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2:28
인내의 말씀-신앙성공은 인내
1983.12. 3. 토새.
본문 : 계3: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한 약속과 또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자유의 범위 안이 있고 또 자유의 범위 밖에 하나님의 그 주권적인 그런 범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는 그 범위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인자가 되셔 가지고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범위 안에는 우리가 주권적으로 역사해 가지고 하나님은 거기에 피동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가 주님이시요, 자유의 범위 밖에 하나님의 그 주권적인 절대적인 그 범위 내에서는 하나님이 단독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하셨고 또 하십니다. 그거는 택하심이라든지 예정이라든지 창조라든지 또 모든 섭리라든지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 존영한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한된 자유나마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신 그 자유범위 내에서는 언제나 우리가 능동이요 하나님은 피동적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다 하나님은 능동적이요 우리는 피동적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고 연구할 때에 이것은 어느 범위에 속한 것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대단히 좋습니다. 그 범위를 잘못 잡으면 오해하기도 쉽고 또 혼란스러워지고 또 이해가 안 되어서 성경에 난해절이 있다 성경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도무지 해석이 안된 일이 있다 하는 그것은 다 이 범위를 착각하고 혼돈시킨 까닭인 것입니다.
여기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거기에 소속으로서 소산으로서 생겨진 다 신앙생활이지마는 그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 범위 내에서는 볼 때에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가지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그 주권 역사가 있고 또 우리들이 자유성을 가지고 노력해서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우리가 성경을 볼 때나 자기의 생활을 살필 때에 이것은 내가 손을 대지 못하고 나는 할 권리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독단으로, 주권을 가지시고 행하시는 일이다 하는 그런 것은 우리가 손댈 필요가 없고,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손대봤자 하나님께서 빼앗기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할 일만 우리가 해야되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가 할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 하는 이런 것은 인간의 그 자유 범위 내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가 이렇게 충성을 할라면 할 수가 있고 한 할라면 안 할 수 있는 자기의 그 자유의 활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너머 하나님의 주권적인 범위가 있기 때문에 그 범위 너머를 보면 궁극적은 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의 범위 내에서는 그것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성을 줘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우리 앞에 열린 문, 형통한 일, 열린 문, 열린 문 이것은 신앙의 형통을 말하는 것인데 자기가 어떤 현실을 당하든지 자기는 실족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는 그 걸음에 아무런 제재받지 안하고 아무런 방해받지 안하고 실수하지 안하고 이 걸음을 잘 걸어 가는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권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그러면, 갚아 주시는 이것은, 그게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지는 않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또 주권 범위 내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상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상으로, 우리에게 피동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동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피동에 원인 되는 우리의 자유 범위 내에 있는 그 능동적인 역사를 우리가 힘을 써야 되지 능동적인 역사가 있어야 거기에 대한 보상적인 하나님의 그 열린 문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수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선포하신 법칙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참 인간같이 사적으로 혹 틀린 것도 사사로 사사롭게 그렇게, 요새는 모두 다 사바 사바라고 하는 뭐 모두 사적으로, 사적으로, 또 사정적으로, 모든 인정적으로 이렇게 해서 일시 그때는 좋은 것같지마는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인정이라는 사정이라는 그런 것을 전혀 버리고 하나님의 성신의 감동대로만 해 주면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고 또 우리에게 더 만족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 마음대로 이렇게 사정적으로 인정적으로 하는 그것 때문에 서로 죽이고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해서는 우리가 그 약속에 어그러질 때에는 어긴 대로 그대로 약속한 대로 보응 해 주시고 우리가 약속을 지켰을 때에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또, 지킨 그대로 보응을 해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선포한 약속에 대해서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이 그대로 실행해 주시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가 또 고대하는 것이요 우리가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포해 놓으신 그 계약을 당신이 어기지 않는 것이 우리를 든든케 하는 것이요 우리를 속이지 않는 것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요, 그것이 또 당신의 거룩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 주신 사랑의 주님이시지마는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그 계약은 어기지를 못합니다. 어기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요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인간과 관계되는 거와같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는 사적으로 언제든지 공평을, 신실을, 진실을 이렇게 지키지 안하시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해 주시리라 바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놓으신 그 약속대로 그대로 그저 천이든지 만이든지 누구에게든지 그대로 하시지 그 약속을 털끝마치도 어겨서 행동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열린 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상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 공의를 가지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절대성인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시고 이렇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잘못됐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시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정의를 가지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성인 그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감이나 변동이나 이런 것을 할 수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어긋나서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다리지를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봤자 스스로 속이는 것뿐이지 일이 안 됩니다.
