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2011.01.09 21:02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제목: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선지자선교회
본문: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서론)

1.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우리 구원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둘 다 구원은 주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셔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두 면으로 받을 수 있으니 하나는 기초적으로 받는 구원이요 하나는 건설적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기초적으로 받는 기본구원은 우리의 죽었던 영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기본구원이요 기초적인 구원이요. 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우리가 힘입어서 우리 심신이 다시 예수님이 건설해 놓은 이 구원을 심신이 받는 것을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은 단일체요 단일성의 것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단번에 받습니다. 영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적 객관 역사로 이 영을 살리는 구원을 하셨는데 이 구원은 단번에 됐습니다. 우리 심신의 구원은 이 심신은 종합체요 모든 집합체기 때문에 이것은 단 번에 이 구속을 받을 수가 없고 중복적으로 수백 수차례를 거쳐서 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은 받은 사람이 이 기본구원의 그 능력과 은혜와 관계를 힘입어서 자기가 현실에서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는 그 방편인 순종을 해서 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구원은 우리가 모르게 이루어졌고, 건설구원은 본인이 알고 이 사실을 자기 심신의 주관이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동할 때에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몰라도 이루어지지 않고 알아도 인정치 안하면 이루어지지 안하고, 알고 인정할지라도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이 구원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마7:24-27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그렇게 이 두 가지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3:10-15에는 보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라,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 그렇게 비유로 했습니다. 이것은 다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들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반석에다가 주초를 놓고 지은 집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마치 법인이 법전과 같이 사용해서 우리 현실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있으니 곧 그 인도를 양심이 받아 가지고 깨달아 가지고 그대로 하는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무제한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그렇지 않고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미리 선포해 놓으신 그 범위 내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 현실에는 내 마음은, 생각은, 소욕은, 뜻은, 행동은 어떻게 하라 하는 것을 성령님이 인도하실 때에 그 인도를 내가 받으면서 또한 성령의 인도인지 악령의 인도인지 우리가 알기 어려운 난제가 거기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인지 악령의 인도인지 그것을 구별하는 데는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신구약 성경 말씀 이 말씀의 법도대로 인도한 것이면 성령의 인도이고 이 성경 말씀에 위반되게 인도하면 그것은 악령의 인도로 우리가 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경 공부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가 열심히 상고하고 익혀 두는 것은 우리 현실에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바로 찾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법인이 법전을 통달하지 못하면 사건이 닥쳤을 때에 그 법대로의 사건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모르면 우리 현실에 하나님의 영감의 뜻을 바로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늘 평소에 공부해서 성경에 이 법규와 은혜와 그 계명과 명령과 요구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익히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뜻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가 늘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반석 위에 지은 집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 하는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 범위 내에서 그 현실 현실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자기가 행동하는 사람은 비유컨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현실에서 이 성경 규범 내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는 받지 아니하고 자기 주관의 인도를 받든지 어떤 사람의 인도를 받든지, 어떤 단체나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나 물질의 인도를 받든지, 어떤 사건들의 인도함을 따라서 자기가 사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다가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나서 살 때에 우리는 영원을 건설하는 사람들인데 이 건설을 영원히 요동치 않는 그 완전무결한 건설을 할 수도 있고, 우리가 건설 같으나 파괴가 되는 멸망을 우리가 건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건설

1)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것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설

우리는 이 건설은 어떤 건설인고 하니,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은 완전히 벗어나는 건설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그런 것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설입니다.

2)하나님의 지성법을 완전히 수행하는 건설

또 하나는 무슨 건설인고 하니, 하나님이 입법해 놓으신 전지자가 입법한 그 지성 곧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되고 지존한 하나님의 그 완전법, 생명법, 자유법,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도 불만 불평 없이 모든 존재들에게 다 생명이 되고, 자유가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완전한 율법이라 자유의 율법이라 생명의 법이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을 준해서 이 법에 정죄 받을 것이 하나도 없이 이 법을 완전히 수행하는 건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건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언행심사가 다 이런 건설이 돼야 되겠고, 자기의 모든 해 놓은 이력들이 다 이런 건설이 되어야 합니다.

3)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을 건설

또 한 가지 건설은 무슨 건설인고 하니, 영원 자존자, 대주재자 이분과 서로 이질 되는 것이 없고, 본질과 본성이 다르지 안하고 이분과 동질이 되고 동성이 되고, 이분의 모든 의사와 소욕과 견해와 평가와 이분과 이분의 계획과 이분의 움직임과 이분이 이루시는 모든 역사와 조금도 배치되지 안하고 이분과 일치되는 그것을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건설인 것입니다.

