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4:17
세 가지 권능
1986. 6. 14. 토새벽
본문:사도행전 1장 3절∼9절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모든 선지들을 통해서 미리 예언해 놓은 말씀을 당신으로 이루어진 것을 가리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의 일을 말씀하셨고, 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셔 가지고서 이 대속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고, 또 사십 일 동안 계시면서 저들에게 부활하신 것을 보이고, 또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강론하셨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8장부터 있고, 마가복음에는 16장 부터인가 있고, 누가복음에 24장부터인가 있고 그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제일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교훈하신 것이 요한복음에 제일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계실 때로부터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설정하시고 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 말씀하시고 성도들에게 대한 모든 소망과 그 권력과 제도와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말씀하신 이게 복음인데 그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대속입니다.
복음인데, 이 복음에 선포해 놓은 모든 계약적 이 구원은 어데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성령 세례에서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환난이 있는 것이냐 환난으로 인해서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느냐 하는 것을 약간 묻고 지나갔는데 그것도 여러분들이 잘 구별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영은 어리고 심신을 통솔할 그 권위가 약해 그렇지 온전함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신은 죄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대속함을 받을 것이 아니고 대속은 받았고 구속을 받아야 됩니다.
대속과 구속이 다릅니다. 대속은 예수님께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공로를 우리 대신 베푸셔서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 대속이요, 구속은 그 대속을 우리에게 적응시켜 주셔서 실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구속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하는 중생된 영의 단체가 탄식하는 것은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밑천이 되는, 예수님이 창세기 1장 때부터 신성으로 오셔 가지고서 역사하신 그 역사와 또 예정하시고 창조하신 그 모든 것과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 공로와 또 선포해 놓은 복음 이 전체가 합하여서 하나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는 셋인데 하나이라는 것이 곧 그 역사는 외부에 나타나기는 셋 종류지마는서도 실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설정해 놓은 이 모든 구원을 우리가 법적으로 받았고, 예정적으로 받았고, 계약적으로 받았고, 우리가 중생적으로 다 받기는 받았으나 실상이 이루어지는 데는 여게 기록된 대로 사도들과 모든 문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당했던 그 고난을 우리도 당해야 합니다. 그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어? 고난 없는 그거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가졌으면 그 관계 가진 그 비밀이 그 표시되는 그 표적은 환난입니다. 예루살렘 환난은 이 환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기와 관계없이 떼 버리면 이 환난은 즉시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자기 위해서 부활하신 이 부활을 상관없이 떼 버리면 환난은 즉시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버리지 안하고 자기 것으로 믿고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는 이것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에 환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환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환난입니다.
오늘도, 그때는 그랬는데 그때 역사적인 그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되고 깨닫는 것은 그때의 역사적으로서는 그 사실이 그랬지마는서도 그 사실이 오늘 내게는 어떻게 적응이 되어지느냐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이 곧 교리요, 깨닫는 대로 자기는 요렇게 믿는다는 고것이 신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심신과 소유가 있는데 이 심신과 소유를 어데다가 투자할 것인가? 내가 돈에다 투자를 할 것인가, 권세나 지위나 세상이나 무슨 사회나 가정이나 자기 몸을 위해서 투자할 것인가, 자기 목숨 위해서 투자할 것인가, 어데다가 투자할 것인가? 투자할 곳을 우리가 확정을 지워 놓고 살아야 그 소유도 남용이 안 되고 심신도 남용이 안 되지 어데다가 투자할 것을, 어떻게 써야 되느냐 하는 것을 모르면 그 사람이 가진 것은 다 불신자와같이 허비되고 낭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데다가 투자할 것인가? 우리는 이 복음을 바로 깨닫음, 복음을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알고 나는 이 복음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되느냐 하는 것을 깨달은 그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면, 이 깨달음은 자기의 소유와 심신을 다 이 깨달음에다가 다 투자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 소유와 심신을 어데다가 투자할 것이며 어데다가 이용할 것이며 어떻게 그 심신을 내가 사용해야 될 것인가 하는 그 처소를, 그 법칙을 그것을 우리가 바로 가지지 안하면 그 사람은 다 허비되고 낭비되겠습니다.
