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15:11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1985. 11. 1. 밤
본문 : 마태복음 18장 5절∼10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다음 주일 공과로 가르칠 말씀인데 반사들이 아무래도 금요일 밤에 많이 참석했을 것이라서 다시 공과 공부를 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그 속에 깊은 뜻을 모르고 학생들에게 가르칠려고 하면 말은 해도 그 학생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선생들이 거게 대한 진리를 깨닫고 가르치면 그 학생들에게 깨달음이 전해지고, 또 반사가 그대로 실행하면서 전하면 그 실행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또 반사들이 그런 사람이 돼 가지고 전하면 사람이 되어지는 그 성화되는 것이 학생들에게 전해집니다. 물론 위에서 전하는 사람을 따라 밑에 받는 사람이 그 양은 틀립니다 만일 전하는 사람이 백 프로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전함을 받는 사람은 그저 한 이삼십 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하는 사람이 자꾸 자신을 점점 온전케 하는 것이 듣는 자에게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좋은 방편입니다. 그와 반대로 잘못된 것은 전하는 사람이 잘못됨이 한 삼십 프로가 있으면 그 전함을 받는 사람은 잘못됨이 백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고 받는 사람에게 좋은 것은 전해지는 그 양이 적어지고, 적어지나마 있으면 고것이 양이 적어도 전해집니다. 또 잘못된 범죄나 그런 것은 전하는 사람에게 적은 양이 있어도 배우고 받는 사람에게는 많은 양이 거기에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가르침 받는 자에게 더 크게 불어서 그에게 역사하고, 옳고 좋은 것은 그 양에 줄어져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반사 선생님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자신들이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변화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이렇게 거듭 거듭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 그렇게 끝을 삼지 말고, 목표를 삼지 말고, 한 번 듣고 두 번 듣는 데서 깨달음도 점점 견고해지고 거게 대해서 믿는 것도 더 확고해 지려니와 자신이 실행하는 그 실행에 대한 강한 소원의 뜻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도록 해 주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이와같이 되지 못한 그런 것을 이 시간에 이 말씀과 같이 되도록 본인이 노력을 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말씀대로의 지식도 가지고 이 말씀대로의 행위도 가지고 이 말씀대로의 사람으로 성화되는 이 은혜를 점점 견고히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들어서 아는 것으로만 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정죄하는 심판의 율법이 되지 다른 것은 되지를 않습니다.
제일 처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 그래 놓고 고다음에는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범죄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다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 죽이는 것이 그게 도리어 낫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주님이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지마는 그 중에도 믿는 사람을 사랑하라 하는 것을 여게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최고의 법을 말씀하실 때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그다음에는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그렇게 이 두 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야고보서에는 최고의 율법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최고의 율법이라, 최고의 율법이라는 것은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제일 주님이 원하시고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뭐인고 하니 우리의 전부를 다 기울여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라니까 잘못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러면 사람 같은 무슨 이기주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당신은 완전자시요, 완전자시요 또 생명이시요 참된 지능이시요 참된 평강과 쾌락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것은 우리들이 옳고 바른 거, 참 행복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요, 영생을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요, 우리들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완전이시기 때문에 그 완전을 사랑함으로 완전한 그 행복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완전자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이 그이에게 도달하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이, 그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분에게 도달하지를 못합니다. 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비유컨대는 빗에 거하십니다. 라 이십니다. 빛이시기 때문에 우피가 아무리 의로운 일을 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이래 해도 그것은 우중증한 그늘과 같습니다. 그늘. 그늘과 같고 그림자와 같습니다. 우중충한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하나그에게 가까이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서 당신이 그 사랑을 당신의 본체에 영접할 수가 없고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완전이시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은 당신을 기뻐하고 당신의 것을 기뻐하고 당신의 법을, 법도를 기뻐하고, 당신의 사상을 기뻐하고 당신의 주장을 기뻐하고, 당신의 뜻을 기뻐하고, 당신의 가진 모든 속성을 기뻐하고, 당신의 역사를 기뻐하고 하는 것은, 피조물 풍에 하나님 본체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제일 완전하고 온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걸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당신이, 피조물에서는 없는, 당신의 본체 다음에는 당신의 역사하심이 이 피조물에 없는 제일 완전이기 때문에 그 완전을 좋아함으로 우리들이 멸망하지 안하고 우리가 영생하고 우리들이 점점 행복되기를 원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사팡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인고 하니, 당신은 무한히 우리보다 크신 분이시요 또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인고 하니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무능자가 전능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그 완전하고 온전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의심하지 안하고 거부하지 안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슷하기는 비슷하지마는 이제 어린 아이를 낳아 놓고 그 부모가 기를 때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그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냐? 그 아이가 부모를 사랑해서 뭣을 대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봉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와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거는 할 힘이 없습니다. 다만 그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전적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분이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그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을 우리가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그 갓난 어린 아이가 세살 먹을 때까지는 부모에게 도움이 없을 수 없고 순전히 부모만 바라고 부모의 은혜를 바라고 은혜를 받고 그 은혜가 아니면 못 살겠다고 그에게만 속하여 순전히 부모의 은혜를 받을 때, 은혜를 받을 때 그때의 삼 년 동안, 부모만 전적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모든 걸 맡겨 놓고 그분의 주시는 그것을 삼 년 동안 어린 아이가 받아서 누리는 그것이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사랑을 받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 학자가 말하기를 부모가 아무리 돈을 벌어 가지고 공부를 시키고 뒤에 가서 뭐 많이 자녀를 위해서 참 수고와 희생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세살 먹을 때까지 부모를 사랑한 그 값이 다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부모를 기쁘게 한 그 댓가가 되지를 못한다, 삼 년 동안 부모를 기쁘게 하고 좋게 하고 만족케 하는 그렇게 한, 삼 년 동안 부모를 기쁘게 즐겁게 한 그 댓가가 안 된다, 아무리 자녀를 그 후에 많이 봉사하고 아주 희생해서 길렀다 할지라도 벌써 삼 년 동안 자라면서 부모를 좋아하고 부모를 기뻐하고 부모를 기쁘게 하고 부모에게 은혜 받은 그 댓가만 하면은, 다 삼 년 동안 부모를 기쁘게 좋게 즐겁게 부모를 그 위한 그 댓가가, 삼 년 동안 그것만 하면 뭐 부모가 자녀를 암만 잘 길러도 그 댓가가 다 된다, 삼 년 동안 부모를 기쁘게 한 그것만 하면은 자녀를 기른 그 대가가 다 된다 그렇게 심리학자들이 말한다는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참 부모가 그 자녀의 사랑으로 만족합니다. 세 살 먹을 때까지는 만족합니다. 불만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만족하고, 그 이상 더 없기 때문에 만족하고 그저 뭐 어떤 수고를 한다고 해도 마음에 수고가 되지 아니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부모를 사랑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가? 순전히 부모에게 받는 것입니다.