3. 말씀으로 계시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 진리와 영감이 와서 감추어 있던 것을 우리가 다 알게 됐습니다. 어두움에 싸여 있던 것을 다 드러내서 계시해서 열 계(啓), 보일 시(示) 그 계시인데 계시해 주심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이 계시해 주심을 피 공로 없는 사람들은 받지를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이종교의 창설자들이 인생 문제를 또 금생과 내세의 문제를, 모든 만 사물 문제를, 인간의 생사 문제와 기타의 많은 문제들을 바로 알아볼려고 애를 썼지만 바로 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벌써 알아 놓은 것이 각 이종교들의 그 교경이 되어 있고 그 경전들은 오늘 벌써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그 모든 경문이나 경전들이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는 정반대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왜 삐뚤어져 있는고 하니, 영원전 자존하신 대주재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그분이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시고, 그분이 보존하시고 관리하시고 운영하시는데, 그분을 모르고 모두 다 지식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평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근본이신 그분을 뺐기 때문에 그 모든 사상이나 주장이나 지식이나 논리나 방편이나 종교의 모든 법칙들은 다 삐뚤어진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을 보고 이대로 해서 건설 할려고 하지 않고 각각 다 자기대로 건설을 합니다.

4. 모래 위에 짓는 집

그런데 예수 믿는 이 중생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모래 위에 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짓는다는 것은 반석 위에 짓지 안하고 모래 위에 짓는다 그 말입니다.

반석 위에 짓지 않는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세 가지 큰 진노의 그 죄를 해결 지우셨으니, 1)우리 대신 형벌 받아서 사죄의 공로를 설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또 2)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대행하셔서 설정해 놓으신 의가 있습니다. 또 3)우리 대신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을 이룬 이 화친의 생명의 의가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의(義)

이 세 가지 의가 신인양성일위 되신 주님이 이 일을 이룬 의인데 이는 완전한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도 완전하고, 지능도 완전하고, 모든 계획도 완전하고, 그 속성들이 다 완전입니다.

완전을 신인양성일위가 우리 대신 이루셨는데 이루신 것을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것을 심사할 때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는 완전이라, 이는 의롭다 해서 하나님께서 의로 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의가 이 세 가지의 노를 풀어서 삐뚤어진 것을 완전히 다 소탕시켜 버렸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세 가지 완전을 건설한 이 의인데 이 의를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이 의를 건설하셨습니다.

6.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의(義)

그러면 이 건설한 의의 건설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건설했지만 이 의는 우리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 몫으로 건설했습니다. 그분은 이런 것을 건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신성은 하나님이시오 인성은 아무런 원죄나 본죄가 없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대신 이 완전한 이 세 가지 노를 푼 이 의와 또 완전한 두 가지 하나님의 욕구를 달성한 이 의와 이 둘 달성한 의와 노를 푼 의와 이것을 합해서 세 가지 의를 설정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는 우리 대신 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7. 믿음으로 받는 의(義)

우리의 것인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느냐? 우리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신한 것인 것을 우리가 믿어서 자기 의로 알고 인정하고 이 의를 버리지 안하고 이 의를 이렇게 큰 힘들여서 이 의를 건설해서 입혀 주셨기 때문에 이 의를 자기가 깨닫고 보존하고 이 의를 잘 간직하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 의를 건설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건설한 의는 우리 것이 되고, 대신 죽기까지 해서 건설했기 때문에 이 건설에 아무 공들이지 안한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고, 공들여서 건설해 놓은 의는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4-15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8. 우리의 건설 3가지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건설하는데 몇 가지로 건설해야 되느냐 하면 1)하나님의 노(怒) 세 가지를 완전히 해결 짓는 건설을 해야 되고, 또 2)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어 드리는 건설을 해야 되고, 또 3)하나님과 완전한 친교를 가지는 이 건설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건설입니다. 이 건설이 모든 세상을 다 이기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 통치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고 피조물들을 살릴 수 있는 이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9. 죄의 삯으로 전 인류는 사망

이것을 우리가 너무 어려운데 그만 예사로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세 가지 범죄, 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것은 각자들이 많은 시간과 양심을 써서 생각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 하나 보면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 하나를 먹음으로써 그 죄의 삯으로 전 인류는 사망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아담 하와가 범죄 해서 죽었는데 우리가 왜 죽어?’ 하고 안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하나님의 계약이라 털끝만치도 변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제가 부인해도 죽는 것은 이 죄에 동참이 되고. 이 죄로 정죄 받은 자는 죽고 맙니다. 인생들이 떠들어도 죽지 안하지 못하고, 죽지 않지를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이 법칙 아래에 복종하고 다 사로잡힌다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수 많은 죄, 또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 자율대로 제 주장대로 제 중심 제 위주로 산 그 죄,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그 마귀로 더불어 합작이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노엽게 한 그 죄 이 죄 하나를 우리가 어떻게 대속할 수가 있습니까? 한 죄를 도말하는 데도 우리는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를 도말하면 벌써 멸망 받았기 때문에 죄 도말하고 나서는 남은 여분이 없습니다. 죄 도말하면 다 멸망입니다.

