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집


선지자선교회 1982년 2월 21일 주전

 

본문 :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연일 계속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실상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고 다만 지식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여러 차례 거듭거듭 말씀하니까 지루도 하고 권태도 나고 염증도 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을 빨리 회개해야 되지 그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자기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는 것 같으나 모르는 자 되기 쉽고 이 복된 도리를  들었으나 도리어 불행한 자 되기 얼마든지 쉽습니다. 택한 자라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우리는 두 집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집이 있고 하늘에 있는 집이  있습니다. 집이라 말은 주인이 거처하는 집인데 곧 우리가 살 집, 우리가 살  처지, 우리가 살 형편, 우리가 살 위치 그런 것을 쉽게 집이라 말했고 그다음에  처소라고 덧붙여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각각 다른 자기 처지에서 자기 형편에서 자기 위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사람은 복되다 하고 그것이 나쁜 사람은 불행이라  그렇게들 평가합니다. 우리는 이 두 처소가, 두 거처할 곳이, 두 처지가, 이 두  자기의 위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늘의 것은 영원하고 땅의  것은 무너질 장막집입니다.

 영광스러운 지위 형편 처지 욕스러운 지위 형편 처지, 부강한 지위 형편 처지  빈곤한 지위 형편 처지, 반석같은 튼튼한 지위 형편 처지 도마 위에 오른 고기와  같은 지위 형편 처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지위 형편 처지, 무능 무지의 형편  지위 처지 구비한 실력 능력 속에 사는 형편 처지 지위, 가난 속에, 가련 속에,  젊음 속에, 늙음 속에 우리는 다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말로 집이라 처소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 가련한 처지에 사는 것과 같이 무궁세계도 가난하고 가련한 처지가  있고 세상에서 참 측량 못 할 구비하고 존영한 그런 형편과 처지 속에서 사는  것처럼 영원무궁한 세계에도 존영하고 구비한 영광의 처지 속에도 살 수가 있는  이 두 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좌우하는 모든 조성의 기간이 세상에  있는 동안입니다.

 우리는 처지가 둘이 있는 동시에 사람도 둘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지금 안  믿는다는 게 아니라 불택자들은. 아무리 안 믿어도 그 사람이 지금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크게 나누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지음받은 택한 사람과 하나님의 목적  밖에서 지음받은 불택자와의 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불택자들은 자기도  하나뿐이 요 처소도 무너질 장막집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공로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또 하나 생겨서 둘이 됐습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서 새사람이라, 참 자기라, 중생된 참 자기라. 믿기 전에 있던 자기는  자기 아닌 자기라, 옛사람 자기라, 참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 아닌 그 자기라.

 호주를 잡아죽여 놓고 호주 입었던 옷을 입고 그 용모와 그 음성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타나니까 저거 호주를 죽인 원수인 줄 모르고 그것이 저거 호주인  줄 알고 오만 것 다 허락하고 오만 지도 다 받는 이런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인생의 참 자기는 누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입니다. 그 영을 누가  죽였는가? 악령이 악성을 일으켜 악습으로 죽였습니다. 이래서 참 자기는 죽고  자기를 죽인 악령 그놈과 어리석은 자기중심인 그 악한 인성과 하나님을 떠나  행동하는 악습 이것들이 뭉쳐 가지고 옛사람 자기입니다. 이거는 자기 아닌  자기인데 이것이 자기가 되어 가지고 이것은 무너질 장막집에 삽니다.

 무너질 장막집에 살고, 진리와 성령으로 주의 공로로 다시 살아난 죽었던 영은  산 영이라 참 자기가 살아났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없던 참 자기가 자기 속에  생겨진 것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참 자기 이것은 새사람 자기요 참 자기인데 이  참 자기는 늙는 자 아니요, 병드는 자 아니요, 죽는 자 아닙니다.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영생할 자입니다.

