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6 11:06
제목: 나사로를 살리심
본문:요한복음 11장 25절-4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아래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니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그 소식을 듣고 주님이 가시지 아니하시고 지체하셨습니다. 그 뒤에 이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갔을 때에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벌써 장례를 지내고 난 뒤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시니까 마리아도 마르다도 그 동민들도 나사로 죽은 데 대해서 심히 슬퍼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마리아는 말하기를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우리의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인데 계시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 또 동민들은 말하기를 이분이 소경의 눈도 뜨게 하고 온갖 기적을 이적을 행했으니 그 나사로도 죽지 않게 하실 수가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말들 하면서 마르다와 마리아도 울고 모든 동민들도 슬퍼하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니까, 보라! 그가 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을 말을 하면서 그들이 웁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을 두 번이나 기록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눈물 흘리신 일이 없는데 여기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흘리시면서 예수님은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또 믿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보리라 내가 말하지 아니했느냐 하는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또 그 무리들 앞에서 기도할 때에 아버지께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제도 내 말을 들으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둘러선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내 말을 들으신다 하는 것을 저들에게 말을 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님이 나사로 죽음에 대해서 민망히 여기시고 또 통분히 여기시는 것은 어떤 면을 통분히 여기셨는가? 첫째아담의 에덴동산 일을 생각하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슬퍼하고, 이렇게 하는 이 싫어하는 죽음 이것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 먹은 값인데, 이렇게 선악과 먹음으로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이런 죽음을 당하게 된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 원인이 배암이 와 가지고 하와를 꾀우고 하와와 배암이 동행해 가지고 아담을 꾀울 때에 아담이 그 미혹을 받아 가지고 넘어짐으로 이 사망이 저들에게 들어온 것을 연상하시면서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배암이 유혹시켰고,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이렇게 저들이 제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이런 보응이 와서 참 사망하게 됐는데, 사망하게 된, 이 사망하게 된 자들도, 또 자기들을 죽인 것이 배암의 유혹이요, 배암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멸하게 하는 것이 뭐인고 하니 한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 않고 자기를 인정하고 주장하게 마귀가 말한 것, 자기를 인정하도록 말했고 자기를 주장하도록 말했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서 생각하도록 말하는, 믿음을 떠나게 하는 이 유혹을 받아서 멸방받은 이 사람들이 또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시는 이 말씀도 하시고 주님이 오셨지마는 그 모든 사람들은 전 안밖이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자기를 인정하느냐? 자기를 인정하는 모든 행동들이고, 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이 다 살고 있느냐 또 자기의 주장대로 살고 있느냐? 전부 자기의 주장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인정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뜻을 좇고 이러므로 그들이 참 슬퍼하며 울며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고통을 당하고 슬퍼하고 우는 그것도 또 뭐이냐? 그것도 역연 자기의 주관 때문에, 자기의 인정 때문에 그렇게 다 슬퍼하고 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했으니까 그만하면 죽음에서 살려낸다고 했으니까 기뻐 즐거워 못견딜 터인데 또 자기 주관으로 그렇게 고민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해도 또 믿지 않고, 자기 주관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분히 여기시고 슬퍼하심은, 분히 여기심은 인간을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주관으로 살도록, 자율로 살도록 이렇게 한, 첫째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미혹시켜 가지고 그렇게, 인간은 믿음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믿음으로 사는 거기서만 생명이 있고 또 모든 존영과 승리가 있는 것인데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한 이 배암의 역사 여기 대해서 주님은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또 민망히 여기시는 것은 이렇게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유혹을 받아서 이 사람들을 자기 주관으로 자율로 살게 한 것은 배암이나 인간이 멸망을 받고 지금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자기 주관 자기 자율 이것 때문에 고통당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인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도 자기 주관이 들어서 자기를 슬프게 만들었고, 또 자기의 주관이 들어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자기의 자율이 들어서 자기를 죽게 만들었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원수는 자기 주관과 자율이 이것이 원수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을,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인간을 믿음에서 돌이켜서 자율로 주관으로 살도록 획 틀어서 뒤바꿔 놓은 것, 방향을 전환시켜 놓은 것, 이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심히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 통분히 여기시는 것은 내가 아무래도, 인간이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주관으로 자율로 사는 이것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기어코라도 이것을 돌려서, 돌려서 주관과 자율로 사는 것을 이제 하나님의, 객관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이 믿음으로 살아, 이렇게 심히 슬피 우는 이것을 돌이켜서 영원히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도록 내가 돌이키겠다 하는 그 일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통분히 여겨서 내가 어떻게 하든지 이 사탄의 일을 다 멸하고 이것을 다 절단을 내고 박살을 내고 사탄의 일을 없애겠다.
