알면 그게 됩니다.
이래서, 그라면 샛별이 떠오른다. 샛별은 성령님을 가리켜 말하는데 성신의 감화를 말하는 것이요, 성신의 감화가 성령이요 성령의 감화가 성령 입니다.
그러면, 성신의 감화와 성령과 다르지 안해. 하나라요. 성령의 감화있는 데 성령 계시고 성령 계시는 데 성령 감화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뭘로 와 짜시는가? 우리에게 감화로 역사한다 크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신의 감화, 영감이라 말이나 그 성령이라 말이나 같은 말인 것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영감이라 말과 성령이라 말과 달리 생각하면 안 돼. 영감은 성령의 감동이고 우리에게 접선되는 것이고 성령은 객관체인데 객관체지마는 객관체가 우리와 연결될 때는 영감으로 연결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영감이 떠오르기까지, 성령이 네 속에 와서 역사하시기까지 네가 이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사모해야 된다. 이 말씀을 주의해야 된다. 또 살펴야 된다. 연구해야 된다. 말씀한 것입녀다.
이러기 때문에, 이 확실한 말씀을 네가 등불로도 쓰고 이 말씀을 네가 어두움에 비취는 등불로도 네가 써야 될 것이고, 또 이 말씀으로 네마음이 환하게 네 마음에 날이 새도록 또 네가 되도록 힘을 써야되고, 또 샛별이 떠올라 네 마음에 성령님이 오셔서 친히 역사하도록 이렇게 네가 힘을 써야 된다 그 말이오. 힘을 써야 된다.
그러면, 우리가 자꾸 어두워지고 새로와지고, 이러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와진다. 날로 새로와진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 새로와진다 하는 것은 옛날 밝은 것이 그대로 있는 걸 말합니까? 새로 밝는 것을 말합니까? 새로와진다 말은 무슨 말이요? 더밝아진다 깔입니까 그대로 밝아진 게 계속된다 말입니까? 더 밝아진다말이오. 새로와진다 말은 더 밝아진다 말이오.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진다. 더 밝아지고 더 강해지고 더 실해진다 그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이 네 어두움에 환하게 네 앞길을 환하게 비춰 주도록까지 이 말씀을 네가 연구하고 살피고 자꾸 이걸 생각해라.
또, 그 다음에는 네 마음에 날이 새도록, 네 마음이 환하게 날이 새도록, 네 마음의 날이 새도록, 또 네 마음에 새벽별이 돋아 오르도록, 또 네 마음에 이제 햇빛을 태양을, 태양을 딱 만난다 말은 주님하고 너하고 들어 만나기까지 이렇게 힘쓰는 것이 가하니라.
여기에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가하니라' 가하다 말은 옳을 가(可)자라.
가하다 말은 이 한문 글자를 인용한 건데 가하니라 그 말은 옳으니라 그 말이오.
옳으니라,
이러니까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데 잘못하면 성령을 박차기 쉽다 말이오. 다른 것은 다 밝아지고 하는 거는 그거 다 알 수 있지마는 샛별이 떠오른다 하는 샛별은 성령의 감화요 성령님인데 샛별이 어떻게오느냐? 샛별이 우리에게 오는데 몇 가지로 온다고 배웠습니까, 손가락으로 ' 뻐뜩 들어 봐요, 버뜩. 다른 사람 보구로 좀 버뜩 늘어봐. 이래 너 이라.
그러면, 영감이 뭐이 영감이냐? 첫째가, 그러면 이 계시 말씀이 전체가 뭘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뭘 가르치고 있습니까? 과학을 가르치고 있소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소, 이 신구약 성경은 무슨 민족성을 가르치고 있소, 문학을 가로치고있소, 월 가르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가르치는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자꾸 연구하면 거기에 첫째로 나오는 게 뭣 나오겠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전체가 은혜요 사랑이기 때문에 감사가 나올 것 아닙니까? 이 성경을 네가 살펴서 마음에 감사가 '하,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이런 구원을 줬다' 감사함이 나오면 그 감사함은 그것이 곧 성령이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감사함이 내 마음에 감사한 마음이 생겨지는데 그것이 내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주관이 아니고 객관이라. 감사함이 나오면 '내 마음에 감사한 마음이 나온다' 그게 제 마음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이 나올 때그 마음을 소멸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는. 것이라. 알겠습니까? 요걸 내가 가르치기 위해 하는 거라. 성령의 감화 감동을 소멸하는 거라.