 이 영생할 중생된 참 자기는 무너질 장막집에 거할 수 없습니다. 무너질  장막집은 무너지면 자기는 집 없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 무너질 장막집이  무너지기 전에 무너질 장막집을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집으로 개조할 수 있는  이런 기회와 방편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개조할 수 있는 방편과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다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속에는 반드시 두 자기가 시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중생된 참  자기는 무너질 장막집이 무너지기 전에 영원한 집으로 바꾸어 가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탄식이 있을 것이고 이 일에 마음이 눌릴 것이고 옛사람 자기는  무너질 장막집을 무너질 장막집이라는 이 인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 '무너질  장막집이 제일이다, 좋다, 이것 외에는 없다, 영원한 집이 어데 있나?  이것뿐이다.' 이렇게 해서 이놈은 우리를 참 나를 죽이고, 일생을 따라다니면서  손해를 보이고,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유혹을 시킵니다.

 그리하여 자기 속에는 영원한 처소로 개조해 받기를 원하는 자기도 있을 것이고  한편에서는 '무너질 장막집 이것이 좋고 이것뿐이지 이것 외에 하늘에 집이  있는지 없는지 알 게 뭐이냐?' 또 새사람이 새 자기가 강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살며시 양보하는듯이 숨어 앉았다가 그 시간이 지나가면 인간은 자기 현실이  바꾸어짐에 따라서 마음이 땅의 것을 접촉하니까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될 때에  그 때 이놈이 썩 나와 가지고 아무래도 무너질 장막집 이걸 보고 '아무것이 집  보라. 아름답다. 영광되다. 좋다 부럽다.'  자꾸 무너질 집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리게 하고 장막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고 '집은 이 집뿐이다. 처지는 이 처지뿐이다. 형편은 이 형편뿐이다. 누구의  처지 형편을 보라 누구의 집을 보라, 누구의 처소를 보라. 좋다. 아름답다.

부럽다. 누구를 보라.' 이는 이렇게 유혹을 하고 무너질 장막집이라는 것을  기억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 원수, 우리 원수, 제일 원수, 마귀보다도 제일  원수, 우리 속에 들어있는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그놈입니다. 그놈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일날 나오는 것은 죽일 놈을 죽이려고 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자를 힘있게 기르려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죽일 놈을 죽이고  살릴 것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분주 복잡한 가운데서라도 어떻게 찬란한 세상과 세상에  속한 집일지라도 우리는 정평 정가해야 됩니다. 그것은 무너질 집이라.

장막집이기 때문에 잘 뜯어 옮기면 좋은데 안 옮기면 헛일이라. 무너질 집이라.

 아주 모든 면이 구비하고 좋은 지위 처지 형편 가졌어도 '저것은 무너질  집이라.' 지위가 좋다, '무너질 집이라.' 건강이 좋다, '무너질 집이라.' 권세가  좋다, '무너질 집이라.' 아주 건강하고 용모가 아름답다, '무너질 집이라.'  젊다, '무너질 집이라.' 돈이 많다, '무너질 집이라' 유식하다, '무너질  집이라.' 기술이 좋다, '무너질 집이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고 존대하는  집이나 무너질 집이라. 얘, 무너지기 전에 잘 옮기면 되지마는 네가 개조 못  받으면 헛일이다. 불쌍하다. 무너지면 다시 일으키지는 못한다.'  이 인식을 우리는 언제든지 가지고 무너질 장막집과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을  언제든지 기억해서, 기억이 얼마나 되느냐? 우리 속에 탄식이 되기까지 기억이  나고, 간절이 일어나기까지 기억이 되고, 사모가 일어나기까기 기억이 되고,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마음이 점점 눌리기까지 이것이 기억이 되어지고, 이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장막집이 무너지기 전에 하늘에서 오는 집을 덧입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우리 속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불이 붙어서 이 일만 전공하고 이 일에만 전력을 기울여도 살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빠진 줄 모르게 다 빠져서 무너질 장막집이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 얼마나 많고 이것을 개조해서 가진 그 양이 적은데, 여기에 대해서  일생동안 생각도 못하고 무너질 집만 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것만 부러워하고  여기에만 사모하고 간절하고 열중한 그자의 생애가! 마지막 죽을 때에 남을 것이  얼마나 있겠느냐! 헤아려 보십시오! 하늘에 처소로 바꾼 것이 얼마나 있는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자기 아닌 자기 원수인 자기 이놈을 발견해서 이놈을 죽이려고  원수로 대항해서 노력해도 가다 보면 내가 이놈 돼 가지고 내 몸뚱이 내 마음은  이놈을 제 주인으로 저인 줄 알고 마음과 몸은 이놈에게 속해 가지고 이놈의  이용물이 되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자기를 분별하지 않고 이런 자기나 저런  자기나 자기는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자에게 산 생애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공중에다가 활을 쏘면서 잉어가 맞아 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그보다도 더 허무한  것입니다. 허망한 것이오.

