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20:03
우리의 위치
1987. 6. 2. 새벽 (화)
본문: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살고 있는 위치가 어데인고 하니 하나님과 사람과 하나님과 모든 만물과 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삼각 가운데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또 택한 우리를 당신의 택하신 목적대로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또 예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고 예정하신 순서대로 모든 것을 진행하시고 또 창조하신 것을 예정대로 운행을 해 가지고 이 창조 이후의 시공 역사라는 이 역사는 계속됩니다. 시공 역사라면 시간과 공간을 가진 우리 사람들이 살아온 이 세상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시공 역사라 이렇게 말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고?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로 그 목적을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무한하시고 그 영영하신, 당신의 속성에 완전성, 전지 전능성, 영원성, 불변성, 당신의 속성에 맞은 모든 영계도 그 안에 있는 것도 물질계도 물질계 안에 있는 것도 이것을 창조하시기로 당신이 정하시고 그 창조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목적으로 세우신 곧 선택, 에베소 1장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동기돼 가지고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서만 그것이 시발돼 가지고 목적도 정하시고, 곧 목적은 택하심인데 택하심을 정하시고 따라서 이 목적인 이 택함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서 모든 존재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그것이 목적에서부터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하나님이 자존하신 그 자존하신 다음의 순위로 존재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이 목적이 하나님 다음 첫순위요, 그 다음이 예정 순위요, 그 다음이 창조 순위요, 그 다음이 하나님의 보존 관리 섭리 이렇게 이 순서로 나가는데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 다음으로 피조물 가운데에서는 제일 완전해서 하나님과 꼭 같은 하나님의 모형, 모든 것이 하나님은 원형이라면은 하나님으로 인한 모형의 존재로 목적인 교회를 세우시고 또 교회의 모형, 곧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이 교회요 교회의 모형이 또 모든 불택자의 인류와 또 그외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이렇게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전지한 지혜로 절대성인 그 진리로 모든 것을 다 예정하시고, 예정하시고 하는 말은 모든 것을 설계하시고, 집짓듯이. 설계하시고 그대로 지금 시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교회를 하나님과 모든 영계나 물질계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 그 사이에 교회를 위치로 둬 가지고 교회는 위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를 가지고 또 아래로 모든 피조물과의 완전한 관계를 가져서 하나님의 그 완전하시고 충만하심이 교회에 다 유업으로 상속되고 또 교회에 받아 가진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영물이나 물질의 것이나 모든 피조물들에게 충만히 배급되고 충만히 그것이 발휘되고, 발휘라 말은 빛을 비추는 그런 격으로 비유해서 발휘라고 말하고 이런 물질을 나눠 주는 것 모양으로 해서 분급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래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완전하심같이 먼저 교회가 그 다음 완전하고 영물과 모든 물질의 것이 완전해서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좋아하시는 목적 정한 그대로 다 이루어져서 이것이 영원한 천국으로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권을 잡으시고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관리하시고 이래 가지고 복되게 하는 그 나라를 가리켜서 천국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천국을 건설하고 또 이 천국을 든든케 하고 또 밝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국은 시발부터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피동으로, 하나님께 순종되는 순종으로 다시 말하면 피동과 순종이 뭐이냐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이루어지는 그 결과,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하늘나라고 하나님에 그 반동으로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에게 반동으로 이루어지는 그것이 지옥이요 곧 사망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을 이룬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좋은 면으로 이룬 것이 천국이고 또 지옥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데 그분에게 거슬리는 것들은 다 이렇게 된다 하는 것으로서 보여주는 것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발돼 가지고 영원 무궁토록 계속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다 무엇을 하고 사느냐? 저는 뭐 돈 보고 살고, 사람 보고 살고, 행락 보고 살고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실은 두 가지 생활을 하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무슨 두 가지 생활 하는가? 하나는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일에게, 행동에게,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증거하는 그 증거 생활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이렇게 거슬리고 이렇게 반대하고 이렇게 거역하고 이렇게 불순종하는 자는 이렇게 결과로 망치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증거하고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하나 하나는 다 이라든지 저라든지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증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증거할라고 하지 않지마는 ‘저렇게 못되게 구니까 저렇게 망치는 하나님이시다. 저렇게 진실되게 사니까 저렇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래서 지옥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지옥이요 천국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천국이요 이 세상에서 모든 신불신자가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증거 생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시작부터 이 큰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이 큽니다. 다시 말하면 선택이 큽니다. 그러면 그 외에 수많은 것들이 있지마는 다 하나님은 선택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다 작용하시고 운영하시고 활용하십니다. 위하든지 안 위하든지 교회를 위하는 것이 모두 다 피조물들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어떤 것을 고대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뭇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자유함에 이른다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 피의 본질과 본성대로, 또 영감의 본질과 본성대로, 진리의 본질과 본성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중심이요 본질이요 본성이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본질 본성대로 하는 것이 자유지 본질 본성을 거슬려 하는 것은 다 그것은 자유하지 못하는 것이고 강제를 당해서 종노릇 하는 것들입니다.
