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 믿음에서

 

1988. 12. 2. 금야

 

본문: 누가복음 21장 33절∼30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남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3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의 그 중량이 천지보다 무한히 뛰어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말과 같이 그렇게 평가하는 이런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자꾸 자기가 믿고 인정하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이 신앙이 된 지 후에 객관적인 신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들이 모든 믿음의 행위를  하려고 또 믿음의 사람이 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모든 믿음의 이 행위나 구원은 꼭 제가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제가 힘을  쓰니까 되고 안 쓰니까 안 되고 제가 한 것같이 여겨지는 그런 방편을 통해서  믿음의 일들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우리의 전부를 다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순종이 아니면  정상의 순종이 안 되기 때문에 꼭 자기가 한 것같이 하는 그런 방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곧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쓸 때에 그 신앙 생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잘못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공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으로 주시는 것인데 공으로  주시는 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우리가 받을 때에는 그 받는 방편과 또 받는  우리의 그 실력, 하나님의 은혜를 공으로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  실력은 무엇이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하는 그것이 아니면은 그 실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신앙 생활은 자기가 해서 되고 안 하면 안 되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받을 때에 그 받는 방편이  그러하고 그 받기가 얼마나 힘을 써야,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써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힘을 두고 하나님에게 부탁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종노릇은 하지 않습니다. 심부름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힘을 다해도 못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하고 내가 모자라는 것 부족한 것을 내가 다 해 주시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은혜지 그저 자기는 가만히 놀고 쉬고 있고 하나님이 자기 요구하는  대로 그렇게 종 모양으로 심부름군으로 그래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 우주의 중량보다 커서 우주는 없어져도  하나님 말씀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마태복음 5장에는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가감도 없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꾸 생각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니 틀림이 없다.' 내가  그렇게 인정하려고 애를 쓰고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자꾸 이렇게 애를 쓰는 이것은  우리의 주관 행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애를 쓰면 차차 차차 애쓰는 데 따라서 내 주관의 노력이  하나님의 이 계약의 말씀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만치 하나님께서는 또 믿어지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실력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얻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늘나라는 힘센 사람이 얻는 게 아니고 힘쓰는 사람들이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있는 힘을 아주 빈약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면, 여간한  힘이라 말은 보잘 것 없는 그 힘 아주 미약한 힘을 가리켜서 여간한 힘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주 미약한 힘 그 미약한 힘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려고 있는 힘을 다 쓰는 그자에게 하나님께서 열린 문을  주셔서 다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힘쓰는 자는 하늘나라를 얻는 것이요 자기의 실력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리라 생각하는 사람, 또 자기의 가진 실력을 다하지 안한 사람들은  얻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주관 행위가 있는 힘을 다 쓰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해  주십니다. 이래서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들이지 않으면 주님이 주시는 이 성화구원은 안 됩니다. 영이  중생되는 이 기본구원은 우리가 알기도 전에 이 구원은 돼 가지고 있습니다.

나기도 전에 벌써 이 구원은 영원한 때 전부터 이 구원이 이루어져서 우리의  행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구원이 되어 있다  이랬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알기도 전에 우리 영이 중생된 구원 얻었기 때문에 이 구원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도 없고 그저 알고 믿고만 있는데 이 중생된 영이 우리의  심신, 육을, 심신을 돕는 이 은혜를 받는 데에는 이 심신이 있는 것을 다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다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 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영생을 얻는다. 네게 있는 것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주는 구원은 받지 못한다.' 이게 다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은, 그러면 이 신앙 생활을 이걸 누가 하겠는가? 우리는  못 하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이래서 마치 우리 신앙 생활은 산을 올라가는 거와  같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날래다 할지 라도 산 한 십 미터만 단번에  올라가려고 해도 올라갈 사람 천하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라도 십 미터 아니라 백 미터 천 미터라도 꼬부락 꼬부락  앉아서 기어서, 굼벵이 기듯이 기어서 올라가면 천 미터도 올라가고 몇 천 미터도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게을 부리지 않고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서 신앙  생활을 하려로 하면 이 신앙 생활은 점점 장성해서 어데까지든지 자라가고  구원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그 아이들 말에 토끼 걸음 또 거북 걸음 둘이 시비해  가지고 거북이 이겼다는 말과 같이 그저 기독자는 쉬지 않는 근검이 있어야  됩니다. 쉬지 않는 부지런한 열심이 쉬자 않는 열심이 있어야 되지 뭐 그 사람이  계속하는 그런 열심이 없고 왈칵 힘 썼다가 안 썼다가 하는 그라는 사람들은 다  헛일합니다.

 그래서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켜서 모든 시험을 다 이기게  하겠다' 인내라 말은 계속이라 말입니다. 네가 내 계속의 말을 지켜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계속 되는 데에서 성공이 있지 딴데서는 성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에는 자기 주관이 하니까 돼지고 안 하니까 안 돼지는 것  같은 그렇게 여겨질 만치 그런 방편을 취하지 않으면 신앙 성장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불변이다. 가감없이 그대로 획 하나도 가감도 없이  어누리도 없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는 이 사실을 자기가 믿으려고, 내가 자꾸  믿으려고 애를 쓰고, 또 이런 것 저런 것 또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해 놓은 걸  보니까 말씀한 대로 다 됐고 이래서 자꾸 믿으려고 애를 쓰니까 믿음이 조금  생겨집니다.

