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21:36
빚진 자로 살자
본문 :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고 또 이런 증거를 한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한 것이지마는 자신의 신앙으로만 우리가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계시의 기관으로 된 사도의 생애요 또 신약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의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성령의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요 성령의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의 기독자의 신앙의 표본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나타내셨다 그렇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사람은 이렇게 산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성령의 감동의 사람이요 이것이 기독자의 정상적인 산앙의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표본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 행위가 이와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다 미달이요 비정상입니다. 미달이요 비정상이요 영감은 누구든지 구속받은 사람이라면 다 이와 같이 변화를 시키고 옳고 바르고 참된 그런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표본을 어데까지 둘 것인가? 신앙의 성령의 사람, 정상적인 신앙의 사람 사도 바울이 간 데까지, 사도 바울이 가진 심령에게까지 우리는 그렇게 갈 수 있는 사람이요, 또 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요, 또 가야만 할 우리들인 것을 여게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 생애 표준을 우리가 된 대로 표준을 삼을 것이 아니고 또 어떤, 성경에 표본으로 성령의 사람은 이러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대로가 아닌 뭐 자기 교회에 어떤 집사를 보고서 '그 집사가 저만큼 믿으니까 나도 저만큼 믿으면 되겠다. 또 어떤 장로가 저만큼 믿으니까 우리도 저래 믿으면 되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신앙의 그 표본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를 우리가 표본으로 삼지 아니하고 제각각 제 마음대로 제 눈에 보이는 대로 신앙 표본을 삼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 9장에 보면 거게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많은 무리 들이 광야에서 그때 떡 먹을 때도 그때 사나이 수만 세어도 오천이라 하는 것보면 참 그 시대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많이 모여서 사람들이 놀랄 만치 많은 숫자입니다.
한 오천 명 모였으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데 뒤에 울렁울렁거리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움직이니까 모두 군중의 그 소동에 따라서 소동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어데 있는지 그저 앞으로 가니까 대중이 가는 대로 가고 또 멈추어 서면 멈추어 선 대로 서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대면하지를 안했습니다.
못 했습니다.
그저 앞에 사람 뒤만 보고 또 뒤에 사람 그 사람 뒤만 보고 자꾸 이래 사람만 보고, 예수님을 향하는 사람들만 보고 따랐는데 거게 특히 삭개오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래 가지고는 내가 주님을 보지 못하겠다' 해서 주님이 가시는 그 길로 앞질러 가서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고 뭐 뽕나무 위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때 나무가 뽕나무니까 그랬지. 그저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고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이러니까 그 앞으로 지나가니 위에서 볼 수 있다 그말이요. 예수님을 불 수 있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가서 뽕나무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에 주님이 '내려오라. 내가 오늘밤에 너희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내려오라 했습니다.
그것도 계시, 계시라 말은 하나님이 열어 보이는, 이 문서계시는 신구약 성경은 계시 지식인데 하나님이 열어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인데 계시 그래 신구약 성경은 특별계시라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 기관으로 삭개오도 하나님께서 영감시켜서 그렇게 제 맘으로 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신앙 표본을 보여서 이렇게 믿는 것이 정상이나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지마는 사람 자기 앞에 사람 보고 앞에 사람 보고 사람이 사람 보고 따라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을 만날라는 이런 마음이 없는 것이 다 대중들의 심리요 행동이었는데 거게서 삭개오가 '이래 가지고는 사람이나 보지 주님은 만나지 못하겠다' 하고 그런 방편으로, 만나기 위해. 그 방편은 어쨌든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안 되겠다고서 만날라고 하는, 만나야 일이 되지 만나기 전에는 일이 안 된다는, 군중만 따라다녀 가지고는 소용 없고 주님을 만나야 된다는 요 마음을 가진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도 군중들이 많으니까 그 안에 갈 수 없으니까 마구 뚫고 이리저리 뚫고 들어갔다 말이오. 그거 인제 나무 위로 올라가지 안하고 뚫고 들어갔어. 뚫고 들어가 가지고서 주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만졌다 말이오.