그러면, 감사한 그것이 제 마음이 아니고 성령께서 자기에게 감동시켜 주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멸하면 안 돼요. 감사하니까 자꾸 성경에서 감사가 자꾸 뜨거워지고 감사가 더 충만해지고 자꾸 감사가 커집니다.
감사가 자꾸 넓게 돼요. 요 모로도 생각하니까 감사하고, 일 면으로만 감사한 게 아니라 감사한 게 요 면으로생각하니까 감사하고 이 면으로 생각하니까 감사하고 나중에, 모든 면 이감사가 자꾸 넓어지고 커지고 확고해집니다.
감사가 커지면은 그 다음에 뭐 나오겠소? 감사는 좋은 걸 해 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감사한 것 아닙니까? 좋은 거 해 준 게 많으니까 자연히 기쁘지.
감사가 많이 나오고 감사가 필연적으로 기쁨이 돼집니다.
또, 기쁨이 돼지면 하나님이 좋은 것 줘 가지고 이런 구원에, 줘가지고 이 감사하니까 그 다음에 셋째 로는 뭐이 나오겠습니까? 욕망이 나와. 욕심이 나와.
'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와같이 이렇게 구원을 주셨으니 이 구원을 이룰 시기가 되는 이 짤막한 이 세상을 촌보라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일 분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주님하고 동행해 가지고서 이 구원을 이루겠다.
그러니까, 막 욕심이 생깁니다. 욕망이라 말은 소망 망(望)자 욕심 욕(慾)자, 그러면 소망에 욕심이 생겨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바울이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이제 과거에 가치로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다 똥오줌과 같이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이제는 내가 깨달았다, 뭐이냐? 뭘 내가 암만 그전에는 과거에 욕망하던 거는 다 치워버리고 그런 거는 다 똥오줌으로 배설물로 여긴다 하니까 네가 욕망하는' 게 뭐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함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그것이 참말로 온전하고 영원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한다.
그러면, 얻고자 하면 뭣까지 얻고자 하느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나도 이르러 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나도 본받아, 예수님께서 당신이 왕되기 위해서 고난받는 것이 아니고 봉사하기 위해서 고난받았고 섬기기 위해서 종질하기 위해서 고난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나도 참여해 가지고서 그리스도 부활에 나도 참여할라고 지금 이 살아 있으로서 부활 준비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오. 그게 신앙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욕망이 생겨져. 셋째 욕망이 생겨지니까 탁 욕심이 납니다. 무슨 욕심? 땅에 있는 거는 아무 욕심 안 나. 그 한국에서 제일 뭐라하노? 제일 학교라. 하나, 뭐라 하노. 서울대학을? 뭐라 하노? 일류? 제일 좋은 학교, 서울대학. 서울대학 욕심도 뭐 하버드대학 욕심도 뭐뭣도 그런 게 안 납니다. 뭐 뭐 정권 그런 데 욕심 안 나. 이제 욕심이 딴데 난다 말이오.
이 계시 말씀을 사모하니까 욕심이 딴데 있으니 그 욕심 내는 것이 땅에서는 보지도 못하는 것이고 다 소용없는 걸 욕심 내니까 저 좋은 사람 버렸네. 좋은 사람 버렸네. 예수 믿는 사람 보고 저 사람 좋은 사람버렸네. 저 사람이 학계로 나가면 학계 일등 될 것이고 정계로 나가면 정계 일등 되는데 그만 그 사람이 엉뚱한 걸 지금 그런 거는 아주 똥오줌같이 여기고 그러니까 사람 버렸다 해야 됩니다.
왜? '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만 보고 위엣 것만 지금 위에 요 다음에 부활하고 난 다음에!, 요게 모자라겠다.
부활하고 난 다음에 요게 필요 하겠다. 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 부족한 것, 그때 수치스러운 것, 그때 후회될 것 거기에만 힘을 쓰니까 벌써 죽음 너머에다 힘을 쓰니까 그걸 세상 사람이 알 리가 있습니까? 이런 욕망이 생겨져야 됩니다.