이런데 1)그 죄를 어떻게 도말하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가 있으며, 또 2)하나님의 그 율법의 요구를 우리가 다 어떻게 이행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 율법을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합니다. 억억억 억만 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어떻게 우리가 다 이행을 할 것인가, 또 3)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 된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와 화친을 이룰 수가 있는가?

이것은 도저히 인생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이렇게 온전한 것을 법을 세워놔야 이 온전한 것을 만들 수가 있고, 온전한 법을 세워 놔야 이 법을 이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기업으로 상속시켜 줘야 되지 온전치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온전한 것을 또 줄 수가 없습니다.

10. 거저 공으로 주신 의(義)

이러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은혜를 다 상속시켜서 주는 데에는 온전한 자가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온전한 자가 되어 지는 데에는 온전한 조건들이 있어서 그 조건들에게 다 맞아야 온전한 자가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속하셔서 이루어 놓은 이 의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완전무결하다 인정받아 통과된 이 의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의는 순전히 우리는 알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신인양성일위로서 대신 이 의를 설정해서 이 설정한 완전한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 통과한 이 의를 우리에게 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공으로 줘서 이 의를 우리 중생된 영이 중생되기 전에 이 공로를 하나님께서 입히셔서, 지공하신 분이 이공로를 입혀서 우리 죽은 영을 살렸지 이 공로를 입히지 안하면 우리 죽은 영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두움이 없고 하나도 불의함이 없는 깨끗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대속의 의가 아니고 범죄 함으로 죽은 그 영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11. 중생된 영(靈)과 심신의 구원

그렇기 때문에 살리는 데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것을 안 살릴 수 없고 살리는 데는 당신이 이것을 대신해서 완전한 의를 건설하시기 전에는 이것을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가 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의를 건설하시고 이 의를 우리 영에게 입혔을 때에 우리 영은 죄 없는 영이 됐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공로로 죄 없는 영이 됐고, 의로운 영이 됐고, 하나님과 친밀한 영이 되어서 영생하는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영은 이렇게 받았지만 우리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하나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객관 능력으로 이것을 살릴 권리가 없습니다. 왜 권리가 없는고 하니 우리의 영육으로 된 사람이라 영은 주격이요 이 심신은 피소유격인데 주격인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주격이 뚜렷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월권적으로 그의 심신을 직접 관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 심신을 살리는 운동을 하지 직접 하지를 않습니다. 롬8:16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셨으니,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심신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가르쳐 주면서 자꾸 깨우쳐서 구원 할라고 애를 쓴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해주고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지금 너무도 교리적으로 희미해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다 연구를 했지만 여기에 대해서 뚜렷이 판명을 내어서 명료하게 증거 하지는 안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모두다 뒤숭뒤숭 하고 모두 확정을 짓지를 못하고 흐린 가운데 있는 어려운 교리입니다.

12. 완전한 의로운 영(靈)

우리의 영은 완전한 의로운 영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의인이라 말씀했습니다. 로마서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로마서1장 16절 이하에는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그 의인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 의인된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은 완전한 의인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의라면 어떤 공로를, 어떤 경력을, 어떤 이력을 가진 완전한 의인가? 그 이력은 곧 여섯 가지 완전한 이력을 가진 의의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셔서 대신 행하시므로 우리 영에다가 입혀서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공로를 입음으로 그 공로로 인해서 우리 영은 하나님 앞에 의의 영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우리의 영은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완전히 자유 합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이랬는데 이제 우리 영은 이 하나님이 대신 이루어 주신 완전한 의를 입었지만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이것은 입지를 못했습니다. 입지를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에게 입힐 때에 같이 입혀 줬으면 좋을 터인데 이렇게 생각하지만 영은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살아날 힘이 없기 때문에 객관 역사로 이것을 살려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살렸지만 일단 영을 살렸으니까 그 사람의 주인이 살았다 말입니다.