만지면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내가 나으리라' 하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서 헤치고 속으로 그뭐, 병든 사람이니까 물론 힘도 없을 거라 그거요. 그러나 그 벌써 여러해 동안 혈루증 앓은 여인이 기운도 없지마는 마구 속으로 기어코 뚫고 가 가지고서 주님 만나 가지고 성공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부 사람 보고 따르는 사람 들이 많습니다. 이라니까 사람 보고 따르니 표본보다는 아무래도 그것이 모형이 표본만 못하기 쉽습니다. 이러니까 찍해야 사람 보고 따르니까 먼저 자기가 표본으로 삼은 그 사람만 못하고 또 그다음 사람은 그다음 사람을 또 표본으로 삼으니까 그 사람만 못하고 이래 가지고 점점 속화되고 타락되고 이렇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믿는다 해도 '장로님 신앙을 본받아야지. 목사님 신앙을 본받아야지.'이라니까 기껏 장로님이나 목사님의 신앙을 자기가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서 그를 따라서 이래 믿을라고 하니까 또 조금 그만 못하다 말이오.
장로님만 목사님만 못해. 못하니까, 또 그 사람 보고 믿는 사람은 또 그래.
그래 가지고 타락이 되는 것인데 이제 그런 것을 표본으로 해서 그런 신앙의 방편으로 믿는 사람이 다 예수님 당시에 삭개오와 반대된 그런 대중들입니다.
그들은 따라다니기만 따라다녔지 아무런 주님으로 말미암은 직접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랬지마는 삭개오는 '오늘밤에 네게 유하겠다. 구원이 너거 집에 임했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들도 신앙의 어떤 그 전기나, 어떤 성자의 전기나 성녀의 전기나 그런 전기를 보고 우리가 믿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서장이라는 그 아주, 그는 참 비밀의 나라인데 그 나라에 그 입구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물으니까, 산다싱이 물으니까 칠년째 거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나라에는 들어가면 다 살해를 받기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나오는 그런 혹 나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할라고 칠 년 동안을 거게 있었다 이라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래 이렇게 성의있게 칠 년 동안 복음 전할라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거 비밀 나라에 기다리고 있었느냐? 후란시스라는 성자가 있었는데 그이의 설교를 듣고서 감화를 받아 가지고서 자기가 그렇게 전하고 있다 이랬는데 산다싱은 그렇지 안했습니다.
자기가 불교에 그 독실한 신자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사람들 말만 들을 게 아니라 주님을 만나서, 참 구원이 있으면 구원이 있고 구원이 없으면 인생이라 하는 건 이거 비참한 것이니까' 이래 가지고서 주님을 만나기까지 하다가 안 되니까 그만 레일 위에다가 새벽에 차가 지나 가는 그 시간에 레일 위에 가 가지고 자기가 베개해서 누워 가지고서 '주님 나를 보여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참 주님이 없는 공연히 이런 종교 저런 종교 사람들이 상상으로 추측으로 공상으로 공연히 그런 철학으로 만든 거와 같은 그런 예수교라고 하면은 다른 종교는 내가 다 거쳐봤는데 예수교도 그런 종교라고 하면은 나는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서 베개를 하고 누웠을 때에 그때에 이제 주님이 나타나셔 가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하는 그 음성을 자기에게 들려 줘서 그때에 자기가 나서 가지고서 '이제는 주님과 결혼했다' 하고 평생 동정남으로 신앙을 바쳤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주님 만나고 서장에 들어가 가지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했지마는 거게다가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많이 세웠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다' 자기가 모든 신앙 생촬에서 온갖 박해를 당한 지 후입니다. 그저 바울은 믿는 그 시작하는 믿는 첫 시간 다메섹에서부터 바울은 박해로 시작해 가지고서 거게서 그냥 나오지 못해서, 거게서 그 복음을 금방 예수 믿는 사람을 반대하던 사람이 거게서 예수 믿는 도를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이게 변질됐다' 하고서 이것부터 죽여야 된다고 해 가지고 박해가 심해서 잡을라고 해서 성 들창문을 열고 거기서 이렇게 그물로 달아 내려 가지고서 비로소 피신해 가지고 아라비아에 가 가지고 얼마 동안 거기서 기도하고 나왔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에부터 참 고난의 주님을 고난의 주님으로 증거했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 다, 하나님으로서 '그 부요하신 자가 너희를 위해서 가난해지심은 너희들로 부요케 하기 위해서 가난해지셨다' 주님이 모든 그 영광의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인간 중에 제일, 제일 낮은 인간이 된 것은 그 제일 낮은 인간까지 다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인데 그렇게 하셔 가지고서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을 자기가 받았고 그 구원을 나타내고, 그 구원을 주신 주님이 자기에게 부탁하신 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는 주님이 자기에게 하신 그 일을 생각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하면 놀랄 만한 일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다 동지들이 말하기를 '뭐 그렇게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말을 많이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떠나서 예루살셈으로 갈라 할 때도 그때도 모든 교인들이 못 가라고 목을 안고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또 선지가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면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잡혀서 사형을 받게 된다.' 