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11:22
생명의 의미와 영생을 이루는 방편
1988. 1. 22. 금새벽
본문: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언제나 우리 현실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과,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이 있는 것을 요새 늘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멸망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인도의 길을 걷는 데에는 얼마나 힘드느냐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곧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말씀입니다.
언제나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나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때에 반드시 내 앞에는 생명과 멸망의 갈래길이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겠고, 또 그 길만 있을 뿐 아니라 멸망으로 이끄는 영이 있고 생명으로 이끄는 영이 계신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영은 전인류를 다 자기의 부하를 삼은, 첫 아담을 승리한, 세상을 점령한 강한 영이요, 또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영은 자존하셔서 우주와 영계를 창조하시고 주권하시는 완전하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영이 있어 우리를 이끌려고 할 때에 이 세력은 심히 강하나 예수님께서 승리했기 때문에 이 세상 왕인 마귀도 우리에게는 왕노릇을 하지 못한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악령의 인도를 환영하면 악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우리가 악령의 인도를 물리치면 그는 우리에게 강제할 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때문입니다.
대속을 입지 안한 불택자들은 절대 강제입니다. 그들은 벗어날 수가 절대 없습니다. 영원히 그의 종으로서 영육이 지옥에 가서 탈 때까지 같이 가서 타서 같이 영원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이 있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의 권세를 입은 사람들은 마귀에게는 이 권세로 자유 있고 하나님에게는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강제하지 아니하시고 자유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 영이 자기 앞에 있는 줄을 알고 하나님의 영을 자기가 환영해 영접하면 그는 대주재시요, 주권자시요,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와 도움을 받을 때에 모든 피조물은 그 인도를 받는 자를 직접 돕든지 직접 돕는 일이 없는 것은 간접으로 돕고 그 역리적으로 돕기 때문에 꼭 해하는 것 같으나 결국은 돕는 일이 됩니다.
인간이 이해 못 할 돕는 것으로써 지극히 큰 도움을 주실 때에는 그 도움은 사람이 보기에는 망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여집니다. 주님 때문에 망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주님 때문에 망한다. 다니엘도 주님 때문에 망한다. 모든 평소의 생활도 주님 생각할라 하니 자유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고통스러운 생활이다.
마지막에 불미 속에, 사자굴 속에 들어갈 때에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자유하지 못하고 항상 절제 생활을 해야 되는 그 어려운 생활이 무궁세계에 그는 흠과 점이 없는 깨끗한 자기로 조성해 가지고 가게 되었고 그런 어려움 당한 그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냈고 그 나라에, 하나님을 무시하던 나라에서 하나님을 높여 섬겨 알고 믿는 그 백성들로 충만하도록 그렇게 만든 그 결과였지마는서도 처음에 만날 때에는 그렇게 저희들을 돕는 것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통계를 봤고 선진들의 걸어간 그 길을 봤기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을 지킬 때에는 다 우리를 돕는 그 결과를 맺는다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이 걸음을 걸을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이란 말과 이 생명이라는 말이 다릅니다. 영생보다 생명은 무한히 그 가치와 권위가 탁월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한번만 얻지 두번 얻지 못하는 영생하는 생명이요, 생명은 대주재이신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연결해서 결합되는 것이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지극히 고귀한 것으로서 순전히 예수님이 대신하셔서 모든 것을 제물되어 갖추셔 가지고 이 생명 곧 하나님과 우리와의 친합이 된 이 결합이 된 것이지 인간의 노력은 하나도 든 것 아닙니다.
이러기에, 이 귀중한 생명은 택한 자들은 다 은혜로 얻게 됐고 불택자들은 천하 사람이 다 달라들어도 한 사람의 생명도 얻지 못하고 이 생명 얻는 근방에 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기가 실질적으로 듣지 안하고 우리 강퍅한 마음으로 상관하기 때문에 그 가치와 능력을 아주 무시하게 됩니다.
