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제자

 

1986. 11. 29. 새벽(토)

 

본문:요한복음 8장 31절∼3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기도 드립시다.

영원한 자유와 지극히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의와 완전한 생명과 영생으로 우리를 사셨고 우리에게 장가오신 주님, 저희는 영원히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지체요 몸이요 신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나라요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이요 거룩한 선지자요 영영한 왕입니다.

이렇게 큰 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신 주님, 이제는 이렇게 주의 것 되었사오니 이제 사는 것은 저들이 사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사 주님의 것 삼았사오니, 주님의 것이 되었사오니 주님의 것이 사는 이 생애로 영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오직 성령과 진리로만 피를 증거하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만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저들이 확실히 믿고 소망합니다.

오늘도 이 작업이 우리 안팎에 계속하시는 이 주님의 이 사랑의 광대하신 섭리를 저들이 거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소망 중에 복종하여 날마다 주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주님이 친히 역사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있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을 완전히 죽여 주시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다시 지음받은 저희들로 살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이 이스라엘들이 이렇게 들었으니까 예수님의 교훈과 거리가 뭐 천리 만리도 멀고 그 사이에 가리워진 게 얼마나 가리워졌는지 모릅니다. 근처에 가지도 못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 신적 요소에 반대되는 모든 피조물 요소에게 피동되는 것은 다 피조물의 종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피조물은 이것은 다 모든 처소와 형태가 다 변해지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성자가 영원히 거한다 말 아니고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하신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 안에 거하나니, 생명 세계에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아들은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설정하신 아들입니다. 사활의 대속의 공로는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이 사활의 공로를 가지신 주님이 자유케 하면 자유합니다.

“참으로 자유하리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자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슬리면 다 절단나 버리는데 하나님에게 거슬리지 안하고 일치가 돼 가지고 있으니까 이질적이 아니고 하나님과 동질 동성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참 제자 되는 것입니다.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가 저희들 속에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희들 속에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이 진리가 참 제자 된 제자 속에는 이 진리가 타율이 아니고 자율이 되고 그때 그때 하나님이 건설적으로 영생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이루어진 참 제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가 다 타율이 아니고 자율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그것이 자기와 대립되는 이질의 것이 아니고 자기의 본능이라.

이는 하나님에게서 발원되는 하나님의 뜻이나 자체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됐기 때문에 배치되는 것이 없고 다 일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들 속에는 이 진리가 있을 곳이 없다. 너희들 속에는 이 진리와 전부가 대립이다. 대립이기 때문에 이 진리가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죽고 또 너희를 안 죽일라고 하면 너희 안에는 이 진리가 있을 곳이 없다.

성도야, 하나님의 모든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곧 자기 주관, 자기의 자율, 자기의 본능 되기까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성도들이며 그 속에 곧 이 진리의 하나님의 뜻, 제자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 되어 이 뜻대로 하는 것이 자기 본능이요 이 뜻을 거슬리는 것은 자기의 본능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죽는 것인데,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하나도 변화되지 안해서 전부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마다 자기와 서로 상극이 돼서, 상극이 되니까 말씀이 죽든지 제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지 같이 있을 수는 없으니, 진리가 죽든지 제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지 같이 있을 수는 없으니 진리가 죽습니까? 안 죽습니다. 진리가 안 죽으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예수님의 구원을 이루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죽으면 안 되고 죽기 전에 변화가 돼야 되겠는데, 죽으면 안 되고 죽기 전에 성화돼야 됐는데, 그러면 “너희 안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 내 말 하는 이것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하는 그 진리가 같은 말입니까, 뭐이 어데 속했습니까? 어느 거와 하나입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이 말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으니” 하는 내 말 하는 이 말과 같은 말로 이렇게 깨달아지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와 “내 말이 너 안에 거할 곳이 없다” 하는 이 말과 “진리를 알지니” 진리와 같은 말씀으로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하나도 안 드네. 다 틀렸어. 후자야, 후자. 전자가 아니고 후자라. 왜? 전자의 것은 “내 말에 거하면” 그 말씀 안에 사람이 거할 수 있는 것인데 왜 거할 수가 없어? 그러나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는 너희 안에 거하지를 못해.

이러니까, 통통 듣지를 못하고 껍데기 듣고 있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는, 자, 예를 들어서 어떤 식물이 있다고 하면은 그 식물은 먹어봐야 아는데 먹어보지 안하고 어떻게 알겠소? 말은 있지마는 자기에게 들리지 안하니까 귀가 가리워져서 들리지 안하니 어떻게 그 나는 소리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까? 모르지.