이래서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들의 그 자유를 고대한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곧 목적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의 본질과 본성대로 사는 그것을 고대하고 있다 하는 그 말입니다.
왜 고대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 때에 관련된 모든 피조물은 다 구원이 되고 또 하나님을 거슬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중생된 본질 본성대로 자유하지 못하고 본질 본성을 거슬려서 원치 안하는 그 강제를 당해서 종노릇 하는 그런 생활 할 때에 관련된 모든 만물들은 피조물들은 같이 멸망을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는 관련된 모든 만물이 영원한 구원을 받든지 영원한 멸망을 받든지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이 고대하면서 탄식하고 지금 걱정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만물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리를 지켜서 그대로 살 때에 거기에 이용되는 공기도, 이용된 이 공간도, 이용된 물질도, 이용된 사람도 그 모든 것도 다 의에 참가했기 때문에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리는 그 행위, 자기의 자유 아닌, 다시 말하면 자기 본질 본성대로의 그 행위가 아닌 강제당하는 억제 행위 그것은 곧 영감 행위가 아니요 진리 행위가 아니요 예수님의 대속의 행위가 아닌 그 행위를 할 때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 행위한 그 사람의 그 정력도 기능도 다 멸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련된 만물들도 멸망받기 때문에 그들이 탄식하고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그렇게 발표한, 사람들은 만물이 말하는 걸 모르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만물이 말하고 호소하는 그것을 아는고로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잘못 말한 게 아니고 성령은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탄식과 고대하는 것을 말했고 인간은 그걸 모릅니다.
그런데 가라지 비유 하니까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성경을 넓게 보면 이 풀 한 포기도 그가 고대하고 호소하는데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됐던, 하루 살면 그만한 정력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사는 정력은 오늘 새 정력이지 어제 산 정력은 그거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없어지니까 자꾸 없어지고 하나님의 작정에 너는 정력이 물로 말하면 너는 물 한 도라무다. 한 도라무깡이 너의 정력이다 하면은 그 정력을 그 빼서 그저 쓰는데 구멍을 적게 뚫으면은 적게 나오니까 오래 나올 것이고 구멍을 많이 뚫으면은 많이 나오니까 일찍 나올 것이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은 자기의 정력을 이렇게 제맘대로 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은 그저 짧게 살고 굵게 살고 그만 끝나버리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질질 또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 있고 이래서 세상에서 그렇게 뭐 뚜렷한 일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다 백오십 세니 이렇게도 백이십 세 산 그런 사람들 그저 사람으로 그냥 살기만 살지 뚜렷한 무슨 그런 일을 한 일이 없고 속썩은 일도 없고 그렇게 뭐 분투 노력한 일도 없고 그 생명 내놓고 하는 그런 어려움의 역경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장수하고 다 그렇게 뭉텅뭉텅하게 내 쓴 사람들은 다 단명을 하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있는 그 정력을 써서 그런데 예를 들어 물 한 도라무깡인데 한 도라무깡 물이 전부 죄 짓는 데 다 썼으면은 죄 짓는 그 정력은 다, 거게 관련된 풀 한 포기도 지옥에 가는데 그 관련된 그 모든 정력이 그것이, 이 풀 한 포기의 그 모든 정력보다 사람의 정력은 더 고급으로 돼 가지고 있고 세밀히 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그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똘똘 뭉쳐 가지고서 그 음부에 가 가지고 가슴치고 이를 갈고 슬피 울면서 통곡을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거 통곡합니다. 