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14:40
구원
1980. 11. 10. 월새
본문 : 베드로전서3:20-22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노아 때에 하나님이 방주로 홍수 심판에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에서 멸망 받지 아니하고 구원 얻는 길을 하나님께서 방주로 그 길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방주로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명 뿐이었다 하는 말입니다. 홍수 심판때에 하나님이 방주로서 구원을 얻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 길을 정하시고 구원하시리려고 애를 쓰고 이 구원을 받도록 하실려고 오래 기다렸다 이랬어요. 오래 참고 기다렸지만은 다 순종치 아니함으로 어 홍수 심판에서 멸망을 받았고 구원 얻은 사람이 겨우 여덟명 뿐이었다 했습니다. 그들이 홍수 심판에 이 홍수 재앙이 내린다고 해도 그들이 이 말을 허술히 듣고 참되게 듣지 않했고 도 이 홍수로 온 천하에 생면가진 것이 다 멸망을 받는데 다만 이 방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했지만은 이 방주로 구원 얻는다는 이 사실도 그들이 허술히 들었지 그렇게 인정하지를 않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이 세상 것과 세상 재미에 그만 취해 가지고 하나님이 홍수로 멸망 받는다 하는 말씀도 아주 허수이 듣고 또 이 홍수 재앙 심판에서는 방주로 구원 얻는다 해도 사람들이 헛되이 받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다 멸망했고 여덟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 재앙을 방주로 멸할라고 애를 쓰지 안했기 때문에 그기 됐다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도록 할라고 오래까지 기다리고 참으셨다 그러나 그때에 이 사실을 신실히 듣고 이 홍수 재앙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에 이른 사람이 겨우 여덟 사람 뿐이었다 그 홍수 심판과 그 방주의 구원은 곧 오늘 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물은 21절엣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임하신 것은 홍수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홍수와 같고 예수님이 십자가 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방주와 같습니다. 그때 홍수가 임할때에 홍수로 멸망한다는 것도 무시했고 방주로 구원 얻는다는 것도 다 무시한 그로 인해서 멸망한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제 믿지 안하는 자는 다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얻고 예수님을 믿지 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한다 이래도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일을 등한이 하고 아주 허술이 받아 노아때의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땅의 것에 붙어 가지고 땅의 것만 생각하다가 멸망한 것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무슨 뜻으로 세례를 받는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자기가 확실히 인정하는 그 표로 받습니다.
그어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가 옛사람으로 살던 그 멸망을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가 죽음이라 그러기에 옛사람으로 살던 그 옛사람은 완전히 죽고 도 예수님이 부활하심은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이라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으로 산다 예사삶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이것이 말세에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길이라 이것이 노아때에 그 홍수 재앙에서 방주로 구원 얻으라고 할때에 홍수로 멸망받는 줄 알고 방주로 구원 얻는 걸 알아서 이 멸망과 구원을 자기가 무시하지 안하고 여게 대해서 준비한 사람들은 다 구원 얻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라들이 다 들었지만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 여게 대해서 이 진실되이 준비를 했지남은 사람들은 다 준비 안해 가지고 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지금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가 멸망할 자가 멸망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자기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요 새사람으로 사는 요것만이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그때 사람들이 죽는 것과 사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은 무식한 것처럼 오늘도 어 죽는 것과 사는 것 요 두가지를 무시합니다. 죽는 요것을 신실히 듣고 자기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옛사람이 죽은 것이니 요 죽은 것이니 요 죽은 것인 것은 요 죽은 것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새사람으로 살 수 있는 이 산자인 것을 인정해서 죽은 자인 것을 인정하는 것과 산 자인 것을 인정하는 요 표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세례 받을 때에 물을 머리다가 찍어 얹어 가지고 이렇게 세례를 받지만은 다른 교파에서는 침례를 받습니다. 침례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물속에 푹 잠기 가지고 잠깐 동안 있다가 다시 이제 건져 냅니다. 그것은 뭐이냐 땅 속에 실은 갖다가 요 세례받는 것이 땅속에 파묻었다가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처럼 땅 속에 파 묻었다가 새로 거게서 파내서 살리는 요것이 고 형식을 참 달은 것인데 예수님이 삼일 동안 땅 속에 파묻혔다가 그 다음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요 형식을 통하는 것인데 그렇게는 못하고 이러니까 물속에 들어 가 버렸으면 숨 안쉬고 물 속 들어 갔으니가 그거는 죽은 것이다 물속에 들어간 것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하고 고 다음에 다시 물속에서 건져내서 산 것으로서 이제는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다시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요것을 하나의 형식을 갖추어서 본인들에게 인식하는 말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너는 이제는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다시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요것을 하나의 형식을 갖추어서 본인들에게 인식하는 말입니다.
