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2:54
성화구원의 어려움
1984. 4. 29. 주일오후
본문 : 마가복음 10장 23절∼31절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성경에 재물이라고 이렇게 표시한 것을 단순히 돈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이치를 말한 것이 성경입니다. 참된 이치를 말씀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재물이라고 이렇게 표시한 것은 물질이라는 말인데 물질을 그중에 알기 쉽게 재물로 하나 표시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라고 하면은 우리의 마음도 물질이요 몸도 물질이요 마음과 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물질입니다. 마음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이나 지혜나 세상 지식 지혜 사상 그런 거 다 물질의 운동들이요 물질의 작용들이요 요소들입니다. 사람에게는 물질 아닌 것은 영에 속한 영뿐입니다.
오전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다 영생을 가진 것이요, 또 완전한 것들이요 영원 불변의 것들입니다. 우리의 기본구원인 영의 구원은 우리는 상관도 없이 순전히 대속의 객관 은혜로 됐지마는 이 대속의 기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기본구원을 어떻게 그가 실상으로 입고 믿고 의지함으로 그 효력을 보느냐 하는 것이 건설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받은 그 기본구원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칙으로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힘 있는 대로 기본구원을 힘입어서 행해 나가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건설구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구원을 얻을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건설구원을 이룰라고 노력하고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여기에 말씀하신 것은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죄 아래에 있는 것이요 땅에 속한 것이요 대속을 입었지마는 아직까지 영원 완전한 것으로 변화함을 받지 못하고 변화함을 받을 수 잇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든 우리의 물질로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가 되어서 우리의 이 몸의 형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서 그때 죽지도 늙지도 쇠하지도 낡아지지도 않는 몸으로 변화를 받고, 우리의 이 마음은 믿는 자가 세상을 떠날 때에 변화받은 거 만치 그 영이 입고 하늘나라로 갑니다. 갔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영과 마음이 주님과 같이 와서 자기의 두고 간 그 몸을 입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 몸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될 때에 다 부활은 받기는 받지마는 그 기능이 성화된 사람은 성화된 기능과 몸이 부활할 때에 같이 그 기능도 부활하고 성화되지 못한 기능은 둘째 죽음의 사망으로써 다 그리스도 심판에서 정죄받아 다 유황불 구렁텅이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으로서도 그 기능이 첫째 사망에서 법적으로 대속의 구원을 받은 자가 두번째 대속을 현실에서 기능이 벗었기 때문에 벗은 기능을 대속을 벗은 기능은 둘째 사망의 해를 다시 받아 가지고 유황불못에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고 하니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쉬우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어려운 것이 여기에 보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말한게 아니고 어렵기를 절대 안 된다' 는 것을 말해 놓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법적 구속을 받은 사람이지마는 그 자기의 기능이 영생하는 기능으로 성화를 입는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기능이 영생하는 기능으로 성화되는 것은 참 어려워서 사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그 어려움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어려움이 그렇게 어렵지마는 낙망할 것은 없는 것은 이 어려운 이것을 하나님으로서는 능히 하실 수가 있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 선포하시기를 우리가 기도하면 다 들어서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그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는 낙망할 것 없고 기도로서 가능 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성화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어려운가? 그저 아무나 따나 자기 주관의 마음으로 성화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화도 때는 반드시 큰 시련을 겪어야 한다. 큰 시련을 겪으는데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겪으는고?,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굼벵이가 매미로 부화가 되면 땅 속에 있지 안하고 공중에 날아다니면서 아주 영광스러운 그 매미로 부화가 됩니다. 그 부화가 될 때에는 굼벵이가 매미로 부화될 때에는 그가 태양빛에 쪼여서 땅 속으로 들어갈라 해도 붙들려 매여서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래야 죽지는 안하고 이렇게 그 불에 굽혀 가지고서 커다란 굼벵이가 불에 햇빛에 굽혀서 마르고 말라 가지고서 이제 못 견뎌서 등어리가 열 십자로 탁 갈라지고 바짝 마른 그 가운데에 남아 있는 그 생명이 부화를 해 가지고 매미가 되는 것처럼 이런 곤충들도 그것이 부화를 할 때에 변화를 받을 때에는 그런 큰 어려움의 시련을 통과해야만 그게 변화가 돼지지 그런 것이 없이는 변화가 되지 안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 사망과 저주와 죄와 악령과 이 세상에 땅에 속한 것이 완전한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하늘에 속한 영생하는 것으로 성화가 될려고 할 때에는 큰 시련이 있다. 그 큰 시련이 있기 때문에 그시련을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감당할 자가 없다. 하나님은 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이 해 주시면 된다.
그런고로, 그런 시련이 있는 것을 깨닫고 그 어려움의 시련을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그 어려움은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 하나님만은 하실 수가 있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구하여서 그분이 도와 주시는 그 은혜로서만 이 불 같은 시련 변화 전 시련. 변화를 일으키는 그 시련. 불시험 시련 그 시련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길 수가 있다.