그 바로 가지는 그것은 우리는 신앙 생활에 다 바쳐야 되기 때문에 자기의 깨달음에 다 바쳐야 되는데, 그러면 깨달음은 자기의 소유도 몸도 생명도 다 투자할 그 길인데, 내 전부를 투자할 그 길이니까 그 길은 내게 있어서는 내 소유나 몸이나 생명보다도 귀중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게 대고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신조와 교리를 가지는 것은 자기 생명을 바칠 만치 생명보다 중량이 크게, 내 생명을 어데 대고 쓰겠느냐, 어데다가 투자해야 되겠느냐, 다시 말하면 내 생명을 어데다가 맡겨야 되겠느냐, 어데다가 보관을 해야 되겠느냐, 내 이 심신을, 내 소유를 어데다가 내가 투자해야 헛일이 안 되고 유익이 되겠느냐 하는 그 투자할 길을 확정하는 것이 자기가 교리와 신조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정한 고대로 자기의 소유나 심신은 다 거게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나가는 말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유와 심신을 이렇게 투자해도 되고 저렇게 투자해도 되고, 이렇게 써도 되고 저렇게 써도 되고 하는 그 사상과 꼭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공중에다가 활을 쏘면서 잉어가 혹 맞아서 떨어지리라 하는 그보다도 더 허무 맹랑한 생각이니 그 사람에게 무슨 영생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생각해서 깊이 생각해야 알 건데, 죽으시기 전에,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교훈하신 이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성령 세례 받지 안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거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 전부는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말씀도 하셨고 예수님이 실제로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성령 세례가 뭐인데? 성령 세례는 성령의 권능으로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옛사람은 죽이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이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거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성령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내가 실상으로 입고 내게 효력이 이루어져서 이 공로가 내 공로가 되는 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리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공로를 우리에게 주어서 이 공로가 내 공로가 되고 내 구원이 돼서 내가 하나님의 공심판에 마음대로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이런 공로인데 이 공로를 내것으로 확실히 알고 믿고 요 공로로 실상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성령은 뭐하러 왔느냐? 이 일 하러 왔습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줬다 했습니다. 진리는 뭐하러 왔느냐? 진리도 이 때문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것인데 내가 내것인 줄 모르고 이 공로를 또 내가, 얼마나 이 공로는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공로인데, 이 공로는 하나님의 노에 대해서 하나도 없는, 노를 완전히 풀어서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런 권세요, 하나님의 전지의 율법을 완전히 이행한 능력의 공로요, 마귀하고 합작되었던 것을 하나님하고 상호 내주해서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되고 하나님의 지체되고 하나님의 몸되고 이렇게 되어지는 이 권세요 능력인데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여서 실상을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 진리요 오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러기에, 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곧 이 공로로 인해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피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고 살면 심신은 어찌 됩니까? 심신은 어찌 됩니까? 우리의 심신은 어찌 됩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면 우리의 심신은 어찌 됩니까? 옛사람이 죽으면 심신은 죽습니까 심신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까? 예? 우리 심신은 어찌 됩니까? 죽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심신은 안 죽습니다. 요것을 알기 쉽도록 인간의 말로 표시하기 위해서 제가 증거하기를 탈색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악령 악성 악습이 우리 심신을 주관하고 있는 주관권을 다 죽여서 좇아내 버리고 죽여 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것이 내 심신을 주관하는 그 주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오. 마치 원단 베쪼가리는 그대로 있는 검정물을 들였던 것을 탈색을 해 버리니까 백색이 됐습니다. 원색이 돼 버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령 악성 악습이 내 심신을 주관하던 그 주관권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완전히 죽여 버리고, 대속의 공로 아니면 죽일 수가 없어. 대속의 공로로 죽여 버리고 예수님의 대속, 피와 성령과 진리로 내 심신을 주관하도록 하는 그것이 새사람이 된 것이요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그 일 하기 위해서 성령과 진리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래서, 성령 세례 받는 것은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성령의 도우심의 은혜로 죽이고 살리는 이 일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그것이 세례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자체의 성화가 세례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내 증인이 된다는 그것은 자체가 아니고 그의 언행 심사의 행위가 성령의 권위로 말미암은 권위 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증인은 행위가 증거하지 자체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못합니다. 그러나, 자체가 세례 받아서 자체가 죽고 살아난 그 자라야 성령의 권능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의 행위가 뭐인데?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지마는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하나님의 진노 세 가지를 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 이 세 가지를 갖추어 가진 이 의를, 하나님의 의인데 이것을 설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도성 인신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까지 하셨습니다.
