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23일 토새

 

본문 : 벧전 3:19-22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은 에덴동산 타락 전 아담 하와에게 교제를 가졌던 그  하나님이 도성인신 하신 분이시요, 또 타락한 뒤에 동산에 숨어 있는 아담  하와를 찾아가신 그 하나님이 도성인신 하신 그 하나님이시요, 노아 때에 저주와  사망과 이 죄로 인한 갇혀 있는 그 영들에게 구원하시러 가신 성령이 곧  도성인신 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지옥 가 있는 영들에게도 전파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자들도 예수님의 공로를 입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나고 난 다음에는 구원 역사가 없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활의 공로는 왜 어떤 자에게는 멸망케 하는 것이 되고 어떤  자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가? 비유컨대 많은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의 그 죄를 왕의 아들이 담당을 했습니다. '왕의 법을 어긴 이 죄의  형벌을 내가 받겠습니다. 또 왕의 명령에 복종치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한 이  불의의 값을 내가 담당하겠습니다. 또 왕을 대적한 이 값을 내가  담당하겠습니다. 왕으로 더불어 화친하고 순종해야 되는 이것도 내가 담당을  하겠습니다.' 할 때에 왕과의 관계돼 있는 일이기 때문에 왕의 아들이 그것을  담당을 하면 죄에 대해서 형벌이 없이 그저 용서해 가고, 법을 어긴 것이나 제  맘대로 한 것이나 또 왕을 대적한 그것을 왕의 아 들이 담당을 하니까 그만  그대로 용서해 지나고, 이러면 나머지기 죄에 대해서 불의에 대해서 원수에  대해서 처형하는 일이 매우 가 벼워질 것이요 좀 물러지고 흐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국법이 왕의 아들이 그렇게 해도 법대로 이행해서 징역 살릴 것을  징역을 살리고 벌금 물릴 것을 다 벌금을 물렸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왕의 법을  더 견고케 해서 남은 감당치 아니한 그 사람들에게 대한 처형이 왕의 아들을  처형한 이 일은 더 엄중해졌고 더 무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은 더 엄중히 됐고 더 절대성  있는 그 시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그분은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또 그분은  순종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형벌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죄가 없고 또 당신이 당신 주장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러기에 순종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벌받을 이유도 없고,  순종해야 될 이유도 없고, 화친해야 될 이유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이 이와같이 하신 것은 우리가 일반인과 꼭 같이 우리 이 심판을  대신 받아 가지고 심판받아 저주받고 형벌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우리와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입장 가지고 있는데 우리 형벌을 하신 것이  예수님을 형벌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우리 전인류만 형벌을 했으면 전인류만 형벌하는 것이  되겠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우리를 대신했을 때에 우리 형벌을 했기 때문에  그 법은 더 엄중히 됐고 그 형벌은 더 강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이렇게 벌받을 이유 없는 분이 벌을 받았고,  순종할 이유 없는 분이 순종을 했고, 화친을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을 죽기까지  할 아무런 그런 것 없는 분이 이것을 해 놨기 때문에 이 대신 한 공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대신 한 공로가,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 법에서는 전인류를  심판했지마는, 심판해 처형했지마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한 이 공로 이것이  외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공로는 일면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이렇게 하신 지공과  지성법은 더 법을, 더 엄중할게 없지마는 그 법을 엄중히 그대로 시행한 그  시행의 역사가 됐기 때문에 그 법의 시행에 더 엄중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또  하나는 당하지 않을 분이 당했기 때문에 이 공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심판인데  이 대신함을 받지 않은 자에게는 더 엄중하게 되어졌고 대신함을 받은 자에게는  이 대속을 받을 수 있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공로입니다.

 그런고로 "세상은 그를 믿지 아니함으로 정죄함을 받는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믿지 아니함으로 받는다 그말은 안 믿어도 그대로 받을 것인데 이제 믿는 공로가  설정줬기 때문에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역사가 하나 일어나서 믿기만 하면  대속이 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놓은 이것은 누구든지 이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믿기만 하면 이 대속의 공로는 그의 것이 됩니다. 믿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되지마는 믿지 아니하면 그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본구원으로서는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죽어 있는 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대신 하신 것을 자체가 대신 한 것을 믿을 수 없는 그런,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없고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 있는 것은 당신이 죽어 있는  자에게 대신으로 입히셨습니다.

