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나안 여인의 믿음

  선지자선교회

본문: 마태복음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에 가나안 여인 하나가 나와서 예수님에게 소리를 질러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이렇게 예수님을 불러 가지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이러면서 간청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걸어가십니다. 여인이 아무리 그렇게 부르짖어도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가십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너무 여인에게 대해서 냉정하게 냉대하는 그것이 민망스러워서 선생님, 저 여인이 뒤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무슨 말이든지 해서 보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서 내가 왔지 다른 데 내가 보내서 오지를 안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내가 왔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제자들은 이제 깨달았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 여인입니다. 이러니까 이방 여인이니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하거나 말거나 그렇게 들은 척 만 척 그만 하시고 지냈구나.’ 하는 것을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예수님에게 달려와 가지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그만 절을 하면서 주여 나를 도우시옵소서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대해서 대답하시기를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제자들이 들을 때에도 옳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신데 이방인 그 개와 같은 이방인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로구나.’ 그렇게 모든 제자들이 알았고 또 이 여인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은 짐승과 같이 그렇게 성경에 취급을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취급해 나오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그 이스라엘 사람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또 가나안 본족속인 그 여인도 종전에 다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 여인이 말하기를 옳소이다. 나는 과연 개와 같은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해서 짐승 취급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정말로 짐승 같은 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부러 겸손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참 짐승 취급 받는 그게 마땅한 줄 알고 옳소이다. 그렇지마는 개도 주인의 것 먹고 살지 않습니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그런 것을 먹고 사는 것이 개지 그게 없으면 어떻게 개가 살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주님에게 간청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뜻밖에 말씀하시기를 여인아, 네 믿음이 크다.’ 칭찬했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다. 이제는 네 믿음이 크니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 즉시로 그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세 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처음에 거절당한 것은 아무리 부르짖어도 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대답 말 한 마디도 없고, 말 한 마디 말씀도 없고 그대로입니다. 이런 아주 냉대를 이 여인이 받았습니다.

 

두번째는, 제자들이 간청하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왔지 내가 이방인에게 왔느냐?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왔지 이방인에게 왔느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책망 같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왔지 이방인에게 온 줄로 아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이 여인은 두번째는 이제 거절뿐만 아니라 반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반대하시는 반대의 거절을 받았습니다.

또 세번째는, 절을 하면서 간구하니까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부당치 아니하냐? 자녀에게 주는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부당치 아니하냐? 마땅치 아니하니라.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아주 이제 세번째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아 덕보려고 왔다가 크게 해를 받았습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러니까 아주 천대, 멸시, 모욕, 예수님에게 덕을 보려고 유익을 보려고 왔다가 큰 천대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관계였습니다.

이랬는데 이 여인은 그렇게 세 번이나 냉대를 받아, 또 반대를 받아, 또 천대 모욕을 받아, 이래도 이 여인은 그것이 모두 다 지당한 줄 알았습니다. 지당한 줄 알고, 냉대 받는 것이 지당하고, 반대당하는 것이 지당하고, 그렇게 개로 취급 받는 것이 지당하고, 그러나 주님에게 아무래도 이 소원은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간청을 했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하면서 간청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다말씀하시고 `이제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크니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는 그 즉시로 그 여인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여게서 좀 복잡하고 어려운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증거를 하겠습니다. 제자들과 이 여인들과, 제자들과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볼 때에 과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대해서 냉대를 했고, 또 거부 반대를 하셨고, 또 천대 모욕을 개라고 주셨고 이렇게 제자들도, (그 아이들 한테 두지 마십시요. 여기 앉아도 말씀을 안들으면 아이들에게 축복이 안가요. 어쨌든지 말씀을 듣고 따로 떨어져 앉아서 아이들 함께 두지 말고 얼라(애기) 들으면 기도해요.주여 이 아이도 어짜든지 은혜받게 해 주옵소서.성령으로 감동시켜 주옵소서. 자꾸 이래 기도를 하면서, 그러니까 아이 없는 사람보다 아이있는 여인은 더 기도해야 되고 더 간절해야 되고 더 힘을 쓰고 더 마음을 쓰기 때문에

여인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 이루어진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이 이루어지고 아이 때문에 도로 시험에 들어서 이러면 젖먹이지 않은 여인이 복이 있다,젖 먹이는 여인은 화가 있다,아이 밴 여인은 화가 있다,아이 낳은 여인은 화있다 이랬습니다. 잘못하면 화가 되기 쉽고 잘하면 복이 되기 쉽습니다.

