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2:53
성패의 두 길
1981년 7월 11일 토새
본문 : 창3:4-6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지난밤의 자기의 환경 주위 형편 사정 처지 거기 사람이 개입됐던지 물질이나 일이나 어떤 그 정서의 일이나 어떤 것이 개입했던지 그것이 다 자기의 현실입니다. 자기 현실 자기 현실에게 피동이 되면 그것은 반드시 패하고 망하고 죽고 맙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패망과 죽음의 길은 자기의 현실에게 피동되는 그 길 뿐이요. 또 성경에 성공과 평강과 존영한 그 생명의 길은 현실에게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길입니다. 이 두 길로만 인생들은 걷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그 길 걷고 교역자도 일생동안 그 길 걷는 것만 협조해서 잘 걷도록 그래해 주고 그거는 교인도 택한자라도 행위는 패망할 행위요 교역자도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교인들에게 그것을 바꾸어 주지를 못하고 죽이고 살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인을 패망시키고 죽이는 그 교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망의 길을 시작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생명의 길로 돌아서는 사람도 있고 일생동안을 사망의 길에서 계속하다가 기본구원만 얻고 건설구원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원죄인 자기 중심인 그 악성 이것만 기르고 마귀에게 늘 꼬여서 그대로 움직이는 이것만 생활하다가 멸망받는 그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시작은 잘했는데 중간에 삐뚤어진 사람으로 끝까지 삐뚤어진 사람 있고 또 중간에 삐뚤어졌다가 다시 돌이켜서 바른 길을 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자기의 전 흥망 성패 성쇠 생사 이것이 결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을 예사롭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무슨 길인고 하니 하나님 사랑 하나 자기 사랑 하나 하나님에게 순종 하나 현실이라는 환경에 순종 하나 요 두 가지만을 구별한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인제 온다' 그 말은 마귀가 와 가지고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지금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는 그런 시험할 것을 말할 것입니다. '세상 임금이 와서 지금 십자가에 나를 못박혀 죽일려고 정죄하고 그렇게 할 것이라.' '그러나 제가 오든지 말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다.' 왜? 그놈이 와 가지고 달래다가 위협하다가 꾀우다가 별별 일을 다 할터인데 그 마지막에는 참 고문고행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이기까지도 할 권세를 가지고 오는데 왜 상관이 없어. '아 내게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주님은 뭐하고 상관이 없겠습니까?' '저가 그래하면 내가 아버지 사랑하는 일과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것만이 나 할 일이기 때문에 그가 와서 그렇게 하면 아버지를 얼마나 뜨겁게 강하게 사랑하는 것과 그 계명을 얼마나 힘들여 지키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줄 것 뿐이라.' '명령에 순종 못 하게 하면 내가 안한 게 아니라 못 하게 해도 생명 빼앗아 가도 순종하는 것으로써 끝마칠터이니까 세상에게 그 명령을 얼마나 순종하나 하는 것을 보일 것 뿐이라.' '또 아무리 아버지를 배반하라고 사랑치 말라해도 내가 생명이 다 끊어져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계속할터이니까 그것만 세상에게 보여질 것 뿐이라.' 주님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이 그 마귀에게 지지 아니할려고 하는 그것을 발표했는데 그 두 가지로 발표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 하는 것과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는 그 두 가지로 발표했소. 그 두 가지만 하니까 승리했고 마귀는 그 두 가지 뺏들려고 왔던 것인 것을 여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전 생활은 뭐이냐? 주님 아버지는 이제 주님은 아버지지마는 우리는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사랑안에 거하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들은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안에 거하라" 이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재세의 모든 현실이라는 현실은 어떤 현실로 닥아오고 있는가?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느냐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 하느냐? 다른 것을 사랑한다 말을 민족을 사랑하는 그것도 내 민족을 자기 민족을 위해서 순족한 민족을 위해서 죽은 그런 사람도 왜 모든 민족은 다 같은 민족인데 왜 너희 민족만 위해서 생명 버리느냐 그것이 내나 자기 민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껍데기는 민족이지마는 속에는 자기요. 애국자도 자기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자기를 사랑하느냐? 이 시험입니다. 모든 현실은 또 하나님에게 순종이냐 현실에게 순종이냐? 하는 것인데 현실에게 순종 그것은 아무리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이성비판에 자기의 그 모든 감정비판에 아마도 이리해야 되겠다 해서 환경 현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그것이 자율이요 자기 주관이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모든 닥아오는 현실은 하나님이냐 자기냐? 이 둘의 시비입니다. 하나님이냐 자기냐? 이 둘의 시비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든지 자기 주관에 복종하든지 이 두 가지 시비로써 일생동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다가 차차차차 쉬울 때에 자기를 조금 쪼그매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길수 있는 이 현실로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참 자기와 자기 소유와 자기 몸과 자기 생명까지 다 내놓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이 높은 도수로 끄 올립니다. 하나님이 끄 올려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을 다 내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는 이런 높은 도수로 도수가 높은 도수로 시험의 도수가 자꾸 높은 도수로 끌어 올립니다. 시험이 점점 어려운 시험으로 이제 고급 시험으로 끌어 올립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지극히 작은 그 두 가지 시험에 이기면 또 그보다 조금 큰 시험주고 또 그거 이기면 좀더 큰 시험주고 이래서 지극히 작은 시험 이기면 큰 시험 이긴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데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데도 충성되다 한말은 지극히 작은 시험을 자기에게 줄 때에 그것만이면 그거는 이길려면 이길 수 있다 그 말이오.
왜 작은 시험이냐? 자기에게 시퍼다 그 말이오. 시퍼. 고것은 제가 이길려면 이길 수가 있어요. 이길려면 이길 수 있는 그 시험만 이기면 나중에 최고의 시험도 다 이긴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속에 깊은 뜻은 자기가 이기기 쉬운 그 시험 그것만 일생동안 닥치게 된다. 이번에 닥친 시험을 이기면 그 다음 시험도 또 자기에게는 이길려면 이길 수 있는 시험됩니다.