그거 그러면 없어지고 그만 말리라 하는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도 지금 사람들은 백 목사에게 대해서 반대하는 건 뭐냐 하면 ‘왜 나누느냐, 자꾸? 쪼개느냐 나누느냐, 자꾸?’ 그렇게 말합니다. ‘그만 하나로 말하면 말지 왜 나누느냐 쪼개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지능이 발달돼 갈수록이 나누지 안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옛날 초대에는 예를 들어 비유하면은 문이라 하면은 ‘문’ 말 한 마디뿐입니다. 아마 여기 고전어 교수가 여기 있는데 지금 고전어를 보면은 그 고전어를 보면 뭐 어떻다 하지마는 고전어는 미개어입니다. 아주 미개어요. 옛날 말은 ‘문’ 하면은 닫아라 말도 문, 열라 말도 문, 반 열라 말도 문, 조금 열라 말도 문, 빨롬하게 열라 말도 문, 확 열어라 말도 문, 문 하나뿐이오. 문 하나 가지고서 이래 하니까 뭐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문’ 하면 문 이래 열어라, 조금 열어라, 어떻게 열어라 하는 것이 많은 말로 이렇게 발달돼서 자꾸 나오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 고전어를 사람들은 뭐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 가지고서 자랑을 하지마는 그 안에 다 포함되기는 돼 있지마는 그것은 다 미개어라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이런 위치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 ‘사람의 종류는 두 종류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목적인 종류가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되기 위해서 있는 종류로 두 종류가 되어 있다.’ 이것도 요한 웨슬레는 나누지 안했습니다. 나누지 안하고 ‘인류는 꼭 같다.' 이러기 때문에 전인구원설입니다.
그는 전인류를 다 구원하는 구원설인데 거게서 칼빈이가 나와 가지고서 쪼갰습니다. ‘이거는 그런 게 아니다. 인류는 두 쪼가리다. 둘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와 불택자가 있기 때문에 이 둘로 나눌 수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전인류를 대속한 것이 아니고 택자들만 대속한 것이다.’ 이래서 구속을 제한적 구속으로 이렇게 나눠 놨습니다. 그러면 나눠 놓은 게 더 실상에 밝히 증거한 것이지 하나라 한 것이 증거 아닙니다.
또 구원도 지금 구원도 내치 한 구원인데 이제 누가 나눴는지 몰라도 우리 한국에서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 또 이 구원을 둘로 나눴으니까 왜 그래 쪼개 나누느냐 또 하는 것이 문제지마는 그거 나누지 안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누게 된 것이지 안 쪼갤 걸 쪼개 나누면은 저주를 받습니다. 쪼개서 나눠야 이 구원이 바로 복음 운동이 되어질 것이라 나눌 것을 나눴으면 나눈 사람은 선지자요 상을 받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자들은 위치가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만물 사이에 끼어 있는 삼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이다. 그러면 인간 사이에 들었다면 그 인간은 택자를 말하는가 불택자를 말하는가? 택불택의 모든 인류라 하는 그 인류와 하나님과 모든 만물과 그 삼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왜 그 자리 들어 있는가? 그 자리 들어 있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인류와 피조물과 그 사이에서 자리잡고 그 사이에 중보되는 그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충만을 다 하나님의 교회인 목적인 이 사람들에게 주고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인류에게 만물에게 나눠 줘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만물들에게 충만케 하는 그 충만이 하나님의 교회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지금 우리의 천직을 가지고 있고, 천직은 하나님이 주신 직책인데, 천직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천직을 가졌다 말은 하나님과 피조물 그 사이에 중보직을 가진 것이 교회라 그 말입니다. 중보직을 가진 것이 교회, 이것이 천직입니다.
