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패의 두 길


선지자선교회 1981. 7. 10. 금야

 

본문 : 창세기 3장 4절 - 6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구원 도리를 보면 평가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다고 할만큼  가치적이며 그 가치에 순서적입니다. 거기 보면 우리 인류 시조 아담때부터  사람에 가는 길은 두 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패망과 사망에 길이요  하나는 승리와 생명의 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두 길 중에 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중에는 패망에 길을 처음  시작해서 끝까지 패망에 길을 걸은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성공에 길을  처음에는 걷기 시작을 해 가지고 마지막에 중간에 패망에 길을 걸은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성공에 길을 걷다가 패망에 길로 들어서서 패망을 겪고 다시  회개하고 성공의 길로 걸어간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패망에서 끝까지 일관하다가 전적 패망에 떨어진 그런 사람도 있고 또 성공의  길을 들어서 가지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안하고 성공 길에서 끝까지 성공한 그런  사람들도 있고 패망과 성공의 길을 바꾸어 그렇게 걷다가 실패한 사람 또 그렇게  바꾸어 걷다가 성공한 사람 그런 사람들을 창세기에 보면 처음부터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패망의 길은 어떤 길인가? 패망의 길은 외부적으로 보면 자기가 만나는  그 현실 그 현실에서 끌리는 자기의 환경과 주위에 끌려지는 거기에 피동되는  걸음을 걸어서 다 패망을 했고 또 자기에게 부딪혀지는 환경 주위 형편 사정  처지 뭐 경제면이나 감정면이나 또 영광면이나 이해면이나 고락면이나 어떤  것이든지 자기에게 현재에 부딪혀 오는 그런 것을 합해서 현실이라 그렇게  우리가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자기 형편이라면 그것도 현실이요 자기 사정이라면 그것도 현실이요.

자기 주위라면 주변 자기 주위라면 그것도 현실이요. 자기의 처지라면 그것도 다  현실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은 누구든지 패망입니다. 자기  현실에 따라서 움직인 것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 패망입니다.

그 패망한 것을 예를 들면 인류 시조 하와가 뱀이 자기에게 와서 말을 할 때에  뱀에게 끌렸습니다. 뱀에게 피동됐습니다.

또 그러고 난 다음에는 선악과를 보니까 선악과가 아주 그것만 먹으면 취하면  모든 것이 다 될 것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여져서 또 그 선악과의 매력에 끌려  가지고 결국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해와가 결과적으로 자기는 큰  해산의 고통을 당했고 또 천대를 받게 됐고 만물에게 저주를 받게 됐고 그  남편으로 더불어 아주 사이가 벌어지게 됐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사망을  당했습니다.

또 이 해와만이 아니고 해와가 주는 그 선악과를 아담이 거부하지 아니하고  해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면서 달콤한 말로 그렇게 간교하게 할 때에 고것이  아담의 현실이었습니다. 아담이 또 고 현실에 끌려서 먹으라하는 대로 선악과를  먹어 가지고 아담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결국은 패망과 사망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해와와 아담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좋은 하나님의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망하고 죽은 그 비참을 당하게 되었던가? 그것은 뭐 다른 변명할 것 없이  그 사람의 그 주위 환경인 그 현실 해와가 해와의 현실에게 피동된 그것 때문에  죽고 망했고 아담도 자기 현실에게 피동됨으로 망하고 죽고 뭐 딴 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다.

또 그 다음에 아담의 맏아들 이름이 가인인데 가인이 또 망하고 죽었습니다.

가인이 망하고 죽은 것을 무엇 때문에 망하고 죽었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인이 농사를 짓다 보니까 그만 하나님의 계약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  농사짓는 자기 직업 자기 직업에 피동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점점 직업적인  사람이 되었고 농사를 지으니까 농작물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계약도  잊어버리고 고만 자기가 농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그 농작물로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다가 패망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인이 자기의 현실 자기 형편 사정 처지 자기 환경 주위 거기 피동되어  가지고 하나님 섬김으로 망하고 죽었습니다.

또 그 후에 유력한 의인 노아를 보면 노아는 당시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는데 그 노아가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망령을 부리고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아와 같은 그런 의인이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패망의 길을 걸어 그 후에는 다시 노아의 이름이 없습니다.

