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15:10
주님이 구출해 주시는 방편
1981. 3. 13. 밤 (금)
본문:시편 91편 7절∼16절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 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14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참 사람의 일생은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의 미신에서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허무하던 사람들이 존귀하게도 되고 놀랄 만치 존귀한 사람이 허무한 사람들도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날 때 그 운명을 잘 타고 나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하고 ‘그저 낳은 시가 좋아야 된다' 또 이렇게들 말합니다.
한 시에 난 사람으로서도 같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다 사람이 몰라서 하는 말들이요 너무 시작과 결과가 엄청난 변동이 있으니까 놀라서 다 그렇게 추측 추론들을 하는 것입니다. 몇십 년 전에 그 사람의 형편과 몇십 년 후의 형편을 보면 도무지 상상 못 할 만치 이해 못 할 만치 변해진 것을 많이 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청년이 저를 찾아왔는데 그 사람을 내가 만난 지는 근 이십 년 되기는 됐지마는 이십 년 동안에 너무도 많이 변해 있는 것을 보고서 참 기뻐하고 만족했습니다. 어떤 면으로? 인품도 보니까 이십 년 전에 보던 그 인품과 놀랄 만치 변화가 됐고 또 그분의 세상적 지위라든지 모든 기반이라든지 여러 면에 생활과 형편을 볼 때에 역연 놀랄 만치 변해졌습디다.
그래서 내가 기뻐서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동안 신앙 생활을 잘 했구나 참 모르게도 많이 변화가 됐다.’ 그렇게 말하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심어주신 그 씨가 자라난 것뿐입니다. 내가 여게서 있으면서 설교 들은 것을 간추리고 간추려 가지고 줄기만 잡아서 이십 권을 만들어 놓고 날마다 그 노트를 읽으면서 양식을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목사님께서 심어주신 그 씨가 자라가는 것뿐이지 뭐 딴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역부로 바쁜 사람이 찾아보러 왔다고 그렇게 왔다 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시 또 제가 증거를 받았습니다. “허다한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다” 하는 말씀대로, 그러면서 제가 죽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접촉할 때 그때의 형편의 사람들을 죽 연상을 해 봤습니다. 이 사람도 생각해 보고 저 사람도 생각하고, 생각해 볼 때에 그때에 금덩이 같은 사람이 지금은 참 흙덩이같이 돼 있는 사람도 많고 이십 년 동안인데 그때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이보다도 놀랄 만치 참 그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할 만치 그렇게 변화가 된 모든 형편이 변화가 돼서 그 향상하고 전진한 것이 어떻게 많이 됐는지 그런 사람들도 많이 보여졌습니다.
그 사람들을 제가 아는 대로는 이렇게 살펴볼 때에 다 모두 같은 사람이지마는 자기의 실력이 있고 없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차이 있게 변해졌느냐 하는 것을 제가 따져볼 때에 조심 하나였습니다.
조심을 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졌고 조심하지 안하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제 오기대로 제 욕심대로, 제 오기대로 제 기백대로 제 감정대로, 그저 어떤 사람은 제 하고 싶은 대로 저 놀고 싶은 대로 논 그것이 그만 이십 년 동안에 그렇게 천물을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먹고 싶은 대로 그것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되어진 사람 뭐 별별 모두 다,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 조심한 사람들은 참 그렇게도 모를 만치 변화가 되었고, 또 ‘이번만’ 또 `오늘만' ‘금년만’ 이렇게 하면서 조심하지 안하고 그렇게 방랑 생활 한 사람은 하루 가고 이틀 가고 그것이 참 신속히 십 년 이십 년이 그대로 지내 그 사람도 자기가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도 못 할 만치 허무하게 망해져 가지고 있는 것을 제가 죽 아는 대로는 사람을 열거하면서 연상해 봤습니다.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와 자기의 행위에 있어서 조심하는 그 조심 생활 십 년이면 안 믿는 사람도 굉장히 변해집니다.