또 민망히 여기시는 것은 이렇게 자율로 주관으로 유혹받은 자가 유혹받아 자율과 주관으로 생겨진 이 자율과 주관 이것이 들어서 자기를 죽였고 죽은 자를 또 슬퍼하고 심히 고통, 죽고 고통, 죽는 것도 이 자율과 주관이 죽는 일과 이 고통스러운 일을 이 주관과 자율이 만드는, 이 주관과 자율로 인해서 제가 저를 죽이는, 제가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보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신 것은 이것 때문에 민망히 여기셨고, 또 통분히 여기신 것은 사탄의 이 유혹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셨어.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을 제가 자기를, 자기가 자기를 죽이고 자기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면을 심히 민망히 여기셔서, 시체를 어디다가 두었느냐? 와 보시옵소서. 이 굴에다가 지금 장례를 지내놓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면 돌을 옮겨 놔라. 또 말합니다. 죽은 지가 벌써 나흘이 되어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그 뭐 돌 헐어 봤자 냄새나 나오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어야, 인정해야, 배암의 말은 당장에 유혹을 받고 그것은 놓지 않고 이래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으로 인해서 너는 심히 고통을 당하는 그 고통보다도 나를 믿으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으면 네가 그 죽음에서 돌아설 것이고, 유혹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그 고통보다, 그 고통은 그것은, 사망의 고통도 크지만 그 고통보다 그 고통을 이기고 영원히 살고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이 믿음을 바꾸어 가지지 못하느냐? 하시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돌이켜서 돌을 옮겨 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려고 달려들 때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기도했습니다. 내 말을 항상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내가 새로 재독해서 확인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둘러 있는 이 무리들이 배암이 와 가지고 첫째아담으로 멸망시킨 여기 대해서는 쉽게 받아 들이고 단단히 간직하고 있지마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 가지고 내가 믿음을 지금 주장해 가지고, 믿음을 주장해서 살게 하는 이 일은 저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또 저들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이 말을 다시 합니다.
하시고 또 이제 돌을 다 옮겨 놓고 나니까, 나사로야 나오라! 이렇게 큰소리로 부르시니까 동인 채로, 베로 동인 체로 그 송장이 벌떡 일어서서 일어섭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이걸 다 풀어라 풀어 놓으니까 풀어 놔서 걸어다니도록 풀어 놔라 풀어 놓으니까 걸어다녔습니다.
죽은 것이, 죽음에 대해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생명을, 죽음에 대해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는 이 바꿈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가 누구며, 또 죽음의 이 고통을 계속 당하게 하는 자가 누구냐? 그것을 인해서 심히 통분했습니다. 이렇게 유식인 자에 대해서 통분히 여겨서 통분히 여기신 것을 내가 이것을 어쩌든지 멸하겠다. 그러기에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민망히 여기시는 것은 제가 저를 자꾸 죽이는 자살하는 행위, 자기를 멸하는 행위,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행위에 대해서 주님이 민망스럽게 여겼습니다.
둘러선 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신다는 이 목적은 배암이 스스로 와 가지고 사람을 멸망시킨 그 멸망에서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셔 가지고 이렇게 믿음을 배반하고 자기 주관, 자율, 자기로 인해서 죽게 되고, 죽게 된다 말은 자꾸 죽어지게 됐다 그말이오.
죽게 되고 또 고통스럽게 됐고 또 고통을 하고 하는 이것이 전부 믿음의 원수인데, 믿음의 원수, 믿음의 원수, 믿음의 원수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이 사망하게 됐고, 사망의 고통을 계속해서 당하고 있는데 이것을 벗겨 주실려고 믿음의 주가 오셨다.
믿음의 주가 오셨으니 믿음의 주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믿음으로 영접하면 자기 주관으로 사망하게 된 그 사망을 깨트리고 사망에서 살아 나오게 되고, 또 사망에서 살아나온 자가, 주관으로 고통하고 주관으로 두려워하고, 주관으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고통하고 하는 이, 주관으로 살아서 죽은 자가 죽은 자의 그 결과인 사망의 고통을 당하는 자가 거기서 정반대로 믿음으로 돌아서면 그 모든 고통이 다 물러가고, 그 비겁과 공포도 물러가고, 모든 낙망도 물러가고 이러는 것인데,
이것을 뱀이 와서 주관으로 살게 하는 그 일에는 단번에 되었고 그 주관으로 살게 하는 그것은 신실히 놓지 아니하고 가지고, 주관, 마귀가 주관으로 살게 해서 주관으로 인해서 죽었고, 또 죽은 자가 주관으로 인해서 영원히 고통당하고, 또 죽은 자가 주관으로 인해서, 사는 생명길이 왔지마는 생명길을 맞이하지 못하게 하는 이 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이 주관을 멸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하게 한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저거 앞에서 내가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인 것을 내가 인정하도록 지금 기도했습니다.
