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20:12
우리의 집
본문 :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어제 1층에서, 녹음한 것을 녹음기에 대고 다시 틀어 봤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까 좀 깨닫고 유익이 되더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들으니까 유익이 되더라고 생각하는 분들? 그 좀 깨달아지고 알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네, 남반이 많고 여반에는 좀 나이 많은 분들이 많은데. 나이 많은 분들은 아마 와서 들으면 많이 깨달아질 겁니다. 또 듣고 듣고 하니까. 한 번 듣고 두 번 들으니까 잘 깨달아질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을 할 것입니다.
그러고 그 소리가 나도 자기는 그럴 때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니까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거기에 대한 자기가 기도를 하면서 지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거기 대해서 느끼지 못하지만 느낄 때 '이 면에 대해서 나는 기도를 못했다. 이 면에 대해서 회개를 해야 되겠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때 그때 자기는 기도를 하면서, 안 들어도 되니까. 예를 들면 그 설교를 듣다가 어떤 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다음에 그만 안 들어도 그 한 가지를 거머쥐고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예배드릴 때에는 그 듣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그런 일이 있어도 한쪽 기도하면서 그 듣는 데 주력을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예배드리는 게 되기 때문에 듣는 데 주력하지마는 그것은 자기가 필기한 것을 읽는 것과 같고 하기 때문에 그때는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합니다.
옆에서 암만 녹음을 틀어도 자기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거 안 듣고 기도할 수 있고 또 듣다가 자기에게 맞쳐질 때에는 그 문제를 들고 그만 기도하고 다른 것은 듣지 않아도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로 할 수 있으니까 거기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지난밤에는 보니까 철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를 못합니다.
처음이니까 그렇겠지마는. 지난 금요일날 밤에는 보니까 철야하는 사람이 그전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주일날 밤에는 철야하는 사람이 처음이라 그런지 그렇게 많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차차 많아지면 불을 때 가면서 그렇게 할 그런 가치가 있고 지난밤 모양으로 그렇게 그런 숫자로 모이면 좁은 데 같은면 하지마는 그 넓은 데 하루함 뜨시게 하려 하면 기름값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이 돼집니다.
앞으로 만일 철야를 많이 한다고 하면 계속,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 계속해서 거기에 불을 피우고 철야기도를 하도록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앞으로 그저 경제가 허락하면 그렇게 넓은 장소를 하지 않고 좀 좁은 장소가 있으면 좁은 장소에다가 계속 불을 피우면서 밤마다 그렇게 기도를 하도록 주선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셔도 여기 대해서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고 또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지나가는 말로 듣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 많고 적은 원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복되게 예정되고 덜 복되게 예정된 그 결과입니다.
우리가 언제 떠날런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세상에서 죽는 그 시간이 되면 다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원이 결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죽으면 자기의 마음이나 자기의 몸의 힘이나 자기 활동의 힘이나 또 자기가 해 놓은 이 모든 이력들의 그 힘이나 가치나 자기가 소유하여 있는 그 모든 소유들의 이용되는 힘 그런 것이 세상에서 성령과 진리, 영감과 진리로 변화함을 받은 것과 받지 아니한 것이 그때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받은 것은 그것이 내 마음이지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지마는 하나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이 됐습니다. 내 힘이지마는 하나님 힘과 같이 됐습니다. 왜? 하나님의 힘과 내 힘이 연결된 것만치 그것은 내 힘이 하나님 힘 됐고 하나님 힘이 내 힘 됐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게 보태 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힘이 내게 보태져서 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폭포수 밑에 그릇을 갖다가 놓는다 할지라도 그릇이 된 것만치 물이 받쳐지지 그릇이 작은데 위에서 많은 물이 떨어진다고 담겨질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만치만 하나님의 것이 자기에게 와서 역사할 수가 있지 연결되지 못한 그것은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 연결된 몸, 연결된 행위, 연결된 일, 연결된 모든 만물, 이렇게 연결된 것만치는 하나님으로 연결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충만이 연결된 것만치 그를 통해서 영원히 나타납니다.