꼭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신다 그 말은 그 세 살까지의 그 어린 아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전적 맡겨 놓고 좋아하는 거와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 그 생명을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의 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또 당신이 주시는 지혜를 우리가 귀하게 여겨서 달게 받고, 능력을 달게 받고, 또 모든 축복을 달게 받고, 영광을, 쾌락을 달게 받아서 당신이 우리에게 온전한 것을 주시는데 주시는 온전한 것을 지체하지 안하고 잘 받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좋아하신다 하는 말이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하나님 아버지께서 변화산상에서도 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도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러면, 그 말은,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그것은 그 뒤에도 모든 성경을 다 들춰 보면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제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 그 사랑을 말했는데 그 사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제일 잘 받고, 제일 잘 받고 많이 받고 조금도 틀림없이 다 받은 그것이 뭐이냐?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시고, 둘째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이래서, 여게 어린 아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제일 작은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어린 아이라 말은 나이가 어려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제일 작은 자, 제일 작은 자를 가리켜서 어린 아이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는' 영접이란 말은 대우라 말입니다.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함이요' 하는 그 말씀은.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영접한다 말은 대우한다 그 말입니다. 대우한다. 그러면, 사람에게 대우하는 것은 바로 직접 주님을 대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보면은, 모든 의인들이 세상에서 의로운 생활을 하면서 주를 위해서 모든 형제에게 봉사 생활 또 희생 생활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 전도하는 것이라든지 다른 사람을 참 구원해서 영육이 복되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수고하는 것은 그 수고하는 것이 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되는 줄 알고 주를 위해서 모든 형제들에게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지마는 이다음에 심판 앞에 가서는 모든 의인들이 다 놀랍니다. '내가 이렇게 배 고플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목 마를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이렇게 네가 대접하고 봉사하겠다' 이라니까 의인들이 말하기를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랄 때에 '내가 진실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나의 소자 중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 그러면, 의인들이 다 주님을 위함이 되는 줄 알고 땅 위에 사는 동안에 형제를. 주를 위함이 되는 줄 알고 주를 위하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했지마는 하늘나라에 가서는 주님이 이렇게 당신에게 직접 한 것으로서 이렇게 하실 때 모두 깜짝 놀라고 아무리 주를 위해서 형제에게 한 것이 주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이렇게 계산도 대고 이런 지식도 가지고 있었지마는 그렇게 바로, 형제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직접 한 것이 백 프로 고렇게 되는 줄을 다 몰랐기 때문에 다 놀래서 말한다는 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주님을 사랑함으로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래서, 주님과 형제, 주님과 믿는 사람은 고만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이렇게 보고 우리가 살 수 있을 만치 이 일을 자꾸 연습을 하는 것이 대단히 우리에게 구원에 유익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 저런 것으로써 자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직접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될까?' 이것을 자꾸 이렇게도 맞춰 보고 저렇게도 맞춰 봐서 우리에게 자꾸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져야 되겠습니다. '아, 과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직접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형제에게 나쁘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나쁘게 한 것이다. 형제에게 좋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에게 좋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로 보는, 하나로 보는 이 관념과 이 인식과 이 습성이 우리에게 꽉 배겨야 합니다. 이래서, 참 형제를 대해서 할 때에 바로 주님을 대해서 하는 것으로 나에게 직접 실상으로 느껴져서, 형제에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하는 것으로 느껴져서 주님에게 하는 거와 자기 주관이나 자기 감정이나 이 모든 면에 믿어서 다름이 없는 이런 느낌을 가지도록 이렇게 자꾸 연습을 해서 이런 성화를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 우리도 자기가, 자녀라도, 자녀 중에도 뭐 나 가지고, 나 가지고 고만 잘 무성하게 잘 자라고, 또 공부하는 것도 뭐 공부해라 뭐 이렇게 애쓸 것 없이 고만 공부도 척척 잘 하고, 또 밥만 먹이면 고만 자라고 이렇게 그 자녀가 참 부모에게 애 안 먹이고 공 안 들이고 쉽게 잘 자랐습니다.
쉽게 잘 자랐으니까 그 아들은 그거는 참 아주 정금 같은 아들이고, 아들 하나는 낳아 났는데 이게, 먹지도 못하지, 공부도 못하지, 또 몸은 굉장히 약하지, 거기다가 또 병신이 돼 가지고서 뭐 얄궂도 안하지 이래 놓으니까 그 병신 고 아이 하나 기른다고 다른 아이 뭐 참 열 기르는 것보다도 더 공이 더 들고 밤낮 고생하고 밤낮 눈물 짜고 고통하고 이랬습니다.