또 이 사실은 나를 보내셔서 믿을 때에, 믿을 때에 마귀 역사는 깨지고, 믿을 때에 사망도 깨지고, 믿을 때에 고통도 다 깨진다. 왜? 이 사망과 고통이 무엇을 타고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자기 주관, 하나님을 의심하는, 의심하는 게 자기 주관인데, 의심, 자기 주관, 자기 자율 이놈이 들어서 사망케도 했고 고통케도 했고 생명이 왔지마는 맞이하지도 못하게도 했고 이렇게, 원수가 이것인데, 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서는 데에는 그 주관의 반대 객관, 또 자율의 반대 하나님의 뜻인 타율, 하나님을 의심하고 자기를 인정하는 반대로 자기를 의심해서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이거 외에 살리는 길이 없습니다.
이리 넘어갔으니까, 이렇게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래 넘어갔으니까 남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어서는 데에는, 남쪽으로 일어서는 것은 북쪽으로 돌이키지 않고는 이거 어떻게 일어설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미혹과 의심과 주관과 자율로 죽은 이것이 살아나는 것은 성령의 감화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법칙을 따르는 믿음 외에는 살아나는 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믿으면, 네가 이제는 네 주관으로 사는 것을 객관으로 살고, 네 자율로 사는 것을 하나님의 그 법칙으로 살고, 네가 너를 주장해서 네 생각 네 주장대로 하는, 네 생각이 찍해야 네 생각이 너 고통스럽게 한 것, 네 주장이 너 죽인 것, 네 생각, 네 주관, 네 주장, 네 뜻, 네 견해, 네 지식. 인간들아, 이것은 너희를 죽이게 한, 죽도록 했고, 너를 죽였고, 너희를 죽였고, 또 너희를 고통스럽게 하고, 또 너희에게 이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수 중에 원수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기서 돌아서지 못하니 심히,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망치는 것을 볼 때 민망스럽고, 또 이렇게 인간을 휘딱 뒤비트려서, 인생은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으로만 살게 했는데 배암이 와 가지고 빽 돌아서도록 해 놓은 이 일이 분하다 말이오. 통분히 여기시요.
눈물을 흘리신 것은 이 두 가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통분한 눈물, 또 민망스러운 눈물. 우리도 오늘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다 갖다 놨냐? 무덤에 갖다 묻었습니다. 인간 저희끼리, 저희 오빠를 암만 사랑해 봤자 찍해야 살려내기에 어렵도록, 살려내기에 어렵도록 무덤 속에 매장시킨 것이요, 또 살아났지마는 걸어다니지 못하도록 베로 동여, 똘똘 동여서 그저 죽는, 죽이는 역할,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 이것만 했지. 예수님이 살리러 오셨지마는 저들이 가진 것은 전부 생명을 반대하고 죽는 죽음의 역사만 일으키는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주님이 뭐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돌 그까짓 거 굴러 놓을 게 뭐 있습니까? 큰 도자나 포크레인이 왔는데 그저 뭐 한번 푹 뜨면 차로 거의 한 차씩 이래 떠 재끼는데 뭐할려고 삽으로 가지고 호미로 가지고 그럴 게 뭐 있습니까?
돌을 옮겨 놔라. 너희가 쌓았기 때문에 너희가 옮겨 놔라. 너희가 못하는 거 내가 이제 살려서 일어나게 했으니까, 또 너희가 동였으니까 너희가 풀어라. 풀어 놓으니까 걸어다녔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잘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해서, 그들이 처음에는 자기 주관으로 살았고, 자기 자율로 해석을 했고, 자기대로의, 자기대로의 것으로, 주님이 찾아오셨지마는 주님이 오신 것은 저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반갑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지마는 그 사건에 있어서 그 사건 해결이 되는 것은, 아이구 주님 오셨습니까? 뛰어나온 것도 소용없어. 뛰어나온 것도 소용없어. 반가워하는 것도 소용없어. 여기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 놔야만 일을 하지 돌이켜 놓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이 말씀을 했고 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을 해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관대로의 사람, 자율대로의 사람, 또 주관대로의, 자율대로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고통 이것을 믿음으로 바꿔 놓지 않으면 주님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니까 자기 자율대로 살던 자들이 네, 믿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 구주로 오신 분이심을 내가 인정합니다. 또 죽은 지가 나흘이 됐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돌을 옮겨 놔라. 죽은 지 나흘 됐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예 믿습니다. 돌을 옮겨라. 또 돌을 옮기고 난 다음에는 풀어라 푸니까 걸어다녔습니다.