 이러니까 '내가 믿으려고 하니까 믿어지고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안 믿어진다.

이러니까 내 주관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지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객관 역사는  없는 것이라.' 그렇게 사람들이 망령을 부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힘을 써서 믿으려고, 자기 주관을 다 기울일  때에 그때에 객관 역사가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공짜배기로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노력이고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지 제가 그 은혜를 만들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에는 주관 신앙 생활이 첫째로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우리가 알기도 전에 하나님의 그 객관 역사로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베푸셔도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는데 은혜를 베푸시는데 은혜  베푸시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어떻게 작용하는고 하니 '아무래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생겨지는 것, 다른 사람이 또  '어쩌든지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네가 모든 성공을 해야 되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이렇게 옆에서 권연하는 그게  뭐이냐? 권면하는 것이 그 사람이 권면을 하고 싶어 권면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권면이 왔고, 또 내가  성경을 보고 싶다고 보는 것 아니오. 내가 보고 싶다고 보는 것 같지마는  하나님이 성경을 보도록 얼마나 애를 쓰고 역사하니까 내 마음이 성경 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 그래 가지고 성경을 보고 깨달아지는 것,  그런 것이 다 먼저 객관 억사인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은혜가 나도  모르게 와 가지고 객관 역사의 은혜가 나에게 와 가지고 그 은혜로 나에게 푹  은혜 속에다 집어 담궈 놓고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내 주관에서, 내  주관에서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해서라든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라든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라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그 구원에 대한 것이 라든지 이런 것이  조금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믿어져서 믿을 마음이 생겨집니다.

 그러기에 객관 역사가 우리 모르게 와 가지고 역사함을 인해서 우리 주관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믿는, 예수 믿는 거나 하나님 말씀 믿는 거나 같은  말입니다. 믿어 봐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비로소 생겨집니다.

