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ICCC문제

 

1989. 5. 26. 금야.

 

본문: 에베소서 6장 10절∼1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온 세상에 두어도 둘 만한 곳이 못 되는 많은 도리를 간단 명료하게 육십육 권  신구약으로 간추려 주셨고 또 이 안에 성령님께서 내재하셔서 그 모든 충만하고  무한함을 다 알게 하시고 또 믿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을 소망하게 하시고 또  실상을 이루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시는 주님의 이 구속 역사  성령님의 보증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날밤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함께 하시고 이 자리에도 같이 하사  순전히 주님의 은혜로 우리 땅에 속한 것 들 하늘의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모든 피조물의 이 주관을 조물주이신 주님의 온전하신 뜻으로 바꾸어 주사  영원하고 완전한 것으로 살아났사오니 살아난 새사람으로 자라가는 은혜를 이  시간에도 주시옵소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여기에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했는데 원어에는 그 '우리의 씨름은' 하는 그  씨름은 어떤 말로 표시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우리의 전투는' 하는 말보다  좀 다른 말로 부드러운 말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달음질을 경쟁하는 것,  또 이런 저런 시합을 경쟁하는 거와 같은 그런 뜻을 여기에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저는 깨닫습니다.

 이 전투라면 상대방을 죽이고 그리 안하면 내가 죽든지 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이 시합하는 거와 같고 또 경쟁하는, 달음질할 때 서로 이기기를 다투는  거와 같은 그런 성격의 뜻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는 것은 우리 이 달음질하고 경쟁하고  시비하는 그 방편도 혈육전이 아니고, 그 방편도 혈육전이 아니고 또 우리가  싸우는 그 싸움의 목적도 혈육의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위에 10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주님을 들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또 마귀의 그 모든 궤계에 빠지지 안하도록  해야 된다는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시비하고 서로  이기기를 다투는 이것은 무슨 육신의 소망이나 소욕이나 그런 것을 우리의,  우리의 가치로 삼아 가 지고 이렇게 경쟁하는 것익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슨 싸우는 방편도 혈육적으로 그렇게 무슨 무기를 가진다든지, 또  어떤 무슨 육박전을 한다든지, 또 세상 무슨 물질에, 이런 물질계의 것,  물질계에 있는 그런 것을 힘으로 삼아 가지고 싸우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또 마귀를 대적하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라' 하는 이것은 전부 이 우주 안에 있는 피조물적의 것이  아니고 창조주적인, 창조주의 것인 그런 힘을 가지고 무장해서 강건하여져라  하는 그러한 것을 위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혈육의 방편을 써도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뭐 이 강대국과 저 강대국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또 사회와 사회, 이웃과 이웃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저런  수많은 종류의 경쟁을 하고 있는 그런 류의 경쟁이 아니고 그런 것에다가 가치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그런 것을 여기에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싸우는 방편도 순전히 이 우주 안에 있는 뭐 원자니 수소니 뭐  또 별별 그 모든 이 물질계 안에도 많은 힘들과 또 연구해서 그 연성된 성숙한  모든 능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걸 가지고 우리가 싸우는, 경쟁하는  이 경쟁도 아니고, 방편도 그런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우리가 쓰는  방편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주 안에 있는 그 능력을 가지고  그 능력을 가지고 싸우는 싸움이며 경쟁하는 경쟁이며 서로 이기기를 다투는 이  경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우리가 전투하는 모든 무기나 방편도 그런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 우리가 전투하는 그 소망의 가치도 그런 데에다가  두는 것이 아닌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이래서 우리가 혈육의 그 모든,  혈육이라고 말하면 그만 이 세상의 물질계의 것이라고 해도 됩니다. 물질계의  그런 무슨 그 무기나 힘이나 그러 거 가지고 싸울 싸움이 아니고 또 물질계의  그런 어떤 성공이나 또 소득이나 그런 것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하는 것을 여기에 표현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러면 이 싸움은 무슨 싸움인가? 