그러면 최고의 시험을 닥치도 고렇게 이게 나온 사람에게는 고 시험이 이길 수 없는 시험이 아니라 자기만 이길려고 할 수 있으면 아주 쉽게 수월하게 이길 수 있는 그런 실력으로 자라가게 되기 때문에 모든 세상이 주는 그 시험이 자기에게는 시펀 시험, 아주 쉬운 시험, 그까짓거 이기기야 문제 없는 시험. 그런 시험이 된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 하나 시험보는 그것을 한 번 예사롭게 생각해 가지고 실패하고 두 번 실패하면 그 다음에 세번째 닥아오는 시험은 이기기가 참 어렵다.
아무라도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다 내어 놓기까지 해서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고 싶은 마음들은 다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도 합니다. 기도도 하지마는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보면은 다 패전해버리고 승리하는 사람이 참 흰 쌀의 미와 같이 아주 소수라 이거요. 노아때 노아 여덟 식구만 있은 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소수지 다수가 되지를 못해요.===========================
그게 뭐이냐? 마음에는 그렇게 해야 될줄도 알고 각오도 결심도 기도도 했는데 와 안 되는가?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일을 이기지 안하고 미뤄놨기 때문에 이제는 이길 수 없는 고만 자기의 턱거리하는 그런 시험이 됐습니다. 자기가 항상 발만 내디디면 올라설 수 있는 그런 시험이였는데 몇 번 그저 그 시험을 이기지 안하고 예사롭게 지나가다 보니까 이제는 자기 턱에 올라온 시험이니까 자기가 뛰올라 해도 힘이든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두 가지 갈레길에서 항상 투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그만 이 두 가지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자꾸 바꾸어 가는 바꾸어 오는 자기 현실 바꾸어 오는 자기 현실에 이 두 가지 시험으로 자기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자기를 미워해야 되고 자기를 사랑할라 하면은 하나님을 부인해야 되고 미워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니까 이 중대한 시험 또 하나님의 뜻 명령이냐 자기 뜻 내나 자율이냐? 이 두 가지 시비가 되 가지고 나는데 이것이 망하고 흥하는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이요 평안과 고통이 되는 것이요 천하고 귀해지는 것이요 이기고 패전하는 이 우리의 영과 육의 전부가 여게 메였는데 전부가 여게 메였는데 어리석게 이점은 중대하게 자기가 깨닫아서 다루지를 아니하고 자기 현실에 돈 문제를 다루고, 또 자기 감정 문제, 자기 오기 문제, 자기 위신 문제, 자기 권위 문제, 자기 명예 문제, 자기의 사업 문제 이것을 중점으로 현실에서 다룰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마귀가 순전히 깨워서 이렇게 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거 하라고 주는 것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를 위해서 한 사람이 그것이 해와요 아담이요 가인이요 노아의 그 뒤에 실패할 때의 노아요 또 아브라함도 실패할 때의 아브라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런 사람들도 다 인간 중에는 참 조상이 되는 위인들이지마는 그 길을 걸어 가지고 패망 안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이라 하는 거와 마찬 가지로 자기와 자기 현실에 자기 현실 거게 피동되면 그만 그것은 패망이라는 것으로 변동없이 그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패망이 진리입니다. 그 다른 길이 없어.
이런데 이 길을 갔다가 뒤에 돌아선 사람이 있느냐? 돌아선 사람은 아브라함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갔다가 즉시 돌아섰습니다. 이러나 아담도 해와도 돌아선 것이 나타나지 안했습니다. 노아도 돌아선 것이 나타나지 안했습니다. 가인도 돌아선 것이 나타나지 안했습니다. 아브라함만 애굽에 갔다가 돌아섰습니다.
이 길에 빠지면 이 빠져 들어가면은 어떤게 돌아섭니까? 못 돌아섭니다. 절대 못 돌아섭니다. 못 돌아섭니다. 하나님이 돌이키줘야 돌아섭니다. 아브라함도 그때 하나님께서 돌이키서 돌아서지 돌이키지 안했으면 아브라함은 거서 죽고 자기 가정도 망했고 자기도 죽고 전체가 전멸됩니다.
만일 고때 한 두서너 시간만 지냈으면 전멸됩니다. 왜 두서너 시간만 지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하고 바로하고 동침이 됩니다. 동침되고 나면은 아브라함은 죽습니다. 네 이랬는데 하나님께서 그때에 즉시 천사를 보내 가지고 그 바로를 탄합을 해서 바로가 그때에 그 죄를 범하기 전에 자기가 깨닫아서 깨닫아서 '아이구 패망될뻔 했구나' 그러기 때문에 패망될 것인데 그가 돌이켜 회개를 해 가지고 아브라함을 거게서 석방시켰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고 요 전투인데 자기냐 하나님이냐? 자율이냐 하나님의 계명이냐? 하는 요 두 가지로 싸우는 요 시비하는 전 현실은 요건데 이럴때에 그 현실에서 자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라고 하면 무엇이 준비 되어 있어야 되느냐? 무엇이 준비 되어 있어야 되느냐? 또 자기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보다 자기 하나님 명령보다 자기 자율대로의 비판에서 현실에 피동되는 그런 길을 걸어가게 되면 무엇이 속에 있기에 그런 길을 걸어갔느냐? 고것을 지난밤에 말했습니다.
무엇이 속에 있기에 패망의 길을 걸어갔느냐? 고것은 자기가 자기의 왕이 됐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는 제일 높은 자가 됐습니다. 천하에 자기 자기가 제일 높습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었고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가 되어 있는지 후에 현실에 피동됐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자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생각에 비판보다 하나님 명령을 더 복종할 것으로 여겨서 복종하는 그 현실로 하면 이기는 것인데 이 해와도 아담도 가인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그 길을 걷게 될 때에 그때에 그 길 걷게된 그 자기는 이름을 뭐라고 말합니까. 그 자기를 가르쳐서 성경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뭐라고 말했지요? 저 뒤에도 자기가 안 들려도 그 대답을 해봐요? 속으로 그 자기를 성경에 뭐이라고 말했습니까? 옛사람이라고 말했지요. 옛사람이라고 말했지요.
