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4:54
인론
1989. 4. 30. 주전.
본문: 골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당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여게 생명이라는 말씀이 계시돼 있습니다. 여게 대해서 잠시 증거 할라고 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다 한 종류로서 첫째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첫째 아담으로 난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영과 또 혼과 몸, 모든 속성들 이것으로서 된 사람입니다. 첫째 아담의 요소가 쪼개져 나와 가지고 첫째 아담의 자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보통 사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부정 모혈로 된 보통 사람이라 또 자연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선택자들이라 또 특수인이라, 대속을 받은 사람들이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라다가 인류 시조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이 끊어지게 한 그 죄로 인해서 영도 혼도 몸도 다 정죄받아서 사망하게 됐습니다. 영은 즉시 단번에 죽었고 혼과 몸인, 이 혼은 마음을 가리켜서 혼이라 합니다. 마음과 몸은 서서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생겨 난 지 몇 시간 만에 영육이 죽는 사람도 있고, 또 상고 시대는 구백여 세를 세상에서 있다가 다 죽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요새도 뭐 오십 년 육십 년, 팔십 년 구십 년, 백이삼십 년 까지도 요새는 세상에 지낸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그 심신이 더디 죽는 사람이요, 어떤 사람은 심신이 빨리 죽는 사람으로서 구별됩니다.
그래서, 죄로 다 죽은 영육이기 때문에 이 죄에 대한 문제가 대속받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영이 먼저 죽고, 심신 둘을 합해서 육이라고 하는데 육이 따라 죽습니다. 영이 죽고 육이 따라서 죽는데 육이 죽는 그 기간은 짧은 사람 있고, 긴 사람 있고 동일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조만간에 죽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가 죽게 된 원인이 죄값으로 죽게 됐는데 그 죄는 무슨 죄인고 하니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한 죄요, 또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또 하지 안한 죄요,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외에 딴것을 섬긴 그 죄값으로 죽었는데 그 죄의 값을 주님이 다 대형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죄를 대형하시고 또 이 세 가지를 완전 대행을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친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택함은 영원 전에 택함을 입었고, 택함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대속하셔서 다 죽지 안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서 모든 조건이 다 해결돼서 죽지 안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마련됐으나 법적으로 마련됐다가 때가 되면 그 사람이 중생하게 됩니다. 다시 첫째 아담으로 난 자손과 같이 둘째 아담으로 다시 또 출생하게 됩니다.
이래서, 중생된 사람들은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서 첫째 아담에게 받아서 난 영, 혼, 몸, 혼은 마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영과 마음과 몸 이 세 가지를 첫째 아담에게서 받아서 출생했는데, 죄와 허물로 정죄 받아 죽었기 때문에 죽은 영, 또 죽을 마음, 죽을 몸, 또 죽을 속성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가 살다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실질적으로 입기는 언제 입었느냐 하면, 법적으로는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때에 다 입었지마는 실질적으로 입는 것은 우리가 중생될 그때에 입었습니다. 입어서 이제는 둘째 아담의 자손이 됐습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이 될 때에 영은 단번에 둘째 아담의 자손이 됐고, 우리의 혼인 마음과 몸은 아직도 법적으로는 입고 있지마는 실질적으로서는 입은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런, 둘째 아담의 자손의 생활은, 행동은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힘써서 둘째 아담의 자손인 이 새사람으로 살라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지금의 노력인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정죄받아서 죽은 영. 죽어가는 마음, 죽어가는 몸, 죽어가는 속성 또 세상을 빼앗겨 가는 그 세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하루 산다는 것이 그만큼 심신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날마다 죽어간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겉사람이라는 것은 영은 이미 죽었고 심신으로 된 사람을 겉사람이라, 육의 사람이라 말했는네, 이 사람은 점점 후패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말씀했는데 이는 쇠해지고 자꾸 죽어지고 낡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진다'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되는 죄를 다 예수님이 대속하심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새로와진다 말은 영은 자라가고 또 우리의 마음은 점짐 살아납니다. 