그러면, 그 시련이 무슨 시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시련인가? 그 어려운 시련은 세 가지 시련인데 하나는 의지하는 것이요 하나는 바라보는 것이요 하나는 복종하는 것인데, 우리가 땅에 것을 땅에 있는 그대로 의지하고 살아서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실상은 내게 내 요소에 몇 부분은 이것을 의지하고 저것을 의지하고 전부 땅의 것들을 의지한 그것들이 종합돼 가지고서 내가 현재에 주관적 위로의 유지도 되고, 또 주관적 감각의 유지도 되고, 또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것이 유지도 되어지고, 바라보는 것도 또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라보는 것도 땅에 수 많은 지저분한 것들을 다 바라 보는 그런 소망과 또 의지하는 것도 그러고, 또 복종하는 것도 그러하고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 이런 모든 심신의 기능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의지하고 바라보고 소망하고 복종하는 것이 소망하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대상이 다 땅에 있기 때문에 땅에 있는 그것은 하늘나라로 옮겨 갈 수가 없고, 그것이 영생하는 완전한 것으로 부화되지를 못하고 다시 말하면 성화되지를 못하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땅에 속했기 때문에 땅의 것의 그 어떠함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변동되어지기 때문에 결론으로 말하면 땅의 것이 없어질 때에 그것들도 다 없어지고. 땅의 것이 변동 될 때에 그것들도 땅의 변동될 것이 변동될 때에 그것들이 속하기를 땅에 속했고, 또 땅에게 매여 있고, 땅의 것들이 그를 주관하고 있고, 또 거기에 매여서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 유지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 죽음에 속해 있는 것이니 그것이 성화가 안 되기 때문에 이 성화를 받 을라고 할 때에는 의지를 바꿔야 되고 의지를 바꿀라면 소망이 바꾸어져야 되고 의지와 소망이 바꾸어질라고 하면은 또 피동이 바꾸어져야 되고 이러니까 의지를 바꾼다는 것 소앙을 바꾼다는 것 피동을 바꾼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사립으로서는 이것을 도무지 절대 불가능한 자이라는 것을 여기에 똑똑히 말해 놨습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서 모두 놀라면서 다 근심 하면서 이래 가지고야 누가 구원 얻을 사람이 있겠느냐 다 그들이 너무 두렵고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이라 하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다 낙망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면 고렇게 되도록 요런 현실을 만나 가지고서 요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영원 전 예정한 것이 순서대로 나타난 것이니까 그것이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미리 예정한 하나님의 실물 교재로서 이런 것을 이런 형식을 만들어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그 구원 역사의 한 예정 순서요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화되는 것이 그만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성화된다는 것이 어렵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 또 어려우나 우리로 더불어 약속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도하면 된다 하는 이것을 알고 소망을 가지는 사람이 돼야 되고, 또 어려우면 이제 어떻게 해서 어려우냐 왜 어려우냐 무엇이 어려우냐? 어려운 것은 이제까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땅의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은 알지도 못하던 우리들인데, 대대로 의지한 그것이 벌써 유전적으로 꽉 배어 가지고 있고, 온 세상이 땅의 것들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거기에 피동돼서 사는 것으로 안팎 전체 가 다 그와 같이 되어 가지고 있는 것들인데 이것이 변하여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히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이것으로서 변화가 되어진다는 것은 이것은 굼벵이가 매미되는 그 부화보다도 이것은 참 인간으로 서는 절대 안 되는 그런 어려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꾸 들어서 알면 쉽습니다. 무엇이든지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는 것이 힘입니다. 뭐 어떤 그 작은 일이라도 알기 전에는 그게 어떻게 어려운지 아무래도 모르는데. 알고 나서 보면 쉽습니다. 그 아는 사람은 다 그게 쉽고 모르는 사람은 다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도 아는 것이 그것이 힘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나갈 때에 평소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리면서 이것도 의지하고 저것도 의지하고, 이것도 바라보고 저것도 바라보고, 이것에게도 상호 피동되고 나는 그에게 피동하고 그는 나에게 피동하고 이리이리 해서 어물거려 가지고서 사는 것이 세상 피조물 저거끼리 이렇게 어물 거려 어물거려 가지고서 사는 것이 세상 생활이기 때문에, 모든것이 그 생활이니 이것이 변화돼야 되기 때문에 평소에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지 물질을 의지하는 것인지 인간을 의지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인지 인간을 물질을 바라보는 것인지, 하니님에게 복종인지 어떤 피조물에게 복종인지 그것이 잘 구별이 안 납니다. 여기에 복종이 저게 복종도 되고 이거 의지가 저거 의지도 되고 둘이 일치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서로 그 상충이 되지 안하고 대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 나 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때는 어려움이 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려는, 하나님은 아무래도 이것이 완전히 변화가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차차 차차 하나님을 알게 하셔 가지고서 그의 성장에 따라서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우리를 연성시켜 갑니다.
자, 이제 의지라고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라면 요거 의지하는 것을 버려야 되겠고 요걸 의지할라면 하나님 의지하는 걸 버려야 되겠고 요렇게 시작할 때에 그때는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이까짓 거 쯤이야 땅에 있는 거 이거 의뢰하던 거 이거 버려도 된다. 이거 의뢰하던 거 버려도 된 다 하고서 하나님 의지하는 거로 쉽게 바꿉니다.
