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8 13:09
심신이 살아나는 법
1987. 12. 24. 새벽(목)
본문:요한복음 14장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봐도 그 말씀을 뜻을 깨닫고 안다는 그것만 가지고 안 됩니다. 자기가 성경을 다 알다시피 알고 또 뜻도 다 깨닫는다 할지라도 이 말씀과 자기와의 연결이 될 때에 구원이 되지 연결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인해서 우리가 예수님 믿는 도리를 압니다. 이 성경을 보고서 예수님 믿는 이치를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알아서 예수님의 이 대속하신 것을, 예수님의 대속하신 것을 내가 성경을 보고 깨달아 알고 생각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이 도리인 진리도 내 속에 들어옵니다.
또 내가 그렇게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할 때에 또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도 내 속에 들어옵니다.
또 진리를 생각하게 하고 이 대속을 생각하게 하는 그 역사가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내 마음 안에 들어와서 계시게 됩니다.
우리 영은 하나님이 처음 지으실 때부터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도록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과만 연결을 가지도록 이렇게 지은 존재기 때문에 배암에게 유혹받아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 죄를 지었을 때에 영은 그만 당장 죽어버렸습니다. 영은 그뭐 시간 걸리는 게 아니고 그만 하나님을 어겼을 때에 어긴 그 하나로써 그만 당장 죽어버렸습니다.
많은 죄를 범해서 그 영이 죽었거나 죽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것 다 계약인데, 계약으로 관계되는 것인데 계약을 한 번만 어기면 즉시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기 전에 벌써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 이럴 때에 다스리지 않는 거게서부터 벌써 하나님과 그 사이가 끊어졌습니다. 이러고 나니까 그다음에 배암이 와 가지고 배암이 선악과 먹으라 하니까 뭐 선악과 먹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부터 하나님만 알고 사모하고 생각하고 또 쓰여지기도 하나님에게만 쓰여지지 여게 저게 쓰여지지를 않는 그런 존재로 우리 영은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죽기도 담박 죽어버렸고 또 살아난 것도 단번에 살아났습니다.
죽기는 그렇게 쉬웠지마는 살아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느냐? 살아나는 것은 자기의 영육이, 영과 육이 지은 모든 그 삐뚤어진 데서 다 해방을 받아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영육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을, 세 가지 죽으심을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된 그 형을 받아서 죽으셨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진 의무와 책임을 다 이것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불화된 이것을, 배반한 이 불화된 불목의 죄를 이것을 완전히 화목하기 위해서 죽어서 세 가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영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 모든 조건들을 갖췄습니다. 그래도 화목은 못 했습니다.
조건을 갖췄어.
갖췄다가, 다시 우리 대신해서 인성을 가지고서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셨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되는 그 모든 근거인 그 모든 기본 공작은 죽으심으로 됐고 실지로 그 공로를 힘입어서 살아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살아나게 됐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영은 근본 지으실 때부터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한번 죽으면 못 살아나고 한번 죽어서 못 살아나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은 할 수 없어 다른 이가 대신해야 되기 때문에 대신하는 자는 사람이니까 사람이라야 대신할 수가 있고, 사람이라야 대신하는 데는 한 사람밖에는 대신 못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하는 데에는 신성이 같이 해서 인성뿐 아니라 신성 인성 양성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양성일위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오셔 가지고서 사활로 우리의 영을 완전히 살렸습니다. 살리고 난 다음에 우리 영은 본래 짓기를 하나님이 그래 지으셨기 때문에 한번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으로만 사는 그 영이 돼서 다시 그 영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하나된 이 생애가 계속됩니다. 계속되는데 얼마나 계속되느냐? 영원히 계속되고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이라 하는 것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육이라는 것은 피조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지은 것이 육입니다.
피조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영은 하나님만 상대하고 하나님만이 쓸 수 있지 타락한 영이라고 그 타락한 영을 악령이 사용하거나 무슨 죄가 사용하거나 사망이 사용하거나 그런 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해.
그러면 하나님이 사용치 안하면 그것은 아무짝도 쓰지 못할 것이고 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사모하지도 관계도 생각하지도 아무것도 못 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런데 하나님과 관계 끊어지니까 그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영물이 아니고 이것은 물질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물질입니다. 우리 마음을 물질이라고 이럴 때에 ‘어찌 마음이 물질일까?’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마음도 물질이요 우리의 이 모든 생각이나 또 욕심이나 뜻이나 감정이나 그런 것도 다 마음입니다. 마음인데 그게 전부 다 물질의 소행으로 됩니다.
영은 피조물 가운데에는 영은 사람만 영이 있지 사람 외에는 영이 없습니다.
짐승들은 영이 없습니다. 영이 없는 그 모든 지음을 받은 존재들도 감정도 있고, 그대로의 사랑도 가지고 있고, 욕심도 가지고 있고, 또 그것 뜻도 가지고 있고, 모든 비판할 수 있는 이성도 가지고 있고, 사람의 마음과 짐승의 마음이 차이가 있어 그렇지 종류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종류가 거의 다 짐승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숭이 큰 원숭이 그 이름을 뭐이라 하요? 침팬지? 앙골라인가 뭐 고릴라인가? 그런데 그것은 지금도 뭐 운전도 하고 또 점원노릇도 하고 그런 것 다 합니다.