점점 살아나서 고쳐져 가고 우리의 몸도 살아 나서 고쳐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이래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과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의 생명과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의 생명이 다릅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의 생명은 사형을 받아 있기 때문에 점점 죽어가는 생명이요, 둘째 아담의 자손은 점점 살아가고 자라가고 온전해져 가는 생명입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한 생명만 가졌습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죽은 생명만 가지고 있지마는 우리 중생된 사람들은 죽은 생명과 다시 난, 새로 출생한, 새로 생산된 새사람의 생명과 생명이 두 가지로 우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생명은 둘째 아담에게서 우리가 받았고 또 죽어가는 생명은 우리 조상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생명들입니다. 이래서 이 죽어가는 생명만 받은 사람들은 점점 죽어가는 세상이 되어지고, 영생하는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자꾸 살아난다'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영도 아니요, 혼도 아니요, 몸도 아닙니다. 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영육이 아닌 별개체입니다. 아주 별개입니다. 이 생명이 영육을 주관합니다. 주관해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줄 알지마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이 봅니다.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줄 알지마는 생명으로 보는데 생명이 눈으로는 보는 일을 하여서 보는 데에는 그 생명이 눈을 기관으로 도구로 이렇게 써서 보고 또 그 생명이 들을 때에는 이 귀를 도구로 삼아 가지고 듣고 또 그 생명이 생각할 때에는 그 마음을 도구로 사용해서 또 기억할 때도 그 마음을 도구로 삼아서 또 자기가 생명이 말하고 싶어 할 때에는 그 혀를 기관으로 삼아서, 수족 이런 것들을 다 도구로 시관으로 삼아 가지고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그 사람의 그 영육은 꼭 같이 되어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어지면 그 영육의 기능 작용이라 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거는 단독 기능 가진 것이 아니고 생명이 그것들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는데 생명이 떠나 버리면 그거 그만 영육이 다 움직이지 못하는,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동결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된 둘째 아담의 자손도 그러합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도 활동을 할 때에 우리의 영육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활동을 합니다.
이래서, 첫째 아담의 자손과 둘째 아담의 자손이 바꾸어진 것이 무엇이냐? 영이 바꾸어졌느냐? 바꾸어지지 안했습니다. 내나 그 영입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받아 나온 그 영이요 또 혼 곧 마음도 그 마음이요 또 몸도 그 몸입니다. 또 머물고 있는 이 처소도 역연 꼭 같은 세상입니다.
세상인데. 다만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 난 사람에게는 달라진 것이 뭐이냐? 달라진 것이 이제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첫째 아담의 자손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령을 취했기 때문에 악령에게 속해 있고, 둘째 아담의 자손은 소속이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또 달라진 거는 뭐이 달라졌는가? 생명이 달라졌습니다. 첫째 아담의 자손은 죽어가는 생명을 가졌고, 죽어가는 생명, 죽는 생명, 죽이는 생명을 가졌고, 둘째 아담의 자손은 영생하는 생명을 가졌습니다.
영원히 죽지 안하는 영생하는 생명을 가져서 이 생명이 점점 튼튼해 가고 자라갑니다. 충만해 갑니다. 이래서 생명이 다릅니다. 생명이 달라서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만 되어 있는 그 사람들은 생명 가진 그 생명이 죽어가는 생명이요, 죽이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하루 살면 그만치 죽었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들은 하루를 살았으면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튼튼해지고 영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자손이 뇌어 있고 두 가지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버릴 생명이라 이거는 죽이기를 힘써야 하겠고 또 한 생명은 이 생명이 살아야 되겠으니까 살도록 힘을 써야만 합니다.
이래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 영육을 둘째 아담에게 소속한 영육이 되도록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죽은 생명이나 산 생명이나 그 영육이라는 것, 속성이라는 것 그것은 생명이 주장합니다. 그것 단독이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합니다. 손도 제 단독이는 못하고, 무슨 이목구비.
