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20:02
우리의 원형
1986. 8. 22. 금저녁
본문:요한일서 4장 18절∼21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에베소서 4장 12절∼16절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표준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 예수님과 꼭 같이 되는 이것이 우리의 목표요 또 소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고 닮아서 예수님이 볼 수 없는 아버지의 형상과 꼭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심같이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상과 꼭 같은 형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이 꼭 그와 같은 형상을 입고 계셨고 또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우리가 입기 위해서 대속하시고 불러서 예수님 믿게 하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형상은, 첫째 하나님 아버지는 형상이 없는 무형의 존재입니다. 잘못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형의 존재인데 무형의 그 형상을 예수님께서 유형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유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형상을 또 우리들이 유형적으로 받아서 입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근본은 형상이, 형체가 없는 형상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그 신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은 무형의 존재가 유형의 존재로 나타나서 예수님은 형체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형상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볼 수 있도록 가지신 예수님의 형상은 곧 예수님의 인격성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성이라.
또 우리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함은 예수님의 그 속성, 다시 말하면 그 인격성, 그 인격성을 우리들이 본받아서 예수님의 인격성과 같은 인격성을 가져 우리의 속성이 예수님의 속성과 같은 속성으로 성화되어지는 이것이 우리 구원의 목표입니다.
그뿐 아니고 우리 모든 기독자들이, 개인 개인이,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억억만 명이고 모여서 그 모든 것이 합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가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이 말은 모든 기독자들이 서로서로 연결 협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좀 어려운 말입니다.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이 말은 우리 기독자들이 예수님의 그 몸에 속한 한 지체요 한 분자라 그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속한 한 지체요 한 분자라.
분자인데,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우리가 목사는 목사대로 역사하고, 장로는 장로대로 역사하고, 주일학교 반사는 반사대로 역사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역사하고 이렇게 각 지체가 분량대로, 제 분수대로 역사하여, “그의 몸을 자라게 하며” 그의 몸을 자라게 한다. 그의 몸을 자라게 한다 말은 예수님의 몸이 점점 자라서 커지고 온전해지도록 하려 하는 것이라.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봉독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데 이루는 구원은 어떤 구원인가? 예수님은 이 피조물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가지고 피조물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가 볼 수 없는 무형의 존재로 피조물을 향하여 하시는 그 일이 볼 수 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대속하신 대속은 무형의 존재로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이 인간이 볼 수 있도록 독생하신 예수님께서 역사하셔서 나타냈습니다. 좀 어려운 말입니다. 내가 좀 전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도가 점점 깊지를 못하고 얕아진다’ 이라는데, 물론 한 없이 끝이 없이 깊지요. 그러나 분명히 그 사람은 지금 이 도를 못 알아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도가 뭐인지를 지금 모르고 아직까지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는 그 증거입니다.
오늘 밤에도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새겨서, 이제 오랫 동안 늘 초등 학문을 가르쳤고 또 젖으로 먹였는데 이제는 차차 장성했기 때문에 여문 식물을 먹이고 장성한 자의 식물을 먹여서 이렇게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에베소 4장을 봉독한 것은,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라, 형체가 없는 존재라, 무형의 존재인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은 무형이기 때문에 형체가 없습니다. 없는데 무형의 존재가, 왜 무형이냐? 무형은 흐미하고 불완전해서 무형이 아닙니다. 무형이라 하는 것은 완전이 되면은 무형이 됩니다. 형체가 있으면 그것은 완전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형체가 있으면 벌써 그만큼 제한이 돼 버리고 맙니다.
무형의 아버지의 대속 완전 행위를 독생자가 유형 대속 행위로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볼 수 없는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그 모든 것을 다 피조물들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내신 것이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슨 뭐 이목구비가 있는 그런 형상이 아닙니다. 인격의 형상이요, 행위의 형상이요, 그 도덕과 사랑의 모든 형상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 형상을, 존재 형상을, 완전 전지 전능의 영원 불변의 그 형상을 예수님께서 볼 수 있도록 나타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형상이 같다. 예수님은 모형이라면 아버지는 원형이다.
이런데 우리를 예수 믿도록 만든 것은 뭐 할라고 예수 믿도록 만들었는가? 우리를 예수 믿도록 만든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원형으로 삼아 가지고 원형인 예수님과 꼭 같은 모형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하는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듣겠습니까? 거게 다른 말을 하면은 그만 설명을 할라면 복잡해서 원줄기를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래만 해 놓습니다.
우리의 원형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원형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요래만 아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룰라고 하는 구원은 우리의 원형인 예수님의 모형이 이루어지려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꼭 같은 자 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인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와 우리의 인격과 이 모든 것이 예수님과 꼭 같은 예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 구원인데, 예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 구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분자입니다. 이거 뭐 또 분자라 말도 이거 좀 알아듣기가 어려운데 여러분들이 들으면 그만 말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져요. 우리는 예수님의 분자입니다.