또 우리의 소망은 뭐이 소망인가? 하나님의 충만을 다 갖다가 피조물에게 줘서 충만케 하여 하나님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 만족을 이루고 모든 피조물들로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을 이룰 수 있는 이것이 영원한 하늘나라며 영생이며 이것이 평강인데 이 일을 달성시키고 이 일을 계속 역사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우리 보고 살고 우리는 하나님 보고 살아서, 그러기에 “주는 것이 복있다” 하는 그 말씀은 어떤 데서 하는 것인고 하니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받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다 주는 자가 돼야 된다. 그게 근본 우리 천직인 그 본지위와 권세를 나타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위치를 두지 안하고서 그저 이 세상 일만 가지고서 ‘주는 자가 복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주는 자는 다 거지되고 망해버리고 맙니다. 알겠습니까? 이 위치에서 하나님에게서만 받고 줄 수 있는 이 위치에 가면 영원히 받고 영원히 줘도 남음이 있는 것이 이것이 이 위치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선지자직이라든지 제사장직이라든지 이 복음의 은사 교권, 은사 교권이라면은 하나님 앞에 받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이 위치를 가진 것이 전부 은사 교권입니다. 목사도 은사 교권이요, 권찰도 은사 교권이요, 장로도 은사 교권이요, 주일학교 반사도 은사 교권인데 그 직책, 주일학교 반사라면 주일학교 반사가 다른 일도 하지요. 다른 일도 하지마는 반사 일 하는 그것은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서 학생들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자꾸 많이 받아서 많이 주면은 제가 커집니다.
많이 주면 커지고, 그래서 반사가 지난 주일에 보고한 데 보니까 굵닥굵닥한 반사들이 모두 다 보고를 하는데 그래 그거 볼 때에 ‘저것은 크다’ 보니까 아주 손가락만한 것도 있고 엄지손가락만한 것도 있고 있어요. 그 뭘 보고 그러냐? 그건 매달려 있는 학생이 많으면 그거는 굵다, 적으면 적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이것을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삼각 속에 끼어 있다 하는 요것을 단단히 명심해야 됩니다. 명심하는데, 삼각 속에 끼어 있다.
삼각 속에 끼어 있기 때문에 여게 말씀하시기를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요 삼각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 생활이 무슨 생활이냐? 영원 무궁의 생활을 연습하고 있는 생활입니다. 연습하고 있는 생활이요, 훈련받고 있는 생활이요, 영원 생활을 지금 조성하고 있는 생활입니다. 영원 생활을 지금 기르고 있습니다.
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에 하나님에게 필요 있는 것만치 사람에게 필요하고, 하나님께 사람에게 필요 있는 것만치 만물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 필요 없는 것만치 사람에게 필요 없고 사람에게 필요 없는 것만치 만물에게도 필요 없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지금 현재라 그 말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만드는 것.
우리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이거는 예를 비유컨대 하나님에게도, 하나님께서도, ‘이거는 십 원짜리다. 뭐 그거는 호주머니 그만 넣어 냅두라.’ `이거는 천 원짜리다.’ 또 좀 더 귀중히 취급할 것이고 ‘이거는 만 원짜리다.' `이거는 만 원짜리가 아니라 이거는 지금 백만 원 수표다.’ ‘이거는 천만 원 수표다.' `이거는 억만 원 수표다.’ 이 종이 쪼가리지마는 그 가치가 점점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거 모양으로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가치는 무슨 가치인고? 하나님에게 쓸모 있는 가치요 인류에게 쓸모 있는 가치요 만물에게 쓸모 있는 가치니까 하나님에게는, 하나님께는 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줄 수 있는 그 가치, 하나님이 신용하고 척 얼마든지 맡겨도 되는,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그 말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예수님에게는 다 줄 수 있고 예수님은 다 받을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을 유일로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또 이것은 학생 열 명에게 필요하다, 백 명에게 필요하다, 이거는 천 명에게 필요하다, 이거는 만 명에게 필요하다, 이거는 뭐 몇천만 명에게 필요하다 그게 뭐냐 하면은 또, 인류에게 필요한 것, 또 만물에게 필요한 것, 만물들이 지금은 이거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서 저거 구원이 되도록 하니까 만물이 자꾸 필요한 것, 마치 교회서 이 교역자를 청하고 싶다 저 교역자를 청하고 싶다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대로 가치를 보고 자꾸 지금 청하는 것이고 또 자꾸 실력을 갖춰라, 중간반 반사들에게는 내가 ‘실력을 갖춰서 해라.’ ○○○, 중간반 반사를 열심히 했어. 열심히 했는데 이번에 남해 ○○교회 가고 나서 ‘저게 지금 ○○○목사님은 참 실력가고’ 그는 거기 끼어 있어도 끼어 있는 이유가 있어서 있었지 실력이 있는데 이번에 ○○교회로 갔습니다. 그 큰 교회로 갔어. 갔는데, 대번에 큰 교회로 갔어.