이 세상 걸 가지고, 자연 계시는 이 세상에 되는 모든 것이 다 그저 볼 게 아니라 그것이 자연 계시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땅 위에서 그 회사에서는 고 회사라는 조그만한 점 하나만도 못한 그 속에서는 사장과 자기와 둘이 친합이 된다면 그것도 좋다, 조그만한 지역 이 부산시라면 시내에서 그 시장과 자기와 단둘이 단합이 됐다고 하면은 그것도 귀하다, 대통령과 그와같이 됐다면 귀하다, 뭐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화합되면 귀하다.
요새, 올림픽에 백 육십 한 나라든가 그렇게 모두 다 참가하게 된다고 귀하다 하는 거 그런 거 다 귀합니다마는 그런 것이 우리가 생명 얻은 이와는 너무도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뭐 얼마나 귀하다 하는 그런 숫자로 뭐 억억억억억 평생해 억억억억한다 해도 그 숫자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이렇게 귀하건마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이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큰 구원을 다 저버리고, 택한 자들도 있는데.
이제 오늘이라도 세상 딱 떠나면 자기가 땅 위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어떻게 믿었으며 성령을 어떻게 믿었으며 진리를 어떻게 믿었나, 어떻게 평가했으며 어떻게 대우했나 하는 그것을 영원히 하나님께서 고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보응해 주시는 것은 당신을 좋아한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을 좋아하고 완전으로 사는 것만치가 그의 가치요 무궁세계 생명 세계에 그를 등용할 수가 있고 그의 실력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이게 생명이요, 우리가 생명은 다 같습니다.
영생은 생명이 산 생활이 영생입니다.
우리 현실에는 생명이 현실 생활을 주장해 가지고서 하기도 하고 현실 생활을 생명이 주장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이 주장할 때도, 주관 중에도 욕심이 주관할 때도, 감정이 주관할 때도, 세상 소망이 주관할 때도, 자기 성질이 주관할 때도, 자기의 그 모든 정서가 주관할 때도, 자기 현실을 가족이 주관할 때도, 가족에게 끌려서, 남편에게 끌려서, 아내에게 끌려서, 자녀에 끌려서,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서, 자기가 좋아하는 이에게 끌려서, 이런 모든 자기 취미에 끌려 별별 것들에게 끌려 가지고 네 현실이 인도를 받느냐, 거기에 하나님과 결합된 그 결합이 너를 끌어서 인도를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 이렇게 있는데 멸망의 문은 넓고 길이 아주 평탄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 이랬습니다. 찾는 이가 적다, 찾는 이가 많다 이렇게 말했소.
이러니까, 인간은 다 인간이지마는서도 택함받은 자들이 적고 택함받아서 중생된 자들은 많지마는 중생된 하나님과 결합된 그 결합 그 권세가 내 현실을 주관해 가지고 한 자욱씩 밟아 나가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우냐?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습니까?’ `네가 성경에서 뭐라고 가르침을 읽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또 네 이웃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그래 예수님께서 ‘잘 알았다. 그대로 행하면 된다. ' 이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영생을 이루는 데에 이걸 다해 가지고서 영생을 이루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영생을 이루는 것인가? 이것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 내가 마음을 어떻게 다할까? 주님 사랑하는 것으로서 내 마음을 다하는데 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내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내 힘을 다해서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내 뜻을 다해서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하는 이것을 우리가 알고 해야 되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기 마음을 졸이고 자기 목숨을 바쳐 놓는다고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그 방편을 말한 그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나 좁은 문 넓은 문,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찾는 데에 네 마음, 목숨, 힘, 뜻 다해라.
또, 네가 거기에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분이 있고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으니 둘 중에 네가 어느것을 선택해서 네가 믿고 영접을 할 것이냐? 이것을 네가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여서 네가 찾아서 결정 지워라.