우리가 억억억억억만이 모여 가지고 예수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각 마디가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는 그말은 역사에 수많은 성도들이 다 하나가 돼 가지고 예수님의 몸을 이루어 예수님이 이 대속의 완전 행위를 하신 이 완전 행위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똘똘 뭉쳐 가지고 그 완전 행위를 해서 예수님이 해 놓은 완전 행위와 기독자가 전부 합해 가지고 해 놓은 완전 행위가 그 둘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완전 행위 모든 성도들의 완전 행위 그 둘은 꼭 같습니다. 예수님의 완전 행위 이꼴(equal) 모든 성도들의 완전 행위, 성도들의 완전 행위의 총합 이꼴(equal) 예수님의 완전 행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이 구원을, 인제 구원을 지금 구원 결론만 들어서 말을 했습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데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돼야 되느냐? 나라는 나, 우리 자신은 몇이 합해 가지고 우리 자신이 됐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이 합해 가지고? 셋이 합해서 우리 자신입니다. 영 혼 몸, 이 셋, 그러니까 둘이라 해도 맞습니다. 영 육, 둘이라 해도 맞습니다. 영 육 둘이라 해도 맞습니다. 우리 사람은 영과 혼과 몸, 이래서 이것은 삼분설이라 하고, 이분설은 영 육 하는데, 육은 마음하고 고기덩어리하고 둘을 합해서 육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과 꼭 같은 형상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데에는 그저 형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력도, 또 지혜나 능력이나 지능의 실력도, 사랑의 도덕도, 모든 행위하는 역사도 꼭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이 되는 데에는 다른 식으로는 되는 수가 없습니다. 같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과 나와 하나가 되고, 또 대속으로 말미암은 영감과 나와 하나되고, 또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와 나와 하나되어서, 그러면 피와 성령과 이 진리 이 셋은 하나님의 완성이요 공심판을 통과한 의입니다.
자세히 들으면 다 알고 쉽고 벌로 들으면 모릅니다. 껍데기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전지 전능의 완전을 가지고 완성해 놓은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와 나와 연결이 될 때에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이라 인정할 수 있는 그 완성을 이루신 그것이 내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완성이 내것이 되고, 또 하나님이신 전지 전능의 영감과 나와 하나되고, 또 전지 전능의 진리와 나와 하나되니까 이것은 다 완전이요, 영원이요, 불변이요, 영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데에는 다른 길이 없고 피와 성령과 진리와 내 심신이 하나되는 것. 그러면 영은 하나가 돼 가지고 있고, 이러니까 하나되는 것이니 피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함께 우리에게 옵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함께 우리에게 오는데 올 때에 내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내게 와 가지고 내 심신의 기능이 대속의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와 중생된 영과 하나가 되면 완전이요 영생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이 역사를 우리가 이루는 것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내가 갖추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은 셋이요 완전과 연합이 돼 가지고 완전된 것까지 하면은 완전이 넷입니다. 우리를 완전케 하기 위해 가지고 찾아온 것이 넷입니다. 넷이 찾아왔는데 언제 찾아오느냐? 우리의 현실에 찾아옵니다.
현실에 찾아올 때에 내 심신이 현실에서 이 찾아 온 넷과 하나가 되면 하나된 그만큼은 다 그것은 영생돼 버렸습니다. 다시 변동 못 합니다. 영생이 됐습니다.
또 그 현실에서 이 넷과 하나될라고 하니까 하나되지 못하도록 이 넷과 하나되지 못하고 저와 하나되자고 꼬우는 그 원수가 옆에 또 있습니다. 원수가 우리 옆에 와 가지고 이렇게 꼬우고 있는데 그 원수는 숫자가 몇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녜, 원수도 숫자가 넷입니다, 넷.
요것은 악령, 악성, 악습 요게 뭉쳐 가지고 세상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요 온 세상과 악령 마귀 그놈과 우리의 원죄, 부패성, 우리 원죄성,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원죄성, 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행동한 그 습성 이 넷이 들어서, 요 넷을 합해서, 요 넷을 합해서 뭐라 합니까? 요 넷을 합해서 뭐라 하지요? 녜, 악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요 넷을 합해서 세상이라 합니다. 또 셋을 합하면 그걸 뭐라 합니까? 셋을 합하면? 옛사람. 녜, 셋을 합하면 옛사람입니다.
그놈은 자기 아닌, 우리가 아닌 원수입니다. 자기 마음에 와서 꼬우고 몸에 와서 꼬와 가지고 이 마음과 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 마음과 몸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대로 살지 못하도록, 영감대로 살지 못하도록, 진리대로 살지 못하도록 이것이, ‘네 중심으로 살아라, 네 위주로 살아라, 악령의 감화로 살아라, 세상 맞춰서 살아라.’ 자꾸 이것들이 꼬우고 협박도 하고 이래 가지고 오른편의 넷하고 합하면 그 현실을 통해서 우리 심신의 기능이 영생이 돼 버리는데 요 현실에서 왼쪽의 원수 넷이 들어서 오른편의 넷 하고 합하지 못하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이러니까, 왼편의 넷을 따라서 그 현실에 내 심신이 움직였으면 둘째 사망으로서 영멸이 되고, 그때에 오른편에 이 넷과 그 현실에서 내 심신의 기능이 합하면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현실이라는 현실에서는 이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알아듣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오른편 왼편이라 말했습니다.
