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6 11:01
제목: 혈루증병
본문:마가복음 5장 25절-34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언제나 말씀한 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나 또 기록된 사건이나 이런 것은 다 우리에게 구원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계시입니다. 여게 혈루증 앓는 이 환자가 나은 이것도 우리가 잘못하면 ‘예수님에게 나와서 병 나았다 예수님의 능력은 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예수 믿어 병낫자.’ 이런 데서만 머물기 쉽습니다.
이 병낫는 이 사실이 있는 것은 병낫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에게 구원 얻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5장 25절로 34절까지에 있는 이 혈루증 병이 나은 이 여인의 기록에서 어떻게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치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서 예수 믿는 이치를 자기가 깨닫고 이 이치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참 이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복음이 되는 것이지 껍데기로 ‘이 병나으니까 나도 병낫자’ 이런 거나 생각하고 하면 이는 껍데기 신자입니다. 껍데기 신자는 알맹이 신자를 마지막에 죽이는 데에 세상 이용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게서 구원 얻는 이치를 가르친 이것을 우리가 여기서 잘 깨달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 이치를 깨달을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뭐 사람이 많이 갔다 많이 오고 떠들고 또 흥분을 일으키고 이러면 그 흥분되는 그것이 은혜인 줄로 알지마는 그것이 은혜일 수도 약간 있지마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흥분을 일으키면 믿음이 있는 것 같고 흥분이 가라앉으면 믿음이 없고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 구원을 다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 구원은 대개가 밤중에 이루어집니다. 어려운 역경을 통해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어려운 역경을 만날 때는 그렇게 흥분시켜 주는 것들이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안 된다는 이 면에 흥분을 일으켜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흥분이 일어나면 이 흥분에 충격돼 가지고 이 흥분자 되고 저런 흥분이 일어나면 저 흥분에 충격되고 저런 흥분자 된다면 그 사람이 뭐하겠읍니까?m춤추는 데 가니까 춤추는 그 흥분에 충격돼서 춤추는 자 되어지고, 또 씨름 하는 데 가니까 씨름 하는 거기에 그 흥분에 충격돼 가지고 씨름 하고 싶은 자 되어지고, 노름 하는 데 가면 그자 되어지고, 또 저 무슨 구경하러 갔던 얘기가 집집이 나니까 거게 그 흥분에 충격돼 가지고 자기도 한번 관광 가야 되겠다, 관광 가기 위해서 ‘관광 그 계에 나도 들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흥분은 인적 요소지마는 매우 삼가야 할 그런 요소입니다. 좋은 점도 있지마는 좋은 점보다 큰 폐단을 일으키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손뼉이나 치고 고함이나 지르고 훌훌 성령 성령 지시 지시 또 방언이라고 데데데데? 이라면 거게 흥분돼 가지고 고함이나 지르고 북이나 치고 떠들고 이라면 그 흥분되면 그게 은혜인 줄 알고 항상 그런 흥분의 분위기만 찾습니다.
그런 흥분의 분위기가 공산주의자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 예수님을 내놓느냐 믿느냐 하는 그럴 때에 그 무슨 흥분이 따라갑니까? 그런 흥분 거기 하나도 없읍니다. 다른 일들만강하게 자기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이 은혜받는 것은 예수 믿는 이치를 자기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배우는 데 그 이치를 배운 그 이치가 논리적으로 이렇게 논리를 하고 비판을 하고 평가해서 그것이 가는 데까지 가고 그 이상은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논리가 세상을 이길 논리가 돼야 됩니다. 비판이 세상을 이길 비판이 돼야 됩니다. 세상이 마귀가 와 가지고서 ‘이렇고 이러니까 믿으면 안 된다’ 이럴 때 그 이상 ‘그런데 그 위가 있다. 그 다음이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 외에 이런 이런 순서가 있다.’ 할 때 마귀는 꺼꾸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은 이런 이치인 줄만 알았는데 그 위에 마귀란 놈이 안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또 외식 신자들을 통해서 이런 이치를 말할 때에 ‘아이쿠 나는 그 이치 몰랐다. 그 이치를 보니까 내가 이제까지 예수 믿던 이치는 아주 유치했구나.’ 자기 이상의 이치가 올 때에는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믿는 이치를 똑똑히 배워 가지고 이 믿는 이치를 아무것에게도 지지 않을 수 있는 꺼꾸러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깊고 높고 영원한 요 이치를 배워서 세상 어떤 이종교가 말해도 그 이치를 발 아래 밟고 그 이치가 모르는 그 이치 위에 영원한 참된 이치가 있음을 자기가 알고 요 이치에서 입각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미혹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을 길러보면 그 사람이 성경을 보고 설교 말씀을 듣고 그 이치를 깨달을라고 애를 써서 거게다 눈을 뜨고 ‘예수 믿는 이치가 어떠한고 보자’ 요렇게 관심을 가지고 따지는 사람은 ‘여게서 가르치는 이치는 실지로 살라고 하니까 안 맞는다. 저게서 가르치는 이치는 예수 믿는 생활을 실지로 할라고 보니까 딱딱 들어맞는다. 내가 볼 때에는 그 이치를 이해 못 한 것도 내가 실천을 하니까 들어맞는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평생 처음 만난 일을 착착 만나니까 이제까지 배운 예수 믿는 이치가 딱딱 들어맞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을 이기고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성경을 보고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면 성경 해석도 ‘이 해석이 맞나 안 맞나? 이 해석이 어리나 장성하나? 어느 해석이 어느 설교가 더 장성하며 어느 설교가 유치하냐? 어느 설교가 편벽되게 일방적이고 어느 설교가 모
든 면을 원만하게 구비했노?’ 요렇게 성도라는 것은 놓고 따지는 구별하는 무리라 그말입니다.