주님은 기본구원은,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아무 주관이 없습니다. 영이 죽었지 또 육은 완전히 죽어서 그것의 것이 되어 있지 이러니까 주격인 영을 살리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그 주격을 통해서만 역사하지 주격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못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우리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이 구원 역사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중생됐다 그말이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일하지 못하시는 것은 어디 지금 대항을 받아 가지고 일하지 못하느냐? 못하는 것은 우리 주관, 주관 때문에 주님은 쫓겨납니다. 우리의 자율 때문에 쫓겨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구원 얻지 못하는 것, 능력을 받지 못하는 것, 평강을 얻지 못하는 것 이것이 순전히 자율과 주관 또 사욕 이 세 가지가 들어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주님도 이 일을 하실 때에 이것을 없애느라고 아주 많이 말씀하시고 이 일에 대해서 통분히 여겼어. 이렇게 한 이 사탄에게 대해서 통분히 여겨서 내가 이 사탄의 일을 기어코라도 박살을 내고야 말겠다. 하는 그것이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제가 거꾸로 돼 가지고 제가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을 심히 민망스럽게 여겨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우리도 내 주관과 자율, 내 사욕 이것이 나로 말마암아 생긴 게 아니라 배암 사탄으로 말미암아, 그때만 아니라 지금도 사탄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이것이 생겨진 이것을 우리가 알고 여기 대해서 통분히 여기는 이것이 있는 것만치 살아납니다. 내게 주관, 자율, 사욕 이놈이 내가 아니고 나 아닌 원수라.
사탄이 나에게 내 자율대로 나를 해석하도록 하고, 주관대로 나를 주장하도록 하고, 사욕대로 내 소원과 욕심을 가지도록 하는 이것이 순전히 뱀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 원죄로 인해서, 오늘도 사탄으로 인해서 나에게 이것이 오는 이것이 우리의 원수인, 주님이 통분히 여기신 그 통분! 우리가 이것에 대한 통분히 여김을 가져야 되고, 주님이 스스로 제가 저를 망치고 제가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일에 대해서 참 민망스러워 견디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신 거와 같이 자기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자기 속에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자기가 아닌 자기 이것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데 대해서 우리는 민망스레 여기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 형식 계시에서는 순전히 자기의 주관, 자율, 사욕 그것이 망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없고, 또 살리시는 이런 데는 살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 외에는 다른 게 없다 그거요. 또 주님이, 이렇게 튼튼히 만들어 놓은 것은 죽게 만들었고 살아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이들인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살리려고 하시니까 또 주님이 살리는 역사에게 전적 반대하는 것뿐입니다. 아주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식 듣고는 화다닥 일어나서 갔지마는 실은 주님에게 반대하고 있다 말이오. 껍데기는 환영하지마는 반대하고 있어. 오늘 우리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나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모든 사망을 멸하고, 근심, 걱정, 고통, 번민, 이 모든 사망으로 말미암은, 사망에서 돋아 나온 이 사망의 열매, 사망의 역사 이것을 완전히 벗겨서 우리를 죽은 요소를 다 살리고, 죽은 요소를 살리고 또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담대하게 만들고 평안하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고, 이 사망의 역사를 유유하게 기쁘고 즐거움으로, 웃음으로 그런 것 다 이길 수 있도록 이렇게 하실려고 주님이 오셨는데, 이 모든 은혜 역사에 방해자가 누구냐? 자율이요 주관이요 사욕입니다.
다니엘을 사자구덩이에 넣는다는 그런 어려운 문제가 전국적으로 나돈 것이 그것이 믿음있는 다니엘을 위해서 그 일이 생겨졌고, 또 다니엘의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므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큰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다니엘은 하나님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했고, 자율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 법칙을 따르고, 자기의 인간 욕심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성령의 소욕을 가지니까 다니엘은 그때에 기쁘고 즐겁고, 사람 보기에는 담대한 사람으로 보여졌지마는 담대한 게 아니라 사실이라 그말이오. 담대한 게 아니고 그게 정상입니다. 그게 정상이오. 그게 필연성입니다. 다니엘은 위험 천만한 사람으로 보였지마는 그게 튼튼한 일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그 결과로 좋은 결과가 나타났지 나쁜 결과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찾아오셨는데 살리려고 찾아오시는 이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누구며, 방해하는 것이 누구며, 자기를 계속 고통스럽게 하고 기쁨으로 행복으로 평강으로 온유로 바꾸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누구냐? 이것을 여기서 보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인정함으로, 인정함으로 행동이 생겨졌습니다. 인정함으로 행동이 생겨졌어. 인정을 함으로 행동이 생겨졌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이거는 벌써 형체가 없는, 형체가 없는 무형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형체가 없는 무형 세계의 신령면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건 껍데기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이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형체를 가지고 있지마는 인정이라 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인정이 행함과 함께 일하지 인정이 없으면 행함이 일을 못 합니다. 인정으로 말미암아 행함이 일을 한다 그거요. 믿음으로, 믿음이 행함과, 인정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으로 말마암아 믿음이 온전하게 되어진다. 온전한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일하시는 이 무형의 신령한 역사가 처음이요, 혈육의 역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역사는 그다음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는 역사는 처음이요 먼저요 위에 있고 주격이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역사는 그다음에 소유격이요 그다음에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행함도 중요하지마는 먼저 인정하는 이것이 중요하다 그말이오. 인정 안 했으면 그들이 돌을 옮겨놓지 않았을 거라 말이오. 인정했기 때문에 돌을 옮겨놨어. 또 풀어 놓아서 다니도록 하라.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풀어 놓는 일을 했습니다. 인정 그게 뭐이냐? 믿음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했다. 인정함으로 그들이 행동하게 됐다. 인정함으로 행동할 때에 하나님께서 따라했습니다. 인정함으로 돌을 굴려 놓는 행동을 했을 때에 주님은 나사로야 나오라. 당신이 또 일했습니다.