그런데 그 이성 비판이라든지 또 평가라든지 무슨 기억력이라든지 또 계획성이라든지 경영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영이 없는 것이지마는 짐승도 그게 있는데 짐승은 성경에 말하기를 몸과 혼이 있다 이래.
혼이 내나 마음입니다.
이래서 성경에 “영과 혼과 몸이라”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한 데도 있고 또 영육으로 말한 데도 있고 이래서 우리 정통 신앙에서는 이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래서 이분설만 알고 삼분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이해가 좁아서 편벽된 그런 치우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삼분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분설을 모르는 사람도 그것 좀 미달되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육으로 된 것인데 영은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이 육이라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만이 그를 사용하고 관계를 맺도록 그렇게 지음을 받아 있지 아니하고 이 피조물을 관계 가지도록 그렇게 이 육이라는 것은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지음받기를 그래 지음받았으니까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하고도 서로 접할 수 있고 저것하고도 접할 수 있고 이렇게 그 모든 피조물들을 다 접할 수가 있습니다.
물건과도 접할 수 있고, 또 사람과도 접할 수 있고, 짐승과도 접할 수 있고, 마귀도 그것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귀와도 접할 수 있고 이렇는데, 그러면 그 타락할 때는 영이 타락했느냐? 영이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영은 마귀가 접하지 못하고 마귀가 영을 그렇게 흔들지도 못하고 또 영은 마귀에게 순종하거나 이용되거나 결합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영이 죽었느냐? 죽은 것은 영의 소유인 그 몸이, 마음하고 몸하고 되어 있는 육 그것이 악령을 접해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범죄했기 때문에 영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육이 범죄했는데 왜 영이 죽었느냐? 육이 범죄에 영이 죽은 그 이유는 영은 육의 주격이기 때문에 그 영은 범죄하지 안했지마는 제가 소유하고 책임지고 있는 그 육, 심신이 범죄했기 때문에 주격 책임에서 그 죄를, 죄가 영에게 전가돼 가지고 영에게 책임이 부담돼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모든 주격과 소유격이 있는데, 그 사람들 소가 남의 곡식 밭에 들어가 가지고 곡식을 먹었으면 곡식은 소가 먹었으니까 주인은 상관이 없지마는, 소는 상관 없고 주인에게 상관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소를 뚜드리고 그렇게 할 것이고 지혜 있는 사람은 소를 쳐내고 소가 먹은 배상을 소 주인에게 말하면 주인이 그걸 물어 줘야 됩니다. 먹는 것도 보지도 안했지마는 소가 보니까 그 밭 가에 붙들려 매여 가지고 있고 이 콩을 먹었다 하니까 콩은 소가 먹었지마는 주인이 배상을 해야 된다 말이오. 그러면 주격 책임의 배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의 주인되는 그 영은 범죄하지 안했지마는 그 소유가 되어 있는 심신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서 영이 정죄를 받아 가지고 단번에 죽었습니다.
그래 인제 또 다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대신 속하신 것이 있고 세 가지 죽으심으로 세 가지 대신한 것이 있어서 거게서 해방은 됐습니다. 세 가지 죽음은 우리의 범죄값으로 죽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공심판에 의무와 책임을 대신 행하시기 위해서 죽었고,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친하기 위해서 죽으신 세 가지 죽으심의 의무를 담당하심으로써 비로소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그런 해방을 받게 됐습니다.
영이 살아날 수 있는 해방을 받았고, 해방을 받은 영이 살아나기는 언제 살아났느냐 하면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 영들이 살아나게 됐습니다.
이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 이하에 보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인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중생, “우리를 거듭나게 하나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영과 같이 지음을 받지 안하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렇게 관계도 맺을 수 있고, 피동도 될 수 있고, 교제도 할 수 있고, 이렇게 또 이끌릴 수도 있고 이러기 때문에 영과 이 육이 다릅니다.
영은 근본부터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한번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를 떠나지 안하고 항상 하나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로 돼 가지고 있지마는 심신으로 된 육이라 하는 이것은 하루도 피와 성령과 진리를 자기가 모셨다가 또, 모셨다가 또 배반했다가 모셨다가 배반했다가 모셨다가 배반했다가 하기를 하루 백 번도 할 수가 있고, 백 번도 할 수가 있고 뭐 몇십 번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끊어져 가지고 있다가서 우리가 연결되는 것은 세 가지로만 연결이 되지 세 가지 아니면 연결이 못 됩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만 연결이 되지 이 셋이 아닌 딴걸로써는 연결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셋으로 연결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성령과 물과 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났다” “성령과 물로 살아났다”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다” “성령과 피와 진리로 살아났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은 그렇게 연결됐는데 우리의 육도 꼭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도 뭘로 살아나느냐 하면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의 마음도 살아나고 우리의 몸도 살아납니다.
살아나는데 영이 살아난 것과 육이 살아난 것이 다른 거는 뭐이냐 하면은 영은 한 번 살아나면은 다시 두 번 살아날 필요가 없고 한 번 살아나면 영원히 계속하지마는 육이라는 것은 하루 몇십 번이라도 살아났다 죽었다 살아났다 죽었다 자꾸 이렇게 중복적의 것이다.
왜 그러냐? 그 이유는 영은 한 번 살아나고 난 다음에는 다시는 변동이 없는데 육은 하루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죽었다가 살았다가 할 수가 있다. 죽는 것은 왜 죽었느냐? 이 셋이 우리 마음에서 나가면 죽습니다. 이 셋이 우리 몸에서 나가면 죽습니다. 또 이 셋이 들어오면 삽니다.