이 싸움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었습니다. 사활의 대속을 입고 우리가 사는데 우리가 욕망하는  것도 사활의 대속이요,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도 사활의 대속이요, 또 우리가  힘과 능력으로 무기로 삼는 것도 사활의 대속입니다. 사활의 대속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보수하고 이 대속을 잘 우리가 모시고 이 대속을 힘입고 사활의  대속을 받은 자로 합당하게 정당하게 정상적으로 사활의 대속을 입은 자로  흠없이 점없이 그 모든 잘못이 없이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전생애요  또 전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그들이 뭐 껍데기는 보면은 우리의 물질을 뺏들라고 하는  것도 있고 우리의 또 권세, 이 세상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 그런 것을 해하고  뺏들고 하여서 그런 것들로 우리 마음에 충격을 주고 또 우리의 정신을 혼란하게  이렇게 만들지마는 실은 그들도 그런 것 때문에가 아니고 그런 것은 작전상 한  방편으로 쓰는 것이지 그들도 목적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들로  하여금 지니지 못 하도록 입고 살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저들의 깊은 목적이요  또 그들의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잘못하면 이 세상살이는 우리가 안 믿을 때와 같이 이  물질계의 것 이런 것을 우리가 우리의 소망으로, 소득으로, 수입으로 이렇게  보고 살면 이것은 순전히 악령편에 서서 악령의 작용에 지금 벌써 그 감화를  받아 가지고 악령에 속한 악령적인 그런 편이 돼 가지고 생애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올바른 정상적인 성도의 생애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의  씨름은 혈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 방편도 이 세상적 방편이나 또 그런  힘을 가지고 싸우는 싸움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 전투하는 그 경쟁하는 우리의  목표의 그 소득과 성공과 가치로 삼는 것도 그런 것은 아니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가치로 삼고 우리의 지닐 보배와 우리가 승리할 그 승리를  무엇으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가 그러면 시비하는 그 가치는 어데  있으며 우리의 성패의 가치는 어데다가 두는가? 그것은 순전히 '혈육의 것이  아니라' 하는 그말입니다. 혈육의 것이 아니라 하는 그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혈육의 것이 아니라'  또 우리가 이 씨름을 하는 이 경쟁을 하는 데에 그 경쟁에 대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어떤 실력인가? 그것도 이 세상의 피조물의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사활로 우리에게 온 그것으로써 힘을 삼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악령들은 우리  성도들을 유혹시켜서 자꾸 이 세상에 있는 걸 가지고 경쟁을 시킵니다. 세상에  있는 것 이것을 가지고 이거 뺏들면 그거 안 빼앗기려고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은  외나 내가 안 빼앗기고 보수해야 될 것은 다 그만 손 털어놔 버리고 엉뚱한 걸  잡고서 시비하기 쉽습니다. 마귀도 이것을 잘 압니다. 그들이 그것은 하나의  전투하는 그 전법으로 쓰는 것이지 그들의 목적도 그 목적은 유일합니다. 그거는  뭐이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들로 하여금 입지 못하게 해서 다만 몇  시간이라도 못 입게 하고 그러면 일생을 못 입게 하고 이것을 실패시킬라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데 그저 전법상 이 세상 걸 가지고 날뛰니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가질 것이며 취할 것이며 우리에게 있는 참 소망하는 그런 가치인 줄  알고 그만 전투하던 것을 대적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삐뚤어진 전투 그런 전투를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는 요것을,  말한 요것을 다 한테 뭉쳐서 보면 그러면 정사와 대립이 되고, 또 세상 권세와  대립이 되고, 어두움에서 세상 주관하는 자들과 대립이 되고, 공중의 악한 영과  대립이 되는 그 대립되는, 여기에 대립이 되는 힘은 무슨 힘인가? 여기에 대립이  되는 힘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힘 외에는 이것들과 대립되는 힘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그들과 대적이 돼 가지고,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그것들과 대적이 돼  가지고 싸우게 되어지는, 필연적으로 대적이 되어지는 그 필연적 대적되는 그  대적되는 거는 뭐인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아닌 것은 세상 권세하고, 또 세상 주관자들하고 또 공중의 악한 영하고 이렇게  합작을 해서 협동할 수가 있는데, 세상 권세, 정사, 또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공중의 악한 영 이 네 가지로 더불어 아무래도 합하지 못하고, 조그매도 합하지  못하고 완전히 그라 이 질적이고 이색적인 것은 뭐인가? 