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11:49
대속을 보수-반석 위 건설
본문 :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 구원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둘 다 구원은 주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셔 가지고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인데 이 구원을 두 면으로 받을 수 있으니 하나는 기초적으로 받는 구원이요, 하나는 건설적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기초적으로 받는 기본구원은 우리의 죽었던 영이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로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기본구원이요 기초적인 구원이요 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우리가 힘 입어서 우리 심신이 다시 예수님의 건설해 놓은 이 구원을 심신이 받는 것을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은 단일체요 단일성의 것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단번에 받습니다. 영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적 객관 역사로 이 영을 살리는 구원을 하셨는데 이 구원은 단번에 됐습니다. 우리의 심신의 구원은 이 심신은 종합체요 모든 집합체기 때문에 이것은 단 번에 이 구속을 받을 수가 없고 중복적으로 수백 수 차례를 거쳐서 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은 받은 사람이 이 기본구원을 받은 이 구원의 그 능력과 은혜와 관계를 힘입어 가지고 자기가 이 현실 현실에서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는 그 방편인 순종을 해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구원은 우리가 모르게 이루어졌고 건설구원은 본인이 알고 이 사실을 자기 심신의 주관이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동할 때에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몰라도 이루어지지 않고, 알아도 인정치 안하면 이루어지지 안하고, 알고 인정할지라도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이 구원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여게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그렇게 이 두 가지로 비유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보면 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라 그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다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반석에다가 주초를 놓고 지은 집과 같다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마치 법인이 법전과 같이 사용해서 우리 현실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있으니 곧 그 인도를 양심이 받아 가지고 깨달아 가지고 그대로 하는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무제한적으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그렇지 않고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미리 선포해 놓으신 이 규범 내에서, 이 범위 내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 성령이 와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 현실에는 내가 마음은, 생각은, 소욕은, 뜻은, 행동은 어떻게 하라 하는 것을 성령님이 인도하실 때에 그 인도를 내가 받으면서 성령의 인도인지 악령의 인도인지 우리가 또 알기 어려운 난제가 거게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인지 악령의 인도인지 그것을 구별하는 데에는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신구약 성경 말씀 이 말씀의 법도대로 인도한 것이면 성령의 인도고 이 성경 말씀에 위배되게, 위반되게 인도하면 그것은 악령의 인도로 우리가 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가 열심히 상고하고 익혀 두는 것은 우리 현실에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바로 찾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법인이 법전을 통달하지 못하면 사건이 닥쳤을 때에 그 법대로의 사건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모르면 우리 현실에 하나님의 영감의 뜻을 바로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늘 평소에 공부해서 성경에 이 법규와 은혜와 그 계명과 명령과 요구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익히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뜻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가 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 하는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 범위 내에서 그 현실 현실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고 인도를 따라서 자기가 행동하는 사람은 비유컨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거와 같고, 또 그 현실에서 이 성경 규범 내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는 받지를 아니하고 다른 자기 주관의 인도를 받든지 어떤 사람의 인도를 받든지 혹은 어떤 단체나 사회나 뭐 가정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물질이나 모든 이런 모든 사건들이나 그런 것들이 인도함을 따라서 자기가 사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다가 집을 짓는 거와 같다 그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나서 살 때에 우리는 어쩌든지 영원을 건설하는 사람들인데 이 건설을 영원히 요동치 않는 그 완전 무결한 건설을 할 수도 있고 우리가 건설 같으나 파괴가 되는 멸망을 우리가 건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건설은 어떤 건설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은 완전히 벗어나는 건설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그런 것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설입니다.
또, 하나는 무슨 건설인고 하니 하나님이 입법해 놓으신 전지자가 입법한 그 지성,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되고 지존한 하나님의 그 완전법, 생명법, 자유법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도 불만 불평 없이 모든 존재들에게 다 생명이 되고 자유가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완전한 율법이라, 자유의 율법이라, 생명의 법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을 준해서 이 법에 정죄받을 것이 하나도 없이 이 법을 완전히 수행하는 건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건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언행심사가 다 이런 건설이 돼야 되겠고, 자기의 모든 해 놓은 이력들이 다 이런 건설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건설은 무슨 건설인고 하니 영원 자존자, 대주재자 이분과 서로 이질되는 것이 없고, 본질과 본성이 다르지 안하고 이분과 동질이 되고 동성이 되고 이분의 모든 의사와 소욕과 견해와 평가와 어쨌건 이분과 이분의 계획과 이분의 움직임과 이분이 이루시는 모든 역사와 조금도 배치되지 안하고 이분과 일치되는 그것을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건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 진리와 영감이 와 가지고 감추어 있던 것을 우리가 다 알게 됐습니다. 어두움에 싸여 있던 것을 우리가 다 드러내서 계시해서 모든 것을, 계시라, 열 계(啓)자, 보일 시(示)자 계시인데 계시해 주심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그래 이 계시해 주심을 피공로 없는 사람들은 받지를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이종교의 그 창설자들이 인생 문제를, 또 금생과 내세의 문제를, 이 모든 만 사물 문제를, 인간의 생사 문제 기타의 많은 문제들을 바로 알아볼라고 애를 썼지만 바로 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들이 벌써 알아 놓은 것이 각 이종교들의 다 그 교경이 되어 있고 그 경전들은 오늘 벌써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그 모든 경문이나 경전들이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는 정반대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왜 삐뚤어져 있는고 하니 영원전 자존하신 대주재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그분이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시고 그분이 보존하시고 관리하시고 운영하시는데 그분을 모르고 모두 다 지식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평가했기 때문에 외나 근본이신 그분을 뺐기 때문에 그 모든 사상이나 주장이나 지식이나 논리나 방편이나 종교의 모든 법칙들은 다 삐뚤어진 것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분들은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을 보고 이대로 해서 건설할라고 하지 안하고 각각 다 자기대로 건설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이 중생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모래 위에 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짓는다는 것은 반석 위에 짓지 안하고 모래 위에 짓는다 그말입니다.