노아의 이름이 없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그가 참 당시의 천하의 의인이라고  했지마는 자기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한 후에는 노아의 이름은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그 유명한 사람이 다시는 이름이 나타나지를 안했는데,  그러면 그 노아는 그때에 또 무슨 병으로 망하고 죽었더냐? 패망을 했더냐?  그것도 여전히 자기가 농사를 짓다 보니까 자연히 농사짓는 농작물의 가인처럼  포도 따고 포도주 만들고 이러니까 그만 한 잔 두 잔 이러는 가운데에 자기도  모르게 완전히 포도주에게 끌려서 포도주에 피동된 완전히 포도주에 끌린 사람이  되어 가지고 패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도 자기의 그 환경 주위라는 그 현실에게 끌렸지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자기 현실에 달콤하고 쌀쌀한 그 포도주가 자기 현실에 있으니 그  포도주에게 끌려가 가지고 패망을 당했습니다.

또 그 후 아브라함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참 위대한 그 신앙의  표본적 인물인데 그도 한번 애굽으로 내려가 가지고 망신을 하고 패가를 하고 참  패가 망신을 하게 됐는데 하나님이 급속한 섭리로 구출해서 그렇지 구출  안했으면 아브라함의 생명도 끊어졌고 아브라함의 축복은 다 패망됐습니다.

그렇게 급속히 구출을 하지 안하고 만일 사라와 바로 왕이 동침하고 결혼을  했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아브라함은 살해당했습니다. 패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위대한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패가망신의 그런 자기  생명이 끊어질 그런 길을 걸어가게 됐던가? 그것도 여전히 꼭 같습니다.

벧엘에 가 가지고 있을 때에 흉년이 들어서 생활에 곤경이 오니까 아주 그 먹고  사는 데에 심히 곤고한 그런 현실이 부딪히고 그 현실이 계속되니까 그만  하나님을 따라 나선 아브라함이지마는 하나님과의 맺은 계약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 곤경한 그 현실에 끌려서 그는 자기도 모르고 슬슬 타고 속화되어 가지고  애굽까지 내려가서 그런 큰 봉변을 당했고 망신을 했고 생명까지 끊어지게 된  것인데 하나님이 특별히 구출을 해서 나온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에 성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들어 말한다면 그는 뭐 수가 심히  많이 때문에 그것을 다 말할 수 없고 여러분들이 가서 의인으로써 패망한 토막이  있고 또 죄인으로서도 승리한 토막이 있고 선지도 패망한 토막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볼 때에 그 패망의 토막은 전부 현실 환경에 피동되어 가지고 된  일들인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베드로가 사도  바울 앞에서 대 망신을 해서 크게 견책을 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바울에게 큰  책망을 받고 그런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가? 그것도  유대인들과 같이 먹고 마실 때에 그 유대인이면서 아니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으로  더불어 같이 먹고 마신다는 그것을 말할 때에 그만 그 환경 이방인이라는 거기에  그 자극되고 피동되 가지고 그 자리에 안 먹은 척 하고 일어서다가 바울에게 큰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바울같은 그런 위대한 신앙가도 예루살렘 올라갔을 때에 너를 죽일라고 지금  달라들고 모두 모여 가지고 있으니 네가 이것을 면하는 데에는 네가 같이 데리고  있는 사람을 여게서 할례를 주면 너는 할례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그 인정을 하고  이 환란을 죽음을 면할 터이니까 그렇게 하라 해서 환경에 쓸려 가지고 할례를  반대하는 사람이 할례를 주장하는 그런 일을 해 가지고 대 수치를 당한 그  흠점을 역사에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패하고 망하고 죽는 그 길이 무슨 길이냐? 어떤 길을 가면  그렇게 되느냐? 그 길은 어떤 환경 형편 사정이든지 거기에 피동 되어 가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두 지파 남기고 열 지파는 르호보함 왕이 그들에게  너무 학정하는 말을 했을 때에 하나님의 계약은 다 잊어버리고 학정하는 그  감정에 부딪혀서 그 감정에 피동되어 르호보함에 학정하는 그 말에 피동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아니하여 르호보함을 배반하고 여호보함을 세워 가지고  이스라엘 열 지파가 완전히 전멸됐던 것입니다.