저수지에 물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자기 집에 수도관이 아주, 그런 수도관은 없지마는 한 한 푼이나 되는 그런 수도관으로 해 놨으면 아마 그 물이 돔박돔박돔박 그저 방울로 덜어지지 더 못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애가 터져서 이제는 돈을 들여 가지고 수도관을 조금 키우면 물이 쨀쨀쨀쨀 그래 나올 것입니다. 또 마음에 물이 많이 필요하다 싶어서 수도관을 한 삼부나 하면 물이 또 좀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러다가 차차 수도관을 키워서 한 몇 백 미리 수도관을 이만한 한 아름되는 수도관을 걸어놓으면 그 물이 뭐 사람이 떠내려가 죽을 만한 그렇게 큰 물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결로서 하나님의 온갖 좋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덕스럽고 깨끗한 모든 충만, 그 전지전능의 그 충만이 자기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그만치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자기가 참 인정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복음이 됐는지 안 됐는지, 그것이 자기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그 말씀이 됐는지? 구원을 일으키는 말씀이 됐으면 복음이 됐고, 구원을 일으키는 말씀이 안 됐으면 자기에게는 복음이 되지 않았고, 또 구원을 일으키는 그 말씀이 자기의 구원을 이루는 자기에게는 복음이 되지 않았지마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도록 다른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자 중에 자기 복음도 남의 복음도 되지 않게 그저 등한히 '원 그렇게 한다' 하는 것으로 이렇게 들려지는, 자타의 복음이 되지 않고 이 말씀을 들어 버린 자에게는 이것이 자기를 정죄하는 율법이 됩니다.
듣지 않았다고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이렇게 했는데 이것을 들었는데 네가 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네, 듣고 제가 행하지 않았으니까 그대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와서 너거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모세와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친 이 말씀이 말세에 너거들을 정죄하리라' 말씀했고 또 하나는 '네가 이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면서 너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를 정죄한다' 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자타에게 아무 관계없이 그저 지내 떠내려 보내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를 정죄하는 법이 될 것이고, 또 이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는 강하게 역설을 해서 다른 사람의 구원은 이루었습니다. 목사가 이런 일 되기 쉽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는 강하게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은 내가 증거하는 말을 듣고 '참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해서 이대로 실행을 해서 다른 사람의 복음은 되도록 이렇게 하고 내 복음은 안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복음으로 자기가 가지고 자기 복음으로는 가지지 못하는 사람 있고, 또 듣고 남에게는 말을 못 할지라도 자기 복음으로는 가지는 사람 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증거는 못 해도 '이러니 어떻게 하든지 이래야 되겠다' 하는, 이 복음을 써먹어서 자기 구원은 이루는 사람 있습니다.
그보다도 제일 복된 사람은 자기 구원을 이루어 자기 구원만 이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까지 마음에 이 세 가지 이 일이 생겨져서 자타의 복음이 되도록 이렇게 하는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자기도 이렇게 안 할 수 없어 하고 자기만 할 게 아니라 자기의 가까운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자기가 맡은 학생들에게, 교인들에게 이렇게 전하지 않을 수 없어 전하는 이 사람이 제일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차차 더 이제 나가면 자기의 원수에게도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 '저 원수에게도, 주님은 원수된 나에게 전했는데 내가 원수된 저 사람이라고 이 복음으로 살리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거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 이것이 영감으로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 무서운 사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의지가 강하고 민첩하고 또 기억력이 좋고, 그 마음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에는 이런 아이큐도 있고 저런 아이큐도 있고 이런 저런 재간이 있고 힘이 여러 종류의 힘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마는 그것 가지고 이 썩어질 세상에서 죽는 생활은 잘 하지마는 하늘나라 가 가지고는 그것은 아무짝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걸 그대로 가졌으니까 자기는 참 모든 일에 명철하고 실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마는 하늘나라 가 보니까 그것은 하나도 못 쓰겠어. 저주 아래 정죄 아래에 있는 그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겨우 벗겨 줬지, 벗겨 주기만 벗겨 줬지 그것을 실질적으로 영감의 것을 만들고 진리의 것을 만들어서 영감과 하나로 움직이고 진리와 하나로 움직이라고 그런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도 안 만들어 놓으니까 거기는 아무짝도 쓰지 못해.