반석 위에 짓지 않는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세 가지 큰 진노의 그 죄를 해결 지운, 대신 형벌 받아서 사죄의 공로를 설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또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대행하셔 가지고 설정해 놓으신 의가 있습니다. 또 우리 대신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을 이룬 이 화친의 생명의 의가 있어서 이 세 가지 의가, 신인양성일위가 이 일을 이룬 이 의인데 이는 완전한 의요, 그러기 때문에 생명도 완전하고 지능도 완전하고 모든 계획도 완전하고 그 속성들이 다 완전입니다.
완전을 신인양성일위가 우리 대신 이루셨는데 이루신 것을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것을 심사할 때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는 완전이라, 이는 의롭다 해서 하나님께서 의로 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 세 가지의 노를 풀어 이 삐뚤어진 것을 완전히 다 소탕시켜 버렸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세 가지 완전을 건설한 이 의인데 이 의를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이 의를 건설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건설한 의는 건설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건설했지만 이 의는 우리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 몫으로 건설했습니다. 그분은 이런 것을 건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신성은 하나님이시오 인성은 아무런 원죄나 본죄나 그런 것이 없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 그런 것이 없는 분인데 우리 대신 이 완전한 이 세 가지 노를 푼 이 의와 또 완전한 두 가지 하나님의 욕구를 달성한 이 의와, 이 둘 달성한 의와 노를 푼 의와 이것을 합해서 세 가지 의를 설정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는 우리 대신 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인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느냐? 우리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신한 것인 것을 우리가 믿어서 자기 의로 알고 인정하고 이 의를 버리지 안하고 이 의를 이렇게 큰 힘들여서 이 의를 건설해서 입혀 주셨기 때문에 이 의를 자기가 깨닫고 보존하고 이 의를 잘 간직하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 의를 건설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건설한 의는 우리 것이 되고 대신 죽기까지 해서 건설했기 때문에. 이 건설에 아무 공들이지 안한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고 공들여서 건설해 놓은 의는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 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건설하는데 몇 가지로 건설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노 세 가지를 완전히 해결 짓는 건설을 해야 되고, 또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어 드리는 건설을 해야 되고, 하나님과 완전한 이 친교를 가지는 이 건설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건설입니다. 이 건설이 모든 세상을 다 이기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 통치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고 피조물들을 살릴 수 있는 이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어려운데 그만 예사로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세 가지 범죄, 세 가지 범죄 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것은 각자들이 많은 시간과 양심을 써서 생각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 하나 보면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 하나를 먹음으로써 그 죄의 값으로 전인류는 사망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아담 하와가 죽었는데 우리가 왜 죽어. 범죄했는데 우리가 죽어?' 하고 안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하나님의 계약이라 털끝만치도 변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제가 부인해도 죽는 것은 이 죄에 동참이 되고. 이 죄로 정죄받은 자는 죽고 맙니다. 인생들이 떠들어도 죽지 안하지 못하고, 죽지 않지를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이 법칙 아래에 복종하고 다 사로잡힌다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범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수많은 죄, 또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 자율대로 제 주장대로 제 중심 제 위주로 산 그 죄,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그 마귀 천사로 더불어 합작이 돼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을 노엽게 한 그 죄 이 죄 하나를 우리가 어떻게 대속할 수가 있습니까? 한 죄를 도말하는 데도 우리는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를 도말하면 벌써 멸망받았기 때문에 죄 도말하고 나서는 남은 여분이 없습니다. 죄 도말하면 다 멸망입니다.