그러면, 쉽게 바꿔서 한 번 두 번 자꾸 바꾸어 대면은 아, 하나님 의뢰 하는 것으로서 바꿔도 그 뭐 그렇게 큰 낭파는 안 당하고 괜찮구나 이래 가지고 하나님 의뢰하면 점점 성장시켜 가지고서 차차 차차 그래서 말하자면 이제 올라 가가지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면은 이거 의지를 버려야 되고 이거 의지할라면 하나님의 의지를 버려야 될 때에는 그게 뭐 손 해가 사소한 이해 관계가 아니고 그 문제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마지막에는 생명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소유 문제 그 커다란 문제가 거기에 매달려 가지고서 이거 하나님 의뢰와 땅의 것을 의뢰하는 여기에 그 결과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쉽게 의뢰하는 것을 바꾸지 못해서 번연히 하나님 의뢰해야 할 줄을 의지해야 될 줄을 알기는 알면서도 마음에 고민하고 애를 써고 번민을 하다가서 이제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이걸 의지해도 당장에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를 해서 멸하치는 안하지마는 땅에 있는 이거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 의지한다면은 당장에 벼락 같은 그 불이 떨어질 터이니까 이거 안 되겠다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그 의뢰하는 것을 그만 바꾸지를 못하고 내나 땅에 속한 사람과 같이 그와 같이 돼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이제까지 공들인 것이 그것이 이제까지 공들인 것이 실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패가 되고 말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서 끝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의뢰하는 것을 바꾼 사람보다도 바꾸지 못한 사람이 바꾼 사람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결론을 지워 놨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의뢰 하는 것을 바꾸지 못했다, 바꾸지 못했으니까 바꾼 사람은 안심하고 바꿨으니 됐다 하지마는 바꾸지 못하고 자기가 참 결심하고 기도도 했고 다른 사람에게 말도 했고 그렇다고 인정돼 가지고 있으니 막상. 그런 큰 결과의 파동이 일어나는 참 산벼락같은 그런 일을 닥치고 보니까 그만 의뢰를 바꾸지 못하고 땅에 있는 것을 의뢰하고, 하나님 의뢰하는 것을 할 수 없어 '하나님 미안합니다.'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 의뢰를 버리고서 땅의 의뢰 그것을 배척을 못 하고 그것을 의뢰하는 일을 했습니다.
했으면 그 사람에게는 항상 고민이요 번민이요 고통이 되어서 이제 넘어졌으니 참 원통하고 분개해서 마음에 고민해서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또 자기가 노력해서 회개를 하고 이렇게 하면 그 의뢰의 그 단계가 의뢰를 바꾸지 못한 그것을 인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기도하고 후회하고 회개하고 했던지 그 다음 위에 단계의 더 큰 의뢰에 가 가지고는 '이제 죽어도 나는 의뢰를 나는 바꿀 기회 있으면 바꾸지 하나님 의뢰하지 땅의 것을 의뢰하지 않겠다' 이렇게 해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그런 희망의 길이 있기 때문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이번에 패전한 자가 이 다음에는 앞선 그 승리자가 될 수가 있다 하는 것을 마지막에 결론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 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멸망의 것이 영원 불변의 영원 완전의 것으로 이렇게 성화되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유한한 것이 무한의 것으로 변하는 것이 불변의 것으로 이렇게 변화되는 데에는 변화 과정에 있어서 큰 시련이 있다. 그 시련이 있는데 그 시련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부르짖어서 구하면 구하는 자마다 다 하나념이 주신다. 또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시행을 하겠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이 계약을 인해서 우리는 낙망에서 소망의 돛을 달고 항해할 수가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그 성화 과정이 어려운 시련이 있다는 것, 이 어려움은 하나님의 도우심만 입어서만 통과할 수가 있지 도우심을 입지 안하고는 통과할 수 없으니 그 기도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습니따. 기도로서 할 수 있는 거.