이래 구별해야 될 터인데 이거는 불교서 불경을 말하는 것이나 이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나 저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나 다 같다 하는 그자는 구별성이 없기 때문에 성도의 위치를 가지지 못하는 자요 이런 자는 시대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이치를 배워야 하요. 이치를 아는 그것이 은혜받은 것입니다. 이치를 알 때 그때에 무한하신 권능이 합께 합니다. 그 이치 그것이 전지의 지혜입니다. 요 이치를 배워 가지고 무슨 일이 닥치면 ‘어데 떠드는 게 없나? 나에게 좀 흥분시켜 주는 것이 없나? 나에게 기분을 일으켜 주는 게 없나? 뭐 충격 주는 게 없나?’ 그걸 찾아다닐라 하면은 환난이 있을 때는 어디로 찾아가겠읍니까? 그때는 뭐 흥분을 일으키고 떠들고 하는 그런 자들은 다 벌써 원수에게 굴복 다 하고 하나도 없읍니다. 찾아다녀야 헛일이오.
그러면 그럴 때에 자기가 평소에 예수 믿는 이치를 배운 요 이치를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원수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매를 맞으면서 요 말씀을 생각합니다. ‘주여, 성경에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생각할 때에 `주여! 믿습니다! 이게 주님의 선물인 것을 내가 알았읍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나고 힘이 일어나 가지고서 이기는 것이지 그거 없이 무슨 피상적으로 껍데기에서 움직인 거게 피동되는 그런 거 가지고는 다 예수 팔고 맙니다. 다 쭉덩이 되고 마요.
우리가 기본구원은 택한 자면 다 기본구원은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몸이 성화된 이 성화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택함에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그만 배어 가지고 그것이 꾸물거리다 낙태해 죽었을지라도 택한 자면 기본구원은 얻습니다. 그러니까 여게서도 예수 믿는 이치를 자기가 배워 가지고 요 이치를 써먹어야 돼요. 요 이치를 쓰면 자기에게 영생이 됩니다.
요 간단한, 혈루증 앓는 여인인데, 요 혈루증 않는 병이라 하는 것은 여인들에게 생기는 병인데 요 혈루증 앓는 여인이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을 했읍니다. 이러니까 그 병을 고쳐 볼라고 여러 의원들을 만나 가지고 이 병을 치료할라고 받을라고 애를 쓰니까 이 의사가 만나면 ‘이렇게 치료해야 된다’ 하고, 또 안 돼서 저 의사한테 가면 저 의사가 또 ‘이렇게 치료받아야 된다’ 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이랬어. 의사를 만나 봤자 고통만 당하고 애만 먹고 고생만 하고 또 있는 것을 다 허비했다 이랬읍니다. 있는 것 허비 다 돼 버렸어.
m자, 의원 만나야 고생만 했지, 있는 것 다 허비했지, 인제 남편에게는 버림당했지, 가정에서는 인제 한, 가정에 마목같이 돼 가지고 있지 이랬는데 이 여자가 이렇게 고생하는 그때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모든 병든 자를 고쳐 주신다 하는 이런 소문을 들었읍니다. 소문을 듣고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이렇게 옹호해서 둘러싸 가지고, 꽉 둘러싸 가지고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혈루증 앓는 이 여인이 앞으로 가지는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알기 때문에. 자기는 추접하고 더러운 병을 가진 자지, 가정에서도 다 버림을 당했지, 모든 것 다 절단날 대로 다 났지, 인간 중에 자기는 참 무슨 죄가 있는지 비참하고 가련한 인간이요 또 자기는 저주받은 죄인이요 이러니까 앞으로 가지를 못하고, 여기 조는 사람, 여기도 졸고, 0집사도 조네. 그 속에 병이 들었으면 졸아. 딴거 생각하면. 여기서 뭐,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야 되지 은헤 안 받으면 다 죽어. 뭐 딸 치울 것 생각하는가? 그까짓 것 생각지 말아요, 다. 여게 앉아 가지고 마귀란 놈이 뭐 장가갈 것, 시집갈 것, 딸치울 것, 사위볼 것, 이 직장 무슨 사업 이런 것만 생각해 가지고서 뭐 됩니까, 되기를?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주시는 이 은혜를 받아서 자기가 성화가 돼야 될 터인데, 자기가 변화가 돼야 되겠고 자기가 또 축복을 받아야 될 터인데.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것도 벌써 죄 지었소. 그 사람 조는 것 때문에 이 시간 얼마나 갔읍니까? 그게 저주받는 거야. 앞으로 못 가고 뒤로 가 가지고 또 뻔뻔스럽게 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섞여서 그속에 섞여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아무래도 이분을 접해야 되겠는데 이분한테 만나 가지고 뭐 정적으로 뭐 안수받고 기도받고 이럴 만한 자격은 없고 ‘나같은 게 이 더러운 병을 가진 것이 그럴 수는 없고’ 이러니까 앞으로도 못 가겠고 예수님 뒤로 숨어서, 사람들 이 속으로 끼어서 예수님에게 가서 예수님의 옷이라도 한번 만지면 ‘이 천한 죄인이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어떻게 말씀을 듣고 뭐 기도받고 안수는 내비두고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내가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서 예수님 앞으로 가까이 갑니다.