거게서는 '바울이라 하는 자가 회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됐다 하니까 이 사람을 어짜든지 없애야 된다. 그래야 예수교를 없애지 그렇지 않으면 없애지 못한다.' 예수교를 박해하는 그 유대교인들이 전부 단합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거기 가면 죽는 일이 되지마는 그래도, 그러니까 못 가구로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에 보면은 '마음에 매인바 되어' 그 마음이 뭐인가? 주님이 자기를 대속해 주신 그 대속해 주신 주님이 어떻게 해 가지고 자기에 대속해 주신 그 대속을 자기가 믿는 그 마음에게 붙들려서 '나는 안 갈 수가 없다. 거기서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게 나 갈 길이다.' 이래 하면서 그곳을 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을 이렇게 보이신 것이 신앙의 이것이 정상적인 영감의 표본이요 또 예수님의 대속과 구속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이것이 정상이요 여게 미달된 것은 다 미완성이요 미달인 것인 것울 알고 여게까지가 우리의 신앙의 표본으로 알아서 여게를 표본해서, 여게까지 가기 전에는 어떤 그 자기가 경우에서 어떤 과거에 걸어온 형편과 그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이 걸음을 걸어서 주님이 죽으심으로 준 구원이니까 자기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복음을 보수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 생명이 끝나기 전에는 자기로서는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을 주지 못했으니 빚진 자라.
또 주님이 모든 것 다해서 나에게 이렇게 이 대속의 구원을 주셨는데 나는 다 주님에게, 하나님으로 내 구원 위해서 다 바쳐서 이렇게 구해 주셨는데 나는 피조물이 타락해서 죄 가운데 멸망받게 된 이것을 내가 주님에게 다 바치지 못했으니까 자기는 미진한 자요 자기는 빚진 자로 이래 알고 주님을 대할 때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 사랑을 자기가 다 감당치 못한 빚진 자요 또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에 다 들일 것과 들이지 못했으니까 빚진 자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 자기가 제 것을 다 못 줬기 때문에 빚진 자라.
이렇게 주님이 사랑을 가지시고 자기에게 이 구속의 사랑을 베푸셨는데 자기는 그것도 다 들여서 주님의 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함같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그 미진한 일을 인해서 주님을 향하여 빚진 자요 또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빚진 자로 이것으로서 항상 그는 생각하고 마지막에 사형을 언도받고-목을 끊겨서 참수해 가지고서 순교했습니다.-죽기 전에는 자기는 항상 빚진 자이니까 '내가 이것을 다 바쳐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고 또 다 바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를 다 들여서 사랑했으니까 나도 다 들여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늘 신앙 양심에서 그는 빚진 자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말한 것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말을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다' 충성을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무슨 작은 일 하든지 큰 일을 하든지 자기가 요 작은 일이니까 '요거는 내가 조그매만 바쳐도 된다 작은 일이니까 작은 힘만 가지고도 된다. 작은 그 자만 해도 된다.' 그렇게 그 사람은 신앙 생활 하지 안하고서 그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거기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서 사는데 그 일을 하고 나서 남은 것이 있으면 '또 남았다'또 그다음에도 다 들여서 하면서 남은 것 있으면 '남았다.' '요거는 남구고 해야 되겠다'하는 그런 일은 없었고 언제든지 요거는 다 들여서 했는데 그 일을 해도 남음이 있으니까 '아이고 또 할 일 남았구나.' 이래서 다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일했기 때문에 그는 말하기를 '내가 단연코 말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 말했습니다. 어데서든지 '그걸 다 들이지 않고는 만족을 하지 못한 그 신앙이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신앙 표본을, 사도 바울만이 아니고 모든 사도들도 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사도들이 다 순교했고 순교 안 한 사람은 사도 요한뿐이었는데 사도 요한은 순교를 할라고 순교에서 순교에서 늘 순생으로, 죽음으로 살았지마는 하나님이 순교를 안 시키니까 순교를 못 한 것이지 그분이 생명을 '요거 생명만큼은 아껴놓고 하겠다' 해 가지고서 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어데서든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들여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당연하고, 크신 주님도 다 들여서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주님에게 비해서 아주 천하고 못쓸 더러운 것인데 이것도 다 들여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거기서 뭐 몇분지 일만 아껴서 '이거는 들여서 주를 사랑할 수 없다' 해서 무엇을 남겨 놓고 그 어떤 찌끄러기, 다 제 맘대로 하고 그래 한다는 것은 주님에게 대한 마음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사람도 안 그렇습니까? 차이가 있는 사람으로서 아주 참 위대하고 훌륭하고 모든 면으로서 자기로서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그 남편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서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면 자기는 그 남편에 비해서 비교도 못할 그런 자기인데 그 자기가 남편은 다해 사랑하는데 자기는 다하지 안하고 찌끄러기 얼마를 가지고서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거 못쓸 사람입니다.