귀로 들어야 그 소리를 제가 알 수가 있고, 눈이 보여서 보아야 알 수가 있고, 먹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짐작은 ‘뻘거니까 맵겠다’ 뻘게도 쓴 것도 있을 수 있소. 뻘게도 단 것도 있을 수 있어요. 고추만 아는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붉으니까 ‘이거는 맵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쥐약은 붉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것만 아는 사람은 ‘이거 먹으면 죽는다’ 또 자기가 무슨 다른 지식은 없고 쨈을 아는 그 지식이면, ‘이거 아마 참 먹으면 맛있겠다;’ 자기가 이미 가진 눈 가지고는 그것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짐작하는 것이지 참맛은 모릅니다. 먹어봐야 알지.

기독교는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요것이 열쇠입니다. 요것이 초보입니다.

입문입니다. “내 말에 거하면” 이것이 아니고는 달리는 아는 도리가 없습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음으로” 있을 곳이 없다니? 그놈의 속이 어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는 것은 그 속이 비좁아서 그렇습니까, 그 속에 주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가 많아 그렇습니까? 왜 있을 곳이 없습니까? 왜 있을 곳이 없습니까?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 이랬으니까 믿는 사람의 속인데 “너희”는 이미 믿은 유대인들입니다. 믿은 사람들이라. 믿는 사람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오. 그런데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

믿는 사람의 속에 있을 곳이 없는데 있을 곳이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의 속이 비좁아서 좁아서 있을 곳이 없습니까, 혹은 대립이 돼서 있을 곳이 없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주님은 살리러 오셨는데 살리면커녕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면 그를 죽여 버릴 것이기에 다, 죽여 버리고 다 헛일이고 다 끝장나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까? 비좁아서 못 들어갑니까, 대적을 하니까 뚫고 들어갈 능이 없어서 못 들어갑니까, 들어가면 너희 속에 있는 것이 다 뒈지기 때문에, 네가 뒈지기 때문에, 네가 죽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까? 일입니까 이입니까 삼입니까?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삼입니다.

그 속에는 이 진리, 진리는 타율이요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뜻에 정 전부 이 대립이 돼 가지고 있는 것만 있으니까 대립된 뜻이 들어가면 이는 진리요 전능인데 대립이 되고 이질이 되면 진리가 절단나겠습니까 이질되는 피조물이 절단나겠습니까? 이질되는 피조물이 절단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에 “내가 사자를 보낼 터이니까 너희들이 이 사자들과 같이 가나안에 가라.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 왜? 같이 가면 너희들이 다 진멸될 터이니까. 너희들은 목이 곧고 패역한 자니 만일 내가 같이 갔다가는 패역하면 나는 당장 사뤄 버리고 죽여야 되는 것이니까, 그게 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니까 너거를 살릴라고 애굽에서 인도해 냈는데 같이 가다가는 살리기 전에 너를 죽여 버리고 말 터이니까 나는 같이 가지 못하니 이제 사자들과 같이 가라.” 말씀을 한 것입니다.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 진리가 자기 속에 있으면은 예수님이 자기와 하나고 동질이기 때문에 곧 예수님이 자기요 자기가 예수님이요 예수님과 자기와 하나인데, 그 속에 있을 곳이 있으면 동질이기 때문에 동성이기 때문에 있을 곳이 있는데 있을 곳이 없는 거는 아주 예수님과 이질이기 때문에, 이 진리와 예수님과 이질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그 행동도 예수님을 죽일라 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예수님과 죽음에서나 생명에서나 가난에서나 어데서나 영원히 주님과 나눠질 수 없고 하나로 살 수도 있는 것이 기독자요. 예수님과 정반대되고 대립되어서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참고 참고 견디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대립되는 자로 세상을 떠났으면은, 하나될라고 하나님께서 애를 써서 하나될라고 애를 쓰다가 하나되지 안했으면, 하나되지 안한 것은 중생된 영이 하나되지 안합니까 심신의 기능이 하나되지 안합니까? 뭐이 하나되지 안했습니까? 심신의 기능이 하나되지 안했습니다. 하나되지 안했으면 그때에 마지막에는 하나되지 안한 심신의 기능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갑니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 가지고 영원히 멸망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나와 내 주관이 되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내 본능 행위가 되고 내 소원 성취가 되고 내 자유가 되고 그게 내 자유가 되고, 우리 믿는 사람이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전부 자기와 다 대립이 되어지는 이 적이 되어지는 것이니 적이 되어지면은 뜻은 살고 적되어 있는 그거는 전부 많든지 적든지 다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적된 그것을 적되지 않게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길이 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자기와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그 길이 무엇입니까? 그 길이 뭣입니까? 저 목사님들 한번 대답해 봐요, 그 길이 뭐인지? 이질이 되지 안하고 동질이 돼 가지고서 대립이 되지 안하고 곧 자기의 자유와 본능과 주관과 자율이 되는 이렇게 되어지도록, 그러면 하나님과 적이 되지 안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이렇게 되는 방편이 뭐입니까? 이 방편을 한번 좀 말해 보십시오. 이 방편이 뭐이지요?  ○○○목사님? 뭐입니까? ‘내 말에 거하면’ 요겁니다. 알겠습니까? 내 말에 거하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하나됩니다. 언제든지 창조주요 나는 피조물이지마는 하나됩니다. 요 순서를 통과하지 안하면, 요 순서를 통과하지 안하면 자기 현실에 닥치는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가 자기와 대립입니다.