이라니까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는데 이거 뭐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앓았으니까 옷이 깨끗하겠소 옆에 가면 냄새가 푹푹 나고 굉장할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어떤 여자가 자꾸 삐지고 들어가니까 어떤 여자가 이래 하는고? 밀어내기도 하고 별별 뭐 배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예, 잘못했읍니다.’ 자꾸 이래 사과하면서 뚫고 들어가 가지고 예수님 뒤에서 가까이 가 가지고서 겨우 자라니까 손을 대 가지고 예수님 옷을 만졌다 말이오.
옷을 떡 만지고 만지니까 자기에게 현저히 그만 자기 혈루증의 그 근원이 마르고 그 병이 나은 것이 자기 몸에 환하게 느껴진다 그말이오. 마음에 느껴져서 병이 나은 걸 자기가 깨달아졌읍니다. 이라자 예수님께서 고함을 지르면서 ‘누가 내 뒤에서 옷을 만졌느냐?’ 이래 큰 소리를 하시니까 제자들이 있다가 ‘선생님 이렇게 사람이 마구 밀고 댕기고 이래 가지고서 벅석인데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고 그런 말씀 합니까? 이 사람이 많은 사람이 이러니까 밀고 당기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랬다 말이오.
이라니까 예수님이 있다가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기 때문에 내가 한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기 때문에 내가 말한다. 이 병든 자를 치료하는 지극히 큰 능력이 내게서 나갔으니 어떤 병이라도 지금 치료했을 것이다. 그가 누군가 싶어서 찾는다.’ 하는 뜻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자꾸 찾는다 말이오. 이러니까 혈루증 앓는 여인이 병은 나았는데 예수님한테 말도 안하고 소문만 듣고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옷만 만져도 이렇게 병이 나을 줄 알고 뒤로 숨어 들어가 가지고 만져 가지고 병은 나았는데 예수님이 찾으니까 이제 죽을 죄를 지었다 싶어서 그래 앞에 나가 가지고 꿇어 엎드려서 살려 달라 하면서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자복을 하고 이라니까 예수님께서 그 딸을 그 앞에 세워 놓고 ‘딸아 네가 내 옷을 만질 때에 내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내가 알고 능력 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너를 찾았다. 능력이 나가서 네 병이 벌써 완전히 나았으리라. 이제는 안심하고 네가 돌아가서 건강하게 지내라.’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여인이 그만 그 많은 사람에게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이라’ 소문도 확 퍼졌고 `예수님의 권능으로 옷가 만져 가지고 완전히 성했다’는 소문도 확 퍼졌고 예수님이 ‘돌아가서 건강함으로 평안하게 지내라’ 했으니까 당장에 건강해지니 아주 놀놀한 얼굴이 뭐 참 복숭꽃이 발가이 얼굴이 화색이 났을 것이고 건강해졌을 것이고 속으로 기분도 굉장히 좋을 것이고 기쁨도 좋았고 모든 사람에게 존대하게도 됐고, 저거 가정에 떡 가니까 그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그 남편이 보니까 완전히 새사람 이거는 신부같이 돼 가지고 왔다 말이오. 얼마나 좋겠소? 이래 가지고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권능으로 인해서 파괴된 자기 신세와 완전히 옛날보다 더 낫게 재건이 되었고 또 완전히 치료가 되었고, 자기 가정이 절단났던 가정이 완전히 건설됐고, 모든 사람에게 천물되었던 이 위신이 높아졌고 동리에서 다 ‘열두 해 혈루증 앓는 그 여인이 나았다지? 그 여인이 어느 마을에 살지?’ ‘아무 마을에 산다.’ ‘한번 구경하러 갈까?' 가 가지고 `저 사람이라?’ ‘아, 저 사람이가?'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거라 말이오. 가 가지고 ‘어찌 돼 그렇습니까?’ `이렇고 이렇고 이래 됐읍니다.'
이제 사회에 그 천함이 완전히 복구됐지, 가정 그 절단이 복구됐지, 자기 몸 절단났던 것이 완전히 회복이 됐지, 자기의 근심 걱정이 변해서 기쁨과 즐거움이 됐지, 항상 낙망 원망 불평이 소망과 감사로 충만하게 됐지, 이것이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회복되고 새로 건설된 것입니다.