지정의 이런 것들이 다 단독 행동은 못하고 나만 그 생명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따라 움직이는데 그 생명이 죽은 생명 있고, 죽이는 생명 죽은 생명은 점점 죽이는 일만 하게 됩니다. 또 산 생명은 살리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오늘 우리 기독자들이 두 가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을 생명으로 살 수도 있고 또 영생하는 생명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죽은 생명으로 살게 할라 하는 것은, 죽인 자가 어떤 자냐 하면은 인류 시조 때부터 죽인 자가 악령이기 때문에 악령은, 우리는 영생할 수 있는 자인데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지 못하게 하고 죽을 생명으로 살도록 할라고 그는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나는 한 시간을 살든지 뭐 얼마 동안을 살든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손으로 살 수 있는 그것은 죽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둘째 아담에게 속해서 둘째 아담에게 받은 영생하는 생명으로 또 사는 사람은 날마다 영생으로 자라가고 충만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하루 하루의 생활이 멸망이냐 영생이냐 하는 그것으로서 하루 하루 끝을 내는 것입니다. 그날 살면 다시 뒤에 그것을 반복하지도 못하고, 이제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 시간이 사는 생활온 영원 멸망이냐 영생이냐 하는 이 두 가지 기로 중에 있는 우리기 때문에 영생이 사는 생명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죽을 생명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의 생활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악령이 이것을 보지 못하게 혼란시키고 혼돈시켜서 또 필요 없는 일들을 자꾸 우리에게 복잡하게 끌어다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문제에 생각할 만한 그런 여유가 없도록 우리를 조져댑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그만 그게 필요한 일인 줄 알고 거게 쫓겨서 하루 하루 사는 생활이 자꾸 죽어가는 생활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죽을 생명도 그 영육과 속성을 그 생명이 주관합니다. 만일 생명이 주관치 아니하면은 죽을 생명이 죽지를 못합니다. 만일 그 생명이 끝나 버렸으면 다시는 그 영육은 죽을 일을 못하고 그대로 썩어져 버리고 맙니다. 죽을 일을 못하고 썩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살아 있을 때에는, 아직 생명이 있을 때에는 그 생명이 들어서 심판거리를 자꾸 마련하고 죽을 일을 마련하지마는 생명이 떠나 버리면 다시는 심판거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그것으로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제가 오늘 증거한라 하는 것은 지금 그게 잘 발표가 될란지 모르지마는 제가 증거할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육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보는 거는 눈이 보고, 또 말하는 것은 혀가 말하고, 또 듣는 것은 귀가 듣고, 또 모든 거머쥐고 놓고 걸어가고 움직이는 것은 모든 수족들이 이렇게 한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그것은 수족들이 하는 게 아니고 안에 있는 생명이 한다 하는 그것을 증거할라고 합니다. 생명이 한다. 그러면 생명이 하는데 들을 때는 생명이 귀라는 그 도구를 사용해 가지고 생명이 듣는 일을 하고, 또 생명이 혀라는 그 도구를 가지고 생명이 제가 발표하고 싶은 것을 발표를 해서 생명 제 주장대로 이렇게 모든 영육을 이 생명이 이용해 가지고 생명의 그 주장대로 이 모든 전신의 심신은 이용을 당하고 활용을 하고 있다. 그러면 심신의 모든 활용 그 작용이라 하는 것은 순전히 생명의 그 힘으로 그런 것들을 다 작용하고 이용하고 모두 계획하고 이렇게 역사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그 영육은, 영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작용적으로는,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없는 거와 같이, 완전히 기능적으로는 전혀 없는 거와 같이 아무 작용이 없는 것이 죽은 영입니다. 다만 심신은 남아 있는데, 이것을 주관하는 그 생명이 죽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 죽은 생명이 심신을 작용할 때에는 죽는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그 말은 육신의 생명이 육신의 생명이 주관하는 것은 사망만 결과 내지 사망 결과 외에는 내는 것이 없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명이 이 심신을 활용해 가지고 생명 제 주장대로 생명이 하고 싶은 대로 그래 합니다. 생명이 하고 싶은 대로 이목구비, 수족, 지정의 이런 것을 다 작용해 가지고 생명의 발표를 모든 이 심신을 가지고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웃는 것도 생명이, 웃는 것은 웃는 데에 필요해서 웃는 데에 쓰기 위한 그 모든 기관들을 사용해 가지고 웃고, 또 울 때에는 또 울 때에 필요 있는 쓰는 그런 기관을 통해 가지고 울고, 성낼 때는 또 성낼 때에 필요한 그런 도구를 사용해 가지고 희로애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희로애락의 발표나 또 지정의를 움직이는 것이나 또 이목구비 수족을 움직이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
생명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생명은 죽은 생명이 있고 산 생명이 있어서 산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 산 생명이요, 죽은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고 악령으로 더불어 연결된 것이 죽은 생명이다. 우리 기독자가 중생되기 전에는 죽은 생명만 우리에게 있었지마는 중생 후로 죽은 생명과 산 생명과 두 생명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 성경에 말하기를. '두 사이에 꺼어 있어서 우리는 항상 이 곤고하고 구원을 이루기가 어렵다' 그러면 산 생명으로 살면 좋지마는 이 죽은 생명 이것이 있기 때문에 거게서 연결돼 나오는 그 세력이 와 가지고 우리를 산 생명으로 살지 못하고 죽은 생명으로 살로록 이렇게 자꾸 유혹을 줍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살면 그게 성공인 줄 알고 자기 욕심대로, 자기 감정대로 자기 주장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기분대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면 그거는 알뜰히 저로 하여금 사는 것인 줄로 이렇게 알지마는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끊어진 그 생명이기 때문에 거게는 산 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전부 그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사는 것이요. 하루 살면 그만치 늙어지고 그만치 죽은 것을 천하에 왔다 간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갔지마는 이래도 사람들은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 모릅니다.
