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11:45
대내전과 대외전
1985. 3. 8. 금야
본문 :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간단하게 여기 있는 그저 큰 뜻만 들어서 몇 절을 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고 난 첫 명령으로 아말렉 족속을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 있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멸하라 그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15장 1절에서부터 보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출애굽기 17장 8절에 보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실 때에 그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방해를 해서 상당히 하나님이 선민 구원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그 후 오백 년, 혹은 오백오십 년, 정확한 시일은 지금 잘 판명되어지지 않습니다. 오백 년으로부터 오백 오십 년, 혹 육백 년 후입니다.
그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할려고 하는 구원 역사에 아말렉 족속이 심히 방해한 것을 내가 추억하노라. 그런고로 네가 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한 짐승도 생명 있는 것은 다 진멸해라' 그렇게 하나님이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깨닫고 지나갈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 운동에는 하나님이 친히 피조물 되시고 또 십자가의 죽으심을 신인양성일위가 사망의 고난을 겪으시면서 구원하신 이 일을 했습니다. 우주를 만드실 때는 그렇게 힘들게 만들지 아니하셨고 그저 엿새 동안에 다 만드셨지만 당신의 목적인 하나님 같은 그런 온전한 자를 만드는 이 구속 역사에는 심히 힘들여, 대속하는 데에는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지 안하면 안 됐고, 또 저주와 사망의 고난을 당치 안하면 안 됐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 구속 사업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을 제일 기뻐하시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목적하신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참 우주와 영계를 능히 상속시켜서 위임 통치를 할 만한 그런 실력의 존재를 창조와 섭리로 이루시는 이 일에 돕는 이 일을 제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기에, 이 일에는 세상 끝날 까지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고 너와 함께 하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반면에 인간을 구원하는 이 구원 역사에 방해하는 일은 하나님이 제일 큰 분개로 이렇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기뻐하시는 깃은 인간 구원에 돕는 이 일 하는 것을 제일 후대로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또 제일 섭섭하고 분개하게 여기시는 것은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되는 일입니다. 보면 아말렉 족속이 그렇게 방해하다가, 오백여 년 하나님이 추억해 계시다가 때가 되니까 하나도 없이 그렇게 전멸시킨 그런 복수는 다른 범죄에서는 보지를 못합니다.
또, 미리암은 모세를 날 때부터 길렀고 애굽 궁성에서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정하고 이렇게 길러 나온 그 미리암입니다. 그랬는데, 미리암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 구원의 책임을 진, 지도의 책임을 지고 있는 모세를 훼방하는 일을 한 일을 인해서 하나님이 미리암을 죽이려고 하실 때에 모세가 심한 간구를 가지고 하나님의 노를 풀어서 비로소 문둥이가 됐으나 일 주일 동안 벌을 받고 나중에 해벌을 시켰습니다.
또, 고라는 아주 유명한, 이스라엘 중에도 권위 있는 사람입니다. 고라의 모세를 훼방하는, 구원 운동에 방해가 되는,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을 허니까 그 허는 소리로 인해서 권위가 벌어지니까 은혜 받는 사람들이 은혜 받는 데에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고라를, 그때 고라가, 아주 머리들만 추려서 이백 오십 명이요. 그랬는데 그 사람들을 땅 속에 산 매장을 시켜서 전멸을 시켰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인간 구원에 협조하는 이것을 제일 기뻐하시고, 제일 섭섭하게 여기시고 분히 여기시는 것은 인간 구원에 방해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이것을 기억하고 사람을 접촉할 때에 혹 그 사람의 믿음에 손해를 내가 보일까, 그 사람이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경 읽는 데에 내가 방해를 할까, 기도하는 데에 방해를 할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을 품고 신앙으로 나아가는 그 열심을 방해할까, 또 그 사람이 천국 소망만 가지고 달리는 것을 혹은 그 사람의 마음을 흩트려서 속화를 시킬까 하는 이런 것을 우리가 아주 두려워하고 삼가해야 됩니다. 내가 조금 잘못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언행 심사가 방종하게 하면 나 때문에 언행심사가, 그 사람의 언행 심사가 방종하게 돼서 구원이 손해 가게 되면 하나님은 그 복수는 결단코 그저 두지 않습니다. 그저 언젠가 거기 대해서 공정된 복수를 하십니다. 그러기에, 구원 운동에 협조되는 일은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고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접촉할 때에 잘못하면 이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돈이 유익하며 돈이 손해 가겠느냐, 또 내 사업에 어떻게 하면 좀 유리하며 손해 가겠느냐, 내 지위나 권세나 위신이나 명예나 그런 데에 손해 가나 유익 되나 하는 그런 면을 노려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의 인인 관계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보다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큰 문제를 우리가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은 생각을 안해도 좋습니다. 내가 사람을 상대할 때에 이 사람에게 구원이 손해 가게 하면 하나님이 섭섭해서, 나는 그분의 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분의 전 은혜로 축복으로 살아야 될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끊어지면 나는 모든 것이 다 절단 나는 것이니 사업이 손해 가고 물질이 손해 가고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안일이나 가정이나 무엇이 손해 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의 이해를 전적 표준 삼아 가지고 우리는 모든 일도 처리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자기가 만일 주님을 생각하고 복음 운동, 인간 구원 운동을 인해서 손해 본 것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그대로 둬 두시지 않습니다. 네가 냉수 한 그릇의 수고라도, 또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손해를 봤으면 여러 배 백 배를 내가 갚아 주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우리가 아주 세상이 모르는 높은 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인 관계에서 물질이나 자기 지위나 권세나 혹은 자기 온갖 계획해 놓은 욕망 그것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그것을 이해의 표준으로 삼고 사는 것이 온 세상 사람인데 우리는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이렇게 이 사람과 관계하는 이 관계가 이 사람과 내게, 내 구원도 내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과 나의, 자타의 구원에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이것만 표준 삼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가지신 주님이 그에게 대해서 후대해 주실 것이요 모든 것을 다 책임져서 손해본 것은 백 배나 보상을 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점을 생각지 못하고 구원이야 어찌됐든지 조브라운 생각 가지고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그런 표준으로 인인 관계, 사물 관계를 가지기 쉬우니까 이것도, 이렇게 우리의 표준을 바꾼다는 거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바꾸는 것이 이것이 참 무한히 큰 것입니다. 세상은 이 가치를 모릅니다. 이 일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하나님이 사람되시기까지, 신인양성일위의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까지 이렇게 전부를 기울이신 이 중요한 일인 것을 깨닫고 우리가 인간 구원에 손해를 끼치는 이런 실수를 우리가 하지 안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으로 만나든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여기 생각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이 소돔 왕으로 더불어 그리한 것이든지 롯으로 더불어 그래 한 것이든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표준해 가지고 거기서 평가하다 보니까 그런 생활을 아브라함은 하게 됐고, 롯은 그런 걸 생각지 안하다 보니까, 그만 세상 사람과 같이 자기의 모든 활동에 표준을 삼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 것입니다.