그러면, 이렇게 어려움을 기도로 된다 이래 놔도 어려움이 왜 어려움인지 그 어려움의 그 구체적인 그 어려움의 실상을 우리가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실상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의지를 바꿔야 되고 소망을 바 꿔야 되고, 복종을 바꿔야 돼서 어떤 피조물에게 피조물에 복종이냐 창조주에 복종이냐? 이 둘을 놓고서 비중을 할 때에 그것이 이 세상으로 더불어 간음한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에게 복종할 때에 이것이 본부(本夫) 하나님에게로 향하여 가는 근본 주인에게로 향하여 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그 의지를 바꿀라고 하면 소망이 바꿔져야 하고, 내가 소망은 이것에게 소망하고 있으면서 이것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소망하는 데에 의지하게 됩니다. 소망과 의지와 복종 이 셋은 일은 다른 일이지마는 실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이 세 가지가 바꾸어져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그 어려움은 기도로서 가능하게 된다 그것을 여기에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왜 바꾸기가 어려우냐? 바꾸기가 어려운 그 이유는 내가 땅의 것을 의지하던 것을 하나님 의지로 바꿀라고 하니까 땅의 의지하던 그것도 내게 괼요하고 중요하고 필요하고 중한데, 의지하는 거 하나님 의지할라 하면 땅에 의지하던 것이 다 절단이 나 버리기 때문에 땅에 의지하는 것이 절단이 나고 땅에 바라보던 것이 절단이 나고 내가 땅의 그 피동 되던 그것이 절단이나 내가 그거 득으로 살았는데, 내가 의지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나라가 살았고, 바라보는 그것으로 인해서 살았고, 또 내가 거기에 속해 가지고서 피동되는 그것으로서 내가 살았는데 그것이 다 없어지게 되면 내 일이 낭파되기 때문에 보이지도 안하는 하나님 그분 한 분을 성경에 선포돼 놓은 그 한 분을 내가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고 이제 눈에 환하게 볼 수 있고 당장 현재에 효력이 있고 당장 현재에 절단이 나면은 자기가 절단나는 이런 적극성 있게 현실적으로 이렇게 당장 효력 있는 이것을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모실려고 하면은 이것을 다 포기해야 되고 이거 다 모든게 절단나게 돼 놓으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버리면 그까짓 거 절단나든지 말든지 버렸다 하면은 되지마는 버리면 낭파되기 때문에 버릴 수 없고, 버리면 자기가 큰 절단 난다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나님은 버려도 그거는 버릴 수가 없어서 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는 지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이 말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의지요 하나님 바라보는 거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나타나시고 영감으로 나타나셔 가지고서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나 이 복음의 신구약 성경 진리를 위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 말이오. 진리를 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칙을 위하는 것은 그 법칙의 입법자인 하나님을 내가 상대해서 대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이 말씀을 우리에게 덧붙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니까, 이 마귀란 놈은 자꾸 혼란시키고 착각하게 만들고, 또 오산하게 만들고 복잡하게 이렇게 흔들어 가지고서 그만 술 취한 사람이 정신 없는 것처럼 막 흔들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서 그만 모든 것이 혼돈돼서 그것을 간추려서 똑똑히 계산해서 따져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똑똑히 따져보면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그 말은 하나도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해 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그런 것들을 버릴라고 하니까, 하나님 모실라면 그것을 다 내놔야 되고 버려야 되고 이러니까 그게 당장에 자기에게 효력이 있는데, 당장에 땅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 효력이 있고 없으면 큰 낭파 되겠고, 당장에 하나님보다 자기에게 크게 효험이 있고 유익이 있고 당장에 직접 효력이 있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인데 하나님과 진리로 인해서 그런 것을 버린다는 것이 이것이 도무지 여간 간을 가지고 여간 간 가지고는 죽을 각오하지 안하면 버릴 수가 없다 그말이오.
없는데 성경에 말하기를 '겁내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 진실은 어느 말씀이 진실 아닌 말씀이 없지마는 우리가 거짓되기 때문에 한번 다져서 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손해 본 자는' 나 때문에 그걸 가지고는 나를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는 나를 딿지 못하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는 내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 계명을 그것을 가지고는 나를 영접해서 내 하나님으로 삼지 못하기 때문에 나 때문에 이 복음의 진리 때문에 무엇이든지 손해 본 자는 잊어 버린 자는 손해 본 자는 할 수 없어 나 때문에 그것을 아깝지마는 내어 놓은 자는 세상에서 여러 배 백 배를 내가 준다! 말씀했습니다.
요것을 믿어야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으로 마귀 그놈을 박살을 냅니다! 믿음으로 물질계와 영계를 우리가 점령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저 믿고 살자는 그 썩은 믿음이 아닙쩌다. 절대자이신 그 분을 믿는 것이요 그분의 계약을 믿는 것이요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이요 그분의 절대자의 완전성을 믿고 신실성과 진실성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 배 백 배를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가 위협을 주기를 '아, 너 나 의지하지 안하고 나 바라보지 안하고, 너는 나 바라보고 사는데 나는 바라보지 않지 않느냐? 네가 어데 나 의지하느냐? 네가 나에게 어데 복종하느냐? 하나님이면 제일이지. 그러면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네게 대해서 나도 나할 대로 네게 박해도 가하겠고 네 직분도 빼앗겠고 너를 형도 주겠고 너를 가두기도 하고 안 되면 너를 사형도 시킬 것이고' 오만 협박을 다하나 참새 한 마리도 생명의 주권은 제까짓게 없다! 없다! 요걸 믿으십시오. '지극히 작은 거 하나 까지도 주권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개별 개별의 모든 것을 내가 총 주권하고 있다. 공간을 내가 주권하고 있고, 시간을 내가 주권하고 있고, 모든 움직임의 움직임의 움직임을 주권하고 있고 인간의 심리를 주권하고 있고, 생사를 주권하고 있고, 모든 존재의 움직임을 다 내가 주권하고 있다. 내게 주권이 있다. 