이런데, 그 죄를 어떻게 도말하고 우리가 살아 남을 수가 있으며, 또 하나님의 그 율법의 요구를 우리가 다 어떻게 이행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 율법을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해. 억억 억 억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어떻게 우리자 다 이행을 할 것인가, 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된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와 화친을 이룰 수가 있는가? 이거는 도저히 인생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이렇게 깨끗한 것을, 온전한 것을 법을 세워놔야 이 온전한 것을 만들 수가 있고, 온전한 법을 세워 놔야 이 법을 이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모돈 것을 다 기업으로 상속시켜 줘야 되지 온전치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온전한 것을 또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은혜를 다 상속시켜서 주는 데에는 온전한 자가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온전한 자가 되어지는 데에는 온전한 조건들이 있어 가지고 그 조건들에게 다 맞아야 온전한 자가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속하셔 가지고 이루어 놓은 이 의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완전 무결하다 인정받아 통과된 이 의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의는 순전히 우리는 알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셔 가지고 신인양성일위로서 대신 이 의를 설정해 가지고 이 설정한 이 완전한,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 통과한 이 의를 우리에게 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공으로 줘서 이 의를 우리 중생된 영이 중생되기 전에 이 공로를 하나님께서 입히셔서, 지공하신 분이 이 공로를 입혀 가지고 우리 죽은 영을 살렸지 이 공로를 입히지 안하면 우리 죽은 영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두움이 없고 하나도 불의함이 없는 깨끗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대속의 의가 아니고 범죄함으로 죽은 그 영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살리는 데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것을 안 살릴 수 없고 둘 수 없고 살리는 데는 당신이 이것을 대신해서 와전한 의를 건설하시기 전에는 이걸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가 돼 가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의를 건설하시고 이 의를 우리 영에게 입혔을 때에 우리 영은 죄 없는 영이 됐습니다.
이래서 죄 없는 영이 되고 또 의로운 영이 됐고, 예수님의 공로로 죄 없는 영이 됐고 의로운 영이 됐고 하나님과 아주 밀접한 친밀한 영이 되어 가지고 영생하는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영은 이렇게 받았지만 우리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이것은 하나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객관 능력으로 이것을 살릴 권리가 없습니다. 왜 권리가 없는고 하니 우리의 영육으로 된 사람이라 영은 주격이요 이 심신은 피소유격인데 주격인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주격이 뚜렷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월권적으로 그의 심신을 직접 관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 심신을 살리는 운동을 하지 직접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심신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가르쳐 주면서 자꾸 이렇게 깨우쳐서 구원 할라고 애를 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도 말한 대로 우리의 구원은, 요것 아주 좀 어려운 말이데 이것을 지금 너무도 세계의 교리적으로 희미해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다 이렇게 연구를 했지만 여게 대해서 뚜렷히 판명을 내어서 그렇게 명료하게 증거하지는 안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다 모두 뒤숭뒤숭하고 모두 확정을 짓지를 못하고 흐린 가운데 있는 어려운 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은 완전한 의로운 영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의인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로마서 1장 16절 이하에는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을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 의인된 걸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은 완전한 의인입니다.
이거는 완전한 의라면 어떤 그 공로를, 어떤 경력을, 어떤 이력을 가진 완전한 의인가? 그 이력은 곧 여섯 가지 완전한 이력을 가진 의의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셔 가지고 대신 행하셔 가지고 우리 영에게다가 입혀서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공로를 입음으로 그 공로로 인해서 우리 영은 하나님 앞에 의의 영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우리의 영은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완전히 자유합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이랬는데, 이제 우리 영은 이 하나님이 대신 이루어 주신 완전한 의를 입었지만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이것은 입지를 못했습니다. 입지를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에게 입힐 때에 같이 입혀 줬으면 좋을 터인데 이렇게 생각하지만 영은 이것은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살아날 힘이 없기 때문에 객관 역사로 이걸 살려야 되기 때문에 이걸 살렸지만 일단 영을 살렸으니까 그 사람의.
주인이 살았다 말이오.
그 사람의 주격이 살았으니까 그 주격을 통해서 그 소유격이 살아야 하나님이 월권하지 안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침략하지를 안하는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침략하는 것이 되고 그 지공법에 걸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일을 하지 못하는고로 이 살리기 위해서 이 공로를 가지고 성령과 진리가 이 공로를 가지고 이 중생된 영과 한꺼번에 같이 합동해 가지고 이 심신을 구원할라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오늘 단계입니다. 오늘 이 설교 말씀하는 것도 이것이요, 땅 위에 믿는 중생된 사람들이 구원 얻을라고 노력하는 것도 다 이 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신이 이 구원을 지금 받아 가질라고 애를 쓰는 것인데 이 구원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가치 있는 완전한 구원인데 이 구원을 받아 가질라고 하는데 이 구원은 그러면 우리 심신이 노력해 가지고 이 구원을 조성하는가? 요걸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조성하는가? 조성하는 게 아닙니다. 조성한다고 다 생각하고 있는데 조성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암만 조성해 봤자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가면 다 바싹 타 버리고 말지 못 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가 이루어 놓은 완전한 의라야 하나님의 공심판에 걸리지 안하고 영생을 할 수가 있고 무궁세계 걸리지 안하지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할 만한 완전성을 가지지 못하고 불변성을 가지지 못하고 영원성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다 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거는 평가적으로 실력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게 완전성이 아닌 영원성의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심신이 지금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 영은 받았지만 우리 심신은 받지 못했는데 성령과 진리와 우리의 주격인 이 영이 이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공로를 성령님과 진리와 우리 영이 이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지금 오는 것입니다. 올 때에 이 공로를 우리가 받아 가지면 됩니다.