옛사람인데 그것을 무슨 죄라고 말했습니까? 저 뒤에도 대답해봐요? 소리를 내 대답해 그래야 옆에 사람이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 자기를 알지 틀렸으면 수치를 당합니다. 틀렸으면 그 자리에서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를 당하면 그것이 잘 잊어버리지 안하고 똑똑히 기억이 되집니다.
자기야 매장이 되든지 죽든지 어쨔든지 이 건설구원을 이루려고 막 욕심을 내 부려야 되지 자기 눈썹 하나라도 상할까 털끝만큼이라도 상할까 해서 그거 안 상하도록 맞추다 보면 자기는 지옥의 자식 되고 맙니다. 건설구원은 완전히 멸망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데라고 이 구원에 대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자기만 나타내면 멸망입니다. 이것이 원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옛사람을 말할 때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악령 또 악성 이것이 악성입니다. 악성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에 성품을 가리켜서 악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자기가 하나님께서 현실을 다스려라 지키라 먹으라는 것만 먹고 먹지말라는 건 먹지 말아라 요 계명을 자기가 지키면 뱀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마귀가 들어 오지를 못 합니다. 요걸 안 지키면 마귀 들어오고 마귀 들어오면 마귀의 유혹 받으면 무슨 사람 됩니까? 내나 타락한 사람되버립니다. 변질된 사람 되버립니다. 원죄의 사람 되버립니다. 자기 중심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은 자기에게 부딪혀진 그 선악과는 자기 죽이는 선악과인데 먹으면 죽는 선악과인데 대대손손이 죽는 선악과인데 요렇게 자기 중심인 원죄가 자기 속에 들어 있으면 고 원죄 속에는 누가 들어 앉았습니까? 마귀가 들어 앉았습니다.
이러고 보니까 자기 죽을 선악과가 볼때에 고렇게 좋게 보였습니다. 그거 아니면 죽겠고 그거 해야 성공이 되겠고 그거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되겠고 요렇게 보여졌다 그거요. 그 사람이 되고 나면은 망할 것은 그렇게 좋게 보이고 좋은 것은 그렇게 망할 것으로 보여져서 화닥 디비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 피동 되어서 자기 현실에 피동된다 말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지 안하고 자기가 중싱되 가지고 자기 비판 생각대로 해 가지고 하지요. 자기 현실에 피동이 되면 고것이 뭐이냐? 자기 현실에 피동이 되면 그 현실에 피동이 되면 죽는 것이고 망하는 것인데 고기 선악과인데 자기 현실이 다 선악과인데 인간에게 자기 닥치는 현실이다 선악과인데 고 선악과에 피동되면 그 선악과 보기에 좋으니까 고만 먹어버렸소. 고만 그 선악과에 피동된 것입니다. 자기 현실에 피동되면 죽는 것이요.
우리에게 당한 모든 현실은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선악과인 것입니다. 이거는 선악과요. 자기 현실에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대로 하면은 그것은 먹으라는 음식만 먹는 것입니다. 고 우리 현실은 선악과가 아니면 하나님이 먹으라는 실과 고 둘이요. 내나 같은 이치입니다.
고 선악과를 볼 때에 그렇게 보기 좋아서 먹게 된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에 고 현실에는 아무래도 요 현실에 피동되야 되겠다 요 현실에 피동되지 안 하면은 가정이 망한다 현실에 피동되지 안하면 내 지위 권세 명예가 떨어진다 내 위신이 깨어진다 사업이 절단난다 요 현실에 요게 요때는 하나님과 그 명령을 배반해야 모든 것이 잘되고 형통하고 성공되고 내가 존귀해진다 요렇게 그 현실에 대해서 보여질 때에 그때에 자기 속에는 무엇이 들어서 그럽니까? 무엇이 자기 속에 들어서 그러요? 저 뒤에도 좀 말좀 해보라 말이요. (김봉태) 장노님 한번 말좀 해봐요. 자기 속에 뭐이 들어가 그럽니까? 네 자기 속에 자기 속에 악성 자기 속에 원죄 고놈이 들어서 그렇게 꺼꿀러 보게 만들어 버립니다. 꺼꿀러 판단하게 만들어 버리요.
원죄 속에는 어떤 놈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합니까? 저 뒤에 저 (신) 조사님 죽림 (신) 조사님 예. 자기 악령 오십점 깍여 악령 그 속에는 악령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네 그러기에 자기 속에 악령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나 성령이 주장하고 있나? 자기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영 새사람이 참 사람이 주장하고 있나 참 자기가 주장하고 있나? 자기 아닌 자기를 죽인 자기의 원수 자기 아닌 자기 원수 이것이 자기로써 가장하고 나타난 원수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악성 악령 요것으로 만들어진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요것이 자기 속에 들어서 옛사람이 멸망받을 악령하고 악성하고 요 멸망받을 사람 자기 아닌 것. 그거 일 자기를 죽이고 그것이 대신 가장으로 나서지 안했습니까.
그 가정에 호주는 불량자놈이 죽여버렸고 죽여서 치워버렸고 호주의 입었던 옷을 입고 떡 나서니까 마누라도 저거 남편 온줄 알고 대우하고 자식들도 저거 아버지 온줄 알고 대접하고 그놈의 집구석 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놈아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죽인 놈이로구나' 이걸 깨닫아야 여자도 정절 지킬 수 있고 자식들도 가정을 건설할 수가 있지 않겠소. 꼭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닌 자기 영은 제거시키버리고 죽이기 전 영은 파 묻어버리고 이래 가지고 악령과 악성이 영을 파 묻어놓고 난 다음에 제가 이제 호주라. 제가 자기라는 고 사람 속에 자기 속에 자기 주인이라. 고기 주격이라 요렇게 가장을 하고 나서는 요기라 그말이오.
그러면 자기 속에 성령이 주장하고 계시는지 중생된 영이 주장하고 있는지 악령이 주장하고 있는지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파묻은 가증한 자기 원수인 자기 그놈이 자기 속에 자기가 되어 있는지 이것을 뭘로 알겠습니까? 이것을 진찰하는 법이 뭐입니까? 이것을 아는 틀림없이 바로 그것을 바로 진찰해서 아는 고 길이 뭐입니까? 저 울산교회 달산교회서 간 (김) 집사님 무엇으로 고걸 진찰해서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알 것 같은데 이거 모르면 앉았어야 공연히 앉았지. 그러니까 못 알아 들으니까 울산서 차비를 애껴서 안 오지 생명을 내놓고 오지 생명을 바꿔도 아 진리 알아야지 생명보다 이 진리 크지 천하를 차지하는 것보다 이 진리 크지.