구원에 방해한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 하실려고 사울 왕을 첫 명령으로 이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러니까, 사울 왕은 참 왕으로 세워 주심을 받은 후 첫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잘 감당했으면 하나님도 그에게 굉장한 축복을 해 주셨을 것이고 또 그도 큰 축복을 받을 것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거는 뭘 보고 아느냐 하면 사무엘이 가니까 사울이 말하기를 '내 주 사무엘이여 여호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당신이 명령한 이 일을 잘 순종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니까, 사울 왕도 벌써 그 명령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 큰 축복 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랬는데,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전투해서 거의 다 멸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한 사람 남았고, 그 많은 사람을 다 죽였고 하나님 명령대로, 아각 한 사람만 남았고, 또 짐승으로 말하면 다 죽였고 그저 거기 촐촐 추려서 종자 좋고 또 아주 우수한 특수한 그런 것만 얼마 남겨 뒀습니다. 이랬는데,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가지고 '사울이 지금 내 명령을 순종하지 안하고 이와 같이했으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은 이것 때문에 세웠는데 내 명령을 이렇게 순종치 안했으니 내가 사울을 이제는 왕으로 세우지 안하고 그 왕 직을 빼앗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건으로 인해서 사울은 그만 왕 직을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깨달을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할 때 우리가 복종하는 일을 잘 진행해서 나가서 한 십분지 오나 그 순종에 성공을 하면 그만 우리는 이만하면 됐다 그렇게 방심하기 쉽습니다. 사울은 거의 한 십분지 구도 더되고 한 백의 구십 구나 성공을 한 셈입니다.
이랬는데 사울 왕은 성공하지를 못하고 실패를 해서 그만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왕 직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박탈당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명령을 순종하는 그 일이 아주 참 일사천리로 그렇게 가속도로 큰 성과를 이루는 거기에 사울 왕의 왕권을 삼키는 적이 있는 것을 사울은 몰랐습니다.
만일 사울의 그 왕권을 빼앗을라고 어떤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 할지라도 사울이 생명이 있는 한은 그 왕권을 빼앗기지 안할라고 거기서 전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왕 직을, 왕권을 빼앗은 것은 군대가 아닙니다. 군대가 아니고,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의 사람을 아주 진멸하고 또 모든 생명 있는 짐승들도 다 이렇게 진멸하기를 한 백의 구십 구나 다 이렇게 성공을 했는데 그때에 그 백성들과 또 사울이 볼 때에 아주 아각이라는 그 왕은 인물이 잘나고 모든 그 인격이나 또 언어 교제에 아주 훌륭한 아름다움의 남아였고 또 좋은 우수한 특수한 그런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만 백성이 '아, 이것은 다 멸할 게 아니라 이거 종자가 좋으니까 얼마만큼 좀 둬서 우리 나라에 가져가 가지고 종자를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또 이런 사람은 너무 죽이기는 아까우니까 이 한 사람쯤이야 살려 둬 가지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이리 저리 이용하면 이용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말해 가지고 그만 그 사울 왕이 거기 넘어갔습니다. 넘어가서, '그러면 그래 보자' 하고 아각 왕과 그 짐승 얼마를 남겨 둬 가지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아서 그만 왕 직을 뺏겼습니다. 하나님이 왕 직을 빼앗으니까 사울 왕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 직만 뺏길 게 아니라 마지막에는 이로 인해서 가족과 부하가 함께 단합 자살하는 그런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울 왕을 망친 적이 어데 있었는가? 그 적이 사울 왕 속에 사욕이라는 그 적이 들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은 그것이 뭐인고 하니 성신의 소욕의 행위입니다. 성령의 소욕의 행위인데,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대로의 일을 행할 때에는 그 일이 아무리 참 백발 백중으로 그렇게 그 일이 잘돼 나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뜻 순종에 충성할 때에 그 일이 잘돼 나갑니다. 그 일이 잘돼 나갈 때에 우리는 그 일이 잘돼 나가는 거 그것만 생각하고, 또 잘해 놓은 그 일만 보고, 또 이제는 다 됐으니까 남은 일은 얼마 안 남았으니 이거쯤이야 잘하지 못하겠느냐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 속에 자기의 전심 전력 기울여 놓은 그 모든 이루어 놓은 그 성공과 승리를 단번에 삼켜 버릴 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못하면 그 모든 승리 생활은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울을 보면 악령이 옆에 붙어서, 언제든지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성령만이 우리를 인도한다고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반드시 그 옆에는 악령은 붙어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은 이렇게 붙어 있지, 악령이 성령과 그 사이에 꼭 이렇게 붙어 있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꼭 붙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소욕대로, 하나님의 소욕대로의 일을 이룰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소욕대로의 일을 성취하는 여기만 전력을 기울이고 여기는 내 성공을 삼킬 무서운 적이, 단번에 나를 삼키고 말 그 적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군대를 선정할 때에도, 기드온 삼백명 군대를 선출할 때에 선출 당한 군대들의 장점이 뭐인고 하니, 갈급할 때에 물을 마시면서도 물만 보고 마시지 안하고 물을 마시면서도 여기 적이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을 살피면서, 네가 갈급할 때에 그들에게 물을 줘서 물먹는 거 보고 네가 선별을 해라했습니다.