세례받을 때에 너는 이제는 옛사람은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또 건져냄으로서 이제 너는 예수님과 함게 살았다 부활하심으로 다시 살았다 요것을 인식시켜서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죽으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한께 하여 나는 이제 죽는다 그 다음에 다시 건져 낼 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이러기 때문에 옛사람으로서는 죽음같이 되어 다시 살지 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이 새삶으로 남은 때는 살아야 된다 하는고 자기라는 것을 본인이 아는 고런 형식을 해서 그렇다는 것을 하나 표를 표시하는 것이요 그렇다는 것을 하나 증표하는 것이요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요 그렇게 죽고 살아 났다는 그것을 하나의 이 형식으로 하나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에 보면은 이 피로 가지고 깨끗해지는 것이 이것이 그 양의 피를 뿌려도 되었으니까 물을 꼭 갖다가서 그렇게 물 속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물찍어 흩어 가지고 이래 해도 이 하나 요식이요 하나 형식익 때문에 하나 의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된다 해서 우리는 세례를 그렇게 줍니다.
삼천명이나 세례를 줄 때에 그때에 그 삼천명 세례를 그 사도들이 어떻게 줬겠느냐 아 하루 동안에 그는 다 이 구약에 물을 뿌리는 것 피를 뿌려서 깨끗게한 것처럼 이제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에 물을 뿌려서 그렇게 했다 하는 것으로 우리 세례주는 것은 침례교회에서 세례주는 거와 다릅니다. 침례교는 그렇게 세례주는 것은 우리가 세례줘도 괜찮지만은서도 할 수 있으면 침례 교회에서 세례주는 것으로서 그렇게 바꾸어 졌으면 신은 그런 생각도 납니다.
또 어떨 때에는 그것보다도 흙을 두고서 너를 이제는 죽었다 하는 것으로서 그 흙 속에 파묻었다가 다시 파내서 나는 예수님의 그 죽으심으로 나는 확실히 죽었다 하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것을 인식을 좀 똑똑히 가지도록 이세는 강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흙으로 파묻었다가 파냈다가 갖다가서 이렇게 해야 되지 물로 찍어 흩어도 되는 것은 꼭 같은데 너무 강팍하기 때문에 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이 에 표를 하는 이 표시를 너무 경하게 여긴다 그런 생각을 여러번 가져 봤습니다. 로마서 5장으로부터 6장까지에 보면 어 너는 죽은 자라 죽은 자라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느냐 그러면 죽은 자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바로 될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의식으로 멸망을 피하고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이 외식은 그 세례로 의식을 삼았는데 의식은 세례주는 것으로 삼았고 실상은 의식은 세례주는 것으로 삼았고 하나님의 멸망해서 멸망을 받는 것과 또 하나님의 구원에서 구원을 얻는 것, 그러면 우리는 멸망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멸망을 받지않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지 않는 것입니다.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은 구원 얻은 이 공로를 예수님이 설정했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대 나는 멸망할 자는 멸망했고 옛사람은 멸망했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사는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은 예수님에죽으심으로 죽었고 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이 이런 이 표를 이 사실을 본인케 인식시키고 본인이 또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람이라 하는 이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이요 실상은 뭐이냐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이요 실상은 무엇이냐 고 밑에 실상을 말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표시는 받음으로 은혜가 더 될수 있고 이 표시를 자기가 받지 않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세례받지 안하면 구원이 없다 아닙니다. 세례를 안 받아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고 이 세례 받는 것은 인식을 하지 안하기 때문에 이걸 한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 형식에 의식에 표시를 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실상은 뭐이냐 실상은 세례라 응.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세례를 그 표를 지금 세례 받는다 말이요 세례라 세례라 세례는 말이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물로 세례받으니까 물로 뭐 씻는다고 세례를 하니까 씻을 세자 례할 례자 이러니까 씻는 레라 이라니까 어 물로 가지고 자기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면 그 그런 것으로 알지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세례는 뭐이 세례냐 오직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야 찾아 가는 것이라 그러면 세례는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것이 세례입니다. 실지의 우리가 구원을 얻는 옛사람으로 살아나는 그기 뭐이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것입니다.