갔는데, ‘저 뒤에 저 ○○○ 저게 가니까 저게 되겠나?’ 이랬는데, 여기서 열심히 했어. 가 가지고 주일학교는 배가 됐답니다. 어제 아레 주일인가 보고가 왔는데 주일학교는 배가 되고 장년반은 열다섯 명이 올랐답니다.
그게 뭐이냐? 그게 필요 있는, 교역자를 배척당하는 것은, 교역자 배척당하는 것은 그 교회에게 필요 없는 인물이라 하는 거, 그것들이 자기들에게 필요가 없으니까 자꾸 배척하는 것이고 필요 있는 사람은 자꾸 청합니다. 필요 있는 사람 청하지마는 거기 갈 수가 없으니까 또 못 간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게 지금 자기 가치를 말하는 것이라. 그 가치, 우리 가치 마련하는 것이 어떤 가치냐? 하나님에게도 필요하고, 인류에게도 필요하고, 만물에게도 필요한 그것이 자기 가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치를 마련하고 있는 현실이니까 우리가 이 현실에서 얼마나 조심있게 모든 데에 필요있는 그자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니, 요 필요해야 되는데 요 필요의 적이 뭐이 적이냐? 요 필요는 하나님에게도 인류에게도 만물에게도 필요한 것이니까 전부 자기 아닌 다른 것에게 필요한 것이 자기 가치요 자기 실력인데 이 원수가 뭐입니까? 이 원수가 뭐이지요? 이 원수가 뭐이지요? 이 실력을 갖추는 데 원수가 뭐이요, ○집사? 저거 어북 깨달아. 인제, 죄 많이 지었어. 죄 많이 지었는데 좀 병들고 난 다음에 지금 깨달아요. 저라면 잠깐 목사 돼. 잘 깨달아.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까짓 거 하나님에 거슬리는 거는 가만히 내비두는 줄 알아도 하나님이 쥐박아요. 쥐박아서 그만 고쳐졌는데.
그 원수가 뭐이냐? 자기라는 것은 모든 것에게 필요한 이것이 자기의 가치와 실력이 올라가는 건데 모든 것을 자기에게 필요하도록 만들라 하니까, 모든 것을 자기에게 필요하도록 만들라 하니까 이것은 악이라 하는 거는 자기 원수 중에 원수라 그 말이오.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자기는 하나님 중심이요 그 다음으로는 전인류 중심이요 그 다음은 피조물 중심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자라고 커가는 실력이 되는 것인데 정반대로 그것의 반대는 악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악이라는 그 정의를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악이라 하는 그 말 하는 것이 퍼뜩 들으면 ‘그뭐 악이면 죄짓고 나쁜 것 불량한 것 그런 게 악이지 악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 피조물 중심이라 뭐 그런 말을 하는가?’ 몰라,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게 어데까지 나가 가지고 어데까지 범위를 넓이 잡아 가지고서 어데까지 깊이 모든 것을 다 총괄해 가지고서 하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저거는 이해를 못한다 말이오.
이해 못 하면 듣고 순종하면 되는 건데 ‘기역’ 하거들랑 그만 기역자를 알고 ‘기역’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이 기역이 뭐이 기역인고?’ 제가 아무 알 두뇌도 없으면서 아직 상식도 없으면서 그걸 연구할라 하면은 니은자도 못 배워.