네째가 뭐입니까? 용단, 용단. 위에 욕망은 욕심 욕(慾)자, 밑에 용단은 용기 용(勇)자, 날랠 용(勇)자, 용기 용(勇)자. 그 용단이 생겨져 그 단행하는 용기가 생겨져. 뭐 죽음도 생각하지 안하고, 베드로가 물 위로 묵 뛰어 내려 가지고서 물 위로 걸어가는 것처럼이런 신앙으로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거 어데서 나옵니까? 이런 아름다운 네 가지의 이 신앙이 어데서 나옵니까? 어데서 나옵니까? 더 확실한 예언을 자기가 살피고 사모하고 연구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주의를 해 가지고서 이래 하니까 거기에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에서 모든 게 나오기 때문에 어데가든지 성경 말씀을 열심히 상고해 가지고서 사는 데에서 우리에게 좋은 복은 다 나옵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양산동에나 모두 구역장들이 기도하러 가는 데도, 구역장들이 가 가지고서 '오늘은 산에 왔기 때문에 야 좋은 공기도 쐬우고 또 여기 모든 자연도 좋다' 이렇게 한 구역장은 그 식구 죽여 버립니다. 들장 가던 길로 주 모아 놓고 그 집에서, 사람이 많은 데는 녹음기만가지고는 잘 안 들려지니까 이제 스피커 있는 데 거기서 재독을 해가지고 온 식구들이 거기에서 고요히 재독 들으면 이 설교를 들으면 자꾸 더 깨달아져 엊저녁에 재독하니카 어째, 더 깨 달아져요? 더 깨 달아져요. 재독하면 자꾸 더 깨달아져요. 이러니까 재독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도 저 더 깊은 산골로, 산중으로 끼고 들어가 가지고서 거기에서 모아놓고 이 재독을 한번하고 두번하고 이래 하니까 사람들이 거기에서 차차차차 뭐이냐 하면 날이 샌다 말이오. 날이 새. 날이 새고 그만 샛별이 떠오른다 말이오.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이 도야지 같은 이 소원, 염생이 같은, 그런 더러운 욕십은 다 없어지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거기에서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서 참 '감사하다' 감사가 움에 터서 올라와. 그라고 나서 좀 있으니 구속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나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욕심이 나와. '이제는 나도 내려가서는 한 번 실행으로 살아봐야 되겠다' 욕심이 나와. 그라고 난 다음에 뭐 그만 아예 단행하는 용기가 생겨집니다.
이래 가지고서, 그러면 그 일 하는 것이 산에만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어데서든지, 어머니로서는 이는 정말로 일등 어머니다. 이는 일등 아버지다. 이는 일등 목사다. 이는 일등 장로다. 이는 일등 우리 사장이다. 모든 게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그 사람이 된다 그거요.
어제가? 어제 내가 내 속에 괴어 있던 감사하는 그 할머니를 찾아가서 봤습니다. 갔는데 그게 인제, 내가 설교 한 번 했는데 그게 누군고 하니 ○○○목사님의 사모님이십니다.
그분이 그래 어제도 내가 말 들으니까 그 자녀가 일곱이라. 아들이 여섯이고 딸이 하나고 일곱이라. 일곱인데 그 자녀들이 공통으로 하는말이 평생, 여기 뭐꼬, 그때 신학교가 어데 있었지, 거기에가? 광복동 그신학교 있을 때에 그 많은 학생들이 있는데 조그만한 방 한 칸에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 없는 줄 알았어. 아이들이 그렇츰 많고 그틱 그때 가난한 살림에 굉장히 어렵게 살았지마는 그 아이들이 공동이라. 한번도 우리 어머니는 -뭐 굶기도 많이 하고 이랬지만-한번도 불평하는 꼴은 평생 그 아이들이 하나도 본 일이 없다 해. 그게 성녀라. 또, 성내는 꼴 한번도 안 봤고. 그러니까 이 다음에 가면은 그런 양반은 저 하늘에 있는데 나는 그 밑이라. 나는 성 잘 내거든. 이것도 고쳐야 되겠는데, 그뭐 좋은 일도 말이요, 그거 성내는 것도 그거 안 내야 될것인데. 나는 나쁜 거 보면 못 견뎌요, 그만.
그래 한번도 성낸 일이 없고 한 번도 불평하는 일이 없고, 그래 그 남편되는 한명동 목사님도 그래 자꾸 울고, 정신이상자같이 되. 더래요. 그거 또 멍해요.