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 되고, 무지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다른 사람한테 멸시 천대받던 사람들이 존귀히 되어지고 그만 조심하지 안하고 마구잽이로 사는 그 하루 이틀 그저 몇 해 동안에 형편 없는 그런 천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믿는 사람은 더우기 측량 못 할 만치 변해집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너를 뛰어나게 하겠다” “위에만 있고 이래 있지 않게 하겠다” “머리만 되고 꼬리되지 않게 하겠다”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지않게 하겠다” “네 하는 모든 일에 내가 복을 주어서 다 형통케 하고 네게 속한 모든 것은 다 내가 복되게 하겠다” 복되다 말은 하나님이 그것을 잘되게 해 주신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잘되게 해 주시면 누가 그것 방해하겠습니까?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은 더욱 더 자기가 십 년을 만일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 그뭐 참 놀랄 만합니다. 경제면이든지 지위면이든지 권세면이든지 사회에 인정하는 그 권위면이나 영광면이나 그 자신의 실력면이나 그런 면이, 그저 그렇게 조심하지 안해도 조금 그 사람이 조심해서 산다 이렇게 보여지면 십 년이면 굉장히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자기가 똑똑히 자기 아는 대로 기록해 놓고 십 년 지낸 지 후에 보면 참 자기도 생각 못 할 만치 그때와 지금과 비교 못 할 만치 아주 큰 사람도 있고 커진 사람도 있고 비교 못 할 만치 오그라져서 허무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시기를 목표는 하나님과 같은 자 되는 이것을 하나님이 목표로 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했습니다. 안 될 것 하나님이 하라는 말씀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같이 너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말은 그다음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큽니다. 우리의 희망은 지극히 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를 알기 전에는 제가 실컷 꿈을 꾸고 꾸고 큰 포부의 꿈을 꾼다 할지라도 우리 기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이 소망과는 비교 못 합니다.
이런 소망을 인간이 꿈 꿔 낼 수가 없고 생각해 낼 수가 없고 이런 희망이 인간에게 있으리라 하는 것을 상상도 해 낼 수 없는 참 측량 못할 지극히 큰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과 물과 피가 보증이 돼 가지고서 이 일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당한 현실에서 이 사회가 나를 어떻게 한다, 이웃이 나를 어떻게 한다, 저 사람이 어떻게 한다 하여 사람으로 더불어 시비를 논하는 사람들은 다 참 답답한 사람이요 심히 고통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임자가 있습니다. 우리만 힘을 쓰고 조심해서 부지런히 나아간다면 이는 참 전지 전능의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모자라는 것을 다 보충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때문에 우리에게 존귀한 것이요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차차 자기가 어떤 넘치는 희망을 가진 자며 형언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자며 이는 추호도 위험이 없는 시온의 든든한 대로를 가진 우리들입니다.
이러기에 그저 조금 힘쓰면 그만 자기와 어깨겨룸을 해 가지고 시기 질투, ‘네가 크니 내가 크니, 네가 높으니 내가 높으니, 왜 내게 대해서 이렇게 멸시하나? 천대하나? 피해를 주나?’ 이렇게 시시비비하던 그 모든 어깨 겨룸이 몇 해만 조심하고 힘을 쓰면 벌써 썩 커서 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그런 시비의 시기의 상대가 어데 있는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벌써 그들 위에 썩 올라가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다 저절로 없어지고 맙니다.
해하는 자가 벌써 그자보다 앞에 몇 십 리 앞에 가 버렸는데 무슨 옆에서 침해나 시비를 할 것입니까? 곡식 밭에 보면 잡초가 이 곡식과 키가 어름어름 할 때에 곡식이 피해를 보지 벌써 곡식이 썩 자라서 올라가 버리면 그 모든 잡초들이 그 밑에 그늘 속에 들었기 때문에 저절로 녹습니다. 안 매도 그 잡초가 녹습니다.