뭐 간단합니다. 성경에 돌아가거든 모든 선지 사도든지 어떤 시대든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하고 망했느냐 하는 그 원인을 찾아보면 꼭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현실에 피동됐습니다. 하나님의 계약에  피동되지 안하고 현실에 피동된 것마다 패망을 봤지 패망보지 아니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감정에 크게  충격될 때에 그 충격시킨 그것과 충격을 당한 그 자기의 감정이 이게 무엇이냐?  이것이 자기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도 하나님의 계약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가 충격된 그 감정대로 자기를  충격시킨 그 사건대로 거기에 피동되서 행동하면 두말할 것 없이 패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공과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이냐? 그럴 때에 참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약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양심껏 인도하는 인도를 생각하기가 심히  어렵지마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피동되면 어려운 것만치 큰 성공과 큰  영광과 존귀와 축복과 생명에 풍성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경제적으로 그  부요한 재산이 당장에 큰 실패를 당하는 큰 실패를 당하는 그것도 자기의  현실입니다. 실패를 당하니까 실패당한 거기에 자기가 고만 실패당한 사람되어  실패당한 거기에 사람이 되 가지고 움직이는 그것이 자기 현실에게 피동된  사람이니 그것이 패망의 길입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어떤 그 경제적 큰 패망이 왔다 할찌라도 패망이 왔다 할찌라도  경제 패망 그것이 나를 패망시키지 못하고 경제 패망에 내가 피동되고 하나님  잊어버렸을 때에 내가 패망하지 네가 나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경제  패망이라도 나는 너희에게 피동되지 않고 이 경제 패망된 이 현실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계약해 주신 이 계약대로 하나님 바라보면서 하나님 인도하시는 요  인도대로 따르겠다 하고 따를 때에 결단코 그 경제 패망은 그 사람을  패망시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패망으로 인해서 여러 배 백 배도 하나님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따른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명예에 속한 것이나, 경제에 속한 것이나, 감정에 속한 것이나, 위신에  속한 것이나, 지위와 권세에 속한 것이나, 사업이나 직장이나 정서에 속한  것이나, 공포에 속한 것이나, 어떤 것이든지 세상에 두렵게 할 때에 그 두려움은  자기의 현실입니다. 두렵게 할 때에 그 두려움에게 피동되어서 움직이면 고것은  다 패하고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두려움이 와도 그 두려움에게 피동되어 움직이지 않고 두려움이 와서  기절하면서라도 그 두려움에서 하나님의 계약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고대로 행동할 때에 그 두렵게 한 두려움은 반드시 내  종이 되어졌고 내 발아래 밟혔고 그는 나에게 하나의 상급의 원인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공과 생명과 존영을 취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가인과 아벨이 제사  때문에 시비가 났는데 그 제사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생활입니다.

행동입니다. 제사가 예배가 되었고 예배가 오늘은 성도의 생활이 됐습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는 것은 성도의 생활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벨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직업을 택할 때부터 하나님 계약 본위로  직업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속죄해  주시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계약을 가죽옷을 지어 입혀 남의 생명이  아니면 네가 그 보호를 입지 못한다는 그런 하나님의 계약이 선포됐고 벌써 그  말씀을 들었고 이러기에 그 후에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시간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씀한 것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 하나님이 순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포한 계약에 아벨이  순종해서 자기가 직업을 택할 때에도 그 형과 같이 농사를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약 본위로 계약 이행하는 데에 편리하고 쉬울 수 있는 가까운 그런  직업을 택한 것이 아벨의 직업 선택입니다.