 그러면 비로소 생겨져서 믿어 봐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생겨져 가지고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믿으려고 애를 쓰니까 제 힘으로 덴는 것같이 이렇게 보이지마는 애를 써서 믿을  마음이 있도록 그렇게 애가 쓰여져서 힘들여 믿고 싶은 그 마음이 있도록 벌써  하나님 편에서 역사하셔 가지고서 그 은혜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믿을 마음이 생겨지고 믿을 그 열심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는, 다해서 믿는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와 가지고 내 주관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까지 만들어 가지고 이제 믿게 하기 때문에,  믿으면 그게 전부 하나님의 역사요. 그래 믿을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  가지고 객관적, 처음에 객관 역사는 내가 모르게 역사했고 내가 객관 역사에  피동돼 가지고 내 주관 역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에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객관 역사가 내 주관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게  됩니다. 알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게 되는 그것이 이제  신앙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금 모두, 우리 신앙은 대개는 모두 자기 주관에서 시발됐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성경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기 주관에서 우리  신앙이 시발된 게 아니고 객관이신 하나님 편에서 우리 신앙이 시발돼서 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모르게, 우리는 알 만한 그만한 눈이 뜨이지 안했고 알 만한  그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에 그 객관 역사를 모르고 내게 와 가지고 그 은혜가  내게 와서 역사해 가지고 그 은혜의 힘으로 인해서 내가 예수 믿는 그 발동이  생겨져 가지고 예수 믿는 일을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일을 할 때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신앙 생활을  하도록, 그렇게 다해서 신앙 생활 하도록,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신앙 생활 하도록 되면 그것이 객관 역사인 하나님의 역사가  벌써 나를 다 점령해 가지고 점령해 가지고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게 피동돼  가지고 그 은혜의 뭉텅이가 돼 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향하도록 이렇게 됐기  때문에, 그 은혜가 나를 와서 변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다음에는 내가 볼 수 있도록 그분이 와 가지고 나를  붙들고 이제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붙들려 가지고 그때 역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 말씀을 이렇게  믿는 것, 이 말씀은, 내 말이라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총칭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신구약 성경 이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요대로 이루어지는 이 말씀, 이 말씀의 신실성, 진실성, 이 말씀의 불변성,  이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완성성 이것을 내가 믿는 이것이 신앙의 모든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의 능력면을, 하나님의 기적면을, 하나님의 어떤  섭리면을, 축복면을, 그런 면을 믿는 그런 것은 다 지엽적인 신앙이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이 말씀은 획 하나 가감이 된다든지 변화된다든지 없어지는 것은  이 우주가 없어지는 것보다도 무한히 어렵다. 이 우주는 없앨 수 있을지라도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앨 수 없다.' 하는 이 사실을 믿는 여게서부터 모든 신앙은  출발하게 됩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갈 때에 '주님이 오라 이랬으니까  주님의 말씀은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주의 말씀은 말씀하시면  그대로지 그 말씀이 조금도 뭐 가감이나 에누리나 변동이 없다.' 하는 이 사실을  베드로가 믿을 때에 그때 물 위로 걸어가다가, 걸어가다가 그 믿는 믿음이  흐려지니까 그만 물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믿을 때에 이 말씀의 능력과 말씀하신 분의 능력은  역사하지마는 믿지 않고 의심할 때는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 속에 빠져 들어갔을 때에 그때에 주님이 다시 붙들고 말씀하시 기를 '믿음이  적은 자야' 그 말은 네가 처음에 믿어서 물 위로 걸어 왔는데 내나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절대성이라 하는 이것을 믿어서, 아무리 옆에서 못 믿구로,  바람도 불고 물결도 치고 아무리 못 믿구로 해도 그런 것들에게로 말미암아  소멸되지 아니하는 고 신앙을 가졌으면 그대로 주님에게까지 갈 수가 있는  것인데 그 주위 환경이 믿어지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환경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이제 차차 약해지니까 그 능력의 접선이 자꾸 약해지고 그러니까 그  믿음이 없으니까 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잡고 말씀하시기를 '적게 믿는 자야' 네가 처음에 믿다가 조금 오다가  그만 믿음을 없앤 자야. '왜 의심하느냐?' 왜 네가 믿는 것을 포기하느냐 그말이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것이 믿음의 전체인데, 이 말씀에는 빠진 것이  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말씀해 놨습니다. 말씀해 놓은 그대로 우리가  믿으면 되는데 요 믿지 않는 데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접선은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신앙 생활에서 제일 기초적으로 중요한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획 하나도 없애거나 가감하는 것은  이 우주를 없애는 것보다 더 무한히 크고 무한히 중하다.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는 없애도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앨 수 없다.' 요렇게 믿어지는 요 믿는  믿음에서, 믿음이 이게 뭐이냐? 믿음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요,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첫째는 주관 신앙을 가지고,  주관 신앙을 가지고 이렇게 신앙하면 주관 신앙이 차차 자라감에 따라서 객관  신앙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믿으려고  애를 쓰는 그것은 이제 주관 신앙이오.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나중에는,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내가 믿으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은 없어져 버렸고, 내가 믿을라고  애쓰는 사람은 벌써 믿음에 삼켜져서 믿는 사람이 되고 없어져 버렸고 이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믿어지도록 그렇게 역사하는 그 객관 역사가 와 가지고  나는 믿어지는 사람이 돼서, 말도,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인해서  말하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말하려고 신구약 성경 보고  성경대로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게 주관 역사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가서  여게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하려고 하지  안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말합니다. 내가 그 말을 하려고 뭐 성경 보고.

이렇게 기도하고 애를 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말씀하셔서 내 말이  나옵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10장에도 말씀하시기를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말할  때에 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서 말을 해서 내가 그때 피동이 돼 가지고  한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말씀하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주관 신앙에 전심 전력을  기울여야 된다. 주관 신앙에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그것이 내가 모르는 객관  은혜의 그 신앙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하시는 그 결과의 표적으로 내 주관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다 기울이는 이 사람이 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다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이 사람이 됐으면 내 주관은 먼저  하나님의 주관에게 내가 피동이 돼 가지고 내가 알기에 주관이라는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다 기울여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니까,  신앙하게 되니까 신앙하게 되니까 내 주관이라는 이것이 벌써 하나님에게  피동돼 가지고 하나님의 것이 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니까 하나님은 다시  나를 붙들고 당신의 지체로 삼아 가지고 역사 하셔 가지고 모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꼭 자기가 해서 된 것처럼 그렇게 해 가지고  되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은 왜 그러냐? 그것은 나를 다 당신이 점령하셔 가지고  내 전부가 당신의 것이 되어지도록, 내 전부가 당신의 것이 되어지도록 하다 그  말은 내 사망의 것이 당신의 생명의 것이 되니까 생명의 것이 되나 생명에게  삼켜져서 생명 속에 생명화된다 말이오. 그리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모든  역사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자꾸 믿으려고 애를 써야 믿어지지 믿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믿어진다 쉽게 말하면 그런 말도 되겠습니다. 믿으려고 애를 써야 믿어집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얼마나  쓰겠느냐? 자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자기  전부를 다해서 믿으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쓰면 차차 차차 믿어지게 돼서 나중에는  믿음이 장성해져서 자기에게 믿지 않는 요소는 하나도 없고 자기에게 있는  요소의 전세의 자기라는 요소의 전부는 다 믿는 요소가 돼 버리고 맙니다. 믿는  요소가 되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당신의 수족으로 쓰셔서 모든  역사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으려고 애를 쏠 때에 믿어지는 그것은 무슨 역사입니까? 내가  믿으려고 애를 쓸 때에 믿어지는 그것은, 그것은 사람 보기에는 제가 보기에는 제  주관 역사인데, 제가 보기에는 제 주관 역사인데 실은 제 주관 역사가 아니라  제가 모르는 객관 역사가 저에게 와 가지고 주관을 무한히 힘써 일으켜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객관에 복종시켜서 복종해 가지고 그와같이 지금 자기 주관이  전부를 다 기울여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으려고 충성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객관 역사가 보이지 않게 나를 그 역사에게 사로잡아서  역사의 것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그러고 나면 나중에 이제 보이는 그  객관 역사가 나에게 와 가지고 나를 보이는 역사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역사를  이루어 가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객관 주관 고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저 여게서 듣고 버리면 안 돼. 자기가 듣고 나서 애를 써서 노력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오면 안 돼요. 옥토에 뿌린 씨라 하는 거는 뭐이요? 길바닥 씨는  길바닥이 여무니까 그 씨가 길바닥의 토양을 하나도 먹지 못하고 또 돌짝밭에  뿌린 씨도 좀 먹다가 그만 돌이 받쳐서 못 먹었고 덤불 밑에 뿌린 씨도 그게  자라서 그만 자라 먹으려 하니까 땅에 있는 양분을 먹으려고 하니까 그 덤불이  들어서 방해를 지겨서 못 먹었다 말이오.