오른편에는 몇이 있습니까? 넷이 있습니다. 왼편에는 몇이 있습니까? 넷이 있습니다. 요 사이에 우리 마음과 고기덩어리는 끼어 가지고, 왼쪽에는 저하고 같이 하자 하고 오른쪽에는 또 저하고 같이 하자 하고 이렇게 하는 이 두 양사이에 끼어 가지고 있는데, 이 오른편에는 현재 좀 어려워도 영원히 장래에 좋다는 것을 참말을 해 주고 왼편의 것은 내일 죽고 망할 것이지마는 임시 좋은 그 거짓말로 가지고 꼬와서 임시 좋은 거 그놈 가지고 하니까 멀리 보지 못한 근시자들은 다 왼쪽에 속하게 되고 장래까지, 영원 무궁까지를 생각하는 좀 심각한 지혜 있는 자는 오른편에 속하게 됩니다. 이러는데 우리는 이 지금 이 싸움을 싸워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데는, 내 영은 닮아 가지고 있고, 내 영은 단번에 닮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마음과 몸 이것은 닮지를 안했는데 마음과 몸 이것이 예수님의 전능을 닮아야 되고, 전지를 닮아야 되고, 완전을 닮아야 되고, 영원을 닮아아 되고, 불변을 닮아아 됩니다.
닮아야 되는데 이 닮는 것은 언제 닮을 수 있습니까? 시간이 언제입니까? 현실에서만 닮을 수 있습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꼭 논리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요것을 꼭 실행해야 됩니다. 현실에서만 닮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에는 반드시 오른편에 넷, 왼편에 넷이 나를 찢어 갈라 합니다. 오른편에서는 오른편에 속하라고 자꾸 이와같이 지금 타이르고, 설교하고, 감동 주고, 또 심방하고, 전도하고 자꾸 오른편에 속하라 하고 왼편에 이거는 온 세상에는 달라들어 가지고 왼편대로 하라고 자꾸 지금 그래 꼬우고 있습니다.
왼편은 ‘하나님 말씀을 어겨야 네가 잘 산다’ 이렇게 꼬우고 있고, 오른편에는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영감대로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을 벗지 안하고 입고 살아야 잘 산다.’ 이래 가지고 양편에서 우리를 댕깁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직장이 있습니다. 자기 직장이 있는데 그 직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은 직장이 떨어지겠고 직장 안 떨어질라면 예수님의 대속도 영감도 진리도 우선 내놔야 되겠고, 이제 그 틈바귀 속에서 끼어 있습니다.
그러면 현실에 내놨으면 그거는 직장 때문에 자기 현실에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을 배척했기 때문에 직장은 가졌지마는 자기 심신의 기능은 영원한 멸망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게 우리 구원입니다.
그럴 때에 이제, ‘나는 직장 아니라 생명이 끊어져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을 수 없고, 영감을 벗을 수 없고, 진리를 벗을 수 없고, 내 주격인 중생된 영을 배반할 수 없다.’ 하고서 진리대로 영감대로 대속의 공로에 일치하도록 살게 되면은 그때에 직장은 없어질지라도 자기 심신의 기능은 영생을 가졌습니다.
가졌는데, 그러면 이렇게 진리대로 살고 심신의 기능이 영생을 얻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절단나는 것으로 보여졌는데 하고 보니까 절단이 나지 안하고 그것이 더 든든하게 됩니다.
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든지 다니엘이든지 이 사람들이 양사이에 끼여 있을 때에 그때에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기도하지 말아라. 한 달 동안 기도하지 마라. 기도하면 너 사자구덩이 들어가서 죽는다.’ 이렇게 말할 때에 다니엘이 그때 뭐 사자구덩이 들어가서 사자밥이 되어져도 ‘나는 기도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오른편에 다니엘이 속했습니까 왼편에 다니엘이 속했습니까? 오른편에 속했습니다. 오른편에 속하기 위해서 다니엘은 뭣을 내놓고 오른편에 속했습니까? 생명 내놓고 오른편에 속했습니다.
생명 내놓고 오른편에 속했는데 과연 오른편에 떡 속해 가지고 사자구덩이에 집어 넣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살아 나왔는데 이제 뒤에 끝을 보니까 오른편에 속한 것이 처음에는 꼭 죽는 것으로 봤는데 뒤에 보니까 왼편으로 속한 것보다도 오른편에 속한 것이 그 생명이 더 튼튼해졌습니까 생명이 절단났습니까? 생명이 튼튼해졌습니다.
우리 일은 모두가 다 이렇습니다. 오른편에 속하면 당장 망하는 것 같고 후가 보니까 뒤에 보니까 잘됐고 왼편에 속하면 당장 잘되는 것 같은데 뒤를 보니까 절단나 버렸습니다.
이래서,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여러배 백배를 얻고”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오른편에 속할라고 하니까, 오른편에 속해서 살면 영생되고 좋겠는데 오른편에 속해서 살라고 하니까 왼편에 몇 놈이 들어서 오른편에 속한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까? 몇 놈이 들어서 방해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네 놈이 들어서 방해합니다. 네 놈 이놈이 우리 원수입니다. 네 놈이 우리 원수입니다.
원수인데, 네 놈의 그놈의 이름을 말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그놈의 이름이 뭐입니까? 악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네 놈의 이름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악입니다.
악령, 악성, 악습,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 이랬습니다. 악한 세상.
요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른편에 속해 가지고 영생 구원을 얻을라고 하면 뭣을 죽여야 됩니까, 뭣을 죽여야 되겠습니까, 저 뒤에 뭘 죽여야 됩니까? 큰 소리로 한번 대답해 봐요. 뭣을 죽여야 됩니까? 저 뒤에도 한번 대답해 봐요. 점잖게 있지 말고 다 같이. 지금 말 안 하면 마귀가 그 들어가 가지고 헛일해. 지금 말을 똑똑히 해야 마귀 그놈이 싹 다 나가지.