이 질적이고 이색적안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이 외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외의 것은 다  거기에서 다소라도 이제 동질이 될 수 있고, 협동도 될 수 있고 서로 화랍도 할  수가 있고, 또 서로 상호 협조도 할 수 있는 것이요 다만 물에 기름과 같이, 또  물과 불과 같이 이렇게 이 네 가지와 완전히 그 깊음의 요소, 요소의 아주  미약한 거, 요소의 참 머리털만한 것이라도 일치가 되지 아니하는 그것이  뭐인가? 그거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외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기에 많은 말들을 해 놨지마는 여기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말은 이제 방편도 그러하고, 또 목적도 그러하고, 가치도  그러하고, 우리가 탐하고 지금 잡을려고 하는 것, 옮기지 않을려고 하는 것은  이거는 순전히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 하는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가 빼앗기지  안하고 이 대속을 보수하려고 하면은 이 네 가지와는 완전히 적이 됩니다. 이 네  가지는 여기에는 추호도 일치되는 것이 없고 완전히 이 질적이요 대립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는 목적이 어데 있으며, 싸움의 가치를 어데다 두며,  또 우리가 경쟁하는 데에 우리의 수입이 어데 있으며, 우리가 또 어떤 힘으로  무장을 가져야 될 것이며, 우리가 씨름하는 그 대상은 어떤 것인가 하는 요것을  바로 아는 데에 먼저 제일 가치가 있고, 그 다음에는 그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어데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 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우리의  대속인데 이 대속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이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외부에  나타나 보이기는 예수님이지 마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사활의 대속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하나되어  가지고 이루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이것을 어짜든지 뺏기지 안하고 내가 이 대속을  입고 살라고 애를 쓰는 것이고 또 악령은 이 대속을 다만 한 시간이라도 입지  못하게 빼앗을라고 애를 쓰는 것인데 빼앗은 것은 저희의 수입이 되는 것이고  입은 것은 우리의 수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이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똑똑히 우리가 이거, 모든 성경이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목적이 어데 있으며,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이 어데  있으며, 우리의 수입이 어데 있으며, 우리의 손해가 어데 있는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외의 것은 다  뺏겨도 하나도 손해가는 거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외에 온 천하를 다  차지해도 한 내끼도 자기에게는 유익되는 것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전욕망이나 또 수입이나 우리의 것이나 가치나 목적이나 하는 이 전부를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다가 두는 것이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대속에 두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악령들은 또 그들은 지금 잘 압니다. 우리의 전부가 되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손해보일라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여기 씨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우리의 사활의 대속을 성공하지 못하게  할라 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가 완전히 입어서 성공하려고  하고 하는 이것이 서로 씨름이요 시비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이 사활의  대속을 인고 살려고 할 때에 원수들이 이 사활의 대속을 손해보일려고 달라드는  그자들의 이름을 가리켜서 여기에 몇 가지 들어서 말해 놨습니다. 모든 세상  정사들이, 우리의 참 영원한 보배요,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우리의 부강이요,  모든 능력이요. 생명이 되는 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벗지 아하고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이런 것들이 못 입게 하는 것이, 방해하는 것이 정사가 방해할  때도 있고, 세상 모든 권세가 방해할 때도 있고, 어두움의 세상 주관하는 것들이  방해할 때도 있고, 모든 악한 영이 방해할 때도 있다.