기역자 그것도 못 배우고 평생 말아버리요.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이런 삼각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에게로 치우치기 쉽고, 잘못하면 사람에게로 치우치기 쉽고, 잘못하면 피조물에게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거는 자기 망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도 치우치지 안하고, 사람에게도 치우치지 안하고, 피조물에게도 치우치지 안하고 바른 관계로 자기의 실력 준비 자기 가치 준비를 자, 목사를 교회마다 오기를 원하고 기다리고 청할라고 하면은 목사 가치가 있소, 이 교회 저 교회 자꾸 배척을 당하고 있으면 목사 가치가 있소? 어떤 게 목사 가치가 있소, 저 ○조사님? ○조사님이가? 뭐? 자꾸 청하는 그게 가치 있지. 싫다고 마다 하는 거 그거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지.
그런데 이런 실력, 실력이 가치요, 가치가 실력이요, 또 실력이 환영이요, 가치가 존대요, 다 같은 말 아닙니까? 이런데 그것을 우리가 이루는 데에는 이걸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뭣 주셨느냐?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를 완전히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잘못된 것이나 또 우리가 할 의무나 책임이나 다 해 놓고 이것만 벗지 안하면 된다 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그겁니다.
복음이 그건데 그러면 요 이리 저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요 삼각 사이에서 요리도 안 걸리고 조리도 안 걸리고 요 바로 해 나가도록 되어지는 그게 뭐이냐 하면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입니다.
복음인데 이 복음을, 이 복음을,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는데 이 복음을 제게 유익하도록 해석하고 또 무슨 유혹시킬라고 해석하고 이래 가지고 교역자가 교인들 집에 가 가지고서 교인의 돈을 뺏들기 위해서, 교인에게 좋은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설교를 하고 기도하고 하는 그것은 아주 그것은 뭐이냐? 그것이 이리요 절도요 강도요 그게 삯꾼이요 품꾼이라 그 말이오.
또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나는 요 삼각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기쁘게 사람도 기쁘게, 하나님도 좋게 사람도 좋게 만물도 좋게 요렇게 해야 되는데 요 절대성인 정확한 이 법칙은 신구약 성경이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하나 맞춰 가지고 나가다 보니까 나중에 보면은 하나님께도 맞고 인류에게도 맞고 피조물에게도 맞고 금생에도 맞고 내세에도 맞고 영원도 맞고 모든 일에 다 딱딱 들어맞는데,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전생애의 잣대로 다림줄로 저울로 요래 삼아 가지고서 자기가 사는 요 생활이 아니면 잘못하면 치우쳐서 안 되기 쉽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으로 치우치는 사람 있고 사람에게로 치우치는 사람 있는데 하나님에게로 치우친 사람과 사람에게로 치우치는 사람 물질에게로 치우치는 사람 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은 그중에 어느 사람이 제일 불행스럽겠습니까? 그 중에는 어느 사람이 낫겠습니까? ○○○조사님? 하나님이 크니까. 알고 하는지 모르지만 맞기는 맞았어.
물질로 치우치면, 물질로 치우치면 그 물질은 나를 고쳐 줄 힘이 없습니다.
치우치면은 치우칠수록이 그놈이 자꾸 나를 끌고 가기 때문에 그 물욕에서 사는 사람은 자꾸 물욕이 자꾸 끌기 때문에 그리 붙어지지 ‘이게 치우쳐서 안 됐으니까 이거 여기 치우치니까 저리 가거라’ 이렇게 해 주지 않습니다.