자, 오른편에 속해서 영생을 얻을라고 하면 원수가 넷인데 넷 그놈을 이름을 말하면 악인데, 우리가 이 영생 구원을 얻을라고 하면은 뭣을 죽여야 됩니까? 자, 한번 큰 소리로, 뭣을 죽여야 됩니까? 저 뒤에, 뭣을 죽여야 됩니까? 악을 죽여야 됩니다. 악을 죽여야 됩니다.
악을 죽여야 되는데 악이 뭐이냐? 이제는 악을 죽여야 되는데 악을 죽일라 하지마는 악이 어데 있는지 악 그놈이 어떤 놈인지 그걸 알아야지? 악이라고 대답은 해 놨지만 악 그놈이 어느 놈인지 그놈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앉았는지 어데 숨어 앉았는지 그걸 알아야 악을 죽이지요? 악은 어떤 게 악이냐? 인생이 창조주 중심 위주로 살지 안하고 피조물 중심과 위주로 사는 그것이 악입니다. 알겠습니까? 전인류를 위해서 살면 그것은 악입니까 의입니까? 자기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서 살면, 중심으로 위주로 해서 살면은 악입니까 의입니까? 악입니다. 악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민족이 좋고, 가정이 좋고, 국가가 좋고, 인류가 좋지마는 그것 중심으로 살면 악이기 때문에 저도 망하고 그것들도 다 망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거 중심으로 살지 안하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살아야 내가 가정을,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내 가정을 다스려야 가정이 살고 행복되고, 내가 국가를 섬기는 것도 인류를 섬기는 것도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내가 섬기는 일을 해야 국가도 인류도 잘 되지 하나님 떼버렸으면 주인 떼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멸망을 시켜 버리고 맙니다.
옛날 바벨탑을 쌓을 때에 하나님 떼내버리고 전인류가 일심 단합돼 가지고 한 것이 그것이 땅위에 전쟁을 시발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한 그 멸망을 시발시킨 것이 바벨탑을 쌓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악을 죽여야 된다. 악을 죽여야 된다. 악을 죽여야 된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중심을 죽여야 되고, 자기 위주를 죽여야 되고,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 위주를 죽여야 되고, 피조물 중심의 행동을 다 죽여야 된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악을 죽이는데, 악을 죽이는데 죽일라면은 뭣을 가져야 악을 죽일 수가 있느냐? 악의 반대를 가지면 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악의 반대를 가지면 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악의 반대가 뭐입니까? 악의 반대는, 악의 반대는,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피조물 중심 피조물 위주인데 악의 반대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그것이 악의 반대입니다.
이러니까, 요 좀 아주 어렵습니다, 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할라 하니까 이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할라면 아주 이거는 참 장성한 사람이 하지 힘이 들어서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이것을 할라면 입학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입학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악은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 좋게 하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위하는 것이요, 자기 좋게 하는 것이오. 선은 자기 아닌 남 좋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닌 남 좋게 하는 거.
이러니까, 악 이놈을 죽여서 없애 버리는 데에는, 악 이놈을 죽여서 없애 버리는 데에는, 나 좋게 하는 거, 나 좋게 하는 거,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내 욕심대로 하는 거, 내 성질대로, 내 고집대로, 내 뜻대로, 내 주장대로, 내 취미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어찌 됐든지 자기를 위주해서 자기를 중심해서 하는 이게 악인데 이놈을 죽일라고 하면은, 죽일라고 하면 어데서부터 시작해야 되느냐? 나 좋게 하는 조그만한 일에서부터 나 좋게 하지말고 남 좋게 합니다, 남 좋게. 나 좋게 하지말고 남 좋게 합니다. 내 주장대로 하지말고 다른 사람 주장대로 합니다. 내 의사대로 하지말고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서 다른 사람의 의사대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위하던 자가 다른 사람을 위하는, 타를 위하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자꾸 연습을 합니다. 해서,ㅡ요거 참 아주 어려워요. 요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안하면은 무슨 말인지 몰라. 말은 아는데 그 속의 뜻을 깨닫기가 어렵다 그거요.
자기를 위해서 항상 어데서든지, 사람을 만날 때든지, 일을 만날 때든지, 물건을 만날 때든지 ‘어떻게 하면 이게 내게 유익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내게 좋겠느냐?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하겠느냐, 내 좋겠느냐?’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나 좋은 것을 택하겠느냐? 나 좋은 것을 택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요래야 내게 좋을까 조래야 내게 좋을까?’ 사람 만나도 ‘요 사람하고 내가 말을 요렇게 해아 내게 좋을까? 요 사건을 요렇게 해야 내게 좋을까? 요 물건에 대해서 요렇게 처리해야 내게 좋을까?’ 어짜든지 거게서 자기 좋게 하려는 그것과 여게서 자기 아닌,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좋게 하려는 것과 그 둘이 있습니다. 꼭 둘뿐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것이 어려워요. 요것이 성화되지 안한 인간은 요 말은 이해 절대 안 됩니다. 안 되고 제가 입술은 천 번 설교를 해도 자체는 절대 변화 안 됩니다. 자체는 변화 안 됩니다. 이다음에 뭐 설교 잘했다고 하늘나라 가 가지고 구원된 거 아니오.