 대신으로 입히신 것은 믿을 수 없는, 믿을 만한 그런 생기가 없는, 그런 존재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대신하신 것을 당신이 독단으로 입히셨습니다. 왜?  본인이 그것 입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독단으로 입히셨습니다.

 이것을 영을 구원하는 것도 독단으로 입히셨고 이 몸이 마지막 부활하는 것도  독단으로 입히셨습니다. 왜? 그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지마는 죽은 영이 어떻게 그 공로를 입을 수가 없고 또 죽어 있는  그 몸이 자기의 힘으로 부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는 불가능한 것은 당신이 독단의 주권 역사로 이 공로를 입혀 주셔서  대속을 하셨고, 그 다음에는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가 자기 행위로서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을 수 있는 자가 되어졌을 때에는 이 본인이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으로 이 공로를 입게 되고 입지 아니하면 입을 수 없는 자로 된 것이  이것이 행위구원이요 건설구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벌을,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벌, 또 자율대로 한 벌, 하나님을  배반한 벌 이 세 가지 벌을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되는데 우리가 받는 걸로  다 받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또 순종하는 것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될 우리가 우리  주장대로 자율대로 산 벌은 받았지마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이것이 있어야 영생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순종하는 이 일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것은 순종으로 청의를 주신  것입니다. 그 순종 이 우리에게 의가 되셨습니다.

 또 대신 화친으로 화친한 것은 그분은 화친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  십니다. 그런데 화친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해 하나가 돼야 되는  이것을 대신 졌기 때문에 대신 화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이 당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전인류를 심판하신  것이요 거기에 안 받을 분이 이 많은 무리를 대신한 것이 있기 때문에, 안 받을  분이 대신 받았기 때문에 받을 분이 안 받아야 되는 이것이 하나 이루어졌고, 또  받을 분이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것을 담당해서 이것이 되어졌을  때에는 그대로 처형한 그 일이 됐고, 처형을 했고, 또 대신 해도 실질적으로  순종해야 되지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예수님이 이 행하신 것은 우리의 대신  행한 것인데 예수님이 거기에 들지 않았으면 그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지마는  예수님의 거기에 드신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더 엄중히 이행해야 된다는  이것이 일면에는 이루어졌고, 일면은 대신 했기 때문에 대신한 이 공로를  누구든지 입을 수 있는, 대신 했기 때문에, 한 법이 한 죄를 한 형벌을 해야  되지 둘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한 이것을 용납 했으니 그 대신 한 공로를  자기가 입는 자에게는 그것을 입히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이런 이것이 하나님의  지성법이요 또 지공법인 것입니다.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대신 하려고 할 때에 대신을 금하는 것은 지공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또 대신 했는데 대신 한 그것을 대신한 자가 주려고 하고 대신  한 것을 입으려고 할 때에, 그것을 입을 때에 '입혀 주지 말아라. 입을 수  없다.' 하면 또 지공법이 범해지는 것입니다.

 지공법은 대신 한 것을 했으니 대신 한 것이 확실히 권위있게 대신이 돼야  지공법이 되는 것이고, 대신 한 것을 입으려고 하는 자가 입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하는 것이 그것이 지공법을 이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홍수에 그 배는, 물의 본능은 띄우는 것이 그것이 물의 본능이요 배가  없으면 가라앉는 것이 그것이 그 본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그 배가  있으면 뜨고 배가 없으면 가라앉습니다. 우리가 그 배의 이치를 잘 아는 대로  나무조각은 뜨지마는 나무조각에 짐을 실으면, 돌을 매면 가라앉습니다.