13. 주격의 영을 통한 소유격의 심신 구원

그 사람의 주격이 살았으니까 그 주격을 통해서 그 소유격이 살아야 하나님이 월권하지 안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침략하지를 안하는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침략하는 것이 되고 그 지공법에 걸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일을 하지 못하는고로 이 살리기 위해서 성령과 진리가 이 공로를 가지고 이 중생된 영과 한꺼번에 같이 합동해서 이 심신을 구원할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오늘 재세 동안의 단계입니다. 오늘 이 설교 말씀하는 것도 이것이요, 땅 위에 믿는 중생된 사람들이 구원 얻을려고 노력하는 것도 다 이 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신이 이 구원을 지금 받아 가질려고 애를 쓰는 것인데, 이 구원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가치 있는 완전한 구원인데, 이 구원을 받아 가질려고 하는데 이 구원은 그러면 우리 심신이 노력해서 이 구원을 조성하는가? 이것을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조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성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조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조성해 봤자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가면 다 바싹 타 버리고 말지 못 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가 이루어 놓은 완전한 의라야 하나님의 공심판에 걸리지 안하고 영생을 할 수가 있고 무궁세계 걸리지 안하지,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할 만한 완전성을 가지지 못하고 불변성을 가지지 못하고, 영원성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다 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가적으로 실력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완전성이 아닌 영원성의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14. 성령님과 진리와 우리 영이 가지고 오는 예수님의 대속공로

이러기 때문에 우리 심신이 지금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 영은 받았지만 우리 심신은 받지 못했는데, 성령과 진리와 우리의 주격인 영이 이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공로를 성령님과 진리와 우리 영이 이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지금 오는 것입니다. 올 때에 이 공로를 우리가 받아 가지면 됩니다.

1)성신의 감동 영감

그런데 이 공로 이루어 놓은 그 실상, 공로 그 자체. 공로 그 본체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인데 그것을 그 본체를 우리에게 보낸, 이 본체를 그대로 가지고 온, 마치 비유는 다 안 되기기는 안 되지만 어떤 형체를 사진기에다 대고 촬영을 하면 그 형체와 꼭 같이 되어 지는 것과 같이, 어떤 그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하나님의 의인 그 의를 그대로 종류도 빠지지 안하고, 모양도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의 그것을 솔빡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건설한 하나님의 의 그 의를 솔빡 그대로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줄라고 그 의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 뭐이냐 하면 영감입니다. 성신의 감동입니다.

성신의 감동은 예수님의 건설해 놓은 그 의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 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 것을 가지고 증거 하리라’ 하셨습니다.

2)신구약 성경 말씀

예수님의 공로, 대속하신 이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것은 내 대신 해서 이 신인양성일위가 건설해 놓은 의이기 때문에 이 의는 네 의니까 이 의를 네가 받아라 하고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의를 가지고 온 분이 누구냐? 성령이 가지고 오셨습니다. 또 성령이 가지고 온 이 의가 성령이 가지고 오셔도 우리가 둔하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가 접촉하는 것이 심히 어려워서 접촉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의를 우리가 접촉하기 쉽도록 가깝게 우리의 이 피조물 되어 있는 이 피조물 된 우리들에게 좀 가까운 근질적으로서 가까운 유사의 동질적으로 우리가 가까이 맞이할 수 있고 접할 수 있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이 의가 우리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건설해 놓은 그 의가 성령입니다. 그릇에 담아 온 것처럼 성령이 이것을 그대로 담아서 우리에게 와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신구약 성경 문서에다 담아 가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와 있는 고로 이 신구약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곧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구약 성경은 이것은 뭐인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설정해 놓은 의가 우리에게 왔는데 이 의가 영감으로 우리에게 왔고, 영감으로 온 것보다도 우리가 더 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신구약 성경 진리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이 진리는 곧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의인데 이 의는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심판도 완전 통과한 이 의인데 이 의는 곧 우리의 것이요 내 것입니다.

15. 우리 믿음의 행위

그러면 내 것인데 이 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신인양성일위가 나 대신 만들었습니다. 내 대신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것이 된 것입니다. 내 대신 만들었기 때문에 이 공로의 의를 자기 것 만든 사람은 자기는 주의 것입니다. 이 썩은 것 더러운 것 이것이 주의 것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값을 내고 사라, 값이 없어도 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대속하신 그 대속의 공로와 우리 것과는 될 수 있습니까? 비교가 안 됩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지만 예수님이 대신했기 때문에 나만 당신에게 맡겨서 이것이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의 공로는 내 것 되고 나는 당신의 것 되고 이렇게 바꾸어서 가지는 이것이 이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에게 이제 말씀으로 왔는데 이 말씀에 보면 여러 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대속이 성경에 들어서 왔는데 이 성경이 바로 예수님이 대속하신 대속한 그 실상 그것입니다.

16. 대속의 피는 영감과 진리에게서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영감에서 나왔는데 영감 그것이 실상이오. 또 영감은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설정한 그 공로에서 나왔습니다. 이런데 우리에게 나온 것이 이렇게 거쳐서 나왔지만 실상이라 말입니다.