마태복음 7장에 ‘내가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내가 선지자 노릇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말은 ‘내가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설교를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얼마나 감동을 많이 줬습니까?’ 이랬지마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쫓아냈습니다. 요거 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입술로는 아무리 해서 천번 만번 해도 저 좋게 하는 것과 자기 아닌 남 좋게 하는 거 요거 현실에는 꼭 요 둘이 당도합니다. 요게 없을 때는 없어요. 요 둘이 꼭 당도해요.
이라는데, 그 현실에서 저 좋게 하는 거. 인인 관계에는, 인인 관계에는 저 좋게 하는 거, 그게 뭐입니까? 그게 뭐입니까, 그게 뭣입니까? 고함을 질러. 그게 뭐입니까? 녜, 악입니다.
또, 사람과 나와의 상대하지 안하고 하나님과 나와 둘이 상대됐을 대에,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과 피는 하나인데, 또 중생된 영도 하나인데,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은 하나인데 내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 ‘하나님 좋게 하느냐 나 좋게 하느냐?’ 이래서 나 좋게 하면 악 하나님 좋게 하면 선, 자, 자기 양심하고 영하고는 이래 하자 하고 자기 욕심은 이래 하자 하고, 욕심은 ‘이라자’ 돈을 보고 욕심은 `이렇게 하자' 중생된 영과 양심은 ‘이렇게 하자’ 할 때에 그때에 돈 따라가면 그거는 뭐입니까? 악입니다. 악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악 이놈을 때려잡아야만 되는데, 때려잡아야만 되는데 그러면 악은 저 좋게 하는 것이 악. 또 선이나 의는 다 한가지인데, ‘선’ 하면은 다른 이 좋게 하는 것이 선, 악은 나 좋게 하는 것이 악, 내게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 악,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 선.
이런데 나 아닌 다른 것이, 나 아닌 다른 것, 나 아닌 것 다른 것이 몇 종류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나 아닌 다른 것이 몇 종류 있습니까? 둘입니다. 나 아닌 타는 둘입니다. 하나는 뭐입니까? 하나님. 하나는? 사람, 전인류.
이런데 악을 잡을라면, 자기를 위하는 요것을 잡고, 자기 좋게 하는 걸 잡고 나 아닌 타를 좋게 하고 타를 위주하는 요것을 길러 숭상을 해야 되겠는데, 숭상해야 되겠는데, 이제 이 악령, 악성, 악습, 악한 세상, 악세, 이것은 전부 악이기 때문에 이놈들은 어짜든지 나 좋도록, 하나님 대하면 피조물 좋도록, 하나님 대하면 피조물 좋도록, 인인 관계를 대하면 저 좋도록, 요렇게 하는 요것을 가지고 꼬우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서 멀리 보지 못하고, 길게 보지 못하고, 결과를 보지 못하고 당장 눈 앞에 있는 짤막한 근시를 가지고 짤막하게 보는 자들은 전부 요 악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좋도록 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자, “목숨을 아끼는 자는” 뭐라 했습니까? “잃을 것이요”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는” 뭐라 했습니까? 뭐라 했습니까? “찾을 것이라” 이랬습니다. 요거는 천지는 없어져도 변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법칙이지마는 마귀란 놈이 꼬와서 인간들은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돼요. 성령의 사람들은 뭐 확고한 이해가 되지마는 성신의 사람 아닌 것들은 이해가 안 돼.
이라기 때문에 목회를 해도 암만 옆에서 말해 줘도 또 보면 항상 ‘요래야 내게 좋을까, 요래야 내 가정에 좋을까, 요래야 내 주장대로 될까, 요래야 내 뜻대로 될까, 나 좋게 될까, 요래야 내가 권위가 설까, 내 명예가 올라갈까?’ 전부 자기 자기.
자, 따라합시다.
우리의! 제일 큰 원수는! 자기 아닌 자기! 참 자기를 죽인 자기! 가장으로 나온 원수 자기!
이놈을 알아야 돼요. 자기가 둘이라. 자기 아닌 놈이,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자기인 척 해 가지고 와 가지고 날뛰니까 속아서, 그놈 잡으라고,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을 죽일라고 성신의 검으로 한 마디 바른 말해서 죽일라 하니까 이거는 제 원수, 저를 죽이는 원수를 죽이니까 응원대니까 감사해야 될 터인데 ‘왜 나를 훼방하노? 나를 욕하노? 나를 책망하노? 나를 왜 대적하노?’ ‘이 병신아. 너를 대적하는 게 아니라 너를 응원해서 살릴라 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너를 착각하기 때문에 너 아닌 원수를 너인 줄 알기 때문에 만판 전부는 완전히 속아서 전멸되고 만다.’ 이거 좀 이해가 됩니까? 저 뒤에 이해가 됩니까? 여반에 이해가 돼요? 점잔부리지 말고, 제까짓 게 점잔 암만 부려봤자 다 불타 버려, 다 소용없어. 무슨 가치 있어! 깨달아야 되지.
그러면, 선은 자기 아닌 타를 위하는 거고 낫게 여기고, 그것을 위하는 것이 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악, 그건데, 악이 몇이라요? 악이 몇이라요? 악이 넷인데, 악이 넷인데, 또 그러면 우리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악이라 죽고 타를 위하고 유익되게 섬기는 것은 살고, 그런데 자기 아닌 타는 크게 말하면 몇 가지입니까? 크게 말하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크게 말하면 몇 가지? 둘이라, 둘. 하나는 뭐이야?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는 창조주인 하나님과 그래 둘이라.