 그러기에 우리의 제일 원수가 누구냐? 제일 원수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 그것이 자기의 원수 중에 원수인 것입니다.

 안 믿을 때에는 순전히 이놈으로 삽니다. 원수가 제가 되어 가지고 원수 이놈  하라 하는 대로 마음도 몸뚱이도 소유도 그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솔빡 이거는  사망뿐입니다. 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중생된 자기도 자기가 '지금 말하는 나는 참 내냐 나 아닌 원수 나 이놈이냐?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참사람, 하늘나라 갈 하나님의 아들된 중생된 참 내가  원하는 것이냐 원수 옛사람 그놈이 원하는 것이냐? 내가 분히 여기는 것은  참사람 내가 분히 여기는 것이냐 옛사람 그놈이 분히 여기는 것이냐? 이 시간 내  마음과 내 몸과 내 소유를 주장하는 자는 중생된 영생을 가진 참 내냐 내 원수인  옛사람 이놈이 지금 이것을 주관하고 있느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의 산 생애는 거기에는 시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참 자기와 자기를 죽인 악령 그놈이 자기중심으로 살았던  버르징이, 버릇, 그 습성 이것과 이 셋이 뭉쳐 가지고 된 그것이 옛사람  자기입니다. 이자는 자기 아닌 자기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경영하는 것은 어느 내가 경영하는 것이가? 내가 소원하는 것은  어느 내가 소원하는 것이가? 내가 지금 부러워하는 것은 어느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가? 옛사람이 부러워하는 것이면 그거는 원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느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가 노하는 것은 어느 내가  노하는 것인지? 내가 웃는 것은 어느 내가 웃는 것인지? 재미있게 여기는 이  재미는 어느 나의 재미인지? 내가 오늘 무엇을 일으켜 놓고 쾌감을 가지는 이  쾌감은 어느 내가 쾌감을 가지는 것인지? 이것을 우리는 분별하는 것이 성도의  첫 발자국입니다.

 이리하여 옛사람 자기는 무너질 장막집만을 좋아하고 그것을 소개하고 그것을  인정시키고 거기에만 심신이 기울어지게 하고 있고 중생된 참 자기는 무너질  장막집이라는 것과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는 이것을 똑똑히 증거해서 무너질  장막집이 무너지기 전에 영원한 집을 덧입도록 이렇게 하려는 데 대해서 참사람  자기는 노력을 하고, 성령도 노력을 하고, 진리도 노력을 하고, 자기 속에 신앙  양심도 노력을 합니다.

 이럴 때에 이 마음이 여기에 들어서 이 증거를 받아 가지고 이 마음이 '그게  옳다' 하여 이 마음이 이제 새사람에게 단합이 되고 이 몸이 새사람에게 단합이  되면 그때 비로소 하늘에 있는 처소로 덧입는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지금 희로애락을 가지고 날뛰고 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뛴 나는  원수 그놈이 내 몸과 내 마음을 거머 쥐고 사망을 이루고 있는지 참 중생된  자기가 오늘 하루종일 없어지지 아니할 무궁한 것을 이루고 살았는지 이것을  우리는 구별해야 됩니다.

 자기를 모르거든 남을 보아서 깨달으십시오. 그러기에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다"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중생된 사람들이지마는 참 자기는 파묻어 버리고 옛사람 자기 그놈이 들어서 전  희로애락이 옛사람 그놈의 희로애락, 그놈이 들어서 마음도 몸도 그놈이  주장하고, 모든 경영도 소원도 노력도 성취도 다 그놈의 것만 노력하고  성취했으니까 전부 불탈 것만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모르는 소리입니다.