왜 이것을 우리에게 보였읍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요렇게 자기 신세가 참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 또 다른 면이 좋아도 어느 부분적으로 요 면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 사업이든지 경제든지 출세든지 가정이든지,m우리 가정은 아이들 말로 콩가루 집이 돼서 빠사질 대로 다 빠사졌고 희망이 없다는 이런 아주 파괴의 가정이 됐든지, 자기 출세가 아주 절단나고, 자기 명예도 다 파괴되고, 자기의 사업도, 자기의 몸도, 무엇이든지 자기의희망 모든 것이 다 희망 없이 이렇게 되어지고 상해서 병들고 절단난 거 무엇이든지,
예수님은 영육의 구주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은 우리의 육의 모든 멸망을 예수님이 담당했읍니다. 영적만이 아니오. 예수님은 인간의 영과 육, 금생과 내세, 자기의 인격, 자기의 사회, 자기 가정, 자기 사업, 자기 경제, 자기 명예, 자기 권세, 자기 지위 무엇이 병들었든지 ‘이것은 희망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예수님이 아니면 이거 할 수 없다는 요것을 자기가 생각하는 요것이 권위입니다.
요런 것인 것을 알고 ‘뭐 예수님이 도와줘서 도와 주시면 좋지.’ 예수님 아니라도 되기는 되지마는 예수님이 도와 주시면 좋지, 예수님 아니라도 내가 할 수는 있는데 예수님에게 이렇게 의지하고 바라보지 안하면 예수님이 방해할지 모르니까 방해할 지 모르니 ‘주님 고쳐 주십시오’ 이런 정도의 간구,m자기가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도와 자기를 간구, 예수님이 방해할까 싶어서 좀 도와 주기를, 또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 아무것이한테 찾아가면, 어떤 일을 하면, 누구 누구를 만나면, 내가 어떤 사교를 하면 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예수님에게 ‘주여 구원해 주옵소서’ 이게 쉽고 비용도 덜 들고 하니까 한다는 그런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안 됩니다.
예수님 앞에는 ‘이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다.’ 하는 거기에 국한된 그 병을 주님이 치료하십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다 안 되니까 왔읍니다. 안 되는 자들이 왔어. 요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인간끼리 된다고 해도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되는 것은 전부 사망의 원인이오. 멸망의 원인이오. 화를 초래하는 그 성공입니다. 성공 같으나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병을 치료해 주실 주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이 사실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병이 나았는데 병만 나은 게 아니라 이 병으로 가정도, 가정 모든 파괴도 해결, 사회에서 자기는 버림받은 사회 이 자기 파괴된 사회성도 해결, 모든 것 다, 몸이나 뭣이나 기쁨이나 쾌락이나 인간에게 대우받는 대우나 이 부부간이나 가족끼리나 전체가 모든 면으로 다 해결이오. 모든 면으로 다 행복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금생과 내세에 이 대국적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전면적으로, 전체적으로 완전히 치료해서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여게 첫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다른 데는 보면 예수님에게 말을 해서 예수님이 허락을 하시고 안수를 하고 기도하고 이랄 때 됐는데 여게는 예수님에게 묻지도 안하고 모르게 갔소. 모르게 뒤로 돌아갔읍니다. 낫아 주신다, 병이 낫는다는 소문만 듣고 갔어.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안하고 믿는 자가 더 복있다 했습니다.
오늘 자기가 성경 보고 깨달으나 뭐 영감으로 깨닫지 안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육, 세상과 천국, 모든 사업과 경제와 위신과 인격과 지능과 사업과 대우와 영광과 인인관계에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유익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안하고 유익을 끼치는 이 모든 면 어떤 면이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이 모든 것이 치료받을 수 있다 하는 요것을 믿어달라고 요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요걸 믿어 달라고.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이 병으로서 많은 의원들을 만났어. 이 의원은 이라면 낫는다 하지마는 고생만 시켰어. 이것이 뭘 보입니까? 오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온갖 무책임한 인간들의 말하는 그 모든 말 인간들의 모든 주장하는 방편 이것 때문에 이 사람 말 듣고 이래도 해 보고, 저 사람 말 듣고 저래도 해 보고, 이런 사상 저런 주의, 저런 논리, 이런 지위에 있는 자, 이런 권세자, 이런 부요자, 이런 똑똑한 자,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는 자, 오만 것을 다 해 봐도 자기에게 손해만 갔지 유익이 없다는 것을 여게 보입니다.