이랬으면 그 부모가 여러 자녀가 있는 가운데에 사랑이 제일 어데 가 있으며 또 마음이 어데 가 있으며 그 정이 어데 가 있느냐? 제일 못난 거 거기 가 가지고서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혹 다른 사람이 이렇게 참 쉽게 건강하게 잘 자란 그 자녀에게 대해서는 그 다른 사람이 좀 몇 뺨때기를 때려 주고 좀 싸워 가지고 쥐박고 이렇게 좀 해쳤다 할 때도, 해를 쳐도 부모 마음이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 아프지 않소. 아프지 않지마는 이 병신 애물이,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아이, 그놈아 얼른 뒈졌으면 좋겠다.' 그만 뒈졌으면 좋겠는데, 뒈졌으면 좋겠다 싶은데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안하고 만일 그에게다가서 쪼끄마치라도 강건한 그 아들에게는 뺨 열 번을 때리고 이거는 뺨도 때리지 안하고 왈깍 밀쳐뜨려서 피씩 자짜지기만 자빠졌어도 그 부모의 마음은 열 번 뺨 맞는 그 아들이, 건강한 아들이 뺨 맞는 것보다도 마음이 더 아프고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잘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기가 많이 수고 들어, 자기 수고가 많이 들고 또 애로가 많이 들었고 그를 위해서 희생을 많이 했고 고생을 많이 했고 이럴수록이 거게 더 사랑과 애모와 그 마음은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그 집에 자녀 중에는 제일 어떤 자에게 부모의 마음이 만날 가 있느냐 하면은 부모가 제일 희생 많이 한 데 거게 마음이 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면으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보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생을 했으며 어떤 희생을 했는가, 주님의 그 희성하신 그 사랑을 생각해 보면은, 주님이 인간을 위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소자 그 하나를 위해서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도 지위도 권세도 부요도 뭐 그것도 조금도 꺼리지 안하고,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에게 좋다고 하는 데에는 오만 거 다 줬습니다. 다 줬지, 땅 위에 오셔 가지고도 삼십 삼 년 사 개월 동안 공생활이나 사생활에 한 그 구비구비도,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으심도. 또 그다음에 또 사람으로 다시 부활하심도, 그 주님의, 주님이 그 형제를 위해서 당신이 하신 그것을 느껴 볼 때에 그분이 희생한 그 사람을 당신, 당신보다도 그 희생한 사람을 더 사랑하는데 왜 첫째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는 고 말을 붙였느냐 하면은 고것은 당신 사람하는 것이 우리들이 행복되기를 원해서, 당신, 당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 되고, 당신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에게 평안이 되고, 당신을 높이는 것이 자체가 높아지는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는 것이 우리 행복되기를 원하는 그것으로써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한없는 수고와 공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느껴 보고,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사랑을 느껴 보고, 느껴 볼 때에 이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마음이 있고 '또 그 사랑을 다른 데다 전해야 될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들고, 또 내가 주님이 날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차차 느껴 가지고서 주님이 다른 형제도 고와같이 사랑하셨다는 고것을 하나씩 실상으로, 실감적으로 느껴 보면, 느껴 보면 우리는 그 형제에게 대해서 우리가 털끝만치라도 거리끼게 하면 주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그것을 위하면은, 그것을 위하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자꾸 말로만 이랄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실상을 우리가 실감적으로 느껴 봐야 됩니다. 주님이 나 위해서 모든 부요를 내놓고 가난해지셨다 이래 말씀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암만 해 봐도 모릅니다.
내가 형제를 위해서 손해를 당하고 형제를 참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큰 손해를 입어 볼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또 자기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권세를 쓸 수 있지마는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권세를 쓰지 못하고 죽어서 죽어서 죽어 지내서 온갖 속을 썩히는 그런 일을 해 봄으로 비로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날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주님이 소자 하나 그것도 그렇게 주님이 사랑하신, 주님이 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함이라 이렇게 말씀했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함이라, 소자 하나를 대우하는 것이 막바로 나를 대우하는 것이라, 소자 하나에게 마시는 거 준 것이 바로 나에게 목마를 때 마시게 해 준 것이라, 직접 이것이, 소자 하나에게 뭐, 소자니까 큰 자는 의례히 그럴 거 아닙니까? 소자니까 큰 자는 의례히 그렇다 그 말이오.
소자로 여기 말한 것은, 소자로 말한 것은 제가 먼저 제일 병신 아들 말한 거와 같은 그건 의미에서 소자로 말한 거 아닙니다. 소자로 말하는 것은 여게는, 모든 택함을 받고 구원 받는 자 중에, 구원 받는 자 중에 제일 주님과 먼 자가 있고, 주님이 제일 관심이 적은 자가 있다고 하면은 고런 자를 가리켜서 말하자면 소자로 말한 것입니다. 제일 주님이 측은하게 보는 고 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제일, 믿는 자 중에 제일 주님과의 관계에서 제일 양이 적고 관심이 적은 자라 고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제일 작은 자 그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
그러면, 의인들이 가서 보고서, 의례히 그런 줄 알고 세상에서 했지마는 하늘나라 가서 보고는 이렇게 사람에게 행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직접 행한, 백 프로 주님에게 바로 행한 것이 되는 그것을 그렇게 그럴 줄을 다, 몰랐기 때문에 다 놀랬다 이랬어요. 놀랬다 하는 거, 놀래는 그것을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형제를 위해서 하는 것이 막바로 날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너희들이 아무리 꼭 그렇다 하고서 이렇게 해도 가 보면 너희들이 참으로,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그 주님에게 직접 행한 것인, 이렇게 주님에게 행한 것인 것을 너희들이, 그 실상을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 아무리 지금 이 세상에서 느끼고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 실상만치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때 가 가지고는 다 놀라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다 이렇게 말하게 된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뭣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바울도 말하기를.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우리 목적이 뭐이냐? 주님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목적입니다. 우리 영원한 목적이, 제일 목적, 목적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 뭐 신구약 성경에는 다 보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제일 목적이요 이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뭐 그 외에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주님을, 그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의 제일 전부요 우리 목표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이 사죄 주셨으니까 사죄를 다 입고, 칭의를 주셨으니까 칭의 다 입고, 화친을 주셨으니까 화친 다 입고, 하나님의 형상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형상 다 입고,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인격성 주셨으니까 신성과 같은 인격성 다 가지고, 하나님이 지혜 주셨으니까 지혜 그거 다 받고, 능력 주셨으니까 능력 다 받고 '이거 하나님이 주시는 거 다 받드니까, 다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기뻐한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 것을 그걸 주님이 기뻐하신다 그 말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사랑하는 것은, 무지자가 지혜자를 사랑하는 것은 지혜자가 무지자에게 살 길을 가르쳐 줄 때에 의심 없이 예 하고 받는 고것이, 약자는 강자의 것을 받는 것이, 강자의 것을 받는 것이 그것이 강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사랑하는 법이 없소.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주님이 이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완전한 거, 영원한 거, 불변한 거, 하늘의 무한하신 모든 거 이거 전부 다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을 백 프로 다 받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거. 그러기 때문에,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이 세상 일과 같이, 자꾸 받으면, 받으면 주는 자가 섭섭해 할 것이고 도로 갖다 드리면 좋을 줄 아는 그걸 그런 사랑 가지고서 생각하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주시는 것을 다 하나도 버리지 안하고 다 받아서 다 강직하고 다 가지고,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니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제일 기뻐하신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신다 그 말은 주님 사랑하는 게 뭐인가? 다른 많로 말하면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주님과 꼭 같은 자 되는 것이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그 말입니다. 이 말을 지금, 생전 실감을 안 가지기 때문에 말하기가 힘든다 말이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신다는 그 말은, 주님 사랑하는 것이 뭐인가? 주님에게 받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안하고 거부하는 것이 그것이 미워하는 것이라. 그러면, 주님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주님 사랑하는 것이냐 하면은 내가 주님의 것을 다 받는 것을 당신 사랑으로 알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이니까, 다 받는 것은 뭐이냐? 내가 주님의 것을 받아서 내가 주님과 꼭 같은 자가, 하나님과 꼭 같은 자 되는 요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신다 말이오. 이 말을 여러분이 알아 듣는지, 이거 느끼지 못하고 껍데기만 줄줄 하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가 안 돼. 아무 소용이 없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고 하는 고 말은 결말적으로 말하면 이제 자꾸 그 순서를 말했는데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좋아하신다 했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녜, 받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뭐입니까? 주님과 꼭 같이 되는 것을 당신이 제일 기뻐하신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 안에 달리 수가 많으니까 이걸 여기서 들을 때 알지 나가 놓으면 그 말을 모른다 그 말이오. 그 말을 모르기 때문에 이 생활이 도무지 변화가 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를 못한다 그 말이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시는데 그것은 뭐이냐? 마지막에 결말로 말하면 주님을, 그 순서로 말하면 주님의 것을 받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받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받아서 뭐 할라고? 받아 가지고서, 주님의 것 다 받아 놓으니까, 내가 주님의 것 다 받아 놓으니까 주와 꼭 같은 거 아닙니까? 이리 되는 것을, 그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신다 그 말이오.