 옥토에 뿌린 씨는 어떤 쁠린 씨요? 윽토에 뿌린 씨로 말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오면 이 옥토에 뿌린 씨는 땅에 있는 지기를 그 씨가 다  도식했어. 혼자 다 먹어 버렸어. 땅에 있는 지기를 그 씨가 다 먹으니까 이제 그  씨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말씀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  목숨, 힘, 뜻 다 먹어야 됩니다. 그걸 다 먹어야 자라고 또 그뿐 아니라 내 소유,  몸, 생명 다 먹어야 자람니다. 이래서 요거 먹고 자라는 거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요거 먹고 그 말씀이 내게 자라서 결실이 되고 또 저거 먹고 자라서 결실이 되고  어쨌든지 하나님의 도를 우리가 받았으면 받은 도는, 그 도는 나를 먹지 않으면  내게 와 가지고 결실은 못 합니다. 그 도가 내게 와 가지고 나를 먹은 것만치  자라고 자란 것만치 결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듣고 그저 듣고 난 다음에는 하루 종일 살아도  자기 마음도 돈이 다 먹고, 또 자기의 뭐 생명도 돈이 다 먹고 하루 종일 산다는  그 생기도 다 그놈이 다 먹고, 뜻도 그놈이 다 먹고, 힘도 그놈이 다 먹고 그놈이  다 먹고 하나님의 도는 받기만 받았지마는 하나도 이 도가 나를 삼키지 뭇하고  내가 삼키지 않기 때문에 이 도는 빼빼 말라 가지고 아무 결실이 없어. 아무리  수싶 년 믿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래서 하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라" 이제 다른 사람이  조심하라 한다고 조심하는 이런 송아지 믿음을 버려야 돼요. 송아지 믿음을  버려야 돼.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하니까 나오고 '아이구 어째' 옆에서 권면하니까  나오는 그까짓 놈의 신앙은 목맨 송아지 신앙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 없어.

 뭐 옆예 사람이 기분 좋게 하면 뭐 있는 것 하고 또 봉사하고 또 뭐 땅의 것이  잘되면 뭐 예수 믿는 척하고 하는 그 것이 전부 원인이 땅에 있기 때문에 그  껍데기는 예수 믿는 것 같지마는 원인이 땅의 것이니까 원인을 잡아 훌치면  나머지 결과는 다 따라오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원인이 하나님이 원인이 돼야  되지 땅의 것이 원인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그 말은 네가 스스로 네가 네 마음을 단속하고 네 구원을  준비해야 되지 남에게 피동되는 그런 것으로써 믿음 준비 하려고 하지 말아라.