그 시발은 영원 전 자존하신 하나님의 자존의 사랑과 자존의 의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하셨으니 그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하신 그때부터, 삼위 일체는 협동했고 거게 있는 그 중에 하나인 제 이위인 그리스도는, 제 이위인 예수님의 신성은ㅡ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ㅡ신성은 그때부터 우리에게 대해서 대속을 착수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사활까지를 완성을 하셨는데 이 대속하신 이 공로를 영은 입었고 우리의 심신이 이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아니하고 입은 자로 살려고 벗지 않고 살려고 할 때에 우리에게 어려움 오는 것은 벗지 아니함으로, 아니할려고 함으로 오는 어려움이요 입고 있을라고 함으로 오는 어려움입니다.
이 어려움이 예수님의 사활 때문에,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내가 벗어 버리면 아무 어려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내가 상관없다 해 버리면은, 그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에 있어도 ‘상관없다’ 할 때에 `상관없다' 할 때에 아무 박해 없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와 함께 다닌 자인 걸 내가 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저주할 때에 아무도 베드로를 손대지 안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예수님의 대속하신 사활의 공로로 인해서 너희에게 어려움이 올 때에 대속의 사활의 공로를 네가 벗어 버리면 그 모든 환난은 너와 상관없다. 그것이 환난을 피한 것이다. 그 예루살렘 환난을 피한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예수님의 대속의 사활의 공로로 인한 이 환난을 네가 피하지 말아라. 이 환난을 입고 있거라. 환난을 뭐할라고 입고 있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있으니까 환난을 입고 있게 되고 대속의 공로를 벗으면 환난을 벗게 되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이 공로를 네가 버리지 말아라. 환난을 피하는 것이 공로를 피하는 것이요, 공로를 입으면 환난이 자연히 오는 것이요 이 두 가지는 하나이지 각각이 아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이 환난을 피하지 말아라, 이 공로를 버리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보다 앞서 있습니다. 요 순서를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보다 앞서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성령 세례가 우리에게 오지 이게 아니면 우리에게는 성령 세례는 전 인류가 다 죽으면, 다 생명 바쳐서 힘을 써도 한 사람도 성령 세례는 못 받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때문에 받습니다. 공로의 권세로 받습니다.
이 공로를 벗은 증거가 뭐이냐? 환난 없는 증거입니다. 세상과 마찰 없는 증거라 그말이오. 이 공로를 입으면 세상과 필연적으로 마찰이 있습니다. 마찰 있을 때에 공로를 벗으면 마찰이 없어지고 공로를 벗지 안하면 이 마찰이 계속됩니다.
공로를 벗지 아니함으로 이 계속되는 마찰 속에서도 이 공로를 벗지 아니할 때에 그때에 성령은 그이에게 옵니다. 왜? 예수님의 공로를 버리지 안했기 때문에 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버리면 안 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버리지 안한 증거가 뭐인가? 환난이 오나 그 환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를 버리지 안한 표적입니다.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버리지 안해야 성령님이 옵니다.
성령님이 뭐할라고 오는가? 옛사람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리는 그 일을 해 주시기 위해서 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벗지 않는 그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이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그것을 소원하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깊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면 복잡하고 모를 것이기 때문에.
그저, 여러분들이 힘쓰면 저절로 알아. 행할라고 하는 자에게 알아지지마는 행할라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모릅니다.
여기에 설탕과 꿀이 있는데 아무리 열변가가, 웅변가가 이거는 꿀은 이렇다, 이런 설탕은 이렇다 암만 말해도 모릅니다. 먹어 보면 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먹어 보면 알아.