또 우리가 시험의 때를 면하는 것, 시험을 이기는 것, 시험을 이기는 것 시험의 때를 면하는 것 그런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보상적으로 주십니다. 그 자기가 어떤 시험을 당했을 때에 그 시험을 이길라고 자기가 결심하고 뭐 작정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결사적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환난을 때에 승리를 하나님이 주시지 인간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 자기가 모든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데, 다른 사람은 환난을 받는데 그 사람에게는 환난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환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놀래는데 그 사람은 놀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려움의 파동이 심히 큰 풍파가,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런 풍랑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약속대로 벌써 그렇게 될 수 있는 원인인 자기의 자유성을 가지고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능동이 되는 그 능동의 부분을 잘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같이 피동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어떤 잿만당을 넘어가는 높은 잿만당을 넘어가는데 그 잿만당을 넘어가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가 걸어서라야 그 잿만당을 넘어가는 그런 잿만당이라면 다 걸어서 넘어가야 되는데 걸어서 넘어가는 데는 그만한 노력과 그만한 힘이 들어야 그 잿맛당을 넘어가지 그리 안하면 그 재를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어려움을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어려움을 크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천 미터가 되는 그런 재라 할지라도 한 자욱씩 또박 또박 걸어 간 때에, 걸어 가니까 그 사람은 한 자욱씩 걸어 가니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아니하고 그 어려움을 나누어 가지고서 어려움을 나누어 가지고서 보스라기, 부스러기, 부스러기 십자가를 그 사람이 졌기 때문에 부스러기 십자가가 모여서 티끌모아 태산으로서 그렇게 태산같은 그런 십자가가 되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재를 넘어가는 그 어려움이나 노력이나 그것을 이렇게 나누어 가지고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크게 어려움 된 것이 없어졌지 그것을 그 사람은 안 당해서 그런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물같이 너희에게 이르리라 덫과 같이 그날이 이르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장차 오는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항상 기도하고 항상 깨어 있는 그 부스러기 힘 부스러기 고통 그 어려움 그것이 뭉쳐 가지고서 다른 사람에게는 덥치기 그물같이 이렇게 일어나서 그 사람을 그만 사로잡고 천하에 모든 사람 이 다 사로잡히는 그런 덥치기 그물이, 새에게 덥치기 그물 고기에게 그런 것 처럼 이렇게 모든 자유하던 것이 갑자기 다 절단이 나고 막혀지고 사로잡혀지 그 이러는데 이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고 늘 깨어 있기 때문에, 깨어 영감과,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영감과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로 살아난, 진리로 살아난, 진리의 힘으로 산 진리로 움직이는, 영감으로 움직이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감이 진리가 됐고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내주해 가지고서 역사하는 그 역사가 우리의 생명의 힘이요 그것이 이 세상에 살 때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서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떠 일을 당한다 할찌라도 평소에 그 모든 어려운 고난을 나누었다 그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안하는 이 깨어 있는 생활, 영감과 진리 생활 이것을 해야 온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덫과 같이 그물같이 이르는 그것을 면하게 되지 그 그물을 통과 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그물을 통과 안하고 살아 날 사람은 없고 통과 안할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 통과하는데 그 그물이 그이에게 그물되지를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영감대로 살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살았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만, 높은 재를 넘어가는 데에 그 사람은 나누어져서 한 자욱씩 한 자욱씩 그렇게 또박 또박 걸어 가서 어려움을 나누어 가지고 자기가 감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려움이 없이 