네가 네 힘으로 스스로 능동적으로 네 신앙을 준비하도록 그렇게 힘을 쓰라  그말이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러면 스스로 조심하는 것은 이것은 옆에 피동되지  말고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라" 옆에 피동되지 말고 조심하라. 그러면 마음을  조심하는 이 조심을 일으키는 것은 어데서 왔습니까? 동에서 왔어 서에서 왔어?  어데서 왔어?  스스로 조심하는 이 조심하는 그 경성, 그 깬 생활, 그 능력은, 조심하는 능력은  어데서 왔습니까? 위에서 왔소 밑에서 왔소, 동에서 왔소 서에서 왔소? 목사로  말미암아 왔소 권찰로 말미암아 왔소, 어데서 왔소? 스스로 조심하라 했으니까  어데서 그 조심이 나왔습니까? 자기 속에서 나왔다 그말이오. 속에서 나와야 돼,  속에서. 조심하는 그 조심이 네 속에서 나와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너는 항상 이 구원 이루는 이 마음이나 이 열심이나 이 생각은  옆에 네 몸 밖에서 피동돼 가지고 하지 말고 네 속에서 나오는 그 힘 가지고  네가 네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을 해라.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마음 속에 뭐 있는데? 마음 속에  신앙 양심이 있지. 신앙 양심 속에는 뭐 있는데? 신앙 양심 속에는 진리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진리가 들었지. 그러면 진리 속에는 뭐이 들었는데? 성신의  감화가 있지. 여게서 나와 가지고 네 마음을 단속을 해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루도록 이렇게 해야 되지 네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네 속에서 나온  힘이 아니고 옆에 목사의 권면으로, 권찰 권면으로, 또 옆에서 뭐 분위기가 좋아서  뭐 명예가 좋아서, 전부 땅의 것을 땅의 것을 욕망하거나 땅의 것의 가치로  인해서 일어나는 힘 그까짓 거 다 썩은 힘이고 또 이 모든 땅에 있는 피조물  그런 걸로, 암만 목사든지 장로든지 누구로 인해 나는 그런 것도 다 썩은 것이고  다 소용 없고 원인이 오직 피와 성령파 진리가, 네 속에 너를 중생시키기를 피와  성령과 진리가 너를 중생시켰기 때문에 너를 중생시킨 네 속에 피와 성령과  진리로 인해서 네가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이 조심돼 가지고 이렇게 구원 이루는  일을 해야 되지 네 몸 밖에 있는 피동하는 것은 그거는 뭐이냐? 다 죽은 증거라.

생명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면 물이 홀러내려가면 내려가고 빙빙 돌면 돌고, 생명  없는 것은 주위 환경에 따라서 피동되는 것이 생명 없다는 증거고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주위 환경에 피동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합니다.

 제 마음대로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이렇게 자기 속에 꾀와 성령의 진리의 소욕대로 움직이는 그게 사는 것이지  이거 없고 항상 옆에 피조물로 인해서 움직이는 그런 거는 생명 없는 다 죽은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라" 남에게 피동돼서 조심할 게 아니라 네 속에서  나오는 힘으로 조심해라. 이러기에 좋은 것도 네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제 좋은  것 하고 이제 모든 주위 환경에 나쁜 것을 막는 것도 네 속에서 나오는 힘  가지고 막아라.

 그러면 모든 그 사망의 세력도 내 속에 나온 것으로 다 방어하고 또 생명의  역사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는 요것을 연습해 가지고 항상 자기 속에,  마음 속에, 이래서 '지킬 것 중에도 그중에 지킬 만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왜?  모든 생명의 근원이 여게서 나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자꾸 주위 환경에 피동되는 이 일을 하지 말고 자기 속에  '기름 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니까 그대로 네가 행하라.'  이랬어.

 그러니까 속에서 나오는 여게서 피동될 요것을 생각해야 되지 이걸 공들이지  않고 자꾸 주위 환경에 모든 껍데기에서 피동되는 이 일이 송장 일이요 썩는  일이요, 주위 환경에 피동된 것은 뭐이든지 썩은 것이오. 다 썩은 것이라.

 이러니까 썩는 일 하지 말고 사는 일을 해야 되는-데 자꾸 속에서 나오는 그 힘  가지고, 그래서 '너는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배울 필요가 없다. 왜? 기름 부음이  네 속에 있나니 그 기름 부음이 너한테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지 안했어?  이러니까 자기 속에서 나오는, 속 어데? 자기 속에 마음 속에 양심을 찾아야  됩니다. 양심 찾지 않는 자는 신앙 생활 뭐 몇십 년 해도 아무 소용 없어, 그거는.

기본구원뿐이지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어.

 양심을 찾으면 이 양심이 그까짓 거 뭐 압니까? 양심 찾으면 그 양심은 진리를  찾는 것이 양심입니다.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꼬?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에 맞겠느냐?' 이렇게 자기가,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이 지식에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라고 요렇게 찾는 요것이 양심인데,  그러니까 '요게 하나님의 뜻이다' 찾고, 하나님의 뜻이다 찾고 나니까 그 속에  성령님의 감화가 오고,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래 가지고 우리가 무한히  존귀해 지기도 하고 무한히 능력 있기도 하고 무한히 지혜롭기도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땅위에 있으나 그거 뭐 그런 일을 안 해 그렇지  영계와 이 물질계 이거 다 전부 통치할 사람이라. 에이구 그거 뭐 이거 무슨  동남아니 구미 무슨 나라니 그까짓 거 손톱만치도 못한 것. 하늘에 있는 저와  땅에 있는 거를 다 통치할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그런 것을 벌써 자기에게 욕망을 두고 그것을 점령하고 그거 맛도 보고 통치할  그거 지금, 통치할, 뭐라 할꼬? 정치과라 할까? 이걸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땅에 있는 뭘 부러워하고 뭘 탐하겠어? 그저 사람들을 위해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 허 허 이러고 있지 땅위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고 다 아는  사람은 똥오줌과 같이 여깁니다. 배설물이라.