행해 보면 아는 것이 제일 간편한 일이요, 행하지 안하고 제가 서적을 수천 권 수만 권을 읽어도 모릅니다. 절대 모릅니다. 왜? 이것은 이 말씀인 이 진리가 인간보다 무한히 탁월한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지배나 인간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에게 합당해야 이 진리가 긍휼히 여겨 줍니다.
긍휼히 여겨 줘야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 진리를 도용할 수 있는 그런 약한 진리가 아니요 천한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가 모든 인간을 엿새 동안에 만들었습니다. 이 진리는 이런 권능 있는 진리입니다. 우주 만물을 엿새 동안에 만들었습니다. 사람도 그때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를 모시고 이 진리에게 복종하여서 이 진리에 은택을 구해야 되지, 이 진리에 은택을 구해야 이 진리가 은택을 베풀어 주시지 이 진리를 ‘네까짓 거야 뭐라 하든지 내가 잡아 이용하겠다’ 이 진리를 잡아 이용할라 하는 자에게 이용당하지를 않습니다. 이 진리에 복종하지 안하고 ‘내가 서적만 많이 찾아 가지고서 보면은 진리 그까짓 걸 내가 알 수가 있고 이용할 수 있지’ 진리가 깨닫게 해 주지 않는데 제가 깨달을 수 있다고 하면은 진리가 권리가 있습니까 깨달은 사람이 권리가 있습니까? 누가 상전이고 누가 종 되었습니까? 깨달은 자는 상전이고 깨달아지기 싫지마는 이용을 당해서 깨달아졌으면은 그거는 종입니다. 진리를 종으로 잡아 부린 것입니다. 진리는 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순종할 때에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말했습니다. 진리 아는 고것은 깨닫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처음에는 성경 보고 행하니까, 깨닫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는다 말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말한 게 아니고, 성경을 일반적으로 아는 게 아니고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자기 교리가, 자기 신조가 그것이 자기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성경은 이런데 나는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이 자기 깨달음입니다. 그대로 자기의 생활은 돼 나갑니다.
깨달음이 이중이면 그 사람 행위는 이중됩니다. 깨달음이 잘못됐으면 그 사람 행위는 잘못됩니다. 깨달음이 바르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바로 됩니다. 구원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성경 진리를 바로 깨닫는 것이요 바로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신데 이 두 분은 뭣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실상으로 입히는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온 영감은 뭐인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실상입니다. 실상이요 실체요.
실상이요 실체가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입을 수 있도록 편리하게 가깝게 온 것이 영감이요, 그보다 더 편리하게 가깝게 온 것이 진리요, 이 진리보다 가깝게 우리에게적응시켜 준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걸 누가 깨닫게 하는가? 영감과 진리 둘이 들어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나에게 갖다 줘 가지고 너는 이렇게 살아라, 요렇게 행해라 하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런고로, 다 이 기독교는 필연성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모험성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리이리 해 가지고 이렇게 되는 모험성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썼는데 제가 읽어보니까, 기독교는 모험적이라. 칼 물고 뛰엄 뛰는 것으로 뛰어 보니까 들어맞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마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기독교는 필연성이오. 하나에 하나 보태니까 둘되는 그것이 필연성입니다. 둘에다가 둘 보태니까 너이 되는 그게 필연성이오.
기독교는 필연성입니다. 기독교는 민주주의 아닙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기독교는 절대주의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자기가 버리지 아니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라고 애를 쓰면 쓰는 것만치 세상에 거슬립니다. 믿으면 믿는 것만치 자기에게 거슬립니다. 자기 것을 삼으면 삼은 것만치 세상에게 거슬립니다. 마찰이 됩니다.