이 사람이 아주 방탕하게 춤 추고, 춤 추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하는 이 죄짓는 데는 아주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또 사기 협잡 그 못된 운동 이런 것을 하는 데에는 참 세상에서 능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덕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이러는 데는 가니까 아무것도 못 해. 그만 교회 와 가지고 설교만 하면 그 소리를 들으면 그만 잠이 오고 안 돼.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그랬지마는 하늘나라 가면 아무짝도 못 써.
그 사람이 아주 자기 뫼대로는 잘 살았지마는 공부를 하나도 못 하니까 거기는 영어를 하는 미국 나라니까 미국 나라 가니까 그만 봉사도 되고 벙어리도 되고 다 돼 버렸어. 그것 하나도 안 배웠으니까 못 한다 그거요. 한국서는 참 자기가 대가리 노릇을 할 만하지만 거기 가니까 뭘 꼬구랭이를 그려 놨으니 뭐인지 그만 눈이 있었지마는 완전히 소경이 돼 버렸지, 모르니까. 또 귀가 있기는 있지마는 뭐라고 쌓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들으니까 귀머거리가 갑자기 돼 버렸지, 또 입술이 있지마는 뭐 암만 말해야 그 사람들도 모르고 그 사람 말 나도 모르고 벙어리가 돼,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있는 이것이, 하늘나라는 영감으로 진리로만 된 것만 쓰기 때문에 그 안 된 것은 있어도 없는 것 한가지라. 이러니까 이것을 입었으면 되는데 못 입었으니까 벌거벗은 자로 벗은 자로 나타날 이걸 생각하니까 기가 막혀.
이래서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그걸 시험해야 되겠는데 믿으면 믿는 증거는 여기에 보니까 어제 세 가지를 말했는데 믿는 증거 하나는 탄식과 간절이 이 일에 대해서 사모하는 이것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있고, 또 그게 있다가 일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참 믿고 이랬으면 점점 이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고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탄식이 이것이 점점 더 심해져 갑니다.
탄식이 심해져 가는 것은 자기가 하지 못한 것을 인해서, 한 것은 생각이 안 나고 자기가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그 현실에 자기 속에 원수 그놈 때문에 그놈 그만 친구 좋아하는 것 그놈 때문에 그만 그 일을 헛일했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그놈 때문에 그만 실수를 했고, 자기는 너무 인간에게 서로 화평하게 하려고 인간 비위 맞추려 하는 사람 좋은 그놈 때문에 실수를 했고, 자기는 이성 음욕이나 정욕이나 그놈 때문에 실수를 했고, 자기는 가족이나 친구나 인정 그놈 때문에 실수를 했고 이걸 생각하니까 이제 탄식이 나오기를 기가 찹니다. 이 탄식이 나는 것만치 자기는 강하게 서둘고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탄식이 나지니 이제는 차차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탄식이 심해지니까 '아이고, 뭐 삐꾸려면 삐꾸고 말라면 말고. 삐꾸든지 말든지 나는 양보할 수 없다. 이제는 친구의 의가 끊어져도 할 수 없다. 이제는 뭐 살림살이 그까짓 게 뿌숴져도 할 수 없다. 사업이 절단나도 할 수가 없다.' 이제는 '이러면 네가 이렇게 덧 입으려고 하면 너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 갇혀도 내가 이 일은 안 할 수 없다. 죽어도 안 할 수는 없다.' 이러니까 탄식이 있는 것만치 담대가 더해집니다. 담대가 더해지는 것만치 세상에게 눌리고 꺾어지지 않고 붙들리지 않으니까 이 덧입는 일이 점점 더해져 갑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이 탄식과 간절한 사모가 자기에게 있는지? 이것이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점점 심해지는지? 이것이 심해지면 세상에 대해서 담해지는 건데 자기가 담대해지는지? 무슨 일만 하나 떡 닥치니까 '이 일은 하면 내게 명예적인 문제인데, 내가 이 일을 하면 지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봐서 내 위신이 떨어지겠는데, 위신이 떨어지니 이거는 할 수 없다. 사업이 절단난니 할 수 없다. 이것은 내 감정에 내 자존심에 걸리는데.' 이것이 있으면 탄식이 그것이 거짓 탄식입니다.