“너희 속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다” 그러면 내 말이라 하는 건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요 진리와 하나인 말씀입니까  후자와 하나인 말씀입니까, 전자와 하나인 말씀입니까? 뭐입니까? 전자와 하나인 말씀으로 깨닫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거는 틀렸고. 후자와 하나인 것으로 깨닫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뭐인지 몰라. 이러면 안 돼.

그렇츰 말해도, 왜? 자기가 딴 사람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전부 듣는 것이 대립이라. 왜? 듣는 것이 전부 자기에게 안 된 말만 합니다, 강단에서. 강단에서 하는 말은 자기에게 전부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전부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부 부정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부정입니다. 그러면 부정은 하나님 말씀이 저희에게 부정당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자기의 자율입니다. 자기 주관과 꼭 같습니다. 자기 자율이 아니지만 타율이지마는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됐기 때문에 이제 타율이 자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러니까 그 모든 행동은, 그 모든 행동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행동이라니? 그때는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였지마는 지금은 죽이는 행동이 뭐입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죽이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래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야 되는데 하나님하고 동질이 돼야 하고 동성이 돼야 되고 뜻은 자기 뜻과 하나님 뜻이 같이 돼야 됩니다.

제가 처음 믿을 때에 요한복음 15장 7절을 보고서 고거 제가 그 절수를 항상 기억해서 그만 제 요절이 됐는데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그러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하니까 자기 욕심이 다 소원 성취가 되니까 복된 것입니까? 자기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라, 하나님의 소원이 자기 소원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 외에는 자기 소원이 없고 자기 소원 외에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소원이 없어.

모든 소원과 본질과 본성과 사상과 지식과 비판과 모든 것이 다 하나됐다 그말입니다. 요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이것은 지금 성화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화시키는 작업 역사를 하는 이 말씀이 있고, 작업 역사를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형상화된 자에게 자기의 자유로 자기의 영생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화되도록 하는 이 성화시키는 작업 역사를 이루시는 이 말씀을 자기가 받아 가지고서 이 작업 역사에, 작업해 만든다 말이오. 지을 작자 업이라는 업자, 자꾸 이 작업, 만드는 이 일에서 만들어지지 안하고, 만들어지지 안하고 그다음에 진리 맞이하면 죽습니다.

그러면 작업 역사를 하는 하나님 말씀이 있고 산 자와 영생케 하는 말씀이 있으니 자기가 이 작업 역사한 여게서 하나님의 작업을 받아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율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율법이 천 조문이 있다 합시다. 천 조문이 있는데 천 조문 가운데에 구백구십아홉 조문을 완전 순종했습니다. 한 조문만 순종 못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한 조문만 순종 못 했으니까 그 사람은 상을 받습니까 죽임을 받습니까? 상을 받습니까 죽임을 받습니까? 죽임을 받습니다. 죽임을 받소.

또,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율법의 천 조문 가운데에 한 조문만 행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 조문만 행했는데 한 조문 행한 그것이 그이에게 뭣이 됩니까? 상이 됩니다. 상이 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기를 원하는 자는 율법 아래 있으니 그는 절대 그가 의롭다 함을 얻지를 절대 못 한다 했습니다. 절대 못 하는 걸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은 사는 게 아니고’ 그 율법을 완전히 다 행하면, 율법을 완전히 다 행했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하나라도 범했으면 죽습니다.