이라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악을 죽이는 데에는, 악을 죽이는 데에는 선이라야 악을 죽이는데, 선이라야 악을 죽이는데, 타를 위하는 것은 선이요 자기를 위하는 것은 악인데, 이 선이라야 악 이놈을 죽여서 없앨 수가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타를 위하는 것을, 타를 위하는 선은 몇 개 됩니까? 타를 위하는 선은 몇 개입니까? 자, 손들어 봐요. 타를 위하는 선은 몇 개요? 어렵다. 되나 안 되나 네 개만 들면 되는 줄 알고. 타를 위하는 선은 몇 개지? 자기 아닌 타가 몇입니까? 타가 몇입니까? 타가 둘이지. 그러면 타를 위하는 것은 몇입니까? 내나 둘이지. 그렇지 안해요? 타가 둘이니까 타 위하는 거 몇이냐 하면 둘이지 뭐 더 있을 턱이 뭐 있소? 타를 위하는 것은 이 피조물이라는, 인류까지 합해서 피조물 위하는 그것이 하나, 또 창조주 위하는 것이 하나, 타를 위하는 것이 둘입니다. 둘.
둘인데, 요게서부터 잘 들어요. 인제 더 안 가르쳐 줘요. 요거만 알면 돼. 타를 위하는 것은 둘인데 자, 에베소 4장에 읽어보기를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 했지요? 자라가면 큰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까 작은 것부터 시작해 가지고 커지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까? 자라가는 것은 큰 것부터 시작해 가지고 자라갑니까 작은 것이 커지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까? 작은 것이 커지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작은 것이 커지는 것이 자라가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선은 큰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자, 선은, 악을 죽이는 선, 선은 큰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자,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녜, 이거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면, 위하는 것을 하나님 위하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인간 위하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인간 위하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하나님 위하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하나님 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사람 손 들어 보이소.
손 들어 봐요. 하나님은 큰데 하나님 위하는 것이면 큰 거지. 타를 위하는 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뭣부터 위하는 걸 시작해야 됩니까? 뭣부터 위하는 걸 시작해야 됩니까? 작은 것부터 위하는 걸 시작해야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 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요것을 여러 시간 가르쳤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구만요.
자, 내가 한절 읽을께요.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뭣부터 사랑해야 하나님 사랑이 돼요? 뭣부터 사랑해야 하나님 사랑이 돼요? 보이는 사람 사랑하지 안하는 그것은 하나님 사랑할 수 있다 했어요 없다 했어요? 없다 했어.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사랑할 수 있다 했소 없다 했소? 요거 똑똑히 잡으십시오. 오늘 저녁에 요것만 잡으면 돼.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데서부터 길러야 돼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랑을 어데서부터 길러야 돼요?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길러야 돼요? 사람은 보이거든, 보이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보일 수도 있고 사랑할 수 있지마는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서 자꾸 연습을 해 가지고, 연습을 해 가지고 나중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성장돼 나갑니다. 알겠습니까?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초절적으로, 보이는 형제도 사랑치 안하는, 사랑치 못하고 미워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거짓말 하는 자라. 거짓말 자라. 알겠습니까? 사람 사랑하는 것을 연습해서 사람 사랑하고, 나보다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무슨 사건이 있거든 나부터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부터 생각하고, 나 좋은 걸 생각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 좋을 거, ‘요라면 내게 손해가 되나 유익되나?’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되겠나 유익이 되겠나? 이거 남에게 방해가 안 되겠나?’ 자기 생각하는 것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또 자기 손해나는 것보다 다른 사람 손해가는 걸 먼저 생각하고, 자기 유익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 유익되는 걸 먼저 생각하고, 자기가 부애나는 것보다 다른 사람 부애날 것 더 생각하고, 자기가 섭섭할 것보다 다른 사람 섭섭할 것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렇게 점점 하면,ㅡ요거 여러번 말 안 해 줘요.ㅡ사람이 하나님 사랑한다는 거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자꾸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요 일을 연습하고, 사람을 자기보다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 유익보다 다른 사람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섭섭한 것보다 다른 사람 섭섭한 걸 먼저 생각하고 요게서 연습하는 요 연습을 자꾸 합니다. 요 연습은 하늘에 속한 연습입니까 땅에 속한 연습입니까? 아니야. 땅에 속한 연습이야. 요 연습은 땅에 속한 연습이라.