 

이 제자들이 보는 데나 보고 듣는 데에, 아 듣는 데나 또 예수님을 접촉하는 데나 또 이 여인이 보고 듣고 접촉할 때나 과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세 번 못할 일을 했습니다. 세 번 못할 일을 했소. 냉대했소. 반대했소. 아주 개라고 모욕했소.

이 제자들과 이 여인이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고, 반대를 하는 것이고, 냉정스럽게 하시는 것이 되는 것을 생각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생각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까?그들은 벌써 역사를 압니다. 역사를 알기 때문에 역사에 비추어서 볼 때에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이렇게 냉대 반대 모욕 주는 일을 한 것으로 그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역사를 의지해서 인정을 했습니다. 역사가 그리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자기네들이 이미 그런, 그렇게 알고 있는 지식을 인해서 또 그렇게 여겼습니다. 또 그들이 자기네들의 이 주관을 가지고 생각할 때에 또 그러합니다.

역사로 봐서 그러하고, 자기네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지식으로 볼 때에 그러하고, 또 자기네들의 그 주관을 가지고서 볼 때에 비판할 때에 그러합니다.

뒤에서 말하면 으례히 부르짖으니까 뒤로 돌아서 가지고서 뭐 너무 급하게 그러지 마라. 내가 서 있을 터이니 오라.’ 이러는 것이 이것 환영하는 것인데 못 들은 척하고 말 한 마디 안 하니까, 역사를 모르고,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에는 이런, 이스라엘과 가나안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렇다는 그런 지식을 모르고, 역사를 모르고 지식을 모른다 할지라도 자기네들 주관으로 생각해도 이것은 확실하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 그들에게 냉대로, 반대로, 천대의 모욕으로, 해를 끼치는 이 해로 이렇게 보여진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역사가 그러하고, 역사라 말은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 말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국사가 그러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그들의 사기가 그러합니다. 역사, ‘역사책안 합니까? ‘역사 공부한다.’역사가 그렇다고 하고, 역사에 역사가 그렇다고 인정을 하고,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이것이 또 그러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게 됐고, 또 자기네들의 일반 상식적 주관, 자기 주관들이 볼 때에 이 세 가지는 다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 그말이오.

말 한 데 말 한 마디도 안 하지, 불쌍히 여겨서 말해 보내십시오하니까 턱 엉뚱한 반대말만 척 해 버리지, 또 불쌍히 여겨서 도와 달라 하니까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 주는 게 마땅하냐?’ 그 상식이나 아니, 역사나 또 그런 기존 지식을 안 가지고 있는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청하니까 자녀의 떡을 개에 주는 것이 마땅하냐?’ 하니 그거는 뭐 그럴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과연 그 여인에게 냉대를 하셨던가? 반대를 하셨던가? 해를 끼치는 모욕을 천대를 하셨던가? 그 사실은 어땠던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한번 살펴봅시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뿍뿍 걸어가신 것은 그 여인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셨던가? 그 여인이 소원하는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그 역사를 하셨던가 소원하는 것을 반대하는 역사를 하셨던가? 그것은 그 뒤에 나타나 보면 압니다.

그럴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들은 척하시지 아니하시고 이러니까 이 여인은 그 소원하는 소원이 이제는 더 불이 붙습니다, 소원하는 소원이. 예수님께 간청하는데 못 들은 척하니까 이 여인은 아이구, 이 큰일 났다. 주님이 안 들으시니 아무래도 주님이 들어 주셔야 되겠는데해서 그의 소원의 그 도수가 강해졌습니다. 소원의 도수가 강해졌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 주님에게 고침 받아야 되겠다는 그 욕망이 또 뜨거워졌습니다.