은혜 아래 있으면 천 조문에서 구백구십아홉 조문은 어기고 한 조문은 순종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벌이 있습니까 상이 있습니까? 벌이 있습니까 상이 있습니까? 상이 있습니다. 구백구십아홉 조문을 행하고 한 조문 못 했는데 벌이 있습니다. 한 조문 행한 사람은 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고 은혜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 은혜 아래 있다’ 하는 이것을 제가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아무 교수도 말하는 이 없었습니다. 이걸 물어야 분별하고 구별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오종덕 목사님이 여게 대해서 요 말씀을 해석을 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분이 알기는 알았는데, 알고, 알기는 아는데 그것을 너무 현 교계에 반대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이거 증거할라고 애를 쓰지마는 모두 듣는 사람들이 다 정반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은혜 아래 있다 율법 아래 있다 하는 이것을 아무리 해석을 할라고 해도, 할라고 애를 쓰기는 쓰는데 그 해석이 잘 되지 안하고 뭣을 말할라고 한다는 그것을 제가 그때 들을 때에 알았습니다. 그걸 뭣을 할라고 저분은 무엇을 증거할라고 저분이 저라고 있다 하는 것을.

은혜 아래에 있는 거는 뭐입니까? 일곱 가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나를 위해서 행했기 때문에 일곱 가지는 내것 되고 나는 예수님의 것 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되지 안하고 이렇게 행하는 것은 법 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실컷 행했는데 자기는 벌밖에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여전도회 때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는데 간단한 설교에서 그런 설교하는 걸 내가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하면은 한 거는 전부 다 상이 되지마는 예수님의 것이 되지 안해 가지고 한 것은 얼마든지 많이 했는데 그것이 다 사망이 되고 벌이 된다.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한 것이라야 하나든지 둘이든지 고거 영생이 되지 예수님의 것이 되지 안하고 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 행했다 해도 하나만 행하지 못해도 그거는 다 사망이 된다.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설교하는 소리를 듣고서 내가 간단하게 그렇게 하는 소리를 듣고서 놀랬습니다. ‘저 사람이 저것을 택한 것 보니까, 저 진리를 택한 것 보니까 깨달음이 있는 자이다.’ 그분이 언제 또 어데 며칠 전에, ‘큰 환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오늘 누구를 데리고 가야 되겠습니까?’ 이래 물어서 ‘데리고 갈 게 아니라 뭐 누구 데리고 갈 사람이,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남권찰님이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지마는 없으면 그만 있는 식구들 데리고 가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이랬어.

‘무슨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물을 때에 내가 그때에 그 소리를 그걸 설교하는 소리를 오층에서 들었기 때문에 그래 내가 그말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택할 것을 그 자기가 벌써 알기를 시작했고 어느 말씀을 해야 되는가 말씀 선택할 줄을 아는 것을 시작했고 자기 속에서 무슨 말씀을 증거하라 하는 증거하는 그 증거의 역사가 자기 속에 시작됐으니까 자기 속에 시작된 그 시작이 자꾸 이렇게 함으로써 자꾸 성장하도록 해야 되지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내가 그말 했어. ‘너희 안에 가르치는 자가 계시니 너희 안에 가르치는 자에게 네가 들어 가지고 할 일이지 네가 뭐 물을 필요가 없다.’ 그라며 내가 또 말했습니다. 내가 오층에 지난 주일에 여전도회 때에 설교하는 걸 들었는데 그거 제가 저한테 물어서 저가 말한 게 아니요. 나한테는 묻지도 안하고 말도 안 한 겁니다. 안 한 건데 그 말씀을 증거를 하기 때문에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뭐인가? 그 뜻을 찾는 그 싹수가 나왔다. 그 움싹이 나왔다 하는 것을 내가 그 사람에게 그것을 길러 주기 위해서 ‘움싹이 나왔으니 그 움싹을 기르면 되는 것인데 무슨 말씀을 증거할까 나한테 물을 게 뭐 있느냐?’ 내가 그렇게 대답을 했었습니다.

대답을 하니까 그분이 ‘이 말씀을 할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내가 또 한참 생각하니까 ‘그 말씀이 좀 해당치 않는데’ 조금 생각하니까 ‘그 말씀이 좋아요. 그 말씀이 거기 해당입니다.’ 그렇게 내가 말해 줬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으면 헛일입니다. 은혜 아래, 은혜 아래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것이 됐다 말입니다. 은혜 아래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것이 내것 됐기 때문에 내것은 예수님의 것 됐습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됐는데,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되고,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성전되고, 예수님의 지체가 되고, 예수님의 몸이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예수님의 나라와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되고, 예수님의 왕이 되고, 예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고, 예수님의 형상이 되고, 되는 것은 우리가 될 수 있습니까? 되기 전에는 뭣을 가져야 됩니까? 되기 전에 뭣을 가져야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자, 되기 전에 뭘 가져야 됩니까? 되기 전에 몇 가지를 가져야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몇 가지가 돼야? 일곱 가지가 돼야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일곱 가지 되기 전에는 예수님의 것이 안 돼요.