그래도 그게 사는 것인 줄 압니다. 사는 줄 알고 그거, 사람이 뭐 억만 명이, 지금은 세계에 몇억이나 되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마귀 악령 악성 자기 중심 자기 위주 마귀의 지도 유혹으로 마귀의 인도를 따라서 이래 사는 것은 억억만 명이라도 그게 다 하루 살면 그만치 죽고 마지막에 죽어 끝나고 마는 것을 우리가 다 보고 있습니다.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다 하는 그 말은 이제 죽은 생명으로 사는 것은 전부 죽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고 또 영생하는 생명으로 산 것은 다 영생한다는 걸 보이고 있고, 기독자들은 두 가지 생명 속에 끼어 있기 때문에 죽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알뜰히 저를 위해서 수익 있는 생활이요, 가치 있는 생활인 줄 알고 죽은 생명으로 사는 그자로서 일생을 죽이고 마는 그자도 있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똑똑히 깨닫고 그것은 죽은 생명이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영생하는 생명을 우리가 가졌으니까 이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걸 깨닫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세상이 보고 '미련한 사람이라', 이 십자가의 도를 걸어가는 사람을 미련한 사람들이라 이라고, 십자가의 원수로서 이렇게 영생하는 생명을 가진 구속받은 사람들이 구속은 다 집어던져 버리고 죽을 생명으로. 하나님과 끊쳐진 그 생명력을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서 세상 중심 세상 위주로 이렇게 사는 것은 알뜰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고 참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알아서 죽은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고 산 사람 보고 부러워 하지를 아니합니다.
제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이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뜻밖에 끝나는 것도 보고 또 뜻밖에 끝나지 안하는 뭐 다 정식적으로 일반적으로 몇해만 되면 끝나는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거게 대해서는 아무 새로운 느낌이나, 새로운 충격이나 새로운 깨달음으로서 어떤 그 뭣을 사색하는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마귀 요놈은 참 기묘한 놈으로서 마귀를 이기면 우주의 왕이 됩니다? 마귀를 이기면 우주의 왕이 됩니다. 마귀 그놈의 궤휼을 알고 그게 미혹받지 안하고 그놈을 대항해서 이기는 사람이면 영계와 물질계의 것을 하나님 대리자로 통치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면 하나님 다음의 지능을 가진 자요, 그는 온전한 자요 견고한 자라고 볼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래서, 죽은 생명도 이목구비 수족을 그것이 주관해서 활용하고 또 산 생명도 이목구비 수족뿐 아니라 영육을 다 주관해서 작용을 한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몸은 우리의 마음이 주관하고 또 우리의 마음은 영이 주관하고 우리의 영육은 생명이 주관한다. 생명이 주관 하다니 그 생명이 뭐입니까? 요거 한번 대답해 봐요. 그 생명이 뭐이요? 요 학생들 대답해 봐. 하나님과 연결 그게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인데 생명이 주관한다. 연결이 주관한다. 하나님과 연결이 주관한다. 연결이 주관하면은 연결이 뭘로 연결됐어, 연결이 뭣 됩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게 뭐입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게 진리입니다. 