왜? 말하기를 참 와서 고생을 했다고서. 배도 많이 곯았고 아이 또 너무 많이 낳아서 아무 보충도 못 하고 이래 놓으니까 그래 됐고, 그래도 한 번도, 뭐 아픈 일도 많았지만 한번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아프다 소리도 못 들었대요. 그저 그러면 그냥 누워서, 다른 사람이 보고그렇지 자기는 아프다 소리나 불만이나 원망이나 불평이나 그 성내는 것이나 뭐 그런 것은 평생 보지를 못했대요. 아무리 병들어도, 그때도 정신이 없는데 항상 웃어요. 그저 웃는데 누군지는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고 웃기만 웃어. 누구라고 이라면 '아, 그러냐고서' 누군지 사람은 사람은 분별 못 해요. 그냥 웃기만 웃고. 이랬는데 그분이 내가 존경하는 여인 중에 하나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나중에 보면 다 가버리고 그분하고 나하고 둘이만 기도해요.
기도하는데 그래 나는 그거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아니까 한명동 목사님 사모님이라. '저분은 저렇게 기도하는데 뭘 기도하는고 좀 한 번 알아 봤으면 좋겠다' 이렇지만 나는 남자지 그분은 부인이지 또 나이도 거의 같다 그거요. 이래 놓으니까 부인 있는데, 여자석 남자석이 다른데 쭈지쭈지 가 가지고서 그래 찾아 갈 수도 없지 참 그것도 노리니까 힘이 들어요.
그래 어째 한번은 가니까 남반 있는데 거 게, 또 앞에 차혜로 앉지 거기 또 따로 앉으면 또 이상하다 그 말이오. 그래 마침 어째 만났어. 딱 옆에 앉아 나도 그 옆에 남반이 옆에 딱 요래 앉아 가지고 그래 '오늘 아침에는 내가 이 어른이 기도하는 걸 내가 들어 보겠다' 그래 들었는데 그 장시간 그렇게 기도하는데 다른 기도를, 뭘 주십시오 하는 그런 걸들어 보지를 못했어 기도하는데 늘 '감사합니다' 아침 내 감사한 것만 해. 뭐 또 '감사합니다' 또 뭣 또 '감사합니다' 감사한 것만 자꾸 하는데 나는 그때 내가 놀랬어요. 아침 내 장시간을 기도하는데 전부 뭣이 감사하고 뭣이 감사한지 그거는 내가 감사하다 말만 들려, 뭐 그거는 말은 안 들리고. 그 가끔 가다 들으니까 '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뭣이 감사합니다.' 아침 내내 감사하다는 감사만 하고서 감사가 끝나고 나니까 일어서 갑디다. 그래 내가 다 일어서 가는 것 보고 그 뒤에 내가 나왔어요. 그래서, 항상 그분을 내가 존경하고 사모하고 있는데 이번에 병원에 입원을 해서 가 가지고 보고 한명동 목사님도 같이 그 옆에서 같이 한 번 기도하고 인제, 기도하는데 그 기도하니까 이래 알았으니까 그 목사님이 내가 기도하다 보니까 한명동 목사님이 그 사모님을 이래 아마 그냥 있으면 안 되니까 이래 딱 아듬고 이래 가지고 이래 가지고 기도를 해요. 그래 가지고 그래 같이 기도하고서 그래 왔습니다. 그래 한 번 가서 그래도 죽기 전에 가서 만나봐야 되는데 한 번 만나봤어.
그라고, 어제는 저게 손명복 목사님이라고 옥중 성도인데 그 남반으로서는 이인재 목사님하고 둘밖에는 살아 있는 이가 없어요. 없는데 그 이가 마산에 이제 은퇴해 가지고 있는데 그래 한 번 오래 동안 벼르다가 한 번 가서 찾아 보고, 또 조수옥 권사님, 인애원 원장, 가서 한 번 만나보고 또 주남선 목사님 큰 따님이 그분이 처녀로서 참 깨끗한 동정녀로 지냈습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하도 늘 저를 사모해 쌓아서 인제 한 번 가 찾아 보고 그래 가지고 그날은 그래 가지고 그라면 다섯사람 방문했습니다. 해서 그라고 나니까 그만 좀 피곤해서 다른 거 못했습니다. 목요일날 갔었어요. 어제가 금요일이지? 내가 목요일날 갔었어요.
그러니까, 그저 우리의 모든 행복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행복은 여기에서 나오요. 여기에서 나오니까 기도하러 가든지 어데든지 교인들에게 자꾸, 이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 이 가운데서 나오는 욕심이 가운데서 나오는 용기, 이 가운데서 나오는 기쁨, 이 가운데서 나오는 담력 그거라야 되지 그뭐 세상에 자기 배경이 정권자가 배경이 됐다 담대하는 그 담대는 마귀 담대요 그까짓 거 죽는 담대라. 소용이 없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