되면 죽어 버리요.

이렇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뭐이 됩니까? 자유가 돼.

자유부터 얻어야 돼.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돼. 그다음에 완전 생명이 돼.

그다음에는 영생이 돼. 예수님의 대속 밖의 거는 다 죽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방주 밖에는 사망뿐이지 방주 밖에는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주 밖에는 다 죽습니다. 오늘은 뭐 밖에는 다 죽습니까?  ○○○목사님? 뭐 밖에는 다 죽습니까? 일곱 가지 밖에는 다 죽습니다.

다 죽는데, ○○○목사님이 내가 왜 묻느냐 하면은 저 지난 번에 여기 한번 왔다 갔지요? 며칠 전에 왔다 갔지? ○○○교회 갔다 왔지? ○○○에 갔다 왔지? 아이 때문에 가서 아이 만나고 왔지? 만나고 왔는데 그날 밤에 여기 와서 졸아요. 그래 내가 생각하기를 ‘저분이 아들을 만났을 때에 거게서 마귀가 들었나? 지금 마귀가 속에 들어와 가지고 있는데. 그래 들어왔나? 왜 설교를 못 듣노? 그전에는 안 그랬는데.’ 또 이번에도 와서 보니까 설교 말씀이 속에 안 들어가요. 자기 속에 안 들어가.

자기 속에 이렇게 변화시키는 이 능력으로 지금 들어가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듣기는 듣고 알아듣기는 듣고 있는데 얼굴 보면 다 알아요. 그 사람은 그 사람 정도로 하면은 지금 하나님의 지금 건설 역사, 성화 역사가 지금 계속되고 있고, 그 사람으로는 요만한 정도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만한 정도로 계속이 안 돼 가지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이만한 정도. 이만한 정도로 계속 안 되고 이 위에 올라가야 계속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자기에게 이 구원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 사람마다 각각 달라요. 다르지 않습니까, 이 세상 것도? 일학년과 육학년과 중학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과 자꾸 다르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들을 때에 자기에게 새로운 역사가 없으면 뭐 자며 들어도 듣습니다. 설교 들을 때는 자며 들어도 듣지마는 들을 때에, 말씀을 들을 때에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마구 죽을라고서 호독거리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또 살아나 가지고서 생생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죽는 자는 안 죽을라고 막 발악을 치고, 발악을 치는데 계속하면은 죽을 놈 이놈이 죽든지 그리 안 하면 도망을 쳐 버리든지, 새로 살아날 놈은 살아납니다. 죽이는 역사와 살아나는 역사가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역사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이거 없는 그것은 아무런 생명의 작용은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따라서 듣지 싶어서 하는 겁니다. 이러니까 대구 ○○교회 있을 때는 내가 염려하기를 뚱뚱하기 때문에, ‘아, 이 목사님 배가 나온다.’ 그말 한 걸 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목사님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말했습니다. ‘배가 나온다’ 또 서울에 ○○교회 가고 난 다음에는 ‘아, 목사님이 너무 수척해지는데 건강을 조심해야 됩니다.’ 또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경제로 가지고서 그래 된다고 하면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런데 좀 가서 힘을 써서 지금 그렇지 않느냐? 내가 그래 봤기 때문에 너무 자꾸 자기 영적으로 역사해 가지고서 수입되는 거 이 수입만 보고서 이 자본을, 기계를 기름치지 안하고 이래 쓰면 일찍 절단나는 그걸 모를까 싶어서 ‘안 되겠는데’ 말했고 여기는 `뚱뚱해서 살이 쪄서 안 되겠는데’ 여기는 ‘말라서 안 되겠는데' 다 그렇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와 앉았어도 저 사람은 지금 이 진리는 모르고 있다. 지금 와서 앉아 가지고 있지 그 속에 변화가, 변화 역사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게서 31절에 “그러므로” 이 그러므로라 하는 이 그러므로 예수님이 왜 이리 말씀했느냐? 그러므로라는 것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고 나 혼자 있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라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생겼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와 함께 있는 거 이거 너희들이 좋은 줄 아느냐? 너희들과 나와 함께 있어 영원히 함께 있다.

