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4:16
세 가지 구원을 기념하는 것
본문 : 벧전1:3-7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가르침 받는 것을 그저 예사롭게 생각하고 항상 국민학교 오학년밖에는 안 한 사람이, 오학년도 다 수료 안 했어. 맡 하니까 저런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라 그러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고 또 미국 가서 공부하고 박사들은 다 광범위하게 광문다학, 듣기를 넓게 듣고 '광문' 아주 넓게 듣고 '다학' 많이 배웠고 하니까 다 아니 저런 사람들의 말이 맞지 이래 하면 여러분들의 구원은 다 실패가 됩니다.
왜? 오늘까지 근 이천 년 동안 모든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과 뿌럭지는 둥치는 같지마는서도 오늘에 필요한 복음은 거의가 다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맞나 안 맞나 이것을 상고를 해야 되지 상고 안 하면 헛일이오.
진리는 하나라. 이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리 맞춰도 저리 맞춰도 서로 모순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가 돼야 됩니다. 이 면으로는 맞지만 저 면으로 안 맞으면 그 뭐인가 사고요.
노아 홍수 때에 노아 여덟 식구 외에는 다 지옥 갔다 이래 하는 것이 그것이 내가 주석들은 못 찾아봤지마는 모든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은, 그분들이 뭐 유력한 사람들의 주석은 잘 들여다 보고서 그것을 자기네들의 눈으로 삼아 가지고 그대로 모두 다 그것 가지고서 증거하고 있는데 다 지옥 갔다고 하면은 그 문제는 큰 문제가 생깁니다.
다 지옥 갔다 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임함도 노아의 때와 같다 이래으니까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세계에 얼마나 되지마는 다 지옥 갈 사람들이요 애수님 오실 때에 그때에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너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하라 했으니까, 거룩한 행실 경건함으로 준비하라 했는데 그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 거룩에 억만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거룩이 되는지? 경건이 억만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경건이 되는지? 완전 경건 완전 의를 말하는 것인지? 뮐 말하는 것인지? 그 표준이 무엇인지? 만일 그 불의 해를 받지 안할 수 있는 이런 경건과 의라고 말하면 내가 보는 대로는 내 눈으로 봐도 이것은 흠잡을 점이 없이 거룩과 경건을 가진 사람이라 하는 사람은 내 눈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 어두운 눈으로써도 거룩지 않는 더러운 게 가득 찼고 경건치 않는 것이 가득 찼습니다.
이러니까, 노아의, 여덟 사람같이 몇 사람만 구원 얻고 나머지기는 다 멸망을 받을 터인데 그라면 다 자기를 생각지 안하고 건너다 보고만 말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너는 그러면 어찌 되겠느냐? 너는 그러면 구원을 받겠느냐 멸망을 받겠느냐, 너는 어찌 되느냐 하는 걸 생각하면 그런 소리를 담대히 못 합니다.
또 그러면 깨어 있으라 너희들이 언제 주가 올란지 모른다, 깨어 있으라. 이런 거는 준비하라 말 아니요? 노아의 홍수 때와 같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 노아와같이 깨어 있지 안하면 안 된다 이랬는데 또 다른 데 성경에 보면은 그렇게 성경에 말했습니다. 이 구원은 영원한 때 전부터 이루어진 구원이라.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았다. 그러면 그 구원은 과거사 아니요? 과거사인데 예수님이 또 말씀하실 때에 노아의 때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 그저 어찌 됐든지 준비해라 이거는 또 미래사 아니요? 그러면 과거사로 말하는 구원이 있고 미래사로 말하는 구원이 있다는 이것을 구별해야 될텐데 이걸 구별을 못 해요. 이런 구별하면은 이만 하면 그만 깜짝 놀라고 '야, 이는 참 성경의 전체를 아는 것이고 이거는 성경에 한 국부적으로 알아 가지고 말하니 이거 이 성경 지식은 이거 큰일났다.' 이렇게 깨달아야 될 터인데, 그래도 책 많이 읽은 사람이, 또 그래도 뭐 세상 지식을 많이 배운 사람이 낫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멸망이 떠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 말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해서 택한 사람들이 있어. 택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저 구원을 줘서 하나님의 자녀가 돼 가지고 구원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가리켜 기본구원이라 하는 것이오.
또 네가 열심히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거와 같고 또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거와 같다. 이래서 모래 위의 집은 다 절단나 버리고 반석 위의 집은 그대로 견고히 남아 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 듣고 지키고 안 지킨 데 따라서 결정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천국 지옥 가는 것이 우리의 행함에 따라서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게 결정됩니까? 다른 데는 우리 행위로 말미암은 게 아니고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있다 이랬는데.
이러니까 이거, 나는 그 말을 하는 것은, 오학년 공부도 다 수료하지 안했다 하는 말은 세상 지식은 오학년밖에는 공부 안 해도 평생 공부한 여러 수십 박사를 가진 사람보다 성경에 대해서는 내가 더 알고 있다. 그걸 그 지식이 무가치하다는 것,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데에는 성경 지식뿐이지 딴 지식은 그것은 방해만 하지 소용이 없다.
이러기 때문에,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지혜는 뭐 무슨 말이라요? 지혜는 뮐 말합니까? 세상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도 세상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 업신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미련타고 하는 어리석다고 하는 전도로 사람 구원하시기를 작정하셨다 그렇게 말씀했어. 지난밤에 거는 공과에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로부터 알아야 둬 필요한 것은 거게서 간추려서 이것만 똑똑히 알고 배우면 성경을 다 배우고 다 알지 뭐 알 필요가 없어. 다 알게 돼. 이거 모르면 저는 아무리 일생 동안 성경 학자라고 아주 이름을 가지고 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돼요.
[찬송하리로다] 하는 요 한 마디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견해는 한없이 차이가 있어.
