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8 13:12
심의기관-노소원
1989. 2. 7. 새벽
본문: 야고보서 3장 1절∼12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여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같이 하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옆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광고합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반드시 공과를 외우고 또 실행 실천해서 경험의 깨달음과 체험의 깨달음을 가지고 그 공과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지 마시고 잘 착실히 계속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없이는 앞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 반사 선생님들이나 부장 선생님들이나 권찰님들은 주님에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식구를 마음 속에 품어 놓고 기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게 야고보서 3장을 보면 말을, 우리가 말하는 그 말을 비유하시기를 말하면 또 말이 사람 말이나, 뭐 입으로 하는 말이나, 타고 다니는 말, 또 곡식 되는 말 꼭 같소. 이러기 때문에 이건지 저건지 좀 구별 하기가 어려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한 원어 고전어는 그는 옛날 미개어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계시할라고 준비하셨지마는 미개어라서 그 한 마디 말에 범위가 심히 넓어서, 그 원어를 나는 공부 안했지마는 전이치가 그렇기 때문에 원어 사전은 심히 종류가 많을 것입니다. 또 같은 단어를 이렇게 저렇게,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건가 저건가 해서 그 바른 뜻을 깨닫기가 어려워 그 번역한 것도 그와 같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원어 학자들이 많지마는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이 복음이기 때문에 이 복음으로 세계에 있는 인류에게 전파하려 하는 하나님이시니까 각국으로, 각국 말로 번역할 때에 그래도 그 원어에 능통한 사람들을 만드시고 또 붙들고 쓰셔서 번역하지 안했나? 이래서 우리 한국말로 번역한 이 번역은 한국에 있는 언어 학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능숙한 사람이고 실수가 적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이 성경이면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또 따라갈 수 있고 혹 거게는 원본 성경과 같이 절대 정확 무오하지는 뭇하지마는 그것은 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그 전체에서 그 뜻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뭐 조금도 착오 없이, 원어 몰라서 성경 진리 모르겠다 그런 염려 없이 우리가 능히 알아 나갈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인용한 비유에 말망아지를 이것을 어거하기 위해서 굴레와 재갈이 있다. 입에 재갈먹이는 거. 재갈이 있다. 그러면 굴레 끼우고 입에 재갈먹여 가지고 그 말을 어거합니다. 아무리 큰 말이라도 힘 작은 사람이 그것을 끌고 마음대로 이렇게 제어할 수가 있어서 말 고삐 가는 데로 말은 끌려가기 마련이다.
말은 작은 우리 몸의 지체이지마는 말 재갈과 배의 키 처럼 온 몸을 좌우한다.
자기의 전생애를 좌우한다.
그런데 이 혀는 어떤 일 하는고 하니 조그만한 것이지마는 '세계 같은 악이다' 비유컨대 조그만한 불씨가 사람이 안 끄면 얼마든지 많은 나무를 태우는 거와 마찬가지로 조그만한 사람의 제 혀 하나가 모든 윤회하는 만물을 불사른다.
불사르는 거는 사람을 불살라 멸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이 관리하니까 사람이 멸해지면 다 멸해진다. '세계 같은 악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을 조심할 것은 말할 때에는 저 혼자 구덩거리는 그거는 말이 아니오. 저 혼자 구성거리는 거는 그거는 말이 안 되고, 말이라 하는 거는 꼭 사람을 상대해 가지고 서로 대화하는 것이 말입니다. 대화하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상대하는 상대방의 사람만 보고 그 사람에게 이해를 시킬라고, 그 사람을 설득을 시킬라고, 그 사람을 내 사람을 만들라고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여' 어떻게 금하라 말인가? 악을 버리라. 악한 말을 버리라. 자기 중심의 말을 버리라. 이것을 거게는 일호로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할 때에는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를 세우고 자기에게 무엇을 다 설복시키고 정복시켜서 그렇게 점령하려는 그런 것이 제일 쉽기 때문에 말할 때에는 자기 중심부터 버리라. 그것 버리지 안하면 일생 동안 말하는 것은 자기를 망칠 뿐만 아니라 모든 이 세계를 다 망칠 수도 있고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을 다 망칩니다. 조금 가까우면 그만치 망치고 많이 가까우면 더 망치고 그 사람에게 해를 보지 안할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제일 먼 사람이 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을 할 때에는 제일 자기 중심이라는 이것을 버리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또 둘째로는 그 사람만 상대해서 말하는 그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 상대하면은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도 아니요 진리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납득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상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할 때는 첫째로 자기 중심이라는 이것을 버려야 되고, 둘째로는 사람만을 상대해서 어짜든지 그 사람을 이해시켜서 납득시킬라고, 또 자기가 설득을 시켜서 자기에게, 자기를 이해하고 굴복하도록 할려고 해서 그 사람 상대하지 말 것, 사람 상대해서만 말하지 말 것, 사람 상대하는 껍데기 속에 그 사실을 상대할 것, 자기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실상이냐 실상이 아니냐, 이 실상이 어떠냐? 실상과의 관계점을 생각할 것, 그 실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실상만 다가 아니니까 실상 속에, 실상 속에 우리에게 선포해 놓은 유일한 법칙이 있으니까 진리에 맞나 안 맞나? 진리를 상대해서 말을 할 것.