함께 있어. 얼마나 함께 있느냐? 내 뜻이 곧 너희 뜻이고, 아버지의 뜻이 내 뜻 된 것처럼 내 뜻이 너희 뜻 되고, 아버지와 나와는 하나라. 내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하는 그것이 내 말로 나왔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말을 내가 들어서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은 하나이다.

이와같이 너희들이 내 대속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의 인생 너희가, 인성뿐인 너희가, 신인양성일위로 와 가지고서 사활의 대속을 한 것은 너희들 이 피조물을 창조주와 하나되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 그의 지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거와 같이 너희들도 우리 안에 있고 우리도 너희 안에 있으리라. 이 놀랠 만한 놀랠 수밖에 없는, 이거 아무리 해도 측량 못 하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측량 못하는, 이 무한함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땅에 있는 이 이십세기의 과학 저거들이 지식을 말하지마는 그까짓 놈의 지식은 이 근방에 보지도 못해. 암만 말해야 듣지도 못해.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 이거는 아는 도리가 없어. 아는 도리는 “내 말에 거하면” 이것뿐이라. “내 말에 거하면” 하나님과 나와 하나돼서 사상이 같고 뜻이 같고, 언제까지나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인데, 피조물인데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됩니다.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면 이것은 다 인적 요소요 신적 요소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타 통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가 뭐입니까?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원수된 것이 하나님과 완전히 친밀이 돼서, 이것을 가리켜 완전 생명이라 이랍니다. 완전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완전 친밀해서 둘이 아니고 하나됐다 그말이오. 그러면 피조물이 창조주 됐다 말입니까? 피조물과 창조주는 영원히 떨어지지는 안하고 피조물과 창조주로 엄연히 이래 가지고 있지마는 움직임은 같이 움직입니다. 생각이 같고 뜻이 같고 소원이 같고 비판이 같고 평가가 같고 취미가 같습니다. 이것이 완전 생명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그의 죄에서 해방시켜” “그의 피로 그의 죄에서 해방시켜” 요한계시 1장 5절에 말씀해 놨습니다. 해방은 죄에서 해방했으니까, 죄에서 해방하는데 죄를 멸해서 해방했습니다. 왜? 죄의 형벌을 받았으니까 죄가 멸해졌습니다. 죄를 멸해서 죄에서 해방받았습니다.

죄에서 해방받고 나니까 어데서 해방이 됩니까, 따라서? 사망에서 해방됐어.

죄에서 해방돼서 죄가 없는 자를 누가 죽일 자가 있습니까? 죄값은 사망인데 죄가 없는데 무슨 사망이 옵니까? 사망에서 해방됐습니다. 또 어데서 해방됐습니까? 마귀에게서 해방됐어. 마귀가 침노하지를 못해.

죄에 해방된 자가 있습니까? 제가 석가모니고 뭣이 뭐 톨스토이고 소크라테스고 마호멧트고 뭣이 공자고 뭐 노자고 떠들어 쌓아도 죄에서 해방당한 자가 하나도 없어. 죄에서 해방된 자가 하나도 없어. 사망에서 해방된 자가 하나도 없어.

마귀에게서 해방된, 마귀가 지금 그 속에 왕이 돼 가지고 있어. 이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인데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이래서, 하나님을 향해 영생이라면, 영생이라 말은 과거를 지킨 것이 영생입니까 현실을 지키는 것이 영생입니까? 영생은 현실에 만들어지는 것이라. 현실에 만들어지는 거. 그러면 현실 생활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그것이 경건이요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그것이,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그것이 영생이라. 하나님을 향해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그것이 영생이라.

이것을 우리가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이 있는데 아무리 자기가 지켜 봤자, 하나님을 아무리 향해 봤자 완전 향함은 못 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향한다 말은 하나님을 상대한다 말이오. 이것을 가리켜서 다른 데는 신부라 말했습니다. 신부라 말은 하나님과 짝이라 말이오.

하나님을 아무리 향해서 완전히 산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대로 살고 하나님의 진리대로 산다 할지라도, 인간이 암만 산다 할지라도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산 것만 합니까? 못해. 예수님 산 거는 완전 산 것이요. 예수님이 산 것을 내것 삼아서 믿어서, 예수님이 산 것을 대속한 것을 내것 삼아서 내가 믿음으로 내것 삼으면 그것 내것 됐어. 나 주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믿으면 내것 됐어. 믿고 난 다음에 생활 안 해도 내것 됐어요, 내것 됐습니다. 내것 된 자는 내것이 되고 보니까 필연적으로는 나는 예수님의 것이 돼야 영생되고 보배가 돼. 예수님의 것이 돼.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이깁니다.