받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로 이루어 놓은 그 실상, 공로 그 자체. 공로 그 본체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인데 그것을 그 본체를 우리에게 보낸, 이 본체를 그대로 가지고 온, 마치 무슨, 그거는 다 비유는 다 안 되기기는 안 되지만 어떤 형체를 사진기에다 대고 촬영을 하면 고 형체와 꼭 같이 되어지는 거와 같이 어떤 그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신 고 하나님의 의인 고 의를 그대로, 고 의 그대로 종류도 빠지지 안하고 모양도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의 그걸 솔빡 고대로 가지고, 예수님의 건설한 하나님의 의 고 의를 솔빡 그대로 가지 우리에게 전해 줄라고 고 의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 뭐이냐 하면 영감입니다. 성신의 감동입니다. 성신의 감동은 예수님의 건설해 놓은 그 의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 것이 성신의 감화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 것을 가지고 증거하리라 이랬습니다.
예수님의 공로 대속하신 이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거는 내 대신 해서 이 신인양성일위가 건설해 놓은 의이기 때문에 이 의는 네 의니까 이 의를 네가 받아라 하고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받으라 하고 전달해 그러면, 의를 가지고 온 분이 누구냐? 성령이 가지고 놨습니다. 또 성령이 가지고 온 이 의가 성령이 가지고 와도 우리가 둔하기 때문에 그 의를 우리가 접촉하는 것이 심히 어려워서 접촉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의를 우리가 접촉하기 쉽도록 가깝게 우리의 이 피조물 되어 있는 이 피조물된 우리들에게 이 좀 가까운 근질적으로서, 가까운 유사의 동질적으로 이렇게 우리가 가까이 맞이할 수 있고 접할 수 있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이 의가 우리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신구약 성겅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건설해 놓은 그 의가, 성령이라 그릇에 담아 온 것처럼 성령이 이것을 그대로 담아 가지고 우리에게 와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신구약 성경 문서에다 담아 가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와 있는고로 이 신구약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곧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우리의 것이오. 그러면 이 신구약 성경은 이거는 뭐인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설정해 놓은 의가 우리에게 왔는데 이 의가 영감으로 우리에게 왔고 영감으로 온 것보다도 우리가 더 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신구약 성경 진리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이 진리는 곧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의인데 이 의는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심판도 완전 통과한 이 의인데 이 의는 곧 우리의 것이요 내 것입니다.
그러면, 내것인데 이 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신인양성일위가 나 대신 만들었습니다. 내 대신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것이 된 것입니다.
내 대신 만들었기 때문에 이 공로의 의를 자기 것 만든 사람은 자기는 주의 것입니다. 자기는 주의 것이 됩니다. 이 뭐 썩은 것 더러운 것 이것이 주의 것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값을 내고 사라, 값이 없어도 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대속하신 그 대속의 공로와 우리 이거와는 될 수 있습니까? 비교가 안 됩니다. 이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지만 예수님이 대신했기 때문에 나만 당신에게 맡겨서 이것이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의 공로는 내것 되고 나는 당신의 것 되고 이렇게 바꾸어서 가지는 이것이 이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에게 이제 말씀으로 왔는데 이 말씀을 우리가, 이 말씀에 보면 여러 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록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대속이 성경에 들어 가지고 왔는데 이 성경이 바로 예수님이 대속하신 대속한 그 실상 그것입니다. 대속하신 실상 그것이오.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영감에서 나왔는데 영감 그게 실상이오. 또 영감은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설정한 그 공로에서 나왔습니다.
이런데, 우리에게 나온 것이 내나 거기서 거쳐 나왔지만 실상이라 말이오.
실상인데, 이 말씀 가운데에는 세 가지 노를 푼 사죄의 의에 관계된 이 의가 들어 있는 성경 말씀이 있고 요거 잘 안 들으면 몰라요. 이 세 가지 노를 푼 사죄의 의가 우리에게 담겨 온 이 성구가 있고. 또 대행의 칭의와 대화친의 이 생명이 담겨 가지고 온 이 성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세 가지 노를 푼 것이 이 성경에 담겨 왔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 세 가지가 이 성경에 우리에게 담겨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를 푼 이 사죄의 의가 담겨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담겨 왔느냐? 여게서 성경에 이것은 네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 있습니다. 이걸 다 말할라 하면 뭐 흐트러 놓으면 너무 복잡해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거는 조용히 가서 얼마든지 깨달을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죄의 세 가지 노를 푼 이 대형으로 사죄된 사죄의 이 의가 이 성경 가운데에 담겨 가지고 왔으니 성경에 곧 이라지 말아라 하지 말아라, 말아라, 말아라, 이거는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들이 담겨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뭐이냐? 예수님이 대형으로 진노를 다 해결 짓고 사죄해 주신 이 사죄 우리가 입었기 때문에 사죄 입은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을 하면 내가 사죄를. 벗어 버리는 게 되고, 다시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안 하면 사죄 입은 그대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가진 고 사죄를 버리지 안하고 사죄를 내가 잘 보존하고 사죄받은 내기 때문에 나는 죄 없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로 내가 있는 것이고, 하지 말라는 것 하면 죄 있는 자가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죄 없는 자로, 내가 하지 말라는 걸 안 해서 죄 없는 자로 되는 것 그러면 성경에, 요 현실을 주시면서 요 현실에서는 요런 거 하지 말라 조 현실에서는 조런 것 하지 말아라, 또 요 현실에서는 요런 것을 해라 요 현실에는 요런 것 해라, 현실마다 하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 하라는 거와 하지 말라는 것이 섞여 있는 것, 하라는 것이 둘이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인 것 이 여러 가지가 이 현실에서는 복잡하게 섞여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그것이 주님이 사죄를 내게 주셨으니 사죄 받은 그대로 다시는 더러워지지 안하고 내가 사죄받은 자로 내가 있는 것이고, 그대로 사죄받은, 대신으로 사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에 사죄받은 이 공로를 가지고 나는 사죄받아 나는 죄 없는 자가 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다시 거기서 또 범죄했으면 또 죄 있는 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 공로를 그 시간에 버렸기 때문에 다시 입어야 됩니다. 다시 얼른 그것을 회개하고 또 주님의 그 사죄를 다시 입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현실에서 요것은 주님이 나에게 입혀 주신 사죄를 내가 벗지 않게 하는 요 성구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벗지 않게 하는 성구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그 국기 배례가 와 가지고 국기 배례하라고 학교에서 국기 배례 안 하면 학교에 퇴학을 시킨다 벌을 켠다 이렇게 큰 형벌이 있었습니다.