목마를 때에 물을 주니까 그만 목이 마르니까 물을 꿀떡 꿀떡 넣어 삼키는 그런 사람들은 따로 내고, 목이 암만 말라도 물을 먹으면서 손으로 물을 찍어 먹으면서 자꾸 지금 눈은 양사방 이렇게 둘러보면서 적이 어찌되나 적을 보면서 물을 찍어 먹는 그 사람만 삼백 명을 추려 가지고 그때에 전쟁에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자기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역사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하는 그 반면에 자기를 삼키는 적이 있는 것을 늘 노리고 해야 되지,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만 한다고 거기만 전력을 기울이고 적을 방비하는 그 깨어 있음이 없으면 헛일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무슨 일이든지 가치 있는 의로운 일을 할 때에는 그 일에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충성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충성하면서 거기에는 나를 삼킬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이 거기 같이 늘 따라다니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걸 붙여 둡니다. 붙여 두기 때문에 거기에 육체의 소욕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방비하는 깬 전투가 아니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의로운 일 곧 하나님의 뜻대로 의로운 일을 할 때에 그 의로운 일하는 데에 우리의 적은 어떤 게 적이냐? 우리가 의로운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무슨 일을 할 때에는 외적이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무슨 군대든지 어떤 세력이라도, 그러기 때문에, 사자들도 해하지 못하고 불도 해하지 못하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해하지 못하지만 자기가 대내전인, 자기 안에서 전쟁하는 대내전 여기에 늘 깨어 있지 안하면 우리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우리의 제일 큰 적이 되는 성령의 소욕의 일을 할 때에 우리의 제일 큰 적이 되는 육체의 소욕 큰 적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되고, 하나님의 하나님의 중심의 일을 할 때에는 자기 중심이라는 이 적이 항상 같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또 하나님 위주의 일을 우리가 할 때에는 자기를 위주로 하는 그런 적이 옆에 붙어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지 못하면 승리는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스라엘 첫왕 사울 왕의 첫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가 아각 한 사람과 짐승 몇 마리 남겨 놓고 난 다음에는 전부를 몰사를 다시키고, 10절로 11절에 보면, 이렇게 사울 왕은 백의 구십 구나 성공을 했으니까 자기 마음에는 다 이제 만족히 성공을 했다고 생각하고,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했습니다.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니까, 그가 한 백의 구십 구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대성공을 했다' 이렇게 자기 마음에 만족이 되고 해서 승리한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또 그 다음에 내리 읽어 보면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사울 에게 이른즉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울 왕이 사무엘을 만나 가지고 '사무엘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시옵소서. 내가 당신이 나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을 다 지켜서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그 순종을 다해서 드렸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이, 내게 그 명령을 전달한 당신도 하나님 앞에 큰 칭찬을 받을 것이고 또 나도 큰 칭찬을 받을 것이고 복을 받을 것이라' 그렇게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가 내 명령을 지키지 안하고' 11절에,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순종하고 이루었기 때문에 사울 자신은 의례히 큰 축복을 받을 것이고 또 그 명령 전달한 사무엘도 하나님 앞에 큰 복을 받을 것이라 이렇게 평가했는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 왕이 내 명령을 지키지 안하고 배반하고 저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사울 왕 세운 것을 후회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 여기서 우리는 깨달을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에 대해서 그 명령 순종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순종을 하면 그 순종이 하나님 앞에 인정이 될까? 순종의 그 표준을 어디다 둘까? 이것을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이번 명령에는 참 큰 칭찬과 축복을 받을 만침 내가 그 명령을 복종했고, 나뿐 아니라 이 전달한 사무엘 당신까지도 이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명령 복종의 표준이 사울 왕이 표준한 표준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 순종을 표준한 그 표준이 이렇게 차이 있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 결정을 해 나가야 합니다. 사울 왕이 이거 순종한 것은 거의 백의 구십 구나 순종했습니다. 백의 구십 구나 순종했으니까 이만한 순종이면 우리들도 완전 순종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 사울도 자만했고 또 승리했다고 기뻐서 기념비까지 세우고 잔치까지 하고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이 보신 그 계산 표준은 아주 이것은 반역이라고 정죄를 해서 그 왕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명령 순종에 대해서 그 표준을 어떻게 우리가 두는가 하는 것을 확정을 지워야만 하겠습니다. 성경에 사데 교회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이 성화구원이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순종을 어느 정도로 표준을 삼는가?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도 그러하고 신약에도 행위의 명령 순종의 표준은 완전입니다.
완전이지, 사울 왕의 표준과 같이 그저 '십분지 오를 순종했으니까, 혹은 십분지 일을 순종했으니까, 백분지 구십 구를 순종했으니까 이만하면 되지 않느냐?' 이 사울은 백의 구십 구 정도로는 순종을 했습니다. 백의 구십 구를 순종했습니다.