이러니까 왜 영은 단번에, 그러면 변동이 없는데 육은 왜 이렇게 살아났다가 죽었다가서 변동이 있습니까? 그 변동이 있는 이유가 뭐이요? 여게 학생, 여기 경찰에 다니는 사람? 영은 왜 한 번 살아나면 다시 죽지 안하는데 육은 살아났다가 죽었다가 하루 백 번이라도 왜 중복을 할 수 있는가? 그게 뭐인지, 왜 그런지? 왜 그렇지? 내가 묻는 것은 요새 지금 이제 제대하고 다시 공부하러 간대요. 공부하러 가면 이제 떠날 터이니까, 떠나면 말이요, 떠나면 여게서 배우다가도 떠난 사람 다 솔갱이한테 채여갑니다. 여게서 배운 것을 진리를 제가 다는 못 해도 하나라도 뽈끈 거머쥐면 딴데 가서는 그렇게 가르치는 데가 없다 그말이오. 하나라도 뽈끈 거머쥐어 놓으면 변하지 안하는데 껍데기만 배우고 속에 알맹이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다 변동이 돼 버리고 그만 떠나버려.
그러면 우리가 여기 배운 진리가 우리 마음에서 떠나면 뭣이 떠난 것입니까? 하나님이 떠난 것이요, 피가 떠난 것이요, 진리가 떠난 것이요. 이러니까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라.
왜 다릅니까? 왜 영은 한 번 그렇게 살아나면 다시 죽지 안하는데 이 심심으로 된 육은 하루 여러 수십 번 수백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하는 그 이유가 어데 있습니까? 어째 그렇지요? 너 한번 대답해 봐. 요게 조그만해도 요게 바로 안다 말이오. 저기는 아주 또 거게 필기하느라고 뭐 필기하는 데 정신을 잊어버렸어.
필기만 자꾸 이래 하고, 그래 그것 될 수 있는 대로 필기는 좋지만 들을 때 깨달아야 돼요. 들을 때 깨달아야 되니까 필기보다도 그것 깨닫고 난 다음에 필기는 집에 돌아가서든지 시간 있을 때에 가만히 명상해 자꾸 생각하면 그것을 기억할 수가 있어. 그래 하는 길도 하나 있고, 하나는 필기만 이래 해 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돌아가서 필기를 보고 자꾸 이래 생각해서 깨달아집니다. 필기를 보고 깨달아야지고 또 깨달은 것을 필기하고, 필기를 뒤에 하는 것과 또 깨달음을 뒤에 하는 것 앞에 하는 것 그것 다 되기는 되지마는 요걸 자기가 깨달으려고 애를 써 깨닫고 난 다음에 필기하는 것이 더 나아요.
왜? 필기는 해 놨지만 나중에 가서 그 필기만 보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거든.
모르면 맛이 없다 말이오. 모르면 맛이 없으니까 그만 실패작이라. 그거 깨닫고 난 다음에 자기가, 깨닫고 난 다음에 집에 가서 다시 그걸 생각해서, 필기하지 안하는 사람은 필기하는 게 좋습니다. 왜? 그 사람은 그만 잊어버려 버려.
잊어버리니까 다시 그것은 모르는 거라.
다시 모르는데 이제 그 사람은 혹 뒤에 알게 되면 자기에게 듣고 배울 때에 그 속에 요 진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들어가 있으니까 자기가 혼자 어떤 그런 경우가 되면 깨달아집니다. 깨달아지면 자기가 저 혼자 깨달은 것으로 이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래 내가 저 아레 거석했는데 그분이 지금 배운 것은 생각지 안하고 자기가 깨달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직까지 자기가 말한다고 해도 지금 배운 그 범위 속에 지금 다 가지도 못하고 그 안에 이래 있지만 자기는 자기가 깨달은 것같이 그래 가지고서 그렇게 교만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뉘게 배운 걸 알라” 그것 이래서 자기 그러면 교만이 없어지는데 교만해지면 나중에 물리침을 받는다 그거요.
이래서 모두 다 여기 녹음하는 그것도 괜찮은데 녹음하면 녹음은 저 혼자 녹음하고 나는 들어서 깨닫기를 단단히 깨닫고 이러면 뒤에 녹음한 그것을 다시 테이프를 듣게 되면 자기가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게 괜찮은 방편입니다.
그래서, 영은 단번에 살아나면 죽지 않는데 육은 살아났다가 죽었다가 수십 번을 하니 왜 그런가 하는 그 원인은 이제 지음을 받을 때부터 그렇게 지음을 받아서 그렇다 그거요.
그러면 그런 것은 성경에 그렇게 명문되어 있느냐? 성경에 한 구절에 되어 있는 그런 게 아니고 전 성경을 비로소 봄으로써 거게서 깨달아지기 때문에 그런 건 평생 성경을 수백 독을 읽는다 해도 모를 사람은 모른다 그말이오. 자기가 거게서 그것은 실행하는 데에서 알아져.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한 데에서 그런 것이 하나씩 둘씩 차차 알아지게 된다 그거요. 이것 지음을 받을 때부터 그래요.