택한 자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건설된 것 외에 인간을 통해서 건설할 수 있소. 자기 노력으로 건설할 수 있소. 있지마는 결론적으로 결과적으로 수지 계산에 마지막에 결산을 지우면 그 모든 것은 자기의 정력을 허비했고, 자기의 시간을 허비했고, 자기 지혜와 총명을 허비했고, 자기의 노고를 허비했고, 결국은 자기의 모든 재료 허비, 쓸데 없는 헛된 수고 이거 외에는 없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제가 날 때부터 열심히 해 가지고 세계에 출세 양명을 하고 이랬으니까 있는 줄 알았지마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보니까 하나도 없어. 헛일이오. 이런 방편 저런 방편, 이런 의원 저런 의원, 이런 치료자 저런 치료자, 이렇게 행복되게 하는 자 저렇게 행복되게 한다는 방편 수많은 방편대로 했지마는 영원을 이룰 수 있는 인간 요소만 다 허비, 결국은 헛된 노고만 한 것뿐인 것, 마지막에는 비참하고 가련하고 실패한 것뿐인 것이라는 것을 여게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보이는 것은 예수님은 이렇게 고쳐 주실 것을 자기가 믿고 ‘예수님이 안수해야 고쳐 주신다.’ 그 믿음은 안수 받기 전에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한번 기도를 해 주셔야 고침받는다.’ 그건 기도하기 전에는 안 됩니다. 그래밖에 안 믿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옷가만 만져도 구원 얻습니다. 만지기 전에 안 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집에 오실 게 뭐 있읍니까? 나도 내 위에 상관을 모시고 있고 내 아래 부하를 데리고 있는데 상관이 명하면 내가 복종합니다. 내가 명하면 내 밑에 부하들이 복종합니다.
주님이 말씀만 하셔도 되지 우리집까지 올 게 뭐 있읍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이제 이시로부터 나으리라.’ 하는 그시로부터 집에 가 보니까 그 병자가 나아 가지고 마중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수님이시오. 믿는 대로 됩니다. 주님이 모든 병을 고쳐 주시기로, 공부 못 하는 학생이 공부 잘하게 해 주실 이 공부 못 하는 병을, 자기 속에 악이 있는 병을, 못된 습성이 있는 병을, 이런 저런 쓰지 못할 더러운 욕심 때문에 망하는 병을, 노름하는 병을, 술먹는 병을 무슨 병이든지, 경제병 사업병 영병 세상병 무슨 병이든지 예수님은 이것을 치료하러 오신 구주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의심없이 확신을 가지고, 안심이 되고, 평안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기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대로에 그 능력이 올 수 있도록만 하면 됩니다.
그 능력이 올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자는 만질 때에 능력이 왔고, 어떤 자는 ‘말씀만 하십시오’ 말씀하실 때에 그때에 능력이 왔고, 이 능력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성령으로 중생됐다 말은 이 능력으로 그러면 이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면 됩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오는 것은 이 여인도 보면 그게 능력을 오게 한 것이오. 자기는 아무데도 이제 희망이 없는 자인 것을 자기는 알았읍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권세요. 자기는 인간 중에 희망 없는 인간이라는 인간이라는 자기의 모든 비참한 단점, 자기의 단점 요것을 찾아 가지고 감히 머리 들 수 없는, 세리가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나는 이런 이런 죄를 지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그 자격입니다.
자기는 희망 없는 자, 인간 중에 자기는, 자기의 단점만 찾으니까 인간 중에 제일 못쓸 인간이라. 그러기에 뻔뻔스럽게 나타나지를 못해. 자기의 희망 없는 자기의 비참 그것을 아는 것, 또 자기에게 모든 못된 점 그것을 아는 것, 요 두 가지. 요 두 가지를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근심하고 요것을 없애는 것이, 요 부끄러워하고 근심하고 하면서, 요 두 가지를 부끄러워하고 근심하면서, 요 두 가지를 자기가 부끄러워하고 근심하면서 이것 때문에 자기는 여게 눌려서, 여게 눌리고 요것으로 인해서 부끄러워하고 근심하고 감히 사람 앞에와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요 소자요 희망 없는 자라고 깨달아지는 요것이 주님 앞에 영접을 받는 원인입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는 영접합니다.
중풍병든 자가 자기의 병든 것과 자기의 희망 없는 천한 그걸 가지고 근심했읍니다. 그럴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왜 소자라 했소? 소자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단점만을 찾아 가지고, 단점만을 찾아 가지고 인간 중에 자기가 제일 못난 인간이요 인간 중에 제일 악한 인간이요 요렇게 그것 때문에 심히 근심하고 떠니까 주님은 그때 위로하시면서 ‘소자야 내가 너를 영접한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주님과 접선이 돼서 그는 병이 나았읍니다. 나으니까 존영한 자와,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읍니다.
이 혈루증 여인도 앞으로 못 가고 뒤로 갔어. 요것이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병을 치료해 주시는 주님이신 것을 자기가 확신하는 것, 소문을 듣든지 어쨌든지 확신하는 것, 확신하지마는, 확신을 하지마는 확신을 한다고 능력이 안 가면 되는 것 아닙니다. 확신이 없는 것 아닙니다. 확신을 하는데 그 확신에 따라서, 그 확신에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접선이 돼야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능력이 접선이 돼야 돼.
하나님의 능력이 접선되는 그 접선의 방편이 무엇입니까? 2장 1절 이하에 중풍병 든 자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 그가 자기 죄, 자기 소자된 것, 인간 중에 제일 못난, 인간 자기의 단점, 자기의 죄, 자기 단점 자기 죄 요 두 가지로 근심한 그것이 주님을 만나게 된 공작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된 그 방편입니다.