나무조각이 들들 한테 짜서, 궤같이 짜 가지고 그 안에 물이 하나 들어가서  하나될 터인데 물 양보다 무거운 것은 그 안에 담을 수 없지마는 물 양보다  가벼운 것은 그 안에 공기가 돼 있기 때문에 담을 수 있는 그것이, 이것이  물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서 대신해서 형벌받았기  때문에 이 형벌은 남아 있습니다. 대신 해서 받았기 때문에 이 형벌은, 만일 이  대신 한 이것을 누구에게 주면, 누구에게 주면 이 대신 한 그것을 받은 자가  자기 것이 되겠고 이것을 아무도 주지 아니했으면, 아무도 주지 아니했으면 이  공로는 따로 남아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주지 않았으면 이 공로를 대신 했던 그  자가 이 공로를 입지 않을 때에는 그는 이 형벌을 다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를, 나를 위해서 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는데 이  대속의 공로를 내가 입으면 이 대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 법에서 이제  형벌할 것 형벌했고 순종할 것 순종 했고 그것이 이제 끝장났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입히지 않았으면, 내가 입지를 않았으면 이 공로는 남아 있고 내가  입지 않았으니, 그 공로를 입지 않았으니 나는 부득이 심판을 받아야 되겠고,  순종의 공로를 입지 않으면 나는 순종을 해야 되겠고, 또 내가 그 공로를 입지  않으면 화친을 내가 가질 수 없고 원수된 그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에게 설정된 것이지마는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입히셨으나 우리의 건설면에 있어서는 이 공로를 자기가  입으려고 하면 입고 입지 아니하면 이것은 입혀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이의 행한 대로 갚는다 하는 것도 이 뜻이요, 또 이 공로는  자기가 믿을 때에 이 공로가 자기의 공로가 되어지지 믿지 않으면 이 공로는  자기 공로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저 은혜로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주체가,  주격체가 이 은혜를 입어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 주격체를 통해서 그의 소속체는  은혜를 입힐 수 있고 또 스스로 이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비유가 잘 안 되지마는, 얼어 죽은 사람이 생명이 끊어져 기절했습니다. 기절이  됐으나 생기가 다시 돌아와서 기절된 것이 생기가 살아났습니다. 생기가  살아났으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그 생기 그것의 힘으로 차차  차차 생기만 강해지고 그 생명만 강해지면 그 생명력으로 차차 차차 남아서  동결된 남은 몸은 희생이 되고 건강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생명력의 작용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영 이 살아난 자는 "성령이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증거한다" 그랬습니다. 증거한다 말은  그렇다고 소식을 전한다는 그 말이 아닙니다. 증거라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생명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된다" 말은 땅끝까지 예수님화시키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땅끝까지  예수님화 시킬 것을, 예수님화 시키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성령과 물파 피가  증거한다" 말은 이 셋은 하나인데 이 셋이 예수님화 시키는 것, 다시 말하면  성령은 성령화 시키고, 진리는 진리 화 시키고, 피는 피화 시키는 그것을  가리켜서 증거한다, 그러기에 증거한다는 그말을 그저 사실 그렇다 전해 주는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증거한다는 그 말의 뜻은 그렇게 피상적인  그런 것이 아니고 실지화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히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게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전인류가 심판받은 것입니다. 전인류가 심판을 받는 그 심판에 예수님도  동참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동참해서 받았는데 예수님은 받을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받을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았는데, 우리가 받은 것인데 만일  우리가 받은 것을 우리가 실상으로 받게 되면 예수님이 대신 받은 것은 그것은  다시 변상을 해야 됩니다. 그것 다시 남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이 대신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지 않으면 예수님의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지 거기에 아무런 받지 않을 것을 받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이 어떻게 해서  아무 죄 없는 분이 형벌을 받으며 어떻게 순종할 화친할 이유 없는 분이 해야  되느냐? 그것은 없는 것이 할 때에는, 없는 것이 할 수 있는 그것은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없는데 하게 된 그것은 어떤 면으로 하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주신 그  자유성에서 예수님이 대신 하려고 하시니까, 대신 하려고 하시니 그 자유법에서  대신을 금지할 수 없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공법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공법을 통하여 지성법에까지  완성을 하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그런고로 이 대속하신 공로는 이  지공법에서 대속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공로는 이분이 입히려고 하면  입히십니다. 이분이 입히려고 하면 입히십니다. 강제로 입힐 수 있습니다.

입히십니다.