그러면 오늘 아침에 또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이 배운 것을 뭣을 배웠느냐? 영과 육은 지음받을 때부터 다르다. 영은 하나님만 알게 돼 가지고 있어. 영은 하나님만 상관하게 돼 있지, 피조물은 하나만 상관해요.
영은 위로는 하나님만 상관하게 돼 있고 또 아래로는 피조물 하나만 상관하게 돼 가지고 있어요. 하나만. 하나 뭣만 상관하는고, 하나? 피조물 하나 그러면 저 뭐 덕유산인가 금강산인가, 이 부산인가 대구인가, 그리 아니면 무슨 좋은 빌딩인가, 어떤 사람인가 뭐 하나만 상대하게 됩니까? 영은 뭐 하나만 상대하게 되지요? 영은 마음 하나만 상대하게 돼 있어. 자기 마음. 남의 마음은 상대 못 해요. 영은 자기 마음 하나만 상대하게 되고, 그러면 마음 그거는 자기 육을 통해서 모든 걸 상대하지 육을 통하지 안하면 상대하지 못하게 돼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또 자기 몸을 상대하게 돼요. 몸을 상대하게 되니까 몸은 또 몸 밖에 있는 사람들도 물질들도 모든 것을 상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말이요, 자기 마음이 어떤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싶어도 마음이 사랑을 못 해요. 마음이 사랑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뭐 사랑하는 눈으로 보든지, 그리 아니면 귀로 듣든지, 손으로 만지든지, 이렇게 접촉을 하든지, 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말을 한다든지, 사랑하는 행동한다든지 모든, 마음이 그 어떤 걸 사랑하는 것을 발표하는 데에는 그 몸을 통하지 안하면 발표를 못 해요. 몸을 통하지 안하고 발표할 수 있습니까? 발표 못 한다 그말이오.
또 영은 자기의 모든 활동과 그 작용을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또 할 수가 없어.
그러면 영은 하나님만 위로 상대하게 되고 아래로는 자기 마음만 상대하게 되고 또 이제 마음은 또 자기 고기덩어리만 상대하게 돼요. 딴 고기덩어리를 상대하지 못해요.
마음이 만일 어떤 사람에게 뭣을 부탁을 하고 싶어도 마음은 부탁을 못 해요.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암만 하고 싶어도 마음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 굉장한, 굉장한 간절한 마음이 있어도 몸이 안 들으면 안 돼.
그것 또 사람이 죽을 때는, 죽을 때는 그것, 이제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죽을 때에 이 마음이 자기의 영과의 연결이 돼 있지 않고 마음이 이놈이 주동이 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위로도 아무 가질 것이 없지, 옆으로 모든 피조물만 가져야 되겠는데 가깝게 자기 자손들이라든지 가족들이 있는데 가족에게 대해서 말을 하려고 그것 뭐 그때 다른 것 없기 때문에 마음 전체가 기울어져 가지고서 말을 하려고 애를 써서 이렇게 해도 말 못 해요. 옆에 뭐 건강한 몸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 몸 가지고 안 돼요.
자기 몸을 가지고라야 꼭 그 할 말을 하겠고, 부탁을 부탁하겠고, 정을 통하겠고, 또 여러가지로 주의 줄 것도 주의 주고 관계를 가질라 해도 마음은 직접 못 해.
마음은 직접 못 하기 때문에 할라 하는데 이 몸이 듣지 않는다 말이오. 몸이 듣지 안하니까 몸이 이래 듣지 안하니 입을 암만 입을 벌려도 혀가 안 돌아가고 안 돌아가니까 말을 못 해. 못 하다가 이제 조금 거석해지면 어짜다가 한 마디 두 마디 유언하고서 떠나는 게 그거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조성이라 하는 것이, 영, 혼,몸 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인데 영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하나님만 알게 되고, 위로는 하나님만 알아서 하나님만 상관하게 되고 또 아래로는 몇 가지 상대합니까? 아래로, 손가락으로? 몇 가지 상대해요? 아래는 몇 가지 상대해? 아래는 몇 가지? 손가락 들어 봐. 손가락 들어 가리켜 봐. 다 가리켜 봐요. 영은 아래로는 뭘 상대해요, 몇 가지? 손가락 들어. 모르는 사람 있는데. 요 하나. 요것은 성경을 제가 암만 봐도 성경만 껍데기로 봐 가지고는 몰라요. 자기가 경험의 지식을 가지고서 알게 되지.
이러기 때문에 이 영은 자기 마음에만 상관하게 됩니다. 자기 마음은 또 뭣만 상관합니까? 자기 마음은 뭘 상관하요? 자기 마음은 자기의 고기덩어리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해. 이러니까 선악과가 암만 먹고 싶지만 먹고 싶은 발표도 몸이 아니면 발표 못 하고 또 먹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서 먹었어.
그러니까 죄를 지음으로써 영이 단번에 죽었는데, 범죄한 데 제일 말단에 실지로 선악과를 딴 것은 뭣이 땄으며 먹은 것은 뭣이 먹었느냐? 마음이 먹었습니까? 마음이 선악과를 따 먹었소? 고기덩어리가 따 먹었어. 고기덩어리가 따 먹었는데 그 고기덩어리를 누가 시켰는가? 마음이 시켰다 그말이오. 마음이 시켰어.