진리로 하나님과 연결이 됐습니다. 영감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으로 연결이 됐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으로 우리가 연결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된 이 생명은 몇 가지가 우리의 중생된 생명이 됐는가?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십시오. 중생된 생명은 영 가지로 됐습니까? 중생된 생명은 몇 가지로 됐습니까? 전부 저게는 다 죽었는가 생명 모르는구만. 생명을 몰라. 모두 다 돈벌이나 하고 세상 썩어질 그런 것만, 그러기 때문에 '호색하는 자들이 망한다' 이랬어. 호색한다 하면은 뭐 남자가 여자 탐하고 여자가 남자 탐하는 그거 호색 말한 게 아니라. 세상 이 번쩍거리는 거 이 껍데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다 망한다 그랬어. 뭐해서 분주했는지 새벽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대학을 졸업맡은 최고의 학을 가진 이런 사람인데 최대의 학을 가졌으면 너 죽는 학 까짓 거, 너 죽이는 학을 가진 거 뭐 자랑할 것이고? 너 멸망시키는 학을 가졌는데 뭐 자랑할 것이고 그놈 때문에 '나는 지위가 정권적으로 제일 머리되는 정권을 가졌다, 재정적으로 제일 머리되는 거 가졌다, 뭐 가졌다.' 다 각각 제대로 지금 아주 중요한 그 지위를 가지고, 권위를 가지고, 보배를 가져서 부요한 줄로 이렇게 알아서 그런 것 때문에 가치를 거게다 두니까, 가치를 두는 것이 전부 뭐이냐 하면은 썩어질 것에다가 가치를 둡니다. 없어질 것 들에게 가치를 둡니다. 오늘이라도 숨떨어지면 상관없을 것들에게 가치를 둡니다. 죽지 아니할 거 썩지 아니할 것, 영원한 거 영원히 자기 것이 되고 완전한 거 거게 대해서는 가치를 가질 줄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 가지고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하루 살면서 그 사람이 영생하는 생명이 사는 생명 생활 할 수도 있고 영원히 죽는 사망 생활 할 수도 있는데, 사망 생활하면서 저는 살았답니다.
'오늘 하루 살았다. 왜 내가 죽어?' 안 죽기는 왜 안 죽어? 네가 오늘 이십사 시간에는 살아서 이십사 시간 죽어 버렸어. 네 생애고 뭐고 산 거 하나도 없어.
죽었어. 그말 맞아요 안 맞아요? 하루 살았으면 하루 죽었다 말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생명이 감해졌소 연장됐소? 감해졌어. 이랬는데 썩을 것에만 분주해 가지고 거게만 가치를 두고 거게만 욕심을 품고 그것만 지금 노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하는 이 생명, 다 중생된 사람은 이 영생하는 생명을 가졌는데 제가 가진 생명도 뭣이 제 생명인지 그것도 모른다 그거요. 생명이 몇 가지로 됐는고 손 한번 들어 봐요. 자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안드는 사람은 생명 모르는 사람들이라. 다 들어 봐요. 모르는 사람 많다. 모르는 사람은 아마 다 대학한, 공부한 모두 최고의 학부를 공부한 그런 사람들일 거고, 제 딴에는 똑똑한 사람들일 거고, 세상에서 부요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완전 요소요, 이거는 영영 불변하는 요소요, 영생하는 요소요, 이거는 자존자의 요소입니다. 자존자의 요소로 우리가 됐습니다. 우리가 첫째 아담의 자손의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첫째 아담의 자손의 것이 우리 영육인데, 영육과 속성인데 영육과 속성이 이것이 악령의 유혹을 받아서 생명이 끊어져 버렸어, 생명이 끊어졌다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버렸어. 연결이 끊어져 가지고 죽은 것이 돼 버렸는데 이 죽은, 죽은 영육, 죽은 속성, 죽은 이 모든 소망 희망 이것을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다시 살려낸 것이오.