이런데 마귀란 놈이 나에게 지음받은 그 마귀와 모든 지음받은 것들 제 마음대로 제게 무슨 주권이 있는 체로 이래 협박을 놓으니까 협박에 떨어지는 것은 너희들이 내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협박에 떨어지지 내 말을 믿으면 협박에 떨어질 이유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백 배나 얻는다 백 배나 주겠다. 이러니까 마귀의 협박에 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사람들이 다 이래서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적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자 하지마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할 수가 없어. 믿음을 버린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학사하면은 그대로 믿음 버리는 것이 잘되는 줄 알고 더 믿음 버려야 될 터이니까 할 수 없고, 아, 다니엘도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에 하나님이 일할 수 있었어.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이니라. 다니엘 이 믿음을 가지고 나가니까 하나님의 일거리가 생겼다 그말이오. 믿음을 가지고 나가니까 사자의 입을 봉할 일거리가 생겼어. 사자 구덩이에서 살려낼 일거리가 생겼어. 믿음을 가지고 나가니까 다리오 왕을 다니엘 앞에 복종을 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일거리가 생겼어. 믿음을 가지고 나가니까 다니엘의 모든 원수를 다니엘 앞에 사자 구덩이에 집어 넣어서 다 몰사 시킬 수 있는 이 복수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거리가 생겼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 협박에 그 유혹에 떨어질 이유가 없이 우리는 이게 바꾸 어져야 되니까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해져야 되고 피조물에게피동되는 것이 하나님께 피동되야 되고, 피조물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고, 모든 피조물의 안보를 받던 것이 하나님의 안보로 바꾸어져야 되고 이렇게 모든 것이 바꾸어져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옳겨지는 것이니까. 바꾸게 될 때에 사람들이 왜 그걸 못 바꾸고 마느냐 하면은 이제까지 의지하고 바라보고 복종하던 그것이 크다고 하나님보다 크다고 생각할 때에 안 되고, 그 하나님은 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멀리 있고 하나님은 배반해 봤자 당장에 이놈 하고서 매를 때리지 안하지마는 이거는 당장 배반하면 당장에 매가 오고 당장에 절단이 날 거 같기 때문에 이거는 배반 좀하고, 속으로는 배반을 안하고 속하기는 속하지마는 이놈 언제 없애 버리면 될고 없애 버릴고, 밉기는 미워도 꼼짝은 못하고 그에게 복종을 하지마는 '안심하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것 이 피기는 법칙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계약과 능력을 믿고서 나가면 그것도 여라 배 백배를 해 주신다. 백 배를 네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염려 하나도 하지 말아라 주님이 이렇게 위로를 우리에게 했습니다.
이 거짓말이나 뭐 에누리한 말씀이 아니요 그대로요. 우리가 큰 것은 믿지 안하고 조그만한 것을 믿는데 조그만한 거 믿어 가지고 신앙의 경험과 체험이 없이는 예수 못 믿습니다. 조그만한 데 믿어보니까, '아. 과연, 과연 옳습니다.
당신은 신실하십니다. 당신의 계약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꾸 경험하고 체험해서 신실한 사람은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해도 아브라함은 기뻐 즐거워 했어. 그 이삭의 혈육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의 수와 같이 많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 이삭을 번제로 불에 태워서 재를 만들면 잿더미 가지고서 아이 나올 수 있도록 사람으로 다시, 개조해서 살아나게 하신다 하는 그거 믿으니까 그것 밖에는 답안이 안 온다 말이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죽음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낼 줄을 믿었다 그말이오.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약을 믿으니까 거기에서 새로운 지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서로 자라가니까 사람 볼 때는 산벼락같은 그 참 기막힐 일이다 싶으지마는 아브라함에게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고 날마다 가는 그 길이 그 길이요, 날마다 하나님이 모르던 거 보여 주시고 새 것 보여 주시고 새 일 해 주시고 또 새 것 주시고 당신이 이래라 할 때에 인간이 볼 때에는 실패했는데 당신 하나 때문에 성공이 되고, 인간이 볼 때는 손해라 했는데 나중에 해 보니까 유익이 되고 이러니까 고만 그것이 꽉 배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뭐이든지 유익이요 참됨이요 신실이요 그 대로 이루어진다.
이러니까, 가나안을 삼 대에 준다고 약속을 하고 안 주셔도 세상을 떠날 때 죽음 때까지 안 주는 거 보니까 이젠 안 줄란갑다 하지 안하고서 죽을 때에 떠날 때에 이보다도 더 좋은 영원 불변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나에게 주실라고 이제 이 가난 없어질 가나안을 주지 안했구나. 믿고 떠났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고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에게 무궁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늘나라 아브라함이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기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꾸기 어렵다는 거 요것을 기억합시다. 며칠전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 해서 그 말씀을 우리가 해석할 때에 두 차지 죽음에 우리가 연합해야 되고 한 가지 부활에 연합해야 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한다는 것은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이제 오늘 바꾸기 어렵다는 거 이거 이거 바꾸기 어려운데, 이거 바꾸기를 입개 바꾸는 사람은 뭐이냐 하면은 아야 뭐 내가 바꾸는 거야 몸 내어 놓으라 하면 몸 내어 놓지 자유 내어 놓으라면 자유 내어 놓지 생명 내어 놓으라면 생명 내어 놓지 소유 내어 놓으라면 소유 내어 놓지 뭐이든지 내가 바꾸는 것 만큼은 틀림 없다: 의지를 바꿀 때에 소망을 바꿀 때에 나에게 내 능동을 바꿀 때에 나에게 원동 그 능동을 바꿀 때에 그때에 세상에게 나는 피동된 세상으로 능동자룰 삼았고 그를 소망하고 그를 의지했는데 이것을 이 둘 중에 이거냐 저거냐 이렇게 할 때에 그 바꾸기가 어려워서 모두 뻘뻘 떨고 있는데, 바꾸기가 어려워서 뻘뻘 떨고 있는데아야 바꾸는 이 일에 대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내어 놓고. 다 버린고 바꾸기로 바꾸는 거기에 대하여 바꿀 때야 뭐 그런 거 하나도 돌보지 안하고 그런 것을 다 내어 눙는 사람에게는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어. 바꾸는 것이 문제가, 뭐 지체할 것이 뭐 있는가? 마귀란 놈이 그래 가지고 시험도 안해요.