구십 구를 순종하고. 자기가 '이만하면 됐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족하실 것이고 축복하실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이 고장입니다. 만일 사울 왕이 그렇게 순종하다가 '다 순종하지 못하고 지금 남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순종을 해야 될 터인데' 하고 자기가 그 순종에 노력을 가하면 그 어떤 어려움 부분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와서 완전 순종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실패한 것은 순종의 표준을 잘못 정해서 실패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순종의 표준이라 하는 것을 너무 우리 주관대로 우리 사욕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정해 놓은 이것을 참 우리 자타를 보고 한국 교회 세계 교회를 볼 때에 전부 하나님이 순종을 어느 정도로 표준했느냐, 그 표준 하는 표준 이것이 다 잘못되어서 그저 순종하다가 모자라면 있는 힘의, 이 완전 순종을 표준을 하고 달리면서 모자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라면 하나님이 도와서 반드시 완전 표준, '네 행위에 온전하다' 온전함에 도달할 터인데 우리가 이 표준을 잘못 정해 가지고 실패하는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들, 요리 문답에도, 요리 문답에도 보면 죄가 무엇이냐 하는 죄의 정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부족한 것과 어기는 그것을 가리켜서 좌라고 말했습니다. 어기는 것만 죄가 아니라 백의 구십 구를 순종하고라도 그 순종의 완성을 못했으면 그거는 죄가 된다 이렇게 모두 다 선각자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모든 바로 깨달은 성령의 사람들은 다 순종의 표준을 완전으로이래 잡고 있는데 오늘 우리는 너무도, 그저 순종의 흉내만 내면 됩니다. 흉내만 내서, 말만 조그매 순종하면, 행동만 조그매 하면, 그저 백분지 일만 해도 '됐다' 백의 오십만 해도 '됐다' 백의 구십만 하면 '이제 됐다' 하고 참 사울같이 기념비를 세우고 아주 이제 축복이 올까 이렇게 기다리고 손 씻고 기다리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많이 있어 가지고 실패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이 표준을 확고하게 정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 건에 대해서는 그 건을 완전 순종이라야 순종이지, 중단하지 말아야 됩니다. 완전 순종으로서, '요 행위에 대해서는 완전하다. 네가 다른 것은 다 잘못했지만 이 건만은 완전히 순종했다' 완전히 순종. 완전 순종 그것을 우리가 표준으로 삼고 우리가 노력하면 다 될 수 있는 것인데, 마귀란 놈이 우리를 꼬아 가지고 완전 순종을 표준으로 삼지 못하게 하는 데에서 다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뻐케 여기라 그 말은, 시험을 당하거든 소망을 가지고, 그 시험으로 인해서 네가 크게 높아지고 귀해지고 영광과 칭찬과 존귀함을 얻을 것이고 네 자체나 행위에 대해서 큰 수입을 볼 이득이 오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그라고 난 다음에 무슨 말씀했느냐 하면 '이에 대하여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됐다. 이것만큼은 됐다. 다른 것은 백 가지를 다 네가 죄 짓고 이랬지만 이 한 가지 명령 순종한 이 일에 대해서는 네가 완전 순종을 했다. 이거는 됐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거기도 보면 표준이 완전 표준입니다. 완전을 표준했습니다. 사데 교회에서도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찾아보지 못했다' 이랬으니까 그 표준이 온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에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의 소욕대로 행할라고 할 때에 성신의 소욕의 적이 무엇입니까? 성신의 소욕의 적은 육체의 소욕입니다. 자기, 물론 육체의 소욕은 자기 몸 밖에도 온 세상이 다 육체의 소욕이요 또 자기 안에도 육체의 소욕인데, 자기 안에 있는 대내전의 육체의 소욕으로 더불어 싸워서 그걸 적인 줄 알고 이기면 자기 몸 밖에 있는 적이라 하는 그까짓 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인 대내전 이 대내전을 싸우는 것은, 이 대내전을 싸우는 것은 이것은 기본구원을 얻은 그 은혜를 힘입어 가지고 저 단독이 싸워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대내전은 자기 단독 싸워야 됩니다. 왜? 자기에게 자유성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를 꺾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이랄라면 이라고 저랄라면 저라고, 육체의 소욕을 영접할라면 육체의 소욕을 영접하고 성령의 소욕을 영접할라면 성령의 소욕을 영접하고, 이것은 자기 자유성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능하지만 우리의 자유성으로 육체의 소욕을 내가 취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 손을 못 댑니다. 우리에게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그러나, 일단 대내전을 싸워서 자기 자유성이 '나는 성령의 소욕을 원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나는 원수로 삼아서 대적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나는 취합니다.' 이 결정만 딱 떨어지고 나면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가 할 때에, 대내전은 쉽게 말해서, 내나 하나님 기본구원을 힘입어 가지고 하는 것이지만 대내전은 제 자유성 가지고 저 혼자 싸우는 것이고, 저 혼자 싸우는 것은 무엇이냐? 자유를 가지고 이렇게 하느냐 이렇게 하느냐, 제가 육체의 소욕을 영접하느냐 성령의 소욕을 영접하느냐, 옛사람을 영접하느냐 새사람을 영접하느냐 그것은 자기 혼자 주관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을 영접한다 하면 마귀는 춤을 추고 큰 개가를 부릅니다. 왜? 벌써 그때 '나는 육체의 소욕을 나는 취하니까 성령의 소욕은 나는 배반합니다' 하면 낯이 발가이 해 가지고, 참 낯이 발가이 해 가지고 수치를 당하면서 물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항거 못합니다. 만일 항거하다가는 사탄에게 고발당합니다. '하나님이 자유성을 줘서 이래 해 놓고, 이가 이 자유성 가지고 나를 지금 영접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이라도 당신의 그 정해 놓은 법을 어기며 그렇게 월권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빨리 나가십시오' 하면 하나님은 꼼짝 못 하고, 꼼짝 못 하고 낯이 벌거이 해 가지고 수치를 당하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내전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너만, 너만 허락해라. 너만 허락하면 지극히 큰 능력이, 네가 믿기만 믿으면, 네가 나한테로 속해서 나에게 복종만 하면 지극히 큰 능력이 너에게 간다' 이렇게 하고 있을 때에, 그때에 실룩실룩 있다가서 사단을 약을 올리고, 사단은 저는 지금 제 성공할까 싶어서 막 지금 안달이 돼 야단을 지기는데 이렇게 좀 약을 올리고 난 다음에 '나는 너를 부인해. 떠나' 하면 하나님께서 그때에 당신을 영접하는 것은 그거 말할 수 없는 영접이오, 말할 수 없는 영접. 그만 그 이상 영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그래. 네 모든 것은 내가' 이라는데, '내 몸 밖에 지금 원수가 많이 있는데 이 일을 어쩌고' '아, 그거야 내가 하지. 너만 허락하면 그거야 내가 하지' 그 다음에 모든 것은 지극히 큰 능력이 다 처리하기 때문에, 대외전이라 하는, 대내전만 승리해 놓으면 대외전이라 하는 것은 할 것도 없어. 하나님이 다 승리해 주시오.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해야 합니다.