세상이 모르는 하늘에서 내려온 우리의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은 이 두 집이 있는 것 두 자기가 있는 것 명심해야 됩니다. 저는 가끔  사람을 접촉할 때에 난처할 때에는 '지금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멸망할  옛사람겠느냐 새사람이냐 그것부터 분별하라.' '뭐 분별할 것이나 뭐 있습니까?  옛사람이지요.' '옛사람이면 왜 그렇게 옛사람으로 살려고 옛사람 그놈 원수인데  그놈의 주장을 따르느냐?' '그렇지마는 못 견디겠습니다.' '못 견디겠다고 하는  그놈은 누구냐?' '그것도 옛사람이지요.'  이렇게 옛사람의 원수된 것과 그대로 살아서 멸망받는 것을 서서히 말할 때에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그렇지마는 사람이 못 견뎌 그렇지요. 헛일이야  헛일이지요. 손해야 손해지요.' 했으면 그만 두고 지내 두면 그 사람이 기도하면  옛사람 그놈을 원수로 삼아서 벗어나서 새사람이 자기가 될 때는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왜 내가 과거에 그때는 그렇게 미친 짓을 했는가? 어리석은 짓을  했는가?' 후회를 하면서 그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고로 옛사람과 새사람, 자기에게는 두 자기가 있는 것,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가장 재빠르게 나타나는데 그놈은 무엇이 뭉쳐 가지고 무슨 요소로  된건가? 세 가지로 된 것입니다. 하나는 악령, 하나는 우리의 원죄, 하나는  자기가 삐뚤어진 행위를 한번 두번 한 그 습성, 버릇, 그 연습 이 세 가지가  뭉쳐 가지고 된 것이 이것이 멸망할 자기 아닌 옛사람이오.

 이놈이 들어서 영을 죽였습니다. 우리 참 자기를 죽였습니다. 죽인 것을  예수님의 피공로로 대속해 가지고 우리를 영생할 자로 살렸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영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영생함으로 옛사람이 자기로 더불어 싸우는  것을 계속합니다.

 거기에 보면, 4절에 보면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이 말씀  있습니다. 무슨 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 벗어버리면 어찌 됩니까? 벗어버리면 다시는 못 입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을 한번 벗어버리면 다시는 잡지도 못하고 가지지 못합니다. 한 번  벗었으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벗으면 끝납니다.

 벗으려고 벗기 전에, 벗기 전에, 벗기 전에 하늘의 처소를 덧입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벗을 그때에, 벗을 그때에 벗지 않고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겹쳐  입습니다. 옷 하나 입고 그 위에 또 우와기 덮어 입고 하는 것 덧입기, 덮어  입는 것, 덮어 입는 이것으로써 장막집이 영원한 집이 되는 요 한 방편뿐입니다.

 그러기에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집으로 개조하는 그 시기는 언제냐? 무너질  장막집을 벗는 그 시입니다. 바로. 벗는 그 시기에 하늘에 오는 처소를  덧입으면, 영원한 집을 더 덮쳐 입으면, 덮쳐 입으면 속에 무너질 장막집이  영원한 집으로 싸 버렸기 때문에, 영원한 집으로 폭 쌌기 때문에, 영원한 집으로  완전히 덮어 가리워서 그 안에 들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 헌집을 수리할 때 보니까 그 벽이 무너지는데 그 벽이 무너지면 위에  것이 다 내려앉겠는데 무너질 벽을 두고 양쪽에서 쌓아 올립디다. 양쪽에서 쌓아  올리니까 가운데 벽은 약하지마는 양쪽 벽이 딱 싸 버리니까 그만 안 무너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덧입는 것, 평소에는 덧입어도 그게 벗어집니다.