감당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어려움이 있어 참 결사적으로 생명을 내놓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 닥치는 그런 사람은, 그사람이 다만 몇 자욱이라도 걷지 안하고 그 자욱을 한테 모아 가지고, 어려움의 힘들여야 되는 그 힘들여야 되는 것을, 힘들여야 되는 것을 조그매 모으고 다 그때 그때 다 하고서 조그매 모은 사람은 다 같은 환난을 당해도 그 사람은 조그만한 환난이 될 것이고 또 그 사람이 많이 게을을 부려 가지고서 자기가 걸어 가야 될 걸음을 걷지 안한 사람에게는 많은 환난이 될 것이고 또 자기가 걸어 갈 걸음을 이제는 너무 게을 부리고 방탕해 가지고서 자기가 자꾸 모아 놓은, 그 모아 놓은 것이 인간의 힘으로서 도저히 그것은 걸어 갈 수, 승리로 걸어갈 수는 없고 그들에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런 많은 게을을 둔 사람은, 그 사람은 절대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신사 참배라는 그 문제가 도무지 인간으로서 이길 수 없는, 너무도 고문과 고행이 심하고 너무도 심해서 그 사람이 뭐 결심하고 결심하고 이래 결심을 해도 그 사람이 들어 갔다가 또 나오고 들어 갔다 또 나오고 또 굴복하고 굴복하고 마지막에는 이기지를 못하고, 다 같은 육년 지냈는데 오년 몇 개윌까지 지나다가 다 실패를 한 사람들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당했지마는 쉽게 이겼고, 또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갔지마는, 같이 갔지마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그렇게 별 어려운 일이 없었고 감옥 밖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그런 어려움이 없었고, 또 어떤 사람은 감옥에 들어 가지도 안하고 자유롭게 또 평안하게 그렇게 산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이냐? 그 사람이, 시험은 다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을 미리부터 노력을 해 가지고써 거기에 대한 모든 겪을 수고와 자기와 들여야 될 힘을 다 들여 가지고서 얻어야 될 그 모든 실력을 얻어서 통과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목 닥치지 안하니까 쉽고, 또 그것을 평소에 평범한 생활에서 다 감당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고, 사도 요한이가, 사도 요한이가 순교하지 안하고 그와같이 갔다 하는데, 그러면 사도 요한이는 순교하지 안하고 했으니까 다른 이만 못한가? 이렇게 생각을 하기 쉽지마는 사도 요한이는 그만침, 그만침 물셀틈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보면 그 신앙의 생활이 물결이 센 것 모양으로 신앙생활이 센 사람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아주 풍랑이 많고 이렇게 굴곡이 많고 파란이 많은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깨어 있는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요 계속적으로 항상 기도하라 했는데 기도하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뜻밖에 그물이 됩니다. 뜻밖에 그물이 이르는 사람이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도 보면 '너희들이 낮에 속해서 깨어 있는 자에게는 밤이 이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희에게는 밤이 오지 않는다 너희들은 낮에 속했기 때문에 밤이 오지 않는다' 낮에 속한 사람은 밤이 오지 않는데 낮에 속한 사람이 그 사람이 낮에 속한 생활 하지 안할 때에 그 사람은 밤이 와서 자는 거와같이 그 사람은 자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서 갑자기 도적같이 오는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렇게 적은 힘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안했다는 말은 나는 예수 안 믿는다 그렇게 말한 게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다는 그게 아니고 '너희들이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과 그 천사 앞에서, 하나님 사자앞에서 아노라 하겠고 네가 모른다 하면 나도 모른다 하겠다' 안다 모른다 하는 그것은, 누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때 당장에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큰 세력 강한 세력이 나에게 와 가지고서 그 세력이 나를 탄압 할 때에 그때는, 전능하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때에는 전능하신 그 전능의 하나님을 자기가 부인치 안하고 모시는 때입니다.
또 자기에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자기에게 올 때에 그때는 자기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주권적인 섭리를 가지신 주님의 주권을 믿는 주권의 주님을 믿을 때에 그것은 해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님이 이것도 주권하셔서 이렇다 하는 것을 믿을 때에 해결이 됩니다. 자기에게 이해 못할 아주 참 분한 일이나 두려운 일이나 참 기막히는 일이나 인간이 할 수 없는 참 기절할 만하고서 낙망할 만하고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때에는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주님을 배반치 안한 사람 만이 이깁니다.