어제 오전 오후에 말씀하신 거와 같이 우리가 양시을 찾을라고 하면 특별계시 자연계시 이 두가지 계시의 지식을 자기가 받아 하나님이 이렇다 이렇다 이렇게 자연게시 만물을 통해서 참된 이치를 가르쳐 주시고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참된 이치를 가르쳐 주시는 이 이치를 자기가 사용해서 요 이치대로 참된 이치대로 살아야 겠다 하는 요 마음을 가진 요 마음이 똘똘 뭉쳐서 요 마음을 가지고 요 마음을 어떤 욕심이 아이구 그대로 살아야 되지만은서도 이제 현재 이런 사건이 있기 때문에 이 사건 해결하고 나서 살자 또 고대로 살아야 되지만은서도 지금 문제가 있기 때무네 이 문제를 (졸고 응 예배볼때 졸면 귀신 들어가 하나님의 도를 못듣는데 어떻게 갖다가서 구원이 되겠어 똑똑한 사람들 보면 예배 볼때에 꼭 조는 사람 있어 그 사람은 그 잠깨기 전에는 절대 제가 신앙 생활 못합니다. ) 자기가 이 두가지 지식에서 얻은 이 지식을 을 가지고 요 지식이 가르쳐 주는 대로 요대로 살라고 애를 쓸 때에 그때에 모든 사건들이 들고 일어난다 말이요 자기 몸 밖에 있는 모든 사건들이 내가 깨달은 요 진리대로 살라고 하니까 그것이 다 거리낌이 되어지고 낭파가 되어지고 또 자기 속에 그기 낭파되면 어짜노 그기 낭파되면 큰 일 나지 않나 이라면서 자기 속에서 또 그렇게 살아서 낭파된다고 하는 또 그 자가 있다 그말이요 그러면 요대로 살라고 자기가 깨달은 요 지식대로 살라고 애를 쓰면 자기 속에서 낭파된다 낭파된다 이라면 큰 문제다 큰 문제다 하는 고놈이 누군고 하니 고놈이 옛사람 원수 고놈입니다. 고놈은 죽이야 되는 놈입니다. 고놈 욕심을 못이루고 고놈의 갖다가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고 놈이 지금 갖다가 낭파 당한다고 야단치는 고놈의 낭파가 당할 뿐만 아니라 고놈이 죽어야 됩니다.