이 사울 왕이 그 다음에 아각과 좋은 짐승 몇 마리 남겨 놓은 거 보면 그것은 사울을 삼킨 사울 속에 들어 있는 사욕이 들어서 그랬다고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그거는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사울 속에 물욕이라는, 물욕이라는 사욕이나 정욕이라는 사욕이나 성욕이라는 사욕이나 명예욕이라는 사욕이나 안일욕이라는 사욕이나 생명 애착욕이라는 사욕이나 사욕은 종류는 많지만 한가지입니다.
어쨌든지 이것은 물욕이라는 욕심의 사욕이요. 물욕이라는 사욕이 들어 가지고 사울 왕의 일생을 망치고 그 존귀한 직책을 다 망쳐서 절단 내리라고는 사울 왕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욕에 대해서는 생각지 안했어. 그때에 '요 짐승을 남겨 두자. 이 아각은 살려 두자.' 옆에 백성들이 말하는 그것이 막바로 사울 왕을 칼로 찔러 죽이는 자인데, 이렇게 사울 왕 자기의 원수인 줄 알았으면 그 부하들이 그러면 부하들 쳐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사울 왕의 용기에 쳐죽여 버리고 달성했을 것인데, 그게 어떻게 묘하게 와 가지고 사울 왕을 삼키러 왔던지, 사울 왕을 삼킬 사욕이라는, 물욕이라는 그 사욕 그놈이 자기인 줄 알고 원수인 줄 모르는 착각하는 거기서 사울 왕은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원수인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이렇게 옛사람을 정의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은 다 이 싸움에서 너무 많이 속고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에, '그놈이 내나 내라고 하지만 내가 아니다. 나를 죽인 원수다.
참 네가 아니다. 원수인 내다' 이렇게 정의를 하는 것은 너무도 많이 속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걸 보면 물욕이라는 그 종류의 사욕이 들어서 사울 왕을 그렇게 죽였고, 또 그 다음에 기념비를 세운 걸 보면, 기념비를 세운 걸 보면 그게 무엇이냐? 자기 중심 아닙니까? 자기 중심,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안하고 벌써 이기고 나니까 제가 이긴 것처럼 해 가지고 그 영광을 제가 가로 취한 것을 보면 그 사울 왕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이 사건이 바로 되고 난 다음에도, 30절로 31절에 보면 사울 왕이 그렇게 말했오. 30절로 31절에 보면, 벌써 이 사건이 다 폭로가 돼 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사울 왕을 왕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거기서 벌벌 떨면서 회개할라고는 생각지 안하고 말하기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 당신이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폭로를 시키면 내 권위가 떨어져 가지고 안 될 터이니까 이 사실을 폭로하지 말고 그저 형식이라도 나하고 같이 가서 동행해 가지고 제사 드리는 것으로 한번 경배하러 같이 가자' 강제로 옷을 거머쥐고 탁 땡기니까, 무력으로 하니까 어쩔 수 없어 가 가지고 이랬습니다. 그걸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 위하는 것이 없고 자기 위하는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이 왕이 되어 가지고,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아말렉 족속을 치는 명령 순종하는 그 일에서 그 사람이 벌써 원수인 자기 사욕이 들어오는 걸 몰랐고, 육체의 소욕이 들어오는 걸 몰랐고, 자기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들어오는 걸 몰랐고, 또 자기 위주, 자기 무슨 백성들에게 가치 없이 보일까 싶어서, 자기는 자기 위주인 원수가 들어온 것을 몰랐습니다.