사랑의 주님을 배반치 안한 사람만이, 사랑의 주님 또 주권의 주님 전능의 주님 전지의 주님 어디든지 계시는 주님 지극히 큰 능력으로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 이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안하고 이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웃음으로 지나갈 수 있고 감사히 지나갈 수 있고 그것을 자기의 구원으로 다 활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적은 힘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키고 또 주의 이 름을 배반치 아니한 그것이 들어서 열린 문이 됐습니다. 그것이 들어서 열린 문이 됐습니다. 그것이 있으면 절로 문은 열리게 되는 것이고 그 문은 아무도 닫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시험의 때가 면했다 그 말은 시험이 그에게 다 무시험 통과라 그와 같은 말입니다. 무시험 통과라 무시험 통과는 그 사람은 다 그만침 벌써 평소에 실력이 있어서 다 통과했기 때문에, 이제 이 천 미터 산 그 절정에 올라라 하는데 그것을 천 미터에 산에 십 분 동안에 올라 가거라 일 분 동안에 올라 가거라, 만일 일분 동안에 올라가라 하면 대단히 큰 시험이겠습니다. 일분 동안에 올라 가라 하면은 그것을 누가 올라 가겠습니까? 못 올라 가지마는 그 사람이 굉소에 또박 또박 걸어서. 이제 한 자욱밖에 안 남은 사람에게는 일분 동안올라 갈라 하니까 한 자욱 바딱 올라가니까 일 분도 안 걸립니다. 그 뭐 아무 어려울것 없이 그래 올라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꼭 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강한 자가 강한 것을 믿고 굳센자 굳센 것을 믿고 자기나 자기의 무엇을 믿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현실 진실에, '믿음으로 행치 안한 것은 다 죄니라'말했습니다. '믿음으로 행치 안한 것은 죄니라' 그 말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도 빈틈이 없습니다.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하는 그것이 힘들지마는 계속하논 그것이 나중에 모들뛰기로 드는 그런 힘보다는 아주 갈라 하면 쉽습니다. 그만한 애로가 있어 가지고 되는 것이지 없어 가지고 되는 것은 없기 때문에, 흘러서 부스러기 십자가를 지므로서 인간이 지지 못할 천하에 제일 무겁고 아주 중량 많은 그런 가치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죽도록 생명을 걸어놓고 했는데도 실상 보니까, 큰 십자가를 지고 간 것같지마는 아주 몇 되지 안한 것, 그저 작은 십자가, 말하자면 저는 죽자꼬 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해도 찍해야, 열 발자국을 한 번에 올라 갈라 하면은 그만침 고난이 되니까 많이 올라 가봤자 열 발자국밖에는 못 올라갔습니다. 저 사람은 한 자욱 올라갔지마는 천 미터 벌써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하는 것은 부지런히 꾸준히 게으로지 아니하고서 쉬지 않고 이래 하는 데에서 신앙의 성공이 있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세상 마귀 법칙은 대인들은 큰 것만 받고 작은 것은 무시 한다 그렇게 말했지마는 성경은 정 반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도 무난히 통과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지극히 작은 것을 무시한 사람은 그것은 지극히 큰 것도 그 사람이 무시해서 실패하게 되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내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네가 내 계속의 말씀을 지켰은즉' 계속의 말씀, 이거는 이 현실에도 주의 말씀이 계속되고 저 현실에도 주의 말씀이 계속되고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 토막이 없고, 주님이 내기에 명령하신 명령이 없는 토막이 없고, 요구하시지 않는 토막이 없고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신 법칙이 없는 그런 공간은, 공간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이 신앙 걸음을 묘사하기를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이 달음질 하는것과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둘이 달음질하는 그 사람이 저 사람과 나와 서로 이기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이기기를 다투는 그 경쟁이 그것이 어디 찰나라도 쉬는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쉬지 않습니다. 계속 서로 대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과 우리는 싸우는 싸움이, 악령과 싸우는 싸움이, 죄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 이 모든 사망에 속한 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 이것이 계속되지 그것이 찰나라도 토막있는 것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치 안한 것은 죄다. 전부가 순종으로 하지 안한 것은 그것은 다 삐뚤어진 것이 된다. 죄가 된다 하는 그것은 전부 계속성을 가르쳐 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내 인내와 말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켜서 시험의 때를 면케 한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지키시는 그것도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안 됩니다. 