또, 이분의 인도를 따라서 네가 그 길을 걷는 데에 걸어가는 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네가 걸어가지 그리 안 하면 못 걸어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사업만치도 마음을 기울이지 안한 그까짓 걸로 예수 믿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다 그래 예수 믿지 않소! 저도 지금 늙어서 오늘 내일 하지마는서도 그래도 한시도 이 일을 위해서 생각지 안할 때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있는 데는 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는 기어서라도 있는 마음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목숨이 다 돼야 될 때에는 목숨까지 다 바쳐서 갈라고 각오하고 매일 기도하는 것이 이것 다하지 못할까 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이것보다 나은 거 그런 거 저 예수 믿기 딱 시작한 그때부터 그보다 나은 것으로서 여겨본 것 없었습니다.
내가 평생 내 마음에 아픈 것은 그것도 주를 위해서 경제에 대해서 자녀에게 들인 그 모든 돈과 내가 하나님께 들인 모든 돈과 이걸 비교해 보면은지금은 하나님께 들인 게 많습니다자녀들 공부시킨다고 할 때는 그때는 물론 주를 위해서 했지마는서도 늘 마음에 그때에 등록을 할 때마다 내 마음에는 내가 한목 몽땅 하나님에게 이 들이는 것이 이 아이들 등록하는 이것만치 들인 그 액수가 크나 적으나 늘 그런 것 비교해서 하나님께 들인 액수보다 단번적으로는 그 액수가 세상에 무슨 가족이나 이 세상에 대해서 바친 그런 액수가 크게 지나는 고민에서 못 견뎠습니다. 그래서 고걸 싸워서 고 액수를 해도 고보다는 이 액수가 컸다 이래 돼야 안심이 되고 또 통계를 맞춰도 이제 통계 맞춰도 큽니다.
그렇게,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기 할 대로 다하고 자기가 가치로 아는 것은 자기 가정에 있고 자기 욕심에 있고 자기 취미에 있고 자기 행락이 있고 그저 이리저리 다하고 남는 찌끄러기, 찌끄러기 아주 찌끼 그거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서 영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요! 영생이 어떤 게 영생인데? 영생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된 그 결합, 그 결합을 가지고서 이 세상 언행 심사를 함으로 그 결합을 따라서 온 세상이 반대하는 것을 세상을 이긴 거요, 영생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영생이오.
영생은 하나님 한 분에게 이끌려서 모든 피조물을 다 상대할 때에 자유하는 것이요, 모든 피조물에게 끌리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끌린 그 일을 하다가 피조물이 반대하면 생명을 빼앗겨도 빼앗기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빼앗기지 피동을 버리는 일은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우리가 한목 못 하니까 한토막 한토막 이래서, 그래도 승리한 토막은 승리한 토막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이러니까 진합태산으로, 우리가 기도를 하루 삼십 분 자기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 하자는 것도 하다가 못 하다가 이래도 한 것만치, 어떨 때는 반 시간 한다 하는 게 무엇이 들어 방해를 해 가지고서 십 분 기도하고 또 그다음에 또 그 뒤에 다음 시간에 좀 있다가 또 십 분 기도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할라 하면은 인간들이 와 가지고서, 이래서 세번 네번 합해 가지고 비로소 삼십 분 기도를 채우고 이렇게 해도 주님이 뿌스러기를 모아도 모은 그것을 무시하지 안하고 ‘한목 몽땅 돼야 된다’ 하지 안하시고 이렇게 해서 이것을 주 모아 가지고 인정해 주시는 이런 단편 구원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해 주시고 이런 긍휼을 베푸시는데, 우리는 몽둥이가 아니면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꼭 벌을 받아야 아이구 하나님 이렇지, 멸망을 해서 멸망당할 때는 택한 자들이 하나님에게 징계받아 가지고 멸망을 당하는 그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 자복 안 하는 자가 없고 두려워하지 안하는 자가 없고 후회하지 안하는 자가 없으나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에 은혜는 받지를 못합니다, 다. 영원히 불가운데 구원 얻은 것같지.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 같다 하는 것을 나는 처음에 불 가운데 지금 있으면서 구원 얻은 것 같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불 가운데 있으면서 구원을 얻어 나왔다 그건데 그러니까 뭐 다 타버렸습니다. 다 탔어. 입은 옷도 타버리고 다 탔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진 것 하나도 없지, 갑자기 호텔에 누워 자다가, 둘이 벌거벗고 누워 자다가 그리 아니면 혼자 벌거벗고 누워 자다가 갑자기 불나니까 뛰어 나오니 어떤 사람은 빤스 바람으로 나오고 어떤 사람은 발가벗고 나오고 그게 뭐 좋을 게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 거지지. 아무 것도 없지.