 그러면 우리의 적은 어떤 게 우리의 적인가? 우리의 적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손해보일라고 하는 이것이 우리 적이지 이거 외에는 우리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요걸 똑똑히, 아주 똑똑히 확정을 짓고 단정을 해야 되지 머뭇거리면 다  헛일입니다. 이 세상이 지금 뭐인 줄을 모르고 벌로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정사가, 정사는 가정에도 정사가 있고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경영이든지 있으면 거기에 다스림이라는, 다스림이라든지 관리라든지 그런  게 다 정사입니다. 그게 없는 데가 없는데 이 세상에 어떤 정사든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입었는데 입은 이 사활의 대속을 손해보이는 것이 아니면  우리 적이 아닙니다. 적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어떻게  한다 해도 사활의 대속을 손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적이 아니요, 사활의 대속을  손해보이는 것은 아무리 자기의 친근한 가족이라도, 또 형제간이라도, 부모라도,  뭐 어떤 고귀하고 위대한 무엇이라 할지라도 내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털끝  만치라도 손해보일라 하면은 그것은 나의 적으로 알아서 우리가 상대해야  됩니다.

 이래서 예를 들면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과 공중의 그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이 대적을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하는 그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네가 벗지 마라 그  말이오, 대속을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뭐?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우리에게 전신갑주입니다. 전신갑주인데 그러면 이 전신갑주인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어데 있는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신구약 성경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어데 담겨 있는가? 신구약 성경  하나님으로 더불어 계약한 이 계약 안에 담겨 있다. 계약 안에 담겨 있는데 이  계약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하는 그말은 하나님이 완성해 놓은, 이는 조금도 흠이 없는 완성해  놓은 것이 복음에 나타 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가질려고 하는 것은  복음 속에 하나님의 사활의 완전 대속의 완성인 이 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  우리가 복음을 가질려고 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속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들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복음이라 말은 복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활의 대속이 이  신구약 성경 가운데 들어 가지고 있는데 신구약 성경 가운데 들어 가지고  있지마는 신구약 성경을 어떻게 깨달아야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을 깨닫는 것을 가리켜서 교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교리라  말은 예수교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 그말입니다.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그말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성경 깨달음이라.

 신구약 성경의 깨달음이란 말은 신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사활의 우리 구원이  들어 있는데 이 구원이 어떻게 들어 있으며, 또 이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잘  보수해야 되며, 또 이 구원을 빼앗기 위해서 원수들이 어떤 방편을 가지고  오는가 하는 그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구원에 대한 보수하는 그 모든 지혜가  담겨 있고 또 원수를 바로 지적해서 방어하는 그런 모든 지혜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바로 깨닫는 것을 가리켜서 교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교리라 그렇게  말하고, 또 그러면 이 바로 깨달은 이것을 확신을 가지고 믿는 걸 가리켜서  신조라 그렇게 말합니다. 교리라 신조라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 담겨 있는 이  사활의 대속, 우리 구원 곧 복음, 우리 구원을 깨닫는 것을 가리켜서 교리라고  말하고, 깨달은 대로 그대로 자기가 믿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 믿는 조건 '나는  요거는 요래 믿는다 조래 믿는다' 하는 그런 것을 신조라 그렇게 말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그 씨름은 어데 있는가? 우리가 이 신구약 성경에 대한 올바른  교리를 가진 것은 신구약 성경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이고, 또 올바른 신조를 가지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  들어 있는 이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바로 가지고 누리고 실상을 삼아서 그  효력을 보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없었으면 안 되고, 사활의  대속이 있은 후라도 이 사활의 대속을 담아 가지고 우리에게 갖다주는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없으면 안 되고, 또 신구약 성경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없으면 또 안 되고, 또 올바른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서 이대로 확신하는 신조를 삼지 못하면 또 헛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땅위에서 뭐 혈육의 소망이나 혈육 방편의 혈육의 무슨 무장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능력을 입어  가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것을 대항해서 싸워야 하논데 이 싸움의  가치도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니고 혈육의 것이 아니라 하는 그말은 벌써 신령한  것이라 하는 그말입니다.

 이래서 육체의 생각을 상대해서 영의 생각이라 말했고,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욕심이라 또 그렇게 말해서 언제든지 이랬는데 혈육이 아니라 말은 영이하는  것을 벌써 성경에 늘 기록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요 또 우리가 이 사활의  대속을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원수들은 이 정사, 권세 어두움의 주관, 공중에  권세잡은 악령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가지지  못하도록, 대속만 입고 벗지 안하면 만능이요 완전인데 이 입지 못하도록 이렇게  방해하는 역사가 있는데 그 방해하는 역사 그걸 우리가 방어해 낼라고 할 때에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방어해 낼라고 할 때에는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는가, 그러면 무슨 이 세상에 잘난 권세들을 많이  배경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과학을 구비해야 되겠는가? 아무것도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그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고 벗지 말아라 그말입니다. 대속을 벗길려고 애를  쓰는데 그 찍해야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벗으라고 하는 대적들을 대적하는  데는 내나 사활의 대속을 입고 벗지 말아라. 입고 벗지 마라. 내나 벗기기  위해서 하는데 방어하는 방법이나 승리하는 방법을 입고 벗지 말아라 하니까  내나 그 말이 그 말이니까 아무 뜻이 없는 것같이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고 벗지만 안하면 이는 전능이요 만능이요  무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대속을 입으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내가 입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위해서 베푸신 모든 완성해 놓은 그 완성을 내것  삼아 입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또 우리가 입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이 우리 중에 우리가 돼 가지고 역사하셔서 그 모든 것을  피조물에 대해서 창조주가 역사하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서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신 자가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빼앗을려고 애를 쓰는 자에게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속을 입고 벗지 않는 것이라 하니까 말같지 않게 들립니다. 대속을  재앗을려는 그 적이 와서 이라는데 적을 방어 하는 무슨 다른 방편이 있는 게  아니라 대속을 뺏을라 할 때에 '대속을 벗지 말아라' 하는 그 말이니까 이거  아주 말같지 않지마는 대속을 우리가 입고 벗지 안하면 그는 벗길라 하는 그런  자들이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안 벗을라 하는 여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뱀이 그놈이 세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무한히 능력을 주신 하나님이 계셨고 전능의 말씀이 계셨고  이랬는데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모시고 있었으면 그까짓 거 오지도 못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고 있으면 오지도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우리의 대속을 뺏들라고 하는 자에게는 우리가  대속을 우리 생각에서 잊어버리지 안하고 벗지 안하고 항상 대속을 생각하고  대속을 입고 있는 그게 유일한 승리의 방법이요 유일한 실력을 갖추는  방법입니다. '내나, 누가 벗고자 벗는가? 벗길라고 애를 쓰는 거기에 안 벗는  방법은 입고 있는 것이다. 그 무슨 말이 그런 말인가?' 이러나 벗기는 것을  방어하는 방법은 인고 안 벗을라 하는 것뿐입니다. 입고만 있으면 됩니다.