거기 보면, 17절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왕 되기 전에는 자기는 스스로 작은 자로 여겼다 하는 그 말은, 자기는 무지 무능자요 자기는 죄인이요, 자기는 참 죄인이요 무지 무능한 자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은 몰랐습니다. 사무엘은 이 사람 모르는 사람인데, 사무엘을 보내서 '네가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을 들어서 왕을 세워라' 할 때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 말이오. 하나님이 인정했기 때문에 왕으로 세웠습니다. 왕으로 세웠는데, 왕으로 서고 난 다음에도 그런 표시가 안 났지만 명령을 순종해서 명령 순종의 성공이 자기들에게 오게 되는 그 즈음에 거기서 마귀란 놈이 와서 사욕을 불러 들였고 자기 중심을 불어넣었고 자기 위주를 불어넣어 가지고 망치게 됐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룰라고 준비를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지혜를 가지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나의 약한 것과 모든 부족한 것을 나는 자랑한다' 자랑한다 그 말은, 부족한 것만 항상 나는, 내게는 부족하고 무지 무능한 이것만 찾는 것이 자기에게는 성공과 복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자기는 알았습니다. 왜? '내가 약할 때에 강해졌고 내가 무지 무능할 때에 능력 있는 자 되어졌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에 그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자기를 바로 알았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도와서 역사한 그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나 어른이나 강자나 약자나 할 것 없이 어쨌든지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은 자꾸 자기의 단점, 자기의 단점, 자기의 약점, 자기의 모든 불의의 점, 죄, 자기의 약점, 자기의 죄, 자기의 단점, 자기의 어리석음, 자기는 실패자, 전부 자기에게 나쁜 것만 찾는 이것이, 나쁜 것만 찾고 '나는 이런 나쁜 자입니다' 하는 이걸 찾아 가지고, 이런 자이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을 구할 때에, 자기의 정말 나쁜 이 부족점을 찾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제가 '나는 지금 무지한 자입니다' 무지한 자를 알고 있으니까 지혜를 주시니까 '아, 이거는 하나님의 지혜라'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무능한 자인 줄 아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니까 '아이고, 이거 하나님의 능력이라.' 자기는 패전자인 줄 아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이러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자기는 승리할 수 있는 자라, 지혜 있는 자라, 능력 있는 자라, 자기는 깨끗한 자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자에게 그걸 주면 제가 잘나 가지고 그런 줄 알지, 점점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공연히 제가 교만해 가지고 이래 나가서 멸망만 당하지, 이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줄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제일 좋은 곳이 어디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 어디며 제일 평안한 곳이 어디며 제일 행복스러운 곳이 어디인가? 높은 지위나 대궐이나 왕위나 그런 것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좋은 거처는 어디냐 하면 죄인의 자리, 무지의 자리, 또 무능의 자리, 그렇게 모두가 다 약한 자리 그 자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제일 낙지(樂地)입니다. 그만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자기가 있어. 자기는 그런 자리, '나는 이런 자다' 그런 자로 되어 있음 때는 만사에 형통이요, 평강이요, 성공뿐입니다. 실패는 없습니다. 이런데, 사람이 그 자리를 있지 안하고 자기가 높은 자리, 의인의 자리, 자기의 장점만 보는 자리, 모든 유능한 자리에 자기가 있으면, 그 자리에 있다 그 말은, 자기가 그런 자인 줄로 알 때에, 자기가 그런 자인 줄로 아는 그때가 그게 지옥입니다.
어떤 친구 하나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하고 둘이 앉아서 말하기를 그런 말합디다.
'나는 참 좋은 자리 택했어. 좋은 자리.' '무슨 좋은 자리 택했느냐?' 이라니까 '내가 이래 거석해 보니까 죄인 자리가 제일 좋아. 그래서 나는 이 죄인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만사에 성공이 됐는데 그만 죄인 자리만 떠나면 그만 환난과 고통과 모든 실패가 오더라' 그러면서, 죄인 자리가 자기에게 제일 행복이라고. 그러면, 죄인 자리라 말은 죄를 짓는 자리라 말이 아니오. 자기는 죄인이라는 그 자리에 말이오.
'자기는 죄인이라는, 자기는 무능한 자라는, 죄 짓는 자리가 좋은 게 아니라.
자기는 무능자요 범죄자요 자기는 연약자요 어리석은 자라. 그래 자기가 낮아질 때에, 자기가 참 단점을 발견했을 때에, 자기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에, 자기의 흉한 점을 발견한 그때에, 그걸 발견한 그때가 제일 좋은 때요, 그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더라.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모든 죄인 나쁜 것 그것만 발견하고 죄인으로 그 자리에 살 때에는 거기는 모두 성공뿐이오 평강 뿐이더라' 바울의 견해나 그 사람의 견해나 같아요.
그것이 누구냐 하면 서울에 있는 OOO 목사님하고 저하고 둘이 이래 앉아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OOO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디다. 그래서 내가 참 들으니까 어떻게 좋고 또 나도 기쁘고 그런지 그래 하면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셨다. 평생 그 선물을 버리지 말아라. 가장 처세의 행복의 자리다. 그 자리를 버리지 말아라. 평생 버리지 말고, 그 자리 떠나면 죽는데 그 자리만 있으면 행복이다' 둘이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라고 할 때에는 거기는 적이 있다, 적이 함께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우리가 옳은 자리에 서서 나아갈 때는 그 자리에 적이 한테 붙어 있다. 이것만 알 게 아니라 또 우리가 어떤, 예수님의 대속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실패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실패냐, 이라면 실패 속에 파묻혔는데 실패 속에 파묻혀서도 이라면 성공 자리에 옵니다. 실패 있을 때에 성공도 거기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엉망진창에 빠져 가지고 있을지라도 거기 헤어날 대궐이 옆에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회개만 하고 믿음만 거머쥐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승리를 할 수가 있고 헤어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럴 때마다 대내전 이것을 잃지 말고 언제든지 대내전을 하면서 대외전을 해야 되지 대내전을 무시하고 대외전에만 주력하면 그 사람은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악령은 우리가 이 대외전을 해 나갈 때에, 그때 사울 왕이 대외전을 하여 아말렉 족속을 마구 치고 짐승을 치고 이래 가지고 군대를 거느리고 아주 그저 아주 일사천리로 쫙 전진하니까 그것만 보고 쳤지, 자기의 참 적은 자기 속에 있었는데 대내적을 이것을 발견하지 못해 가지고 완전히 사울 왕은 실패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몸 밖에 어떤 일을 건설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일만 보고 자기 속에 내란이 난 것을 그걸 살피지 못하면 그만 실패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가 대외전 할 때는, 대외전만 하는 사람은 벌써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좀 있으면 패전자로 나타나고 맙니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대외전 할 때에는 대내전을 해서 대내전에서 승리한 그 승리가 대외전이고, 또 대내전에서 승리한 승리가 대외전 하고 그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겨자씨 믿음을 주님이 해석할 때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먹이다가 돌아오면 앉아 먹어라 하겠느냐. 네가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예비하고 띠 띠고 주인이 먹은 후에 널 먹으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했다고 칭찬하겠느냐' 하는 그 말이 비유인데, 그거 무슨 말씀이냐? 어떤 대외전 이라도, 양 먹이고 밭 갈면 그거 대외전 아닙니까? 그거 복음 운동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어려운 일을 하고는 그 일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 일 하고는 즉시 대내전으로 돌아가라.