 그러나 이분이 입힐 수 있는 때가 있고 입힐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입힐 수  있는 때는 언제인고 하니 그가 아무런 그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입힐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입힐 수 있지마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입힐 수  있는데 입힐 수 있을 때가 어떤 때인고 하니 그의 주격체를 살려 낼 때는 입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동적으로 그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격체가 살아난 데에는  벌써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되는 그 동시에, 그 주격체 영이 살아난 동시에 그는  자유성이 살아났습니다. 자유성이 살아났기 때문에 이 자유성을 이것을 이제는  강제하지 못합니다. 강제하면 또 하나님의 지공법에 또 어김이 됩니다.

 그러기에 살아나고난 다음에는 그 자유성이, 자유성이, 이 자유성을 가지고  대속한 공로를 입으려고 할 때에는, 입으려고 할 때에는, 입혀 주는 자가 입혀  주지 않으려고 하면 입으려고 해도 못 입습니다. 못 입지마는 대신한 자가  입히려고 하는 그 자유성을 가지고 입히고자 하고 입히려고 하고 또 이 살아난  자유성 있는 자가 그 공로를 입으려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금지할  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히려고 하지마는 자유성 가진 자가 입지 않겠다 할 때에는  입힐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생된, 중생된 영이 중생되기 이전에는 예수님의 공로를,  아무런 그에게는 자유성이 없기 때문에 입힐 수 있었지마는, 그는 자유성 없는  무생명자이기 때문에 입힐 수 있지마는 입혀서 살아나고 난 다음에는 그의  자유성이 예수님의 공로를 독단으로 입힐 수 없는 벌써 자유와 자유가 이렇게  교제가 돼 가지고 이것이 결합이 돼서, 이 둘이 결합이 돼서 자유로 이 자유성이  입히고자 하고 자유성이 입으려고 할 때 입는 것이지 암만 입히려 해도 '나는  입지 않겠다. 입기 싫다.' 할 때에는 입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에게 베푸실 때에 이 자유성에 거리낌이  없이 입힐 때가 있고 자유성이 생기고난 다음에는 자유성을 통해서 입히지  자유성을 통하지 않고는 입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성령이 직접 우리에게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몸의 구원에 대해서는 성령님이 이 대속의 공로가 있지마는  단독적으로 이래 할 수가 없고 중생된 자가 있기 때문에 이 중생된 자의  자유성을 통해서 입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을 증거해 준다"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기본 대속을 입는, 기본적으로 대속을 입는 기본구원은 이것은  일방적이요, 객관적이요, 하나님의 독단적이요, 이러나 이 기본구원을 얻은 후의  은혜는 모든 은혜가 다 유기적입니다. 강제가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이 은혜를  입도록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공로는 뚜렷이 남아 있는데, 예수님의 공로가 남아 있는데  이 예수님의 공로를 입는 자에게는 그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과만 관계가 있지 하나님의 지공법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에는 예수님의 공로를 입을 때에는 예수님이 대속해 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심판에서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과만 관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후에는 예수님과만 죄에 대한 문제가 있고, 또 순종에  대한 문제가 있고, 화친에 대한 문제가 있지 이 지공 지성의 심판적인 이  하나님에게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이 공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지공법인 이  심판에는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사심판인 그리스도의 심판에 관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에 서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대속하신,  대신 담당해서 공심판에 우리를 떼냈기 때문에 예수님과만 우리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 이 사심판에 우리가 관련된 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심 판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어떤 심판을 하느냐? 이  공로를 입은 자는 당신이 담당하실 것이고 입지 않은 자는 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공로를 입은 자 입지 않은 자, 이 입고 안 입은 것은 저에게  자유성이,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이 자유성을 가지고 거부한 자에게는 이  공로를, 공심판에는 다 대신 했기 때문에 사심판에는 떼 나왔지마는 사심판에 와  가지고 무슨 일 하느냐? 이 공로를, 자기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공로를  예수님이 입히시려고 할 때에 원해서 입은 자는, 원해서 입은 자는 이 그리  스도의 심판에서 이 공로를 입은 자로 심판하고, 예수님이 입히실 때에 제가  입지 아니하려고 한 그자는 이 공로를 제가 자유성 가지고 거부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타깝게 또, 그를 대신 해서 이와 같이 공로를 베풀었지만 그가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 심판에서 그를 심판합니다. 사심판에서 이 공로  입지 않은 것은 유 황불 구렁텅이에 태웁니다.