이래서, 그러면 첫째 아담의 자손은 부정 모혈의 그 부모의 요소가 실지로 와 가지고 내가 됐습니다. 그냥 말로 내가 된 게 아니고, 제도로 내가 된 게 아니고, 또 법적으로 내가 된 게 아니고, 계약적으로 내가 된 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그 요소 그것이 나와 가지고 내가 된 것입니다. 요것은 여러분들이 다 알지요? 요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유전성을 말하는데 그 아버지의 요소 그 어머니의 요소가 나와 가지고 새끼가 됐으니까 꼭 그와 같다 그 말이오. 쥐새끼는 아나 모르나 쥐새끼는 쥐새끼 돼. 개새끼는 개새끼 되고. 그러면 개새끼도 뭐 달리 되는 줄 압니까? 그것도 내나 부정 모혈이요. 그래 가지고 됐어. 그게 그대로 되는 것처럼, 사람도 그대로 돼 가지고 된 것인데 그러면 첫째 아담의 자손은 이렇게 부모의 요소가 그것이 갈라져 나와 가지고 내가 된 이것은 인식을 하나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녀 됐다 이라니까 이것은 계약적 자녀요 법리적 자녀요, 제도적 자녀요, 이것은 무슨 상속권의 자녀요, 실질적으로 부모인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내가 되어졌다 하는 이것은 사람들이 인정하지를 안합니다. 인정하지 안하고 여게 대해서 언급하지를 안하고 여게 대해서 생각지를 아니하고 지금 그것은 딴 세계의 말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십세기의 이 성장된 마귀, 성장된 마귀의 이 고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자꾸 박멸돼 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나라는 이걸 모르기 때문에 미국 나라가 점점 세상화되고 '지금 뭐 인력으로 달에도 별에도 다 내왕할 수 있는데 하필 예수 믿어서 비현실적인 비실상적인 그런 천국을 갈 게 뭐 있는가?' 이라면서 무시하기 때문에 그 자녀들을 어떻게 억제할 도리가 없어. 이러니까 미국 교회는 가 놓으면 청년들이 없어. 전부 모두 영감 할마이들만 만날 한숨만 쉬고 '아들딸 저것들이 저래 어짤고?' 하고 한숨만 쉬고 뭐 그놈들은 주일 하나도 안 지켜. 전부 이 세상에서 높은 거, 제 맘에는 보배로운 거 그거 취하러 가느라고 야단을 지기지.
이게 뭐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둘째 아담의 자손된 것도 둘째 아담의 자손, 둘째 아담은 누구요? 둘째 아담은 그리스도 예수요.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생됐는데 그러면 우리가 진리로 중생됐고, 또 영감으로 중생됐고,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중생 됐고 하늘의 소망으로 중생됐는데 이것이, 자, 이것이 다 실존입니까, 이 진리가 실존이며 성령이 실존이며 예수님의 대속이 실존이며 또 하늘에 대한 소망이 이게 실존입니까 하나의 가정적으로 하나의 논리에 그쳐지는 논리입니까, 이것이 실존입니까? 진리와 성령과 예수님의 대속과 하늘에 소망이라는 이것이 실존이라고 확실히 믿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실존으로 믿어요. 실존입니다. 인제 실존인데 '그는 실존인 줄 알지마는, 알지마는 그 실존이 내게 와 가지고 내가 됐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는 요 말을 오늘까지 나도 생각하기를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만 말했어. 다시 살아 났다.
그러니까 우리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 된 이것이 이제 살아났다 하는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오. 영육이 살아났습니다. 영육이 살아났으나 우리가 그 영육을 그것을 살린 것만 아니라 이 네 가지 그 실상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우리가 됐습니다. 우리에게는 요 네 가지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래서 부모의 육, 첫째 아담의 요소인 부모의 요소가 내게 와 가지고 실지로 그것이 내가 돼 가지고 내가 자라갔다 하는 요거와 같이 둘째 아담의 자손도 둘째 아담의 요소가 내게 와 가지고 둘째 아담의 요소, 말하자면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신인양성일위의 요소인데 이 요소가 내게 와 가지고 그 요소가 내게 와서 그 요소가 내가 돼 가지고 그 요소가 점점 지금 자라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여게 대해서 사람들이 믿지를 아니합니다. 요것을 지금 여러분들에게 증거를 할라고 하는 것인데. 첫째 아담의 자손도 첫째 아담의 그 요소가 그것이 와 가지고 실지로 그 요소 그 실물이 와 가지고 내가 돼서 자라고 있는 거와 같이, 둘째 아담의 자손된 우리도, 둘째 아담, 다시 말하면 신인양성일위요 곧 그리스도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이 요소, 이 요소가, 요소의 그 실상이, 요소의 그 실체가 이것이 와 가지고 그 실체가 내게 와 가지고 내가 되어 가지고 자라간다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믿기를 지금 원합니다.