실상의 이 말씀 가운데에는 세 가지 노를 푼 사죄의 의가 우리에게 담겨 온 이 성구가 있고. 또 대행의 칭의와 대화친의 생명이 담겨가지고 온 성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세 가지 노를 푼 것이 이 성경에 담겨 왔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 세 가지가 이 성경에 우리에게 담겨서 왔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를 푼 사죄의 의가 담겨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담겨 왔느냐? 여기서 성경에 ‘이것은 네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 있습니다. 이것을 다 말할라 하면 너무 복잡해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조용히 가서 얼마든지 깨달을려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1)예수님의 대형 사죄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죄의 세 가지 노를 푼 이 대형으로 사죄된 사죄의 이 의가 이 성경 가운데에 담겨 가지고 왔으니 성경에 곧 이러지 말아라, 하지 말아라, 말아라,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들이 담겨 있으니 이것은 뭐이냐? 예수님이 대형으로 진노를 다 해결 짓고 사죄해 주신 이 사죄를 우리가 입었기 때문에 사죄 입은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을 하면 내가 사죄를 벗어 버리는 게 되고, 다시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안 하면 사죄 입은 그대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가진 그 사죄를 버리지 안하고 사죄를 내가 잘 보존하고 사죄 받은 내이기 때문에 나는 죄 없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로 내가 있는 것이고, 하지 말라는 것 하면 죄 있는 자가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죄 없는 자로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해서 죄 없는 자로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현실을 주시면서 이 현실에서는 이런 것 하지 말라, 저 현실에서는 저런 것 하지 말아라, 또 이 현실에서는 이런 것을 해라, 이 현실에는 이런 것 해라, 현실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 섞여 있는 것, 하라는 것이 둘이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인 것, 이 여러 가지가 이 현실에서는 복잡하게 섞여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그것이 주님이 사죄를 내게 주셨으니 사죄 받은 그대로 다시는 더러워지지 안하고 내가 사죄 받은 자로 내가 있는 것이고, 사죄 받은 이 공로를 가지고 나는 사죄 받아 나는 죄 없는 자가 되어서 있는 것이고, 다시 거기서 또 범죄 했으면 또 죄 있는 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 공로를 그 시간에 버렸기 때문에 다시 입어야 됩니다. 다시 얼른 회개하고 또 주님의 사죄를 다시 입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현실에서 이것은 주님이 나에게 입혀 주신 사죄를 내가 벗지 않게 하는 이 성구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국기배례가 와서 학교에서 국기배례 안 하면 퇴학을 시킨다 벌을 준다 이렇게 큰 형벌이 있었습니다. 뚜드려 맞기도 하고 그때 맞아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살아났지만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데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성경에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니까 성경 때문에 내가 맞게 되고 성경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면 그 성구는 뭐 할라고 줬느냐? 그 성구는 사죄 받았으니 네가 다시는 사죄를 벗지 아니하고 사죄 받았기 때문에 죄 없는 자로 그대로 네가 살아라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자로 살라고 하니까 국기배례에 절을 안 해야 되는데 국기배례를 하면 죄 있는 자가 되고 마니까 국기배례 절 안 할라고 하면 맞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퇴학도 당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사죄를 내가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내 죄를 없애 사죄 주셨는데 이 사죄를 내가 고통당한다고 다시 이 사죄를 벗어 내버리고 다시 죄를 입을 수가 있겠느냐? 고통을 당한다고 죽는다고 이 사죄의 공로를 벗고 다시 죄를 덮어 쓸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모두 다 하지 말라는 것을 나는 안 할라 하는데 세상은 하라고 덮어씌우고 강제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입혀 주신 이 사죄를 벗어라고 졸려대는 것입니다. 사죄를 벗고 이제 옛날과 같이 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우리하고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죄인으로 나타나지 안하고 사죄 이것을 벗지 안하니까 세상하고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안 할려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안하고 이렇게 할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자 되는 것 아닙니다. 국기배례 하라는 국기배례 안 했으니까 죄를 안 지었습니다. 죄 안 지었지만 그 안 지은 것 그것 하나 가지고 하나님의 지공의 심판에 가서 죄 없는 자로 통과가 되겠습니까? 거기는 억억억 억만 가지도 넘는데 그것 한 가지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아니나 다만 예수님께서 나를 대형해서 사죄를 입혔기 때문에 나는 사죄를 다시는 나는 벗을 수가 없다 하는 것으로서 입혀 주신 사죄를 내가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것은 됩니다. 입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형의 사죄 입은 자를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기까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계명을 어기라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라고 해서 안 할라 하다가 우리가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죽음이 무슨 죄 없는 무죄의 의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대신 무죄를 건설해 놓은 이 의를 내가 입고 그 옷을 뺏기지 안하는 것입니다. 이 의를 벗기지 안한 것입니다.