왜? 금생과 내세 자기가 죽고 망하고 흥하고 쇠하는 것이 여게 달렸기 때문에 자기 속에 성령이 자기를 주관하는지 악령이 자기를 주관하는지 자기의 원수인 악령 악성 그것이 자기것 처럼 가장을 해 가지고 그걸 옛사람이라 하는 것인데 옛사람이 자기를 주관하고 있는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사람이 자기를 주관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자기를 주관하고 있는지 그것을 바로 심사할려면 어떻게 하면 바로 심사됩니까? 그걸 어떻게 하면 바로 심사됩니까? (김명재) 조사님, 현실로 가지만 심사 바로 됩니다. 현실로 가지고만 바로 심사됩니다. 다른걸로 심사하는 길이 없습니다. 현실로만 가지고 심사됩니다.
현실로 어떻게 자기 강한 현실에 벌써 거게 현실에서 자기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쫓느냐 자기 현실을 쫓느냐? 어느 것을 쫓아? 자기 현실 쫓는다는 그것이 내나 자기 비판대로 한 것입니다. 그거 자율이요. 내나 그 못 들으면 안 돼. 그 모르기 때문에 껍데기를 말하는 거라.
자기 현실,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느냐? 어떻게 하느냐?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겠고 하나님의 계명 지킬라 하면 현실을 거부해야 되겠고 현실에 따라서 피동되지 안해야 되겠고 거게서 하나님을 사랑할라 하면은 자기는 박살이 나겠고 자기를 애껴서 자기를 사랑하고 세울라 하면은 하나님을 배반해야 되겠고 이거 둘 중에 난처가 됐습니다. 난제가 됐습니다. 이거 참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갈레길에서 이래 볼까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그때에 자기 속에 중생된 자기 속에 자기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저 거제동교회 (이) 목사님 예 손가락으로 가르쳐봐요. 네 둘입니까? 맞습니다. 둘입니다. 둘입니다. 그럴때에 뭐 이럴까 저럴까? 서슴을 것이 있는가 자기 당한 현실마다 하나님이 어찌됐든지 요래야 내가 높아지겠나, 요래야 내가 위신이 서 지겠나, 내가 권위가 서 지겠나, 요래야 내가 장로 권위가 서지겠나, 요래야 목사 권위가 서겠다, 요래야 호주 권위가 서겠나, 내 권위가 서겠나, 사장 권위가 서겠나, 내 위신이 서겠나, 내게 유익하겠나, 어째야 내게 유익하겠노? 어떻게 해야 될까?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 법 율법 다 치워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어떻게 하면 유익하고 좋겠나? 요렇게 고 사람이 현실 만날때마다 고렇게 나가면 그 속에 자기라는 사람이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김정식) 조사님 손가락으로 가르쳐요. 빨리 아 둘 또 (정재완) 목사님 자기 속에 자기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예 둘, 또 자기 속에 그 자기가 둘이야? 하나입니다. 하나입니다. 둘입니다. 참 목사 조사들 꼴 좋소. 그래 가지고 뭐할기요. 네 어떻게 거게 자기가 둘이요.
현실 당할 때마다 현실 당할 때마다 고 현실에서 요래야 내게 유익되겠느냐? 요래야 내게 성공이 되겠느냐? 요래 필요해야 되겠느냐? 어떻게 할꼬? 자기 현실에 대해서 자기만 생각하고, 돈만 생각하고, 사업만 생각하고, 자기 명예만 생각하고, 위신만 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현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래 하는데 그때에 그 속에 자기라는 사람이 그 둘이라 말이오. (이종옥) 목사? 예. 하나님입니까? 확실히 하나요? 확실히 하나요? 틀림없어? 이러면 목회 성공하지 이래야 목회 성공이 된다 말이오. 요걸 알아야 돼. 이걸 모로고 저 암만 예수 믿는다 해야 헛일입니다. 이거 현재 교회들이 지금 죽이야 될 놈을 자꾸 살을 찌워서 살리요. 죽이야 될 놈들을 살린다 그말이오. 자기를 죽일 놈을 살리주면 좋다고 가보지 남산교회가 (김영웅) 목사가 목사를 잘못됐오. 죽이야 될 놈을 죽이주지 못했어. 이러기 때문에 어지러워 열한 시 사십 분까지 말한 나는 녹았어. 그 사람은 순전히 자기 속에 하나 뿐입니다.
또 하나님 생각하니 자기 절단나고 자기 생각하니 하나님 절단나고, 하나님 법도 생각하니 자기 견해가 절단나고 환경과 적이 되어지고 환경과 자기 자율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한덩어리 이게 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걸 생각하니 하나님의 계명 어기야 되겠고 이럴까 저럴까? 불미를 디디고 이러자니 세상이 낭파 이렇게 하자니 구원이 절단 어떻게 할까 할 때에는 자기 속에 두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 그럴 때에 "현실 당할 때에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어든지 말든지 와서 저희들이 날뛰면 아버지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계명을 어데게 지킨다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줄 것 뿐이다 그 외에 없다."그러면 예수님 속에는 사람이 그 자기가 둘이요 하나요? 둘이요 하나요? 저 뒤에 하나입니다. 그렇지요. 오늘 우리도 이 하나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로 하나로 살아야 되요. 가인도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아담도 돌아서지를 못했습니다. 노아도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돌아섰습니다. 아브라함이 돌아설 때에 제가 돌아섰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으로써 그것을 돌이켰습니다. 살리서 돌이켰소.