 그게 그거 무슨 필요하냐? 그 속에서 내 구원올 이루기 때문에 필요하지  그것만으로써는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네  속에서 나오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붙들리고 또 네 마음으로  말미암아 네 이목구비 수족이 붙들려서, 눈으로 암만 보고 싶지마는, 보고  싶지마는 속에 마음에서 '보지 말아라!' 아무리 귀로 듣고 싶지만 '듣지 마라'  아무리 가고 싶지마는 '가지 마라' 아무리 하고싶지만 '하지 마라' 아무리 먹고  싶지만 '먹지 마라' 내 속에서 나오는, 그 능력에게 피동되어 사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생각해 봐요. 여러분들 하루  종일 뭐 어데, 어데 피동됐어? 잘 때도 '회사에 뭣이 어떻고, 월급이 어떻고,  장사하는 데 어떻고, 누구하고 의논하는 거 어떻고.' 전부 피조물하고 움직이고  의논한 것뿐이지 속에 양심의 피동을 받았느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뭐라  하느냐! 내가 이 움직임에 진리의 말씀이 뭐라 하느냐? 진리의 말씀에 한번  생각이나 해 봤느냐? 피동됐느냐? 영감에 피동됐느깍? 그리 안 하면 죽은 자라.

조심하지 않으면 속에 나오는 그 능력으로 조 마음을 붙들고 역사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이라' 그리 안 하면 '방탕함이라' 방탕함이라 말은 향방도  없고 목적도 없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속에 생각나는 대로  방탕하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산다 그말이오. 마구잡이로 살아. 마치 사나운 개를  이렇게 당글어 매 놨다가 끌러 놓으면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거와 마찬가지로  제 마음대로 다니니까 방탕해. 방탕하니까 이것이 무슨 소망은 하나 가져야 될  그때에 이 소망 가졌다가 저 소망 가졌다가, 이 취미 가졌다 저 취미 가졌다가, 이  욕망 저 욕망, 욕심도 뭐 오만 욕심, 오만 욕망, 오만 소원 오만 취미 오만 생각,  이거는 뭐 아주 인격으로 말하면 그거 도면을 쳐 보면 잡것 잡것, 잡성스러운 것  말이오.

 그거 뭐라고 할꼬? 그거 뭐 잡놈이라 해야 되겠소 잡년이라 해야 되겠소? 아주  망신창의 창기보다도 더 잡돼! 이게 방탕이라 말이오! 네 속에서 너를 다스리는  그 능력을 네가 받아 가지고 살지 않으면 너는 잡것된다. '방탕' 잡것 된다  그말이오. '방탕' 잡것 된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술취함이라, 그러면 술취한다  말은 이 술은 사상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요 지식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술취한다 말은, 뭐꼬? 청문회가 있으니까 청문회 거게 또 청문회 하니까 거게 막  도취가 돼 가지고, 교역자들도 모이니까 '답하시오. 밑에 사람한테 밝히시오.' 그저  세상이 지금 공산주의 오면 공산주의 사상에 도취되고, 사회주의 오면 사회주의에  도취되고, 민주주의 오면 민주주의에 도취되고, 뭐 요새는 학도 별별 학들이 다  있으니까 이거 오면 여게 도취되고 저거 오면 저게 도취돼 가지고, 아무리 도취돼  봤자 망하고 죽는 것 뿐이지 거게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술취하는  것이라.

 예수 믿는 사상, 하나님의 이 포도주, 생명의 이 복음은 버리고 이 세상 모든  음행의 포도주에 도취되는 그걸 가리켜서 술취함이라 그렇게 말해. '술취하지 마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  이래서 세상주의, 육신주의, 오늘 죽을지 모르는 것이 항상 세상주의, 육신주의,  살 주의, 오늘 저닉에 죽을지 모르는 게 항상 살 준비만 합니다. 어리석소.

 죽으니까 죽을 준비해. 죽으니까 죽어도 후회없도록, 죽으니 준비 해야 됩니다.

'나는 죽기 때문에 내가 무슨 준비해야 되겠느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슨 준비해야 되겠느냐? 내가 죽어서 무궁의 세계에 나아가게 되니까 나 뭐해야  되겠느냐?' 이 죽음을 생각하면 준비하면 지혜 있는 사람이 될 전데 항상,  이사 갈 풍체가 땅에서 살 것만 생각하고 사니까 항상 어리석은 일이라. 항상  해야 헛일만 하고 있어. 술취함이라 말은 세상주의, 세상주의라 말은 과학주의  이십세기의 문화주의, 여게 암만 취해 봤자 소용 없어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만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저 요만한 정도로 살면 또 요만한 정도로 살과, 또 그만한 정도가  됐으면 또 요만한 정도로 살고, 이거는 뭐 무한정이라. 그것을 가리켜서 '네가  수입이 더 않으면 어쩔꼬?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는다.' 네가 자꾸 놨위를  넓히면 한정 없어. 그래서 이것을 성경에 말하기를 무저갱이라, 밑구멍 없는  구멍이라 했어. 밑구멍 없는 구멍이라.