마지막 이 집을 벗게 되는 그때에 딱 덧입트면 이제는 영원히 입어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면 덧입는 것이 뭐이 덧입는 것인가? 덧입는 것이 무너질 장막집, 자기의  없어지고 다 멸망받을 이 처지, 형편, 사정, 지위, 자기 몸, 자기 몸의 힘, 자기  마음의 힘 이것이 다 무너질 장막집인데 이것이 무너질 그때에 일차적으로  진리와 연결시켜서 진리화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성령의 감화 감동에  연결시켜서 성령의 감화 감동의 영감화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결합이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죽을 것을 생명에게 삼킨바" 생명 안에 내포  되도록 "하려 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힘은 이 시간에 쓰이는 힘이 있고 그다음 시간에 쓰이는  힘이 있고, 이 시간에 쓰는 힘은 이 시간에 썼으면 그것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마치 물통 안에 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 놓으면 한 시간  흐르도록 구멍을 뚫으면 한 시간이면 다 흐르고 두 시간 흘러서 없어지도록 구멍  뚫어 놓으면 두 시간이면 다 흐릅니다. 인생의 모든 가진 것은 하나님이 한정해  놔서 그 한정을 다 지나면 그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시간을 살았으면 그 사람의 마음의 힘 몸의 힘 이것은 그만치 한  시간 지나갔으니까 감소됐습니다. 두 시간 지나갔으면 감소됐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늙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감소되는 것, 이것을 그 현실에 감소될 그것이 진리와 연결 적으로  없어지는 것, 영감과 연결이 됨으로 끝나는 것, 하나님과 연결되어 끝나는 것,  연결되어 끝났으면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으로 완전히 관계없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연결되어 끝날 그것이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와 연결되어서 끝을  마쳤습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영생.

 그러기에 생명과 영생은 다릅니다. 생명은 한 번밖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이 생명은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영생이라 하는  것은 단번에 이루는 것입니다. 영생은 단번에. 현실에서 그 시간에 쓰여질  마음의 힘, 그 시간에 쓰여질 몸의 힘, 그 시간에 쓰여질 모든 자기 물질,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의 지위,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 권세, 그 시간에 쓰여질  자기의 모든 자기의 형편 사정, 그 시간에 쓰여질 그것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연결이 되어서 그것으로 끝났느냐? 그것으로 끝났느냐? 그것이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에 연결된 것으로 끝났느냐? 요것이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으면 안 돼. "덧입고자 함이라" 벗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세상에 없는 것을 하늘나라에 가서 있으리라고 생각을 말아야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그것이 하늘의 것으로 개조됩니다. 성화가 됩니다.

우리의 새사람이라 하는 것이 새로 지은 것 아닙니다. 죽은 영을 진리와  영감으로 살린, 참 자기를 죽은 자기를 진리와 영감으로 살린 것이 우리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첫째 아담의 것을 둘째  아담으로 다시 살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한 번 벗으면 그 시간에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연결시켜서  그 시간에 해당된 것이 끝났으면, 통에서 그 시간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그  방울이 이 그릇에 담기느냐 저 그릇에 담기느냐? 이제 떨어졌으면 그것은 다시  들어가지 못해. 다시는 떨어졌으니가 이쪽으로 오른편으로 옮겨져서 오른편으로  옮겨졌든지 왼편으로 옮겨졌든지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한 시간 요 시간에 살 때에 그 시간에 해당된 마음의 힘 몸의  힘 자기의 소유 모든 자기 처지 형편 사정 지위 자기의 이 무너질 장막집이, 요  현실에 해당된 장막집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어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어서 생명화되어 영생화됐느냐 요것이 영원히 멸망할 멸망화됐느냐?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벗기를 원합니까 이제 이것을 덧입기를 원하겠습니까?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기독자들이 세상에 있는 세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재물 그까짓 거야, 뭐  지위 그까짓 거야, 지식 그까짓 거야.' 그렇게 무시하지 않습니다. 무시하지  않습니다. 일단 자기에게 왔느냐? 귀중히 여깁니다. 일단 자기에게 있느냐?  귀중히 여깁니다. 귀중히 여겨.

 어떻게 귀중하게 여기느냐? '이대로 가지로 있으면 무너지면 그만이다.