그러면 마음이 고기덩어리를 따 먹도록 마음은 또 누가 시켰습니까? 마음은 누가 시켰소? 마음은 영이 시켰습니까 배암이 시켰습니까? 배암이 시켰어. 영은 안 시키고. 영은 그러면 하나님만이 거석하고 하나님만 전달하는 것이 영이기 때문에 영은 마음에게 전달하는데 마음 이놈은 지음받기를 처음부터 모든 피조물과 접촉하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에 배암하고 접촉해 가지고서 그래 됐다 말이오.
배암하고 접촉했는데 그러면 배암이 그랬는데 그 배암이 혼자 들어서 그랬습니까 배암 속에 뭐 있었습니까? 배암 속에 악령이 있었다 말이오. 악령이 그때는 배암을 이용했지마는 지금은 인간도 이용하고, 돈도 이용하고, 사랑하는 부모도 이용하고, 사랑하는 남편도 이용하고 많이 이용해.
어제 어떤 사람이 나한테 묻기를 ‘이 가족이 지금 이래 가지고 있는데 어째야 됩니까?’ 그것 지금, 내가 그걸 시켰어. ‘뭐 지금 자꾸 딴 교회로 가자 하고 이러는데 이것 어째야 됩니까?’ 이러기 때문에 그것 내가 ‘그리 가고 싶거든 그러면 그리 가라.’ 또 가기는 싫다고. ‘그러면 가기는 싫으면 또 하나 해야지.
가기 싫으면 자꾸 싸우고만 있을 건가? 싸우기만 하고 있으면 안 되니까 가기 싫으면 거게서 기도해야지.’ 기도는 무슨 기도할 건가? 기도는 그 세 가지를 기도하라 했어. 악령, 악령 그놈을 요 가족에게서 꼭 떼도록 해 주옵소서. 악령 그놈을 이 가족에서 쫓아 보내서 떨어져서 다시 만나지 못하도록, 악령 그놈 만나는통에 탈이 나는 거라.
악령 그놈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악성, 악성 그놈을 어째야 됩니까? 악령은 쫓아내야 돼요 악령을 죽여야 돼요? 악령은 쫓아내야 돼. 악성 그놈은 어째야 돼요? 죽여야 돼.
악성 그것은 곧 사람이 아니라. 악성 그놈은 사람하고 악령하고 둘이 합작해 가지고서 한 것이 그것이 악성인데 악성이라 하는 그것은 원죄입니다, 원죄. 그 악성은 뭐이 악성인고 하니 자기 중심, 자기 중심 자기 위주,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악성이라 말이오. 악성 그놈을 사람에게서 뽑아버리면 사람들이 다 깨끗해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데 그 사람을 망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이 악성이라, 악성.
악성 그게 자기입니까 자기 아닙니까? 악성이 자기입니까 자기 아닙니까? 자기를 죽이는 자기라. 자기 아니라. 그놈만 떼 버리면,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무서운 병이 걸렸는데 병 그놈 똑 잡아 떼 버리면 얼마나 건강하고 좋습니까? 또 악성 그게 원죄라. 원죄란 것은 자기 중심의 주장, 자기 중심의 자기, 자기 중심의 자기 그게, 자기 중심의 자기 그놈을 죽여버리면 자기가 죽습니까 삽니까? 자기 아닌 그놈은 홀딱 벗겨져서 죽어버리고 자기는 산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마귀는 하나님이 마귀를 떼내 보내달라고 자꾸 그래 기도해라. 또 그 속에 악성 악습을 죽이도록 하나님이 죽여 달라고 기도해라.’ 그래 이 셋이 만일 쫓겨 나가고 죽어버리고 하면 어찌 돼요? 그리고 나면 어찌 됩니까?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이 무슨 사람되는고 하니 예수님의 피의 사람, 영감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참 나는 예수님의 피의 것된 나, 영감의 것된 나, 진리의 것된 나,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서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 나 이것이 참 자기입니다. 이 자기와, 이 자기가 생각하면 모든 걸 옳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하기도 옳고 바르게 행하고 이 사람은 사는 것은 전부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우리의 심신은 수백 번 수십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하는 것이 이 심신이라. 그러면 심신의, 우리의 그 마음이 살아나면 몸이 살아나는 것인데 마음에 몇 가지가 들어오면 살아납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 들어오면 살아납니까? 세 가지 들어오면 살아나.
세 가지 들어오면 살아나는데 세 가지 들어오는 것이 무슨 ‘후’ 바람같이 이래 가지고 옵니까, 물 모양으로 그래 물렁물렁하게 그래 가지고 옵니까, 우리에게 땐땐하게 콩알 모양으로 그래 가지고 옵니까, 어째 옵니까? 그런 형체가 있게 옵니까? 형체가 있게 옵니까, 형체가 싸래기 동가리만치라도 형체가 있게 옵니까 형체가 없게 옵니까? 형체가 없게 온다 말이오. 무형의 존재라. 피공로도 무형이고, 영감도 무형이고, 진리도 무형이라.
무형의 이 세 가지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가 살아나는 건데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 어째 들어옵니까? 첫째는 지식으로 들어와요. 아는 걸로 들어와요.