당신이 선포해 놓은 계약에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킨다'는 요 계약에 해당이 되어야 당신이 우리를 지켜 주시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같이 어려움을 당할 때라도 아,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의 주님을 믿습니다. 이것을 자꾸 평소에 기도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라고 믿을라고, 지식도 환하게 알고 또 자기가 믿고 싶기도 믿고 싶고 또 자기가 믿을라고 해도 싶고 이라는데 이 일이 다만 안 되는 것은 갑자기는 안 됩니다. 갑자기는 안 되고 전부 다 연습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갑자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전능자가 나에게 지키는 데 땅 위에 있는 어떤 세력이 와봤자 무슨 상관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동무하고 싸우다가서 동무, 저보다 큰 동무가 저를 때릴려고, 이럴때에 아무래도 거기있다가 매 맞을거고 견디지 못해서 도망을 쳐 가지고서 이렇게 자기 아버지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와 가지고서 아버지의 품 안에 딱 안겨 가지고는 그 뒤에 따라오니까 따라오는 거 보고서 조롱을 합니다. 아나 때려라 아나 때려라 아나 때려라, 왜? 너보다 센 우리 아버지가 지금 내 배후에 있다 그 말이요. 아나 때려라 그것이 뭐이냐? 왜 금방 겁이 나 가지고 못 견디는 자가 아버지 품 안에 안기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조롱하고 그리하느냐? 그것이 속에 아버지가 있는 게 확실히 믿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가 믿어저야 되지 믿어지지 안 하는데 어짭니까? 믿어지지 안하기 때문에, 믿어지지 안하는데 자기가 믿을라고서 애를 씁니다. 이래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사옵나이다 믿어두었사옵나이다 믿습니다. 주님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걸 믿습니다. 암만 주 지끼봤자 그때에 믿음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평소에 그래 그래 가지고서 자기에게 신앙 경험에서 믿음이 생겼고 체험에서 믿음이 생겼고, 이러니까 그것이 본능적으로 믿어지는 믿음의 본능적인 믿음이 되어져야만 이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렇게 하는 데에서,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데에서 네가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된아 '네가 이것을 굳게 잡아라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속히 오리라' 그 말씀은 네기에 이렇게 되는 것이 이것이 지루하고, '내가 속히 오리라' 하는 그 말씀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 신앙생활 계속하는 것, 거룩과 진실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심히 피곤한 것을 말합니다. 심히 피곤하지마는 '내가 속히 온다' 그 말은 너희들이 심히 피곤하지마는 이 피곤한 이것은 지극히 작은 피곤 가지고서 무한한 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한한 것을 얻는 그 결과에 비해서는 그것의 원인이 되는 이 피곤이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에게 이렇게 지루하게 피곤을 많이 끼쳐 줄라 그 하는 게 아니라 신속히, 단축 시키고 단축 시키고 축소 시키고 축소시켜 가지고서 그 무한한 것을 아주 짧은 눈꼽재기같은 조그만 짧막한 요런 토막을 가지고서 이와같이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이 사실을 깨닫고 참고 견디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잡은 것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 하도록 네가 잡은 것을 굳게 잡아라'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고 놓지 말아라'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네가 가진 것이 뭐입니까? 가진 것 그것이 거룩과 진실입니다. 거룩과 진실, 거룩과 진실이 무엇을 낳았느냐? 거룩과 진실이 '적은 힘 가지고서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안한' 그것이 거룩과 진실에서 나왔습니다. 딴 데서 나오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인내의 말씀 계속의 말씀을 지킨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도 거룩과 진실에시 나왔습니다. 그러면 모든 천하에 있는 사람들이 다 어려움을 다 당하는 그 어려움을 자기에게는 어려움이 되지 안하고 쉽게 된 그것도 다 거룩과 진실에서 나왔습니다. 이러니까, 피곤하기를 거룩과 진실로서 피곤하고 또 자기가 쉬지 못하는 것, 쉬지 못하고, 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 년 쉬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은 몇 달 쉬고 난 다음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은 며칠 쉬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마는 이 사람은 하루도 쉴 수가 없는 사람이라, 항상 거룩과 진실하니까 오늘도 피곤하고 그날도 자기에게, 이러니까 그날도 지고 갈 만 은 하기는 하지마는, 못 지고 갈 것은 아니지마는 갈 만은 하기는 하지마는 어려움이라는 것이 언제 쉬는 공백이 없다 말이요. 공백이 없는 그것을, 어떻게 공백이 없게 되느냐? 거룩과 진실을 가질라 하니까 공백이 있을 수가 없게 됐더라 이거요.
