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지식

 

1981. 1. 23. 새벽 (금)

 

본문:고린도전서 15장 55절∼58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를 사망시키는, 우리를 사망시키는 그 권세가 뭣이냐? 이 사망이라는 것이  무슨 권세를 가지고서 우리를 사망을 시키느냐? 죄의 권세를 가지고 사망을  시킵니다.

그러면 죄는 무슨 권세를 가지고 사망에게 그렇게 명령하느냐?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권세로 삼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인데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인고로 무한한  법입니다. 또 하나님이 천 년이나 살고 말 것 같으면 천 년 동안 유지되는  법이지마는 하나님이 영원 무궁하기 때문에 하나님 법은 영원 무궁한 법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법이 무한한 법이며 영원 무궁한 법이기 때문에 이 죄도 그  법이 있는 데까지 그 법을 어긴 것은 다 죄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도  무한한 죄며 영원한 죄입니다.

그러면 죄로 인해서 사망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죄요 영원한 죄니까 그  죄의 값은 어떠합니까? 죄의 값도 영원한 사망이요 무한한 사망입니다.

그러기에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누가 이 범죄를 아니할 자가 있으며 또 이 죄에서  벗어날 자가 있느냐? 범죄하지 안할 자도 없고 죄에서 벗어날 자도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그것이 범죄한 것인데 그러면 선악과를 먹지 안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걸로써 다냐? 그 다음에 무한한 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법을 행할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이 범죄함을 속할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이 형벌을 받고 견딜 자도 없습니다. 왜?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이러기 때문에 무한하신 분이 대속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법으로 정죄하고 무한한 법을 근거해 가지고 사망된 데에서 벗어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게 없이는 벗어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법이라 영원한 법이라, 무한한 정죄라 영원한 정죄라, 무한한 사망이라  영원한 사망이라, 여기에서 이 형을 감당할 자도 무한한 자가 이 형을 감당할  수가 있고 영원한 자가 이 형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한하며 영원하며 죄가 없는 자, 그러면 죄가 없는 자이면 얼마나 없는  자인가? 무한히 없는 자 영원히 없는 자라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기를 하나님같이 되기를,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정하신 그 법에 다 만족을 이룬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않고는 될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은 공짜로 구원 얻는  것이니까 이 구원이 싸서 공짜가 아닙니다. 이 구원이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나 또 다른 이종교나 다 종교는 종교니까 종교로 통일하자’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도 모르고, 하나님의 정죄도  모르고, 정죄의 댓가도 모르고, 어떻게 하면 이 정죄에서 대속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그 대속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 종교나 저 종교나 같다 하는 그 말은 사람을 표준으로 해서, 사람을 표준으로  해서 사람이 표준이 돼 가지고서 사람 정도로 사람의 그 주관성, 사람의 그  지식, 사람 정도로 정죄된 것, 사람 정도로 사망하는 것, 사람 정도로 법을  세워놓은 것, 이것을 표준을 하기 때문에 ‘뭐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니까  인간이 있는 것 다해서 법 제정한 것이면 그 법은 이 종교법이나 저 종교법이나  같다. 또 인간이 다해, 힘 다 들여서 하면 같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그 영원성  무한성을 다 끊어내 버리고 아주 극히 제한되어 있는 그 인간만으로 전부를 삼는  가운데서 종교 통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 통일이 되면 신불신자의 인간 통일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들 말로  통일이 되는 것이지 그 속에 수많은 얽혀 삐뚤어져 있는 것이 있는 것인데  그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통일이 된다고 하는 것만치 속에서는 원수가  자라고 대립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통일도 무한자가 이 통일을 시킬 만한 그런 자격이 있고  그만한 또 그것을 알 만한 지혜도 있고 그것을 해결지울 만한 그런 능력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이랬다 말이오. 죄.