알면 들어왔어요. 또 그다음에는 인정을 해요. 믿어요. 예수님의 열여섯 가지 대속을 내가 알면 지식으로 들어왔고, 또 인정하면 벌써 영감으로 들어왔고, 또 내가 그대로 실행을 하게 되면 그것은 능력으로 들어와 버렸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속에, 저 아레 여게서 그날 ○○목사님, ○박사 말이오. 신학박사 ○○○목사님이 여게 왔기 때문에 내가 그걸 똑똑히 말을 그날 아침에 설교했습니다. 보혜사 성신. 보혜사 성신이 우리에게 오시면 모든 것 다 되는데 우리에게 이 생각을 가지고 지식을 가질 때에, 지식이 다 다른데 지식이 다른 지식만 알고 그 지식 안 가지다가 그 지식 가졌을 때에 우리에게 들어오고, 또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생각하고 느낄 때에 그때에 영감이 들어오고, 또 그대로 소원할 때에 벌써 능력이 들어온다 그거요.
그래서 우리가 자기 혼자 단독 생각인 줄 알고 그 생각을 버리면 안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에게 지식으로 들어온다 말이요,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이게 뭣입니까? 이것이 뭣이요? 이게 지식입니까 감동입니까 뭣입니까? 지식이라. 지식이라.
그래 지식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 느낄, 실지로 자기가 인정해서 느낀다 말이오.
느끼면 그게 뭐이요? 그게 감동입니다. 감동이라.
그래 자기가 그것을 믿고 자기는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주의 것이요 자기는 살아났다는 것을 자기가 인정할 때에 그때에 그것이 능력이라 말이오.
이러면, 피나 성령이나 진리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에 형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게 아니고 형체 없이 무형의 존재로 들어오는데, 들어오는데 어데 들어오느냐 하면 우리의 지성 속에 들어오고, 우리의 감정 속에 들어오고, 또 이성 속에 들어오고, 또 우리의 소욕 속에 들어와. 우리의 소욕. 우리가 욕심 내는 소욕. 우리의 소욕 속에 들어와.
그래 들어오면, 들어왔는데 잘못하면 자기 생각인 줄, 자기가 생각한 걸로 이렇게 자기가 생각하기 쉬워. 우리 속에는 그런 게 없어요. 없는데 그게 곧 예수님의 피공로의 실상이, 또 진리 실상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이렇게 이 성경 보고 아는 그것이 뭣입니까, 그게 뭣이요? 지식인데 지식에 들어온 것은 뭣이 들어왔어? 그 지식 그게 그 지식이 무슨 지식이요? 그 지식이 무슨 지식이요? 사람의 지식이요 무슨 지식이요? 하나님의 지식. 그것을 가리켜서 진리라 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영감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 마음 속에 들어왔는데 이것을 마귀란 놈은 ‘네가 쓸데 없는 생각한다 야’ 다른 걸 자꾸 주면서 ‘이 돈 이거나 좀 생각해라. 아무것이가 너한테 지금 약속한 그거나 생각해라. 어떤 사람을 생각해라. 어떤 놀음을 생각해라.’ 자꾸 이것 해라 바꾸도록 한다 말이오.
바꿀 때에 안 바꾸고 이것을 물리치고 그대로 가지면 그게 뭣이냐?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이 들어왔는데 그 들어온 것을 통틀어서 말하면 한 말로 말하면 뭣입니까? 보혜사라 그말이오. 보혜사 성령이 오셨어.
보기는 시뻐 보이고 이렇지마는, 쫓아내려면 쫓아내고 이렇지만 내가 영접해 가지고서 그분을 힘입어서 살면 전능을 힘입어 살고 전능이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 보이는 것만 자꾸 위주하는 여게서 보이지 않는 이 신령한 면을 자꾸 이거 눈이 떠서 생각해야지 그걸 전연히 모르는 사람 있어요. 평생 예수 믿어야 그 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사람 있어. 그거는 다 외식이고 이렇지 실은 신앙 생활을 못 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율법을 지켰지마는 율법주의자들이지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어.
자꾸 새벽으로 나와요. 이것 또 새벽에 많이 줄었는데 여러분들이 죽자껏 애를 써 가지고 주일을 암만 지켜 봤자 그것 가지고 안 돼요. 나와서 진리를 배워야 되니까 이것 다 살려 가지고 죽이는 것 모양으로 그것 기도도 하고 또 자꾸 전화도 하고 이래 가지고 이 새벽으로 나와야 되는데, 그만 ‘누웠으니까 가기 싫다’ 또 ‘뭣이 남편이 붙들고 자자, 그만 자자 하니까 가기 싫다’ 요래 가지고 하고 난 다음에 뒤에 후회가 되는 것은 전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후회되는 것은 전부 마귀가 주는 것이요, 후회되는 것. 하고 난 다음에 후회되는 것. ‘오늘은 구경하러 가자.’ 구경하러 갔다 오니까 후회가 됩니다.
‘야, 이건 좀 테레비 재미 있다. 테레비 보자.’ 테레비 보고 나서도, 테레비를 보고 난 다음에 후회되는 건 언제 후회됩니까? 언제 후회돼. 그것 실험해 봤으면 알지? 후회가 언제 되지요? 언제 됩디까? 우리, 이름이 뭐더라? 보루꾸 장사.
후회가 언제 돼요? 이튿날 아침에 후회가 돼. 일어날 때 되면 ‘엊저녁에 테레비 그만 그놈만 안 봤으면 일찍 일어나는 건데 늦게 누워자서 그만 곤하다.’ 새벽에 후회가 돼.