인간이 옛사람으로 살고 환경에 피동되는 옛 사람으로 사는 거기에서는 제 힘으로써는 절대 돌아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 돌아서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이켜 줘야 됩니다. 하나님이 누굴 통해 돌이켜 줍니까? 그 교회 사자를 통해서 돌이키줍니다. 천사를 통해 돌이키줍니다. 여기서 돌이켜 살릴 자가 교역자입니다. 교역자가 살리지 않으면 저는 일생동안 망치고 맙니다. 모르는 정권들이 다 그런 정권들입니다. 모든 목사들이 그런 목사들입니다. 이런 목사가 많오. 산태가 났소.
예 여러분들 이러니까 여게서 살리낼라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야지 정말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야지 하나님이 전하는 말을 전해야지 하나님이 전할 말을 전할 때에 전능이 같이 가야지. 그러면 실패했던 아브라함도 그 자리에서 돌아서고 난 다음에는 다시는 그 길 안 갔지. 믿음의 조상으로 성공을 했지. 그이의 이 믿음 걸음 걸어간 그것이 그 당시는 몰랐지마는 역사에 인류중에는 제일 위대한 인류가 됐지 제일 위대한 사람이 됐지 제일 성공한 사람이 됐지. 자기를 진찰하는 법을 오늘 아침에 다시 재론했습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물어도 답을 잘못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 듣는데 목회 성공이 여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난밤에 이야기를 할 때에 부임하던 길로 대심방을 시작했는데 대심방을 시작해 가지고 그만 그 교회 가 가지고 기도만하고 설교는 예배는 보지 안하고 그렇게 대심방한다고 그 교회 불평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불평하는 것이 당연한 불평입니다. 오면은 예배 보자고 떡 모두 다 책 놓고 성경 내놓고 목사가 오니까 가정 예배 그 들여줄 줄 알고 그게 복되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기도만하고 지나가니까 다 섭섭할 것 아닙니까. 섭섭하지요.
또 그 목사가 대 심방하면서 기도만 하고 예배보지 안하는 예배 보지 아니한 그것도 시간이 바빠서 말하지마는 바쁘면 한 달 안 걸리면 두 달 걸리면 되지지 바빠서 못한 게 아니라 실은 예배볼 실력이 없어서 예배를 못 봅니다. 그렇게 고해야 됩니다.
다 배짱들 좋지. 처음에 그 교회 뜩 부임해 가지고 턱 가서 '자 새로 목사님 왔으니까 대심방 시작합시다' 할 때에 할 실력이 있다고 '예 합시다' 척 나타나는 사람도 배짱 좋소. 그 배짱이 요번에 큰 위사했소. 네. '그런 대심방이 어디 있소.' 이래서 네가 요걸 면해주기를 '심방은 집에 떡 들어가서 다 평안하시요 하고 썩 지나가는 설 심방도 있고 들어가서 기도만 해주고 가는 기도 심방도 있다 예배 보는 예배 심방도 있다' '이러니까 꼭 심방은 하면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봐야 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해서 수치를 면해줬습니다.
또 그러고 난 다음에 대심방은 가는 것은 그 집을 심방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종이 그 가정을 심방하면 그 가정에 병을 치료해 줘야 되고 그 가정에 복의 길을 열어서 복을 줘야 그 가정 심방한 하나님의 사자의 보람이 있지 하나님의 종이 가 가지고 그 가정이 당장 치료해야 될 것도 몰라서 그대로 지나가고 보고는 길이 막혀 가지고 있어도 티워 주지 못하고 그대로 가면은 그까짓거 허수아비 심방 죽은 심방 하나마다 그러기 때문에 심방을 하면 그 가정에 이 가정에는 이 말씀이 적절하고 저 가정에는 저 말씀이 적절하고 이 가정에는 이 말씀이라야 이 가정에 무슨 이 죄로 말미암아 가정이 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죄를 멸하는 요 말씀을 해야 되겠고 이 가정에는 요것이 지금 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요걸 티워야 되기 때문에 요 말씀이 적절하고 이러니까 그 가정에 사정을 자기가 환하게 다 알지마는 평소에 집어서 말하면 도리어 섭섭할 것이기 때문에 대 심방에 고 가정에 딱 갈때 고것을 그 말을 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인데 그 가정에 그 가정이 어떤 가정인 줄은 모르고 이 가정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해야 될 가정에 이 가정에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지금 주신다 했으면 얼마나 거짓 선지자요. 어떻게 부임하던 길로 교인의 가정을 어떻게 안다고 대심방에 척 나서는 것도 참 뜨거운 국에 디이 죽을 줄 모르고 멋 모르고 달라드는 것이지.
이러니까 대심방을 한다고 시작은 했지마는 그 가정에 막상 무슨 말씀을 증거해야 적절한 하나님이 그 가정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전해야 될터인지 모르니까 차라리 모를진데는 기도하고 지나가자 그것이 잘됐습니다. 예배보는 것보다 그게 잘됐어. 또 그보다 더 잘되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가정 사정들을 모르기 때문에 대심방에 나서지를 못하겠습니다' '설 심방이나 하고 기도 심방도 잘 못하겠습니다' 했으면 더 잘되겠지.
고 목사 쳐놓고 세상에 심방 못 다니요. 내가 엊저녁 말했소.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 그 가정에 사정을 다 알아서 이 가정에는 환자가 있으면 병 낳게 해돌라고 기도를 해야 되겠고 이 가정에는 건강해서 죄를 지으면 이 건강을 잘못하니까 이 건강이 차라리 죄 짓는 것보다은 오히려 병드는 게 낫겠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되겠고 하는 그 사정을 알아야 기도도 하지 알고서 그 가정에 대심방을 해서 그렇게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고 모르는 그 가정에 대심방을 가 가지고 참 하나님이 그 가정에 말씀하는 고 말씀을 딱 딱 할라고 하면은 껍데기는 심방하러 다닌다고 덜렁 덜렁 다녀도 속으로는 죽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그렇게 쉬운줄 압니까. 쉽지 않소. 가정 마다 그 가정에 가 가지고 하나님의 할 말씀을 딱 자기는 그 가정을 모르지마는 딱 고 말씀을 하면은 아는 사람이 있다가 참 그 가정에 꼭 적절한 말씀을 주신다 그게 그렇게 알아내기 쉬운 것 아니요. 목사가 주일날 설교하는 그것도 하나님 앞에 그걸 무슨 말씀 하나님이 하실라고 하고져 하시는가 고걸 찾기 위해서 녹습니다.