자기는 다해도 '이 남편이 다해서 나를 사랑하는 그 남편의 자원과 내가 다해서 남편을 사랑하는 내 아내된 나의 자원과 비교하면 그 자원은 대자원이요 나는 자원이 아주 소자원이니까 다해도 이것 가지고서 부끄러운데 이래도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 하는, 마음에 부족과 참 감격한 빚진 것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그게 정상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이 바로 될 것이고 행복스러울 것이고 그렇지 안하고 자기에게 남은, 다른 데 다 제 마음대로 할 대로 다 이래 하고 그 눈가림으로 찌꺼기만 이렇게 해서 이래 한다고 하면은 그 가정은 파괴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이렇거든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는 성경에 성령의 사람 우리의 신앙의 표본의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어데서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거기에 다 들여서 사랑했고 또 주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시키시는 그 일에도 자기는 다 들여 했는데, 다 들여 했는데 다 들여지지, 다 들여지지 안하고 남으니까, 남으니까 남은 것은 '또 아마 남은 걸' 또 가지고서 또 들이도록 하고, 또 다 들였는데 남으니까 또 그러고, 매사에 있는 것을 다 드려서 그렇게 충성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요구도 그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어데 있습니까? 영생은 과거에 있습니까 미래에 있습니까 현재에 있습니까? 영생이 어데 있지요? 현실에 있지요? 현실에 있는데 영생은 현실에 있습니다. 이 현실에서 영생 얻어도 그 다음 현실에서는 영원한 멸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 현실 현실에서 끝나는 것인데.
'네가 영생을 얻을라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주를 사랑해야 된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그래야 영생이 된다 말이오. 이 성경에는 얼마든지 표본을 이렇게 해 놨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구원을 이루는 것은 그 현실에서 다 안 들어도, 현실에서 다 그게 없어지지 안해도 들이기는 다 들여 가지고서 생활을 할 때에 거게 다 소모되지 안하고 다 그때 쓰여지지 안하고 그저 남아 있는 것은 또 그다음으로 가고 이래도 다 들여서 해야 영생이라 그렇게 성경에는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어떤 사람을 보고서 신앙의 표준으로 삼지를 말고 '선지 사도 터가 된다' 사도들의 기초 위에 있다 그러면, 사도들의 기초라 말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그와 같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바울이 말하기를 '나를 본받으라 하는 그 본받으라 하는 것을 바울이 그 인간적인 자기 행위를 본받으라는 그런 말로 해석을 하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표본은 예수님뿐 이십니다. 표본은 예수님뿐이신데 성경에 기록한 이 성경 표본으로 아브라함이나 이래 기록한 것은 성령의 사람으로서 곧 하나님의 모형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본받는 것이 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모형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사람은 다 정상적인 신앙의 사람은 이 사도 바울과 같다 이랬으니까 나는 사도 바울을 신앙의 그 표본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마는 그 표본을 주님이 나를 어떻게 하신 그것이 내게 신앙의 표본인데 내가 그러면 주님을 어떻게 해서 주님을 닮아서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신 그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는데, 그렇기에 사랑해 가지고서 어데까지 돼야 되느냐? 적어도 사도 바 울같이는 돼야 된다. 사도 바울같이 돼야 그게 정상이다. 사도 바울같이 되어져야 정상인데 거게 미달에는 언제든지 비정상이다. 이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고 신앙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데 우리가 신앙 생활 하다가 주님의 주시는 이 대속을 내가 보수할라고, 이 대속을 뺏기지, 세상에 뺏기지 안하고 이 대속을 보수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모든 애로나 굴곡이나 고독이나 또 내가 이 대속을 이웃을 사랑하라 이랬으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 이랬으니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서 그 당하는 이려움이나, 내가 보수로 어려움이나 전함으로 어려움이나 주님의 대속이 관한 이 어려움이 어데까지 어려움이 됐든지, 어려움이 됐든지 우리는 이 일을 할 때는 다 기울여서 다 들여 가지고, '요거 하는 데에 반만 들여도 될 터이니까 반만 들이겠다. 