또 인간에게 치우친 자도 인간 인본으로 인간에게 치우친 자도 자꾸 인간으로 들어붙지, 인간과 들어붙지 거게 그 인간에게서 뭐 ‘네가 이리 치우쳤으니까 이거 좀 고치라’ 이런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치우치면 하나님께 치우친 걸 하나님이 받고 있느냐? 받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치우치면 하나님은 ‘네가 이거 너무 이렇게 치우쳐서 하나님께로 치우쳐서 네가 삼각에 중보 실력을 갖추지 못하니까 네가 이걸 고쳐라. 성경 보고 고쳐라.’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에게로 치우친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본 데도 하나님께로 치우친 사람은 그 사람은 언젠간가 희망이 있어서 깨어날 수가 있지마는 인간으로 치우친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깨고나지를 못합니다. 왜? 인간으로 치우치면 그 사람이 고쳐지지는 안하고 자꾸 치우칠수록이 자꾸 붙어서 저거끼리 찰떡같이 들어붙습니다. 찰떡같이 들어붙어 가지고 이러니까 서로 죽이고 만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권찰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양성원 학생들이 있는데 이렇게 떡 가서 보고서, 자기가 목회자라면은 밑에 있는 권찰들이나 교인들 보고서 ‘저것은 하나님으로 치우쳤다.’ 하나님으로 치우쳤으면 뭐 미쳤든지 어쨌든지 하나님으로 치우친 인간은 하나님이 가서 고쳐 줄 수가 있고 그 사람은 뒤에 잘 믿는 신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치우쳐 가지고 인간하고 그저 인간 비위 맞추고 인간하고 단합해 가지고서 할라 하는 요 인간 관계에 단합의 그 힘에 맛을 본 사람은 돌아서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걸음이 삼각 속에 들어 있으니 우리는 이리 저리 치우치면 안 되니까, 잘못하면 우리는 사람에게로 치우치기도 쉽고 모든 만물에게로 치우치기도 쉽고 또 하나님께로 치우치기 쉬우니 하나님, 그중에는 치우친 게 안 됐지마는 하나님께로 치우친 것이 낫고 사람에게로 치우친 것은 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 뒤에 가서 하나님의 징계나 받고 매나 맞고 뚜드려 맞고, 그리 안 하면 물질로 치우친 것은 세월 다 보내고 나중에 물질에 전실패되고 난 다음에든지 실패를 하고 난 다음에 ‘그놈 물질 그것 때문에 세월만 허송세월 했다’ 이란다든지 마지막에 그리 안 하면 물질에 실패되지 안한 사람은 마지막 죽을 때에사 ‘내가 만금을 가졌으면 내가 뭐하노?’ 하고서 자기 생활을 후회하는, 그 시간 다 지나가 버리고 “오늘밤에 네 영혼을 부르니까 그 모든 저축해 놓은 그 물질이 뉘것이 되겠느냐” 그거 몇장이요, 누가복음 12장에 있습니까? 복 없는 부자. 누가복음 12장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그러기에 물질로 치우친 사람은 당장에 물질로 실패, 물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물질 때문에 또 어데 들어가고 요렇게 하는 그 사람은 좀 복이 있는 사람이오. 왜? ‘물질 이놈 따라오다 내가 이렇게 크게 속았고 망했다.’ 요걸 보는 사람은.
물질 따라가는 사람이 죽는 날까지 물질이 형통하니까 사업에서 회사 하나 차렸다가 둘 차리고, 둘 차렸다가 서이 차리고, 서이 차렸다가 너이 차리고 자꾸 곳간을 헐고 자꾸 널리 지어서 이렇게 돼 나가는 그 사람은 택한 자라면 언제 회개합니까? 언제 회개합니까? 죽을 때 회개해, 죽을 때. 알겠습니까? 죽을 때 회개하지만 그때는 정력 다, 구원 이룰 수 있는 정력은 다 허비해 놨는데 뭐 이룰래야 이룰 수가 있습니까? 그보다는 사람으로 치우치는 게 낫습니다. 사람으로 치우친 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이거는 참 이거는 내 아들이기 때문에 전부 다 기울어야 되겠다.’ 나중에 얼마 안 가서 ‘아이고 내가 후회된다.’ 사람 보고, 사람 보고 이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늙어 죽기 전에 기운이 다 빠지기 전에 후회가 됩니다. 후회가 돼서, 말은 못 해도 속으로는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인간 보고 산 것 헛되다. 나는 이렇게 전부 다 기울였었는데 보니까 그는 내게 대해 이렇지 않구나.’ 이래 가지고서 모두 후회하고 다, 후회하고 분하다고 섭섭하다 하는 게 인간의 섭섭이라 하는 것은 다 인간 보고 산 그것의 결론의 총론을 가리켜서 섭섭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치우친 것은 치우쳤으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로 치우쳤으니까 당신이 조절해서 이걸 자꾸 경계하고 경책해 주니까, 경계해 주니까 자꾸 고쳐져.
그러나 그것도 우리에게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계시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 복음 외에 딴 복음이 없어.