무너지면 다시 개조 못 한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게 보배다. 이 보배인데  개조 못 하면 영원히 무너진다. 개조를 할 희망성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라" 무너지기를, 무시하고 없애는 게 아니라  "덧입기를 원한다" 기회를 놓지 않고 기다리다가 그것이 요 현실에서 '자,  왼편으로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연결되어서 죄의 것으로 불의의 것으로 악령의  것으로 악습의 것으로 악성의 것으로 이것이 끝을 맺느냐? 그것이 되어지느냐?  이 시간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와 연결되어서 하나님화 진리화 영감화  되어지느냐?'  요것을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요 기회를 떨굴 것이기 때문에 탄식이 되고,  떨굴까 싶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마음이 눌려지고, 요렇게 하다가 그것을  개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들은 자기의 무너질 장막집이 있느냐? 이 장막집이  없으면 영원한 집이 안 돼. 장막집 이것이 영원한 집을 덧입어서 개조하는  것뿐이지 개조뿐이지 신축은 없어. 개조뿐이지 신축은 없어. 신축은 영원히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개조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개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헌집 그것도 괜찮다 그거요. 무너질 집도 괜찮다 그거요.

 그러나 성경에 말하기를 "무너질 장막집은 무너질 그때에 무너지지 아니하고  개조만 하면 영원한 처소가 된다" 이러니까 자기에게 무너질 장막집 있는 것을  가치없는 것이라고 집어던지지 않고 그것은 개조할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의  가치가 있다는 요것을 기억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요 개조하는,  개조하는, 기회 놓치지 않고 개조하는,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기회 놓치지  않고 개조하는 여기에만 전심 전력 다 기울입니다. 전심 전력 다 기울입니다.

 '그러면 무너질 장막집은 하나도 마련치 않고?' '예. 마련치 않고.'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 요것 하늘에 처소로 덧입어 개조하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무너질 장막집은 어떻게 하고?' 요것 개조하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개조해야 될 무너질 장막집은 자꾸 생겨집니다. 자꾸  생겨지요.

 나는 그것 하려고는 하지도 않았는데 그거는 하나님이 있어야 할 것인 줄 알고  무너질 장막집을 또 주면서 "이것도 개조해라" 개조 하는 것만 하니까 또 주면서  "이것도 개조해라" 개조할 무너질 장막집은 주님이 자꾸 마련해 줍니다. 마련해  주는 것을 나는 그것을 개조하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계명 지키다 보니까 부자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명 지키다  보니까 대학자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조하는 이 개조하는 데다가 개조에만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지위가 생겨졌습니다. 개조에만 전력 기울이고 이  권세는 생각도 안 했는데 개조하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권세가  생겨졌습니다. 개조하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영광되다 존귀하다 이 영광 존귀가 왔습니다. 왔으면 그것도 무너질 장막집이기  때문에 이것을 영감과 진리화하기 위해서 영감에게 쓰여지고 진리에게 쓰여지고  하나님과 결합하는 요것으로만 이용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두 자기가 있는 것을 제일 명심하여 깨어 있어야 하고, 이 두  집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집으로 개조하는  데에서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무너질 장막집은 개조하는 요 조건으로  가치 있지 요 조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무너질 장막집은 개조하는 요것으로만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보다  좋습니다. 그러나 개조 못 하면 후회됩니다. 개조는 한 번 하지 두 번은 못  합니다.

 한 번이라는 것은 그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 해당된 그것은 현실에서만 개조하지  현실을 지나가 버리면 그 현실에 소모된 그 물방울은, 흐른 물방울은, 소모된 그  현실을 통과한 것은 다시는 통과 못 합니다.

 쇠털같이 많은 날이 있지마는 결단코 이 한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하루는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 현실에 이용된 것도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조에 전심 전력,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심 전력, 어떤  기회? 이 현재라는 현재에 내 무너질 장막집 이것 현재에 진리대로! 영감대로!  하나님대로! 이리하여서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과 원수되지 않고 이 시간 진리와  영감과 하나되는 데에 단번에 돼도 좋고 어쨌든지 이 시간 진리와 영감대로의  현실로 통과하여 통과한 양이 적든지 많든지,  '이 현실에 진리와 영감으로 통과하려다가 네 장막집이 한목 다 무너지면 어찌  되느냐?' 한목 다 무너지면, 한목 다 무너지면, 한목 다 무너지면 '네 소유도  몸도 생명도 한목 이 진리와 영감 때문에 다 절단나면 어찌 되느냐?' 한목 다  무너지면 한목 다 절단나면 한목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의 것 됐기 때문에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것이 순교자들입니다! 세상이 모르는 성도에게만 주시는  복음입니다.