일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주님이 일했으면 다 하지 뭐할려고 그래? 또 저희들이 해 놓은 거는 저희들이 저질러 놓은 것은 저희들이 해결해야 된다 말이오. 풀어 놔라. 풀어 놨을 때에 나사로는 걸어다니게, 걸어다니도록 풀어 놔라 할 때에, 풀어 놔라 할 때에 풀어 놓으니까, 걸어다니도록 풀어 놓아라 했는데 풀어 놓으니까 걸어다녔다 말이오. 걸어다니는 이거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
그런고로 지난밤에 사데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받았는지 네가 생각하고 지켜 행하여 회개하라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 말씀인데 그 위에 초두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데교회에는 어떤 주님으로 나타나 나타나셨느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이러니까 이분이 지금 말씀하는 것은 이분이 일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다음에, 그 사데교회에 접선된 것은 사람이요 접선된 것은 성령님이지마는 그 성령님과 사람을 거머쥐고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들은 것, 또 자기가 받은 깨달음, 또 받은 결심, 그러면 아무 현실이 없는데 지금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도 또 이 자리에서 깨달아지는 것도, 또 결심하는 것도 주님이 하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는 성령을 통해서 주셨지마는 주신 분은 주님이시라. 그러면 지금 받았습니다.
이것이 자본이 돼 가지고, 이것이 자본이 돼 가지고 이다음에 그 현실을 만날 때에 그때에 다시, 내가 먼저 들은 것이 깨달은 것도 있고 결심한 것도 있었지마는 결심한 대로 행해집니까? 결심한 대로 할 수 있습니까? 현실을 닥치지 않았는데 뭘 행할 수가 있습니까? 네가 나를 부인하지 말아라 하는 이 말씀을 들었고 깨닫고 자기가 이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 했지마는 자기 혼자 앉아서 주님을 내가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부인하면 내가 널 부인한다. 인정하면 내가 널 인정한다. 이랬으니까 사람 앞에 가서 부인하게 할 때에 그때라야 그 결심도 깨달음도 작정도 쓰여지는 것이지 저 혼자 굴에 앉아서 방안에 앉아서 주님을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난 부인하지 않는다. 하는 그 말은 소용이 없는 말이라 그말이오.
네가 예수믿으면 죽인다든지 그리 안하면 예수믿으면 손해본다든지 이렇게 무슨 그런 현실을 만났어야 그때 자기가 들은 거 깨달은 거 또 작정한 거 그것이 필요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걸 잘 단단히 들으십시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아, 그 사람 설교 잘한다. 대구집회 때 가서 말하니까 어떤 사람 나가면서 나는 말 못하는, 떠듬거리고 말 못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말 잘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말 잘한다. 그 사람의 말로 그렇게 듣는 것처럼, 사람의 말로 듣는 것, 깨달음과 결심은 자기 것으로 듣는 것, 이것이 제일 자기 믿음 하나도 섞이지 않고, 믿음 하나도 섞이지 아니하고 전부 자기 주관, 자기 자율, 자기 사욕대로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믿음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살 희망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아. 생명 역사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아.
이것보다 나은 것은 자기 현실을 만났는데 보자. 이 현실에 이럴 때에는, 이럴 때에는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를 하시더라. 이럴 때에는 성경이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더라. 이것도 순전히 사망만은 아니고 이게 믿음이 조금 섞여 있어서 생명의 기운이 조그매 비추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나은 것은 아, 이렇게 하신, 그때 내가 아무 강단에서 아무 집회때에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것을 막바로 이것이 주님이 그 사자들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해 주신 말씀이다. 또 성경에 기록된 것은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인정하는 데에는 제법 생명 역사가 지금 접선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 가지고는 안된다 그거요. 그거 가지고는 안돼.
주께서 내곁에 서셔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이 시간, 이 시간 나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는 이것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자가 나에게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옛날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는 게 아니고 직접 이 시간에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 이 말씀을 나에게 해 주시는 분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면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이 현실을 만들어 주신 분이 이분이 만들었다.