뚜드려 맞기도 하고 그때 참 맞아서 죽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살아났지만.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데,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성경이 없었으면 그런 것 국기 배례 필요 없는데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니까 성경 때문에 내가 맞게 되고 성경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말이오. 그러면 고 성구는 뭐할라고 줬느냐? 고 성구는, 사죄 받았으니 네가 다시는 사죄를 벗지 아니하고 사죄 받았기 때문에 죄 없는 자로 그대로 네가 살아라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자로 살라고 하니까 국기 배례에 절을 안 해야 되는데 국기 배례를 하면 죄 있는 자가 되고 마니까 국기 배례 절 안 할라고 하면 맞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퇴학도 당하게 하고 당한다 말이오.
그러나, 내가 이 사죄를 내가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내 죄를 없애 사죄 주셨는데 이 사죄를 내가 고통 당한다고 다시 이 사죄를 벗어 내버리고 다시 죄를 입을 수가 있겠느냐? 고통을 당한다고 죽는다고 이 사죄의 공로를 벗고 다시 죄를 두터 쓸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모두 다 하지 말라는 것을 나는 안 할라 하는데 세상은 하라고 두터씌우고 강제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입혀 주신 이 사죄를 벗어라고 조아대는 것입니다. 사죄를 벗고 이제 옛날과 같이 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우리하고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죄인으로 나타나지 안하고 사죄를 이걸 벗지 안하니까 세상하고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안할라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안하고 이렇게 할라고 애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자 되는 것 아닙니다. 죄 없는 자 되는 것 아니오. 그까짓 것 가지고, 죄를 안 지었지요. 국기 배례 하라는 국기 배례 안 했으니까 죄를 안 지었지요. 죄 안 지었지만 그 안 지은 것 그것 하나 가지고 하나님의 지공의 심판에 가 가지고 죄 없는 자로 통과가 되겠습니까? 거게는 억억억억만 가지도 넘는데 그것 한 가지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한 가지 가지고 되는 게 아니오. 아니나 다만 예수님께서 나를 대형해 가지고 사죄를 입혔기 때문에 나는 사죄를 다 서는 나는, 벗을 수가 없다 하는 것으로서 입혀 주신 사죄를 내가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거는 됩니다. 입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형의 사죄 입은 자를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기까지 계명을 지켜서, 계명을 지키다가, 세상은 계명을 어기라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라고 해서 안 할라 하다가 우리가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죽음이 무슨 죄 없는 무죄의 의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대신 무죄를 건설해 놓은 이 의를 내자 입고 그 옷을 뺏기지 안하는 것입니다. 이 의를 벗기지 안한 것이오. 두루막을 벗지 안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의를 벗기지 안한 것입니다. 또, 그 옷을 더럽히지 안한 자가 복이 있다 그말은 예수님의 이 사죄를 해 주셨는데 이 사죄의 공로를 내가 입어서 무죄한 자 된 것이 금방 또 죄 지어 더럽히고 더럽혀 놓으니까 뭐 옷이 얼룽덜룽 얼룽덜룽하이 이래 가지고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자들도 있고 깨끗이 입은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루마기를 빤 자들이 복이 있다 그말은 주님의 이 사죄와 칭의의 이 대속의 공로를 깨끗이 입고. 빨기는 어디다 빱니까? 우리 주님의 공로에 빨아야 됩니다. 다시 내가 `이제 못 믿던 걸 내가 믿습니다.' 하고 이 시간부터라도 믿고 예수님의 내게 대해서 대속하신 이 의를 확실히 믿고 이 의를 더럽히지 안하고 내주지 안하고 이 두 가지, 사죄의 의와 칭의 이 화친의 의 이 의를 내가 입고 있으면 내가 믿음으로 빠는, 믿음으로 빨고, 믿는 증거가 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증거가 뭐인가? 믿는 증거는 행동이라 그말이오. 행동이 의를 건설하는 거는 아니고 믿는 증거라, 증표라 그말이오.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의 그 표적이 뭐이냐 하면 이 행동이라 그말이오. 표적이 행동이라 말입니다.