그러면 “죄요” 하는 데 여기에서는 죄니까 그 죄가 어느 정도의 죄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을  근거해 가지고 무슨 권능으로, 권능을 의지하고 그 권능으로 죄가 제정되는  것이냐?“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러면 이 율법은 인간이 세워놓은 법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법은  영원법이요 무한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해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무한하신 분이  영원하신 분 당신이 영원법 무한법을 인간에게 세우시고 이 법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시요 받은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만일 억억만 년을 자기가 죄짓지 않고 예를 들면 살았다 할지라도 억억만 년 그  다음에 죄를 지으면 내나 사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으로서만 이 법을 제정했고, 또 하나님으로서만 이  법을 지킬 수 있고, 또 하나님으로서만 이 법을 어긴 범죄를 대속하려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데 기독교의 근거는 여기에 있는데 이  기독자들이 전부 여기에서 나와 가지고 껍데기 외식이 돼 가지고 뭣을 하느냐?  다만 사람들로서 정한 법, 그것은 인간이 세워놓은 법이요, 이 국법 이것도  사람이 정해 놓은 것이요, 또 이종교의 그 종교법도 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 정해 놓은 이 법을 한계로 지우고 이 너머는 없고 이 법, 이  한계 안에서 사람들은 법을 삼고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으로서  해결지울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너머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주재가 되신 하나님이  당신이 권세가 있기 때문에 당신만이 모든 것을 주권할 수 있는데 그분의 법이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 저거끼리 모아놓은 몇 가지 법이 이행됐다고 해서 그 법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 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법을 생각지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세워놓은 법은 뭣이냐? 인간이 세워놓은 법은 인간이 볼 수 있는  법이요, 알 수 있는 법이요, 또 느낄 수 있는 법이요, 또 인간이 그 법을 행할  수 있는 법이요, 또 그 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된 그 정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정죄요, 또 그 법이 ‘이는 참 완성했다’ 하는 그 완성도 인간의 법으로  판단할 때 완성이요 인간 보기에 완성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은 제거하고 인간법으로 하니까 인간이 볼 수 있는 의, 인간이  볼 수 있는 덕, 인간이 볼 수 있는 죄,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이목이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것에서 그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만 위주를 하고 상대를 하고 나가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뭣이냐? 기독교 인본주의라는 것인데,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이  사회를 어떻게 잘 개량해서 나가는 것, 기독교 정치주의나 이런 것이니까 이것은  사람 보기에는 인정이 됩니다. 이것만으로 인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만이 인정되는 이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원치 안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그것에 인정을 받아 가지고 그게  어데까지 먼지가 날아가야 되느냐? 그것이 어디까지 비추어 나가야 되느냐?  인간이 볼 수 있는 사회 정화 또 도덕 여기에까지 이것이 비추어 나가야 되는  것이지, 마치 인간들이 말하는 도덕이나 사회나 하는 윤리라 하는 이런 것은  그것이 마치 자동차가 지나가면은 먼지 일어나는 것처럼, 저 해가 돋으면 환하게  비추어지는 것처럼, 해의 그 광선 이런 데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가  넘어가면 그 광선은 없어집니다. 해가 넘어가 버리면 빛이 아무리 있다가도 해  넘어가면 빛이 없어지는 것이고 해가 돋으면 빛이 있는 것입니다. 또 차가  지나가니까 먼지가 일어났고 차 지나가고 좀 있으면 먼지 다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이것 모양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게 근거해 가지고 사람 보는 도덕까지 나오고  사람 보는 사회까지 나와야 그것이 되는 것이고, 저게 있음으로 안에 것이  있음으로 겉어머리 것이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이런 것이라야 되어지는 것이지  안에 없는 껍데기만 맞춰놓은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이것을 가리켜서  외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껍데기 이것만 맞춰 가지고서  된다고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을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우리가 나기 전에도 이  무한한 범죄할 수 있는 범죄성, 우리가 죄짓지 안했지만 앞으로 죄를 지을 것,  무한한 범죄성,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이것을  끌어다가 우리에게 다 정죄를 했습니다.