기뻐하시고, 둘째로 기뻐하시는 것은 뭘 기뻐하시느냐?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둘째로 기뻐하십니다. 이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이 두 가지면 다요. 주님이 원하시는 거는 당신 사랑하는 거 원하시고 인간 사랑하는 거 원하십니다. 그 외에는 다른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원하시는데,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원하시면 주님이 왜 인간 사랑하는 것을 제일 원하실까 이걸 알아야 된다 말이오. 아, 인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둘째로 원하신다, 인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둘째로 기뻐하신다 이라면서 인간을 사랑핥라고 해도 인간 사랑이 안 된다 그 말이오.
인간 사랑이 안 돼. 그저 하나의, 하나의 한 명령적으로, 하나의 명령적으로, 또 하나의 법적으오, 인간을 이렇게 사랑할라고 해도 그게 안 된다 그거요. 인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둘째로 기뻐하시고, 첫째 기뻐하는 거 둘째 기뻐하는 거 그뿐인데, 두 가지뿐인데,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최고의 법이라. 이게 최고의 법.
첫째는 나를 사랑하고 다음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는 이것이 최고의 법이니라 이랬어. 야고보서 2장에 최고의 법이라 이랬어. 최고의 법. 모든 법이 이것뿐입니다 이 외에 딴거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고 하는 데는 왜 주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는가? 당신의 명령이라 그럴까? 명령이라 그래 할까? 또 당신이 그렇다고 계약을 했으니 그럴까? 계약 명령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어. 제 몸같이 사랑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것은, 주님이 왜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그 이유는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의 모든 것이 다 들었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것이, 생명도 거게 다 투자됐지, 그 부요 다 투자됐지, 영광 다 투여했지, 권세 다 투여했지, 모든 거 존귀 다 투여됐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도 다, 사람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거게 다 투자됐지, 이렇게 모든 걸 투자했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므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또 그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음 사랑하므로 투자했고, 또, 사랑하므로 또 부활했고 이라기 때문에 사람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둘째로 제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뭣 때문에 사랑하는가 요걸 자꾸 실감을 가져야 되겠다 말이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실감을 가지는 게 문제야. 입으로 암만 천 번 만 번 하고 평생 노래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실감을 가지는 데에는 내가 인간을 사랑해 보면은 느낄 수가 있어. 인간을 사랑해 보면. 네가 형제를 위해서 희생을 해 보고 참아 보고 손해를 봐 보고 뭐 아무리 형제가 어떻고 이래도 뭐 수고를 해 보고, 형제를 위해서 무슨, 전염병만 돈다 해도 그거 안 되고, 또 여간 좀 어려움만 있다 해도 안 되고, 재물만 손해간다 해도 안 되고, 뭐 부부 사랑 그까짓 거 암만 뭐 이래 쌓아도 이제, 사랑한다 해도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에게 조그만치만 잘 못하고 아내에게 대해서 아주 불행을 끼쳐 버리면 당장 이혼해 버립니다. 당장 이혼해.
그런 데서, 모든 인간 생활 이것이 다 자연 계시라, 자연 계시이기 때문에 땅 위에 이건 사랑 저건 사랑 모든 사랑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랑과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비교를 해 봐요. 중량을 비교해. 중량을 비교해. 보면 비로소 알게 되고, 부부 간에 사랑하는 것이나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나 모든 인간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과 주님이 날 사랑하는 그 사랑과 논리적으로도 비교를 해 봐요.
논리적으로도 비교해 보고, 또 차차차차 실감적으로 비교를 해 보고 이라면 주님의 사랑을 다소 깨달을 수 있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지키느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주님이 날 사랑하므로 부요를 희생한 그, 부요를 희생해 보고, 또 존귀를 희생해 보고, 천대도 받아 보고, 모든 영광도, 영광도 수치로 받아 보고, 그다음에는 고생도 하고 수고도 하고, 또 잘못한 벌도 내가 받아 보고, 또 그 형제가 할 일을 내가, 내가 형제가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 책임져 가지고 해 보기도 하고, 대신 매도 맞아 보고, 대신 감옥에도 갇혀도 보고, 대신 잠도 못 자 보고, 대신 이제 참 내가 죽는 그, 형제를 위해 형제를 구출하려니까 내가 죽는 그 죽음을 죽어도 보고 그래 보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거게서 더듬어서 조그만치씩 그 실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 말로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실지로 자기가, 내가 형제를 사랑해 봄으로써 비로소 조그매씩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구역장이 돼 가지고서, 반사가 돼 가지고서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진정코,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한 그것을 느껴서 자기가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써 제물 되어진, 재물 되어진, 희생하신 그것을 내가 반사로서 학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실지로 그 일을 해 봤고, 권찰이 자기 식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해 봤고, 목회자가 교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일을 실지로 해 본 그 사람은, 해 본 사람은 거게서 '아, 나도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 이러니까, 이래 해 보니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내가 양을, 양을 팔고 양에게 거짓말하고 그라지 못하겠다' 하는 그런 걸 느낄 때에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하신 말씀이 신실하고 거짓이 없다는 것, 또 주님이 날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변동이 없다는 것, 또 당신이 능력 가지시고 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를 구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구출할 수 있는 그건 기회에 내가 허덕거리는데 나를 구출하지 안하고 냅두겠다 하는 그건 것을 그럴 리가 없다 하는 것이 자기에계 느껴집니다. 