그러니까, 그걸 네가, 그 생활하는 그것을 가진 것을 굳게 잡고 놓지 말아라.
가진 것을, 네가 계속하는, 피곤하지마는 그 생활을 네가 굳게 잡고 놓지 말아라, 이것이 면류관이다. 이것이 완전 승리를 이루는 그 승리다. 그런데 '내가 속히 온다' 내가 너한테, 너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극히 큰 것을 짧고 짧은 것으로서 이룰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축하고 단축해도 그 이상 단축할 수가 없어 가지고서 이와같이 한 것이기 때문에 네가 지루하게 생각지 말고 지극히 큰 것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해결됐고 얻는다는 이 사실을 알고 네가 참고 견더라.
그러면, 이기는 자는 이 생활을 계속하는 자는 뭐이 되느냐? 그 사람은 '성전 기둥이 된다' 그 사람은 저만이 아니고 그렇게 하는 너 하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감이라는 토대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운다. 그 영감은 반석이다. 영감이라는 토대 위에 세우고, 요렇게 거룩과 진실로 계속하는 요 신앙생활하는 그 사람을 인해서 영감 위에 세워진 교회는 서서 있다. '기둥이 된다' '성전 기둥이 된다' 그러면 성전 기둥이라는 것은, 기둥 빼면 성전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성전은 네 어깨 위에 들려 가지고 있다 네 힘으로 들고 있다 그 말이요.
성전은, 요렇게 계속적인 신앙생활하는 사람 그 사람으로 인해서 교회는 들려 가지고 있고 교회는 서 있고 교회는 이루어지는 것이지 게을 부릴 대로 부리면서 명예 영광을 가지고서 무슨 큰 소리나 텅텅 해 가지고서 세계 뭐 선교니 세계 선교니 기독교 한국 기독교 연합회니 또 만 교회 운동이니 이렇게 그 속에는 무서운 자기라는 그런 악이 들어 가지고서 다 모두 자기 명예 중심, 자기 공명 중심. 자기의 사욕 중심 그런 걸 가지고서, 그저 광고 한장이면 다 되고 사람들 모여서 회의 하나만 다 되고 몇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결의하면 다 된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외식인지 모릅니다.
절대적인도는 절대적인 그 분이 선포한 계약대로라야 되고 그 분이 인정해야 되지 그분이 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분이 할 일이 있고 우리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할 일은 그분이 해야 되지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해야되고, 우리 할 일을 우리가 해야 되지 그분 할 일을 우리가 한다는 것이요 새 사람들이 모두 날뛰는 것이 그분 할 일을 전부 사람들이 할라고 하고 있고 우리가 할 일은 다 회피해서 다 요리조리 버려 버리고 말기 때문에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이 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전 기둥이 되게 한다' 또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그 위에 기록된다' 하나님이, 그 위에 하나님은 계시고, 그 위에 하나님은 계시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은 계시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세상이 볼 수 있게 그 위에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있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도 그 위에 있다 그 위에 있다. 그 위에, 그 위에, 요렇게 적은 힘 가지고서 주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그 위에, 인내 말씀을 지킨 그 위에, 그 위에 있다. 그 위에 있으니 그것이 곧 성전 기둥이요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도 있고 그 위에 새 예루살렘의 이름도 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을 가르쳐 말하는데 천국도 그 위에 서서 있다. 그 위에 서서 세상에게 보여 주기도 그 위에 보여 준다. 그 사람이 보여 주고 그 사람을 통해서 증거하고 그 사람 위에 천국의 모든 권세와 역사들은 그 위에 있다. '내 새 이름도 그 위에 있다' 주님의 새 이름이라는 것은 복음 운동을 가르치는데 새 복음 운동, 모든 새로와지는 것도 그게 있다. 개혁도 그 위에 있다. 개혁이 무슨 유력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잘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힘센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적은 힘 가지고서 계속하는 그 위에 개혁도 있고 개혁도 있고 또 그 위에 보수도 있고 그 위에 하나님도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도 있고 권능도 있고 역사도 있고 만방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도 그 위에 있지 이 억센 자에게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힘쓰는 자가 다 천국은 얻는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같이 부지런한 노력, 이 부지런한 노력이 게을을 부릴래야 부릴 수가 없고 쉴래야 쉴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걸 구별 하지 상고하지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고 자꾸 이리 이리 그만, 그날 그날은 시원치 않는 생활이지마는 하루 하루 신앙생활해 나가다 보니까 마지막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칭찬 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것 가지고서 사소한 그런 생활에 항상 머리 써 가지고 정신쓰고 이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시험의 때를 면해서 다른 사람은 그런 어려움인데 그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지 안해. 어려움을 당하지 안해 과연 그렇습니다. 저도 체험했는데 내가 6·25때에 어려움 당한 일 있습니다.