저도 예배 보는 게 쉬운 줄 아요. 거미 속에 거미 똥구멍에서 자꾸 거미 줄 줄줄 나오듯이 얼마든지 나오는 줄 압니까. 아니요. 엊저녁에 설교하는 그 설교할라고 꽃마을에 가 가지고 암말 날뛰도 안 돼. 또 여게 와 가지고 날뛰도 안 돼. 난중에 죽을 지경이요. '주여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습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이래서 예배 좀전에서 생각이 나 가지고 기록해 가지고 왔는데 그것도 또 헛일이요. 또 여 와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하고져 하시는 그 말씀을 인간이 받아서 고대로 전한다는 것이 그게 쉬운 줄 압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설교 딱 제목과 본문을 택해 가지고 월요일부터 연구한다 하는데 나는 그래 한번도 못해봤어. 왜 이 말씀 할라하면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딴말 하라 합니다. 난 그랬는데 이러기 때문에 아야 마지막 시간까지 뭐입니까? 그 문제 제목 문제 무슨 말씀을 할라 합니까 그것 묻다가 그것 알았으면 잘 전했든지 못 전했든지 벌써 잘못 전해도 팔십프로는 효과가 있는 것이라 그말이오.
아 이런데 자 대심방을 하면서 이집에 대심방 하고 또 가 가지고 이래하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 가정에 대한 실정을 말씀해주는 그걸 영감을 받아 가지고 그 지시를 받아서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압니까. 대심방하고 나면 교역자가 녹습니다.
이러니까 저하고 심방다니니면서 아 그 가정에 적절한 말씀을 주신다 나는 이 가정이 뉘 가정인지 모릅니다. 갔는데 아 그 가정에 삼년째 내나 그 말씀을 주신다 이 년 작년에도 이 말씀을 주셨다 나는 그 가정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전하니까 이제 그 가정에 회개를 안하고 있으니까 그 말씀을 또 주신 것이지요.
이러니까 대심방이 뭐인지 집 아는 게 대심방인가 대심방에 가서 본 정신도 개별적으로 가정 가정마다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되는 이제 이것을 하는 게 대심방인데 이제 이 모두 돌아다니며 덜렁덜렁 돌아다니며 아랫도리가 병신이 되든지 하지 어떻게 힘이 있어 놨는지 힘이 있어 놓으니까 이 가정에 버득 저 가정에 버득 이렇게 돌아다니기만 돌아 가지고 아주 날낸 사람은 이 사람이 가 가지고 요렇게 기생이 팔방미인으로써 요 남자 만나면 요래 요래해 가지고 아이 '요 여자는 나만보고 사는 여자로구나' 요 남자 꾀우고 요 남자 꾀우고 열 명이라도 오는 놈마다 다 꼬아서 전부 이 기사는 자기하고만 연애하고 있는 줄로 이렇게 알도록 하는 것처럼 요래 가지고 요 사람하고 조 사람하고 돌아다니 가지고 사람을 자기 사람 자기는 그 사람 자기는 그 사람 되 주고 그 사람은 자기 사람 만들고 요런 노릇을 하면서 이것이 목회라고 하나님 앞에 진노와 벌을 얼마나 받을라고 예. 자기도 바로 되어 있지 않는데 무슨 목회를 해 하기를 성경을 배울 필요가 뭐 있어.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 알지 못하는 걸 알게 하는 것이 믿음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은 저절로 알아지는데 나에게 순종케하는 인도한 그 성령이 하나님이신데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신데 이러니까 자기를 심사해서 천하에 자기보다 더 큰 원수가 없습니다.
이러기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허공을 더불어 싸우는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하지 않는다 내가 푯대없이 달리지 않는다. 내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적 없는데 공중에 보고서 이와 같이 지금 싸우는 이런 싸움 싸우지 않는다. 나는 내적을 똑똑히 발견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바울이 똑똑히 발견한 그 적이 무엇입니까? (이순기) 목사님 한번 말씀해봐. 그 적이 누구지요? 바울이 내가 허공을 내가 싸움을 허공을 치는거와 같이 하지 않는다 하면서 자기 적을 똑똑히 발견해 가지고 말했는데 거게 발견한 자기 적이 뭐이지요? 옛사람, 네 옛사람이라 하면 칠십점 밖에 안 됩니다. 자기입니다.
자기, 거게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버림을 당할까 하여 자기를 쳐서 복종한다 이랬습니다. 자기하고 싸웠어. 자기 이놈은 하나님에게 순종할 놈인데 자기 이놈이 왕이 되 가지고 하나님 거역하고 자기 주장대로 하는 이놈을 지금 싸워 이놈하고 싸운다 그말이오. 그게 자기 원수중에 원수라. 네. 옛사람 그것이 자기 원수중에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하나인지 둘인지 둘이면 두말할 것 없이 그 사람은 고민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라면 행복된 사람이든지 완전히 멸망속에 든 사람이든지 둘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면 현실을 만날 때에 하나님과 자기와 둘이 이럴까 저럴까? 분리를 부리지 안하고 고만 어떤 현실이든지 당하면은 여게서 어째야 돈이 벌리겠노? 어째야 사업이 잘되겠노? 어째야 명예가 올라가겠노? 내 지위가 올라가겠노? 어째야 내가 들리겠느냐? 어떻게 하면 요 환경 요게 딱 맞추어서 환경은 나 맞추고 나는 환경 맞추고 환경은 나 위하고 나는 환경 위하고 요렇게 딱 들어붙어 세상하고 간음해 가지고 살까 요것만 생각하는 자라면 이자는 옛사람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멸망 뿐이지. 멸망만 속에 들어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인데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떤 현실이 오든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노라. 어떤 장기간 고문과 고행이 와도 요 고것에게 피동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하나님만 사랑하겠다. 요래서 마지막에는 불로 자기를 지지는 기도할 때에 '주여 내가 이렇게 하지마는 그 불로 내 몸을 태울 때에 내 가죽을 벗길 때에 내 팔을 뒤로 묶어 가지고 이걸 공중으로 들때에 그 신경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잠깐이면 기절해서 없애기는 거라 말이오. 이럴때에 주여 내가 그 아픔에 피동되면 아픔에 피동된 것은 그렇게 고통을 주면서 이렇게 해라 하는 요구가 있기 때문에 그 요구에 피동되면 대번 탁 끊어놓지 칭찬하면서 아 수고했습니다. 공연히 그랬으면 되는건데 고생을 고만했습니다. 이제 대우하지요 그럴 때에 고문과 고행에게 불에게 형벌에게 그 신경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게 거게 내가 피동되지 안하고 그럴 때에 내가 주를 사랑해야 되겠고 그럴 때에 주의 계명에 내가 순종해야 되겠는데 이것을 내가 원하지마는 이거는 지극히 큰 권능이 아니면 안 됩니다. 주의 권능으로 그때 도와 주시옵소서' 할 때에는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 말이오.