곡식이 무성하면 그 밑에 잡초가 올라오지를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 베풀 자가 지극히 크신 분이 계시고 또 약속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희망이 큰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보고 원망 한탄 복수 시비 시기 질투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안 하고는 안 됩니다. 같이 사니까 그가 침해하면 내가 침해를 받기 때문에 안 받으려고 시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든지 말든지 그 모든 것보다 무한히 크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과 나와 하나돼 가지고서 자라 올라가면 그게 따라올래야 따라오지도 못하고 총을 쏴야 내게 자라오지도 못할 터인데 그만치 앞서 높이 크게 자라 그 모든 것은 그 그늘 능력 밑에 다 깃들이게 될 터인데 그럴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인하여 한탄하는, 이웃을 인하여 한탄하는 우리가 그런 짓을 하지말고 또 세상에 어떤 것을 보고서 부러워하는 그런 짓을 하지말고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희망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힘만 쓰면 뭐 얼마 안 가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정도 될 수 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시기하고 시비하던 사람이 아예 상대가 안 돼서 시기나 시비를 하려 해 봐야 거게 대이지도 안하는, 힘센 장사에게 어린아이 그것이 조그만한 지푸라기 가지고 때려봤자 그게 뭐 아플 게 뭐 있겠소? 이 모양으로 이웃을 탁월할 수 있고 자기 사회를 탁월할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게 말씀하시기를 1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궁지에 들었든지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의 궁지도 벗어날 수 있고, 억울함의 궁지도 벗어날 수 있고, 무식한 궁지도 벗어날 수 있고, 못난 무능의 궁지도 벗어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 천대 업신여기는 참 천물 같이 되어 있는 그런 궁지도 벗어날 수가 있고, 어떤 그 몸에 질병이 들어 있는 그 질병의 궁지도, 근심의 궁지도, 번민 고통의 궁지도 우리는 다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준다고 하면은 못 건질 데가 어데 있겠습니까? 어떤 궁지에서 어떤 함정에서 하나님이 건지려면 건지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그 깊은 멸망 가운데 있다고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려 하면은 건져주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한 계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하신 계약입니다.
자기 마음에 ‘내가 이 궁지를 벗어나야 되겠다. 이 어려움을 벗어나야 되겠다.
이 고통을 벗어나야 되겠다. 이 설움을 이 억울함을 벗어나야 되겠다. 이 가난을 벗어나야 되겠다. 이런 압제와 이런 천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내가 사망 중에 들었으니까 이 사망 중에 벗어나야 되겠다. 내가 이 감옥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모든 사람이 다 보는 대로 나는 완전히 희망 없는 멸망 가운데 빠진 사람인데 여게서 벗어나야 되겠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했기 때문에 이 성구를 보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려고 하면 나를 능히 건지실 수 있다. 내가 나를 구속하신 주님이 안 계시면 내가 빠져 있는 이 궁지에서 세상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 궁지에 빠졌으니 나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 낙망할 수밖에 없지마는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이 궁지에서 나를 구출 못 해도 주님은 나를 여게서 구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당신이 나를 구출하시려고 하면 능치 못할 것이 없으신 당신이 나를 여게서 구출하실 수 있다.’ 이런고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출해 주실 이 한 길이 있으니 하고서 이 계약을 붙들고 당신 앞에 소망을 가지는 자를 당신은 찾습니다. 당신은 부자를 찾지 않습니다. 행복에 가득찬, (저 아이들 단속해, 좀! 아이 어머니들은 집에서 기도해요. 기도하고 어린아이들 데리고 와요. 기도하는 사람들 자녀 보십시오, 예배볼 때 고요히 보지. 그렇게 떠드는가?) 하나님께서는 잘난 사람, 부자, 행복스러운 사람, 모든 것이 구비한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오신 분 아닙니다. 주님은 참 멸망 가운데에 빠져서 ‘나는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는, 육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자, 저주와 멸망 속에 들어 있는 자 그자를 구원하려고 주님이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맞이하러 왔느냐? ‘아무도 나를 이 궁지에서 이 비참에서 이 근심 걱정 고민에서 구원할 이가 없는 이 어려움인데 주님이 계약하시기를 건져주신다고 하셨으니 주님이 나를 건지시려면 건지실 수 넉넉히 있으리라’ 하는 이 사실을 믿고 당신에게 향하는 그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 사람을 원하시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되지 못할 어려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육의 문제나 영의 문제나 어떤 문제든지 구출되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바라보면 당신이 어떤 자에게 건져주신다고 했습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 택함을 입은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 다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이것을 거머쥐고 제 꾀로 수단으로 악으로 독으로 거짓으로 열심으로 어떤 인간으로 뭘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이것은 아무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먼저 인식되고 주님만이 해 주시려면 해 주실 수 있다 하는 것을, 아무도 할 수 없는데 주님만이 할 수 있다는 이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달라붙는 그 사람이라야 주님은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주님을 향해서 건져주심을 받는 그 방편이 무엇입니까? 그 방편이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져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건져 주겠다 했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건져 주겠다 했어.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지 전능의 사랑의 주님이 나를 궁지에서 건져주시도록 하는 그 방편을 취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건져주심을 입을 수 있는 자요 주님의 건져주심을 입기 위해서, 아무도 건질 수 없는 것 주님이 나를 건져주심을 내가 입기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 건져주심을 받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계약하지 안했습니까? 따라합시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이 계약을 믿습니까? 이 계약을 믿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권위 있는 이 계약입니다.