[찬송하리로다] 그러면 찬송을 하라 말이요 하지 말라 말이요? 할라고 노력을 하라 말이요 해야 된다 말이요?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말이요?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것은 필연성을 말합니다. 주님이 이 구원하신 무엇을 알아보면, 어째 알아보면?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몇 가지로 알아봅니까, 손가락으로? 이거 또 다 잊어버렸어. 그거 그렇게 아는 사람 몇 사람 없구만. 손가락을 또 안 들어. 뭐 점잔해서 안 들고 위대해서 안 드는 게 아니라 몰라서 안 들어.
이 구원을 알아보는 데는, 알아보는 대로는 몇 가지 면으로 알아봐야 된다고 말했습니까? 양성원 학생들. 손가락으로 들어 봐요. 몇 가지로 알아봐야 된다고? O조사, 몇 가지로 알아봐? 몇 가지로? 몰라? 그전에는 조금 빛이 나오더니마는서도 지금 또 깜깜해져 버렸어, 또 어데 파묻혔는지 몰라. 예수 믿는 거는 하늘과 땅의 것을 기업으로 받는 것인데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그렇게 천한 것이 아니오.
세 가지로 구원을 알아봐야 돼. 세 가지로 구원을 알아봐야 돼. 하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지 그걸 알아 볼라면 예수님이 나 위해서 고생당하신 그 고난당하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 아봐야 돼요. 그러면 또 자기가 체험해 보면 알아 볼 수가 있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어떤 고난? 그 고난에 인제 대략 순서로 말하면 하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소유와 권세와 모든 부요를 다 내놨어. 다 내놓은 사랑이라. 자기가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고 뭐 아내 사랑하고 남편 사랑하고 자녀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자기의 가진 것을 내놓지 못합니다. 내놓을 지경 되면 다 반발하지 안 내요.
이런 것을 자기가 알라고 하면 둔한 심령에서 무엇을 해야 이거 알아보게 되느냐? 알아보는 순서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지난밤에 뭘 해야 알아 볼 수 있다 탰어요? 믿을라면, 하나님을 따라갈라면, 이거 다 믿는 데 속한 것인데 하나님을 땀는 데 속한 것인데, 딿는 게 뭐이 딿는 것이요.? 자기는 '나'로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하면은 '가'로 따라가는 게 딿는 것입니까 뭐이요? 이 세상 마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죽어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산 지식을 주실 때에 산 지식 하나 하나를 내가 그대로 따라서 하나님이 가 하면 나도 가, 나 하면 나, 가나다라 하면 가나다라, 마바사아 하면은 마바사아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따라서 가면서 하나님의 지식으로 내 지식을 삼는 그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요 그게 믿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구원을 주셨어. 그러면 사랑하셨으면 그 사랑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가 그 사랑을 아는 데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해서 나 위해서 희생한 그것을, 고난받으신 그걸 가지고서 알 수 있고, 그걸 가자고 아는 것도 내가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와같이 지금 한번 실행을 해 보면 참 이 사랑이 어떠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남모르는 고난을 자기가 받아보면 알 수 있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자기가 희생을 해 보면 안다 그말이오. 자기가 자식을 낳아 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그 사랑함으로 키우는 그 희생하는 그걸 해 볼 때에 과연 부모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그거 또 사랑할 때 자기가 그걸 사랑하는 걸 위해서 희생을 해 볼 때에는 그 사랑하는 자를 자기가 놓지 안하고 자기가 힘이 있는 데 까지는, 자기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그걸 힘을 다해 가지고서 사랑하고 그를 보호하는 그것을 자기가 해 보는 것으로 경험하고 체험할 수가 있어.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어.
그렇게 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이 돼져. 확신이 돼지니까 바다 가운데에 파선이 돼도 거게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다 물에서 자기가 익사를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 속에서 완전 구원을 얻어 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라 하는 것이 공포를 주지 못해. 죽음이라 하는 건, 자기는 그를 해하지 못하고 자기는 그 죽음의 해독을 받지를 안해. 죽음이 없는 영생으로 그는 갔든지 말았든지 영생으로 그대로 있다가 주님 재림하시면 다 살아서 영생하는 생명을 가지고 오는데 몸은 그때 부활해 가지고서 다시 영원히 죽지 안한 몸으로 있게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찬송하는 것을 알아야 찬송을 하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을,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것을 희생하셨다, 어떤 어려움을 당했다 하는 이것을 자꾸 이렇게 찾아서 생각해 보면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참 사랑하기는 되게 사랑했다, 당신 생명보다 사랑했구나, 지위와 권세보다 사랑했구나, 영광보다 사랑했구나.'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사랑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그 일을 겪어볼 때에 나도 이 사랑함으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요거, 어려움 당하는 것도 어려움 당할 때에 그만 사랑한다 할지라도 어려움이 오니까 그만 그 사랑하는 것이 변해지고 중단되게 되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변동도 없고 아무 요동이 없었으니 그 사랑이 어떠한가? 내가 사랑하는 행위를 해 볼라고 달라들어서 해 볼 때에 내가 변동 됐는데 당신은 변동되지 안하니까 그 사랑이 더 확실하고 크다는 것, 나는 그 만분의 일도 안 되는 조그만한 것도 희생할 때에 그 희생하기가 어려운데 그분은 그 무한한 것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희생한 그 희생을 자꾸 이렇게 생각째 보고 알아보고 연구해 보고 자꾸 이 세상 것과 비교해 보고 또 나와 비교해 보고 이런 걸 자꾸 비교해 보니까 자꾸 알아진다 그거야.
이러니까, 자기가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사랑하는 자를 구원 하기 위해서 자기가 억울함을 당해 볼 때에, 아주 천대를 받아 볼 때, 천대를 받아 볼 때에 그만 그 사랑이 변동돼 가지고서 속에서 불이 일어나 가지고서 뭐 사랑이고 구원이고 할 것 없이 다 자기 있는 기 백대로 다 한다 말이오. 기백대로 다 하는데 주님은 그거 몇 배나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을 당하셔도 기백대로 당신이 하지 안하셨으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꾸 못 알아 듣는 사람은 못 알아 들을 거라.