이분이 현실을 만드시고 이 시간 나에게 지금 타일러서,-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자기 주관대로 나가기 때문에 그렇지 신비가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비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니라. 이거 마귀라는 놈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이걸 배격하는 이 깨달음에, 정통 학자들의 깨달음을 이걸, 보배인데 이걸 없애기 위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반대하다가 지나쳐 넘어가지고 참된 신비주의까지 부인하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아, 성경에 기록했으니 네가 성경대로 지켜야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 말했기 때문에 네가 지켜야지. 이것이 건전하고, 이것이 아주 신사적인 신앙이고, 이것이 참 튼튼한 신앙이지. 아, 이 시간 주님이 오셔 가지고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내 이 생각을 주장하셔 가지고,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지금 내 주관을 통해 가지고 나에게 지금 알려주고 있다. 성령님이 내 중생된 영과 또 내 육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이것을 들려주고 있다. 생각하게 할 때에, 생각은 영만이 못합니다. 생각은 영만이 못하고 이거 육이라는 것이 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중생된 영과 내 심신으로 된 육을 통해 가지고 나에게 말한 것이니 이 말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현실을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 공사를 하실려고 주님이 오셨다.
이러니까, 내나 사람을 통해서 말했고 성령을 통해서 말한 것이니, 주님이 지금 이 시간 자기 안에 계시면서, 자기 안에 계시면서 말씀하기 때문에 중생된 영이 거기 피동됐고, 중생된 영이 피동됐기 때문에 이제 그 육체가 거기 피동돼 가지고 자기가 감각하게 됐고, 자기가 감각하게 됐고 깨닫게 되니 감각이, 감각하게 됐고, 또 자기의 감각으로 결심하게 됐고, 자기의 감각으로 들었고 자기의 감각으로 깨달았고 자기 감각으로 결심하게 됐고, 이러니까 주님이 오셔 가지고 자기가 이 사실을, 성경에 언제 들은 것 그런 게 아니라 이 시간 그것이,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들은 것이 생각나면 생각나는 이거는 순전히, 생각나는 것은 하나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의 뜻 그것이 생각날 때에는 그 생각이 무엇과 무엇의 합작의 열매입니까? 그 생각이 무엇 무엇이 합작해 가지고 그 생각이라 하는 것을 만들어 놨습니까? 그 생각을, 생각을 건설한, 그 생각을 건설한 그 건설자가 누구입니까? 대답해. 생각을 건설한 그 건설자가 누구입니까? 첫째, 첫째? 사데교회를 지금 공부하고 있지 않소, 사데교회를? 누가 일곱 영을 가졌습니까? 주님이 일곱 영을 가지지 않았소? 첫째 이 공사를, 누가 공사의 주인입니까? 주님. 그다음에 이제 청구한 이가 누구입니까? 성령님. 그다음에 이 일을 맡은 자가 누구입니까? 중생된 영. 이러니까 제 일이지. 그다음에는 이 일을 맡은 자가 누구입니까? 마음. 그다음에는 이 일을 맡는 자가 누구요? 육체의 신경. 이 육체라 말이오. 이래 가지고 자기가 말씀이 이 시간에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깨달아지는 깨달음을 조성한 자가 누구입니까? 깨달음을 조성한 자는 누구요? 누구? 큰 소리로 해 봐요. 이 깨달음을 조성한 자, 내게 깨달음이 왔는데, 깨달음이 왔는데 깨달음이 내게 오기까지 이 깨달음을 지금 만든 자가 누구냐 말이오. 깨달음을 만든 자. 주님, 또 성령님, 또 영, 또 마음, 또 자기 육체, 몸. 이래 가지고 조성된 이것을 믿을 때에, 인정할 때에, 인정할 때에 그분은 역사할 수가 있고 내가 인정하지 아니할 때에 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인정 이게 믿는 것인데, 인정 이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인데, 마음의 순종인데,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 몸으로 믿는 것 둘인데 이 인정이 없으면 일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하지 못하고 쫓겨나가는 것은 어떤 것이 쫓겨나갑니까? 무엇에게 쫓겨나갑니까? 부인하는 데에 쫓겨나갑니다. 의심할 때 쫓겨나갑니다. 부인할 때는 쫓겨나가야 돼. 의심할 때는 쫓겨나가야 돼. 그분을 와서 일할 수 있도록, 일할 수 있도록 영접하는 거는 뭐입니까? 인정, 인정. 인정할 때에 그분은 일하러 들어오십니다. 일을 착수를 하십니다.