‘아무것이가 몇 천 년 후에 나면 그 사람은 이런 이런 범죄를 할 것이라’ 하는  그 죄를 나기도 전에 범죄할 것을 다 우리에게 정죄를 하고, 정죄한 그것을 또  예수님에게 다 정죄해서 예수님이 대신 맡아 가지고 대형을 한 것이고 또 책임도  이 법을 다 행해야 되는 그것이 다 하면은 의가 되는데 다 행하지 못하면 그것  또 불의가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대신 다 행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 대형 대행 한 것이 무엇이냐?  어떤 것을 대형했으며 어떤 것을 대행했느냐? 어떤 원수된 것을 화목을 했느냐?  이것을 법적으로는 다 해 놨지마는 실질적으로 이 일을 하면서 우리에게 현실을  줘 가지고서 어떤 대형을 했다, 어떤 대행을 했다, 어떤 대생, 대생이라 말은  화목이 되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목을 했다 하는 그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알리기 위해서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그 현실에서 자기가 모르면 자기가  어떤 죄라는 그 죄를 알게 하고, 또 자기가 해야 될 의무를 알게 하고, 또  자기가 하나님과의 어떤 면이 멀어져 있는가 그것을 알게 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현실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또 현실을 만들어 줘 가지고 이것을 알게 하고,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가지고서 하나씩 둘씩 이기는 연습을 해 보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의  실력입니다.

또 이것에 대한 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것을 성신의 감동으로 알게도  하지마는 또 그 죄의 형을 어떤 그 죄에 대해서는 형벌이 있는 것인가 하는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이런 체험을 시키고 저런  체험을 시키고 시킵니다.

그래서 다 같이 현실은 다 일생을 살아 나가기는 나가지마는 현실을 살아 나가는  가운데에 그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같은 정도가 아니라  뭐 천층 만층이라 하지마는 천층 만층도 더 되는 그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은 꼭 같지마는 차이점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현실을 주신 것은 뭣을 목적으로 해서 뭣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현실을 주셨느냐? 하나는 죄에 대한 지식과 또 죄에 대한  그 실력, 죄를 이기는 실력, 죄에 대한 지식과 죄에 대한 실력, 또 죄에 대한 그  형벌에 대한 지식 또 그 형벌을 받는 그 실력, 형벌을 감당하는 그 실력, 또  의에 대한 지식, 의를 감당하는 그 실력, 또 원수에 대한 그 지식, 원수에 대한  실력 이것을 알고 또 자기가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이겼지만 자기가 한번  이겨보고 자기가 알아보고 자기가 이겨보고, 알고 이김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가 하는 것을 자기가 실질적으로 인정해서 느끼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만일 죄를 지었으면 그 죄 지은 것 ‘이것,  잘못됐습니다. 이것 내가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하는  그것만으로써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욕구를 이루어 드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죄는, 이 죄는 하나님께서 이 죄의 근거가 어데까지 있으며  어데까지의 이 형이 있는가? 죄에 대한 무한성의 지식을 알아 나가려고 애를  쓰고, 또 무한성의 형벌을, 무한성의 대속을, 또 무한성의 감사를 자기가  여기에서 찾아 느껴 나가려는 그것과 그러면 죄를 자기에게 무엇 때문에 줬느냐  하는, 또 이 의를 자기에게 무엇 때문에 줬는 하는, 이 원수를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줬느냐 하는 그 주신 목적을 자기가 아는 것이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지 안한 그 의가 나타나지 안하고 하나님의 예정되지 안한 그  범죄가 없습니다. 예정된 범죄를 인간이 어떻게 합니까? 안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예정되지 안한 원수 아닌 원수가 자기에게 닥치지를 않습니다.