그러면 주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인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에 밝혀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너희들을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도 저를 사랑하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궁지에서든지 그 궁지에서 택한 자를 건져주실 이는 마귀도 아닙니다. 인간도 아니요 세상도 아닙니다. 택한 자를 건져주실 이는 주님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건져주시게 하는 데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외에 방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방편이라니?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나를 건져주시는 건져주심을 입기 위해서 받기 위해서 내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셉이가 그 파란곡절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어려움에서 어려움에서 어려움에서 통과해서 마침내 자기와 이스라엘을 다 구출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받은 것은 다른 것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셉과 그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건져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요셉을 통해 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이 건져 주셨는데 그 건져주심을 받은 그 방편은 요셉이가 하나님의 계명 지킨 그 외에 딴것 없습니다. 계명 지킨 것이 전부 건짐이 돼 버렸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러합니다. 그들이 그 전국이 죽이려고 모해하는 거기에서 그들이 죽어야 하는 불구덩이가 앞에 있을 때에 그들을, 다른 사람은 죽일 사람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뭐 다신종교인들인데 범신론자들인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기독자들만 저촉돼서 죽는 그 궁지입니다.
벌써 그 사회가 국가가 다 이렇게 싸였지마는 그 죽음에서 불구덩이 집어넣는 그게 죽음 같았지마는, 죽음 같았지마는 거게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 하는 그 이계명 지킨 그것이 그들에게 전능의 능력이 그들을 구출하고 그 원수를 다 진압시키고 해소시킨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다니엘도 그러했습니다.
다윗 왕 같은 분들도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몇 번이나 그렇게 계획을 가졌지마는, 스물세 번이나 가졌지마는 다윗 왕을 건지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그가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다는 것이 부끄럽지 안하고 그를 건지실 때에 이 악령들과 모든 송사자들이 비웃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담대히 다윗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떤 궁지에서든지 그 궁지에서 하나님만이 나를 건져주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시고 건져주시기를 원하시고 건져주실 실력도 가지셨는데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받는 것은 거게 대한 계명 지키는 것이 이것이 하나만 되는 방편입니다. 이 외에는 방편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는 이 계명을 업신여기고 그럴 때마다 주를 배반하고 피조물 어떤 것을 가지고서 그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기에서 믿는 사람들은 참 맛 잃은 소금이 되어서 버림당하고 천대당하고 사람에게 짓밟힌 것이지 그 궁지를 주의 도우심으로만 구출받을 이 욕망을 가지고 주의 도우심을 입는 데는 그 계명을 지키는, 당신을 사랑함으로 그 계명을 지키는 이 길 외에 딴 길이 없는 요 한 길을 잡고 걸어간 사람은 구출 못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출 못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져야 이렇게 맛잃은 소금처럼 천대받고 있는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구출 받아서, 파사 나라에서 다니엘로 인하여 그 온 전국이 그렇게 조롱 멸시했던 기독자들을 하나님을 이렇게 높여서 하나님처럼 높였던 것입니다.
요셉도 바로가 바로의 아버지가 됐다 했어. 모든 애굽 백성들의 주가 됐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다음의 말씀은 내일 아침에 증거하겠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요 말씀을 굳게 잡고 요 방편을 놓지 맙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확정을 지웁시다. 계명 지킴으로 생명이 끝나도 계명 지키는 그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요 주를 사랑할 때 주님이 건지신다는 요 계약을 잡고 우리는 담대히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도록 우리가 믿음을 지킵시다.
<기도>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떠한 궁지에서라도 주를 사랑하는 일, 곧 주님을 바라보는 일, 주의 계명 지키는 이것 하나만이 구출되는 방편인 것을 똑똑히 알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이 도리를 굳게 잡고 모든 함정에서 구출받아 주 앞에 영광을 돌리는, 세상 영육에 빛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