이렇게, 여러가지로써 자기가 알라고 노력을 해야 돼요. 알라고 노력을 해야 되지 노력을 안 하면 안 돼. 이러니까 조그만치라도 자기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나를 사랑하셨다,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사랑한 것을 뭣 보고 알겠느냐? 사랑하신 것은 이렇고 이렇고 이렇게 하신 것을 보아서 이렇게 사랑하심으로 이렇게 하셨다고 하니까, 나는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식을 사랑함으로서 이렇게 하지 못하는데 사랑함으로서 이렇게 하셨으니까 자기가 자식을 사랑 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 사랑한 거는 더 크다 하는 요만치만 믿어도 그거 큰 효력이 나온다 그말이오.
그뭐 제가 사람 죽는 것 많이 봤는데 사랑하는 자녀가 자기가 죽을라고 하면은 부모네들이 고생을 하지 않소? 하는데 한 사오 일만 지나가면은 지금 자식이 죽을라고 깔딱깔딱 숨을 깔딱 모아도 그 부모는 암만 깨워도 모릅니다. 깨워도 깨서 눈뜨고 있다가 그만 또 자 버리고 자 버리고 하지 그 사람이 삼사 일, 사오 일만 잠 못 자고 말이지 이래도 오는 그 피곤을 물리칠 만한 그런 사랑이 못된다 그말이오.
제가 거기 있으면서 마지막까지 그거 거게 대해서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줘야 되겠고 또 타일러야 되겠고 이라면 그만 부모네들은 누워 잡니다. 안 자고 눈 떠 가지고 그만 자 버려. 자 버리는데 암만 깨워도 잘 만치는 자 버려요. 그러면 그래 다 거석하고, 뭐 그래 깨워봤자 그렇고 이래서 자꾸 깨워도 안 되면 내비둬요.
내비두면 나중에 인제 운명하고 난 다음에 그래 '운명했습니다' 이라면 그때사 그뭐 울고 불고 야단을 지긴다 그거야.
그래, 인간의 사랑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랑을 실험도 해 보고 체험도 해 보고 이래 모두 다 세상 모든 사랑들을 비교해 볼 때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은 세상에는 그런 사랑이 없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낮아지신 것, 또 가난해지신 것, 천해지신 것, 아주 천물되어지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과 우리 사람이 똥구덩이 속에 구더기 되는 것과 비교하면은 어찌 됩니까? 주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과 똥구덩이에 구더기같이 똥구덩이에 우리가 가 가지고 들어 가지고 삽니다. 똥구더기에 가 가지고 들어가 가지고서 이와같이 거게서 지금 뭐 살라 하면은. 그 똥물이 배어 오니까 따갑기도 할 것이고 나중에 궤숭도 할 터인데 거게 사는 것과 주님이 사람되어 인간계에 온 것과 비교하면은 어느 것이 더 어렵겠지요? 어느 게 더 큰 희생이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자꾸, 주님의 구원의 고난을, 구원의 그 고난을 알아볼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구원하신 그 사랑을 알아볼라고 하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 구원에 사랑의 수고라 그렇게 며칠 전에 내가 기록을 하라 했습니다. 수고라 하니까 뭐 조금 힘쓰는 수고가 아니라 받을 수(受)자 고통 고(苦)자. 그래서 수고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신 이 구원을 알아보는 데에는 뭘로 알아봐야 됩니까? 알아보는 데에는 어떤 걸로 알아봐야 돼요? 알아보는 데는 지식으로 알아볼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지식으로 알아봐야지 지성, 이성으로 알아보고 지성으로 알아보고, 감각으로 알아보고 이렇게 알아봐야 되는데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 알아볼 건가? 알아보는 거는 첫째는 신구약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가 신구약 성경에게 물어 가지고서 알아봐야 되겠고 성경이 가르쳐 주는 성경에 배워서 알아야 되겠고 또 그다음에 둘째로서는 뭘로 가지고 알아야 되겠느냐 하면은 이 성경 말씀은 특별 계시인데 자연 계시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 계시라 말은, 계시라 말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말인데 특별히 가르쳐 준 거는 신구약 성경이 특별 계시요 자연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 계시는 어떤 게 자연 계시인가? 이 모든 물질계에 있는 만물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자연 계시라 그렇게 말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들을 가지고, 뭣 때문에 만물을 지었느냐? 우리 구원에 이용하기도 위해서 지었고 또 이 만물을 보아서 우리 구원 도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만물을 지으셨다 말이오.
만물을 지었으면, 뭐?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를 가지고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창조하신 걸 가지고서 우리의 이 구원에 대해서 깨닫는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또 하나님이 이거 섭리하시는 섭리, 하나님의 창조하신 만물과 하나님의 섭리, 또 하나는 인간들의 천태 만상의 조석으로, 한 시간도 변하기를 어떻게 요리조리 요리조리 변하는 인간들의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서 비로소 하나님의 도리를,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
이래서, 자연 계시로 특별 계시를 해석하고 특별 계시로 자연 계시.를 해석해야 되지 사람들은 자연 계시 그걸 계시인 줄을 모릅니다, 세상에 과학자 중에, 과학자 중에 자연 계시라는 것을 모르는 그 사람은 그 모든 만물박사가 됐다 할지라도 그거는 무식 중에 무식한 사람이오. 만물이 뭣 때문에 생겨졌으며 만물이 뭣을 가르치고 있으며 만물이 어데 뭣 때문에 그것이 역사하고 있는가? 만물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그까짓 놈의 하자가 뭐 하겠소?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지으신 분도 모르고 되어 있는 그것만 아는 게 그까짓 게 무식 중에 무식이지 그게 무슨 학자요? 무엇을 안다 말이요? 창조주를 모르는 그거는, 있는 물건은 그걸 보고서 그걸 지으신 분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만물에 대해서 전무식자입니다. 전무식자. 지은 분이 있는데 지으신 그분이 또 없앨라면 없애고 그분이 자유하는데 그걸 몰라 놨으니까 그 안다는 게 얼마나 껍데기요 얼마나 일방적이요 얼마나 무식입니까? 만물 박사라 할지라도 창조주를 모르면 전무식의 사람이요, 또 만물의 존재가 존재 목적이 뭐이요? 만물의 뭣 때문에 존재하는 거.그 무슨 목적으로 존재가 됐는가? 또 만물은 지금 어데 이용을 당하고 있는가? 만물은 그것은 어떤 결과를 맺는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전무식이지 그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래서, 성경의 도리를 깨닫는 데는 이 자연 계시의, 자연 계시에서 성경 도리를 깨달아야 됩니다.