입고만 있으면. 이것이 이 믿음의 비밀이요 오묘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안하려고 하는 것은 뭐이냐? 사활의 대속은  신구약 성경 말씀에 담겼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가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속을 벗지 안하려고 하는 것이 곧  신구약 성경에 계약하신 그 계약대로의 계약을 어기지 안할라 하는 것이요,  우리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에 어긋나지 안하고 교리와 신조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리와 신조대로 우리가 살고 또 이 교리와 신조대로 사는  그것이, 그것이 개인의 개개의 사생활도 되지마는 이것이 단체 생활이 될 때에는  그때에는 행정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생활이 확대되어서 정치에  관련되고 정치에 관련된 것이 마지막에 종말에는 단체 싸움이 아니라 개별적인  개인의 전투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러면 씨름이라 하면은 좀 힘이 없는 것  같아서 전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투는 무슨 전투인가?  우리의 전투는 교리 전투요, 신조 전투요, 행정 전투입니다. 이 세 가지  전투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교리 그대로 하려고 하고, 또 그대로 신앙하려고  하고, 그대로 우리가 모든 행정을 하려고 할 때에 우리에게 모든 대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의 악한 영들이니까 우리가 정사를,  정사를 우리가 적대시하는 그거 잘못입니다. 어떤 정사든지, 어떤 정사라도  정사가 우리 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사도 적대시하지 말고, 악령도 적대시하지  말고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도 적대시 말고, 모든 권세도 적대시하지 말고  우리의 이 할 일은 뭐이냐 하면,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보고 바로 깨달은 올바른  교리와 신조 또 성경대로의 행정 요대로만 하는 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래서 I.C.C.C에 주동자이신 맥킨타이어씨가 그분이 I.C.C.C에 제일  두목되는 분인데 그분을 왜 그 반대를 했느냐? 제가 경기노회에 그때는 나는  지금 여기에서 지금 고신에서는 쫓겨났기 때문에 어데 붙을 때가 없습니다. 붙을  때가 없어서 경기노회에 나를 붙여주겠다 이래서 경기노회에 가입을 했었습니다.

경기노회에 제가 가입을 할 때 그때 우리 교인들 많이 갔습니다. 가입해 가지고  가입되면 거기에서 목사 안수 받을까해서. 안수는 받아야 되는데 뭐, 자격증은  그때 어떻게 해서 강도사 인허는 받았지마는 안수는 아무도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인제 경기노회에 가입을 했습니다.

 가입을 했는데 가입해 가지고 회의 진행하는 가운데에 I.C.C.C 문제가 나니까  강원도 지방에 있는 그 모든 교회들이, 경기노회에 속한 강원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I.C.C.C에 벌써 가입을 했고, 또 경기노회도 I.C.C.C에 가입을 하기로  그렇게 결의가 되기 때문에 결의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나는 가입 청원서를  철회를 했습니다. 철회한 것은 '내가 I.C.C.C에 여러분들이 가입하니까  I.C.C.C에 가입하는 거 게는 나는 가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도로 가입  청원서 한 걸 그걸 철회를 해 달라' 이라니까 그분들이 좋아서 얼른 철회해  줍니다.