 그러기에 이 사심 판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입지 않은 자는 그 사심판에서  심판을 받고 행한 대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터인데 이 심판대  앞에서는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 그말은 이 공로를 입은 자는 입은 자로  영원한 보응을 받게 되고 이 공로를 입히려고 해도 입지 않으려고 거부한 자는  공로 없는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때에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멸망할 것은  멸망하고 구원할 것은 구원하는 이게 됩니다.

 공심판에서는 일단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나왔지마는 예수님의 사심판에서  예수님의 이 공로를 자유성을 가지고 거부한 자도 있고 환영한 자도 있고 했기  때문에 환영한 자에게는 입히지마는 거부한 자에게는 이 공로가 그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건설구원이요, 이것이 성화구원이요,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재에 하고 있는 일은 무슨 일이냐? 우리가 현실 현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 대속의 공로를 내 자유성을 가지고, 이  공로를 예수님이 입혀 주시려고 할 때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입는 시간이요,  '아니 나는 입지 않겠습니다.' 하는 거부하는 시간이 우리의 현실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노아 때에 그 홍수가 내리는데 배는 홍수의 도움을 받아서 홍수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고 배가 없는 것은 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나를 대신한 것을 내가 알고  인정하고 그 실상으로 대신 한 것을 내가 입을 때에는, 알고 인정하고 입을  때에는 나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멸망을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배가 있었기 때문에 심판받지 아니하지 아무리 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배가  뜨는 줄로 인정을 한다 할지라도 배가 실상 없으면 그는 물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형식계시로 우리에게 이 절대성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입니다. 아무리 배가 있으면 배는 물에 뜬다는 지식을 가지고 배가  뜬다는 그 인정을 가지고 한다 해도 배가 없으면 물에 가라앉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은 노아가 만든 배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노아가  만든 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공로는 내  공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나를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 때에는 예수님의 공로는 내가 아무리  입으려고 해도 믿음이 없는 것은 배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물에 자무라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예수님의 공로를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만치 입을 수 있고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공로는 내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효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공로를 내가 입고 못 입는 것, 홍수에 배가 있고 없는 것,  배가 있고 없는 것, 홍수에 배가 있고 없는 것, 없으면 배가 없기에 홍수로  멸망할 수밖에 없고 배가 있으면 총수의 도움을 입고, 배가 없으면 홍수의  도움은 없고 멸망을 받는 것, 예수님의 공로가 없으면 이 심판에서 멸망을 받고  예수님의 공로가 있으면 도움을 입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그 배를 순종으로 만든 것처럼 우리가 믿음이라는 이 믿음은  순종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으로 만든 믿음이 있으면 이 공로는,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의 대속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대속을  내가 입을 수 있어서 이 홍수는 나를 돕는 홍수가 되고, 이 홍수는 나를 돕는  홍수가 되고 배가 없으면 나를 멸하는 것이 되고, 이 심판은 내가 믿음이 있을  때에 이 심판은 나를 돕는 심판이 되고, 왜? 예수님이 대신 한 그게 있기  때문에. 내가 믿음이 없으면 이 심판은 나를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현실 현실은 이것이 심판입니다. 현실 현실은 심판인데  예수님께서 대속은 단번에 하셨지마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당신이 기본적으로  입히는 것은 단번 입힙니다. 우리의 영이 중생되는 것도 단번이요, 우리의 몸이  부활되는 것도 단번이요, 단번이지마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에게 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벌써 우리에게 시작하기 전에 단번에 입히는 것,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에게 시작하기 전에 기본적으로는 이 공로를 주님이 강제적으로  입혔습니다. 능동적으로 입혔습니다. 주관적으로 입혔습니다. 그러기에 이것  객관 역사입니다.