땅에 속한 요 연습을 해 가지고 장성하면 나중에 그라다 보면, 사건을 당했을 때에 나 좋은 거 생각할 수가 없어. ‘이라면 내야 좋지마는 주님이 섭섭해 하시지.’ 이제 보이는 형제에게서 하도 그 일을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라면 내야 좋지마는 보이는 그 형제가 섭섭해 한다. 이 사건에서 나 섭섭한 것보다도 이라면 형제가 섭섭해 한다. 이라면 내야 좋지만 형제가 손해가고 안 되겠다. 이라면 나만 좋게 하고 다른 사람 해치니까 이게 옳은 일이 아니다.’ 요 일을 자꾸 해 가지고 거게서 양심을 기릅니다. 알겠습니까? 거게서 양심을 길러 가지고 그 양심을 길러 놓으니까 나중에 하나님 대해서, 자기 대해서, ‘요렇게 하면은 하나님 배반하는 것이고, 요렇게 하면은 나 좋게 하고 하나님 배반하는 것이고, 또 조렇게 하면은 하나님 좋게 하고 나 손해가 가는 것이고.’ 고 둘을, ‘나 좋게 할까 하나님 좋게 할까? 나 위할까 하나님 위할까?’ 요게서, 사람을 상대로 해서 길러 놓은 요 양심이, 닥칠 때에 ‘할 수 없다. 안 된다. 내가 어떻게 죽어도 나 좋기 위해서 하나님 배반할 수 있느냐?’ 요런 사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할 수 있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요 사람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제가 이것을 여러 시간 벌써 말을 했습니다.
이래서 지난밤에는 디모데전서 6장을 읽었습니다.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을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두며 선한 일을 행하며 또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사람이 되게 하라 이것이 자기를 위하여 장래에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요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걸 가지고 말씀을 했어.
이러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우리가 그라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다른 사람 좋게, 다른 사람 유익되게, 나보다도 다른 사람 섭섭할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부담 안 줄라고, 몸에 부담을 안 줄라고, 경제 부담을 안 줄라고, 손해를 끼치지 안 할라고 자꾸 이렇게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땅위에서, ‘그 사람 점잖하다. 그 사람 참 도덕가다. 그 사람 의인이다. 성현이다.’ 자기 이 세상에서 명예 칭찬받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에게 호감받아 가지고 투표 많이 받기 위해서, 땅의 소망을 위해서 요렇게 타를 위하는 연습을 하는 자는, 그자는, 그자는, 자, 어데 속했습니까? 악입니까 선입니까? 대대악이라. 알겠소? 자, 그것은 대악.
따라합시다.
그것은! 대악! 대악! 장성한 악! 기능적인 악! 최고의 악!
이제 이 연습을 하는데 사람에게 칭찬받을라 하는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 좋게 하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유익되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하나님 위할라고 해도 이 일이 안 되니 내가 보이는 형제에게서 연습을 해 가지고 이제는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순전히 나를 대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내가 죽음 앞에서도, 공산주의 앞에서도, 억만금이 내 앞에 닥쳤어도, 천하에 제일가는 지위나 권세가 내 앞에 와도 나 위하지 안하고 내가 주님 위하는 요 사람으로서, 자기 위하지 안하고 주님 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일을 인인끼리의 연습을 해 가지고, 자기 위하지 안하고 타를 위하는 연습을 해 가지고 이 연습의 숙달로써 하나님 위하는 일을 할라고 이 소망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악입니까 선입니까? 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형제를 위하는 것도, ‘저 사람이 뉘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다. 주님의 사람이다.’ 자, 인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인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오. 제일 못나고 악한 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까 보이는 사람에게 대해서 이와같이 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다 그말이오.
자, 보이는 사람 앞에서 죄를 지을 때에, 죄를 지을 때에 사람의 눈을 무시하고 죄짓기가 쉽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짓기가 쉽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짓기가 쉬운지, 사람 눈을 무시하고 죄짓기가 쉬운지? 사람 눈을 무시하고 죄짓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사람 눈은 빠끔하게 보기 때문에 못 해. 하나님은 전지자이지마는 하나님의 눈을 보고 죄짓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쉽지 안해요. 나는 그렇데요. 여러분은 안 그렇습디까? 나는 그래요. 여러분들은 안 그래요? 안 그래? 그러면 손 들어.
이거야. 이러니까 여러분들, 사람 앞에서 연습하기는 쉽고 하나님 앞에는 연습하기가 어렵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연습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 것이, 당신을 사랑함으로 인간을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하는 게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에게 이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이 일을 연습해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악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을 어데서 연습해야 되느냐? 악을 죽여, 악을 죽여, 다시 말하면 이기주의 이놈을, 이기주의 이놈을 죽이는 연습은 어데서 할까? 내 중심 내 위주를 죽이는 연습을 어데서 할까? 어데서 할까? 사람에게서 해야 됩니까 하나님에게서 해야 됩니까? 이제 큰 소리로 대답해. 저 뒤에, 사람에게서 해야 됩니까 하나님에게서 해야 됩니까? 몇 사람 하는 소리도 안 된다. 몇 사람 하는 소리도 안 돼. 다 패전해, 패전. 아, 이걸 들어서 깨달으면 막 좋아서 뛸 터인데, 여러분들은 나만침 진리를 사랑치 안해요. 정말로 나만침 진리를 사랑함이 없어요. 나는 만일 이런 거 하나 깨달을 때 나는 막 뛰고 굴리고 못 견뎠었어.
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진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눈물을 흘리고 이랬지마는 뭐 사람이 죽거나 뭐 그런 일에 대해 눈물 흘려 본 일이 없어. 자녀들이 그때 뭐, 지금은 뭐 왔다 갔다 하지마는 자녀들이 미국 간다 하는데 미국 갈 때 다른 사람 볼 때는 ‘아마 미국 가니까 지금 아마 조사님이 지금 눈에 눈물 흘려.’ 눈물 요만치도 한번도 비춰보지도 안했어요.