아벨은 목축업을 택했습니다. 목축업을 택했으니까 마음껏 좋은 짐승을 깨끗한  짐승을 마음대로 가려서 제사를 드릴 수 있고 밤에도 낮에도 언제든지 드릴라면  드릴 수 있지마는 자기 집에 그게 없으면 드릴려면 며칠 경영을 해야 될 것이고  사와야 되는 것인데 아벨은 계약 본위로 직업도 택했고 그가 제사를 드릴 때에  그 계약 본위로 하나님의 계약에 따라서 계약대로 그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인정하는 그런 축복을 받아서 아벨은 지금도  예수님 다음으로 가는 큰 구원 역사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히브리 13장에 말씀  해놨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이 아벨의 계대에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직장이든지 직업이든지 선택을 할 때에 먼저 어데 돈이 많으냐? 어디가  영광스러우냐? 명예스러우냐? 어디가 평안하냐? 그런 본위로 사업이나 직장이나  그런 것을 취하지 않습니다. 돈보다도 수월한 것보다도 명예가 있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계약 지키기에 가장 용의하고 쉽고 편리한 그런 자기의 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벨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처녀가 상대를 구할 때에 총각이 상대를 구할 때에 돈보고 먼저 돈보고 세상  기능보고 세상 그 사람의 명예보고 '하이야 아무것이는 박사란다' '아무것이는  그 큰 회사의 뭐 사장이란다' 뭐이란다 이런 것만 보고 우쭐거려서 취하지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데에 편리하겠느냐 불편하겠느냐? 지키기에  어렵겠느냐 쉽겠느냐? 그 사람 자체가 그 위치에 있으면서 속화가 잘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아벨과 같은 계약 본위로 평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것까지는 죄가 되지 아니하지마는 가인같은 그 위험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가인같이 위험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랬지마는 아벨은 벌써 직업을 선택할 때부터 하나님의 계약을 본위로  중심으로 삼아서 어떻게 하면 계약 이행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섬기기에 좋고  편리할까 하나님 중심 계약 본위 요렇게 선택을 한 아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하나님이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 쉽소.

자기가 어떤 업을 택하든지 하나님과 그 계약 중심으로 하는 사람은 성공과  생명과 평강이고 하나님과 계약은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그거 위주로  그거 중심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마는 죄는 아니지마는  결과적으로 위험에 빠져서 실패하기 쉽습니다.

처녀들이 저보다 낫다 싶어서 믿음은 없지마는 세상에 구비한 그것보고 가  가지고 없어질 것 가지고 번들 번들하게 차리 가지고 있지만 새벽기도가 자유가  있소, 주일 지키는 것이 자유가 있소, 신앙 양심의 자유가 있소, 거기 코가 끼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언제 마음 기울일 여가 없이 거기 걸리 가지고 그것만  가누다가 마지막에 송장되 죽어. 곱게 송장이나 되 죽으면 하지마는 난중에  그러면 뒤에가서 천대 멸시를 받기를 얼마나 받는지 그 다음에는 이혼도 당하고  첩 꼬라지도 보고 비참하게 가련하게 다 자기가 취한 자기 열매 자기가 먹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는 죽었으나 믿음으로 오히려 말하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 다음에  일 제일 많이 하는 분이 아벨이요. 예수님 제일 많이 하고 그 다음에는 아벨이  그 다음으로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소. 성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의인 에녹이 있는데 그 에녹이 어떻게 해서 죽음을 보지 안하고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성경에 표현하기를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니까 하나님  저버린 일이 없었지 하나님 잊어버린 일이 없었지 하나님과 같이 움직였으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피동됐지 다른 것에게 피동됐으면 하나님 버리고 갔어야지  내나 그것도 하나님에게 피동이요. 하나님의 계약의 피동이요. 인생에게 죽지  안하고 영생하는 영생은 하나님에게 피동에서만 된다. 현실에 피동되면 망하고  죽는다.

노아같은 사람도 마지막에는 현실에 피동 되어서 망했지마는 천하에 모든 인간이  다 망할 때에 노아만은 망하지 안할 때에 노아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천하가  망하는데 저는 망하지 안하고 살았는가?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준행함으로 그가 온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고 말씀했습니다.

노아도 딴것 없소. 환경에 현실에 피동 안 되고 하나님에게 피동될려는  요것으로써 노아가 일차 성공하고 이렇게 성공한 노아가 이차에는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현실 환경에 피동됨으로 패망됐습니다.

의인도 소용없어요. 성공자도 소용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피동되면 사망이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피동되면 생명과 평강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실패했지마는 아브라함은 즉시 그때에 회개하고 벧엘에  돌아와 가지고 벧엘에 와서 제단 쌓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아브라함이  현실에 피동된 일이 없었습니다. 롯하고 그렇게 시비했지마는 시비하는 그  시비에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께 피동됐습니다. 소돔 왕이 그렇게 많은 제물을  줬지마는 그 제물이라는 현실에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됐습니다.