 이러니까 뭐 못 먹어서 염려가 아니라, 생활의 염려라는 거는 못 먹어 그런 게  아니라 '이거' 억대 있는 것은 십억 가지고, 십억 있는 것은 백억 가지고 싶고, 이  끝이 없어.

 이 어리석은 것아! 네 속에 탐심이라는 마귀가 들어 있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거는 끝이 없다. 아무리 또 곳간 새로 헐고 범위를 헐고 헐고 범위를 넓히고 넓혀  가지고 암만해 봐도 그것이 네 생명을 부르는 고날까지 고놈이 들어서 자꾸  범위를 넓혀서 암만 있어도 더 더 더 그러다가 멸망받는다 그말이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마음이 이제 둔하여지는 거는 마음이 마음이  예민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둔해져. 생활의 염려로. 둔해지기는,  하나님의 참 이치를 깨닫는 데에 둔하지, 저 할 일이 뭐인지 아는 데 둔하지,  자기를 멸망시키는 일이 뭐인지 모르는데 둔하지, 전부 옳은 것 아는 데에  둔하니까 옳은 것 모르지. 또 자기 멸망시킬 것 둔하니까 모르지 면망할 것  모르지 자기에게 복된 것 모르지, 죽는 것 모르지, 사는 것 모르지 알속 있는 것  모르지, 허탕칠 것 모르지, 전부 이래 놓으니까 마음이 둔해져.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오늘밤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부르면 영혼을 부르면 얼마나  슬기롭게 살았어? 전부 헛일이요, 전부 헛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 날이' 그 날이라 말은 개인으로 죽음의 날을 가리켜 말하고  예수님의 재림날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날이" 네 종말날 말이요 종말날.

재림으로 종말이든지 네 생명이 끝나 종말이든지,  '그 날이 덫과 같이 온다' 덫이라 말은 그물이라 말이요, 그물. 덫이라 말은  그물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네 종말날이 그물과 같이 온다. 새라는 놈이,  여기 새 그물을 말하는데. 새라는 놈이 제 마음대로 날아 돌아다닙니다. 제  마음대로 날아다니다가 그물에 딱 걸리면 그만 그날 죽는 날이라.

 하나님이 그물 쳐 놓은 이 그물은 피할 길이 없어. 하나님의 계약의 그물이요  계약의 그물 계약의 그물인데 이 계약대로 행한 것은 이 그물에 걸리지 안해.

계약대로 행한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의 그물이기 때문에 말씀에 걸리는 것만  걸리지 말씀대로 행한 것은 이 그물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을 이 오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이러니까 오늘 저녁에 이 말씀 증거한 거는 내가 '덫과 같이' 이 말씀 때문에 이  말씀 증거합니다. 모두 다, 이 덫이라 하는 것은 제 마음대로 자유하는 자유가 이  그물에게 딱 걸려서 그것이 그만 끝입니다. 그물에 걸리면 그만 잡아. 그물에  죽어, 망해. 그물에 걸리면. 그물에 걸린 그때는 그뭐 새라도, 새라도 뭐이요? 전  부치는 것 뭐라 하노 그거? 튀김 튀기는 거 뭐이야, 그게? 후라이판. 옳지,  후라이판 후라이판에 그만 자글자글 볶아서 그만 다 헛일이요, 그만.

 여러분들 우리가 후라이판에 볶여. 뭣이? 자유가 후라이판에 볶여 자유가  후라이판에. 제맘대로 말하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욕심 품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싶은 대로 취미 가지고 싶은  대로, 제 멋대로 얼마든지 해. 얼마든지 하나 하나님께서 그물로 싹 훔쳐서 다  후라이판에 자글자글 볶아서 태울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고 보고  있어요. 이렇게 사람들이 제맘대로 한 것 그거 전부 하나님의 말씀의 이 그물  심판에 다 걸려서 절단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도  하고 자기가 항상 조심해서 마음을 잘, 자기 속에서 나오는 이 충격으론 말미암아  자기 마음이 붙들려지고 이렇게 항상 새로워져서, 그물에 걸릴 거는 안 해.

하나님의 말씀에 걸리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걸릴 거는 다 그물에 걸릴 거라.

말씀의 그물이라. 하나님 말씀에 걸리지 않도록, 그저 어쩌든지 하나님 말씀에  걸리지 않도록 '하, 요번에 이 일에 잘못하면 그 사람 친구 말대로 했으면 요  하나님 말씀에 딱 걸릴 터인데, 우리 마누라 하자 하는 대로 했으면. 이 그물에  걸릴 터인데.' 그러기 때문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이랬어.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암만 사랑해도, 암만 형제간이라도, 암만 부자간이라도, 아무리 친해도  하나님 말씀에 어기면 안 들어.

 왜? 오늘 내가 그물에 걸리는지 내일 그물에 걸리는지 모르는데 이제 하나님  말씀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고것을 생각해서 그물에 걸리지 안할 것이라면  그대로 하고 할 때에는 그거 뭐 천하가 죽인다 해도 그대로 해.