착수하는데 그분이 친히 오셔 가지고 일을 이제 시작해서 일을 하는 그 움직임의 실상으로 일하는, 일하는 그것은 어떻게 일합니까? 어떻게 일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행할 때에 일할 수 있소. 우리가 행할 때에, 우리가 소원할 때에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할 때 일할 수 있소.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당신이 행동하실 수가 있고, 우리의 인정을 통해서 당신은 계획과 모든 영적 역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데교회가 들은 것을 생각하고 받은 것을 지켜 행하는 이 일을 하면 그 일이 어느 정도까지에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까? 저 거제도 가서 일하고 있는 조사님, 어느 정도?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고 지켜 행하라 그렇게 하면, 자기가 생각하고 지켜 행하면 어느 정도의 일이 된다고 말했습니까? 뭐라 하노? 대답에 보니까 틀린 것 같다. 000조사님, 000조사님 알겠지? 초자연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지. 또 0선생 0선생, 온전한 행위! 온전한 행위! 이렇게 들어야 돼! 이렇게 안 들으면 헛일이라! 마귀라는 놈이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마구 구멍이 꽉 차 가지고 이 구멍 내놓으면 이 구멍으로 끌어 냅니다.
이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길러 볼려고 하면 마귀 역사를 알 수가 있어. 이것을 이리 못 가게 이 구멍을 영 힘들여서 막아 놓습니다. 막아 놓으면 이리 팍 불거트려. 여기 막아 놓으면 저리 불거지고.
주님이 지금 통분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시는 것이 이걸 통분히 여기십니다, 이걸 통분히 여겨서. 민망히 여기는 것은 제가 저를 멸망케 하는 이걸 볼 때에 참 답답하고 견디지 못해 애터진다 그거요. 제가 저를 고통스럽게, 제가 저를 망치게 하는 것을 볼 때에 기가 찬다 그거요.
우리의 행위구원이라는 것은 온전한 행위가 되어야 그 행위를 영생 결정이 되는 것이지 온전치 못한 행위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결정을 지울 수가 있소? 온전치 못한 행위를 영생으로 결정지우면 하늘나라에 온전치 못한 것만 가 있으니까 언젠가인가 그것이 자라면 멸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우리의 행위구원은 온전한 행위 그것만이 이제 영생을 가진다는 이것을 어제 밤에도 암만 말해야 그것이 들려지지를 않는 것 같다 말이오. 이러니까 만날 하는 말 자꾸 그렇게 들려지고 이러니까 이 말씀을 대구에서도 얼마든지 말했고 여기서도 얼마든지 말했지마는 도무지 이게 벗겨지지 않아.
행위구원은 온전한 행위여야 하는데 온전한 행위가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느냐?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인간 단독이는 절대 못 한다. 못하는데 이 일을 하기가 쉽다. 뭐이냐? 들은 것과 받은 것을 생각하고 지켜 행하면 된다. 그러면 뭐이 되느냐? 온전한 행위가 된다. 온전한 행위가 된다. 온전한 행위가 되다니?
들은 것 생각하고 깨달은 것 결심한 것 지켜 행한다고 어떻게 그게 온전이 될 수 있느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사데교회 말하지 않았느냐? 주님이, 네 앞에서 인간을 통해 왔든지, 네 육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네게도 오지마는 네 생각이 자기 육체를 통해서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천상 자기 주관같이 하지마는 네 주관에 그런 게 있나? 네 주관에 그런 산 게 있나? 그런 게 있나? 옮은 게 있나? 네 주관이 아니고, 내가 네 주관을 사용해 가지고, 이 마이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내가 말한 것이다. 이걸 믿어야 된다 그말이오. 이럴 때에 주님은 능력이 옵니다, 인정할 때에.
이러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며칠 전에 이것을 또 말씀했다 말이오. 믿음의 주라니?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이것을 찾아 가지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함으로 온전한 행위가 이루어져 가지고 승리를 하신 것이 주님이시라. 우리도 그와 같소.
이러니까 이 사망은 믿음을, 믿음을 없애는 데에서 인류에게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믿음으로 살았소. 그가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 믿음으로 지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는데 배암이 와 가지고 믿음을 돌이켜서 믿음의 정반대인 자율, 주관, 사욕, 이율로 살도록 한 것이 인간을 죽인 것이라.
첫째아담을 뱀이 와 가지고 믿음을 떠나서 자기로 살도록 해 가지고 멸망을 받은 이것을, 이제는 자기로 삶으로 멸망받아. 인간이 자기 주관으로 멸망받고, 자율로 멸망받고, 사욕으로 멸망받고, 이거는 순전히 자기를 죽이는 망치는 것뿐인데 이놈을 가지고 장성해, 이러니까 주님이 오신 것은 이것을 돌이켜서, 돌이킨 것은 뭐이냐? 믿음이라 말이오. 믿음은 뭐이냐? 하나님 인정, 인정한 그대로 자기가 행동 이것이면 됩니다.