고놈을 죽이야 됩니다. 응 내게 몸 안에서는 그런기 일어나지 몸 밖에서는 또 모든 경제 문제 사회문제 또 모든 사업문제 이런 모든 먼 친척 문제 뭐 갖다가서 정실문제 혈육문제 이런 모든 것이 막 들고 일어나는데 그 일이 낭파되니까 요대로 하면 그일 낭파된다 고 일이 낭파가 되야 된다 그말이요 고 일이 전부 나를 죽일라고 만들어 논 일이라 그말이요 고것이 전부 갖다가서 나를 지옥보낼라고 그렇게 막 둘러 싸고 있는 이럴 때라 그말이요 이러니가 이것 살리고 이것 살릴 수가 없다 그말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이 자연계시에서 깨달은 요 지식대로 살라고 하니가 내 안에 있는 낭파 된다고 갖다가서 지금 도근 거리고 안된다 하는 고놈이 내 속에 있지 내 몸 밖에 지금 낭파되는 일들이 있지 이러니까 자 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요 일을 요걸 갖다가서 할라고 하면은 이 일들이 되니까 그러면 이것을 버릴까 이라다가 그걸 귀중히 여기면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보고 자연을 보고서 깨달은 것이라도 이걸 포기하게 되고 이것을 잡고 놓지 안하면은 저기 자연히 말라 죽어버리게 되고 이 둘중에 하나라 말이요 갖다가서 이래서 이 두리 싸우는데 자기 몸 안에서도 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 싸우고 몸 밖에도 싸우고 이렇게 싸움이 있는데 이때에 자기가 깨달은 요대로 할려고 하면 이것들이 낭파된다고 야단을 칠 때에 고대에 진리를 양보하고 고리 달아나지를 안하고 고게 속하지를 안하고 세우고 있으면 아무래도 이래 살아 되겠는데 이래 살아야 되겠는데 이래 살아야 되겠는데 이래 살아야 되겠는데 할 고때에 일어나는 고것이 양심입니다. 고때 일어나는 고것이 양심이요. 이 싸움이 엇는 자는 양심을 찾지 못합니다. 이래 가지고서 두 싸움이 일어 날때에 양심이 와 가지고서 자꾸 달랩니다. 양심이 와 가지고서 아무래도 이래 살아야되지 않느냐 살아야 되지 않느냐 요럴 때에 내가 고렇게 살기로 단정을 딱하고 여러 건이 한몫 다 나타질 안하니까 한 건씩 한 건씩 나타나니까 한건 나타날 그때에 그 현실에서 현실에 닥친 고건에서 이제는 물리치고 말씀대로 요래 딱 살때에 고때에 양심을 내가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이제 나를 만났고 내가 양심을 찾았습니다. 양심은 자기 마음의 주인공입니다.
자기 마음에 제일 빛이요 주인공인데 요대로 해서 요 현실에서 양심을 영접하면은 옛사람 요것이 갖다가서 물러 갑니다.
요것이 물러 가족 양심을 영접하게 되면은 즉시 양심을 영접하면 양심이 중생된 영을 쫓아 갑니다. 중생된 영을 쫓아가고 중생된 영은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것은 원층 거리가 멀어서 말하면 정 반대니가 그놈하고는 사귈 수도 없는데 양심은 좀 갖닥 친근해 양심은 좀 통한다 그말이요. 요럴 때에 이제 영이 양심을 통해서 들어갈라 할때에 다른 마음이 욕심 그런 거는 어림도 없지만은 양심이 있다가서 그 중생된 영을 영접합니다. 중생된 영을 영접하요 영접하면 중생된 영이 자기 속에 들어 와서 이제는 마음이 양심이 자기 마음을 주관하지 중생된 영이 들어와 가지고서 자기 마음을 주관하지 중생된 영이 들어와 가지고서 자기 마음을 주장하지 그러고 나면 진리가 들어와 가지고 주장하지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들어와 주장하지 이러면 벌써 갖다가서 살았소 이것은 아무라도 해하지를 못합니다.