내가 갈라디아서를 요새 많이 좀 읽으라고 자꾸 이렇게 말한 것은, 뭐 어떤 사람 아래 와서 말하기를 ‘내가 스무 번 읽었습니다.’ `스무 번? 그래 읽어 가지고 안 된다. 네가 그만 외우다시피 외워도,’ 그러니까 갈라디아서를 모두 말하기를 ‘갈라디아서는 참 복음 중에 아주 열쇠 되는 복음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어. 간단 명료합니다.

거게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죽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산다 그것입니다. 믿음으로는 살고 행함으로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믿음이 강조되는데, 그 사람 보면 저 사람은 아주 말씀대로 열심히 행합니다. 행하다 보면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 있고 아주 행하지 안한 자도 보면 믿음 아래 있는 자 있소. 은혜 아래 있는 자 있소, 은혜 아래 있는 자.

내가 그래서 언제 말하기를 여게 김재순이라고 있었는데, 권찰들 내가 여기 부산 서부교회 처음 부임해 가지고서 이랬는데,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행위가 엉망진창입니다. 엉망진창이라도 저거는 은혜 아래에 있다. 지금 엉망진창인 그걸 모두 당신이 계시에 필요해서 이용하기 위해서 하지마는 지금도 만일 죽음이 오면 저 사람은 순교당한다. 너거 여기 있는 사람 예수 잘 믿어도 순교할 사람 하나도 없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없다. 사랑해도 하나님이 또 의의 행위를 하게 하면 의의 행위 하고 의의 행위를 하지 안 하게 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라. 의의 행위가 없다고 해 가지고 그 사람 믿음이 없다 그렇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래서, 믿음과 이 행위 이것을 잘 구별해서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되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를 얻은 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는 것을 의로 하나님이 그 평가하셨다. 의로 여기셨다.

행함으로가 아니다.” 그것을 많이 말한 것입니다.

이랬으니까 우리가 사람이 바꾸어지지 안하면 안 됩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안하면 제가 아무리 말해도 앞으로 팔 때가 되면은 팔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면 부인합니다.

자기가 오늘에 이 바꾸는 거, 이 바꾸는 역사, 바꾸면 모든 하나님의 뜻이 자율이 돼, 자율이 돼. 자율이 되면 자기 주관이 되기 때문에, 자, 하나님의 뜻이 자율이 되면은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기는 것이 쉽습니까? 행하는 게 쉽습니다.

그러면 행하는데, 행하는데 얼마만큼 행하겠습니까? 힘있는 대로는 다행합니다.

힘있는 거는 전부 행하는 걸 다 행합니다. 우리 본능은 그렇지 않습니까? 자, 그 사람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이 본능입니까 불에서 살아나오는 게 본능입니까? 뭐이 본능입니까? 살아나는 게 본능이지.

그래 그 사람을 불에다가 들이밀면 그 사람이 힘을 두고 불에서 안 나올라 하겠습니까 힘있는 데는, 힘 있는 거 다는 불에서 안 타 죽을라고 안 타 죽는 데 다 쓰겠습니까? 어데 다 쓰겠습니까? 그 사람의 힘은 불에 안 타 죽는데 힘을 쓰겠습니까 힘이 아까와서 아끼고 남궈 두겠습니까? 어찌 돼요? 안 타는 데 힘 다 써요? 다 쓰지요.

다 쓰니까, 다 쓰다가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데 있는 힘 다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다 썼으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행한 것입니까 못 행한 것입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이 자기의 자율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예수님은 자율이 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형으로 죽으신 거 있고 행함으로 죽으신 거 있습니다. 요것도 오늘 구별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뭐 죽으심인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신앙이 범벅이기 때문에 이 사랑도 범벅이라.

사람에 해독이 제일 큰 게 사랑이요 제일 사람에게 효력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데 사랑과 사랑은 정반대인데,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요새 뭐 ‘사랑 없어’ ‘사랑 없어' 그뭐 찬송이 몇 장이더라? `세상 모두 사랑 없어 탄식한다'는 그 사랑도 자세히 좀 훑어 보십시오.

사랑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밖에는 사랑 가진 게 없어. ‘서부교회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뭐이 사랑이고? 너거가 말하는 정욕의 사랑, 동류의 사랑은, 혈육의 사랑은 없다. 그거는 원수다. 무슨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뭐인데? 그 사람을 죄에서 구출해서 구출하려는 것과 하나님과 연결시키려는 거 요것뿐이다.