전부가 예정대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그게 뭣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했느냐? 택한 자의 구속을 위해서 하나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정하셨고  창조하셨고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분명히 죄도 의도 원수도 화목도  이것이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위해서 있으면 그것을 닥쳤을 때에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이것을 뭣 때문에 자기에게 지금 주셨느냐  하면 죄에 대한 그 무한성, 또 거기에 대해서 무한한 정죄, 무한한 형, 무한한  대속, 대속해서 무한한 그 사죄를 줬어. 무한한 사죄를 줬습니다. 그 무한한  사죄에 또 무한한 소망이 있습니다. 무한한 사죄에 무한한 소망이 있으니까  무한한 소망을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무한한 배경이 있습니다. 무한한 배경은  하나님과 진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그러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만일 잘못돼서 죄지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죄지은 일 있으면 그  죄에 대해서 자기가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것이 단번으로 끝납니까, 단번으로  ‘내가 이런 죄를 지었다. 이것 회개해야 되겠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그만  단번에 끝나느냐? 또 그 양이 단번에 끝나느냐? 아닙니다.

그것을, 예를 들면은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깨달아 느끼는  것과, 또 믿음이 좀 있는 사람이 깨달아 느끼는 것과, 지금도 그 사람이 양심의  도수로 인해서 거기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정도가 다릅니다. 또 그 사람에게  있는 영감의 도수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딤전1:15 ) 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자라”(고전15:8) 어제 뭐 어데  우리 교인 가운데서 아이가 너무 약해서 유리관 속에 넣어놔도 하나는 죽는다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삭되지 못 해서 낳은 것은 유리관  안에서 키워야 되지 밖에서는 못 키운다 그말이오.

바울이 자기가 말년에 분명히 자기는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자와 같은 그렇게  약한 자라는 것을 자기가 말하고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인 것을 말했으니까 그분이  우리보다 죄가 많은가? 그분이 우리보다 죄가 많지 않습니다.

그분이 처음에 말하기는 율법으로서는 나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으로서는 자기가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랬는데 왜 죄인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법을 보는 눈이 점점 밝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죄가 많아 그런 게 아니고 눈이 밝아서 많이 보이고 더 크게 보여 그렇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이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성의 그 법이기  때문에 자기의 어두운 눈으로서 해결됐다고 그럴 게 아니라 자꾸 나벼보면 그  속에 아직까지 해결지워야 될 미래가 가득 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약점을 찾는 것이 끝나버렸고, 자기의 죄되는 것을 찾는 것이 끝나버렸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요것까지 요것만 입었다 그 끝나버리면  끝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는 상관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죄를 발견, 새로운 죄를 발견할 때에 새로운 사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사죄를 발견할 때에 이제 새로운 형을 발견하고, 새로운 형을 발견할  때에 예수님이 새로운 대형한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대형을 발견할 때에 새로운  감사가 나오고, 새로운 감사가 나올 때에 새로운 주님이 자기에게 필요하고,  새로운 주님이 필요할 때에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는 무한한 관계를 맺고 무한히 찾고 이래야 되는 것인데,  사람들에게 은혜가 어떤 것이 은혜냐? 이것이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아침에, 주님의 마음을 뺏들고 주님이 나를 떠날 수 없고, 주님이  나를 떠날 수 없고 주님을 내가 잡아두고 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안할 수  없는, 주님이 보실 때에 미점은 뭣이 미점이냐? 소자라. 죄인이라. 요것이  주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것이요 주님의 권능을 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강하고 잘난 것을 자랑이 아니라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왜? 약한 것, 나는”(고후12:5) 약한 것 그것이 자기에게는  보배라 말이오. 왜? ‘내가 약할 때 강해짐을 봤다. 나는 약할 때 강해지더라.