여게? 삼분지 일쯤 들이겠다. 또 얼마 정도는 들이다가 되면 되고 그 이상은 들이지 않겠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 다 자기 주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서 정상은 아닙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다 들였는데, 다 들여서 그 일을 하는데 그 일을 해도 남음이 있으면 또 아직까지도 다 못 줬으니까 빚진 자입니다. 아직까지도 줄 것을, 이것을 다 들여서 복음을, 주님이 다 들여서 나에게 이 구속을 주심같이 나도 다 들여서 복음을 전해야 될 터인데 야직까지 남아 있으니까 남아 있는 게 빚진 것이고 마지막 순교로 당하는 그 자리에사 비로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나의 달려갈 길 내가 걸어갈 길을 다 갔으니 이제는 됐다 이제는 주님 앞에 설 때이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나에게 의로운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이 면류관 받을 것밖에 없다' 거게서야 비로소 만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주님의 구속하신 이 구속의 도리를 기념하라 하는 것은 구속의 그 받은 구속을 자기가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라 그말이오.
기념하라는 것은 보이라 그말이오. 세상에게 알려 주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의이 대속하신 이 사랑의 대속을 내가 보수하는 데에 어데까지 나는 고난을 계산할 건가? 또 내가 이 도를 전할 때에 어데까지 계산을 할 건가? 계산을 해서 자기가, 그러면 그 계산한 것이 다 들지 안했으면 다 들지 안했으면 보수하는 데에 자기는 계산을 다했는데 다 들였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심같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 사랑하지는 못했다. 당신은 다 바쳐 없어지는 사랑을 냈는데 나는 바쳤지만 아직까지 이것이 다 바쳐지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나는 미달의-아주 차이는 있지마는-주님에게 대해서 미달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해서 사랑했는데 나는 전부를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주님에게 대해서 빚진 자라, 사랑에 빚진 자라. 또 이웃에 사랑에 전하는 데에도 사랑에 빚진 자라.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이런 표준으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적으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당할 때에 우리가 누구의 그 사람을 표준하지 말고 '아무것이는 그래 믿어도 되는데' 그런 사람 표준하지 말고 그저 주님이 내 게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데 나는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하신 데 비해서 낮아짐에 대해서든지, 가난해짐에 대해서든지, 박해에 대해서든지, 천대에 대함에서든지, 또 그렇게 모든 전능의 능력을 다 가지시고 전부 당신의 것이지마는 그 당하신 모든 그 사랑으로 희생해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생각함으로서 고와 비교를 해 가지고서 자기도 모자라고 하지마는 다 들이기 전에는, 다 들이기 전에는 '주님은 이렇게 다해서 나를 사랑했는데 나는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다. 주님은 다해서 사랑했는데 나도 다해서 사랑 할라고 했는데 다해서 사랑을 하지 못했다. 다해서 사랑할라고 했는데 주님은 다해서 사랑했는데 나는 다해서 사랑할라고 했지마는 이것이 미달되어서 다하여 사랑하지를 못했다. 이러니까 아직까지 나는 주에 대해서 주의 사랑에 빚진 자요 또 그 전달에 대해서도 빚진 자다. 양면에 대해서 빚진 자다.' 이렇게 빚진 자로 자기가 간주한 이 바울이 빚진 자로 여긴 요 빚진 나로 여긴 요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마지막에 순교를 해 딱 바쳐지는 거게서야 비로소 '이제는 됐다' 했습니다. 우리도 요 걸음으로 우리가 걸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남선 목사님은 참 그 순교하기 위해서, 6·25때에 그때에 순교하시기 위해서 저 피난 간 교인들한테 가 가지고 주일 보고는 반드시 거기 나옵니다. 거기 나와 봤자 다 공습으로 불타버리고 예배당만 동그라이 남아 있고 또 그 사택만 동그라이 남았고 주변으로는 전부 폭격해서 다 타 버렸습니다. 다 타고 거게 뒤에 조그만한 대밭이 있습니다. 대밭이 있는데 대밭이 거게 그늘이니까 그저 거게 가서 밤낮 거기 있습니다.