 왜? 내가 거기 들면 고통이요, 지금 고신에서 두통거리인데 또 들 어가면  두통거리가 될 터이니까 좋아서 '그리 하라' 그래 내가 있다가 말하기를  '철회한다는 것을 노회 촬요에 쓰되 아무것이가 이 경기노회에 가입을  신청했다가 I.C.C.C에 경기노회가 가입을 할라 하기 때문에 가입 청원서를  철회했다 하는 그것을 명목적으로 명문으로 그 기록을 하고 나를 그 철회해  달라. 그라면 내가 여기 철회해 나가겠다.' 그분들이 날 철회시키기 위해서 '아,  좋다. 그러면 노회 촬요에 그렇게 기록을 하고 그렇게 해 주겠다.' 그렇게 하고  했는데 그들이 그래 말했는데 그뒤에 기록했나 안했나 그거는 조사해 보지는  안했습니다.

 왜 I.C.C.C 그걸 지금 그렇게 했는가? I.C.C.C 그가 선포해 놓은 표어에  제일호가 반공입니다. 일호가 반공이고 이호가 보수입니다. 이래서 그거는  기독교 정치주의라 해 가지고 그때 OOO 목사님이 거기 갈라고 하면서 나한테  사람을, 그때 서부교회 집회하는 중에 있는데, 내가 집회 인도하는 중에 있는데  사람을 보내 가지고 '이 I.C.C.C에 가입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하는 그것을  물으러 왔기 때문에 '그거는 기독교 정치주의기 때문에 가입하지 말아라' 해서  그분들이 가입을 안 했습니다.

 왜? 그것이, 우리는 반공하는 것을 반공하지만 우리는 반공주의자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지금 이거 보수하는 거, 지금 신조와 교리를 그거 보수한다는 그것이  둘째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내가 부정했었습니다.