그거야 거기 나왔더란대도 그 밖에 자기 재산이 있으니까 그렇지마는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딱 떠날 때에 그런 가운데 떠나면 어데 자기 밖에 무슨 소유가 있습니까? 홍포입은 부자와 같지.
이러니까, 급하고 거지고 놀랬고 추접하고 모든 사람 앞에 제일 가련한 신세지, 이게 우리가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
그런고로 우리가 이렇게, 영생한다 말은 자기 현실을 죽은 생활하지 안하고 자기 현실 생활한 것이 한 시간 살았든지 십 분을 살았든지 자기가 잠깐 이삼 분을 살았든지, 어떤 사람은 이삼 분도 어려워. 자기 전부를 다 기울여서 주님의 뜻을 행할라고 하는 것이 일생 동안 일 분도 해보지 못하고 천국가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거 다 쓰레기라.
하나라도 행치 안하고 하늘나라 간 자는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모든 것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사람은 지극히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그렇게 하늘나라는 정확합니다. 행위에 대해서 정확하요.
그래서, ‘네가 심은 대로 거두리라’ 제가 콩을 심었는데 행여나 만 개 중에 혹 팥이 한 개라도 나지 않겠는가? 안 나요. 그 심은 고대로 나는 것이지. 인간의 행한 그대로 영원히 보응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이렇게 마음 모든 것 다해서 할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내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고 뜻대로 행하는 요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 사랑하는 법이 없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고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요한1서에 내가 그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 형제를 상대해서 형제 보는 데에 내가 하나님의 그 뜻을 바로 찾아 고대로 행하는 것이 형제에게 양식을 주는 일이 되고 고것이 형제를 살리는 일이 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된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총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가지고 뭣 할 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데에 이 네 가지를 다 기울여야 되고 찾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이 네 가지를 다 기울여야 되는데 전부 세상에다 다 기울이고 껍데기만 가지고, 속에는 자기라는 고놈이 들어서 악이 들어서 주인이 돼 가지고 그놈이, 아무리 설교도 제 비위에 맞으면 헤헤 웃고 제 비위에 틀리면 헛일이오. 하나님이 고걸 복수할라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 악성 악습 요놈을 죽여서 멸하기 위해서 당신이 죽지 안하면 그걸 죽이지 못할 때에는 당신이 죽어서까지 해서 멸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하셔서 그 긍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잡았고 생명의 권세도 다 잡았기 때문에 생명에 속한 것도 당신이 주권하고 계시고 사망에 속한 것도 당신이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주권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깨달은 자가 땅 위에 뭣을 두려워할 게 뭐 있어, 있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두려워하지 안하고 함으로써 저것이 나 때문에 구원에 지장이 됐다 이게 있을까 싶어서, 사도들도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두려워했지 정말로 피조물 가운데 두려운 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소.