이러면 진리가 나를 지켜주지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너를 자유케 하면 참 자유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지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자유케 하지 이러면 이제는 진리와 영감대로 그대로 살수 있다 말이요 진리와 영감 그 소원대로 살수가 있어 그러기에 우리가 요 양심을 만나지 안하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것이 참 세례라 이것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이니라 그말이요 응 이러니까 착한 양심을 찾아야 되는 이것은 내가 처음에 자연게시에서 받은 이치 신구약 성경 말씀을 배워서 아는 이 진리 이 이치 참된 이치를 듣고 요 이치대로 내 마음이 살아 볼라고 애를 쓸때에 살아 볼라고 애를 쓸 때에 이것이 뭐이냐 착한 양심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살때에 착한 양심은 영접됐고 옛사람 저거는 물러 갔습니다. 이러니까 요 애쓰는 노력 요것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아 요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요 지식대로 살라고 하는 요것이 있는것이 양심을 영접하는 노력이요 영접할라 하는 노력이요 고럴 때에 옆에서 내 몸 밖에 이제까지 살아 나오면서 이제 까지 살아 나오면서 만들어 논 사건들이 마구 방해를 하니다. 왜 그놈은 마귀하고 합작되고 했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역사니까 몸 밖에 이놈들이 방해를 한다 말이요 방해하지 내 속에 내가 방해합니다. 내 속에 내 생각이 그라면 안 되는데 그라면 안되는데 내 생각 그기 뭐냐 하면 옛사람 고놈이라 그말이요.
이러니까 이제 이 두가지 싸움에서 두가지 싸움을 그기 한몫 다 나오는기 아니라 요 현실에서는 요 싸움이 나오고 저 현실에서는 요 싸움이 나오고 저 현실에서는 저 싸움이 나오는데 고 현실에선는 한 가지 싸움인데 고 현실에서 한 가지 싸움을 사워서 내가 질 여 성경 말씀대로 요대로 살고 싶은 마음대로 살게 될 때에 고때에 살면 양심은 이제 내기에 나타났고 내가 양심을 만났고 양심이 살아 났고 양심이 권세를 얻었고 저 예사람 저기 갖다가서 시들어져 가지고서 지금 힘을 못쓰고 있습니다. 힘을 못쓰고 있는 데 양심을 만나면 이제 양심은 내 마음을 도와 가지고 내 마음을 인도해서 옛사람 저것을 지금 대항하는 힘이 점점 강해집니다. 이래 가지고서 차차차차 한번 두번 이렇게 하면 착한 양심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찾아 가는데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하나님 만나기 전에 요리 되면은 진리와 의로 된 요 새사람 요 새사람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요 새사람 참 사람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잊어버렸던 자기를 찾게 됩니다. 이러면 이제 자기 마음과 자기 양심과 자기 영 요 영 요것이 갖다가서 참 자기인데 영 요러면 이제는 요 영이 진리를 만나게 합니다. 요 진리 고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영 그 영감 영감을 만나게 합니다. 요러면 다시 이제 단합이 되어지면 그가짓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 옛사람 그것은 문제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데서 지금 물고 있느냐 어떤 사라은 벌써 양심을 만나서 양심이 가르쳐 주는 것은 다 버리겠습니다. 양심이 하라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양심이여 나를 인도하옵소서. 이래도 야심 인도를 그걸 갖닥서 없어서 지금 양심 인도만 기다리고 있는 사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생된 영과 양심과 합작이 되어 가지고 이제는 어 그리스도의 영과 요 진리를 찾아 만날라고 애쓰는 요 단계에 있는 사람도 잇고 그러나 그 요것이 자라 갈 때에 요렇게 자라가지를 안하고 요렇게 자라가면 요 단계를 요것 보십시요 예를 들면 요 다섯이라 하면은 요렇게 자라가면 요 단계가 완성하고 요럴 긴데 그렇지 안하요 옆으로 자라가요 옆으로 이 옆으로 자라가기 때문에 요것이 조금 자라면 요것도 조금 자라고 요것도 조금 자라고 요것도 조금 자라고 요것도 자락고 이렇게 자라갑니다. 