우리 진영에서 탈퇴하고 나간 사람에게 내가 잠깐 말을 했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이렇게 모든 의결을 다 의논해 가지고 행정 결의하는 이 결의를 내나 소원 노원 이래 내 가지고 개인의 의사를 이것을 다 충분히 종합해 가지고 우리가 하자 이라는데, 이것을 결의 기관으로, 의논을 해 가지고 결정을 지우는 결의 기관으로 하지를 안하고 심의 기관으로 하자. 인간 뜻을 찾을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자는 하나님의 뜻, 심의.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심의 기관으로 하자. 그래 가지고 그 마지막 결정지우는 것은 우리에게 선포해 주신 법칙이 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 말씀으로 그 결정을 지우자 이렇게 말해 놨으니 내나 종전과 같이 말씀은 백 목사에게 배우기 때문에 백 목사 독재로 하자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합디다, 그 사람에게 내가 전화로 대화를 했는데.
'그러면 우리들이 이렇게 의논해 가지고 다수로 따라서 결의를 한다고 하면 그 다수가 틀릴 수도 있지 않나? 맞으면 최종은 성경 말씀대로 결정지우자 했으면은 성경 말씀에 맞으면 우리가 그대로 결정을 지워서 따라갈 것이고, 성경 말씀대로가 아니면 어떻게 사람의 다수라고 따라서 갈 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이것은 심의 기관으로 하고 의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자 하는 건 이건 잘못됨이 없는데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느냐?' '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다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다 그 사람들의 의견이면 곧 하나님의 의견이요 그것이면 진리의 의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의견에 다수에 따라서 이와같이 가는 그거라야 되어지는데 내나 그렇지 안하고 또 성경 하니까 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해를 못 합니다' 그렇게 말을 했서 그 사람에게는 내가 잘못 가르친 것 그거나 탄식을 하고, 또 그 사람에게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렇게 명문된 것도 모르니 그 사람은 사람의 다수만 따라가기 때문에 그의 종착점은 무엇이 종착점이라 하는 것을 단정을 지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제가 이 야고보서에 대해서 그전에도 많이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껍데기는 단둘이 대했지마는 그것보다는 단둘이 대한 그 속에 사람만 보고 말하면 외식자입니다. 외식하는 말이오. 그 속에 사실을 내가 사실과 맞나 안 맞나? 내가 이 말 하는 것이 실상과 맞나 안 맞나 그것을 찾아서 그것을 종합해 가지고 자기가 발언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사실만으로 다가 아니라 그 속에는, 사실온 사실인데 성경 말씀에 어찌 되느냐? 기생 라합은 분명히 거짓말을 했는데도 하나님에서 의인으로 그를 구원하실 때에 그 거짓말 한 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했다 의인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따라서 내가 이러면 성경대로 내가 이 말을 하느냐? 있는 것 있다 한다고 다가 아니라, 없는 것 없다 한다고 다가 아니라 그보다도 그 안에 있는, 그러면 이 건에 대해서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성경 말씀을 따라서 찾아야 되겠고, 그다음에는 성경 말씀대로 됐으면 다 아닙니다. 다 아니오. 성경 말씀에 맞은 데도 성경에 보면은 하나님이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시편 1편에 보면은 마지막에 결론이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것을 그렇게 높은 가치로 평가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인정하나 안 하나? 그것만으로도 다 아닙니다. 인정은 해도 그거는 뭐 그거는 틀렸다고 하지는 못하지마는, 당신이 기뻐하셔서 축복하실 수도 있고 옳기는 옳지마는 당신이 칭찬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찬성 안 할 수도 있어.
이러기에 우리는 말을 할 때에 첫째는 자기 중심이라는 것을 이것을 조심해서 먼저 벗어나야 우리가 말하는 것이 자기를 망친 일이 안 되겠고, 자기 중심이라는 이것을 벗어나고, 그다음에는 이 실상에 맞나 안 맞나 사실대로를 지금 붙들고 사실을 접해서 또 계산하고, 또 사실은 사실이지마는 이것이 성경이 뭐라고 말했느냐? 성경이 이 말 하는 것을 이런 말 하라고 했느냐 안 하라 했느냐? 성경에 접해 가지고 자기가 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고, 말의 발언을 계획해야 될 것이고, 또 성경 말씀에 맞다 할지라도 이 말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나 안 하시나? 성경에 맞지만 성경대로 해도 주님이 섭섭한 것 있습니다.
우리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사람인데 우리도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맞아도 섭섭한 것 있습니다.