계22:14에 ‘그 두루마기를 벗지 않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이 의를 벗기지 안한 것입니다. 또 ‘그 두루마기를 더럽히지 안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사죄를 주셨는데 이 사죄의 공로를 내가 입어서 무죄한 자 된 것이 금방 또 죄 지어 더럽히고 더럽혀 놓으니까 옷이 얼룽덜룽 이래서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자들도 있고 깨끗이 입은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기를 빤 자들이 복이 있다’ 그 말씀은 주님의 이 사죄와 칭의의 이 대속의 공로를 깨끗이 입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 두루마기를 빨기는 어디다 빱니까? 우리 주님의 공로에 빨아야 됩니다. 다시 이제 못 믿던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고, 이 시간부터라도 믿고 예수님이 내게 대해서 대속하신 이 의를 확실히 믿고 이 의를 더럽히지 안하고 내주지 안하고 이 두 가지, 사죄의 의와 칭의 이 화친의 의 이 의를 내가 입고 있으면 내가 믿음으로 빠는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빨고, 믿는 증거가 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증거가 뭐인가? 믿는 증거는 행동이라 그 말입니다. 행동이 의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고 믿는 증표라 그 말입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의 그 표적이 뭐이냐 하면 행동이라 그 말입니다. 표적이 행동이라 말입니다.

이래서 이 사죄를 우리가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것이고, 성경 말씀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성경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데 하라고 명령하신 그대로 내가 실행을 한다 말입니다. 그대로 내가 실행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 내가 실행을 할려고 하니까 세상이 실행을 못 하게 합니다.

2)예수님의 대행의 칭의와 대화친의 화목

내가 실행을 ‘이대로 하라’ 하는 그것은 네가 이제는 의인이 됐고 하나님과 화친된 자가 됐으니까 다시는 네가 의인이 죄인 되지 말아라, 너는 의인이니까 너는 의인 생활하고 네가 의인이 의인으로 살고 의인이 다시 죄인 되지 말아라. 의인이 죄인 되지 말고 의인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 계명은 의인 생활을 하라 그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하는 그것은 의인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 생활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할려고 하면 여러 가지 애로가 있어도,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대행해서 칭의를 입혀 주셨고, 죽기까지 하셔서 대화친을 해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셨으니까 내가 무슨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안하고, 행해야 될 하나님의 명령을 살기 위해서 이것 행할 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또 하나님과 화친된 이것을 내가 세상에서 안 죽기 위해서 이 화친된 것을 내가 파괴하고 양보하고 이럴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3)사죄와 칭의와 화친

그러니까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말씀은 두 가지 종류인데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이 있는데 하지 말라는 것은 사죄를 입고 있는 증거요, 또 하라는 것은 칭의와 화친을 입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사죄도 입고 있고 칭의와 화친도 입고 있는데 이것만 양보하지 안하면 이걸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입고 있으면 이것을 하지 안할려고 죽기까지 충성해서 했으면 우리 충성된 노력으로 이 공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내가 안 벗을려 하고 세상은 벗길려고 애를 쓸 때에 나는 벗지 안하고 이것을 보존하고 보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됐으니, 나는 하나님과 화친자 됐으니, 나는 죄 없는 자 됐으니,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 의인됐기 때문에 나는 의인으로 살지 의인이 나는 변질되지 않겠다 하는 그것입니다.

17.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순종하는 자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 그 말은 행하는 것은 뭐이냐? 두 가지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것이 행하는 것이요,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행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하는 사람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자와 같다 하셨습니다. 이 주초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이 생활을 가지고 자기를 건설하려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1)하나님의 노를 푸는 건설이 자기 건설이요, 2)하나님의 율법 완수가 자기 건설이요, 3)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화목의 화친을 가지는 것이 자기 건설이니까 이 건설을 할 때에 ‘반석 위에 주초를 놓은 자와 같다’ 이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은 자기 건설할 때에 비유컨대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은 자와 같다’ 그 말씀은 자기 건설하는 데에 예수님이 대속으로 건설해 놓으신 그 건설에다가 기초를 잡고, 대속하신 그 건설을 근거로 삼고, 기초로 삼고, 뿌리로 삼고, 원인으로 삼고 거기다가 뿌리 둬서 그 대속하신 그 대속을 자기 것으로 삼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18.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는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인고 하니 이 세상에 이런 좋은 일 저런 좋은 일, 또 비가 내리면 그 비가 들어 나중에는 창수가 되는 것입니다. 창수가 되고 또 바람이 불면 나중에 집에 가서 부딪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 때에 오늘은 이 재미 내일은 저 재미, 사람이 이상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죽기는 싫어하면서 날마다 시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죽기는 싫어하면서도 씨를 심어놓고 ‘보자 났나 안 났네 언제 날 것인고’ 또 보고 또 보고 이렇게 죽기는 싫어하면서 자기의 욕심으로 인해서 자기의 계획이나 모든 소망은 빨리 빨리 이루어지기를 자꾸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비오는 것이라 말입니다. 재미라 말입니다. 너희들이 재미 재미 암만 재미가 있어도 그 재미의 끝에는 다 사망이 오는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의 멸망이 오기 때문에 그때는 다 헛일이라 말입니다.