 이는, 왜? 나에게 거부할 것도 환영할 것도 아무런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는 당신이 입힐 수 얼마든지 있어. 대신 했기 때문에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혀서 일단 살려내고난 다음에는 벌써 자유성도 생겼고 능동성도  생겼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 되면 강제로 입히면 하나님의 지공법에 위반이 되기  때문에 강제로 입힐 수 없고 언제든지 우리에게 이해를 시켜 가지고 우리가  환영을 해서 입히기 때문에 성령 이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우리를 구원하는 이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매일 매일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그 심판  곧 그리스도의 심판을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지금, 하나님의 공심판이며 하나님의  사심판입니다. 우리는 지금 매일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심판이며 하나님의  사심판인데, 하나님의 공심판은 예수님의 대속이 일단 방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은 우리에게 막아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심판만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심 판에서 예수님께서 '내 공로를 내가 네 대신  했는데 내가 형벌 받은 것을 네가 형벌 받으면 영원히 받아야 되고' 영원히  받습니다. 이 공로를 입지 않은 우리의 요소는 영원히 받아야 되는 것이라.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공로를 입지 않은 것은 영원히 받습니다. 이공로를  입은 것은 영원히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순종도 이는, 거역의 벌을 영원히 받고 순종도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를 대신 해 순종했기 때문에 영원히 순종한 영원히 순종입니다. 영원  순종을, 영원 화친을, 영원 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공심판이 뭇인간에게 다 현실 현실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이 신불신자에게, 하나님의 공심판이 자기 이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 하나님의 공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이 오는데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심판이 오는 그 앞에 그리스도가 대속한 이  대속이 있어 이 심판을 막고 그리스도의 심판만 우리에게 당하는 이 심판이  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같이 동시에 심판받는데 그리스도의 이 심판이 우리를  대속한 이 공로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만이 우리를 책임지고 우리 앞에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닥치는 것이 하나님의 공심판과 그리스도의 심판이 같이  오는 이 심판이라는 무서운 이 멸망이 지금 오는데 이 멸망을 일단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막아버렸습니다. 방파했슴니다. 방어했습니다.

 방어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이 멸망을 막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이것 멸망을 막고, 대속하신 분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이 심판으로 우리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매일 매일 자기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지금 우리를 상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심판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이 심판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공로를 입으라고  합니다. '내가 네게 대속한 이 공로는 너로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에, 너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내가 대신 했기 때문에 이 공로를 네가 인정만 하고 입기만  하면 된다. 이 공로를 인정하고 입기만 하면 된다. 이 공로를 네가, 내가 너를  대속하신 이 공로를 지식적으로 알고, 이 공로를 네가 알고'  (저 졸면 모르는데. 앉아서 자면 그 속에 변화가 없어. 그런 사람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아도 매일 매일 이래 변화돼 가지 않는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볼 때는 그 사람 변화 없이 잘 믿는 것 같지만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늙은이  신앙이오, 늙은이 신앙. 늙은이 신앙은 꿈꿉니다. 젊은이 신앙도 소용없어. 환상  봅니다. 아이 신앙, 종의 신앙이라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졸면 소용없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이 공로로 일단 멸망을 다 방어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에게 이 현실에 닥쳐온 이 현실이니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공로를  입히려고 애를 쓰고 또 성령도 입히려고 애를 씁니다. 또 중생된 영도 입히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다만 이 마음과 몸이라는 이것도 모형적 자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성을 가진 그 자유성의 모형을 우리 영이 가지고 있고, 영의  자유성의 모형을 마음이 가지고 있고, 마음의 자유성의 모형을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는 이 자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자유성 가지고 제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성령도 중생된 영도 진리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우리 현실에서 일단 큰 파란은 물리쳐 놓고 이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히려고 '이 공로를 입으라 입으라' 하고 지금 권면하고, 타이르고, 달래고,  이해를 시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만 우리의 심신의 이 자유성에만 강제하지 않지 모든 그 주변의  것은 다 동원을 시켜 가지고 모든 모양으로 '보라, 이렇게 순종치 않으면  망한다. 거역하면 망한다.' 대신하는 이치, 온갖 이치로 이 모든 만물을  자연계시로 삼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이 모든 우리에게  접하고 있는 이 만물은 우리의 대속의 공로를 입히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실물 교재입니다. 실물 교재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목도 곤충도 이 자연도 인간도 모든 것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자연계시요 이것은 실물 교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가 배우는 학교인데 뭘 가르치고 있느냐? 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이 대속의 공로를 네가 입으라.'  하는 이것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지식이요 이것만이 우리에게 필요있는  지식이지 이 외에 모든 것이 이것을 반대하면 그는 음행케 하는 멸망시키는  지식이요, 그러기 때문에 세상 과학을 배우는 과학이 이 지식을 우리에게 돕는  것이 되면 그 지식은 여기에 이용이 되고 살아난 지식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은 뭘로 입습니까?  믿음으로 입습니다. 믿음으로 입습니다. 믿음으로 입는 것은 믿음은 세 가지로  되는 것인데 한 가지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한 것, 이 형벌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화친에 대해서, 형벌은 원수된 형벌,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 법을 어긴  것이 불의가 아니고 자율적으로 산 그게 불의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 법을  어긴 것이 죄입니다.