그래 가지고 '주님 잡수실 게 무엇입니까?' 주님이 당신의, 우리가 모르는 음식이라고 말하지 안했습니까? 그것은 곧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 양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인의 먹을 거 마련하고 다 자시고 나면 너 먹어라 그 말은, 대외전 하고 나서는 믿음이 자라는 법입니다. 대외전 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랬으니까 앉아 먹겠다, 칭찬해 주겠지' 대외전 했으니까, 너는 대외전의 승리를 했으니까 승리의 무슨 상을 네가 기다리지 말고 대외전 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 주인 잡수실 게 무엇이냐,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냐 이라고 찾아 가지고, '주인 먹을 때에 띠를 띠고 섬기다가' 그거 무엇이냐? 주님의 뜻을 찾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먼저 잡수시는 게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찾고 난 다음에는, '이게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당신의 뜻인데 이 뜻을 내가 행할라고 하면 내 힘으로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러니까, 뜻을 찾은 것이 잡수실 것을 예비하는 것이요, 예비하는 것이요, 그라고 난 다음에는 띠 띠고 섬기고, 다 먹도록 띠 띠고 섬기는 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여, 이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하나님께 기도해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대한 당신의 뜻을 내가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그 뜻을 하나님이 먼저 이루시고 난 다음이라야 우리가 이루지 이루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루어 달라고 간곡히 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 허락하심을 받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네가 먹어라. 그 다음에 네가 행해라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네가 행해라. 그 전에는 네가 행하면 안된다 이렇게 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는 대외전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대내전을 보면서 대내전을 승리한 그 승리가 대외전으로 나가고 또 대내전 승리가 대외전으로 나가고 이렇게 언제든지 전쟁은 안에서 시작해 가지고 승리했으면 그것이 대외전으로 나가야 되지 대내전에 승리 못한 것이 대외전 하러 나가면 반드시 큰 패전을 당해 가지고 포로를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사울은 이렇게 순종하고 난 다음에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기념비 세우고 했는데, 하나님이 요구하신 표준은 완전입니다. 백의 구십 구이면 되는 게 아니고 완전을 하나님이 요구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명령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 일을 이룰 때에는, 이룰 때에는 그것이 완전이 되어야 그게 이루어진 것이지 완전 순종이 아니면 그거는 실패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말씀하시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하는데 이기는 자는 한 사람뿐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뿐이라. 그 하나뿐이라 말이 무슨 말이냐? 하나뿐이라 말은, 여기는 일등도 이겼고 이등도 이겼고 삼등도 이겼고 상급을 그래 주지 않습니까? 거기는 말하기를 이기는 자는 하나뿐이라 하는 그 말은 다 이겨야 이긴 것이지, 다 이기야 이긴 것이지, 그러면, 백 명이 있는데 구십 구명을 이기고 한 사람에게 져도 졌다 그 말이오. 백명을 다 이겨야 된다 말이오.
우리는 전부 전투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이라 하는 것은 다 이겨서 완성이 돼야 되지 완성이 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네가 얻는다.' 인정하신 후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가 돼야만 된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니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신앙의 지혜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오늘 저녁에 배운 것은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명령 순종하는 신앙 생활 할 때에 거기는 대내전과 대외전 둘이 있는데, 자기 몸 안에서 싸우는 대외전이 있고, 대내전이 있는데, 사울 왕은 대외전만 막 쳤습니다. 대외전만 이렇게 쳐서 구십 구나 다 승리해 버렸어. 이랬지만 자기 속에 대내전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사울 왕이 이겨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 전쟁에서 대실패입니다. 무슨 실패했습니까? 거기 31장 4절로 6절에 보면 사울 왕과 자기 자녀와 또 거기 부하들과 한목 자기 칼에 전부 자살했습니다. 합동 자살했습니다. 사울 왕이 무엇이 승리한 게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대외전에서 아무리 영광 있게, 명예 있게, 개운하게 이렇게 승리를 했다 할지라도 대내전을 살피지 안하고 대내전에 졌으면 그 패전한 것이 당장에는 나타나지 안해도, 기념비도 세웠고 그 뒤에 또 사울 왕이 왕 노릇 안했습니까? 왕 노릇했습니다. 했지만 마지막에는 보니까 자살 행위로 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때에 언제든지 잘못하면 대외전만 생각하고 가기 쉬우니까 그리 말고 꼭 대내전을 생각하고 대내전부터 먼저하고 대내전에 승리한 그 승리를 가지고 대외전을 해야 되지, 대내전을 하지 안하고 대외전을 하는 것은 자멸하는 행위라 이걸 기억하십시오. 대내전은 하지 안하고 대외전만 하는 것은 자멸하는 행위라 것을 기억하고, 또, 우리는 언제든지 신앙 생활 할 때에 적이 누구입니까? 사욕, 어떤 사욕이든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의 적입니다. 그 속에 육체의 소욕이라는 이게 적이요, 하나님 중심이 될 때에 자기 중심 그것이 적이요, 사울은 그게 다 있었소. 자기 중심인 것이 다 들었소. 이러니까 이기고 나니까 기념비 세웠지. 기념비 세운 그것은 자기 중심이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 중심인 것 같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자기 중심의 기념비는 자기를 기념하는 기념비인데 기념비를 세웠지. 자기 중심이라는 게 드러났다 말이오. 그리고, 또 사무엘이 그렇게 책망을 하니까, 책망을 하니까 말하기를 '나한테는 책망하지만 제사장들이나 이 방백들 듣는 데는 책망하지 마라. 그러면 내 위신 떨어져서 안된다. 그러니까 그들 앞에는 말하지 말고 숨겨 두고 나와 같이 가 가지고 하나님을 같이 섬기니까 "아, 지금 사울 왕은 사무엘이 지금도 같이하는구나' 이렇게 인정하도록 해 돌라고 안 갈라고 하지만 옷자락을 거머쥐고 달려들어 가지고 갔으니까 그분이 얼마나 자기 위주냐 말이오.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자기 소욕 이 세 가지를 두고는 신앙 생활이라 하는 거는 아예 안되는 것입니다, 암만 해 봤자 자살하는 행위뿐이지 안된다 그 말이오.