자연 계시에 성경 도리를 깨달아야 되고 또 자연의 이 계시, 자연의 계시인 자연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라야 깨닫습니다. 이 모든 자연이라는 자연이라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이저 물질계 있는 이 전부를 자연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라야 깨달아. 성경 아니면 못 깨달아. 성경 아니고는 못 깨달아.
이 우주에 가득 찬 걸, 큰 게 있다 작은 게 있다 긴 게 있다 둥근 게 있다 뜨거운 게 있다 찬 게 있다 하는 그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걸 창조하셨다 이러니까 그걸 만드신 분이 만들어진 것보다 크기 때문에 만드신 분 그분 주재분, 모든 것을 개별적으로 다 섭리 하시는 그분을 모르고 이 존재한 그것만 이게 존재하다 하는 게 얼마나 일방적 지식이며 얼마나 그게 원만치 안한 불완전의 지식입니까? 이래서, 우리 구원에 대해서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되겠고,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고난을 알아야 돼. 사랑과 사랑의 고난을 아는 것이 첫째 문제라. 그걸 알도록 자꾸 우리가 궁구하고 연구하는 데에는 뭘로 궁구하고 연구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이 사랑과 하나님의 그 고난을 우리가 아는 데에는 뭘로 가지고 알아야 됩니까? 뭘로 가지고 알아야 돼요? 어데서 배워 알아야 돼요? 또? 그 특별 계시 자연 계시에서 우리는 배워서 알아야 됩니다.
자연 계시라면은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 곤충들이 새끼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 곤충도 새끼를 위해서, 고동이 같은 것은 완전히 그 에미가 자식에게 완전히 먹혀지고 삼켜져서 완전히 없어져야 비로소 그 고동이 고동노릇을 하게 됩니다. 고동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것은 딴 데다가 기르는 게 아니라 자기 몸 속에다가 넣어 가지고 자꾸 기르는데 뭣 먹여 기르느냐 하면은 자기 몸뚱이 먹여 길러. 이제 자기 몸뚱이, 에미 몸뚱이를 다 먹고 난 다음에는 이제 그것이 고동 밖에 나와도 고동노릇을 하고 살 수가 있어. 그말 있지 않소? 다 갉아 먹어서 거석해 놓고 난 다음에 이제 그 껍데기가 도부랑도부랑 떠내려가니까 말하기를 우리 엄마 시집간다 한다고서.
그게 뭐이냐?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서 난 자를 그것을 내놓은 자가 사랑하되 자기 전부를 다 먹여서 그 고동이 장성하도록 이렇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신 사랑이라 말이오. 하나님의 성격을 거게서볼 수 있어.
이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도 다 그렇게 만드셨는데 당신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가지고서 우리를 창조해 냈는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사람 되셨다, 또 대신 죽고 고난받으시고 가난해지시고 천대받고 멸시받고 조롱받고 이럴 때에도 당신이 그렇게 천대 조롱을 되게 받을 때에 '내가 참말로 능력이 없는 줄 아나' 하고서 한 마디만 했으면 다 헛일이라 말이오.
그걸 다 참고 견뎠으니까 우리가 그런 현실에 참아볼라고 할 때에 참아짐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은 극하다 하는 것을 자기가 그 사랑과 고난을 알아보도록 노력하고 그걸 노력하고 또, 둘 째로는 뭣을 노력하라 했어요? 누리는 것,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뭐 대통령 아들이 나아요 하나님 아들이 나아요? 누가 부자라요? 그러면, 그 나라에 대통령 아들인데 그 나라에서 누가 그를 해하겠소? 해할 수 없는 그거는 대통령 해도 눈이 여게만 있지 저게는 몰라. 그 대통령 찍책 그런 것도 원만치 못하기 때문에 자기 마누라 애처가로 자꾸 마누라 말만 듣고 이렇게 하고 이래 돌아다니다가 이제 그렇게 왕창 망한 걸 봤지.
어짜든지 미국에 바람 들어온 것 좋은 것은 있어도 나쁜 거는 나쁩니다. 미국 사람들이 전부 돌아다니며 마누라하고 둘이 꼭 같이 다녀요. 안 다니면 큰 우사고 같이 다녀야 신사인 줄 알아요. 이러니까 미국 갔다 온 사람 그라니까 이 O대통령도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거 이래 장 둘이 다니지 안하면은 세상에서 알아 주지를 안해. 이랬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안해요.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이 남녀 동부인으로 꼭 정치가든지 뭐 대학자든지 그떻게 꼭 다녀야 된다는 것 아니요. 좀 달랐어.