또 주님에게 대한 마음이나 몸이나 그 심신의 그 열심이, 심신의 열정이 더 일층 가해졌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냉대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 믿음이 되는, 받을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되는, 받을 만한 그런 자격이 되는, 그런 실력이 되는, 실제로 예수님에게 간구하는 그 실질성, 그 진실성 그것이 일어나도록 소생시킨 그 역사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그 여인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요 요소가, 요 재료가, 요 방편이, 요 믿음의 본질과 본성의 요 자격이, 요 도수가 요것이 빈약한 요것을 소생시켜 가지고서 요것이 강해지고 간절해지고 하나님이 주실 만한 그만한 도수에 이르러야 되겠고, 자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요것 하나를 간구하는 여기에 그 심신이 다 마구 똘똘 뭉쳐서 집중돼 가지고서 간절한 이 소원, 아무래도 받아야 된다는 요 참 절대라고 할 만치 요 욕망,마음으로 간절과 욕망 요것만 있을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태도까지도 마구 빨리 달아나서 주님에게 쫓아가야 되는 이런 심신의 그 진실의 열정 이것을 소생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 본인도 모르고 제자들도 모르는 그 이면에 이 역사를 일으켰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 그 결과로 이 여인이 이렇게 됐거든요.

그 결과로 그 여인이, 낫아 달라 하는데 주님이 첫 말에 내가 낫아 줄 터이니까 천천히 오라하면은 그만 낙관시하고 이럴 건데, 들은 척 만 척하니까 이것 기가 찬다 그거요. 그러니까 들은 척 만 척하니 포기가 되든지, 포기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간절이 되든지, 낙망이 되든지 더 욕망이 되든지, 뒤로 물러가든지 더 열정을 내든지 둘 중에 하나 아닙니까? 둘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이건 필연한 일 아니요?이랬는데 예수님께서는, 둘 중에 하나인데 주님을 향한 그 욕망과 간절한 소원과 이제는 어쩔 줄 모르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주님을 향하여 발동치는 이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낙망도 이르지 안했고, 포기도 이르지 안했고, 후퇴도 이르지 안했고, 불만 불평도 이르지 안하고, 어쨌건 그만 열정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은 요것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셨으니 제자들이 볼 때에 냉대하는 것으로 보여진 것과는 천치 차이입니다. 제자들이 냉대하는 것으로 보여진 것과는 정반대요. 정반대의 그 역사를 주님은 하셨는데 인간들의 그 역사로 볼 때에, 인간들의 선입 기존 지식으로 볼 때에, 인간들의 그 주관 인간성으로 볼 때에 정반대로 보여졌습니다. 정반대로 보여지는 주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역사를 하신 요것을 우리가 꼭 잡아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살 때에 일 년이고 이태고 삼 년이고 사 년이고 십 년이고 주님이 내게 대해서는 아주 냉대한 것 같은 예수 믿어야 예수 믿는 효력이 하나도 없는 냉대한 것과 같은 그런 냉대의 기간 같은 그런 기간이 있습니다.

그게 뭣이냐? 그대로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냉대같이 있는 그것은 아무래도 예수 믿어 일 년 믿어야 효력 없어, 이 년 믿어야 효력 없어, 십 년 믿어야 효력 없으니까 낙심하고 돌아갈 자는 돌아가고 아무래도 안 됐다. 예수 믿어야 효력 없으니 성경에 이런데 안 됐다.’ 발버둥을 치고 이 소원을 뜨겁게 하고, 욕망을 뜨겁게 하고, 그 심신의 발동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그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요것을 미리 알고 요런 기회에 요렇게 우리는 예비 지식을 가지고 해야 성공하는 큰 믿음을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 둘째로 내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갔지 다른 데 보냄을 받지 안했다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보내지 안했는데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은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시지 안한 데, 하지, 하라고 하지 안한 일, 하지 말라는 일을 했으면 예수님이 죄지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분명히 그들이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과 역사를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만 이스라엘 사람으로 알았지 영원 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은 몰랐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은 택함을 받은 자로서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한 이것이 잃어버린 양인데,이러니까 여인아, 내가 제자들이 말할 때 내가 다른 데 온 것 아니다. 내가 딴데로 갈 건데 딴데로 가지 안하고 시돈과 두로로 이리 찾아온 것은 이 여인에게 나를 보내서 내가 이 여인에게 찾아왔다.’ 이 말씀이라 말이오. 이 여인에게 찾아왔다. 그 말씀은 분명히 그 여인에게 찾아왔다는 말씀입니다.