진짜 탄식이라면 위신이고 '그까짓 것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것, 자존심에 걸리면 뭣 할 것이고? 자존심이 얼마나 있을 것이고, 그까짓 것.' 이제 모든 세상과 세상에 있는 데 대해서는 담대해서 그것이 조그마치라도 자기에게 억눌려지지를 아니한다 말이오.
오히려, 오히려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 몸에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것인 것을 알기 때문에 뭐 고생으로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든지, 뺨을 맞아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든지, 눈을 빼여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든지, 험하게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든지, 순하게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든지 뭐 그 방편은 냅두고 어쩌든지 내 마음과 몸과 행동과 내 해 놓은 일과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 뭐 방편이 좋아도 좋고 험해도 좋고, 순해도 좋고 급해도 좋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과 진리의 것이 되어 주님과 진리화되기만 되면 좋겠다 하는 이것이 소원되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참되게 이 복음이 자기 복음 된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 마음에 분개함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내가 가졌던 힘은 요놈 때문에 내가 뺏겼다. 내가 간절하던 게 요놈 때문에 뺏겼다. 그래서 나는 또 실패했다'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큰 탄식으로 나타나고 탄식으로 나타나고 나니까 나중에 그게 와 가지고 '너 그러면 요래 된다.' 위협도 주고, 꾀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내 마음에 욕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할 때에 그때에 자기 같으면 그만 턱 넘어지는데 이제는 많이 탄식이 되고 보니까 분개해서, 분개해서 '그까 짓 거야 그리 되든지 저리 되든지 뭐 어찌 되든가 죽어도' 진리의 것만 되고 영감의 것만 되니까 '너 이러면 죽인다. 눈을 뺀다.' '눈을 빼서, 눈을 빼서라도 내 인격과 내 정신과 내 전부가 주님과 진리의 것만 되면 좋다. 뭐 그 방편이 급하고 느리고 그저 그것이 고속으로 되든지 저속으로 되든지 상관도 없다. 이러면 되기만 되면 됐지 상관도 없다. 어쨌든지 주님과 진리의 것 돼서 끝나는 것을 소원한다' 하는 것이 여기에 결론인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삽니다. 그저 듣고 저버리고 자기가 자기의 더러운 욕심대로 하나가 되니까 성공이다 좋다 됐다 하는 그런 썩은 데에서 있지를 않는 것이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타를 구원하는 일 외에는 하지를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같이, 죄짓는 자에게는 죄짓는 자같이 이렇게 하나 속에는 지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 방편이 요 자기의 구원의 성화된 이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대속의 정신에서 하는 것이지 자기가 속속들이 자기를 따라서 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 10분 기도하고 권찰회 모입니다. 장로님들도 좀 참석을 해서 의논할 때에 참석하면 의논을 대개는 처음에 할 의논을 처음에 하고 하니까 그때 의논에만 동참하고 가도 됩니다.
또 권찰님들도 와서 잠깐 자기 출석만 하고 가도, 견물생심이라 일을 보면 생각이 납니다. 마음이 납니다. 출석만 하고 가도, 어떤 사람은 '출석하고 가려 하니까 오층까지 올라가니까 다리 아프다'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몇 번 출석하고 나면 '이 출석하는 데 나도 출석하고 뭣 좀 들으면 좋을 건데 듣지 못하고 간다' 할 것이고, 또 좀 출석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은 듣는데 나는 생활 정리가 이렇게 안돼 가지고 필요있는 걸 듣지 못하니 참 가련하다.' 갈급할 것이고, 좀 애쓰면 조금 들을 수가 있고, 마지막에는 다 해서 온 가족이 듣는 걸 좋아하고 다 못 들으면 하나라도 듣고 와 가지고 얘기를 해야 되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남편 당신이 가 들으십시오. 이번에는 여보 자기가 듣고 오십시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런 가정으로 점점 진화되고 점점 성화되고 이렇게 향상되는 이것이 개인에게나 가정에나 있어야 되지 후퇴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