이것을 자꾸 좀 해 봐야 돼요 그래서, 반사 하는 사람들은, 권찰일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다소 쪼끄매씩 느껴 볼 것이고, 참 진실되이,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거와같이 요 진실되이 반사노릇을 해 보고, 권찰노릇를 해 보고 목사노릇을 해 보고, 장로노릇을 해 보고, 전도사노릇을 해 보고, 해 본 사람은 제 맘 짚어서 남의 맘 안다고 제가 해 보니까, 제가 해 보니까 독사와 시랑이와 같은 되지 못한 나도 나를 전적 믿고 따라서, 아무리 속여도 속여도 얘얘 하고 속이지 안할 줄 알고 무조건 순종을 하고, 또 태산같이 나를 믿고 있고, 또 나를 바라고 있고 이라는데 내가 내게 힘을 두고 내가 힘을 두고, 그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구원하지 안할 수 있겠던가, 안할 수 없다는 걸 자기가 느끼고, 그래 하면은 과연 그래 되면은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 본 사람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애끼지 안하고 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려 본 고 경험과 체험이 있는 고 사람, 고 경험과 체험에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확신이 자기에게 와지고, 어떤 경우에서라도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능력 가지고 그 주님이 이제 나에게 약속해 놓은 것을 그 약속을 위약할 리가 없고, 또 주님이 능력이 있으면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데 나를 구원할 이때에 주님이 어렵다고 구원하지 안하고 나를 버리지 안할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거 뭐 좀 넓으니까, 우리는 이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있습니다.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있는데, 마음으로는. 자기 만일 어떤,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고 하면은 자기 남편을, 외국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여게 앉아서 외국에 가 있는 그 남편을 마음으로도 사랑할 수 있고 또 정신으로도 사랑할 수 있고. 감정으로도 사랑할 수 있고, 또 의지로도 사랑할 수가 있고 이렇게 사랑할 수 있지마는, 아무리 마음으로는 사랑할 수 있지마는 사람은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사랑하면은 사랑하지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거 가지고는 마음에 만족이 안 되고 고기덩어리로 사랑을 해야 또 만족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음으로 뭐 사랑온 하지마는 육신으로 만나지 안하면. 육신으로 만나지 못하면, 육체로 사랑하는 거는 육체로 사랑해야 되지, 육체로 서로 만나 가지고서 손도 잡고 대면도 하고 안면도 보고 이래서로 이래 웃기도 하고 이래 참, 참 이렇게 육체가 육체로 이렇게 만나져야 또 거게 만남의 기쁨도 가지고. 또 마음온 마음으로, 마음은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그 남편을 사랑할 수 있으나 그 육체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리워지고 이라다가 육신으로서 사랑하면 기져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암만 마음으로는 사랑할 수가 있고 만나 볼 수가 있고 위 눈만 감으면 남편 사모할 수도 있고 이렇게 대면할 수도 있지마는 자기 육체로는 만나지 못하니까 섭섭하고 자꾸 이라다가서 육체로 만나면은, 마음으로 만난 그것만이 아니고 육체로 만나면 또 기쁨을 나눌 수가 있다 말이오. 그래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이산 가족들이 그 뭐 사모야 이북 이남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래 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육체로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다가 육체로 만나면 참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울고 뭐 만족을 하고 이렇게, 부모간이나 형제간이든지 이래, 이래 만나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 우리가 본다 그거요.
그런데, 그럴 때에 육체를 만나면은 좋아하고 만족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으로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무형의 주님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가 있지마는, 마음으로는 사랑할 수 있지마는 육체로는 사랑할 수가 없다 말이오. 육체로는 사랑할 수가 없으니까, 마치 아까 그 부부가 마음으로는 외국에 가 있는 남편을 아무리 이래 사모하고 사랑할 수가 있지마는 이 고기덩어리로는 사랑하지 못하니까 항상 불만스럽고 마음에 허전하이 '한번 만나 봤으면' 싶으다 말이오.
한번 만나 봤으면 싶은데, 그래 육체로 만나면 마음으로 만날 때보다 더 반갑고 즐겁고 좋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심령으로는 만나지마는 이 육체로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마음에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움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때에, 보이지 않는 그 심령으로 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심령으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남으로 서로 사귀고, 사귀고, 이 고기덩어리로는, 양성 일위의 주님이 지금 우리와같이 계시지마는 그분을 내 이 고기 덩어리로는 만나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데 이 고기덩어리로는 주님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소자 하나를, 나를 보듯이 소자 하나를 봐라. 소자 하나에게, 내게 하듯이 소자 하나에게 해라. 나를 반가워 하듯이 소자 하나를 반가워해라' 이제 주님이 약속으로, 주님이 약속으로 우리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이 소자 하나는 곧 막바로 내다. 이러기 때문에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요 소자 하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 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 '그 행한 것은 내가 낱낱이 다 갚아 주겠다' 이렇게 주님이 아니지마는 주님이, 우리가 이 육체로 주님은 만날 수 없는, 육체로 만날 수 없는 아 주님을 이제 우리 육체로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대신, 주님의 대신 주님의 대신으로, 주님의 대로 이제 보이는 형제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형제를, 네가 내 육체를 만나듯이 이 형제의 육체를 네가 만나라 계약을 그래 했고. 계약을 그래 하셨고 또 계약만 한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새겨 느껴 보면 주님이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셔서 온갖 것을 다 희생를 애끼지 안하고 다 희생하셨다 말이오. 주님이 모든 걸 희생을 다 해서 주님이 극히 사랑하신 자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자이기 때문에 이제 또 우리가 그 형제를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이 그렇게 대신으로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에 또 사랑하고 이렇게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하는데, 어떤 사람이 참 자기, 자기 오빠가 하나 있는데, 오빠가 하나 있는데 고만 오빠가 나뉘어 가지고서 평생 만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고만 이래 가지고 항상, 남매 간이라도 정이 두터워 놔서 그 오빠를 생각하면 눈물이 항상 나오고 그저 항상 마음에 오빠가 사모돼서 못 견뎠는데, 그 오빠는 만나지 못하고 오빠가 사랑하는, 오빠가 사랑하는 그 외동 아들이 하나 있는데, 오빠가 사랑하는 그 외동 아들이 이산 가족에서 이런게 거석하니까 와 가지고 '내가 아무것이 아들입니다' 하면서, 오빠가 사랑하고 정력을 다 기울여서 사랑하는 그 외동 아들, 오빠가 애지중지하던 그 외동 아들을 이제, 여동생이 만나니까, 고모가 만났지요.