거게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여인의 병 고친 이 일이 첫 일입니다. 이게 첫 역사요. 이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른 데 보냄을 받지 안했고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아서 왔다이 말씀은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아버지가 보내서 내가 이 여인에게 찾아왔다 하는 이 말씀이 우리가 뒤에 지금 아니까 확실하고 분명한데 인간들의 그 역사성과 이제까지 대대로 여러 수십 년 지금, 지금으로 말하면 사천 년 동안 이 문화가 계속돼 오는 이 역사, 통계, 인간의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자기 주관 이것은 정반대로 이 여인에게는 상관 없는 것으로 거부하고 거절하고 반대하는 것으로 보여졌는데 실은 예수님께서 반대가 아니라 환영하고 여게 왔다는 그 발표를 하고 내가 이것 때문에 왔다환영하고 찾아오신 것을 발표했는데 이렇게 반대로 보여졌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니까 뭣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되는 그런 일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신앙 생활 한다고 이렇게 신앙 생활 하는데 예수님이 자기를 돕는 그런 일이 되지 안하고 도로 예수님 때문에 자꾸 해가 되어지고, 예수님의 도와 자기와 이렇게 마찰이 되어지고, 충돌이 되어지고, 자꾸 충돌되어지는 이런 일만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반대하는 것과 같이 주님이 하시는 그 어쩐지 일이 예수교와 자기와 반대, 하나님의 진리와 자기와 반대되는 그런 일만 자꾸 생겨진다 그거요.

갈릴리 바다에 밤중에 이 제자들은 지금 풍랑이 일어나니까 놀라서 죽을 지경인데 저 뒤에서 물귀신이 물 위로 떠벅떠벅 걸어오니까 그만 이 제자들이 물귀신 왔다고 그렇게 막 고함을 지르면서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볼 때에는 구원의 주님이 오실 때에 저희들 보기에 자기를 멸망시킬 것으로 그렇게 와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예수 안 믿으려네.’ ‘?' `나는 예수로 망했어.' `?' `, 이것 사업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루지 안하고 나도 거짓말 이런 것 다 이래 하고 했으면 될 터인데 거짓말 안 하고 정직하게 하려 하다가 사업 다 절단났고, 또 이 주일 지키려 하다가 다른 사람은 주일 안 지키고 다 이러는데 나는 주일 지키려다 목욕탕 하던 것이 다 절단났고, 이발 하던 게 절단났고, 주일 지키려 하니까 모든 장사하는 것도 주일날 제일 성과를 올리는 것인데 주일 지키려다 다 절단났고예수교 때문에 손해본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교로 인해서 예수교는 자기에게 손해를 보이고 반대를 보이는 것과 같은 요런 경우로만 보여지는 그런 토막이 있습니다. ‘예수교는 내 생활에는 반대라. 내 형편에는 반대라. 내 사정에는 반대라. 우리 가정에는 반대라. 우리 가정에는 예수교로써 유익을 못 보고 우리 가정은 예수교와 정반대적이요 대립적이라.’ 요렇게 보여지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치료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멸망의 방편으로 멸망, 성공 같은 멸망을 내가 취할 것을, 성공 같은 멸망을 취할 것을 그 멸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까 이는 예수로 말미암아 망하는 것 같지마는 그것이 망치는 것을 치료하는 것이요, 망치지 안하도록 하나님의 축복이 이제 올 수 있도록 모든 기반을 닦는 것이요, 모든 것을 치료하는 것이요, 정리하는 것이요, 정돈시키는 것이라.