이러니까 사데교회의 들은 것 받은 것 이것을 생각하고 지켜 행하는 이까짓 게 큰 것이 아니지마는, 큰 것이 아니지마는 네가 그와같이 듣고 그와같이 하는 그것은 큰 일이 아니라. 그것은 그와같이 한다 할지라도 네가 인간만치밖에는 못하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해야 온전을 이룰 수 있는데 하나님이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와서 일할 수 있도록 인정해 줘야 된다. 환영해야 된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자기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옳은 말씀이 들립니다. 내게 옳은 말씀이 들려. 들릴 때에는 내게 들려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저 어떤 목사가 나에게 설교해서 들려 줍니다. 들려 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통해 들려 줍니까? 여러분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의 영육 이것을 써 가지고, 또 나에게 중생된 영, 또 내 이 마음을 감동해서 마음을 작용 운동시키고 내 몸을 운동시킬 때에 비로소 내 감각에 들려지는 것이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순전히 우리에게 생명 역사는 주님이 이 진리를 가지고 진리하고 성령하고 중생된 영하고 또 사람의 육하고, 그러면 저 목사님이 나에게 일러 들려 줄 때에 목사님의 그 심신의 육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암만 그 심신의 육이 작용해도 내게 있는 심신의 육이 작용 안 하면 소용없다 말이오. 내게는 들리지 않아. 감각되지를 않아. 다른 사람의 육을 활용하는 동시에 내 육을 주님이 활용하셔 가지고 들려 주기 때문에, 내 귀에 지금 진리의 말씀이 들립니다. 뭐이 깨달아집니다. 결심이 되어집니다. 되어질 때에 어떤 어떤 작용이 되어 가지고 되느냐? 주님이 만물을 다 움직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뭇 영들도 움직이고 그 육들도 움직이고 그 몸들도 움직여 말도 하게 하고 이렇게 하시는 그 성령님이 내 안에 있는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같이 움직여 가지고 내 마음도 움직이고 내 몸도 움직여서 비로소, 내 밖에 있는 모든 역사가 이루어 가지고 내게 마지막으로 내 몸을 움직일 때에 내 몸이 그와같이 행동하는 것이오. 내 마음을 움직일 때에 나에게 인정이라 하는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마귀라는 놈은 자꾸 껍데기만 가지고 자꾸 이래 가지고 생각하도록 이렇게 만듭니다. 껍데기만이 아니라 그 알맹이 속에 수없는 작용이 역사해 가지고 이것이 최종으로 나에게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될 때에는, 내가 깨닫게 될 때에 마지막으로 나에게 깨닫도록 작용한 그 공사자, 나에게 깨닫도록 한, 깨달음의 시공을 한, 깨달음의 공사로서 깨닫도록 하는 그 시공자, 시공자의 제일 말단 시공자는 누구입니까? 말단 시공자는 누구요? 000, 말단 시공자는 누구요? 깨닫게 한 말단 시공자는 누구라? 그거는 그런 건데 말단 시공자는 자기의 마음입니다. 말단 시공자는 자기 마음. 깨닫게 하고 결심하게 하고 하는 것은 그 시공자 중에 제일 말단 시공자가 마음.
자기가 이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목사님이 하든지 어떤 사람이 하든지 해 가지고 성경을 봄으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들었습니다. 들었을 때에는 말단 시공자가 누구입니까? 저 000조사님, 말단 시공자가 누구지요? 000조사님, 저 엉뚱이같이 자꾸, 여기는 말단 시공자가 누구요? 몸! 거기는 말단 시공자가 몸입니다.
나에게, 하나님 말씀을 내가 읽어서, 읽어서 성경 말씀에서 자기가 깨닫고 듣고 다른 사람이 말해서 듣습니다. 자기가 성경 말씀을 읽으므로서 깨닫게 될 때에는 자기 말단 시공자가 누구냐? 자기 눈이라 그말이오. 자기 눈. 또 다른 사람이 말할 때에 듣는 것은 자기 귀, 육이라 말이오. 왜 이렇게 자꾸 말하느냐? 자기가 느꼈습니다. 자기가, 자기가 가만히 명상을 할 때에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느껴졌소. 느껴진 그것은 자기의 이 마음이 작용을 해서, 마음이 작용을 해서, 귀로 들을 때에는 이거 말단 시공자가 육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게 지금 들려지는 것도 이것도 그저 자꾸, 들려지는 것이나 느껴지는 것이나 또 깨달아지는 것이나 결심되는 것이나 이런 것을 위에 그 연결줄을 끊을려고 자꾸 마귀는 역사합니다. 또 이것을 일반화시킬려고 역사합니다. 자꾸 현재에, 지금 현재, 현재 역사하고 있는 이 현재 역사하는 것을 자꾸 이것을 과거로 돌릴려고 생각하고, 현재 역사를 미래로 돌려 가지고 자꾸 마귀는 현재를 도적해 가지고 현재를 우리 것이 되지 못하도록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마귀의 작용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만하면 다 깨달을 수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도 깨달아지는데, 먼데 사는 비쳐만 가도 깨달아지는데, 샛별이 떠 오르기까지 사모하는 것이 가하다 하는 그런 것도 다 이 작용의 역사가 있는데 네가 이 작용의 역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그말이오.
설교: 백영희 목사(1882. 5. 15. 토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