만나 놓으니까 오빠 만난 것만은 못하겠지마는 오빠 만난 거나 질바 없이 오빠가 사랑하는 오빠의 외동 아들을 만나니까 기쁘고 즐거워서 반가워서 그렇게 참 목을 안고 울고 거석하면서, 고만 그 오빠가 사랑하는, 오빠의 사랑하는 오빠의 그 외동 아들을 만나니까, 고만 그 아들 만나 가지고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보니까 이제 오빠 만난 거와 비슷하다 그 말이오. 오빠 만난 거와 비슷해. 비슷해 가지고서 그만 그 만나 가지고 둘이 이래 기삐하고 즐거워하면서 한 집에 고만 한 달포 지내니까 오빠 생각이 없어. 오빠 생각이 없어 고만. 오빠의 아들을 만나 가지고 즐거워하다 보니까 오빠 만난 것하고 꼭 같아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오빠 만난 거와같이 기쁘기도 기쁘고 즐겁기도 하고 고만 그다음에는 오빠 만난 거와 꼭 같아서 뒤에 오빠를 그렇게 육적으로 만나고 싶은 그런 뜨거운 마음이 다 없어져 버렸어, 고만. 그 외동 아들에게 다 기울어졌다 말이오. 이거 여러분들이 이게 느껴집니까, 이거? 느껴져야 말이지만 안 느껴지면 이거 백지 내 혀만 아프지 아무 소용이 없어. 자꾸 느껴지라고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라, 말하기를.
또 써먹어야 되겠소. 얼마 전에 주 남선 목사님 따님이 왔는데 그이는 동정녀로 참 깨끗한 처녀입니다. 동정녀로 시집 안 가고 주를 위해서 마산에서 그 영아원을 하고서 그래 있는데, 원장입니다. 원장인데, 지금은 나이가 뭐 물으니까 육십 몇살 됐어요, 나이가 그래 됐는데, 그분이 참 효성이고 그 자녀 중에 제일, 신앙이 제일 좋습니다. 제일 좋은데,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신앙이 좋은데, 늘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요번에 내가 뭐 좀 비석 하나 세우자 했더니만 어떻게 무덤을 왕릉같이 참 잘해 놨는지, 뭐 거기 갖다 뭐 할 수가 없어. 이랬는데, 권사가 됐어. O권사님이 그때 언제도 또 한번 와 가지고서, 하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주 남선 목사 말이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래 못 견뎌서 이라다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자가 백 목사님이니까 백 목사님 한번 보고 오겠다고서 그래 그때 돈을 십만 원을 가지고 와서, 예물을 가지고 오면서 이래 왔어요.
와서 만나고 난 다음에는 뭐 나는 그렇게 그런 줄을 모르는데도 그 O권사님은 와서 만나 가지고서 뭐 좋아하고 울고 이래 이라더마는 아이구 이제 좀 이제 마음이, 마음이 인제 언간히 풀린다고서 이라면서 이제는 가겠다고 이라고 가고, 이번에는 왔는데 고만 얼마나 그 아버지가 그리웠는지 눈이, 양쪽 눈이 그만 부었어. 이래 가지고 눈두덩이가 이래 부었어. 며칠 울었대요. 며칠 울어 눈이 부었다고, 이버지를 생각하다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또 아버지가 사랑하신 백 목사님에게 내가 가서 한번 보고 와야 되겠다 하고서 그래 나한테 와 가지고서 서로 만나 가지고 기도하고 또 좀 눈물 좀 흘리고 이래 기도하고 좀 이라고 나니까 고만 아버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 고만. 다 고만 아버지 보고 싶은 마음이 없고 다 고만 그 아버지 본 거와 같이 이래 봐서 고만 아버지 보고 싶은, 그렇게 마음 가운데 그렇게 잠도 오지 안하고 막 환장할 만치 그렇게 아버지 보고 싶던 그 마음이 아버지가 좋아하고 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버지의 그 제자로 이렇게 이렇게 삼아서, 제일 사랑했어요. 날 제일 사랑했어요. 이러니까, 고만 날 보니까 고만 마음에 흐뭇해서 고만 그때 '아이구,' 그래 O집사가 말하기를. 이제 목사님을 보고 가니까 마음이 좀 이제 흐뭇하이 이제 좀 이제 내가 가서 좀 잠을 자겠다 하면서 그래 갔대요. 우리가 그런 정을 못 느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이, 당신은 신인 양성 일위이시지마는 신령한 몸으로 계시고 우리에게 육체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타나지 않는 거는 왜 안 나타나느냐? 예수님의 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 주님보다도 우리의 심령으로 볼 수 있는 그 주님의 그 인격성, 주님의 신성, 주님의 모든 그 행적성, 이렇게 육안으로 보면은 딱 갇혀 버리고 육안으로 보지 안하고 심령으로 그 무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육안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 주님을, 우리가 성경 가운데 기록해 놓은 그 주님을 우리 심령으로는 얼마든지 대하지 않습니까? 심령으로는 대면한다 말이오. 우리가 심령으로는 우리가 자주 대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뭐 여러분들이 몇 번 주님 만나지 안했습니까? 몇 번 만났습니까? 오늘 여남은 열 번 이상 만난 사람 손들어 봐. 오늘 열 번 이상 만난 사람. 열 번 더 만나지. 열 번만 만나? 열 번 이상 만났지. 뭐 아마 거석한 사람은 한 백 번 이상 만났을 거라. 이렇게 만나 보지마는, 만나 보지마는 마치 마음으로는 아무리 사모하고 이래 하지마는 육으로 만나지 못하니까, 편지로도 만나도 그것도 좋지마는 그것도 안 되고 이제 마음으로 암만 사모해도 안 되고 육으로 만나야, 또 육으로 만나는 것은 또 육으로 만나야 좋자 육으로 만나지 안하면은 언제나 반쪼가리 그래 만난 거밖에 안 되고 온 전체를 만난 게 못 된다 말이오.
이래서 이산 가족들이 마음으로는 사모하고. 이복에 있는 뭐 부모 또 이남에 있는 자녀 이렇게 사모해서 병이 들 만치 이렇게 하지마는 마음으로 사모하고 만나는 그거는 소용이 없고 이제 그거, 그거 가지고 만족이 안 되고 육으로 만나야 되겠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서로 만나고 난 다음에는 만족을 하지 많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뭐 만나 놓으면 이거고 저거고 아무 소식도 물을 여가 없이 그만들이 그만 거머안고 보면, 뭐 보니까 울고 불고 어짤 줄 모르게 뭐 한, 보니까 어북 어떤 사람은 한 너댓 시간을 울고 불고 어짤 줄도 모르고 뭐 이래 가지고서, 뭐 안부도 뭐도 아무것도 없어. 실컷 울고 그래 육덩이하고 육덩이하고 이래 가지고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라고 난 다음에 이에 정신을 차려 가지고서 '그래, 얘야. 너는 그래 이남에 가서 어떻게 살고 있노?' 비로소 말하고 '아이구, 어머니 어떻게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래 내야' 그때 정신이 들어서 그때 이성을 가지더라 그 말이오.