그러면 당장 후회되는 것 있고 또 좀 있다가 후회되는 것 있고 그래요. 당장 후회되는 것 있고, 또 열 시간 지난 뒤에 후회되는 것 있고, 일 년 지난 후에 후회되는 것 있고, 늙어서 후회되는 것도 있고, 죽을 때 후회되는 것도 있고, 이제 후회가 당장되는 것은 손해가 적은 것이고 이제 좀 오래 있다가 후회되는 그거는 손해가 큰 것이라. 깊이 들었기 때문에 모른다 그말이오. 그 후회되면 마지막 제일 죽을 때 후회되는 그게 손해는 제일 큰 손해라.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후회되는 건 전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소용 없는 것이라.
그러면 누가 성경 보고, ‘오늘 새벽기도 갔더니마는’ 새벽기도 갔다 와 가지고 누가 자꾸 후회되는 사람 있습니까? 후회 안 돼. 후회 안 되는 일만 자꾸 가려 하고 후회되는 일은 자꾸 물리치라 그말이오.
새벽기도 안 나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전화로 자꾸 이렇게 연락해요. 전화로 연락 안 하려면 한 달에 천 원이면 돼. 천 원만 주면 돼. 나는 그거 며칠 전에 들었어. 천 원만 주면 이 전화국에 말이지요, 전화해 가지고 ‘우리 전화는 몇 번인데 새벽 몇 시에 그때 전화를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천 원이면 된대요, 한 달에. 천 원만 주면 그때 거게서 뭣을 뭐 코드라던가 뭘 꼽는대요.
꼽으면 이제 수화기를 들 때까지는 계속 짜랑짜랑거려. 계속 짜랑거려요. 그건 다 공통으로 하고 있대요, 그걸. 짜랑거리니까 자기가 일어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놔야 그만 중단되지. 이러니까 그래서 돈 천 원만 하면 그렇게 깨워 준다 해.
여러분들 권찰들이 깨울 게 아니라 그걸 좀 시켜요.
○○○권사님, 자꾸 전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말이지, 돌릴라 하면 힘드는데 자꾸 그걸 더러 시켜요. 나는 그것 며칠 전에 배웠어. 며칠 전에 우리 교인들이 그것 뭐, 그런 지혜는 있어. 그것 다 알고도 다 그걸 안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것 ‘나를 네시에 깨워 주십시오. 네시 반에 깨워 주십시오. 세시 반에 깨워 주십시오.’ 그러면 짜랑짜랑 그래 한대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재독 참석 수는 몇 명인지 기록이 안 됐네.
‘광고. 어제 떡국 잔치 한 후 정전으로 뒷정리를 다 못했습니다. 오늘 아홉시부터 정리하도록 많이 오셔서 봉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떡국 잔치 하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는데, 많이 했는데 점수는 몇점이냐 하면 칠십점.
작년에는 팔십오점. 올해는 칠십점. 명년에 어찌 될련지? 내가 떡국을 그래, 떡을 가져와서 뭐 끓여 먹으라는가 이래 가지고 끓이라고 가져왔기 때문에 끓이지 말고 그래, 끓인 것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못 쓰겠어.
이래서 끓인 솜씨가 잘못됐으니까 모르니까 가 가지고 가져왔어. 가져와 봐도 그렇소. 맛이 없어.
어제는 그래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어제도 축복을 하시니 뭐 딴것보다 낫겠지마는 축복을 해 놓으면 뭐 세상에 떡국 쳐놓고 그런 떡국은 없었다고 이래 돼야 되는데 어제 모두 하는 사람들이 성의가 모자랐어. 이것 뭐 하니까 조심 없이 아무나따나 그만 이래 해 버리니까 그만 그 꼬라지가 됐다 그말이오.
그전에는 떡국 하는 것도 내가 낱낱이 뭐 크게 썰어라 작게 썰어라 이렇게 시어머니 노릇 했는데 인제 그렇츰 수십 년 가르쳤으니 설마 되지 싶어서 했는데 그 밑에 가르치는 사람이 배운 사람들이 가르쳐야 될 터인데 가르치지 안하니까 그만 그 꼬라지라. 잘못됐어요, 아주.
떡도 잘못됐고, 떡을 하기를 잘못했어. 또 다신물도 잘못됐고, 다 잘못했어. 또 소고기는 끓이라 하니까 뭐 소고기는 넓덕넓덕하게 그랬는데 이거는 자랑만 하는 것이지, 소고기는 그래 하는 것은 동글동글하게 그래 해요. 그것 누가 소고기 내가 말한 것 끓이기를 그래 끓였다고 저게 양산동에 말하는 사람 있는데 거기 보니까 떡국 끓일라 하는데 소고기를 사다 놨데요. 다른 데는 기름이 들면 안 되지마는 떡국 먹을 때는 떡국에는 꼭 소기름이 들어가야 번들번들하게 미끄럽고 좋습니다.
그래 하라 하니까 자꾸 이 멸치 가지고 다시 내 가지고 자꾸 이래 하는데 그것은 맛이 없어요.
이래서 올해 그 떡을 잘못했어. 떡을 좀 돈을 더 주고라도 말이요, 여러번 쪄야 돼요. 여러번 쪄야 떡이 잘 되지 꺼끌꺼끌하게 그래 놓으니까 안 됐어. 나는 그 떡집에 가 보지는 안했는데 옛날 떡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 시골에서 떡을 하려면 이래 또 쪄 가지고 또 새로 한번 뚜드려 가지고 또 새로 한번 두번째 한번 쪄 가지고 세 번까지 찌면 아주 좋아요. 이런데 여게도 아마 그런 것, 한번 쪄 가지고 합니까 여러번 안 쪄요? 한번 쪄 가지고? 한번 찌는데 그러면 한번 쪄도 뭐 비비기를 매 비비겠지.