왜? 말이라 하는 것은 그 범위를 보는 범위가 넓은데 하나님께서 인정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도 있고, 인정하지마는, 하나님이 뭐 정죄는 못 하지마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있고, 또 하나님이 그저 이래 기뻐한다고 해도 그것도 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말에 동행하시고 당신이 인계를 받아 가지고 축복하시나 안 하시나 여게까지를 생각하면서, 설교도 해야 되고, 또 우리는 서로 인인 관계의 이 말이라 하는 것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사람이라는 것이 무지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을지라도 실수 있는 그 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얼른 인계받아 가지고 당신이 축복하실 수 있는 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사람을 상대해서 그 사람만 설득 시키면 되고 이해시키면 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소속해서 점령만 하면 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무서운 영원한 법전이 있으니까 곧 우리에게 나타난 신구약 성경 말씀은 법전이시요 곧 이 말씀이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지 안하고 주님 만난 그 주님은 가짜 주님이오.
우리는 퍼뜩 말하면 '주님'하면 다인 줄 알지마는 아니오. 주님보다도 말씀을 먼저 말해야 됩니다. 나를 구속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신 주님.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 그거 다, 보호 그런 건 다 성경이오. '그 성경을, 이 성경을 나에게 나타내서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 그래 부르는 것이 그것이 정식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사랑하는 주님.
그러기에 우리가 이것을 깊이 생각지 안하는 사람들은 뭐 거침없기 때문에 말을 좔좔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말하는 것이 실상도 생각지 안하지, 성경 법칙에 맞나 안 맞나 그것도 생각도 안하지, 하나님이 노여워하는지 기뻐하는지 그것도 생각지 안 하지, 하나님이 축복하는 건지 하나님이 대적하는 건지 그것도 생각지 안하지, 마구 상대방의 사람, 그 사람만 지금 거짓말 하든지 참말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설득시켜서 자기 말을 이해하도록만 납득하도록만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말을 얼마든지 데데데데 잘하지마는 그말을 우리가 들을 때에 저것은 저 말의 깊이가 어데다. 상대방을 그저 이해시킬라 고만 하는 것이지, 대중만 보고 하는 말이지 자기 하는 말이 그 실상이, 그 사실 말이오.
사실이라 말은 인제 과거 사실 현재 사실이 아니고 미래의 실상을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과거 사실 말하는 것, 과거 실상을 말하는 것 아니요 현재 실상을 말하는 것 아니요 미래에 자기 말하는 것이 실상에 맞나 안 맞나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미래 실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요, 지금. 그 실상과 연결시키지도 안하고, 또 암만 실상과 자기는 연결시켰다 할 때도 그래도 그거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러면 주님이 인정하시나 안 하시나' 주님의 인정도 보면서, 또 주님의 기뻐하심도 보면서, 주님의 축복하심도 보면서, 그래 자기가 말해도 이 말은 실수를 했을지라도 자기 중심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중심과 네 뜻을 안다' 사람의 중심과 그 마음과 뜻을 살피는 자시요 이대로 갚아 주신다 이걸 행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뜻이 어데 있는지? 그 뜻이 제게 있는지, 제가 어떤 악을 달성시키려는 거게 있는 것인지 그게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거게 있는 것인지 어데 있는 것인지? 이것을 우리가 살펴서 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의 미래가, 그 말 듣는 사람의 미래가 비참하개 돼서 윤회하는 만물을 불사르느니라 윤회하는 만물을 불사른다는 것은 모두 다 자주 이렇게 점점 윤회적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이 자꾸 진행돼 나가는 그 전체를 불사른다 말입니다. 그 인류 전체를 죽인 것이 말이 죽였고 인류 전체를 살린 것이 말이 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보다 말이 먼저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설교를 해도 그 설교하는 데에 자기 양심으로는 내가 이 설교는 틀렸든지 옳았든지, 인간이 틀릴 수는 있다. 어쨌든지 내가 주님을 중심해서 했고, 주님이 틀렸어도 당신이 이해하시고 인정하실 것이다. 또 틀려도 당신은 이 말에 대해서 기뻐 당신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것 당신이 보충 보강하셔 가지고 하실 것이다. 내가 하는 말에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요것쯤은 보고서 우리가 말을 해야 되지 이것을 생각지 안하고 마구 있는 대로 빚어 재껴서 이래 놓으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비참해 갑니다.
사람 그까짓 거 뭐 천명 만명 설득시키는 것이 그게 문제가 아니오. 그분이 인정하고 감동 받아야 되지 인간 설득, 그러기 때문에 '코에 호흡이 있는 자를 수로 헤아리지 말라' 했습니다. '내가 몇 사람을 점령했다. 어떤 목사 이제 점령했다. 내 사람이 됐다.' 그 어두운 사람이오. 그게 무슨 큰 힘입니까? 주권자가 그분이신데.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