문제가 없어.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그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 돼야 된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삐뚤어진 일을 할라는 자. 삐뚤어진 일을 하는 자 하나님 의지보다도 세상 의지하는 고게 삐뚤어진 거라 말이오. 하나님 바라보는 것보다도 세상 바라보는게 삐뚤어진 거라 말이오. 하나님에게 피동 된 거보다도 세상에게 피동 되는게 삐뚤어진 거라. 삐뚤어진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 삐뚤어진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 내 생명을 바쳐서 결사적으로 죽이는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나 그 놈을 죽이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은 자가 주의한 가지 죽으심에 죽이기 위해서 죽이는 일에 생명 내 놨다. 죽이는 그 일을 생명 바쳐 투쟁하다가 세상을 마치겠다. 죽이는 일에 생명을 다해서 투쟁하고 살리는, 일에 생명을 다해서 살리는 일에 투쟁하고 이 두 가지 죽음의 투쟁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생명이 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자랍니다. 이것 속에 생명이 자라지 이거 없는 데는 생명이 자라지 못합니다. 영생하는 생명이 자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그리 가면 넓어지고. 내나 하나님의 도는 하나입니다.
'백 배를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요게 문제입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지금 이 백 배를 백 배를 하나님이 주시고 백 배를 받을 수 있는 이 자격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은 백 배를 주실 수 있고 자기는 백 배를 받을 수 있는 이 자격을 마련했는데, 이 자격을 마련할 때에 어떤 것을 거쳐서 자격을 마련했습니까? 큰 핍박을 거쳐서 자격을 마련했습니다.
알겠습니까? 큰 핍박을 거쳐서 자격을 마련했습니다.
참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하고 그참 징그러운 핍박을 거쳐서, 아. 이의지하는 것을 땅에 의지하는 것을 이것을 바꿔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할라 하니까 그 어려움이 조그만 어려움이 아니라 그 어려움이 조그만 어려움이 아니라 땅의 것을 바라보는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볼라 하는 그 어려움이 보통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라. 땅의 것을 복종하는 그 복종을 딱 떼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이 둘이 서로 비중을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이 주격을 바꿀라고 이와 같이 할 때에 얼마나 어려움을 끼쳐 참 아주 지긋지긋하고 다시 그런 일 닥치면 어쩔꼬 하는 이런 어려움을 겪어서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 성화도 받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축복해 주실 수가 있었고 축복 받을 수 있는 자가 돼졌는데, 그만 그 다음에는 축복을 그만 그만 주면 될 터인데 그만 축복을 그저 주면 될 터인데, 또 축복 줄 때에 그 축복이 그런 어려움을 통해 가지고서 축복이옵니다. 여러분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또, 그 어려움을 통해 가지고서 축복이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고 어려움을 통해서 또 축복을 줍니다.
자, 네가 어느 거 의지할래 어느 거 의지할래? 내나 그 싸움 싸워 가지고서 축복 받을 수 있는 그 자격증을 딱 따고 나니까, 또 축복 준다고 하시니까 축복 주시는 것이 또 어느 거 의지할래 둘 중에 어느 거 의지할래 어느 거 의지할래? 이래 가지고서 또 어려운 장을 만들어 가지고서 이것 보다 하나님 의지하겠습니다. 하는 고 하나님을 이것보다 하나님 의지합니다. 이것보다 하나님 바라봅니다. 이것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이것보다 라는 이것을 놓고 하나님에게 의뢰, 복종, 소망할라 하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걸 가리켜서 핍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순서 경로를 통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가지고 주셔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것이 되지 마귀를 의뢰하는 것으로 받으면 그것이 화근이 되기 때문에 그걸 줄 수가 있습니까? 알아 듣겠습니까? 줄 수가 없어. 이 핍박을 인간들이 볼 때에 핍박이지만 인간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핍박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을 다 믿는 데는 그게 의례히 정한 원상적으로 되는 것이요 정상적으로 되는 것이요 합법적으로 되는 것이요 진리적으로 되는 것이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마는 우리가 꺼꾸로의 지식 그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마찰이 되고 여러가지의 심중이 들고 또 난제가 생긴다 그말이오.