그래 가지고 좀 돈을 좀 더 줘야, 시간이 더 걸릴 터이니까, 그래서 떡도 하려면 일등으로 해야 되고 맛도 일등이라야 되고, 엔간히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아이구 세상에 떡국 쳐놓고 그런 떡국 없다.’ 그러면 떡국을 잘 끓였는데도 보면 그것만 하나 해도 ‘야, 너 교회서 떡국 끓인 그런 떡국 먹어봤나? 나 평생 그런 떡국 못 먹어봤다.’ 그 떡국 하나 좋은 데서 ‘그 교회서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좋다. 교회서 하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물도 뭐 교회 물이 참 뭐 아주 그뭐, 무슨 물이라 할까? ‘아주 그 물은 생수다.’ 물도 유명하고 떡도 유명하고 모두 다 그래 그것 하나 가지고 모든 걸 다 보는 건데, 그래 우리 예배당 지을 때 그 예배당을 지으면서 자꾸 ‘이렇게 지을 게 뭐 있느냐?’ 막 이래 크게 이래 그만 이것 그 지으니까 ‘아이구야,’ 저 거창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야,ㅡ내가 그때 조사라ㅡ백 조사님 저거 예배당 짓는 것 보니까 아직 예수님 재림 멀었다. 그뭐 아직 멀었기 때문에 예배당을 그래 지을 거다.’ 그 사람들은 나 그것 아는 줄 알아.
그러며 또 말하기를 ‘그 사람들은 예배당 짓는 것 봐라. 그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막 튼튼하게 해서 너무 지나칠 만치 하는 일을 어떻게 여물게 하는지’ 이래 놨다 말이오.
또 이제 의자도 이것 뭐 들고 올라 하니 힘이 들어. 우리 또 문짝 해 놓은 것을 ‘그 사람들 하는 거는 하는 건 여물게 한다. 무겁게 한다, 여물게 한다, 실하게 한다.’ 그걸 인제 인식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이걸 의자를 이것 여물게 만들었고 이것 무겁게 만들었다고 말이지.
의자 만들었는데 보니까 앉으니까 이것 ‘야 누가 주저앉을 거가 말 거가?’ 이러니까 헤끗헤끗 이러니까 ‘아이구, 그 의자 만든 것 봐라, 그 사람들. 그 사람이 그 꼬라지고 신앙도 그 꼬라지고 그럴 것이다.’ 이리 된다 그거요.
알겠어요? 그 사람의 옷 하나 입고 다니는 것 가지고서 사람을 속을 다 진단을 다 할 수가 있고 또 그 사람 뭐 오만 것 다 봐서 알 수가 있어. 있는데 이 떡국도 이미 하는바에 그걸 잘해야 돼, 좀. 잘해 가지고서, 인제 여기 건축할 때에 여기 국수 삶는데 국수 삶는 것은 아무데 가도 이 국수만치 맛있는 국수가 없다 합니다, 이 건축할 때에. 건축할 때 국수 얻어먹어 봤어요? 그 국수보다 더 맛있는 국수는 아무데 가도 못 먹는다 하는 거라. 그것 뭐 별것 아니지마는. 그렇게 좀 뭐이든지 좀 유명하게 좀 좋도록 그래 해야 돼요. 그래야 빛이 돼, 우리는.
뭐 하나라도 하려면 ‘그 사람 하는 것이면 틀림없다. 그 사람 말이면 틀림없다.
그 사람 주장이면 틀림없다.’ 이렇게 인정을 받아야 그 빛노릇을 하지 그리 안 하면 빛노릇을 못해. 그러니까 말 한 마디라도 허툰 말 안 하고 말했으면 꼭 실행을 할라 하고 자기가 또 실행하려고 작정을 했으면 그 일을 다른 사람보다도 어짜든지 백점짜리가 장 되도록 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라.
어제 수고는 많이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몇점 잡았지? 칠십점. 칠십점이면 많이 줬어. 칠십점이면 많이 줬어. 작년에는 팔십오점이 됐어. 자꾸 내려오는 것 같애.
그 전에는 한 구십점 된 것 같은데 자꾸 팔십오점으로 자꾸 내려오고 또 명년에는 이제 육십오점 되련지 또 모르겠어.
올해 새벽 찬양도 아무나 그래 하지 말아요. 이래 딱 해 가지고서, 이제 떡국 끓여 먹는 것도 이렇게 머리를 많이 써야 돼. 머리 안 쓰면, 머리가 일을 하지. 많이 써 가지고서 도르르르르 요래, 주일학생 한 사람도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는 학생이 없고 그 전부 다, 또 방황하는 학생 주을 요량 해, 또. ‘방황하는 학생을 요럴 때 주워야 되겠다’ 하고서 방황하는 학생을 주을 그런 준비까지 다 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꾸, 많은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그릇이 큰 그릇이기 때문에 그런 데로 다 몰려야 돼.
이 새벽기도 많이 안 나오는데 자꾸 좀 그리 천 원으로 주문하라 해, 천 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