이랬는데, 이번에 O대통령이 이래 이 참 아내를 이래 소중히 이래야 되지 아내하고 이래 삐뚤면 안 된다. 그거는 아내를 웃어야 데리고 돌아다니지 그것도 뛰 하면 안 될 거라 말이오. 띄 하면 안 돼. 같이 지내는 사람 가운데 뛰 한 사람 있는 것이 지옥 중에 제일 큰 지옥이 됩니다. 아무리 밥해 주는 사람이라도 뛰 해 가지고 있으면은 그만 1그 사람은 이 사람의 평강을 아주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절단하는 거라. 이러니까 그렇거나 저렇거나 내가 기쁨이나 즐거움을 아주 그것을 손해보지 안해야 되는데 그게 만날 싸움이야. 그러니까 집안에 싸움 안 할 수 없어. 장 그런 게 다 있는 거라 말이오.
이랬는데, OOO씨는 그만 이라다가 OOO씨가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완전히 망해. 누가 망했어? 애처가가 들어서 망쳤어. 애처가 들어 망친 거라. 전부 거게서 망쳐진 원인이라. 이래 놓으니까 O대통령은 혼자 다녀요, 지금. 혼자 다니고 둘이 안 다녀요. 그래 그거는 내가 '저거는 잘 가르쳐, O대통령은 지금 저게 대해서는 자꾸 지금 좀 깨닫고 좀 지혜는 있다.' 일본 사람은 또 그렇게 안 다녀.
이러니까 성경대로,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라.
이라는 것인데 이놈의 세상이 꺼꾸로 돼 가지고서 남녀 동등이라 이래 가지고서 이거 하나님은 이래 말씀했는데 이제는 미국 같은 나라에는 여존남비요. 일방적 지식은 못 돼. 어쩌든간에 그러니까 표준 지식은 신구약 성경뿐이요. 표준 지식은 신구약 성경뿐이라.
이래서, 내가 지식으로 알라고 그 사랑과 고난에 대해, 이 구원에 대해, 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고난, 어떤 고난으로 나를 구원했고 어떤 사랑으로 구원했는가 그것을 알라고 노력을 하고 또 그다음에는 내가 이 구원을 누릴라고 노력을 합니다, 누릴라고. 누릴라고 노력을 해 봐요. 이거 연습해요.
이러니까, 지금 삼십 분 기도하는 것 뭣 기도입니까? 이거 누리는 거라, 누리는 것.
이제는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서 '너 이놈 우리 뜻대로 하지 안하고 너 우리 심부름 안 하면 너 죽인다' 여러 수천 번 죽어 봐요, 수천 번. 그럴 때, '암만 죽었으면 죽었지 내가 사죄, 칭의, 화친은 내가 내놓지 않겠다.' 또 이렇게 돈을 가지고 꾀운다, 또 뭣을 가지고 꾀운다, 이래 가지고 그런 것을 자기가 자기 혼자 자문 자답으로 하나님의 사죄를 누리는 것, 칭의를 누리는 것, 화친을 누리는 것, 화친 뭐 하나님의 보호를 누리는 것, 하나님의 권능을 누리는 것 이 모든 거자기가 실지로 누려본다는 것, 누려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요 누려본다는 말은 요거 참 묘한 말은 묘한 말인데 이 말이 요새는 그만 대통에 물 쏟듯이 겉어러기만 쭉 이라기 때문에 도무지 사람들이 뭣이 철학적인 그런 머리가 없어. 뭘 좀 이래, 철학이라 하는 건 어떤 거를 철학이라 하느냐 하면은 나타난 것을 인해서 그 속에 나타나지 안한 것을 미루어 연구하는 것이 그게 철학입니다.
철학박사를 불러놓고서 물어보면 깜깜해. 뭐 깜깜해? 철학은 네가 어데서 땅에서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이냐 뭐이냐? 자꾸 찾아 들어가고 철학은 어데 향해 가느냐 하면 몰라. 철학은 어데를 향해 갑니까? 철학은 자기를 향해 찾아가는 것라. 자기 속에 자기 생각, 또 자기 그 모든 호호망망한 자기 욕심 그런 걸 자꾸 찾아가는 거라. 자기 찾아 들어가는 것, 자기 찾아가서 철학자가 다른 사람이 자기 찾아간 것 천명 만명이 자기 찾아간 것 그걸 찾아가 가지고 이라기 때문에 인간 찾아간 것이지 그것은 인간을 그렇기 때문에 초월하지를 못해요. 인간에 박힌 주측 추론 추상 그런 걸 찾아가는 것도 그거 다 철학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도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는 하늘에서 보여 주는 계시의 도. 하나님의 도는 계시의 도. 하나님의 도는 계시의 도요 인간들의 모든 도는 그거는 다 철학적 도라. 알겠습니까? 불교도 철학적 도요 모든 땅에 있는 이종교, 기독교 외에 거는 다 철학적 도요 인간들이 자꾸 인간 찾아 들어가는 거라. 찾아 들어가서 뭐 사실이 있는 걸 보는 게 아니라 자꾸 추측 추론 추상으로 들어가. 이럴 것이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이래 자꾸 추측 추론 추상으로 자꾸 찾아 들어가고 있는 거라.
기독교는 하늘에서 하나 보이면 하나 알고 둘 보이면 둘 알고 하늘에서 열어 보여 줘서 하나 둘 아는 것이고 인간이 자기가 찾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주실 때에 자기는 받는 거라, 배우고.