이래서, 이 사죄를 우리가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것이고, 성경 말씀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성경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데 하라고 명령하신 그대로 내가 실행을 한다 말이오. 그대로 내가 실행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 내가 실행을 할라고 하니까 세상이 실행을 못 하게 합니다.
내가 실행을 `요대로 하라' 하는 그것은 네가 이제는 의인이 됐고 하나님과 화친된 자가 됐으니까 다시는 네가 의인이 죄인되지 말아라, 의인이 너는 의인이니까 너는 의인 생활하고 네가 의인이 의인으로 살고 의인이 다시 죄인되지 말아라. 의인이 죄인되지 말고 의인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래라 조래라 하는 그 계명은 의인 생활을 하라 그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 하는 그것은 의인 생활하는 것입니다. 고게 의인 생활의 법칙이오.
이렇게 할라고 하면 여러 가지 애로가 있어도,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대행해서 칭의를 입혀 주셨고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대화친을 해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었으니까 우리가, 내가 무슨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안하고, 행해야 될 하나님의 명령을 살기 위해서 이거 행할 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또 하나님과 화친된 이것을 내가 세상에서 안 죽기 위해서 이 화친된 것을 내가 파괴하고 양보하고 이럴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말씀은 두 가지 종류인데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이 있는데 하지 말라는 것은 사죄를 입고 있는 증거요, 또 하라는 것은 칭의와 화친을 입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사죄도 입고 있고 칭의와 화친도 입고 있는데 이것만 양보하지 안하면 이걸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입고 있으면 이것을 하지 안할라고 죽기까지 충성해서 했으면 우리 충성된 노력으로 해 가지고 이것을 이 공로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내가 안 벗을라 하고 세상은 벗길라고 애를 쓸 때에 나는 벗지 안하고 요것을 보존하고 보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됐으니, 나는 하나님과 화친자 됐으니, 나는 죄 없는 자 됐으나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의로 의인됐기 때문에 나는 의인으로 살지 의인이 나는 변질되지 않겠다 하는 그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순종하는 자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 그말은 행하는 것은 뭐이냐? 두 가지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것이 행하는 것이요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행하는 것이니 두 가지 하는 사람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자와 같다. 이 주초는 내나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대로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이 생활을 가지고 자기를 건설할라 하는 사람, 자기를 건설할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건설할라 하는 사람, 자기를 어떻게 건설하는데? 하나님의 노를 푸는 건설이 자기 건설이요 하나님의 율법 완수가 자기 건설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화친을, 화목의 화친을 가지는 것이 자기 건설이니까 이 건설을 할 때에 `반석 위에 놓은 거와 같다' 요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은 고 사람은 자기 건설할 때에 반석 위에, 비유컨대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은 자와 같다 그말은 자기 건설하는 데에 예수님이 대속으로 건설해 놓으신 그 건설에다가 기초를 잡고 그 건설을, 대속하신 그 건설을 근거로 삼고, 기초로 삼고, 뿌리로 삼고, 원인으로 삼고 거게다가 뿌리 둬서 그 대속하신 그 대속을 자기 것으로 삼는 자라는 말입니다.
대속을 자기 것으로 삼는 자이기 때문에 이는, 비가 내린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고 하니 이 세상에 이런 좋은 일 저런 좋은 일 또 비가 내리면 그 비가 들어 나중에는 창수가 되는 것입니다. 창수가 되고 또 바람이 불면 나중에 집에 가서 부딪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 때에 매일 오늘은 이 재미 내일은 저 재미, 사람이 말이요, 이상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죽기는 싫어하면서 날마다 시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죽기는 싫어하면서. 또 누가 또 씨를 심어놓고 `보자. 났나? 아이구 안 났네. 언제 날 건고?' 또 보고 또 보고. 이렇게 죽기는 싫어하면서 자기의 욕심으로 인해서 자기의 계획이나 모든 소망은 빨리 빨리 이루어지기를 자꾸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비오는 것이라 말이오. 재미라 말이요, 비가. 비가 오면 재미 있지 않소? 