그러기에 내가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교와, ‘예수교는 내게 맞지 안해. 나는 불교는 내게 맞지만 예수교는 안 맞아.’ 예수교가 자기 형편과 사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 자기 형편 사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 맞지 않는다는 그것이 왜 맞지 않는 것으로 자기에게 보여지나? 주님은 실은 자기에게 오셔서 자기를 지금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자기 모르는 면부터 치료를 해 가지고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도록 이래 하는 것인데 자기에게는 그와 같이 보여지는 그것이 뭣이냐? 인간의 주관이 그렇게 보여지게 하고, 인간들의 선입적 지식과 기존 관념들이 그렇게 보여지게 하고, 모든 역사의 이 세상 멸망법의 통계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지, 그것이 그래 보여지는 것이지 실상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왔다. 다른데 오지 안했다.’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 왔다는 말씀이 그 실상인데 인간들의 모든 역사성, 선입적 기존 지식성, 주관성으로 볼 때에는 정반대로 보여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교가 자기에게 정반대에 거슬려질 때에 거슬려지는 것이 인간이 볼 때에는 예수교로는 자기는 덕을 못 보는 것이고, 예수교와 자기와는 반대요, 예수교로 말미암아 자기는 해보지 아무 성과가 없고 자기가 소망하는 것은 헛일이라 이렇게,예수교와 예수님의 교훈과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모든 소유가 이렇게 대립이 되어질 때에 이것이 실은 주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주님과 삐뚤어진 그것은 다 멸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삐뚤어진 것을 이것을 치료해 가지고 완전자와 일치가 되어지게 해 가지고 주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역사인데 이것이 인간들의 관념이나 모든 비판으로서는 이렇게 정반대로 보여진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대로 보여질 그때가 어떤 때냐? 반대로 보여지는 그때에 큰 믿음 되는 것은 반대로 보여지는 그때에 내가 주님에게 가까이할 때요, 반대로 보여지는 그때에 내가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아지게 절을 하고 꿇어 (**)리는 낮아져야 될 그때요, 반대로 보여질 때에 그때에 자기는 어떤 해가 오든지 낮아지라 하는 대로 낮아지고 자기는 주님에게 더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고, 반대되는 일이 자꾸 나타나니까 자기는 감당 못 하겠다 그말이오. 그럴 때에 자기는 낮아지고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서 주여 도우시옵소서도우시옵소서 하는,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그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기에 냉정스러워 보일 때에는 모든 면에 열심을 가해라. 반대로 보여질 때는 네가 주님 앞에 꺼꾸러져서 주님에게 도움을 구해라.

 

그 다음에 셋째는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한 말씀은 그들이 들을 때에는 이 여인을 아주 모욕 주고 여인을 해치는 것으로 네게는 떡을 안 준다하는 것으로 보여졌지마는 그것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네게 지금 네게 은혜 주려고, 네게 은혜 주려고 영원 전 예정했고 창조했고 섭리했고 이래 오늘 내가 찾아왔는데 네게 베풀 이 은혜를, 절대성 있는 이 은혜를 네게 베풀지 안하고서 누구에게 베풀겠느냐?’ 이렇게 주님은 밝히신 것인데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주 이것은 해치는 것으로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갈 때에 우리에게 해가 옵니다. 해가 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해입니다. 역사 통계를 봐도 분명히 해고, 모든 인간 지식으로 비판하고 평가해도 손해고, 자기 주관으로 봐도 손해입니다.

주님을 향한 소망과 욕망과 간구할 때에, 주를 바라보는 자에게, 주를 소망하는 자에게, 주님에게 간구하는, 주를 향해서 있는 자에게, 주를 향하여 소망하고 있는 이자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당장에 무엇이 덜퍽덜퍽 무엇이 오지 안하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자기에게 오는 것, 인간 보기에, 인간 생각으로, 인간 그 통계로, 인간 주관으로 볼 때에 해가 되는 일이 오는 그 일이 해가 되는 일이 오는 게 아니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인데, 유익을 주는 것인데 인간이 볼 때에는 해로 보인다 그말이오. 인간이 볼 때는 해로 보여. 그게 유익을 주는 것인데.

이러니까 해로 보일 때에 너를 박대로, 너를 천대로, 하나님께서 너는 박대하고, 너는 천대하고, 너는 하나님께서 해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네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요렇게 보여지는 그것이 인간 통계요, 인간 지식이요, 인간 주관의 평가지 그것이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 하는 것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에 유익은, 기독교의 유익은 조그만한 유익은 인간 생각으로 볼 때에 조그만한 손해로 보이고, 큰 유익은 큰 손해로 보이고, 제일 큰 유익은 제일 큰 손해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주로 말미암아 주님 때문에 죽는 그것은 제일 큰 손해인데 그것은 제일 큰 유익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뺏기고 모든 소유가 절단나는 것은 그것이, 절단나는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요가 오는 전제로 앞잡이로 자기에게 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떨어지고 낮아지는 그것은 주님이 자기를 극히 높이시는 그 높이심인데 인간이 볼 때에는 잘못된 관념으로 보니까 그것이 낮아지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낙망하고 후퇴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그 소원과 욕망은 그것을 능가하고 주님 앞에 '옳소이다. 개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자기의 소원하는 소원이 자기에게 부딪힌 형편을, 형편을 초월하고, 자기가 주님 앞에 소원하는데 이 소원으로 소원하는데 소원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큰 손해가 올 때에 이 손해보고는 나는 이 주님에게 이 소원은 이루지 안하겠다. 이 소원 이루려다 이 손해보면 안 되겠다.’ 소원이, 소원이 이 손해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은 소원을 버리고 이 손해를 보지 안합니다.