19.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는 사람은, 다 같이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 꼭 같이 재미보고 이 세상에 농사짓고 장사하고 가정생활하고 자녀교육하고 이것저것 재미있는 이런 생활 저런 생활 하지만 마지막에 세상을 떠나 죽을 때에도 그는 넘어지지 않는다. 주초를 반석 위에 놨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소망삼고 그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할려고 애쓴 것이지 제가 무엇을 건설할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할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 모든 노력은 하나도 헛되지 안하고 그것은 다 완전이 되어 지고야 마는 것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20. 주초를 모래 위에 놓은 연고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주초를 모래 위에 놓고 지은 집과 같다 하셨습니다. 모래라는 것은 무엇이냐? 모래는 예수님의 이 대속을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성령이 가져왔고, 이 신구약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 진리대로 꼬박꼬박 하는 것은 이 대속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 대속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이 대속을 자기가 입고 벗지 안하는 이 일을 했지만, 이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이 말씀대로 하면 대속을 보수하는 것이 되고 대속을 벗지 안하는 것이 되고 이 사죄의 공로와 칭의의 공로와 화친의 공로를 벗지 안하고 사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하지 안하고, 이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했으니까 제 생각이라는 모래 또 남편 생각대로 했으니 남편 생각의 모래, 또 자기 주장대로 했으니까 자기 주장의 모래, 또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국가의 모래, 사회의 모래, 돈 모래, 지식 모래, 명예 모래, 행락 모래, 취미 모래, 또 자기 전공 모래, 별별 이 세상에 있는 그 모래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 대속의 의를 우리에게 갖다 주는 이 의를 보수하는 이 방편을 하지 안하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이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하는 그것을 토대로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오늘은 돈을 토대로 삼았고, 나는 지금 배경이 든든한 세상의 고관 대작을 토대로 삼고, 사물들과 인간들과 자기나 모든 땅 위의 것들을 다 뿌리로 삼아서, 그것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밑바탕을 삼아 가지고, 그로 인해서 이런 것 저런 것 일생 동안 자기 건설이라든지, 자기 행위 건설이라든지, 자기 행복 건설이라든지, 자기 명예 건설이나 지위 건설이나 영광 건설이나 행락 건설이나 행복 건설이나 어떤 건설을 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모래와 같습니다.

모래와 같기 때문에 이 물이 술렁거리니까 모래 그놈이 쏵 씻겨 내려가 버립니다. 저 물이 술렁거리니까 모래가 떠내려갑니다. 이 시대가 지나가니까 그것 다 헛일이고, 시대가 달라지니까 또 헛일이고, 세월이 지나가니까 헛일이고, 제가 늙으니까 헛일이고, 정부가 깨지니까 헛일이고. 정권이 바꿔지니까 헛일이고. 이 시간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서 늙으니까 헛일이고 마지막에 죽으니까 싹 다 무너져서 헛일이라 그 말씀입니다.

(결론)

1. 예수님의 대속공로 보수

그러기 때문에 인생아! 기독자야!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자야 네가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 되셔서 죽기까지 대속하신 이 공로를 설정했는데 이 공로를 네가 보수하고, 이 공로를 네가 내어 주지 않고 뺏기지 안한 이 공로 보수의 이 방편으로 네가 살지 아니하고, 네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보수하는 이 공로를 네가 벗지 안하고 이 공로를 뺏기지 안하고 대속하신 공로를 내가 거머쥐고 뺏기지 안할려고 이 방편으로서 말씀 순종하는 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안하고. 네가 이 세상에서 이런 것을 원인으로 삼고 저런 것을 근거로 삼고, 이런 것을 밑바탕으로 삼아 가지고, ‘나는 공부한다’ 뭐 공부 네까짓 것 공부 가지고 암만 해 봤자, 돈 가지고 암만 해 봤자, ‘나는 이 사람 좋게 하면 된다’ 그 사람 암만 좋게 해 봤자. ‘이 정권자 좋게 하면 된다’ 정권자 좋게 해 봤자. 이 세상 과학을 좋게 해 봤자, 네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뿌리로 잡아도 그것은 훌렁훌렁하면 다 날아간다. 세월만 지나가면 오늘에 정권자 됐던 그 정권 바꿔지면 헛일이고, 오늘에는 막 꽃같이 미인 같지만 실뜩 지나가니까 그만 누루 칭칭하게 아주 더럽습니다.