백세에 난 독자의 문제가 있었지마는 고 현실에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피동 되어서 그는 최후에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고로 의인이라도 할 수 없고 죄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되면  피동된 고것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하나님 대립은 무엇인가? 이 세상입니다. 세상과 세상이 있는 것이 만들어 놓은  그 현실이 하나님과 서로 이래 견제합니다. 어느 것이냐? 하나님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냐 현실이냐? 네가 어느 것을 따르겠느냐? 언제든지 이  둘은 대립적으로 견제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패망인 줄 알면서 왜 그 현실에게 피동이 되는가? 패망인줄  알면서 와 현실에게 피동이 되는가? 피동이 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 보다  자기에게 더 권세가 있어서 그리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는 하나님 보다  큰 사람이 되어 있는 그 표시입니다. 자기에게는 하나님보다 지가가 더 위대해져  있다는 표시가 현실에서 그 현실에 피동되는 것으로 표시됩니다.

그런고로 현실에 피동이 됐나 안 됐나? 그것은 그 열매를 보아라 그 열매가  무엇이냐? 그 열매가 실패와 사망 사망이다. 그러면 네가 네 왕이냐 하나님이  왕이냐? 네가 네 주인이냐 하나님이 네 주인이냐? 네게 대해서 하나님이 네게  대해서 하나님 되어 있느냐 네가 너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되어 있느냐? 네게  대해서는 네가 제일 큰 자냐 하나님이 큰 자냐? 누가 큰 자냐? 요것은 무엇보고  아느냐? 현실을 만났을 때에 현실에게 피동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않는  고것으로써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요것으로 표시가 되는 것이요.

사람들은 참 잘 속습니다. '아 내가 주님에게 속하고 주님은 나보다  크시지''내가 주를 위해 살지' '주가 제일이지' '주를 제일 높이지' '주께서  네게 주인되시지' '나는 주께 속했지' '주님은 나보다 크지' 입술을 암만 많이  해도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자 네게 대해서 네가 큰지 내가 큰지 보자' 하시고  딱 현실을 줄 때에 그때에 제가 하나님보다 크면 고 현실을 따라 피동하고 제가  하나님보다 작으면 현실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께 피동되는 고 결과를  보아서 딱 알도록 만듭니다.

여러분들 이것은 성경에 가르치지 안하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해와가 뱀이 와서  말하기를 '너 이거 먹으면 네가 하나님 같이 될 줄 알고 그래 하나님 그래  금한다' 하니까 이 하와가 '아 나도 하나님 같이 되겠구나' 해서 벌써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으로써 하나님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는 고것이 되고  난 다음에 선악과를 보니까 그렇게 아름다워서 안 먹을 수 없어서 먹었던  것입니다.

선악과 먹은 것은 벌써 하와가 자기보다 하나님을 크게 여겼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크게 여긴 것이 앞서 있는 그 증표입니다. 그러면 하와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게 여긴 그보다 앞선 것은 뭐입니까? 그보다 앞선 것은  뱀의 유혹을 받은 것이 그보다 앞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만났든지 그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현실로 이렇게 통과하지 못하고 그 현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그 현실에게 피동될 때에는 감정으로 피동되든지 행동으로 피동되든지  어떤 것에게 피동되든지 고 현실에게 피동된 자기가 될 때에는 요거 잘 모르면  몰라요.

피동될 때에는 그 뿌럭지를 말할라고 요것만 말할라고 합니다. 피동될 때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있어서는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있어서는  하나님보다 큰 우상이 되어 있소. 자기에게는 자기가 제일 큰 자가 되어 있소.

하나님은 우상의 적입니다. 우상은 씨를 남구지 않습니다. 전멸을 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자기를 우상 만들어 하나님과 대립이 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대립되어 있는지 없는지? 마귀라는 놈이 '아내가 하나님과  대립되 있다' '나는 하나님께 복종한다' 속기 쉽습니다. 네가 우상이 되어  있느냐 자기가 우상이 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느냐? 고것은 네가  만남 현실에서 현실에 피동되느냐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현실을 다스리느냐?  요게서 어느것이 크냐 하는 것이 표시되는 것이니까 '나무를 모르거든 그 열매를  보아서 알아라' '이 결과를 보아서 알아라'  그러면 현실에게 피동되면 자기가 하나님의 대적인 우상이 되어 있고 벌써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있는 자기라 하는 요게까지만 오늘밤에 생각합시다.