이래도 진리 깨달으면 좋아서 못 견뎌. 진리 깨닫고는, 깨달아, 새로운 진리 깨달으면 울어요, 못 견뎌서. 이 진리를 깨달으면 막 좋아서 뛰고 굴릴 터인데 여러분들은 그 아무 감각이 없으니까. 혀도 병신이요 미감도 취감도 다 병신, 마비가 돼 가지고 있으니까 암만 입에 넣어야 맛이 있어야지? 맛이 있어야지? 자, 따라합시다.
마비된 입! 마비된 입병! 마비된 입병! 회개와 기도로 고치자!
고쳐야 돼요. 아무 자극성이 없어요. 아무 자극성이 없어.
이러니까 여러분들 어짜든지 우리의 원수는 악입니다. 악을 죽이는 데에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죽이는 그게 악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를 죽이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연습이 잘 안 됩니다. 보이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나 위했는지 상대방 위했는지 안다 말이오. 나 위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면 상대방이 좋아하거든. 대번에 효력이 나니까 기분이 나고 사기가 돋구인다 말이오. 이러니까 여게서 자기 위주 사욕 주관을 죽이고 형제를 위하는 선에 속한 연습을 여게서 하면은 빨리 자랍니다. 여게서 하면 빨리 자라.
오늘 저녁에 설교한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자, 깨달은 사람 손들어 봐요, 깨달은 사람? 정말로 깨달은 사람 손들어 봐요. 다 깨달아졌습니까? 됐어. 자꾸 연습합시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줬던 걸 자꾸 거둬갑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자꾸 거둬가요. 자꾸 거둬가.
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 것을 자꾸 다른 사람에게 주는 자는 어짠다 했습니까? 뭐라고 말했어, 마태복음 24장에? “주인이 올 때에” 그게 그거라.
“주인이 올 때에” ○○○목사님, “주인이 올 때에”그래. “주인이 올 때에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그라면 부자 됐어요 안 됐어요? 됐어요 안 됐어요? 이게 내나 그 진리라 그말이오.
자기의 것을 타를 위해서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걸 주기 때문에 이제 이거는 몇천 배 몇만 배도 자꾸 돼져. 하나님이 이 일을 연습을 시켜요. 왜? 이 일 연습시키는 목적이 어데 있습니까? 저 위해 살지 말고 창조주, 자존자, 하나님 위해서 살아라 하는 이걸 연습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제가 저를 위하지 안하고 타를 위하면은 ‘타를 위하니 잘 했다’ 또 상급, 타를 위하니까 ‘또 잘 했다’ 상급, 이거는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창조주, 조물주, 자존자 그분을 위하는 자가 되어져서 영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전화도 보면, 전화하면 실컷 얘기하면 아무 답도 없고, 뒈졌나? 이거 자나? 어데 갔나? ‘들립니까?’ 하면 `예' 볼통받이를 쿡 쥐어박았으면 좋을 만치. 그런 미련한 게 뭐 할 거라, 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안해요. 내가 요새 보니까 전화하는데 참 존경하는 인격이 하나는 우리 교회 있고 하나는 저게 ○○○교회 있어요. 전화하면, 이래 전화하면, 이라면서 ‘여보시오’ 하면 그만, `녜' 이라지 않고 `여보시오' ‘예예, 예.’ ‘누구십니까?’ `예예' 한 번 해도 될 건데 `예예' 그만, 그 상대방이 그 말에 기분 좋게 ‘여보시오’ 하면 `예예' 막 반가운 사람 기다리고 있다가 하는 거 모양으로 ‘예예 예예’ 이래. `예예.' 뭐이 어떻고 하면 그만 말할 여가 없이 `예예’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이 없도록, 그 한 마디 하면 ‘예예' 이라면 상대방이 마음을 쓰지 안하지마는 말해도 못 들은 척 하고 있다가 나중에 거석하면 이제 뭐라 하면 ‘예’ 뭐라 하면, `어짭니까 듣습니까?' `예, 듣습니다.' 아이고, 참.
여러분들 오늘 밤에는, 어짜든지 우리가 악이 들어서 우리를 멸망 시키는데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크게 말하면 피조물 중심 피조물 위주 이것이 자기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에 여게서 완전히 돌아서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만들기를 우리를, 우리를 만들기를 하나님 위해서만 살도록 만들었어요. 이러니까 하나님 위하는 연습을, 하나님 위한 연습을 ‘이 사람 위하라’ 하면 ‘예' 하나님 위하는 연습을 `인간을 위해 봐라' 할 때 인간을 위한 거기에서 하나님 위하는 연습이 달성이 되어집니다. 알겠습니까? 믿습니까! 저 뒤에 깨달았습니까! 됐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나와요. 새벽기도에 전화로 해 가지고 연락해요.
새벽기도는 나오지 안하며 뭐 예수 믿는 척 하고 있어? 장로님들 새벽기도 다 나와요. 의무적으로 나와요. 장로가 됐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는 장로돼서 새벽기도 안 나간다. 너거도 나가지 말아라.’ 그 광고 아닙니까? 권찰도 집사도 다 나와야지요. 또 중간반 반사들도 다 나오고. 으례히 중간반 반사 다 나오지. 새벽기도 다 나와요. 요새 새벽기도 한, 암만 그래 쌓아도 팔백 명이 안 넘어가. 항상 그 안에 있어. 어짜든지 새벽기도 전화해서 많이 나오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