그러기에 딸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있으면 딸은 밝은 보름날 같다 이렇지만 어머니는 송장 같아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내나 그것이 송장 됩니다. 그게 송장돼! 이러기 때문에 아름다운 딸과 아름다운 청년이 같이 앉았는데 그 아름다운 청년과 에미 애비의 그 송장과 꼭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같이 보기 때문에 그게 내나 송장이요 그게 그것이기 때문에 별 것이 없습니다.

2.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이러기 때문에 벧전1:24-25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세세토록 없어지지 안합니다.

왜? 이 말씀은 왜 없어지기 않습니까? 내가 이 말씀대로 행한 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행함으로써 그 공로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 말씀대로 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이 공로를 내가 뺏기지 안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죽자 살자 하고 애를 쓰는 것은 내가 행동하는 공로 그것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 신설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신설해서 내게 은혜로 주신 그것을 내가 벗기지 않는 것이라 말입니다. 요 진리를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것을 오늘 너무 분명히 하지 안 해서 다 혼돈돼 있습니다. 이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3. 말씀을 어기는 자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이 말씀을 어기는 것은 자기가 임시 임시 생각하기를 이 말씀을 어겨서 주일을 어긴다. 계명을 어긴다, 율법을 어긴다, 말씀을 어긴다, 양심을 어긴다, 이렇게 어기는 것은 그때그때 이것은 재미가 있다, 이것은 참 재미가 있다, 이것은 참 깨소금 같다 해도 깨소금 같은 뒤에 네가 봐라! 무슨 재미가 있는가? 깨소금 같은 뒤에 봐라! 세상 것은 시작할 때는 재미가 있어 죽을 지경이지만 이제 딱 끝나고 난 다음에 아무 재미가 없어! 돈도 그렇고 권세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어리석은 자와 같이 땅 위에 내가 이것저것 이것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거는 모래와 같이 세월이 지나가면 다 홀러 떠내려 가 버린다. 마지막에 네가 죽을 때 되면 다 떠내려가고 하나도 없고 네가 일생 동안 건설한 것은 꽝 넘어 가고야 만다!

4. 의인이 죽을 때 할렐루야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때는 다 우는 것이오. 왜 우느냐? 우는 것은 제 한 일이 헛일이기 때문에 울지 왜 의인이 죽을 때 왜 웁니까? 의인이 죽을 때 할렐루야 부르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과연 이 하지 말라는 것 안 할라 하고 하라는 것 할라 하는 생활이 어려웠지만 이 죽음이 있기 때문에, 무궁세계가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하지 누가 죽음을 놀랩니까? 이러기에 성도들은 순교 앞에서 기쁘고 즐겁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되새겨서 어리석은 자와 같이 모래 위에 세우지 마십시오.

5. 지금 이 기쁨이 뭐이냐?

내가 지금 기뻐하는 이 기쁨은 이것이 뭐이냐? 이 기쁨은 반석이냐? 이 기쁨은 대속하신 완전한 의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기쁜 것이냐? 인간 둘이 만나서 기쁜 것이냐? 지금 행복이다 다행이다 든든하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든든한 것이냐? 이것이 돈이나 어떤 정권자의 정권 가지고 든든한 것이냐? 아이구! 그까짓 것은 모래위에 것이기 때문에 절단난다!  이것을 판단만 해도 사람은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셔서 이 모로 저 모로 우리를 살릴려고 애를 쓰고 계시는데 우리 마음이 강퍅해서 듣지 안하니까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6. 씨 뿌리는 비유

그러므로 이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오전에 씨 뿌리는 비유를 설교했습니다. 마13:3-9에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솟아나는 그놈 죽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또 내가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가족 문제가, 친구 문제가, 사업 문제가, 세상 모든 염려와 재리 물질 이런 것들이 들고 나서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살려 할 때에 살지 못하게 하고, 안 할려 하는 것을 하라 하고, 이렇게 할 때에 그런 것을 파멸시키는 것이 어렵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극복해 이긴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 사람에게 두려울 것이 뭐 있습니까, 그까짓 것 온 세상은 발아래 밟아 버렸는데 말입니다.

이래서 세상 모든 말들 때문에 우리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렇게 두려운 말씀을 들어도 두렵지 안하고, 간절한 말씀을 들어도 간절치 안하고, 여기 소망을 마구 내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 소망할 말씀이라도 이 소망도 생겨지지 안하고, 간절히 소욕도 생겨지지 안하고, 심판도 두렵지 안하고, 그 눈앞에 있는 이 더러운 땅에 있는 욕심 그것만 가득 차 그것만 보고 마니까 죽을 자가 아니냐 그 말입니다. 우리 눈을 빼 버려야 됩니다. 이런 눈은 빼 버리고 참 눈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세 가지 적으로 더불어 싸워서 우리는 옥토에 뿌린 씨가 돼야 됩니다.

○설교: 백영희목사(1986, 5, 25, 주일오후)/ 정리: 김반석목사(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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