누구든지 현실에게 피동되거든 자기라는 자기는 하나님의 원수인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요. 변론하지 말고 틀림없습니다. 또 자기는 벌써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가지고 있는 마귀의 자식이 되어 있는 자기라는 것을  변론하지 말고 인정해야 됩니다.

복잡하면 안되고 오늘밤에는 요것만 여러분들이 성도의 패망의 길이 무엇이냐?  성도의 승리의 길이 무엇이냐? 또 네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에게 우상되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느냐? 내가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마귀의 자식이 되어  있는지 안 있는지 무엇으로 알겠느냐? 뱀에게 유혹 받은 후에 하와는 자기가  하나님되고 싶었소. 자가기 우상 되었소. 우상되고 나니까 선악과가 그렇게 보기  좋았습니다. 안 취하면 안 될 만큼 되었습니다. 그게 자기의 현실인데 거기  피동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밤에 두 길과 열매를 보아 그 나무 둘을 알도록 자기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있는 마귀 자식이 되어 있는지 마귀 자식이 되어 있으면서 얼마든지 목사 노릇  얼마든지 장로 노릇 얼마든지 집사 노릇 얼마든지 설교도 합니다. 마귀의 자식이  되 있으면서 또 얼마든지 설교합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요것으로 심사해야 됩니다. 요 잣대로 재야 됩니다.

자기 현실에 피동되면 벌써 마귀의 자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피동되면  벌써 자기가 하나님 앞은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주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여러분들 여게서 판정 지워야 됩니다. 천지는 변해도 이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데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이 어데 있으며 이보다 더 우리가 욕심내고  생명을 내걸고 힘써야 될 큰 일이 어데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크고 유익된 성공이 어디있소. 이보다 더 복된 길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화된 길이 어디 있습니까.

예. 간절히 기도해요. 제 말로만 가지고 안 됩니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씨름입니다. 거기서 죽고 망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036 성탄-5가지 은혜/ 누가복음 2장 14절/ 881225주전 선지자 2015.11.06
3035 성탄기념-영광,기쁨,평화로 열매/ 누가복음 2장 12절-14절/ 871227주전 선지자 2015.11.06
3034 성탄의 근본 목적/ 누가복음 2장 14절/ 851225성탄축하 선지자 2015.11.06
3033 성탄-전도지/ 사도행전 1장 8절-9절/ 88120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6
3032 성탄-전도지/ 창세기 3장 1절/ 88121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6
3031 성탄-전도지/ 이사야 9장 1절-7절/ 881218주전 선지자 2015.11.06
» 성패의 두 길/ 창세기 3장 4절-6절/ 810710금야 선지자 2015.11.06
3029 성패의 두 길/ 창세기 3장 4절-6절/ 810711토새 선지자 2015.11.06
3028 성화구원의 어려움/ 마가복음 10장 23절-31절/ 840429주전 선지자 2015.11.06
3027 성화구원의 어려움/ 마가복음 10장 23절-31절/ 840429주후 선지자 2015.11.06
3026 세 가지 고난/ 베드로전서 4장 12절-19절/ 830731주전 선지자 2015.11.06
3025 세 가지 구별/ 마가복음 7장 1절-23절/ 1974. 5. 12. 제19공과 선지자 2015.11.06
3024 세 가지 구원을 기념하는 것/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81013목새 선지자 2015.11.06
3023 세 가지 권능/ 사도행전 1장 3절-9절/ 860614토새 선지자 2015.11.06
3022 세 가지 능력으로 목회/ 마태복음 3장 11절-12절/ 860407교역자회 선지자 2015.11.06
3021 세 가지 대속으로 기쁨과 평화 결실/ 누가복음 2장 14절/ 861214주전 선지자 2015.11.06
3020 세 가지 대속의 공로의 역사/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820611금야 선지자 2015.11.06
3019 세 가지 멸망/ 누가복음 2장 1절-14절/ 851229주전 선지자 2015.11.06
3018 세 가지 믿음 만드는 일/ 로마서 1장 14절-17절/ 860304화새 선지자 2015.11.06
3017 세 가지 받는 방편/ 히브리서 11장 6절/ 791114수새 선지자 201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