그래 누리는 것, 누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이 나를 주권하셔서 내 생사는 하나님에게 달렸지 세상 그 불이나 무슨 이런 과학이나 이런 것들이 죽이고 살리지 못한다. 죽이고 살리는 건 하나님에게 달렸다. 이렇게 하나님의 그 생사의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주권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자기가 누려본다는 거는 뭐이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하나님 말씀 지킨다고 죄 안 짓는다고 불구덩이 집어 넣을 때에 그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를 불가운 데서 능히 구원하겠느냐?'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하실 수 있는데 구원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당신의 뜻이지 당신이 능력 없어 구원 못 하는 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를 이래 불 가운데 자기네들이 암만 집어 넣어도 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이래 불에 죽게 하시면 불에서 죽고 불에 죽지 안하게 하면은 불 내음새도 안 납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믿는 연습을 해서 그분이 불가운데 가도 두렵지 안하고 떨리지 안하고 담대히 마지막에 말하기를 '왕은 암만 하루 종일 자꾸 나한테 그래 말하지마는서도 아예 내가 왕의 말을 들어서 이 우상에게 절하는 그런 일을 안 할 줄 아십시오, 우상에게 절하지 안할 줄 아십시오. 왜 그래 애터져 하고 있습니까? 안할 줄 아십시오.' 하는 그 말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주권의 보호를 맏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렇게 지금 불미를 막 벌거이 달궈 놓고서 '더 뜨겁게 해라. 이놈은 우상에게 절 안 한다 하니까, 느부갓네살 우상에게 절 안 한다 하니까 그 불을 뜨겁게 해라,' 이래 막 벌거이 이럴 때에 두렵지 안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뭐이요? 그거 뭐입니까? 그거는 뭐하는 거지요? 무섭지 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담대한 그것은 뭣하는 겁니까? 그게 누리는 거라. 하나님의 주권의 능력의 보호를 지금 누리고 있다 말이오. 그 혜택을 입고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신앙에서 자꾸 구원을 누리기를 자꾸 힘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누리기를.
알아보는 데에 노력하고 우리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그 고난받으신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는 뭘로 알아야 돼요? 고난으로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에는 하나님의 그 고난, 사랑함으로 날 뭐했노? 사랑함으로, 당신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고난당하신 그 고난을 인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했기 때문에 그분이 전지 전능자인데 내 구원이 허무하지 안하고 내 구원은 확실하구나 하는 걸 자꾸 확신이 생겨진다 말이오. 그 알아보도록 노력을 하고, 사랑과 고난을 알아봄으로 주님이 주시는 이 구원을 알게 되고 또 자기가 누려보고, 이 구원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온갖 구원을 자기가 실질적으로 믿음으로 가져서 혜택을 본다 그말이오. 혜택을 봐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걸 보고 그때는 믿음이 생겨져서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주님이 하시면 그대로 된다 하는 것이 그때 믿어지는 때라 말이오. 확신을 가지고서 그라니까 주님이 '오라' 이라니까 물 위에 툭 뛰어 내려섰다 말이오. 뛰어 내려선 그것은 물 위에 뛰어 내려서니까 빠지지도 안하고 점벙점벙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그거는 뭐이요? 뭐하는 것이요? 누리는 거라. 이걸 자꾸 해 보는 거라, 자꾸 누리는 것. 그라다가 나중에 바람 부는 것 보고 그만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뭐하는 것입니까? 누리던 구원을 어쨌소? 누리던 구원을 그만 뺏겼다 말이오. 누리던 구원을 뺏겼어. 이게 누리는 것이 이게 이거는 또 인제 누리는 구원을 뺏겼기 때문에 물 속에 들어간 거라.
누리면 또, 누리는 건 뭐이냐? 네가 참으로 이 세상에서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네가 희생하면은 여러 배 백 배를 받는다 했으니까 물질에 대해서 그 사람이 말씀대로 행해 가지고서 참 부자가 됐옵니다. 부자가 됐으면 그거는 뭣하는 거요? 그거는 누리는 거라 말이오.
누리는 건데 그래 누리는 것은 그게 변동이 많소 안 많소? 그게 둔합니까 귀합니까? 둔해. 그것은 풀로 누리는 것이고 풀의 꽃으로 누리는 거라. 알겠습니까? 영영히 없어지지 안할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으로 누리는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주님이 나타나시면 다 그때 나타나요.
누려보고, 이 말이 여러분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걸 알아야 되는데 그거 모르면 안 돼. 누려보고. 누려보고 난 다음에는 또 셋째로 어째 봐야 알아요, 어째 봐야? 기념을 해 봐요. 기념은 뭐이 기념인데? 주님의 이 사죄를 기념하는 것은 사죄를 내가 벗지 안하고 현실에서 입고 살기 위해서 이 사죄 때문에, 자기가 이 사죄 때문에 손해보는, 사죄 때문에 손해보고 칭의 때문에 손해보고 화친 때문에 손해보는 그것은 그 뭣하는 것이지요? OOO집사, 그거는 뭐하는 것이지? 기념하는 거라, 기념하는 것. 그러면 기념을 어데까지 해야 될 건가? 사죄 때문에 어데까지 해야 주님의 사죄를 자기로서는, 자기로서는, 하나님은 완전자요 무한한 자의 하신 일이지마는 자기는 유한자이기 때문에 무한한 자같이는 되지는 안하지마는서도 자기로서 최고까지 최종 최고의 기념은 뭐입니까? 최종 최고의 기념은 무슨 기념입니까? 죽는 거라. 사죄를 위해서 죽어 봐야 돼. 사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주님이 나에게 사죄 주시기 위해서 생명 바친 그것을 내가 실질적으로 내가 그때 한 그 공기와 같이, 그때 한 분위기와 같이, 그때 한 실상같이 나도 지금 그것을 지금 해 보는 것이라 말이요, 해 보는 것. 그거 기념 아닙니까? 기념이라 하는 건 과거에 일시에 있었던 것을 내가 그 후에 그와 꼭 같이 해 보는 것이 기념하는 것이라. 기념하는 것. 이래서 기념해. 사죄를 인해서 주님이 어떻게 어떤 일을 량는 그것을 내가 실지로 내가 닥쳐서 내가 그런 일을 해 봐. 칭의를 인해서 해 봐. 화친을 인해서 해 봐. 이것이 기념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또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고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어.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으니까 뭘로 살아난 것이요? 성령과 진리로 살았으니까 전지 전능으로 살아났다는 말이 맞소 안 맞소? 내나 그말이라. 성령으로 살아났다 말은 하나님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전지 전능의, 생명이라. 전지 전능의 생명으로 이 살아난 것을 자기가 알아보고 또 누려보고, 누려보는 건 전지 전능으로 살아난 이거 '내가 참말로 정말로 전지 전능자가?' 한번 누려본다 말이오. 한번 자기가 한번 누려봐. 뭘 어찌 누려봐요? 믿음으로 누려요. 이 도를 모르는 사람은 그 밖에 있는 사람은 뚫고 들어가지를 못해. 이거 뚫고 들어가야 돼요.