요 여인이 감히 앞으로 서서 가지 못하고 모든 사람 속에 섞여서, 왜? 저는 인간 중에 버림받은 천한 인간이니까 대중 앞에 설 수 없어. 이런 흉측한 병이 걸렸어.
이러니까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자기의 그 치료 못 할 이제 그걸로 멸망받는, 자기 멸망받는 그 병, 인간 중에 천물, 내나 중풍병 든 자나 꼭 같애. 그 두 가지 방법, 요 두 가지 요것 때문에 자기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요 뒤로 가면서 그 믿음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는 구원 얻겠다’ 자기에게 그렇게 여겨지니까 옷자락을 만져야 되겠는데, 자기에게 그렇게 느껴지니까 만져야 되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즐비해서 가지 못해. 막 뚫고 이래 들어가면서 기어코라도, ‘이 여자가 미쳤나? 왜 이 야단이야?’ 별소리 다 했을 거라. 뭐 밀기도 하고 끌어내기도 하고 쥐박기도 했을 거라. 어짜든지 기어들어갔소. 우사와 냉면과 모욕과 맞는 거 뭐 그런 거 모르고 어짜든지 들어가서 옷을 만지니까 나았읍니다. 요거요.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주님은 병을 무슨 병이든지 병을 고쳐 주시는 주님이라는 요 사실을 확신하면서, 주님이 무슨 병이든지 내게 이런 병 있지마는 이걸 고쳐 주실 수 있는 주님이신 것을 소망하면서 요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요거 가지고, 이것은 중한 것을 가져 왔읍니다. 가졌읍니다. 귀한 걸 가졌읍니다. 확신을 가졌읍니다. 이렇지마는 능력이 안 오면 안 됩니다. 능력이 접선이 안 되면 안 됩니다. 능력 접선이 돼야 되지. 능력 접선되는 그 능력을 오게 하는 그 방편은 뭐입니까? 두 가지요. 뭐? 주님에게 소망하니까 주님의 능력이 와야 되는데 주님은 하나님이시요 깨끗하신 분이시니 이 주님 앞에 자기가 거리낌이 있는 거, 자기가 잘못된 거리낌이 있는 거, ‘내 행동이 이렇다, 내 구습이 말이 이렇다, 내 성질이 이렇다, 내가 어떤 일을 잘못된 일이 있다.’ 뭐 안다 그말이요, 자기가. 이것이 잘못됐다 하는 그걸 알아. 모르는 게 아니라 안다 그말이오.
그것이 깨달아지지 안하면 자기가 주님에게 대한 소망을 가진 확신이 없는 자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신데, 아무도 해 줄 수 없는 이것을 주님이 해 줄 수는 있는데, 주님이 해 주시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분이 안 해 주면 나는 망하는데, 안 되겠는데, ‘이분이 안 해 주면 어짜느냐?’ 가슴이 도근거리는 그것은 ‘내가 주님이 내게 대해서 뭣이 거리껴서 안 되겠느냐? 뭐이 잘못돼 안 되겠느냐? 무슨 수속이 잘못되겠느냐?’시험치는 사람도 요 획 하나 삐뚤어지면 안 될 터이니까 어짜노 겁이 나는데, 자기가 취직할라고 그거 아니면 지금 죽는 게 아니고 거기 안 되면 딴데든지 해도, 요거 아니면 죽는다 하는 그런 그 경우가 되어지면 자기에게 ‘뭣이 하나 틀리면 안 될 건데’ 대한 염려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잘못된 거 요거, 자기는 주님이 도우시지 안하면 자기는, 인간 중에 자기의 장점 보는 그런 자는 필요가 없어. 예수님은 의인을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장점 가지고 주님 앞에 갔던 사람은 다 배척당해 버렸소. 자기의 단점, 자기의 못난점, 자기 단점, 또 자기의 죄, 요 두 가지 가지고, 요 두 가지 가지고, ‘요것 때문에 주님의 권능이 나에게 오지 안해서 내가 확신하고 소망하는 이것이 안 돼질라? 요 두 가지 때문에 안 돼질라?’ 하여, 요 두 가지 때문에 안 돼질라 하여 근심하는 거, 근심하는 거, 요 두 가지 때문에 안 돼질까 하는 근심하는 거, 근심하는 요것이 요 근심이, 요 두 가지 때문에 안 돼질까 하는 요 두 가지 때문에 근심하는 요 근심이 자기의 단점 그것이, 항상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어야 된다는 요것을 인정하고 있는 거 자기의 잘못된 요게 있으니까 다시는 요 잘못된 일을 범할 수 없다는 요것 요 근심이, 요 근심이 자기의 잘못된 것을 자기의 단점을 잊어버리고 하루만 지내가면, 주님 앞에 요렇게 꼬꾸라져 단점인 줄 안 것이 하루만 지나가면 없는듯이 뻔뻔스리, 그런 정도의 근심은 능력이 안 옵니다.
그것이 단점이라는 그걸 깊이 근심하고 느끼고 느끼고 느껴서 언제든지 그 단점을 잊어버리지 안할 수 있는 그 근심 도수가 올라가고, 자기의 잘못된 그 죄 그것을 다시는 그것을 범할 수 없는 그 근심의 도수가 올라갈 때에 하나님의 권능은 즉시 연결됩니다. 즉시 연결돼요.