 이런고로 무너질 장막집은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덧입어야 된다. 덧입으면 무궁세계에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궁세계에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궁세계에 구비한 마음의 실력을  가졌다, 몸의 실력을 가졌다, 구비한 지혜와 총명의 실력을 가졌다, 구비한  그이의 지위의 실력을 가졌다, 소유의 실력을 가졌다, 권세의 실력을 가졌다.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으려 함이라" 그때에 무식한 자가 안 되려고, 그때  무능한 자 되지 않으려고, 그때에 지혜 총명을 입지 못한 자 되지 않으려고,  그때에 가난한 자 되지 않으려고, 그때 영광 없는 자 되지 않으려고, 그때에  환영 없는 자 되지 않으려고, 그 때에 멸시 천대받는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탄식하는 것이 성령의 사람들이요 중생된  참사람 속사람들입니다.

 누구의 속사람이나 속사람은 다 이렇게 이 탄식을 가지는 것인데 우리가 참  자기를 잊어버리고 옛사람 자기 이놈이 돼 버리면 잊어 버립니다.

 이런고로 두 자기가 있는 것, 두 처소가 있는 것, 이 두 처소는 하늘의 처소로  무너질 처소를 싸 버리면, 하늘의 처소로 무너질 처소를 싸 버리면, 횐 베조각을  붉은 물로 싸 버리면 붉은 베조각이 되는 것처럼 진리화 영감화 하나님화  연결되면, 하늘의 처소로 덧입으면 무궁세계에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덧입어야 되는 것. 두 집이 있으니 기회 놓치지 말고 덧입어야 하는 것.

 셋째, 이러기 때문에 성도는 무너질 장막집을 부인하는 염세주의가 아니요  무너질 장막집의 가치를 개조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 개조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오. 그러나 이미 있는 개조할 무너질 장막집을 개조하는 기회  놓치지 않고 개조하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이지 장막집 필요하다고 장막집  이것 마련하는 데에 힘을 기울일 시간이 없어. 장막집 이것 마련하는 데다가 힘  기울이려 하다가는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바꾸어 가지지를 못 해.

 이러기 때문에 자기의 유한한 힘은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개조하는  여기에만 전심 전력을 기울여. 전심 전력을 기울여. '그러면 무너질 장막집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무너질 장막집 무너질 지위, 권세, 물질, 건강, 소유, 지식  이거는 어떻게 마련하려고?' 그것은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개조하는  것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요 요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만족히  여기는 자이기에 이런고로 이자에게 여러 배 백 배도 주고 있어야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줍니다.

 이러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학창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덧입기를 힘쓰는 그 일만 책상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 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은 하지 않고 무너질 장막집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망이요 하나는 영생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삽니다. 보이는 걸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