제가 처음 믿을 때에 사도행전을 보고서 사도 바울이 그 각하들에게 아주 존경을 하고 이와같이 말을 조심 있게 할 때에 뭐 이래 두려워할 게 뭐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죽으면 영생하는데 뭐 두려워서 이래 비겁하게 이렇게 말을 저자세로 이래 했을까 이래 생각했는데 차차 예수를 믿고 보니까 그분이 자기의 하는 언행 심사가 그들에게 혹은 조그만치라도 감정을 일으키든지 그 속에 주관을 자기가 들어서 일으켜 가지고서 자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자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나오는 데 거리낄까 해서 그를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그렇게 조심했고 저자세로 했지 그것들이 두려워서 그래 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그러합니다.
예수 믿는 자가 믿지 않는 가정에 가서 예수 믿지 않는 남편과거에 그까짓 거 주먹으로 뭉쳐 버리면 다 뒈질 만치 돼 버렸고, 요새는 지금 뭐 참 인권 인권 하는 게 이 기독교로 말미암아 많이 일어나 가지고서 사람을 이래 하지마는 지금으로부터 한 사오십 년 전만 해도 세력 있으면 인간 까짓 거 뭉캐 버리면 뭉캐 버립니다, 천명 만명이 해봤자 잘난 사람이 하나 뭉캐 버리면 뭉캐져.
이래도, 이렇게 뭐 예수 믿지 안할 때는 말만 해도 벌벌벌벌 떨던 그 사람도 예수 믿고 나니까, 예수님을 믿으니 나는 자유가 없어지고 그거는 자유가 있어집니다.
나는 그것에게 뻘뻘 떨고 그거는 내게 대해 큰소리 합니다. 왜? 구원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제가 믿은 후에 제일 무서운 자가 쪽 믿음 남편이오. 아내는 교회 나오는데 그 남편이 교회 나오지 안하니 그 사람이 제일 무서워. 뻘뻘 떨어. 그는 말하면 무슨 소리든지 죄되지 않는 데는 복종을 해야 돼. 왜? 그게 참말로 두려워서? 그 상대방을 사랑해서 구원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예수 믿으러 처음으로 나온 ‘예예’ 굽신굽신하니까 제가 가서 눈을 뚝 부릅떠 보니 ‘예’ 막 그저 고양이 앞에 쥐 모양으로 기어가고 이라니까 제딴에는 ‘교회 뭐 내가 제일이다’ `야, 이 미친 놈아, 너를 구원하기 위해 그렇지 네까짓 걸 무서워서 그런 줄 아느냐? 일본 나라의 그 정부의 전부도 무서워하지 안하고 다 나가는데 네가 무서워 그런 줄 아나? 무서워 그러는 게 아니라 네게 구원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조그만치라도 네가 이로써 구원에 손해볼까 싶어 그런 것이지 정말로 너를 두려워서 그런 줄 아느냐?’ 첫째는 하나님이, 네가 이놈아 그에게 잘못해서 거리낄까 하기 때문에 하나님 두렵고 너를 사랑하려고 네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이렇지마는서도 나중에 차차 예수 믿고 보니까 그것이 바른 정신으로 산 것이요 또 그것이 비판적으로 바른 생활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영생 얻는 데에는 마음 다하고 또 뭐 다합니까? 목숨 다하지 안하면 아무리 발견해도 행하지 못해.
또, 바로 알라고 하는 데도 어떨 때는 바로 알라고 하니까 사건이 와서 부딪혀서 바로 알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다가 어떨 때는 바로 알라 하니까 목숨을 안 내놓으면은 바로 아는 그 길을 바로 알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영생은 언제든지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야 영생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것 다하지 않으면 영생이 안 이루어지는 이런 어려운 구원을 제가 그까짓 거 장관이라고, 제가 무슨 시장이라고, 제가 무슨 구청장이라고, 동장이라고, 제가 무슨 통장, 반장이라고, 제가 호주라고, 제가 무슨 총장이라고, 제가 무슨 부장이라고, 사장이라고, 제가 대학생이라고, 제가 좀 컸다고, 다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뭐 내가 다 내 욕심대로 살고 찌끄러기 이것만 해도 다른 사람보다 많다’ 네 교만이 들어서 너를 멸망케 했다. 이러기 때문에 다 들이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지금 자기가 평생 처음 만나는 첫날을 만날 때에 첫날 이 첫시간을 하나님 앞에 와 가지고서 은혜를 감사하고 잘못된 것을 찾아서 사과하고 자기에게 어려운 일을 주님하고 의논해서 도움을 구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렇게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뭐이요? 이렇게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을 들어 보십시요.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
어데까지 제가 돼 가지고 있어도 다 그래. 별 인간이 없어. 다 그래. 하나님 앞에서는 다 그래.