 사람이 죽이는 것보다 하나님이 죽이는 게 더 두렵기 때문에, 사람에게 몽둥이  맞는 것보다 하나님께 몽둥이 맞는 게 더 두렵기 때문에, 사람에게 벌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벌받는 게 더 무섭고 크기 때문에. 이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마음이  둔하여지고" 이거 여러분들 옛날 에덴 동산에부터 남자는 해와한테 꾀였어.

해와로 말미암아 망했어. 남자의 실력은 여자에게 꾀이지 않는 그게 제일  실력이오. 여자의 실력은 남자를 꾀우지 않고 돕는 그게 제일 큰 실력이오. 뭐 다  정신이 뺐으니까 이제 옳고 바른 걸 다 몰라요.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인자 앞에 서도록" 하필 예수님 앞에 서라 하지 왜 인자 앞에 서라 합니까?  인자 앞에 서라 말이 무슨 말이야? 인자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 중에  제일 제일 거지된 것이 예수님이시요. 알겠습니까? 여기 인자는 인자는 그 근본  부요하신 하나님이신데 제일 거지된 하나님이라 말이오. 거지돼 가지고 온  하나님.

 왜 인자라 했겠소? 하나님의 그 무한한 부요를 다 내놔서 당신의 계약을  준행하는 자에게 내놓은 그 모든 부요를 다 줘. 내놓은 부요 누구 주려고? 내놓은  부요를 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자에게, 다 줄 터인데, 줄 터인데 이것은 생각지  못하고 항상 땅의 것만 생각하다가 멸망을 하니까 항상 네가 깨어서 기도해서  하나님이, "인자 앞에 서도록" 하나님이 모든 부요를 나 주려고 내놨는데  내놓으신 그 모든 부요를 다 내것으로서 유업으로 상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네가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

 술취하지 말아라. 세상주의에게 도취하지 말아라. 이래서 사람을 만나 보니까 그  사람 좀 만나고 나니까 하늘나라는 천리 만리 멀어지고 세상이 가까워져서  '하이구, 이것도 해야 될세, 저것도 해야 될세.' 땅의 것은 '이것도 없네. 저것도  없네.' 땅의 것은 할 것도 많고, 갖출 것도 많고, 모자라는 것도 많고 이렇고  하늘나라는 그만 감감하게 그거는, 아주 완전히 잊어버릴 만치 그와같이 돼지고,  어떤 사람은 만나니까 땅의 것은 그렇게 요긴한 게 보니까 '그거 땅의 것은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 아무 욕심이 없고, '하늘나라의 이것도 모자란다. 저것도  모자란다.' 하늘나라 모자라는 것만 자꾸 생각해집니다.

 사람을 만나서 하늘나라로 갈급이 돼지고 세상으로 멀어지면 그 사람 만날 수  있는 사람이고 그 만나니까 세상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그거  원수라. 만날 가치가 없는 사람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 책임을 잘 감당하고 부장 선생님도 감당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으면 앞으로 큰일 납니다. 하루 삼십 분 이거 등한히 하면 앞으로 큰 환난에 다  패전합니다. 이기지 못해요. 제 마음대로 살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도  한정이 있어. 주님이 오시면 그만 그물같이 그날 다 걸려 버리고 맙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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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 죄에 대한 지식/ 마태복음 18장 1절-35절/ 851027주전 선지자 2015.12.19
1294 죄에 대한 지식/ 고린도전서 15장 55절∼58절/ 810123금새 선지자 2015.12.19
1293 죄에 대한 지식/ 마태복음 18장 5절-30절/ 1985년 22 공과 선지자 2015.12.19
1292 죄의 값은 사망/ 로마서 6장 23절/ 84121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9
1291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로마서 6장 23절/ 861217수새 선지자 2015.12.19
1290 죄의 성질, 범위, 결과/ 창세기 2장 15절-17절/ 820709금새 선지자 2015.12.19
1289 죄의 성질과 죄를 벗어나는 법/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31114월새 선지자 2015.12.19
1288 죄의 역할과 세력/ 로마서 6장 20절-23절/ 830415금새 선지자 2015.12.19
1287 죄의 해독과 회개의 효력/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40301목새 선지자 2015.12.19
1286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요한계시록 2장 21절-23절/ 890802수새 선지자 2015.12.19
128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마태복음 9장 9절-13절/ 1976년 5 공과 선지자 2015.12.19
1284 주 맞을 준비/ 벧후 3장 8절-13절/ 1979년 12공과 13공과 선지자 2015.12.19
1283 주 안에 있는 것/ 요한복음 15장 2절-7절/ 880913화새 선지자 2015.12.19
1282 주 안에서 하라/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810102금새 선지자 2015.12.19
1281 주 앞에 흠없는 사람/ 요한일서 3장 16절-24절/ 830609목새 선지자 2015.12.19
1280 주 앞에서 점도 없이/ 베드로후서 3장 14절-16절/ 881227화새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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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 주관을 깨야 참 믿음/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851003목새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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