요 하나가 완성되고 고 다음에 하는기 아니라 요렇게 옆으로 자라가는 우리의 모든 면이 옆으로 자라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 자기 현실에서 조금 자라 가지고서 난중에 마지막에 완성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러기에 어던 사람은 어떤 면에 대해서는 완성이 된 기 아니라 고 면도 고면에 십분지 일 백분지 일 고면이 완성되고 고 다음에 또 다른 면도 그렇고 그래 가지고 자라가기 때문에 이것이 기형적으로 자라가지 않는다 그말이요 기형적으로 기형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귀만 갖다가서 커다라고 다리는 짧막하고 그러면 기형이라 그 병신이라 기형적으로 자라면 모든 것이 그 체계적으로 원만한 몸 모양으로 그 어린 아이는 귀는 귀만침 크고 또 갖다것 손은 손만침 크고 발은 발만침 크고 그 체격이 갖다가서 맞게 이렇게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자라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만 그 한면이 다른 사람과 차이 있다고 자기는 아주 없는기 아니라 중생된 사람이면 조금씩 조금씩이 갖다가서 참 돌 크듯이 부러 나간다 이기요 그런데 우리가 제일 애쓸 때는 어떤 때냐 우리가 이 착한 양심을 찾아서 착한 양심의 사람이 되어 지는 요것이 우리가 노력할 일 단계입니다. 그러면 그 노력이 뭐인가 자기가 아 성경 말씀에 진리를 깨닫고 또 이 만물을 보아서 이치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아무래도 주님이 나를 어 이 사죄와 칭의에 이 구속을 주시니라고 큰 힘드려서 이렇게 주셨으니 내가 아무래도 사죄 받은 자로 살아야 되고 칭의 받은 자로 살아야 되겠고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살아야 되겠다는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이고 걸 가르치고 있으니까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중심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주인 것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고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요대로 살아야 되겟다 예수님이 이렇게 구속했으니 내가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다시 갖다가서 그의를 버릴 수가 있으며 다시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겠느냐 요렇게 자기가 생각이 나가지고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는 요것만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갖다가 요것을 물리치고 이기면 고때에 이제는 내가 착한 양심을 만났습니다. 내 아주 좋은 지도자, 좋은 인도자 착한 양심을 만나서 착한 양심이 나를 아주 인도하시고 돕습니다. 이 양심이 오니까 나에게 모든 걸 환하게 밝히 봉 준다 그말이요 옛사람 저것도 보여지지 또 멸망할 것도 보여지지 바른 길도 보여지지 나에게 환하게 보여져 그래서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운것처럼 네게 있는 빛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 빛이라고 말한 요것은 양심을 가라쳐서 말씀한 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아무것도 못해 눈이 갖다가서 뜨였으니까 그 심청이가 눈뜨고 난 다음에 뭐 얼마나 그 좋았겠소 이것 모양으로 눈이 뜨이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요렇게 애를 쓰면은 양심을 만나게 됩니다. 착한 양심을 만나게 되니 양심을 만나면 모든 일에 대해서 눈뜬 거와 같애 환하게 보여지니까 보여지니까 이제 갖다가 내 마음이 그대로 살 용기를 가지고 원수를 물리칠 수 있다 그말이요. 요라면 착한 양심을 만나면 요 착한양심이 나를 인도해 가지고서 중생된 영 참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참 사람을 만나면 이 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서 양심이 들어오게 하면 들어 옵니다. 어 그러면 문을 두드리는데 문을 두드리노니 열어 달라 열어주면 내가 들어 가겠다 하는 그대에 누가 두드립니까 그때에 성령님 성령님이 두드리는데 성령님 혼자 두드립니까 아니요 중생된영이 같이 두드리고 있소 그러기 때무네 로마인서 8장에 보면은 그 중생된 영이 성령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살으라 하는 것을 증거해 준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성령님과 언제든지 동행합니다. 이러니까 이 영이 성령님의 앞잡이가 되 가지고서 우리 마음에 들어 올라고 할때에 그 양심 외에 딴 것은 어림없소 막 둘어오면 죽을 줄 알고 반대해 이런데 이 착한 양심이 들어 오도록 영접을 하면 착한 양심을 통해서 우리 마음 가운에 들어와 가지고 어 오도록 영접을 하면 착한 양심을 통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와 가지고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주장을 하면 우리 마음이 살아 납니다.