이 복음이라 말은, 이 복음이라 말은 백 목사 설교를 말합니까 칼빈 설교를 말합니까 신구약 성경을 말합니까? 신구약 성경을 말한 거라, 신구약 성경. 백 목사 설교도 성경대로 맞지 안하면은 그거는 다 사람 죽이는 것이오. 칼빈의 설교도 성경대로 맞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오.
이 성경이, 우리에게 정확무오한 성경이 있기 때문에 이 성경 보고 하나씩 자꾸 행하고 성경 보고 행하는데 성경 보고 하나씩 둘씩 자기가 아는 대로 행하고 하는 데에 성경 보고 행하면서 주의할 것은 몇 가지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성경 보고 행하는데 주의할 것은 몇 가지 있습니까? 손가락 한번 들어 보이소,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몰라? 손가락 들어 가리켜 봐요, 모두. 저 ○○○집사님이 어떻게 답을 바로 했다. 그거 이제 그 말 했으니까 그거 듣기에.
조금 귀가 뚫히는가? 이 서이. 셋.
내가 하나님께로 치우칠라, 사람에게로 치우칠라, 모든 만물에게로 치우칠라? 거게 치우치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 할라고 하면은 바른 길 가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사람 좋게 할라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하면, 잘못하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물질 탐하다가 사람도 잊어버리지 하나님도 잊어버리지, 또 사람 탐해서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들라 하다가, 내 사람 만들라 하다가 사람도 잊어버리지 하나님도 잊어버리지, 내 사람 만들다 뭐 사람 잊어버리고 하나님 잊어버려? 제 사람 만들면 사람 부자 되겠지.
우리 신앙 노선에 롯이 사람 탐한 사람인데 나중에 사람도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다 잊어버리고 비참한 사람 됐습니다.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람으로도 물질로도 하나님께도 치우치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을 신앙 양심으로 깨달아 가지고 그와 같이 하니까 하나님 성공, 물질 성공, 사람 성공 다 해 버렸어.
요것이 아브라함의 노선이라 말이오.
이것을 저 한 그때 대구집회 때에 내가 그때 아플 때인데 건강이 없어서 그거 하나를 내내 가르쳤더니마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데 할 말이 없어서 그것만 만날 말하고 있다.’ 그 말이 지극히 큰 설교지마는 그 몰라. 그 테이프를 지금 나는 또 새로 듣고 싶소.
여러분들 꼭 요거 기억하십시오. 자기가 구역 식구 하든지 권찰 하든지 자기 목회를 하든지 자기 자신을 볼 때 내가 어데로 치우쳤노? 하나님께로 치우쳤나, 사람에게로 치우쳤나, 물질에게로 치우쳤나? “인간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물질을 내가 표준삼으랴?” 그보다도 제일 나쁜 거는 뭐입니까? 이 세 가지로 치우치는 것보다도 나쁜 거는 뭐입니까? 악 그놈이 제일 나빠. 악.
자기 중심 이것이 원수 중에 원수라는 걸 알고 이놈을 죽일라고 밤낮으로 애를 쓰고 매일 기도하고 이래도 이게 자기 중심이 돼지는데 이게 원수인 줄 모르고 그게 예사 자기 중심을 위해서 말도 하고 사람에게 대인 관계도 그래 하고 모든 사물 관계도 그래 하고 사건이나 물질이나 그래 관계하는 그 사람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지 모릅니다. 그 가속도로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들께서는 공과를 다 외우도록 공부합시다. 아마 거의 다 외웠겠는데 자꾸 외워요. 외우면 이 공과 속에서도 한없는 생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없는 능력이 나와요. 자꾸 외워요. 그라고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말고 자기 미래와 모든 관련된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일 삼십 분 기도하는 이 일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사람을 바꿔야 돼요. 사람을 바꾸지 못하겠거들랑 저 양산동 기도산에 가 가지고서 그만 밥을 고 자꾸 천막에나 뭐 어데 비닐 봉지 안에 들어가 가지고서 자꾸 재독을 뭐 몇십 번 들어요, 자꾸. 듣고 그대로, 듣고 듣고 하면 귀가 열리고 그 다음에는 양심이 눈을 뜨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신앙이 차차 차차 생겨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