그래, 자기가 누려봐. 그러면 자, 누릴 때 어떻게? 믿음으로 누려. 이제 현실에서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세상이 천이 와 가지고서 모두 동으로 가야 된다 이라는데, 천이 와서 동으로 가라, 이때는 네가 이 우상에게 절해야 되지 우상에게 절 안 하면 불미 속에 들어가서 타 죽는다. 다 절하라 하는데, 절하라 하는데 자기가 하나님 말씀은 절을 하지 말라 해. 말라 하니까 자기가 그거는 이것을 한번 지금 시험해서 알아보는 것, 그다음에 자기가 누려보는 것, 그러면 보자, 하나님이 전지 전능의 능력으로 나를 살렸다고 하니까 정말로 내가 전지 전능의 능력으로 내가 살아 가지고 있나 없나, 참말로 전지 전능으로 내가 살았나 내게 그건 능력이 있나 없나, 자기가 실지로 우상 숭배를 안하고 불에 들어갈 때에 자기에게 기쁘고 즐겁고 두렵지 안하는 그것이 심령으로 누렸고 또 들어가 가지고 돌아다니까 불이 태우지 못했으면 전능의 능력을 자기가 가진 것을 누려봤소 안 누려 봤소? 한번 누려봤소 안 누려봤소? 누려봤다 그말이오 누려봤어.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큰 구원이 와서 이렇게 겪어보면, [찬송하리로다] 자기가 알아보고 누려보고 또 기념해 보고 이라면 나중에 가서 뭐 이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좋고 기쁘고 감사한지 못견뎌서 필연적으로 [찬송하리로다] 필연적의, 찬송이라는 것은, 찬송이라 하는 것은 환영하는 것이요 또 땀는 것이요 믿는 것이요 인정하는 것이요 또 거게 옳다 긍정하고 자꾸 이래 긍정하고 딿고 이렇게 자기 마음으로써 그를 이렇게, 그뭐 다른 말 쓸 말이 없어, 말이라 하는 것이 그거 몇 가지 안 되기 때문에.
자기가, 찬송한다 말은 그걸 긍정한다 말이요 딿는다는 말이요 또 확실히 인정한다 말이요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좋아 못견뎌서 찬송을 하고 찬양을 하고 감사를 하고 자랑을 하고 이라는 그 전체가 다 뭉쳐서 이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이니까 이 찬송하리로다 하는 요 말로 해 놓은 이거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것을 내용을 말하면 한없이 많고 넓지마는서도 사람의 말로는 표시를 못 해.
사람의 말은 요 몇 가지 안 돼요. 몇 가지 안 돼서 하나님의 이 구원의 도리는 인간의 방언으로써는 표시를 못 하는 거라. 자꾸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서 여러분들도 성신의 감화를 받으면 성신의 감화가 저거 뭐를 말하는가보다 해 가지고 심령이 열려지면 짐작을 하고 차차 차차 조금 알아지고 깨달아질 수가 있는 것이지, 그뭐 과학자는 꼭 눈에 보는 것, 과학자는 꼭 눈에 보이는 것, 여러 수천 배 돋보기로 봐도 봐야 인정하지 보이지 안하는 건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도리는 눈으로 볼 수는 절대 없는, 마음의 눈으로 볼라 해도 못 봐서 감감하고 영감의 눈이라야 봐지는데 그걸 이 물질로 보는 그것을 인정하니까 그 사람은 앉은뱅이야. 믿음의 사람들은 날아돌아 다니는데.
이 눈으로 멀리 보는, 눈이 있으니까 멀리 보는 것이라면 이거는 과학으로 보는 것은 소경이기 때문에 이 소경이 언제 눈으로 보는 걸 따라가겠어? 눈으로 보는 건 척 보면 한 삼심 리고 크게 보면 백 리도 사람 육안으로 볼 수 있는데, 백 리도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손으로 더듬어서 만져 보니까 만져 보는 것이 이 사람 일 초 동안에 백 리 보는 것을 그 사람이 다 만져 볼라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얼마나 걸리겠어? 자 만져 보는 것이 넓게 보고 빠릅니까 눈으로 보는 게 빠릅니까? 눈으로 보는 게 빨라. 또 눈으로 보는 게 빠릅니까 그 심령으로 보는 게 빠릅니까? 심령으로 보는 게 빨라. 심령으로 보는 게 빠릅니까 영감으로 보는 게 빠릅니까? 영감으로 보는 게 빨라. 이 영감으로 봐야 보는 이 거리 먼 이 범위 넓은 무한한 걸, 과학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항상 눈으로 보는 것을 표준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과학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과학을 완전히 과학을 부인하고 과학을 초월하신 과학을 존재케 하신 조물주를 찾아서, 저거 과학 연구한 것은 먼지 뿌스러기, 먼지 같은 뿌스러기고 이제 하나님이 나타내신 신구약 성경 말씀은 무한, 뭐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이거 큼을 자기가 알아서 자존자와 창조주 이 모든 피조물 이 뿌럭지부터 알아 나와야 되는 것이지 이제 눈에 보이는 이거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만을 인정하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과학자는 그거는 참 굉장한 효력을 가지고 있고 유익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과학자는 그거 등신이오. 그거 짐승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과학자는 그거 짐승이라. 그래 장 죽는 일만 하지 사는 일은 하나도 할 수가 없어.