이런고로, 우리 신앙 생활에는 이 세 가지가 적이니까 세 가지 이놈은 어디서 싸우느냐 하면 이놈은 언제든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삼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내전에서 이 셋을 정복하고 나야 그 다음에 대외전에서 승리하는 것이지 자기 안에 있는 대내전에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욕심 이 셋을 죽이기 전에는 암만 해 봤자 원수의 수입만 되지 자기에게는 손해입니다. 이러니까, 자기만 망했지, 마귀 수입만 봤지 자기 수입은 하나도 못 봤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 생활 하는 데에는 대내전에서 시작해야 되지 대내전 하지 안하고 대외전에서 시작하면 그거는 판판이 실패한다. 그러기에, 대내전을 해 가지고 대외전으로 나가고 대외전 승리하고 나서 얼른 대내전으로 들어가라. 밭을 갈고 양을 먹이다가는 얼른 주인에게로 들어가서 주인 먹을 걸 찾아라 그 말입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 소원이 무엇인가 주인의 뜻을 찾으라 그 말이오. 그리고 난 다음에, '주인 먹고 난 다음에' 그 말은 주인이 그 일을 다, 먼저 주님이 다 그 일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 뭘로 이룹니까?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대니까 하나님께서 '오, 됐다. 내가 허락한다. 다 이루었다.' 그렇게 하나님이 먼저 나를 위해서 그 일을 하시고 난 다음에 내가 형식적으로 내가 표현하는 것이지 내가 무슨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러기에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그래 해서 먼저 당신이 해서 성공하고 난 다음에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렇게 피땀 흐르기까지 거석했지만 나중에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됐다. 내가 다 해 주마' 하는 허락을 받고 난 다음에야 '이제 됐다. 이제는 자고 쉬라.' 이러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주인 먹을 것을 먼저 찾고 주인 먹을 때에 띠 띠고 섬겨 대접하고 난 다음에 네가 먹어라 하는 그것을, 제가 먹는 거는 제가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그 말이오. 이것을 하나 기억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명령의 성공 표준은 완전이다. 성공 표준은 완전이다. 이 표준을 흐리멍덩하게 하는 데서 다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래 예수 믿으면 되지.' 그러기에, 우리가 이 표준을 잘못 삼는 데에서 백의 일만 해도 저는 '됐다' 백의 십만 해도 '됐다' 백의 오십만 해도 '됐다.' 아니오. 백의 백을 다해야 성공인데 백의 구십 구를 못하느냐? 백의 일을 한 사람 백의 일을 한 사람은 백의 십도 할 수 있고 백의 구십 구도 할 수 있고 백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러냐? 나만 할라고 달려들면 내 힘에 모자라, 내가 낙망하지 안하고. '이제 됐다' 하는 이 끝을 맺었기 때문에 탈인 것이지 끝이 없는 아직 미결입니다, 미결입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해야 되겠습니다' 자꾸 하고 해 달라고 달려들면, 미결이라고 해 달라 하면 당신은 해 주기로 약속을 해 놨다 그 말이오.
이런데, 우리가 포준을 잘못해 가지고 '이만하면 됐지' 하고 기념비 세우는 거기에서 헛됐어. 그러니까, 기념비 세우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그런 계시를 내리지 안했습니다. 기념비 세우고 난 다음에 내렸습니다. 사무엘이 그 이튿날 쫓아가니까, '사울 어데 갔느냐?' '아무 데 기념비 세우고 아마 거기서 아무 데로 갈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라고 길갈로 갈 것입니다.' 이러니까, 벌써 '이만하면 다 됐다. 이제 다 이루었다' 표준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걸 못해서 어정거리고 있으면 일 년 아니라 십 년이 걸려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거기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안하시지만. '네가 속히 안했다.' 제 힘 없는 거 어쩌겠습니까? 이렇지만 '이만하면 다 됐다' 표준을 잘못 정한 데에서 사울의 실패가 왔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표준을 잘못 정한 데서 왔다, 대내전을 하지 안하는 데에서 왔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기독자의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올라가는 법은 내가 자꾸 내려가면, '어이구. 나는 그 자리에 못 있습니다.' 자꾸 내려가면 하나님이 자꾸 올려 주시고 우리가 올라가면 자꾸 끌어내리고. 마귀란 놈은 자꾸 우리를 올려 주고 올라가면 툭 떨어지고 올라가면 툭 떨어지고, 마귀가 인도하는 것은 올라감으로 떨어지는 그것이 마귀의 인도 법이요, 하나님의 인도 법은 우리가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그것이 천국 가는 걸음입니다.
그런고로, 이 세 가지를 단단히 기억하면서 우리가 우리 구원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작아질 줄을 모르는 사람은 크지 못합니다. 작아질 줄을 모르는 사람은 크지 못합니다. 죄인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의인이 못 됩니다.
무지 무능자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참 지능 가진 사람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