이렇게 해서 평소에 이거야 그게 이기지는 것이지 평소에 여게 대해서 아 사소한 일에도 현실 닥치면 요게서 어쩌면 내 위신이 좀 올라갈꼬, 어떻게 하면 내 명예가 올라갈꼬, 어떻게 하면 내 권위가 좀 올라갈꼬, 어떻게 하면 내 사업이 좀 잘될꼬, 돈이 잘 될꼬, 어짜면 좀 내가 평안해질꼬,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 내 사람 만들꼬 여러분들 어리석습니다. 그까짓거 해봤자 한국에 있는 사람들 제 사람 되봤자 한국 사람이요. 성경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는 온 천하를 자기 것을 만들어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했으면 자기는 손해봤다 했습니다. 이렇게 평가가 높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어떤 자기가 되어 있는지 그것을 심사하는 데에는 그 심사 방법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밖에 없습니다. 뭘로 심사합니까? 뭘 가지고 심사하면 틀림없이 딱 알지요? 또 (정재완) 목사님 뭘로 가지고 심사하면 딱 압니까? 뭘로 가지고 심사를 하면 자기 속에 둘인지 하나인지 죽일 자인지 산 자기인지 고걸 똑똑히 정확하게 고걸 진찰해서 알라면은 뭘 가지고 심사해야 되지요? 네 이번에는 이제 백점이 됐어. 아까 위사를 떡 하니까 떡 됐어. 고렇게만 되면 당장에 교회가 부흥이라 여게 교역자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을 데리고 옵니다. 암만 해도 정신을 차릴려면 교인보다야 설마 교역자가 낫게 듣지 않겠소. 교인이 듣고 알송 알송한데 자기 교회 가 가지고 교역자가 요렇게 요렇게 똑똑히 딱 가르쳐서 고걸 알송 달송하던 딱 알려주고 고걸 확고하게 해주니까 얼마나 좋겠소. 여 와서 들으니까 아무래도 처음에 초보는 거 가서 들어야 되겠다. 초벌 듣고 재벌은 우리 교회 목사하테 들어야 똑똑히 알게 된다.
그러면 그 교인이 여 오겠소 거 있지. 자꾸 자라면 그게 전도 잘하지 연보 잘하지 또 연보 잘하고 전도 잘하니까 하나님이 축복 줘서 자꾸 부자 되지 자꾸 흥왕되지 자꾸 되지니까 아무리 애를 쓴다해도 평신도 보다야 같이 애를 써 들으면 목회자가 훨씬 낫게 듣지 깊이 듣지 '언제 그 말씀했습니까?' '아 그 말씀하지 안했다 이런 말씀' 이러니까 '나는 그런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거게 갈라고 할 때에 서부교회 갈라고 할 때에 교역자가 안가면 애가 터져 그 안 가면 자기가 알걸 모르기 때문에 '아이구 어째 못 갑니까' '아니 몸이 좀 안돼 못갑니다.' '하 이 미리 단속하지마는 이제 차를 태워 드릴 터이니까 같이 갑시다' 자꾸 가자고 애를 쓰지 그 여게 가는 데에 자기 못들은 것 들어 가지고 가르쳐 줄터인데 그가 안 가면 못 가르쳐 주기 때문에 같이 가야 되겠으니까 아플까 싶어서 병이 들까 싶어서 피곤해서 그 못갈까 싶어서 가 가지고 졸을까 싶어서 막 애가 터지지. 이러면 사는 것입니다.
이거 천국 가라 하는 것이 다 교인들인데 교인들에게 천국갈 수 있는 권능을 주고 길을 줘서 아 그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회개가 되어지고 점점 변화가 되어지니까 자기가 받은 증거가 있는데 왜 그 교역자를 배척을 하겠소. 예. 이 깨닫아지는데 깨닫지 못하고 고만 여기와서 어떤 교역자는 잔다 그말이오. 자니까 항상 묵은둥이 옛날 그거 강단에서 말하니 교인들이 은혜가 있어야지 교회가 자꾸 떨어진다 그말이오.
이렇지마는 이거 그거 뭐 나물죽 먹든 것이 나물죽이 고기밥만 못하기야 못하지마는 나물죽 먹는 것을 습성을 드리 놓으면 고기는 먹을라면 느낀 거리고 나물죽이 낫습니다. 나물죽이 낫소. 이걸 교인들 그래도 자꾸 그것만 먹여서 이래 놓으니까 다른 교인들은 와서 맛없더라 배교파 안되겠다 가 버리고 가 버리고 하니까 교회가 부흥 안되고 자꾸 떨어지지 떨어지는데 거게 있는 본교인 교인들은 철통같이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벌서 습성이 식성이 되 가지고 있는 식성된 고것만 자꾸 주니까 좋아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신임투표를 하니까 온 교인들이 다 좋아해. 다 좋아하는데 교회는 부흥 안 되거든 내가 말했어. '너거가 다 좋아하는데 왜 교회가 부흥되지 않느냐?' '너거도 병들었고 다 병들었다.' '너거가 편식이라서 편식 한쪽만 아는 편식이라서 너거도 병들었고 편식 먹이는 목사도 병들었고 다 병들었기 때문에 당장 갈아야 된다' 갈아야 된다 해서 요번에 남산교회하고 서전교회하고 둘이 바꿨다 그말이오.