누려보고 체험해 보고 자기가 기념이라는 것은 뭐이요? 기념이라는 건 자기가 주님이 나를 사죄, 칭의, 화친을 하시기 위해서 그때에 어떻게 하셨는 그 실상을 나도 지금 한번 겪어보고, 겪어보는 것이 기념하는 거라. 주님이 나를, 사죄 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어떻게 한 것을 나는 그 사죄를 벗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했던 고난을 겪는 것이 그거 자기가 기념해 보는 것이요 또 내가 그 사죄를 벗지 않기 위해서. 사죄를 입고 살기 위해서 당하는 그것으로써 기념을 해 보는 것이고 또 내가 이 사죄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어떠한 형편을 당해야 되는가 하는 그것을 자기가 겪어볼 때에 그게 또 기념하는 것이라.
그러면 주님의 세 가지 구원을 기념하는 것은, 기념하는 것은 자기가 이 구원을 가지고 뺏기지 안하고 보수할라고 할 때에 거게 기념이 생겨지고 또 구원으로 살라고 할 때에, 뺏기지 안할라 할 때에 이 기념이 생겨지고 또 이대로 살라고 할 때에 그 모든 것을 기념할 수가 있고 경험할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 줄라고 할 때에 그거 또 자기가 경험할 수가 있어.
그러면 몇 가지로 경험해요? 이 구원을 몇 가지로 기념해요, 몇 가지로 기념해요? 손가락으로 한번 가르쳐 봐. 저 안경쟁이 말이요, 자기 알아 들려져? 양성원 학생.
어데서 왔지? OO교회서? 심령을 자꾸 밝혀야 됩니다.
기념은 예수님의 사죄를 기념은, 사죄를 기념하는 것은 사죄로 인해서, 사죄로 인해서 내가 가난해질 때에 그때 가난해져도 가난해지면서 사죄를 내가 보수하고 가난해지면서 내가 사죄를 사죄로 뺏기지 안하고 가난해짐으로서 사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사죄로 인해서. 가난한 것 낮아지는 것 죽는 것 고난받는 것 목숨 끊어지는 것 이 모든 것을 사죄를 인해서 내가 그런 걸 당하는 그런 과정을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주님이 나를 사죄 주신 것을 내가 몸소 기념하는 것이라 말이요, 기념.
과거에 주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나에게 사죄 주시기 위해서 이런 고난을 당했구나, 이런 어려움을 당했구나, 이런 가난을 당했구나, 이런 억울함을 당했구나 억울함을 당할 때 그때 자기가 억울함을, 사죄로 인해서 억울함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치 않기 위해서 뭐 사죄고 뭐이고 벗어내 버리고 억울함을 '내가 왜 이렇게 해?' 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 사죄를 벗어 놓게 되게 된다 말이오. 그러면 벗어 놓느냐 그 사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런 일을 실지로 해 볼 때에 자기는 그 사죄를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 알 수 있다 말이오.
그러면 사죄를 내가 몇 가지 면으로 기념할 수 있습니까? 종류가 아니라, 몇 가지 면으로? 세 가지 면으로 기념할 수 있어. 사죄를 안 뺏길라고 함으로써 오는 모든 각종의 그 어려움, 또 사죄를 내가, 사죄를 안 뺏길라 하는 게 첫째, 사죄를 받은 사죄를 입고 살라고 함으로써 오는 그 어려움, 또 하나는 뭐이요? 사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오는 어려움이라 그말이오. 이것을 자기가 기념하는, 기념해 봐야 자기가 부족한 것도 알고 주님의 위대한 것도 알고, 허무한 것도 알고, 이렇게 기념해서 참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손해가 가도 낮아져도 천해져도 고난을 당해도 또 멸시를 받아도 이래도 내가 그 사람에게 전하는 그것을, 전하는,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으로써 그걸 전하고 내가 어떤 데 죽음이,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는 것이 주님의 이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 그래 해 보면, 그래 해 보나 그 사람은 몰라. 나는 그것이 생명보다 더 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츰 사랑하고 참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은 모를 때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이와같이 한 것을 내가 지금 모르고 있다. 자기가 알아보는 데에서, 그다음에는 누리는 데에서, 그다음에는 기념하는 데에서 이 세 가지 면으로써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그말이오. 이렇게 신앙에 실행 있는 신앙이라. 이 실행 있는 신앙이요 이게 체험 경험 있는 신앙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르치기를 '실행을 너무 많이 말하면 율법주의자다' 이게 뭐 어데 얼토당토 안한, 이거 막 살라 하는데 뜨거운 물을 퍼부어 막 들어부어 가지고 막 죽이는 역사라 그말이오. 이거 죽이는 역사.
이러니까 저거들이 모르면 배워야 될 터인데, 아직까지 멀었어, 어림도 없어. 지금 백분의 일도 아는 게 아니라, 지금. 이런데 이래 가지고 자꾸 왕되고자만 하고, 스숭되고자 하지 말라 했는데, 스승된 사람은 받을 심판이 크다 하는데. 여기 지금 양성원 학생들이 여게 와 가지고 한 달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새벽으로 가르치는 이걸 가서 자기가 확실히 깨달을라고 애를 써 깨달아 버리면은 뭐 다 알아.
깨달으면 진짜 가짜 거짓된 복음과 참된 복음을 알 수가 있다 그거야. 이런데 그걸 깨달을라고 애를 쓰지 안 해.
깨달을라고 처음에 자기가 대번 깨달아지는 게 아니라. 심령이 어두운데 잘 되겠어? 깨달아지는 건 어째?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라면 진리를 알지니 그라고 자기가 변화가 돼야 알지 변화가 되기 전에 알 수가 있는가? 세상 사람인데 뭘 알아져, 알기를?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