물이 살수로 내려가는 데에 거게 토막나무를 이 끈에다가 달아 가지고서 역류로 끌어 올리면은 그 일어나는 게 뭐입니까? 뭣이 일어납니까? 물이 내려가는 데에 나무 쪼가리를 끄내끼에다가 달아 가지고서, 물 따라 내려가면은 아무 마찰이 없지마는서도 위로 끌어 올라가면은 뭐이 일어납니까? 뭣이 일어나요? 그거 안 해 봤소? 뭐이 일어날까? 모르지? 물이 이리 내려가는데에 이런 나무 뭉텅이를 이런 것 하나 끄내끼에다 달아 가지고서 물이 이리 내려가는데 위로 잡아 올리면 뭐 일어나요? 뭐 일어나요? 이것도 커 가지고서 공부나 해 가지고서 그만 공장에 가 가지고 한 사람들은 몰라. 여러분들, 특별 계시를 모르는 자는 이 자연 계시를 암만 봐야 자연의 모든 광문 다학 해서 대과학자가 됐어도 그는 특별 계시를 모르는 자는 자연 계시가 뭐인지 모릅니다. 자연 계시를 모르는 자는 암만 자기가 평상 성경 보고 야단지켜도 특별 계시를 모릅니다. 특별계시는 자연 계시가 가르치고 자연 계시는 특별 계시가 가르치고 이 두 계시가 우리에게 합해 와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바로 이루도록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 계시만이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물을 당기면은 뭉텅이가 크면 물결이 크게 일어나겠습니까 뭉텅이가 작아야 크게 일어나겠습니까? 빨라야 크게 일어나겠습니까 느려야 크게 일어나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 것을 삼을라고 하면 좀 일어나고, 삼으면 더 일어나고, 삼는데 가속도로 삼으면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야 성령님이 온다 그말입니다. 이게 순서요. 성령님이 오셔야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공로 외에는 아무도 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요게 대해서 깨달음을 생명 바칠 만침 깨닫지 못하면 요 생활을 보수할 자가 없습니다. 요 생활을 팔지 안할 자 없습니다.
요 어려움의 생활을 팔았으면은 무엇을 판 증거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판 증거입니다. 이 대속의 공로를 팔았으면 무엇을 받지 못하면 무엇이 오지 못합니까? 성령이 오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오지 못하면 무슨 역사가 안 이루어집니까? 사활의 역사가 안 이루어집니다. 죽이고 살리는 역사가 안 이루어집니다.
요것만 단단히 가지면, 요것만 단단히 가지면 필연적으로 그이의 소원은 돈에 있지 안하고 지위나 권세에 있지 안하고 명예에 있지 안하고 행락에 있지 안하고 어데에 가정에 있지 안하고 그의 소원은 성령의 권능 받아야 되겠다 하는 이 소원이 됩니다.
왜? 성령의 권능이 와야 저도 살고 가정도 살고 사업도 살고 성령의 권능 와야 다 살기 때문에, 권능이 생명이기 때문에 이게 와야 되는 것이지 짜다라 이거 없이 가정 사랑해 봤자 저 죽고 가정 죽고 다 죽지 필요가 없어. 이것이 없으면 자기 남편 사랑해 봤자 남편은 저 죽이고 저는 남편 죽이지 소용 없어. 이 권능이 와야 저도 살고 저거 남편도 살고 저거 자녀도 살고 가족도 살고 삽니다, 이 권능이 와야.
그러면, 성령의 권능이 오면 뭘 합니까? 성령의 권능이 오면 뭘 합니까?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 자체를 모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도성 인신 한 것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됐지마는서도 자기는 사람이 대가락 같은, 왕 같은 사람이 밑에 이제 천한 종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도성 인신 하심과 꼭 같은 그 모형적인 자기가 되어지고 모든 부요를 내어 놓은 가난의 모형적인 자가 되어지고, 낮아지는 자가 되어지고, 자유 없는 자가 되어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안하고 자기를 완전히 비었다 이랬습니다. 자기를 비었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해 버렸어. 자기의 주장이라는 거는 털끝만치도 없어.
아버지로 전부 삼았어.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주님으로 전부 삼습니다. 왜? 주님이 아니면 나는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살아 있는 자가 필요 있어. 주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으로 살아 있는 자, 이 공로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과 진리로 산 자 이 자만이 하나님에게 필요 있지 이 자가 아니면 필요가 없어.