그러면 인민군들은 그 앞에 이래 거기서 진쳐 가지고 머물러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든지 '보자' 그저 만일 전쟁이 패전된다고 하면 갈 때에 숙청해 버리고 갈라고서, 그러나 미리 하면은 다 이거 점령이 될지 모르니까 그런 유명한 분을 만일 숙청을 시킨 날이면 인심을 수습하기 어렵다 해 가지고서 머물러 두고 그저 돌아갈 때만 생각하고 와 보고 또 조사해 보고 조사해 보고, 이 사람들은 죽일라고 조사해 보고, 후퇴하면 죽일라고 조사해 보고 또 주남선 목사님은 또 주님을 생명까지 다 바쳐 사랑해 볼라고 또 찾아오고, 그러면 찾아오는 그 뜻이 다릅니다. 죽일라고 찾아오고 주 목사님은 또 죽을라고 찾아오시고.
이래 가지고 해도 마지막 예배보러 가다가 그만 어째 다리를 꿈쳐 가지고 뭐 그렇게 꿈칠 데도 꿈쳐 가지고 이래 부어서 그저 겨우 기어서 가 가지고 도무지 뭐 차도 없지 기어 나와 봤자 나오지도 못하지 이래 가지고 사흘 동안을 거게 있다가 '아무래도 내가 이제는 길 만하니까 나가야 된다'고 작대기를 짚고 이래 기어 가지고 나오니까 그동안이 후퇴라. 그래서 순교를 못 했습니다.
'주님은 다해서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사랑하되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다' 하는 이것이 안 돼서 마음에 그라다가 저 협천 가 가치고 집회할 때에 '나는 복음을 전하는 여기에서 나는 생명을 바치겠다'그래 가지고서 그 집회할 때 참 불이 떨어졌는데 어짜든지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그때 그만 간이 부어서 그 걸음으로 메여 와 가지고서 세상 떴습니다. 그거 아마 그래도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는 바쳤습니다.
나중에 의사들이 보고서 '이는 너무 소리를 크게 질러서 이거 간이 부었기 때문에 이거는 다시는 치료하지 못한다'해 가지고서 그때 한 이틀인가 있다가 별세를 하셨습니다.
별세하실 때에, 이틀 남았는데 남은 전에 제가 거기 가니까, 내가 집회를 정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기 좀 있겠습니다.' '안 된다'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되지 안 되니까 집회를 가라' 해서 그래 집회를 갔다가 집회 가 가지고 한 시간 설교 하고 나니까 '주 목사님이 운명할 것' 같다 해서 제가 달음질을 쳐 가지고서 저 서상에서 왔습니다.
오니까 그때까지 운명 안 하시고 있으면서 마지막을 저한테 유언 하기를 '어짜든지 몸을 조심해라. 몸을 조심해야 된다.' 그라고 참 제가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제가 이라니까 다른 사람 거기 많이 있지 마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안하고 내가 조금 안 보이니까 손을 이라면서 '내 앞에 와서 좀 내 보이는 데 있거라' 그래 제가 거기 보이는 데 거기서 있으니까 거기서 그 유언을 하시고 '내가 보던 이 성경인데 이 성경을 네가 가져라' 그래 그 성경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는 목사님의 전기에 거게 앞에 성경책 그거 내나 박혀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제가 받은 그 성경을 거게 주 목사님이 쓰던 성경을 그렇게 저한테 전해 줬었습니다.
그렇게 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대로 나도 주를 사랑해야 되겠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복음 전한 그대로 나도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겠다.' 이것을 표준하니까 바울은 그게 다 되기 전에는 항상 빚진 자라는 이 마음에 마음이 눌려서 마치 빚진 사람이 눌려서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그 빚진 마음에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눌렸다가 그 순교당할 그때사 비로소 마음에 '이제는 다 싸웠고 지켰고 걸어왔다 이제는 의의 면류관만 남아 있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사람 표준하지 말고 주님이 나 사랑하신 그대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 또 주님이 내게 전한 그대로 내가 전할 것, 그것이 다하기 전에는 빚진 자로 여긴 사도 바울의 그 계산을 우리는 표본으로 해서, 그 계산을 우리는 표본으로 해서 다 되기 전에는 우리도 빚진 자라는 그 마음에 눌리는 그것이 있는 것이 성령의 감동의 정상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