그러기에 요 여인은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안했읍니다. 예수님하고 약속한 것도 아니오. 기도한 것도 아니오. 예수님에게 대한 치료자라는 요 확실한 소망과 확신을 가졌고, 요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요거 하나 가졌고, 그다음에 자기는 다시는 남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뻔뻔스럽지 못할 자기의 소자라는 것 요거,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다시 범죄할 수 없는 요 죄를 찾아서 요것 때문에 근심, 요 {세}*두* 가지가 구비할 때에, 자기의 단점을 다시 잊어버리지 안할 수 있는 근심 자기의 죄를 다시는 범할 수 없는 근심의 이 도수, 요 근심과 요 확신, 요 근심과 확신, 이래서 주님은 상한 마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고거 여기 상한 걸 말합니다. 요 두 가지. ‘소자야 안심하라’ 요 근심과 요 확신. 요 두 가지가 갖추어 가졌을 때에, 요 두 가지를 갖추어 가졌을 때에, 주님하고 의논하지도 안했어. 연락도 없었어. 말도 듣지 안했어. 하지마는 요 두 가지가 구비됐을 때에 그 구비된 그 신앙에는 주님의 능력이 쑥 나가 버렸읍니다. 전능하신 그 능력이 나갔소. 나갔을 때에 그 여인은 즉시 나았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능력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뒤에 옷을 만졌느냐?’ 이러니까 제자들은 ‘사람이 마구 이렇게 마구 즐비해 있으니까 이러니까 서로 쓸리고 당겨서 이렇지 누가 사람이 역부로 주님의 옷을 당겼다고 그렇게 말씀합니까?’‘아니다. 내게서 능력 나간 것을 내가 보고 한다.
내게서 능력이 나가 가지고 어떤 자든지 그 소원하는 소원대로 다 소원이 이루어졌을 터이니까 빨리 여기 나와서 고백하라.’ 이 여인이 죽을 죄 지은 줄 알고 쫓아나와 가지고 ‘이렇고 이렇고 내가 열두 해 이런 이런 여인인데 이런 소문을 듣고 주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나을 줄 알고 내가 뒤로 삐지고 들어와 가지고 옷을 만졌더니 나았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아 안심하라. 이 여인은 열두 해 혈루증 앓았던 여인이 나았다. 이제 네가 건강하게 되었으니까 집에 가서 행복되게 살아라.’ 예수님이 당신 나타내기 위함입니까? 예수님이 요렇게 알뜰합니다. 그 사회에서 그 여인의 모든 이제까지의 잘못된 선입적 관념을 다 벗겨줬어. 그에게 대해서 행복된 ‘이제부터 완전자기 때문에 완전자로 영접하라, 건강한 자로 영접하라.’ 하는 그이의 모든 사회와 그의 앞길을 개척해 줬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실 때 이렇게 모든 면에 원만하게 하시오. 치료만 할 게 아니라 그이의 앞으로 행복, 그이에게 거리낌, 모든 사람들에게 선입적 관념 잘못돼 있는 그것까지 해결해 줬어. 이것이 열두 해 혈루증 여인의 이 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여게서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주라. 자기에게 어떤 일이든지 ‘예수님이 아니면 요거는 치료해 주실 수가 없다. 나의 이 절단난 심신은 예수님이 아니면 이것을 구원해 줄 자가 없다.’ 요렇게 자기에게 있는 그 문제가 요렇게 어렵다는 거, 예수님 한 분만이 할 수 있다는 요것으로서 규정지워지는 요것이 문제입니다. 요것이 안 되면 안 돼요. 요것이 문제. 요렇게 ‘예수님이 아니라도 된다. 뭐이라도 된다.’ 이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서 정함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아예 얻기를 바라지 말라 했읍니다. 왜? 제 힘으로도 할 건데 예수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 그자는 예수님을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의지하니까 예수님을 섬길 리가 있읍니까?
또 예수님에게도 다른 것도 ‘하나만 가지고 안 된다. 여러 면으로 해야지.’ 이 세상 일 모양으로. ‘예수님에게만 부탁해 안 된다.’ 여기도 부탁하고 저기도 부탁하고 모두 다 부탁하고 이렇게 여러군데 해야 된다 하는 그자는 되면 마귀란 놈이 영광은 딴데 따먹고 예수 믿는 거는, ‘여게 그렇다’ 이러니까 그런 자는 예수님의 은혜는 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알다시피 딴데는 한 군데 갈라 간 것도 없고 그 한 군데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또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 예수님만이 할 수 있고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요것으로 단일 소망, 요 단일 소망 요것이 권위 있읍니다.
단일 소망. 단일 소망을 가지되 확신을 가지는 것. 이 혈루증 여인은 아무데도 힘이 없소. 있는 것 다 없앴지. 의원 다 해도 안 됐소. 요거 뭐이냐? 요것을 뭘 보이느냐? 단일 소망을 보이는 것이요, 단일 소망. 예수님에게만 소망있는 거 단일 소망.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잘 못 믿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부자되는 그까짓 거야 삼 년이면 됩니다, 삼 년이면 돼. 확신있어. 나도 경험하고 체험했어. 예수 믿어 부자되는 그까짓 거야 삼 년이면 돼, 삼 년이면.