이제 착한 양심을 만나게 되면 이 착한 양시은 즉시 착한 양심이 이제 중생된 영이 우리 속에 영접될 때에 성령님은 같이 들어 옵니다. 그 뒤를 따라서 왜 우리가 이 보배 롭게 가치 있는 자로 기를라고 했기 때무네 유한한 자유지만은 자유 우리에게 줬어 이 자유 이걸 안 죽이고 살릴라고 합니다. 자유 죽이서 만들어 놓으면 짐승 한 가지고 기계한 가지지 아무 가치 없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이 하나님과의 이 유기적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유 의살를 가지고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으 섬기고 이기 가치 있지 안할래야 안 할수 없는 강제적으로 되어지는 이것이 갖다가서 가치가 없다 이기요. 그래서 우리가 아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죽일 자를 죽인는 것이요 살릴 자가 살아나는 것이라 이것은 어디서 되어지느냐 우리 마음이 받은 바의 요 지식을 가지고 지식대로 할라고 우리 마음이 애쓰면 요것이 제일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요 마음이 해를 슬때에 요 마음이 양심아니요. 애를 쓸 때에 고때에 양심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 보면 자기 마음에 환하게 열릴 때가 있어 그러면 자기 마음에 완하게 열려 열려서 환하게 열리니까 그때는 모던 것이 잘 보여요 이러기 때문에 양심을 만난 사람과 양심의 그 성장이 많이 장성해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양심이 어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 사람은 무엇을 깨닫되 어리게 깨닫고 아주 길게 깨닫고 깊이 깨닫고 영원히 개닫이 이 사람 일시만 보는데 아니다 이분은 지금 일시는 좋지만은 그 다음에 어찌 됐다 영원 무궁 가지를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 양심 생활을 성공하지 못하면 영 생활을 성공하지 못합니다. 새사람 생활을 성공하지 못하고 새사람 생활을 성공하지 못하면 진리 생활을 성공할 수 없고 진리 생활 성공하지 못하고 새사람 생활을 성공하지 못하면 진리 생활을 성공할 수 없고 진리 생활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 생활을 성공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이 살아난 것은 뭘로 살아 났읍니까 진리를 만나 살아났고 하나님을 만나 살아 났습니다.
하나님으로 살았고 진리로 살아 난 것이 우리 중생된 영입니다. 그러기에 영은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논리적 순서로서는 중생된 영이 내 마음이 제일 가깝고 고 다음에는 진리가 가깝고 고 다음에는 하나님이 가깝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이 노력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고 성경만 보는 사람은 헛일이요 성경 이건 특별게시인데 특별계시면 자연계시로서 특별계시를 깨닫게 되고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로 깨닫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과학지라도 과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과학이 그 과학을 갖다가 물질만 알지 그 과학을 어떻게 쓰야 되고 어떻게 쓰면 안 안된다는 그걸 모른다 이기야 갖다가서 이러기 때문에 내나 지체적인 지식은 가지지 못하고 거게 하나 소유격에 위치에 있는 지식만 알게 되기 때문에 그 특별계시를 모르면 자연계시에 대한 온전한 그 지식을 가질 수가 없고 자연게시가 없으면 특별게시만 가지고는 온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지식에서 우리가 살아나고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심이 무엇을 먹고 자란다 했지요 양심이 무엇을 먹고 잘요 지식 먹고 자랍니다. 양심이 지식을 먹고 자라요 또 자기 마음을 먹고 자랍니다. 