원하는데,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겠느냐? 그런 문제가 날 것입니다. '그라면 우리가 그리 됐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그만 우리가 분자냐? 하나님의 분자냐?' 말이 나겠습니다. 그러면 그래 생겼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분자입니까?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쪼갱이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우리가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분자라고 성경에 말한 일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분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지체라고 했습니까? 분자라고 하지 안했어. 하나님의 지체라고 했어. 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어. 또 하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요소의 그 실상이 내게 와 가지고 내가 생겨졌지마는, 첫째 아담의 요소가 내게 와 가지고 내가 생겨진 거와 요소가 와 가지고 생겨진 거는 꼭 같은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것이 뭐이냐? 첫째 아담의 자손은 쪼개졌습니다. 그 선조와 자손이 쪼개져 가지고 그 선조의 쪼갱이가 쪼개져 내려와 가지고 되기 때문에 선조가 쪼개졌습니다. 쪼개진 그 아담의 쪼갱이가 내가 됐습니다. 우리가 다 아담의 쪼갱이가 우리가 됐어. 아담의 쪼갱이가 우리가 됐습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아담의 쪼갱이가 우리가 된 것이 아니고, 아담의 쪼갱이가 우리가 된 것이 아니고 아담의 그 본체, 그 실체 그것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우리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완전이기 때문에 분류할 수가 없어 분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의 자손은 분식 자손이요, 분식 자손.
마치 가지를 꺾어다 여기 심으면 가지가 자꾸만 자라서 된 것 모양으로 분식 자손이오. 우리는 분식 자손이 아니라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연합 자손이라.
따라합시다.
연합 자손이라! 연합 자손이라! 연합 자손이라! 이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고 부활에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지체라, 그리스도의 몸이라 이랬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성전이라,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와서 계신다는 그 말이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주인으로 와서 계신다. 또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몸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셔 가지고 우리 영육을 거머쥐고 이용해 가지고 당신의 소원대로 이제 듣고 싶으면 듣고 우리를 통해서 듣고, 말하고 싶은 걸 우리를 통해서 말하고, 이러니까 그분 한 분이 작용을 우리 속에서 해 가지고 우리를 움직여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새로 출생된 둘째 아담의 자손은 생명이 하나입니다. 생명이 하나입니다. 생명도 하나요 또 지혜는 몇이나 됩니까? 지혜도 하나요. 힘은? 힘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희로애락은 몇이나? 희로애락도 하나요.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고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이 둘째 아담의 자손된 것은 계약으로 자손된 것이 아니고, 또 무슨 법적으로 자손된 것이 아니고, 제도적으로 자손된 거 아니고, 제도적으로 됐다 말은 한국 나라의 제도에서는 여자가 시집가면 또 남자가 장가가면 저거 부모가 아니지마는 다 아버지라 합니다. 처부모도 아버지 어머니 하고 또 과거에는 뭐 그런 말 있지만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요. 처부모도 아버지 어머니 또 생부모도 아버지 어머니. 다 이래 가지고 거게 제도라 그 말이오. 또 미국 나라는 시집만 가면 성 없어졌습니다. 박가한테로 갔으면 여자도 박가 됐어. 또 이가한테로 갔으면 여자는 다 그만 이가 성 따라가. 그게 다 제도라.
그와 같은 제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첫째 아담의 실상이 나와 가지고 우리가 된 거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인,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인, 그러면 하나님은 몇이라요? 자, 손가락으로, 하나님 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뿐이라. 하나님이시며 사람. 성경 전체가 그걸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인 이 둘째 아담의 실상이 내게 와 가지고 내가 됐습니다. 그래 다른데, 첫째 아담의 자손과 둘째 아담의 자손이 된 것이 실상이 와 가지고 된 것은 꼭 갈고 실상이 와 가지고 된 것은 꼭 같고, 유전성으로써 첫째 아담도 부모의 형체를 자손이 그 형체를 또 받았다고 성경에 말했고 또 우리도 하늘에 속한 형체를 또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래서 땅에 속한 자의 자손은 땅에 속한 자의 형체와 같은 형체를 입었고 또 하늘에 속한 자의 자손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와 같이 그 형체를 입었다 하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있소 없소? 어데 있어? 속한 자의 형체를 입은 거와 같이 우리는 또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를 입었다 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똑똑히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실체가 와 가지고 우리가 된 것도 같습니다. 또 유전성으로 꼭 개새끼 개되는 것 모양으로 그 유전성도 꼭 같습니다. 같은데 다른 것이 뭐이 다릅니까? 다른 것이 뭐이 다르지요? 다른 것 한번 말해 볼까요? 다른 것, 연결이 끊어져 가지고 있는 게 다릅니다. 연결이 끊어져 가지고 있는 게 다르요. 또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생명이 따로 있는, 개별로 돼 있는 게 그게 다릅니다. 또 다른 것 뭐이요? 지능이 다른 것이 다릅니다. 희로애락의 모든 그것이 다른 것이 다릅니다. 암만 부모는 기뻐 좋아서 못 견뎌도 자손은 근심하고 울 수 있습니다.