나는 무지할 때에 유지해지더라. 내가 죄인이 됐었을 때, 나는 죄인을 찾았을 때  나는 의인이 되더라. 내가 실패를 찾을 때 나는 승리가 나오더라.’ 하는 이  비결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 하는 말이 좀 벙벙하이 무슨 말인지  모르나 가만히 눈을 감고 깨달으면 알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무한법, 우리의 죽고 망하는 것이 그저 이 죽고 망하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고 망하는 것이 이것이 무엇을 근거해 가지고 죽고  망하느냐? 죄로 인해서 죽고 망합니다. 그러면 죄가 있으면, 죄가 있으면 죄로  말미암아 망했는데 또 죄가 있으면 또 망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또 죄가  있으면 또 망해야 될 것 아니겠소?이런데 이 사망이 무엇을 근거하느냐? 사망이  죄를 근거해 가지고 죄 있는 곳에는 사망이 있어. 그러면 죄가 끝나야 사망이  끝난다 그말이오. 그러면 죄는 뭣을 근거하느냐? 죄의 권세는 율법이라  그말이오. 율법이 끝나야 정죄가 끝나지, 율법이 무한한 율법이니까 무한한  정죄가 있다 그말이오. 또 무한한 의가 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것을 무한한 이것을 무한한 법을 줬어. 무한한 법을 준 것은, 무한한  법을 줬기에 무한한 정죄가 됐어.

그러면 무한한 정죄가 되는데 정죄가 안 되면 그 법을 지키면 뭣 됩니까? 무한한  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목적 정하신 것이 피조물이지마는 피조물 이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무한성 영원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목표를 정한  것이 하나님 목적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한성을 성경에 뭐라고 말했는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이 온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은 무한성입니다.

“거룩하심같이” 모든 것을 구별해서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같이, 이것도  영원성이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같이” 그리스도가 누구인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깨끗하심같이 깨끗하심같이 깨끗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향하여 찾아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가 찾아가다가 죄에 대해서  찾아가다가 이제는 죄에 끝을 봤다, 이제는 다 찾았다 하면 그 사람은 주님과의  인연이 끊어집니다. 자기가 행할 의무가 나는 이제 다 했다. 나 할 일 다 했다  찾았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끝이 난 사람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무한한 정죄를 찾고, 무한한 대형을 찾고, 무한한 불의를 찾고, 무한한  칭의를 찾고, 그러면 무한한 대행을 찾고, 그러면 우리 할 일이 뭣입니까? 그것  하나만 대답하고. 그 할 뭣이요? 우리 할 일이 뭣입니까? 여반에? 우리의 무한히  할 일이 뭣이요? 무한히 할 일이 뭣입니까? 남반에?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해야  될 자입니다. 무한한 감사해야 되니까 뭣이 됩니까? 무한히 당신의 것이 돼야  됩니다. 무한히 당신의 것이오. 무한히 당신의 것이요 영원히 당신의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은 뭘 삽니까? 그의 사랑으로 구속을 받아 피에 팔린  것이기 때문에 무한히 그의 것으로 우리는 무한히 그를 위해서 살아도 영원히  그를 위해 살아도 유한자가 무한자를 상대했기 때문에 유한자하고 무한자하고  품앗이를 했으니까 영원히 빚진 자입니다. 요것이 자기에게 올 때가 영감이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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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 주 맞을 준비/ 벧후 3장 8절-13절/ 1979년 12공과 13공과 선지자 2015.12.19
1283 주 안에 있는 것/ 요한복음 15장 2절-7절/ 880913화새 선지자 2015.12.19
1282 주 안에서 하라/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810102금새 선지자 2015.12.19
1281 주 앞에 흠없는 사람/ 요한일서 3장 16절-24절/ 830609목새 선지자 2015.12.19
1280 주 앞에서 점도 없이/ 베드로후서 3장 14절-16절/ 881227화새 선지자 2015.12.19
1279 주관 믿음에서 / 누가복음 21장 33절-30절/ 881202금야 선지자 2015.12.19
1278 주관을 깨야 참 믿음/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851003목새 선지자 2015.12.19
1277 주관적인 평안/ 마태복음 14장 24절-29절/ 850128월새 선지자 201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