 이 세 가지 형벌을 대신 한 것이 예수님의 공로요, 대신 순종한 것이 예수님의  공로요, 대신 화친한 것이 예수님의 공로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공로를  입으라.' 하는 이것을 지식으로 압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속하셨다.' 하는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 대속하신 것을, 대속하신 것을  자기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했기 때문에 내게는 예수님이 의를  입히 주셨다. 나에게는 또 죄를 없애 주셨다. 나에게 화친을 주셨다.' 하는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실제로, 실제로 입는 것입니다. 실제로 알고  인정하고 실제로 입는 것, 입는 것은 입으면 예수님의 사죄를 실지로 입는  것입니다. 실지로 벗어놓지 않고, 알고 인정하고도, 이 사죄함을 입혀 줬는데  다시 이 사죄를 벗습니다. 사죄를 벗는 건 제가 죄를 범할 때는 사죄를 벗는  일이 되겠습니다. 불의 행하면 의를 벗는 일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나눠져 있는 것은 화친을 벗는 일이 되겠습니다.

 또 자기가 이렇게 입는 것, 입는 데는 주님이 나를 대신했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했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으심입니다.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대신 죽은 자 되는 것이 이것이 입는 것입니다.

 대속을, 주님은, 주님의 공로는 내것 되고, 내것 되는 데는 나는 주의 것이  돼야 됩니다. 주님의 공로가 내것 되는 데에는 나는 주의 것이 되고 주님이  죽으심이, 나 대신 죽으신 것을 내가 받을 때에는 나는 이것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주님의 대신 죽은, 주님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은 당신의 것이오. 주님과 나와의 바꾸는 것, 또  이것을 벗지 않는 것. 예수님의 공로를 벗지 않는 것, 또 예수님과 자기와의  바꾸는 것, 이러기 때문에 피에 팔려서 나는 주의 것이 되는 것, 주님의 것이  내것 되고 내것이 주의 것 되는 것, 이것이 실지로 입는 것이요, 또 주님의  죽으심은 내 죽으심 이요 나의 살으심은 당신의 살으심 이것이 이제 입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이것이 뭣이냐?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현실을 주어서 이 면으로, 이 면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각도의 현실을 주시고 저런  각도의 현실을 주시는 것인데 이 현실에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실상으로  자기가 입는 것이니, 실상으로 입는 것은 내가 실상으로 죽는 것이 내가 입는  것이요 실상으로 당신이 사는 것이 내가 입는 것이요, 실상으로 나는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이요 당신의 이 공로는 내것이 되는 이것이 현실에서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실상이 되어지는 이것이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이 구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뒤에 시간이 있으면 계속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기억합시다. 홍수에 방주가 없이는 뜰 수 없고 방주가 있으면 이 물은,  홍수는 방주를 돕습니다. 방주를 도와서, 방주를 도와서 구원하는 것이 홍수처럼  우리에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공로는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공로는 우리를 정죄합니다.

 10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다시 또 여기에 있다가 직원들은 권찰회 다 참석해야 됩니다. 권찰회 참석하지  않고 이 동안에 것이라도 꾀 파는 그것이 나를 망칠 그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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