양심이 마음에 오분지 일을 점령했으면 그만침 양심이 자랐소 그러면 오분지 일을 점령하는 그것이 지식을 그만침 갖다가서 양심이 먹었기 때문에 양심이 지식을 지식을 먹어서 자랐는데 자기의 마음을 먹는 것으로서 이제는 소화가 되서 영양이 되 버렸소 비유컨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애써야 될 단계가 어디냐 하면은 내가 두가지 지식을 발견어 하고 이 두가지 지식으로 인하여 나에게 구속으로 준 우리 진리는 예수님이시요 예수님의 구속인신데 예수님의 구속대로 내가 살고저 하는 요 마음이 강해야 되고 요 노력이 강해야 됩니다. 요것이 강해야 착한 양심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죄없는 자로 죄를 뭐 죽어도 죄를 짓지 않는다 너희들이 죄를 대적할 때에 피 흘리기가지 대적하리라 피흘렸다 말은 죽기까지라 그말입니다. 내가 죽어도 죄를 짓지 않겠다 이제는 내 목숨을 빼았겼으면 빼았겼지 내가 의는 빼앗기지 않겠다 이제는 내가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을 당해도 하나님고의 다시 연결된 연결을 내가 다시 배반치 않겠다 요것을 가르치는 것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요 신구약 성경을 알고 자연 만물을 보면은 전부이 자연 만물이 또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중보자요 그런고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말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요 노력이 있어야 되요 요 노력이 있을 때에 두가지 지식대로 내가 살라고 애를 쓸때에 방해하는 것이 몇이라고 했읍니까 방해하는 것이 몇이라고 했지요 응 응 방해하는 것이 셋 뭐 응 또 그리가 버리네 그것 말하는 기 상식적으로 믿으니까 안된다 이기요 오늘 아침에 가르친기 있는데 뭐 오늘 아침에 가르친 것 말하라고 요렇게 살라고 할 때에 방해를 누가 하지요 방해하는 기 몇이요 둘 하나는 어디 있읍니까 하나는 자기 안에 있어요 하나는 자기 안에 또 하나는 하나는 자기 밖에 그러면 그것들이 뭐이야 하면 이제 갖다가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것이지 옛사람이 뭐이냐 할 때에 그것이 나오는 것이라 그기요.
내가 요렇게 살라고 할때는 고 실지로 내가 살라고 할 때는 내 안에 방해하는 놈이 있어요 내 밖에 이제 갖다가 베풀어는 모든 사업 모든 관련 모든 이제까지 해논 사회 생활 이제까지 닦아는 기반 이제까지 만들어는 무대 이제까지 해논 사업 이제가지 해논 모든 출세 인명 모든 내가 말들어 논 내 세상 내 속에 나 아닌 나 요 들이 들어서 양심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그말이요 양심을 만나지 못하도록 양심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말이요 그럴 때에 그것을 물리쳐야 되 얼마나 물리쳐야 되느냐 모든 것을 어짜기 전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을 네 모든 것을 버리기 전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랬습니다.
응 그것이 버리는 것이 뭐이냐 그것을 포기해 버리라 그걸 포기해 버리라 뭐 그까짓거 다 절단나도 나는 이제는 진리와 영감에 이 갖다가 양심대로 살겠다 이 두가지 지식대로 지식과 맞춰서 살겠다 이리되면 그것 버리지 않으면 못 살아 두가지 길을 못가요 아 하나는 부산오고 하나는 서울가는 찬데 갖다가 둘 검어지고 제가 갖다가 다 랄라하면 몸이 짜게 지든지 뭐 수가 나지 되겠소 한 쪽으로 타야 되지 이것 한가지라 그 하나를 버리야 되지 안버리면 안되 그것을 어 버리지 않으면 나 따라오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모든 것을 네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는 말씀이요 응 자 이제 자기가 깨달은 진리 지식대로 살기 위해서 그것을 버리고 손해보면 성경에 뭐라고 말했읍니까 여러배 혹은 백배 안심하고 던져 버리라 그말이요 안심하고 던져 버려 던져 버리고 살아요 요대로 살아서 요 행위가 온전히 되어지면 그 다음은 영과 육이 다 성공입니다. 그기 십자가의 도요 그러니까 버리고 얻는것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꼭 예수를 못 믿습니다. 이치를 꼭 알고 믿지 이치를 알고 난 다음에 고대로 살라고 내가 애를 쓰는 노력이 있어야 또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