비가 오면 모든 초목이 다 살아나고 재미있는 것이지만 너희들이 재미 재미 암만 재미가 있어도 그 재미의 끝에는 다 사망이 오는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의 멸망이 오기 때문에 그때는 다 헛일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는 사람은 다 같이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 꼭 같이 재미보고 이 세상에 농사짓고 장사하고 뭐 부부 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자녀 교육하고 이래 꼭 같이 이 비오는 아주 이것 저것 재미있는 이런 생활 저편 생활 하지만 마지막에 세상을 떠나 죽을 때에도 그는 넘어지지 않는다. 주초를 반석 위에 놨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소망삼고 그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할라고 애쓴 것이지 제가 뭘 건설할라 하는 게 아니라 그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할라고 애썼기 때문에 그 모든 노력은 하나도 헛되지 안하고 그것은 다 완전이 되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요거 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주초를 모래 위에 놓고 지은 집과 같다. 모래라는 것은 그 모래는 무엇이냐? 모래는, 예수님의 이 대속을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성령이 가져왔고 이 신구약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요 진리대로 꼬박꼬박 하는 것은 이 대속을 보존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 대속을 보수하는 것이요 이 대속을 자기가 입고 벗지 안하는 이 일을 했지만 이 다른 사람들은 요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요 말씀대로 하면 대속을 보수하는 것이 되고 대속을 벗지 안하는 것이 되고 이 사죄의 공로와 칭의의 공로와 화친의 공로를 벗지 안하고 사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하지 안하고, 이제 이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했고, 제 생각대로 했으니까 제 생각이라는 모래, 또 이거는 그 남편 생각대로 했으니 남편 생각의 모래, 또 이거는 자기 주장대로 했으니까 자기 주장의 모래, 이거는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국가의 모래, 뭐 사회의 모래, 돈 모래, 국가 모래, 지식 모래, 명예 모래, 행락 모래, 그 취미 모래, 또 자기 전공 모래 뭐 별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이 대속의 의를 우리에게 갖다 주는, 때속의 의를 갖다 주는 요 의를 보수하는 요 방편을 하지 안하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요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하는 것은 그것을 다 토대로 삼았다 말이오.
제가 지금 오늘은 돈을 토대로 삼았고, `아하, 나는 지금 배경이 든든한 세상의 고관 대작이 내 근거다.' 고관 대작으로 자기의 원인을 자기 움직임의 원인을 삼았고, 모든, 사물들과 인간들과 자기나 뭐 모든 땅 위의 것을 다 그런 것들을 다 뿌리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밑바탕을 삼아 가지고, 그로 원인 삼아 가지고 그로 인해서 이런 것 저런 것 일생 동안 자기 건설이라든지 자기 행위 건설이라든지 자기 행복 건설이라든지 자기 명예 건설이나 지위 건설이나 영광 건설이나 행락 건설이나 행복 건설이나 어떤 건설을 했다 할지라도 이 모든 어떤 건설을 했든지 다른 그런 것들을 원인 삼아 가지고 건설했다 그말이오.
건설했는데, 이거는 모래와 같애. 모래와 같기 때문에 이 물이 술렁거리니까 모래 그놈이 쏵 씻겨 내려가 버립니다. 저 물이 술렁거리니까 모래가 떠내려갑니다. 이 시대가 지나가니까 그거 다 헛일이고, 시대가 달라지니까 또 헛일이고, 세월이 지나가니까 헛일이고, 제가 늙으니까 헛일이고, 모두 정부가 깨지니까 헛일이고.
정권이 바꿔지니까 헛일이고. 이 시간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서 늙으니까 헛일이고 마지막에 죽으니까 다 싹 무너져서 헛일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아, 기독자야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자야 네가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 돼 가지고 죽기까지 대속하신 이 공로를 설정했는데 이 공로를 네가 보수하고 이 공로를 네가 내어 주지 않고 뺏기지 안한 이 공로 보수의 이 방편으로 네가 살지 아니하고, 네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보수하는 이 공로를 네가 벗지 안하고 이 공로를 뺏기지 안하고 대속하신 공로를 내가 거머쥐고 뺏기지 안할라고 이 방편으로서 말씀 순종하는 이 생활 하지 안하고.
네가 이 세상에서 이런 것을 원인으로 삼고 저런 것을 근거로 잠고, 이런 것을 밑바탕으로 삼아 가지고, `나는 공부한다 뭐' 공부, 네까짓 게 공부 가지고 암만 해 봤자, 돈 가지고 암만 해 봤자, `나는 이 사람 좋게 하면 된다.' 그 사람 암만 좋게 해 봤자. `이 정권자 좋게 하면 된다.' 정권자 좋게 해 봤자. 이 세상 과학을 좋게 해 봤자, 네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뿌리로 잡아도 그거는 훌렁훌렁하면 다 날아간다. 세월만 지나가면 오늘에 정권자 됐던 게 정권 바꿔지면 헛일이고, 오늘에는 막 꽃같이 미인같지만 실뜩 지나가니까 그만 누루 칭칭하이 아주 뭐 더럽습니다.
그러기에. 딸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있으면 딸은 밝은 보름날 같다 이렇지만 어머니는 송장같아 보기 싫습니다. 내나 그게 송장 됩니다. 그게 송장돼. 이러기 때문에, 아름다운 딸과 아름다운 청년이 같이 앉았는데 그 아름다운 청년과 에미 애비의 그 송장과 꼭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같이 보기 때문에 그게 내나 송장이요 그게 그거기 때문에 별 게 없어.
이러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모든 것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는 말씀이 곧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니라' 이 말씀은 세세토록 없어지지 안해.