이 자가 뭐인데? 어떤 자인데? 세례받은 자라, 세례받은 자. 세례받은 자 이 자만이 살 수 있어.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 사람 이 육체대로 생각할 게 아니라 새로 지음을 받은 자라. 새로 지음을 받은 자라 했습니다. 이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세례받은 자는 자기의 생활이 옛날 옛사람의 생활과 정 달라, 정반대 돼. 옛사람의 생활이 아니라.
옛사람의 생활은 뭣 상대했습니까? 한 말로 말하면 피조물 상대했습니다. 왕을 상대했든지 정권자를 상대했든지 저를 제가 유아 독존으로 저를 상대했든지 무슨 무엇을 상대했든지 부처를 상대했든지 피조물 상대하는 것은 다 미신입니다. 다 우상 종교요, 창조주를 상대하되 성경대로 상대하지 안한 것은 다 그것은 다 미신이요 다 잡종교요. 대가락같이, 먹줄같이 쪽 곧아서 거게는 요래 조래 꾸불텅이가 없습니다. 요래도 되고 조래도 되는 분근이 없습니다. 어누리가 없습니다.
이래서, 권능을 얻고 예수님 증거할 수 있는,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도성 인신한 것을 그것을 자신이 사람들에게 예수로 인해서 보여 주고 예수님이 아버지만 상대한 것을 자기는 예수님만 상대하는 것 이것 보여 주는 것이 설교 천번 만번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보니까, 저분은 참으로 저분이 왜 저렇게 됐는가? 도성 인신한 그와 같다. 저분은 예수님만 바라본다. 뭣 때문에? 대속의 공로로 제가 살아 있지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저는 없어. 대속의 공로의 것이 됐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로 되어 있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걸로 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개는 개로 살 수 있고 소는 소로 살 수밖에 더 있습니까? 대속의 공로의 것이 됐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보니까 참 하나님을 전능자로 상대하네. 그분이 자존자요 창조주요 대주재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주권자요 개별 섭리의 주권자요 전지 전능자라.
이분으로 내가 믿는 것이 어느날 하루만 와 달라 하는 그 칙칙한 빈약한 그것보다 요렇게 주님을 믿는 것을 보면은 교인이 따릅니다.
전능을 믿지 안하면서, 주재를 믿지 안하면서 입술로 말하니까 거짓말장이만 되니까 이제 ‘원 말로만 저라는 것이지 실상은 아니라’ 전능자를 믿고 전지자를 믿고 그분에게 작고 큰 것도 다 주권자인 것을 믿고 주재자인 것을 믿고 만왕의 왕인 것을 믿고 만주의 주인 것을 믿고 그분에게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개별까지 그분이 주권으로 섭리하는 것을 믿어서 행동하는 것, 말 증거보다는 뭐이 힘이 있어요? 말 증거보다는 뭐이 힘이 있어요? 저 ○○ 교회 조사님, 행동보다 힘 있는 증거는 뭐이라요? 자체야. 설교보다 나은 것은 행동이요 행동보다 나은 거는 자체의 세례 받은 자체입니다.
그러면, 뭐이 와요? 성령 와요. 성령 오니까 그 예루살렘에 그렇게, 마치 참 기름 짜는 틀 속에다가 사람을 집어 넣고 사람을, 기름 짜듯이 짜는 그런 박해 가운데서 박해가 물러가서 평안이 왔어요 자체가 변화되어서 평안이 왔어요? 권능 와서 자체 변화되니까 평안 왔고 그것이 상관없어. 그게 도로 밥이라. 도로 좋아. 유익 있어. 그래야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지, 나타내지.
성령 오셔 가지고서 하루 동안에 세례 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이나 됐다고 말했습니다. 거게 보니까 성령 와 가지고서 그들이 다 새술 취했다고 할 만치 어떻게 해야 될까 회개하는 그 모든 미치괭이라 할 만치 회개에 어떻게 할까 저거 죄를 회개하고 옛사람이 변하여서 새사람으로, 죽이고 살리는 죽이는 구불텅이를 치고 살리는 지금 용솟음을 치는 그 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신약 교회입니다. 이게 교회의 본질이요 본성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기만적인 이런 저런 수단 방법 가지고서 교회된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가 있지요. 그 방편을 쓸 수 있습니다. 나쁘다는 거 아니오.