그러나 생기거나 안 생기거나 당신이 당신의 진리의 법대로 해 가지고 줘야 우리에게 완전을 줄 수 있지 우리 이 꺼꾸로 된 자에게 위로나 주기 위해서 꺼꾸로인 걸 주면은 감사하다 하고 쉽게 받지마는 그거는 나중에 죽음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줄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해가 되십니까?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는 언제든지 피조물 부인이 쉽습니까? 쉽지 않소. 피조물 부인 당신 인정 고걸 통해서 주십니다. 피조물 소망 하나님 소망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피조물 소망을 버릴려고 하니까 요게 핍박이라, 요게 어려움이라. 피조물 소망 버리고 하나님 소망을 확대해 준다 그말이오. 피조물 복종하면은 얼마나 좋아할 것입니까? 피조물 복종 하나님 복종 요 둘이 꼭 맞히도록 외나무 다리를 만나 가지고서 피조물 복종을 버릴려 하니까 참 인정상 할 수 없는 일인데 고 어려움을 꼭 만들어 가지고서 피조물 복종 버리고 하나님 복종하는 고것을 딱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시니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그래 주셔야 그게 진리로 온 것이고 완전으로 온 것이요 가치 있게 있는 것이요 그것이 복되게 온 것이지 그렇지 안하고 온 것은 복되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요걸 우리가 깨달읍시다.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 말은 이렇게 된 것은 다 성화 됐다 그 말이오. 이렇게 되면 성화 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기능은 부분적 기능은 다 성화가 됐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 무궁토록 자기의 기능입니다. 자기의 기능이요. 이렇게 현실에서 자기의 기능이 진리의 것이 된 하나님의 것이 된 하나님과 하나된 진리가 하나된 요 하나된 것이 아닌 것은 진리가 하나 되지 안하면 불법과 하나됐지 하나님과 하나되지 안하면. 마귀와 하나됐지. 그런 것은 영생을 가질 수가 없어. 이렇게 된 것은 내세에 다 영생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영생화된 것이 완전화 됐기 때문에 내세에 부활 할 때에 그 기능은 다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겪어도 기어코라도 바꿔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섬기고 한 주인을 버려야 되는 이런 일을 왜 어려운데 이런 일 하겠느냐? 이 어려운 이유도 이 일을 해야 되는 것은 왜 해야 되느냐? 해야 될 이유는 그 결과가 좋고 또 안하면 안되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하면 무엇이 좋은고 그 무엇이 좋은고? 그러면 우리의 기능이 성화가 됩니다. 우리의 기능이 성화가 되기 때문에 좋습니다. 또 그렇게 할 때에 관련된 모든 만물도 다 좋아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내가 그렇게 지킬 때에 그 지킴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나 하나가 지칠 때에, 부모네들은 원망하고 처자도 원망하고 형제도 원망하겠지, 자녀들도 원망하겠지. 그렇지만 나 하나가 그렇게 지킬 때에 나로 인해서 자녀도 백 배 아내도 백 배 부모도 백 배 전토도 백 배, 그 말은 가치적으로 백 배라 말은 인간의 만수의 만수이기 때문에 측량 못할 다수를 말합니다. 가치적으로 크게 달라져 나 하나가 그렇게 지킬 때에 내 부모가 가치적으로 부모의 권위적으로 부모의 가치적으로 부모의 인격적으로 지능적으로 행복적으로 달라지고, 또 그 효과적으로 달라 효과적으로 달라져.
가치적으로 달라지고 권위적으로 달라지고 효과적으로 달라져 모든 것이.
그렇지요? 부모도 그 부모가 다 같은 부모이지마는 한 부모가 다른 사람 백 부모보다 나은 사람도 있고, 그 부모는 다른 부모의 만분지 일도 안 되는 부모 있다 그말이오. 부모가 자기에게 큰 해독이 되는 것도 있다 그 말이오.
이런데, 백 배나 준다 그말은 내게 백 배나 백 배나 보배로운 부모 백 배나 실력 있는 부모 참 가치 있는 참된 부모 그 부모가 된다는, 그러니까 나 한 사람이 요렇게 바꾸는 요 일을 내 자체가 성화되는 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바꾸게 될 때에 관련된 인간, 관련된 만물 그 전부도 다 이렇게 좋아지니까 바꿀 가치가 있습니다. 내 자체는 영생으로 자체는 성화되지, 성화될 때에 관련된 모든 것도 이렇게 백 배나 그 모든 승격이 돼지지, 그 모든 것이 참 돼지지 이러니까 힘이 들어도 핍박이 심해도 고난 이 심해도 갖출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그말이오.
그 다음에 마지막에 결론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31절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된 자 많으니라' '많으니라' '그러나 먼저된 자' 애를 써서 열 사람이 가는데 아흡 사람은 다 낙제해 떨어져 바꾸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한 사람은 바끈어서 의지를 바꾸고 소망을 바꾸고 자기가 피동되는 그 능동자를 바꾸고 소속을 바꾸고 이렇게 바꿨는데, 한 사람은 바꿨는데 아홉 사람은 바꾸지 못했어. 이러니까 바꾸지 못했다고 낙망하고 그럴 것이 아니라 바꿨다고 안심하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먼저 바꾼자 그 자 잘됐는데 바꾸지 못한 그 자가 바꾸지 못함에 마음에 그 통분과 갈급을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갖추면 먼저 바꾼 자보다 횔씬 더 큰 것을 바꾸고 큰 데에 나아갈 수 있다. 패전이 큰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 범죄가 큰 의도 가져올 수가 있다.