손해보는 것 이 손해 이것이 보이지 안하고 손해보다 이 소원하는 것이 큰, 이 손해를 능가한 그 다음의 소원이라야 이것이 생명 있는 소원이기 때문에 이 일이 성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소원하는 소원은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모든 조건을, 조건을 초월한 소원이라야 됩니다. 모든 조건 이런 이런 게 있지마는 그것이 불구하고, 그게 돌아보이지 안하고, 상관치 안하고, 개의치 안하고 그것보다 더 강한 소원이라야 그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소원의 중량이 백 근이면 그 백 근 앞잡이로서 자기에게 부딪혀지는 모든 손해의 중량이 한 구십 근이나 팔십 근이나 옵니다, 거게 적당한 할당수로서. 올 때에 이 손해보다도 소원이 더 강할 때에 이루어지는데 이 소원보다 그, 손해보다 소원을 더 강해야 그 소원을 이루어 줄 때 그 사람이 보존할 수가 있고 감당할 수가 있지 이 손해보다도 적게 여기는 가치의 소원이라면 그 소원을 그때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면은 그 실상의 가치는, 자기 손해는 오십 근이라면 하나님이 이루어 준 건 백 근인데 이 오십 근짜리보다 백 근짜리의 가치를 적게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백 근짜리를 이루어지면은 오십 근짜리보다도 적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결국은 오십 근짜리에게 뺏기고 맙니다. 남용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보다 가치를 높게 여기는 인정을 할 때 비로소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밤에 또 범위가 넓어져서 좀 복잡하니까 알기 어렵겠는데, 오늘밤에는 여러분들이 요것만 우리가 기억합시다.

이 세 가지 순서에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 여인에게 대해서 참 그 이상이 없는 은혜를 베풀어 적극적으로 역사했는데 인간이 볼 때에는 정반대로 보여졌다. 우리가 주님을 상대해서 살 때에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그것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는 정반대로 보여진다 하는 요것을 기억하고,또 요것은 좀 어려운 것이지마는 기억하고, 그러면 반대로 보여지는데 이 여인이 그걸 알고 했습니까? 반대로 보여지는데 제자들은 다 그래 생각했는데 이 여인은 반대로 보여지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이 참 진정 역사하신다.’인정이 돼서 그 여인이 달라붙었습니까? 어쨌습니까?모든 사람이 볼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께 아주 냉대, 반대, 해치는 손해 이것만 당했는데 그것 당할 때에, 그걸 당할 때에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평가하고 비판하고 인정했는데 이 여인은 그것을 그렇게 불구하고 주님에게 간구하고 달라붙어 가지고 기어코 성공을 했으니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관념하는 거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이 되지 안하고 왜 그것을 불구하고 그와 같이 했겠습니까? 알고 했습니까? 알고 한 것 아닙니다.

알고 한 것 아닌데 주님에게 대한 이 소원과 이 욕망이 인간들이 그렇게 말하는 인간들의 그 자율, 인간들의 지식, 인간들의 통계 이것에게 제재받지를 안하고, 이것이 방해하지를 못하고, 이것에게 꺾어지지 안하고 이것을 초월한 소원이 되어졌고,또 거게 대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얼마나 주관 뭐 감정 그런 게 있겠습니까? 있으나 주님에게 대한 욕망이 자기를 돌아보지 안하고, 자기를 꺾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극기할 만한 그 욕망과 모든 인간들의 전통계를 이것을 초월할 만한, 모든 인간의 인간 전체의 비판과 평가를 인간 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강한 욕심, 이것은 뭐 암만 그렇지마는 안 되니까. 암만 해도 이 소원은 이루어져야 되니까.

인간의 모든 관념과 지식을 초월한 이 소원과 자기라는 그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이것을 능가하고 극복한, 자기를 이기는, 자기를 초월한 이 욕망과, 이 자기 초월의 욕망과 이 모든 인간들의, 인간의 비판 지식을 능가한 이 소원, 요 소원이라야 주님 앞에 산 소원이요 이루어집니다.

그것이라야 이루어지지 그것이 아니면 안 이루어집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설교: 백영희 목사(1981. 1. 16. 금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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