이런데, 새벽기도 나오라 하면 입을 비쭉거려 쌓으면서, 가소롭다 말이지? 속 마음으로는, 겉어머리는 안 그래도 속 마음으로는 비웃으면서 ‘새벽기도요? 내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고 이렇게 내가 지금 사업은 하고 중대한 지금 책임을 지고 있는 내인데 나를 새벽기도 나오라고? 내가 그런 거 하고 뭐할라고?’ 그럴 때 속으로는 야 이자식아 네가 그러면 네가 망할 일을 해야 되겠느냐 네가 살 일을 해야 되나? 네가 중한 일을 맡았으면 중한 일을 맡았을수록이 네가 정신이 더 똑똑해야 되고 중한 일을 맡았을수록이 네가 더 조심해야 되고 중한 일을 맡았을수록이 네가 실수를 안 해야 되지.
첫째 실수 안 하는 것이 처음 만나는 첫날 하나님 만나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관계 맺는 것이 실수 안 하는 것이라. 제일 중요한 일이라.
이라니까, 그전에 여기 시 총무국장으로 있던, ○장로, 전화를 혹 해 가지고서 뭐라 하니까 어짜든지 새벽기도 그 안 빠질라고서 지금 회의가 있고 하니까 여게 와 가지고서 그저 설교 딱 마치면, 요이 땡 하는 거 모양으로 설교 딱 마치면 고만 뛰어 나갑니다.
왜? 그 사람 충성했소. 그래 나가면 뭐 대통령 돼. 대통령은 자격은 다 되고 남아.
대통령 뭐, 요번에 대통령 모두 출마한 사람 많지만 그 사람 같은 그런 실력과 자격과 사고방식이 거게 뛰어난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수만 명 됩니다. 수만 명 돼. 그만치 지능 못한 사람들이 없어. 다 하나님이 세우면 다 서지는 것이지.
그래 조심해서 그런 자리에 있으니까 자기 직장에 제일 앞에 가 앉았답니다. 제일 앞에서, 자기가 맡은 과에서는 제일 먼저 앉아 가지고 그 일호 앉고 다른 사람이 그 뒤에 이호로 오지, 그게 충성이라. 그런 것이 자꾸 하나님을 첫째 만나고 이래 하면 되어지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흐려집니다.
믿는 일 하면은 일 못 출 줄 알아도 믿음이 있을 때는 머리도 착착 돌아가고 몸도 착착 돌아가고 정신도 착착 돌아가서 모든 걸 다 그라지마는서도 믿음이 없을 때에는 이 정신이 헝클어져 가지고서 나중에 보면 ‘아, 그거 시간 지나갔다 아, 그거 후회다. 그걸 할 걸 할 걸. ’ 할 걸 할 걸 그랄 걸, 걸걸만 생겨지지 사전에 자기에게 나오는 게 없어.
암만 제까짓 놈이 공부할라고 그래 쌓아도 하나님 무시하면은 이 대가리가 지금 뭐 딴데 혼잡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 안 나. 거석하면 쫙 생각이 나 가지고 쫙 다 해 버리고 시험칠 때도 다하고 공부할 때도, 요렇고 요러니까 요거 해야 된다 조거 해야 된다 요리요리 요리하면 잠깐 하면 되는 것이고, 사람이 단어를 외우는 데에도, 단어 외우는데 하나님 같이 할 때에는 일 분 외우는 것이 여러 시간 외운 것보다 나아. 하나님이 같이 안 할 때는 이 머리가 혼잡해져 가지고서 암만 외워봤자 안 외워져. 단어 하나를 외울라 하면은 어떨 때는 그 사람이 한 시간도 더 걸리고 두 시간도 더 걸려.