 그 사람은, 다니엘은 삼총리 중에 일총리로서 행정을 하고 있는 데 그 사람은  나중에 가서 사자굴이 와 가지고 지위 뺏기는 그 일이 와서 보니까 그분은  순전히 거기에 앉아서 하는 일이 삼총리 그 자리에서, 삼총리라는 그 장소에서,  삼총이라는 그 분위기에서, 그 위치에서, 거기에서 무너질 장막집, 총리라는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덧입는 그 일만 하고 앉았습니다. 그 일만 하고  앉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지막에 사자구덩이에 집어넣는 그 일이 왔을 때에 그 장막을  만드니까 그분은 만들기 힘드는데 이제 이번에는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의 것으로  사자구덩이 들어가면 무너질 장막집에 마음의 힘도, 몸의 힘도, 지위의 힘도,  권세의 힘도, 소유의 힘도, 그 밖의 모든 영광의 것도 모든 것도 단번에  사자구덩이에서 썩을장막이 영원한 장막으로 완전히 덧입어 끝마치는 마지막에  완성을 이루는, 완성을 이루는 단계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그말은 죽는다 말이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원하고,  그러니까 다니엘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야 '저 사람 벌벌 떨 건데'  하는데 다니엘은 그 마음이 담대하고 기쁩니다. 왜? 어서 영감화 진리화  하나님화 되어지는 이것으로써 완성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두려워하는 비겁이 없고 세상이 이해 못 할 담력이 그에게  있었고 세상이 모르는 소원이 그에게 있습니다. 이게 우리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산 자입니다! 이것이 후회없는 생애입니다!  우리는 두 길이 있는 것을 기억합니까? 두 사람이 있는 것을 기억합니까?  무너질 장막집이 한 기회만이, 개조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만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어떤 데에 전력을 기울입니까? 우리는 무너질 장막집을  마련하는 데에 기울일 힘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자가 돼 나왔습니다. '너 공부하느라고 수고했다.' '나는 공부는  하나도 안 했습니다.' '뭣 했노?' '무너질 장막집 하늘의 처소로 덧입기를  원해서 요 시간 영감 떠나지 않고 영감의 현실로 진리의 현실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으로' '그러면 뭣 했노?' '하나님이 자라 할  해에 잤고, 먹으라 할 때에 먹었고, 읽으라 할 때 읽었고, 들으라 할 때 들었고,  쓰라 할 때 썼고, 기억하라 할 때 기억했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마는  박사도 됐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마는 재벌도 됐고,' 나는 당신이 시키는  그것만 하나 했지, 그것만 해서 나머지 이거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이것  됐으니까 이것 돼도 당신이 시켰지 내가 하는 것 아니야. 나는 당신이 하라는  그것만 했어.

 하나 하나 '요것 해라 말해라' 말했고, '입을 다물어라' 다물었고, '마음을  네가 고쳐라' 고쳤고, '요걸 원해라' 했고, '웃어라' 하면 웃었고, 하나 하나,  하나밖에는 순종 못 해. 현실에서 하나 하나 그것만 순종했는데 이리 된 것은  당신이 나에게 필요해 준 이 무너질 장막집이니까 이것도 개조해야지. 이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은 다 죄니라"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은 다  죄니라"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의 인도 따라 움직이지 아니한 것은 죄니라!  요것이 마지막에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세 가지 기억합시다. 우리는 어데다가 주력해야 되는가? 우리의 힘은 유한해.

우리의 힘은 유한해. 우리의 유한한 힘을 두 군데는 쓰지 못해. 한 군데도 겨우  자라, 한 군데도 겨우 우리의 남은 힘을 어데다 기울일 건가? 우리는 이  장막집을 영원한 처로소 덧입기를 원하는 이것을 우리가 힘쓰는 이것만이 우리  할 일이라.

 우리 속에는 두 자기가 있습니다. 아주 제일 원수된 자기 그놈이 있습니다.

자기 아닌 자기가 있소. 그런고로 자기와 자기를 구별할 것이 며,  장막집과 영원한 처소를 구별할 것이며, 우리는 무너질 장막집을 마련하는 데에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이 무너질 장막집을 영원한 처소로 덧입어  개조하는 데에 여기에 주력할 것, 요 세 가지. 어데다가 주력을 하며, 어떤 집이  있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며, 어떤 두 자기가 있는 것을 기억해서 잰 사람으로 산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 사람으로 산 사람이 깨어 사는 사람이요 이걸 알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자가 불신자와 같은 생활하는 그자가 생명은 있지마는 자는  자요. 자는 자는 죽은 자와 같은 것 아닙니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무너질 장막집 이것이면 다인 줄 알고 이것 마련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이것 있으니까 어깨 벌리고 자랑하고 이걸 보고 부러워하고  이것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격발시키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맙시다.

 '장막집이다.' 무너질 장막집, 무너질 젊음의 장막집, 무너질 건강의 장막집,  무너질 재벌의 장막집, 무너질 권세의 장막집, 무너질 지위의 장막집, 무너질  모든 자연 은총의 장막집, 무너질 명철의 장막집, 이 모든 장막집 영원한 처소로  덧입지 않으면 다 허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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