안 믿어도 그래요. 베드로가 고기 잡아서 당장에 그만하면 돈 한 주먹 짊어질 수 있어. 하루밤에 되지 안했소? 시간 안 걸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자되는 거는 삼 년이면 넉넉합니다. 삼 년까지 갈 것도 없어. 왜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실패하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법칙대로 믿지 안해 그래.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자기를 행복되게 해 줄 수 없다는 요 단일 소망을 가져야 되는데 그 사람이 아직도 그걸 몰라.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구비한 부자였지마는 실은 자기에게 물 한방울의 소유도 가지지를 못했읍니다. 요걸 알아야 됩니다.
돈을 모으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되기 위해서 모으는데 돈 모아 가지고 자식들끼리 시비하고 재판하고 죽이고, 아버지 죽을 때도 흔들어 가지고 ‘이놈의 영감탕구야 나한테로 허락해 달라 허락해 달라’ 딸도 아들도 이래 가지고서, 그게 무슨 행복이요? 인간이 물질로 망합니다. 권세로 망합니다. 지위로 망합니다. 우리를 물질면이나 사업면이나 육체면이나 영면이나 경제면이나 주님이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다 화다. 주님만이 나에게 행복되게 해 줄 수 있다는 요 단일 소망으로 귀속해서 단일 소망 되어지는 요것이 첫째요 단일 소망이 되어져 주님이 내가 단일 소망할 때 이 소망을.
둘째로는, 나에게 확실히 이루어 주실 수 있고 이루어 주시기로 계약한 소망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거,
그다음에는 뭐입니까? 확신을 가지면 그다음에 가질 것은 근심입니다. 그다음에 가질 거는 근심만 가지면 됐소. 딴거 없어. 단일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그다음에는 근심만 가지면 성공이오. 무슨 근심? 자기의 단점 약점, 자기의 약한 점, 바울의 비결이 그거요. ‘나는 약할 때에 강해졌다.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그게 바울의 비결이라. 자기의 단점 자기 약점, 그것 때문에 주님 앞에서 근심하는 거, ‘내가 이런 단점이 이런 약점이 있으니까 주님이 요것 때문에 나를 들어 주지 안할라?’ 근심하는 거, 자기에게 죄가 있으니 ‘내가 잘못된 죄가 있으니 요것 때문에 주님이 들어 주시지 안할까?’ 하는 근심하는 거 그 근심, 약점과 단점을 근심하되 어느 도수에 도달해야 되느냐? 다시는 그 약점과 단점을 잊어버리고 잘난 척하고 뻔뻔거리는 이런 밉상스러운 자가 되지 안하고 평생 자기 약점과 단점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고 약점자로 단점자로 그대로 살 수 있는 깊은 인식을 가지는 그 근심, 자기의 잘못된 그 죄를 다시는 재범할 수 없는 도수에 도달하는 근심 요 근심과 확신 둘만 되면 주님의 무한한 능력은 그에게 갑니다. 그의 사업에 갑니다. 그의 직장에 갑니다. 그의 권세에 갑니다. 그의 지위에 갑니다. 그의 가정에 갑니다. 그의 영에 갑니다. 몸에 갑니다. 구원에 갑니다. 이것이 예수교요. 이런데 이렇게 믿지 아니하고 껍데기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다 헛일인 것이오.
의논하지 않아도 됐소. 주님하고 의논 약속하지 않았소. 허락도 받지 않았소. 요 두 가지를 가지고 주님의 옷을 만질 때에 능력이 나가 버렸소. 예수님은 생각지 않는데 그 능력이 나갔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산 믿음을 가집시다. 뭣 때문에 예수님 믿는 자가 땅에 것이 욕심이 나느냐? 하늘의 것이 희미해지느냐? 뭣 때문에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없느냐? 죽은 믿음 가지고 공연히 위로받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산 믿음만이 통과시킬 수 있는 미래를 우리에게 줍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도 산 믿음만이 통과하고 거짓 부리자는 다 떨어지도록 다 걸리게 한 것이오. 신사참배에 다 걸렸읍니다. 선천군에서는 안 믿는 집이 뭐 넷 집밖에 없다 했는데 선천군에서는 신사참배에 다 걸렸소. 전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신사참배에 다 걸렸소. 6·25 때도 인민군의 세력을 뚫고 나간 믿음은 그 산 믿음밖에 없었소. 죽은 믿음은 다 걸렸소. 그 뒤도 예배당도 내 주고 오만 거 다 굴복하고 항복하고 다 내주었어.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산 믿음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 현실 현실을 줍니다. 개별로도 주고 전체로도 주고 시대적으로도 줍니다. 산 믿음이 아니면 소용 없소. 산 믿음은 능력이 와야 사는데 능력 오는 것은 두 가지. 확신과 근심.
설교: 백영희 목사(1980. 12. 21. 주일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