그래 육덩이로 만나는 거, 이제 주님도 우리가, 주님은 모든 것보다 더한데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이 보는 형제를 사랑하는 그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형제를 가지지 안한 심령으로, 형체 없는 주님을 우리가 대면해서 사모하고 서로 교제하지 않습니까? 주님하고 서로 교제할 수 없으면 우리가 기도를 어찌 합니까? 하루 몇십 번 보지 안해요? 그러면, 주님을 여러분들 못 만나면 뭐 어짭니까? 주님의, 주님의 그 신인 양성 일위이신 그 심령을 우리의 그 심령으로 늘 얘기하고 교제하고 묻기도 하고 답도 하고 이래 같이 동행하지 않습니까? 동행하지마는 이 고기덩어리로 이제 동행하지 못하니까 답답함이 있는데 고기덩어리로, 주님의 고기덩어리를 만나서 동행하지 못하니까 답답함이 있는데, 제자들이 주님이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 만나서 기쁜 거와 같은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는데 그 답답함은 우리가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뭐이냐? 주님이 소자 하나에게 행하는 것이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소자 하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 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라, 이 소자, 이거 예수 믿는 소자로서 주님을 대(代)로 삼았으니까 예수 믿는 대자(大子)는 더할 것 아닙니까? 대자는 더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실지로는 당신이 거기다가 다 애정과 모든 걸 기울여 쏟았기 때문에 쏟앗기 때문에 그에게 한 것이, 그에게 한 것이 곧 주님 당신에게 직접 한 것보다 더 하다 그거요. 이거 느껴집니까? 그 느껴집니까? 이걸 못 느끼면 소용이 없어.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에게 직접, 예를 들면 주님에게 직접 어떤 식물을, 주님이 오셔서 직접 주님에게 식물을 대접한 것보다, 주님을 이 하늘나라에서 직접 주님에게 대접한 것보다 소자 하나에게 대접한 것이 주님에게 직접 대접한 것보다 더 크다 말이오. 요걸 느껴요. 크다 말이오. 더 커요. 왜 큰가? 그분이 그를 사랑해서 못 견뎌서 하늘의 부요와 생명과 모든 걸 다 애낌 없이 투자했기에, 이렇게 사랑해서 구출해서 이 병신 뒈지는 걸 이렇게 구출해 놨기 때문에 주님께서 못 잊는 게 그거라. 그러기 때문에, 죽으심으로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세 가지 죽음으로 죽으시고도 만족이 안돼서 또 이제 사람으로 또 부활하셨다 그 말이오. 부활했는데 또, 창조주가 또 이 피조물의 형상을 영원히 또 입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주님이 그 형제를 어떻게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달으면 그 형제에게 우리 심령으로서는 주님을 그 영을 만나지마는 우리 육으로 만나지 못하니까 이 육은 만족지 못하는데, 만족지 못하는데 이 육으로 만날 수 있는 우리의 대상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육으로 만날 수 있는 그 대상을 우리에게 정해 줬으니,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정해 줬고, 또 당신이 모든 걸 다 희생하신, 당신 자체보다 더 사랑하신 그 대상이 있으니 그를 사랑함이 나를 사랑함이기 때문에 그를 상대해서 네가 육으로 만나 가지고서 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이제 나를 만난 거와 같은 그런 실지의 효력을 받아라, 효력을 받아라. 그 O권사도 만나 가지고서 내가 무슨 말하니까 뭐 고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또 기도하니까 기도로 만족하고 실지로 또 은혜를 받는다 말이오. 아버지에게 받는 거와 같은 꼭 같은 그런 은혜를 받는다 그거요.
또 위로도 되어지고.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둘째로 기쁨이요, 첫째 기쁨은 당신 사랑하는 것이요, 당신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것을 다 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신을 사랑하는 걸 좋아한다 말은 당신의 것을 받아 가지고 당신과 꼭 같은 자 되는 것을 당신이 원한다는 요 말씀이요, 둘째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당신이 둘째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왜 들째로 기쁨이냐 하면은 당신의 모든 것을 그 형제를 위해서 다 쏟아서 사랑하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거나 다름이 없고 그를 대접함이 당신 대접하는 것보다 낫다 그 말이오. 아까, 키운 병신 새끼, 애먹이고 그 병신, 애먹이는 병신 그게 어데서 자빠졌는데 그걸, 그 자빠진 걸 일으켜 세우고 그래 가지고서 조금 업어다가, 업어다 줬다고 그 부모가 그 공을 어떻게 갚을꼬 뮈 마음에 맺힌다 말이오. 뭐 성한 아들 일 년 밥 먹여 준 것보다 더 해. 잠깐 업어 온 게. 그라고 그게, 그게 배가 고파서, 병신이 배가 고파서 허기가 만났는데 그거 빵 한 쪼가리 싸 가지고서 그 허기를 면해서 집에 데려온 것이 어떻게 감사한지 말이지 그거 거게다가 한 것이 그 자기 입에다가 대접한 것보다 훨씬 더 낫다 말이오. 이렇게 주님과 그 소자 하나와의 관계가 이건 관계가 있어 가지고서 이제 그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사 준 것도 내가, 결단코 하늘나라에서 상을 잃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거라 그 말이오.
하는 것은 주님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주님의 마음이 더 기쁘고 즐겁고 더 큰 대접이 된다 그 말이오. 이걸 우리가 실제로 느껴야 돼요. 못 느끼면 헛일이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많은 희생을 해서 췰, 참 눈물도 많이 흘리고 특별히,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애를 많이 썼는데 어떤 사람이 만나 가지고 그 사람에게 믿음에 유익된 말을 한 마디를 해 줬을 때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한 마디를 해줬을 때에 '그 공을 어떻게 갚을까' '아, 네가 어떻게 깨달았느냐?' '아무것이 클 만나니까 그 사람이 뭐 이렇게 말합디다'. 그 만나 가지고 그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믿음에 유익된 말을 한 마디를 해 줘서 이것이 그로 깨달아 가지고서 좀 깨달음을 가졌고 믿음이 좀 나아진 걸 생각하면 '그 사람의 공을 어떻게 갚을까' 우리 마음이 그런 것이 없습디까? 반사 쳐놓고 그런 게 없습디까? 그걸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아, 누가 어멀게 해 가지고 이 학생을 그때 도와서 어떻게 했다는 그걸 잊어 버리지 않는다 말이오. 권찰들도 잊어 버리지 안해요. 목사들도 그건 걸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데, 그 반면에 그렇게 애를 써서 구원할라고 애를 썼는데 그걸 그만 꾀어 가지고서, 꾀어 가지고서 믿음에 손해를 보여서, 믿음에 손해를 보여 가지고서 그걸 살살 꾀어 가지고서, 그렇게 그 등신 같은 걸 기를라고 애를 썼었는에 고걸 고만 꾀어 가지고서 고만 믿음을 딱 타락을 시켰으면 어찌 됩니까? 타락을 시켰으면 어찌, 어찌 되겠습니까? 주님이, 소자 하나에게 범죄케 하는 것이, 범죄케 하는 것이 연자맷돌을 매고, 목에다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서 죽인 것보다 더하다. 깊은 바다에 빠뜨려서, 물에 빠뜨려 죽인 것이 오히려 낫다.