둘다 그 병이 목사도 그 병이 들었고 교인들도 그 병이 들었다 그말이오. 네. 틀리요 틀리거든 얼마든지 거게서 해석을 변명을 해봅시다. 틀렸나 안 틀렸나 자기네들 인식이 부족해 그렇다 그말이오. 목회자가 그 교회 가 가지고 뭐 질이니 뭐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요. 질은 있어가면 저절로 됩니다. 양이 부흥이 안 되면 벌써 거기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요. 두말할 것 없어. 그래도 좋아하면 편식된 그자들만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는 그 교회 목회자라면 십 년 이십 년 몇십 년 있든지 간에 그 교회 교인들에게 진리는 진리인데 가르쳐 주니까 물으니까 또 모르고 또 가르쳐 주니까 또 모르고 이래야 편식이 아니지. 자꾸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니까 저희들이 또 배워도 또 모르지 또 새것 배우지.
이러기 때문에 (한상동) 목사님이 말하기를 목회학에 그렇게 말합디다. 아 목회자가 아무래도 일년 동안에 적어도 오륙백 페이지되는 그 책을 세 권 이상은 저서를 지어야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경험있는 말이오. 오륙백 페이지되는 저서를 두서너 권 해야 되는 게 아니라 옳은 목회하면 일년이면 그것이 얼마나 되느냐 적어도 몇십권 됩니다. 적어도 몇십권 돼. 오륙 페이지되는 그 저서가 그 몇십 권 되요. 그래 되야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다 같은 한 설교라도 이제 좀 고거 가르치고 난 다음에는 요 진리 가지고 요 면을 치료했는데 요 진리 가지고 요 면을 치료하고 칼은 한 칼인데 요면을 수술하고 고 칼을 가지고 요 면을 수술하고 요 면에 고 칼을 가지고 아래를 수술하고 그 칼 가지고 위에를 수술하고 요렇게 수술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은 칼이라.
이 진리를 가지고 요리 조리 자꾸 이와 같이 하니까 아 교인이 요 면에 고쳤는데 또 들으니 요 면을 고치야 되겠고 이러니까 자기가 치료가 되니까 건강이 점점 오는데 왜 싫어하겠습니까. 여러분들 환경의 소산이 되지 맙시다. 환경의 소산되면 죽습니다. 하나님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소산이 되어야 삽니다. 자기를 잘 심사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흥망 성쇠는 꼭 두 길 뿐이요. 두 길 그러기에 이 길은 전부 싸우면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이제 내세우느냐 널 내세우느냐? 아 이 현실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널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느냐 네 이 환경과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느냐? 고만 둘중에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속에 자기가 둘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하나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이게 됐다가 저거 됐다가 싸우는 사람도 있고 망할 자기로만 가득찬 사람도 있고 영생할 참 자기로만 가득차 있는 사람도 있고 이런데 자기 현실에 피동되어 죽었을 때에 스스로 일어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없다고만 생각하는 분들 손한번 들어보십시요. 스스로 일어서는 자 없다고 생각하는 분 여반은 뭣하요. 다 죽었소. 스스로 일어서는 자 없다고 말했는데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거게서 돌이켜 살리야 됩니까? 하나님쎄서 돌이켜 살리야 되지. 하나님이 직접 왔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서 돌이켜 살려냈지. 그런데에는 목사가 돌이켜 주지 안 하면 안 됩니다. 목사가 거게서 돌이켜 주지 않으면 제 힘으로 못 돌아서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돌아서라 할 때에 돌아서지 안 해도 너는 파수꾼의 직책을 했기 때문에 그가 자기 죄 가운데 죽어도 네게는 책임이 없다 했습니다.
뭘로 돌이켰습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돌이켜서 하나님 말씀은 칼입니다. 칼입니다. 이 칼로 찌르면 죽습니다. 옛사람이 죽습니다. 새사람만 살아납니다. 그러기에 좌우에 응한 날선검에 권세를 믿고 행하는 사람들은 다 승리를 하고 성공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영감과 이 진리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을 잘못된 것은 다 찔러서 죽이서 다 파괴해버리고 다 뽑을 수 있고 멸절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진리입니다.
내가 엊저녁에 한마디 들었는데 어쩌든지 거짓되면 나는 지도받지 않고 교훈받지 않겠다 옳고 바르게만 하면 나는 거게 복종하고 섬기겠습니다 딸겠습니다 고거면 돼. 그거만 그만 약속하면 약속 다 했어. '나 봐라 이거 옳으냐?' '하나님 앞에 어느 게 옳으냐고 판단해라' '아 요게 옳습니다.' '그러면 어째야 되지.' '아 고대로 하겠습니다.' 교인도 옳고 바른 것을 따르려고만 하면 살았습니다. 살수있습니다.
옳고 바르지마는 만은을 붙이면 저는 망합니다. 교인들은 다 뭐라해도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따를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도 백성들은 그래 따를라고 했는데 제사장 서기관들은 옳고 바르지마는 그러면 자기 위신 떨어지기 때문에 그 길을 못하고 옳고 바르지마는 그걸 따르면은 자기네들 해 놓은 것이 다 깨지고 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자 복을 해야 될판이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들을 세웠습니다. 자기를 세울려면 주님을 팔아 죽이는 것이 그것이 결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울산교회는 어쩌든지 금요일 날 많이 오라 해. 많이 오면 여러분들이 삽니다. 사요. 살면 하나 살면 둘 삽니다. 둘 살면 셋 살고 무엇 때문에 못 온다 못 온다 하는 그게 우상이라. 사는 길이 있는데 그거 안하고 뭐할긴고 자기 바쁜 그것은 자기 현실 아닌가 현실에 그 끌린 것 아닌가 그 피동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거는 안 되요. 다른 사람 손해르 끼치면 그것을 해약을 하고 해야 되는 것이고 자기 손해는 자기 소유와 몸의 생명을 주를 다라가기 위해서 다 받히기로 산제물로 받혀놓고 사는 게 예수 믿는 것인데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는 자기 이해는 가질 수가 없어. 다른 사람 이해는 남이기 때문에 그건 안 돼. 남을 침략이기 때문에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