그러나, 몰라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안한 사람은 그 방편 쓰지마는서도 옳은 방편 가르쳐 줬는데 옳은 방편을 버리고 그 방편 쓰는 자는 옳은 방편을 버린 것이 바로 진리를 버린 것이요, 주님을 버린 것이요, 곧 권능을 버린 것입니다.
최 권능 목사님이 날은 저물어서 어두워 가는데 저 일군이, 나무하는 일군이 저 삐딱에서 지금 날은 저물어 가는데 어두우면 내려가지도 못할 거니까 막 나무 묶느라고 막 야단을 지기고 이래 급하게 하는데 거게서 암만 해 봐야 달리는 안 될 거고 하니까 방편을 썼어.
여보시오, 여보시오, 큰일 났다고 고함을 지르며 큰일 났다고 고함을 지르니까 그 사람이 그래도 순진한 사람이라 큰일 났다고 하니까 아마 이거 지금 나무 묶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고 큰 일이 있는 갑다 싶어서 그 사람이 그걸 나무짐을 집어 던져 버리고 쫓아내려 왔어. 쫓아내려 오니까 ‘예수를 믿어서 구원 얻으십시오’ 이라니까 그 사람이 대 욕을 하고서 돌아갔어.
그게 방편이라. 그런 방편 같은 그런 방편 쓰는 것을 나쁜 게 아니라 그 방편을 쓰는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그 방편을 언제든지 쓸 것이라고 그 방편을 전도의 유일한 좋은 방편이라고, ‘이 방편 가지고 안 되니까 이 방편 치워 버리고 이 방편이라야 되겠다’ 이거는 방편적으로는 음행했습니다. 변절했습니다. 고 음행한 줄 알고 회개해야 되지 그냥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고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거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 가지고 안 됩니다.
그랬는데, 그 뒤에 가 보니까 그 나무군 그 사람이 바로 교회를 세웠어. 그 사람이 교회 세웠어. 그거는 성령의 권능이, 최 권능 목사님은 전하고 갔지마는서도 그 사람에게 전할 때에 성령이 그 사람을 중생 시켰고 성령은 그 속에 들어가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제가 못 견뎌서 예수 믿었고 못 견뎌 가지고서 교회를 세웠고 한 것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주님 한 분만을 상대하는 그 목사라면은 절대로 거게 왔던 교인이 도망치지는 안합니다. 정말로 그 목사가 자기의 자체와 생사 화복과 모든 의식주와 자기의 성패를 완전히 주님에게 딱 맡긴 사람을 보면, 요새 내가 보니까 뭐 ○○○ 교회는 은혜 있는 교회라 하는데 내가 말 듣기에 ○○○ 교회도 왔던 사람이 가서 안 오고 왔던 사람이 가서 안 오고 이란다 합니다.
오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웅성거리고 있는 것은, 웅성거리고 있는 것은 예수가 어데 있느냐 지금 삭개오와 같이 찾는 시대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삭개오와 같이.
예수가 정말 어데 있느냐? 정말로 주님을 전지 전능의 대주재,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이렇게 참 알고 믿는 목사가 어데 있느냐? 자기의 전부를 주님에게 다 맡긴 자가 어데 있느냐? 맡긴다고 말하지마는 말과 다르기 때문에 전부이 거짓말로 듣고서 저들이 ‘만일 맡길 것 같으면 말만 하겠느냐, 제가 맡기지? 보자. 말 들어 보니까 맡겼는가 보자.’ 말 들어 보니까 안 맡깁니다. 저도 거짓말 하고 나도 거짓말 하고, 거짓말로 이거 돈벌이 하는 것이라. 그게 교회는 구멍 가게라.