주님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멸망받는, 멸망받는 그 죄에 대한 관심과 그 범죄케 하는 거게 대해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가 아무리 느껴 봐도 그 실상만치 느끼지 못합니다.
이래서, 소자 하나를 범죄케 하는 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게 낫다 하는 그 주님의 그 범죄케 함에 대한 당신의 심정이 아픈 거, 당신의 마음이 아픈 거, 당신의 마음이 분한 거, 당산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기막히다는 그걸 우리가 실제로 느껴야 됩니다. 느껴야 돼요. 그저 예사로, 어떤 사람 내가 보니까. 고만 그거 하나 구원할라고 그렇게 애썼는데 어떤 나쁜 사람이 거짓말로 살짝 꾀어 가지고서 고만 그 믿음을 뻐들트려 가지고서 이게 뻐드러져 나가고, 뻐드러져 가지고서 고만 낙심하고 뻐드러져 가 버리고 나니까 구원하던 그 사람이 참 대성 통곡을 하고 이렇게 마구 자기 목숨 잃은 것보다도 더 아까워서 우는 그런 사람을 제가 겪어 봤습니다. 우는 사람을 봤어. 그게 예수의 심정이라. 예수의 심정. 우리가 그거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 말씀을 입술로만 배울 게 아니라 우리가 실지로 느껴봐야 돼요. 느껴서, 예수님의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이라는 예수 그의 심정을 우리가 실지로 실감적으로 느껴 봐야 되고, 또 그 모든 주님의 하신 말씀도 우리가 느껴 봐야 되지 그걸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모든 걸 기울여서 구출한 자이기 때문에 그 자를 죄에서 건질라고 구출했는데 그 범죄케 하는데 대해서 주님이 어떻게 하실 건가, 얼마나 분개히 여길 터인가? 뭐 오늘 저녁에도 이거 자꾸 느끼는 말이기 때문에 말로 줄줄 하는 그런 거 가지고는 안 되고 이거 실지로 느껴져야 되는데 느껴지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 간단하게 그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왜 사랑하라느냐? 주님이 많은 애정을 기울였기 때문에, 애정을 기울이고 많은, 전부 있는 걸 다 기울여 쏟았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을, 그를 사랑하는 것을 당신을 직접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좋아하십니다. 알겠습니까? 그를 사랑하는 것을 당신을 직접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고, 그를 대접하는 것을 당신에게 직접 대접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신다 그 말이오. 좋아하시오. 왜? 당신이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게 있는 걸 다 기울여 쏟았기 때문에.
그런고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둘째로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시는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시는데, 고 지금 말합니다. 요대로 나가면 또 여러분들 중에 나갈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이 제일 또 분히 여기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걸 제일 기뻐하고, 주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미워합니다. 왜?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는 걸 제일 기뻐한다 해놓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걸 제일 미워하시다니 그 무슨 말인가? 사랑은 두 가지가 있어요. 배암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을 배암 사랑을 가지고서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제일 미워하시고 섭섭하게 여기십니다. 배암 사랑은 뭐인데? 정욕 사랑, 혈육 사랑, 동류 사랑 요 세 가지가 배암의 사랑입니다. 이 배암, 사랑은 이 사랑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없애 주는 게 하나님의 사랑이요, 의롭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데,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 이 사랑을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사랑과 혼돈해 가지고서 이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랑 이걸 가지기가 쉬운데, 제일, 세상은 뭐이냐? 사랑이 제일 해독이 많고 사랑이 제일 그 생명이 제일 풍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과 사랑을 구별해야 되는데 이 교회들이 사랑 사랑 해가지고 사랑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지 안하고 마귀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 보면은, 교회도 가 보면 전부 그 사랑 때문에 다 죽이요. 고기덩어리 사랑 때문에 모든 은사 교권, 모든 성직자, 은사 교권하고 기본 교권하고 인간 마귀 사랑때문에 다 난리가 나고, 다 마귀 사랑 때문에, 뭐 혈통 사랑, 정욕 사랑, 그 모든 동류 사랑, 저거끼리 끼리꺼리 이래 해 가지고 교회를 막 들어엎는다 말이오. 교회의 어려운 문제, 교회의 어려운 문제 있는 게 전부 그 사랑이라. 교회의 어려운 문제 있는 게 다 다른 사랑, 마귀 사랑 때문에 다 그래. '우리 교회는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지금 큰 문제가 있습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배암 사랑이로구나. 배암 사랑' 배암 사랑, 그리 아니면, 교역자가, 교역자가 저거 가족끼리 배암 사랑 가지고 사랑해서 이제 교회에 큰 환난이 나든지, 그리 아니면 교역자하고 그뭐 교인하고 배암 사랑을 해 가지고서 큰 난리가 나든지, 교인과 교인끼리 배암 사랑 가지고 난리가 나든지 전부 난리 나는 건 배암 사랑이라. 전부 난리 나는 건 배암 사랑 때문에 절단나고,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배암 사랑이요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여러분들이 구별해 가지고서 오늘 밤에 들은 것을 좀 거석하지만 강직하고, 알려면 자꾸 새벽에 나와 가지고 이렇게, 사람이 성화가 되어져 가야 되지. 말씀을 가르치면 자기가 변화가 돼야 알지 그걸 느낌을 실감으로 느져져서 변화가 돼져야 알지 느끼지 못하고 이런데, 지식으로 만 하는데 그 무슨 실지에 변화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새벽 기도 자지지 말고 나와야 돼요. 빨리 나와서 준비해 가지고 가야 되지 뭐 준비할 그런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준비해야 되지.
자, 오늘 저녁에 시간이 너무 가서 안 됐습니다. 고만 이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고, 오 분 기도 후에 이제 재독이 있겠고 지금 막바로 결혼식이 있겠습니다. 결혼식에 가서 참석하시기 부탁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