왜? 이 말씀은 왜 없어지기 않습니까? 없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이 말씀대로 행한 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행함으로써 그 공로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 말씀대로 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이 공로를 내가 뺏기지 안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죽자 살자 하고 애를 쓰는 것은 내가 행동하는 공로 그것으로 설정되는 게 아니고 새로 신설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신설해서 내게 은혜로 주신 그것을 내가 벗기지 않는 것이라 말이오. 요 진리를 굳게 잡아야 됩니다.
요것을 오늘 세계에 너무 분명히 하지 안해서 이게 다 혼돈돼 있습니다. 요걸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것을 깨닫고 요 말씀을 어기는 것은, 자기가 임시 임시, 생각하기를 요 말씀을 어겨서 요 뭐 주일을 어긴다. 계명을 어긴다, 율법을 어긴다, 말씀을 어긴다, 양심을 어긴다 이렇게 어기는 것은 그때그때 요거는 재미가 있다, 요거는 참 재미가 있다, 요거는 참 깨소금 같다 해도 깨소금 같아도 깨소금 같은 뒤에 네가 봐라, 무슨 재미가 있는가? 깨소금 같은 뒤에 봐라. 세상 것은 `아이쿠' 시작할 때는 재미가 있어 죽을 지경이지만 이제 딱 끝나고 난 다음에 아무 재미가 없어. 돈도 그렇고 권세도, 지위도 그렇고 다 그래요. 하 이거 '머리 싸짜매서 내가 저런 지위 하나 차지했으면 좋겠다 싶으지만 지위를 딱 차지하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다 그렇습니다. 온갖 그거 가리켜서 정욕 생활이라, 정욕 생활. 성욕 생활이나 물욕 생활이나 꼭 같습니다. 물욕도 취하기 전에는 이놈만 취하면 좋겠다 싶으지만 취해 봤자 재미없어 권태 나. 나중에 가서는 그게 들어서 화가 돼서 게워 내트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제 어리석은 자와 같이 땅 위에 내가 이것, 저것 이런 것을 이것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거는 모래와 같이 세월이 지나가면 다 홀러서 떠내려 가 버린다. 마지막에 네가 죽을 때 되면 다 떠내려가고 하나도 없고 네가 일생 동안 건설한 것은 꽝 넘어 가고야 만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때는 다 우는 것이오. 왜 우느냐? 우는 것은 제 한 일이 헛일이기 때문에 울지, 왜 의인이 죽을 때 왜 웁니까? 의인이 죽을 때 할렐루야 부르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과연 이 하지 말라는 것 안 할라 하고 하라는 것 할라 하는 생활이 어려웠지만 이 죽음이 있기 때문에, 무궁세계가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하지 누가 죽음을 놀랩니까? 이러기에, 성도 들은 순교 앞에서 기쁘고 즐겁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요것을 잘 되새겨서 어리석은 자와 같이 모래 위에 세우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기뻐하는 이 기쁨은 이게 뭐이냐? 이 기쁨은 반석이냐, 이 기쁨은 대속하신, 완전한 의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기쁜 것이냐, 인간 둘이 만나서 기쁜 것이냐? 아이고 모래 위에라 절단난다 내가 이와같이 지금 행복이다, 다행이다, 든든하다 하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든든한 것이냐 이것이 돈이나 어떤 정권자의 정권 가지고 든든한 것이냐? 아이구 그까짓 것 모래다.
이것을 판단만 해도 사람은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셔서 이 모로 저 모로 우리를 살릴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우리 마음이 강퍅해 가지고 듣지 안하니까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오전에는 그 씨뿌리는 비유를 말했는데 어쨌든지 세 가지 적으로 더불어 싸워서 세 가지 적을 우리가 완전히 파멸시켜야 됩니다. 완전히 소멸해야 됩니다. 그게 쉬운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솟아나는 그놈 죽인다는 게 쉽지 않소.
그게 쉽지 안해.
또, 내가 주님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에 가족 문제가, 모든 친구 문제가, 사업 문제가, 세상 이런 모든 염려와 재리 물질 이런 것들이 들고 나서 가지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살라 할 때에 살지 못하게 하고 안 할라 하는 걸 하라 하고 이렇게 할 때에 그런 것을 파멸시키는 것이 어렵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극복해 이긴 사람은 세상을 이겨요. 그 사람에게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그까짓 것? 온 세상은 발 아래 밟아 버렸는데.
이래서, 세상 이 모든 말들 때문에 우리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렇게 두려운 말씀을 들어도 두렵지 안하고 간절한 말씀을 들어도 간절치 안하고 여게 소망을 마구 내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 소망할 말씀이라도 이 소망도 생겨지지 안하고, 간절히 소욕도 생겨지지 안하고, 심판도 두렵지 안하고, 곧 그 눈 앞에 있는 더러운 모든 이 더러운 땅에 있는 욕심 그것만 가득 차 그것만 보고 마니까 죽을 자가 아니냐 그말이오. 우리 눈을 빼 버려야 돼.
이런 눈은 빼 버리고 참 눈을 가져야 돼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세 가지 적으로 더불어 싸워서 우리는 옥토에 뿌린 씨가 돼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