이러니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를 세 번 부인한 것이 그것이 들어서 그 후에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어느 사도들보다도 더 높이 섬겨서 순교를 당하되 순교만으로서 만족되지 안하고 주님이 순교하신 그와 같이 나도 어떻게 바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겠느냐? 나는 꺼꾸로 못을 박아 주시옵소서. 순교하면서 주님같은 그 죽음을 할 수 없어 그보다 더 천한 죽음을 하겠다고 하는 그것이 먼저 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중에 성공을 이룬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 말하면 믿는 사람은 겸손히 겸손히 힘쓰면 죽는 날까지 낙망할 것 없이 성공이 앞에 있고, 어떤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만족하고 교만하고 안심하면 그에게논 패전이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아직까지 겪지를 못한 사람들입니다. 저 지난번에 손 한번 들어보라 하니까 6.25 어려움을 신앙으로 싸워 본 사람들을 손 들라 하니까 몇 사람 안 되고 왜정 말년에 그 신앙으로 싸워 본 사람들을 손들라 하니까 뭐 없어. 둘인가 서인가 밖에는 없어. 이러니까 우리는 음달에 자란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음달에 자라서 태양빛의 연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늘에서 자란 우리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당하면은 어찌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비록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이렇게 무슨 지역적으로나 어려움 당하는 그 어려움을 우리가 당하지 안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오지 안했지마는 공산주의의 독침 앞에 하루 열 번도 나타나 볼 수 있습니다. 독침 앞에 열 번도 나타나 볼 수 있고 우리를 감옥에 집어 넣어 놓고 사형한다고 하는 그 사형 선고를 열 번도 받을 수도 있고 또 지하실에 갇혀 놓고서 가죽도 '벗겨볼 수도 있고 우리는 눈도 빼어 볼 수가 있고 빼어 볼 수 있다 그말이오. 우리가 지식으로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한다 하고 나는 눈이 빼인다 하고, 저는 이발할 때에 면도할 때에 그런 기도를 한 번도 안 뺍니다. 면도할 때에 '주여 내가 어떤 그 악의 세력에게 붙들려 가서 칼로 가지고서 이 피부를 전부이 가죽을 다 벗기면 그때에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때에 내가 아픈 걸 견디지 못해서 망령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늘 그 기도를 합니다. 그럴 때도 주를 찬미하게 해 주옵소서.
말하기를 제가 그거는 깨달았어. 운동장에 개싸움 한다는데 개싸움 하는데 한번 가봐야 되겠다. 그 뭐 수입이 없겠나? 가 보니까 큰 개 하고 조그만한 개 하고 싸우는데 아, 큰 개가 작은 개를 물고 막 이래 흔드니까 작은 개 그거 죽겠다 싶어요. 개 임자 저거, 마음에 죽겠다 싶어서 섭섭했겠다 이랬는데 물고 흔드는데 나중에 보니까 물고 혼드는데 어째 그만 뒷 다리를 물어 뜯는가 그 큰 개가 깽! 거려 깽! 그러니까 아, 그자 손바닥을 치며 됐다 됐다 하고서 그만 이래 흔드는데 보니까 나는 '아 작은 개 저 놈이 이번에는 졌고 큰 개 그 놈은 세고 억세다' 이래 생각했는데 그래 옆에 사람에게 묻기를 '어느게 이겼습니까?' 이러니까 '아, 작은게 이겼습니다.' '어째 이겼습니까?' '큰 개가 깽! 안 그랬습니까?' 아, 그래 깽 거리고 난 다음에 다시 막 물고 이래 흔듭니다.
흔들어도 껭! 거리는 놈이 그만 진 거라. 깽! 거리는 것이.
그 큰 걸 받았어. 우리가 공산주의 앞에서 한번 굴복하면 그 다음에 다시 뭐라 한대도 한 번 굴복했으면 졌습니다. 한 번 굴복했으면 졌어 깽! 거리는 거라.
깽! 깽 거리면 헛일이라. 가죽을 벗길 때나 뭐 별별 있지마는 그럴 때에 깽! 거리만 안 된다. 이래 가지고 깽 거리면 안 된다. 아야 하면 안 된다. 아야 할 때에 주여! 때려도 주여! 눈 아프면 주여! 자꾸 주여! 하지, 아야 소리는 입에 나오면 안 된다. 그거는 굴복이다. 주여! 해야 된다. 면도할 때에 그거는 내가 그때의 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지고 하기는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해야 되고, 그라면 피부가 성해 근육과 골수가 성해, 생생하면 그속에 생명이 역사할 수가 있지.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한 그 속에서 진리와 성령으로 부활한 새사람은 그 속에서 역사할 수 있고 살찌고 자라 갈 수가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나그네 세상을 잘 살고 갑시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에 것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찾지 말아라' 말씀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얼마 후면 영광 가운데 우리가 나타납니다. 그 나라가 우리의 영주처입니다. 세상은 우리는 떠나야 될 나그네 생활입니다. 우리의 한 자욱 한 자욱, 한 시간 한시 간, 한 한실 한 현실은 한 자욱 한 자욱으로서 걸어가는 자욱이니 탈선되면 큰 낭파됩니다. 큰 재를 저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