 그래 우리의 할 일은 뭐이냐? 우리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전신갑주 입고 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요, 사활의 대속을 나눠 놓으면 우리가 말하는 교리와 신조입니다. 그러면  그 사활의 대속을 바로 우리에게 알려주고았는 교리와 신조 이것을 우리가 잘  이행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싸움의 유일한 방법이요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저녁에 이말 하는 것은 왜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정사를 대적으로  삼을 것도 아니요, 마귀를 대적으로 삼을 것도 아니요, 공산주의를 대적으로  삼을 것도 아니라. 다만 우리는 할 일이 뭐인가? 우리 할 일은 우리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 행정 요대로만 우리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대로 해서, 이대로 해서 공산주의가 우리가 이대로 우리 깨달은 교리와  신조대로 살 때에 공산주의가 대립되면 공산주의도 대립되고, 민주주의가  대립되면 민주주의도 대립되고, 가족이 대립되면 가족도 대립되고 형제간이  대립되면 형제간도 대립되고, 부부간이 대립되면 부부간도 대립되고, 어데든지  이 교리와 신조대로 우리는 지켜서 살고 이대로 살 때에 방해하면은 우리는  방해를 받지 안하고 이렇게 살라고 하고 그들은 방해하고 이러니까 자연히 그  사이에는 서로 시비가 생겨져 가지고 갈라지기도 하고 아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교리와 신조라 하면 별스러운 것으로 알고 아주 남의 일로 이래  알고 있지마는 우리가 개인으로서 무슨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  신자가의 고난이라면 무슨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것도 교리  신조대로 살라고 할 때에 어려움 당하는 그것이 옳은 어려움이지 교리와 신조  없이 자기 감정이나 무슨 또.정서나 또 물질이나 또 무슨 지위나 권세나 세상  소득이나 이런 싸움은 우리의 싸움도 아니고 이런 고난은 십자가의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교리와 신조와 우리의 행정, 그러면 이 세상과는 예수교가  반대요, 또 예수교 안에서 또 다른 교파와 장로교가 또 서로 반대요, 또 장로교  안에 우리는 장로교들이지만 장로교 안에 또 일반 장로교와 다른 것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가진 깨달은 교리와 신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깨달은 교리와 신조 행정 이대로 우리가 행사하고 이대로 살라고 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마찰되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요 또 우리의 적이요 그로 인해서 고난  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에서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경 보고 깨달은 교리  신조대로 살라고 함으로 가정에 어려움 당해야 그것이 옳은 어려움이고 가치있는  것이지 교리와 신조 냅두고 딴 것 때문에 하는 것은 전부 마귀 싸움이지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는 꼭 교리 신조, 교리라 말은 신구약 성경을 보고 자기가 어떻게 행해야  되냐 하는 것을 깨달은 그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을 보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가 깨달은 그대로 사는 것이 교리대로 사는 것이요, 그대로  사는 것이 신조대로 사는 것이요, 그대로 이 모든 행정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힘쓸 것은 대적이 이런 것 저런 것 대적, 공 산주의라도  우리가 교리와 신조와 그 행정대로 살라고 할 때에 방해하지 안할 때에는  공산주의도 우리에게는 적이 아닙니다. 또 이대로 살라 할 때에 부모, 형제,  자매, 부부라도, 살라 할 때에 여기에 대해서 대립이 되어지면 이것이 우리의  적으로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전신앙생활은 교리와 신조 행정 이것으로 살아야 되고,  또 이것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이 기독자의 박해고 십자가의 고난이요, 또  이대로 살라고 함으로써 여러가지 마찰로 오는 그것이 우리의 싸움이요 우리의  씨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에도 모든 개인의 기독자의 박해도 다 교리와 신조행정에서  나왔고 또 단체의 박해도 교리와 신조와 행정에서 나왔습니다. 깨달은 그대로  할라 하고 다른 사람은 그래 하지 못하게 하고 이래 가지고 나온 것이 기독자의  고난이요 기독자의 모든 전투요 기독자의 십자가의 고난이지, 교리와 신조를  떠나고, 교리와 신조대로 행정하는 것, 교리와 신조, 교리와 신조대로 행정하는  이 세 가지를 떠난 어려움은 그것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것 때문에  꼭 당하는 것이라야 예수님과 상관이 있고 요것을 십자가의 고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그런 것 때문에 모두 다 이렇게, 우리 진영에도 이래 분리가  생겨지는데 그 분리 생겨지는 건, 내가 이번 집회 때도 말한 것이 이 교리와  신조로서 나중에는 자기가 생명도 안 내놓으면 교리와 신조를 양보해야 되고  교리와 신조를 내주지 안할라면은, 이대로 하려고 하면은 생명을 내놔야 되는  이런 일이 필연적으로 앞으로 닥쳐오는 것은 이거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만일 그 경험을 하지 안하고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너는 지금 이 교리와 신조를 뭣만치 여겼다, 뭣만치 못 여겼다. 그러면 이  교리와 신조보다 낫게 여긴 것은 다 적이요 다 멸망이요 소멸이요, 교리와  신조를 그것보다 낫게 여긴 것, 그것보다 낫게 여긴 것은 그것이 구원이 됩니다.

 그러면 교리와 신조보다 못하게 여긴 것, 교리와 신조보다 못하게 여기고  돈보다 교리자 신조를 낫게 여겼으면 돈은 그 사람의 것입니다. 권세보다 교리와  신조를 낫게 여겼으면 그 사람의 권세는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교리와  신조와 행정을 보다 낫게 여긴 그것은 전부 자기 점령이 되는 것이고 또 그걸  귀하게 여겨서 그것 때문에 교리와 신조를 버렸으면 그거는 다 도둑맞고 영원히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 이 간판 문제니 또 찬송가 문제니 이런 것 가지고 지금 말을  하고 있지마는 과거에 참 천주교가 그렇게 지금 돼서 부패되 진 것도 교리 신조  때문에 그렇게 됐고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 신조를 따라가지 안하고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지킬라고 하다가 뭐 수십만 명이 죽임을 받으면서 그래도 그 일을  성공하지 못하다가 그후에 루터 시대에 와 가지고 많은 그 공적이 쌓여 나오다가  비로소 천주교에서 올바른 교리와 신조대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이  개혁파입니다.