자손은 아파서 죽겠다고 말해도 부모는 모르고 웃을 수 있습니다. 또 부모는 죽겠다고 이래 쌓아도 자손은 지금 좋다고 뛰고 굴릴 수 있습니다. 거게는 생명이 끊어졌고, 지능이 끊어졌고, 희로애락이 끊어졌고 생애가 다 끊어져 됐으나 우리는 끊어지지 안하고 하나로 된 요것이 다릅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로 된 것.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너희들이 성령도 하나요 피도 하나요 또 중생도 하나요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생명도 하나라 이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요것이 오늘까지 감추어서 숨어 있던 진리인데 나도 이제 깨달았어.
우리가 중생된 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와 하늘의 소망으로 내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물론 그 첫째 아담의 것이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그것은 껍데기요 살아난 그 껍데기 속에 신적 요소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실상이 돼 가지고 그것이 중생된 우리라 그 말이오.
이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말씀의 씨로 너희들이 거듭 났느니라' 진리가 우리가 생겨진 씨라 그 말이오. 그러면 이 진리는 나눌 수 있습니까? 진리가 나눠지지 못해. 완전이기 때문에 나눠지지 못하고 단일 생명 단일 희로애락. 단일 지능, 단일의 소망 이 단일성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시게 연결되지 안한 것은 다 멸망이야. 여게 연결되지 안한 것은 다 멸망이라요. 이러니까 이 구원이야말로, 그러면 이 구원을 이루어 간 것은, 이 구원을 이루어 간 그자는 무슨 지혜를 가졌어? 너 말해 봐. 무슨 지혜 가졌어? 새사람은 무슨 지혜를 가졌어? 전지의 지혜? 전능의 능력? 이랬는데 다만 이 첫째 아담의 자손 이것이 지금 성화가 안 되기 때문에 이제 그 전능이 와서 역사할라 해도 쉬운 거 껍데기이거나 이게 순종할까 높은 고도의 것은 순종을 못 하게 된다 말이오. 인제 자라면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이냐? 하나님의 전지가 다 내 영육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도록, 영육을 통해 나타나면 이라면 뭣 됩니까? 하나님의 완전 지체가 되는 것이요 완전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요만치만 하고 오후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안 나온 사람은 몰라요. 이것도 여러분들이 가서 떠들면 세상 교회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고 할 것이라.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 있거든 데리고 와요. 내가 성경을 똑똑 밝혀 주며 이 성구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 모르는 거면 다 난해절이오. '그거 무슨 성경인지 모른다. 난해 절이라.' 이래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데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 믿지 뭐 달리 예수 믿겠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완전하시며 무한 하신 주님의 이 도리와 피조물을 초월한 지극히 크고 영광스럽고 거룩한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이 역사, 이는 아무도 피조물로서 감당할 수가 없음을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무도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음을 압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인한 성령님의 감동으로 우리 각자에게 충만케 하사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이 생명의 도를 들어 깨닫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확신을 가지고 이 구원의 소망을 가져 이 구원 이루는 데에 전심 전력 기울이는 저희들되게 하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들은 주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제는 보이는 모든 것보다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저희의 아버지 된 것을 깨닫고 든든히 안심하고 염려 없는 세상으로 범사에 아버지에게 고하여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깨닫게 해 주심과 모든 해결해 주심을 받고 염려 없는 평강 가운데서 나그네 세상을 잘 끝마쳐 영원을 준비하는 저희들만 되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
금번에 대구집회 하는 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여게 참여하는 것보다도 더 수입되고 유익될 것이 없는 이 사실을 깨닫는 영감을 더하여 주셔서 저들이 어떻게 할지라도 이 집회에 참석해서 새로운 은혜를 받아 우리가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짐으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새로와지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도 새로와지고, 만사물과의 관계도 새로와짐으로 과거에 보지 못하던 세계, 과거에 누리지 못하던 평강의 생명의 행복 세계를 누리는 저희들이 되도록 다 참석할 은혜를 주시고, 이 일을 위해서 백방으로 방해하는 악령 악성 악습이 있을지라도 다 눌러 주시고 이것을 막아 주셔서 다 신앙에 자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더우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사 주님이 이렇게 피 흘리기까지 하신, 사람 되어 오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원하시는 인간 구원의 주의 소원과 소원이 일치되어서 끝까지 충성되게 일하다가 주 앞에 설 수 있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