이러기 때문에 새벽에 일찍 자기 돈 벌어 가지고 다 토근도 주고 이래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뺨도 맞고 조롱도 받고 욕도 얻어먹으며 아무 수입도 없으면서 돈 들여 가면서 자꾸 학생들 데려올라 하는 거, 그거 뭐이냐? 그게 참사랑이다.

너는 사랑은 많이 있고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다 하는데 사람에게 전도는 못합니다. 전도할 마음은 없습니다.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힘이나 자기의 명예나 지위나 이런 것을 바치기는 싫어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장로님들이 주일학교 반사가 되지 안하면 장로 자격이 없다. 장로가 자라면 주일학교 반사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 반사가 장로보다 위에입니다. 영 반대요. 왜? 그는 인간적으로 장로를 세웠지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이 속에 이루어지지 안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속에 이루어지지 안했으면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안했어.

하나님의 사랑은 ‘예 예 점심 먹읍시다. 예 오차 한 잔 먹읍시다. 예 예.’ 이라는 그까짓 거는 다 이 동류 사랑이라, 하나님의 적이라. 제것 만들라 하는 것이라. 이러나 전도는 못 해. 전도는, 이 사람은 사람 백 명 만나서 백 명에게 다 전도하는데 그 사람은 한 사람에게도 입을 벌리지 못해요. 전도를 못 해요.

전도를 안 해. 못 해. 할라 해도 할 용기가 없어. 그 속에, 왜? 전도할 용기가 왜 없습니까?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전도하는 사람도 두 가지 종류 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속에 와서 그 사랑에 감격이 돼 가지고서 전도하는 사람 있고 자기 식구를 늘구기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자기는 이 전도하는 그 습성과 무슨 이거 가지고 하는 사람 있고, 사랑 없이 전도하는 것은 다 은혜 아래서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랑 없이 하는 것은 예수님과 상관 없습니다. 사랑을 뭐 자꾸 뭐, 사랑이 뭐이냐? 그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 하나님에게 끌여들여서 영생을 얻도록 하게 하려는 거. 그게 사랑이라. 그외에 사랑이 없어.

이 사랑은, 이 사랑은 보들보들합니까 까끌까끌합니까? 어떻소? 이 사랑은 어떻습니까? 명주 옷고름 모양으로 보들보들합니까 꺼끌꺼끌합니까? 어떻소? 보들보들해? 밤송이 같애. 밤송이같이 까끌까끌해. 밤송이 같애. 꼭꼭 찔러. ‘왜 요거 요라노? 요거 요래하지 마라 조래 하지 마라.’ 간섭이 심해서 이렇게 밤송이 꼭꼭 찔러. 그게 왜? 살리기 위해서.

그뭐 찌르는 건 누굴 찔러? 누굴 찔러? 옛사람을 찌릅니까 새사람을 찌릅니까? 옛사람을 찌르는데 지금 반항하고, 저 찌른다고 반항하고 저를 해한다고서 반대하는 그자는 옛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제가 옛사람 새사람을 알아야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을 이 기회에 참 믿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예수 이천 년에 재림한다면은 몇 해나 남았습니까? 저 ○○○목사님 몇 해나 남았습니까? 만일 예수 이천 년에 재림을 하신다면 지금 남은 횟수가 몇 해 남았습니까? 예? 십사 년? 십사 년? 십사 년 틀렸습니다. 모두 계산에 오 년이 더 줄어져 가지고 있다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 년을 보태야 됩니다. 그라면 구 년 남았습니다. 그대로 하면 구 년 남은 것이오. 요새 역사가들이 계산한 역사가들의 계산대로 하면은 구 년이 남았소. 예수님의 재림이 구 년 남았소.

그러면 구 년 남았습니다. 아니 오늘인지 몰라. 이런데 우리가 아는 것이 다 알기야 알지. 다 아는데 모르거든. 자기 죽을 줄 다 알지마는 자기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든. 예수님의 재림은 다 알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모르거든. 이게 뭐이냐?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그런 것입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하고, 자기가 참 제자가 돼야 됩니다, 참 제자. 참 제자는 예수님의 모형된다 그말입니다. 예수님의 모형되면 무엇이 모형됩니까?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이 자기 속에 있어서,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 당신은 설정했고 설정한 것을 내가 내것으로 받아 가졌고, 이것을 가리켜서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말입니다. 이게 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요새 떠돌아다니는 완전주의와는 틀립니다. 완전주의와는 아주 다릅니다.

잘못하면 학자들은 ‘이거 완전주의를 말하는가보다’ 이래 가지고 미혹받지 말아. 이거는 완전주의가 아니요, 이거는. 완전주의와 이거와 또 정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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