 개혁파인데 개혁파가 나온 개혁파 중에서 또 그때는 감리교, 뭐 성결교, 이  장로교 이렇게 나왔었는데 그것은 너무 천주교 된 그것이 불의의 교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기 때문에 교권은 다 교훈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해 가지고  그렇게 됐는고로 불의의 이 교권에 반대해서 이거 교회 행정은 다수가 되어 있는  이 장로 정치를 해야 된다 해 가지고 그리 됐고, 또 장로 정치도 안 되고  감독들을 내 가지고 해야 된다, 감독을 내 가지고 감독 정치 새 가지고 그렇게  하기로 해 가지고 이렇게 교회들이 자꾸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로 깨닫고 우리 가정에서나 또 자기 어데 개인의  사회생활에서나 어데서나 우리는 교리 신조, 우리 교리 신조, 우리 행정 요대로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들이오. 그저 교리와 신조와 상관없이 사는 것은 그것은  제 잘못해 가지고 박해당하는 것이지 상관없습니다.

 교리와 신조 때문에, 이 교리와 신조 때문에, 교리 신조대로의 행정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 당하는 그것이 십자가의 어려움이요, 또 이대로 살라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요, 우리의 수고요, 우리의 승리의 공로가 되는 것이고  가치가 되는 것이지 교리와 신조와 이 행정에 관련없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

그것은 불신자의 생활과 꼭 같은 것이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평소 때에 항상 가정에서도 그저 아무나따나 사람하고 다툼이  있다고 우리는 다투는 것이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자, 여기에서는  요렇게 하면 우리가 깨달은 깨달음과 같나?' 그라면 깨달음과 맞나 안맞나  하면은 교리에 맞춰보는 것이고, '또 요렇게 하면 우리가 믿는 신앙대로, 우리가  믿는, 믿는 조건, 신조대로 하는 것이냐?' 맞나 안맞나 그래 맞추는 것이고,  '요러면 요것이 우리가 행정하는 그 단일 행정, 통일 행정, 종다수의 가결이  아니고 진리대로의 행정하는 진리대로 행정하는 이 단일 행정이냐, 통일  행정이냐?' 거기에 맞추어 가지고 우리는 작은 생활에서부터 자꾸 그렇게 해  나가서 우리가 밝혀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밝혀 가지고 나가 가지고 이 생활이 나중에 크다가 보면은 가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겠고, 교계에서 일어나겠고. 이 모든 온  세계에서 일어나서 마지막에 우리는 교리 신조 이 행정 때문에 우리는 총독과  임금과 모든 감사들 앞에 우리가 끌려간다 하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그거 처음에는 그 사람이 행정적으로 일어났던, 행정적으로  일어났던 행정 박해지마는 마지막에는 끝에 가 가지고서는 개인 싸움으로써  다리오왕하고 다니엘하고 단둘이 싸움인데 그 싸움 무슨 싸움이냐? 그 싸움은  무슨 싸움이냐? 그 싸움은 교리와 신조 행정 그 싸움입니다.

 다니엘이 깨닫고 있는 그 깨달음대로, 다니엘이 믿는 그대로, 다니엘이 모든  다스리는 그대로 다니엘은 할라 하고 다리오왕은 달리 할라 하고 그 시비로  그때에 사자 구덩이에 묶여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교리  신조 행정의 싸움으로서 그와 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작으나 크나 다 요것을 요렇게 구별해 가지고 살면, 잘  구별하지만 잘못하면은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면 헛된, 공연히 마귀에 꼬여  가지고 마귀 노릇 하면서 의로운 척 하는 그런 잘못이 되기 쉽습니다.

 이래서, 이래서 이 싸움에 유일한 갑주는 뭐이냐? 갑옷을 입으면 원수는 나를  해하지 못하고 나는 원수를 해할 수 있는 것인데 전신갑주를 입어라.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뭐입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딴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그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여러  마디로 하려고 하면은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간편하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입고 벗지 안하려고  하는 거기에서 내가 나를 벗길라고 하는 그것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내가 벗지  안하고 입는 거기에서 지극히 큰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내가 입고  벗지만 안하면은 어떤 피조물이라도 해 하지를 못합니다. 다니엘이 이긴 것도 곧  그거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이긴 것도 그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밤에는 이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우리 신앙생활과 무슨 딴 걸로  이래 알고 있고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작은 데서부터 전 모든 경쟁과  모든 완력과 모든 대립과 투쟁이라 하는 것이 교리 신조 때문에 있는 것이요 이  행정 때문에 있는 것인데 이 교리 신조 행정이라 하면 남의 일같이 보고 자기  생활에 직접 적응시키지 안하는 여기에서 실수를 많이 하기 때문에 오늘밤에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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