교회보다도 장사해서 유익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목회로 취직하는 것이 제일 낫고 목회로 돈벌이하는 게 제일 낫다.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목회하니까 다른 사업 취직하는 것보다 출세보다 나으니까 나도 목사한다 하는데 그 애비가 목사해 가지고 고난만 보이고, 고난만 보이고 아무런 효력이 없고 핍박만 받고 고난받고 돈이 있으면서도 돈을 안 쓰고 이라니까, 아이고 아버지 목사는 안 한다라는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어떤 것인지 뒤에 결과를 봐야 알 것입니다.
그래, 자신과 자신의 생사와 자기의 그 모든 의식주와 자기의 성공과 실패를 정말로 주님에게 딱 맡겨 놓은 그 목사가 있으면은 사람들이 여게 뭐 있다고 불 지르는 것보다도, 여게 곽 속의 사람이, 든 사람이 살아나온다는 것보다도 세상에서 보지 못한 기이한 일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기이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보고서 떠나지 안할 것이오. 성령의 권능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 자에게 보내 가지고 살려야 되겠는데 그 자에게 안 보내고 어데 모든 기만에게 끌려서 보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아요? 자기를 맡겼지, 언행 심사는 그분에게만 동해서 그분에게만 피동돼서 순종 생활하는 이 세 가지로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 주는 사람, 자체로 보여 주고 행위로 보여 주고 자기의 모든 말로 보여 주는 사람, 이러면 왔다가 갈까요? 아버지가 보냈는데 와 보니까 쭉덩이고 거짓부리다 하면서 가는 사람이 없도록, 아버지가 보낸 자는 이 세 가지 보면은 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보낸 것은 이 세 가지 보면은 도망 쳐 버립니다. 방해를 할라고 애를 쓰지마는 그거는점점 도망칩니다. 교회가 점점 정화됩니다. 이 마귀 운동들이 왔다가는 힘을 못 씁니다. 꺾어집니다. 모든 사기꾼들이 다 꺾어집니다.
모든 범죄의 운동자들이 다 꺾어지고 도망을 칩니다. 어두움이 어떻게 불빛 앞에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사람 끌어 들일라고, 끌어 모을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는 사람 ‘아니다, 더럽다, 소용 없다, 거짓부리다.’ 하면서 도망치지 안하도록 하는 것이 이것이 좋은 방편입니다. 아버지가 보내지 안하면 올 자 없다 했습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만 와도 됩니다. 예수님이 전도했습니까? 아니오. 아버지가 보내니까 그렇게 구름덩이 같이 다 모아 들었던 것입니다.
언제 어떤 분은 뭐 삼백 명 이상은 성경적이 아닌 교회라 해 가지고 그것을 뻔뻔스럽게 신문에 내놨어. 대교회주의는 이게 성경적이 아니라. 예수님은 대교회주의입니다. 그대로 사니까 자꾸 사람들이 모아들어서 그때에 사나이 수만 해도 오천 명이 모였으니까 요새로 말하면 뭐 오억만 명도 더 되는 숫자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때와 달라서 세계가 좁아졌어. 좁아졌어. 모이기도 쉽고 전달도 잘되고 통신도 잘되기 때문에 그때에 오천 명은 요새 오십억 모이기보다도 더 어려워. 이거 다 그들이 전도한 게 아니라 저절로 보고 본 대로 말하는 사람이, 본 대로 말하는 사람이 했어.
이렇게 많이 오는데 뭘 보여 줄 건가? 이렇게 구름덩이같이 모여드는데 모일 때 뭘 보여 줄 건가? 오십만 명 여의도 광장에서 모였을 때에 나도 갔었는데, 뭐인고 싶어 나도 갔었는데 나도 거게서, 거게서 흩어져서 거게서 떠나왔습니다. 한 시간 보고 떠나왔어.
왜? 나를 붙드는 게 없어.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떠나지 못하도록 정말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요렇게 믿는 사람이 거게 있고, 믿는 걸 말하고, 주님에게 자신을 다 맡긴 사람이 있고, 주님에게 모두 거게 복종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세 가지 거기 있으면 떠나지 안해. 죽여도 떠나지 안해.
이 교회 목회 안 해도 떠나지 안해. 내가 거게서 은혜 받아 가지고 내가 살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