대번이야 외웠지. 외웠지만 없어지는 거 어째. 한번 외워 놓으면 쭉 일생을 가도 자기에게 그것이 단어가 필요할 때는 고대로 계속해 있는 것이 하나님이 머리를 열어 주시는 거라. 전부 영육의 사는 것이 주님에게 있는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교만해서 제 생각대로, 이거 중학만 가면은 교만해 가지고 예수 믿는 거는 시시하게 여깁니다.
고등학교만 가면 그게 변해집니다. 대학 가면 변해지고, 이것이 그때까지 안 변해진 것도 외국에 유학이나 한번 갔다 오면 변해져요. 마귀 지식 썩은 것만 배워 가지고 저 죽는 것만 배워 가지고 와 가지고 그것이 뭐이 큰 줄 알고! 이래서, 우리 양성원에는 그 교수들을 이제는 있는 박사뿐이지 새 박사는 들여 세우지 않습니다. 박사 학위 가진 사람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등용하지 않습니다. 왜? 그거 유익이 없어, 보니까. 사람을 살리는 데에 그게 유익이 없어.
사람을 미끄러지게 하고 죽이는 데는 유익이 있어도 살리는 데는 유익이 없어.
인간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가르쳐 주셔서 알게 하시고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모르도록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랬어. 주님이 그랬어.
그러면, 세상 지혜 있고 통달하는 것이 천국 구원 이루는 데에 그것이 도움이 돼요 방해가 돼요? 방해가 많지 도움은 많지를 못해.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아서 이것을 예수 믿는 데에 투자해서 예수 바로 믿는 데에 사용할라고, 이 지식 이거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데에 사용할라고 그걸 자기 소유물로 사용하는 자는 그거야 유식한 사람이 더 구원 잘 이루지.
그러나, 유식한 사람은 그 지식이 자기를 지배할 줄로 생각하고 있지 그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을 찾는 데에, 바로 찾는 데에 이용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지식이 너를 교만케 했다’ 교만케 했다 말은 무슨 말이요? 교만한 자는 물리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고 명상을 많이 하고 자기가 실행해서 자기 양식이 돼 가지고서 자기가 이것을 소화를 해서 여게서 얻은 은혜를, 깨달은 은혜를 가르쳐야 그게 젖을 먹이는 거라. 갓난 아이에게 자기가 먹을 그 떡국을 어린 아이에게 집어 넣으면 아이 캑 그러며 죽습니다. 먹고 소화해 가지고 젖을 먹여야 되지. 자기가 이 공과를 외우고 새김질해 가지고 실행해서 거게서 깨닫고 자기가 느끼고 변화된 그 자기가 이 은혜를 전해야 그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봐, 오늘 새벽에도 봐. 저 못 나와. 그것도 자유 못 하는 그 사람이 자기의 비참을 울어야 될 터인데 ‘왜 나는 새벽기도 나가는 새벽기도 못 나가노, 왜 못 나가노?’ ‘아이들 때문에' `왜 아이에게 걸려 가지고 나는 자유하지 못하노?' `나는 아내에게 걸려서’ ‘왜 아내에게 걸려 자유 왜 못 하노?' `나는 남편에게 걸려' `왜 남편에게 걸려 나는 자유 못 하노? 왜 나는 직장 때문에 자유를 못 하노? 내가 자유해야지. 이까짓 대번 어떻게 하든지 해결해 버리고 나는 자유해야 되겠다. ’ 이럴 수 있는 용단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못난 것이 하나님 앞에는 어떻게 잘났는지. 회개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