어려움 당한 일 있는 것은 그것은 뭐이냐? 점심을, 집회해서, 집회를 하고서 점심을 먹는데, 점심먹기 전까지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없어서 인민군들이 와도 문제가 없었고 뭐 와서, 오면은 거기에서 전도했고 또 그들이 예배당을 좀 빌려달라 해도 어림도 없었습니다. 빌려 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인데 어떻게 빌려 주겠소? '아, 이 풍금 좀 탑시다. 그 사람들은 아마 뭐 교편 잡았던지 뭐이든지 '풍금 좀 탑시다.' '아 풍금 못 탑니다.' 풍금 못 탄다 하고 내비둘라 하니까 장 그라면 싸울 것이고 이래서 풍금을 못 탄다 하고 그 사람들을 그래 보내고 난 다음에 '풍금 부숴라' 풍금 해체해서 딱 묶어서 들여 놔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뭐 그 사람들 하나도 없이 다 전부 다 대항하고 이랬지마는 서도 그들도 뭐 성도 내도 안하고 '예,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하고 나가고 또 예배당 둘라 해도 '안 됩니다. 이거는 안 됩니다.
이라면, 아 네 미안합니다.' 또 그렇게 말하고 이래 나갔는데 점심먹을 때에 그때 모두 와 가지고서 '아 이렇게 뭐 인민군이야 아무 겁 안 납니다.' 보니까 인민군은 겁 안나거든, 인민군은 겁이 안나요, 인민군이 겁나지 공습이 무슨 겁나겠습니까? 인민군은 겁 안 나고 이러니까 인민군은 겁이 안나서, 뭐 저거들이 그래도 암만해도 우리가 거부해도 그 사람 참 부드러워서 안한다 해도 그만 '예, 그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뭐라고 가며 '미안합니다.' '오늘 탈환 짐 지고 갑시다. 아이구, 못 지고 갑니다. 아 미안합니다' 이러니까 그거는 뭐 쉽으지마는 공습이 이거 겁이 나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꾸 하루 종일 왔다 갔다 이래 하니까 이거 위험하니 이거 공습을 방지하기 위해서 예배당 지붕에 처어치라고 그렇게 영어로 이제 써서, 그걸 씁시다. 밥먹으면서, 나는 그때 그걸 기도하지 안 했다 말이요. 기도하지 안해 항상 기도하지 안해, 항상 기도 해야 되는데 묻지 안하고 대답했어. 물었으면 문제가 없어. 물었으면 그때, 어 그거는 안된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지 인민군은 쉬운 줄 아느냐? 인민군 때문에 그 공습이 오는 것이다 인민군이 우리 무서움의 대상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 무슨 공습이 무서운 것이냐 그거 안된다 이랬으면 그 한 마디로서 기도해서, 구실해서, 자 이것이 하나님 믿는 것이냐 미국을 믿는 것이냐? 이것이 뭐이냐 아 조그매만 구별했더라면, 내가 그리하면 이거는 그 사람들이 봐도 이거는 친미파라 그렇게 할 것이고 이것 또 우리가 하나님 믿고 오는 것이니까 이거 안된다 그거는 사람 믿는 것이고 하나님 믿는 것은 아니다.
아 요것만 딱 그때 구별했더라면 그만 그때 그거는 안된다 했으면 될 터인데 그 걸 묻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묻지 안하고 '뭘로 쓸래' 이러니까 밥먹으며 나는 예사로 장난삼아 들었어, 예사로 밥먹으면서 '뭘로 쓸래' 하니까 있다가 서 ○○○인가 ○○○인가 잊어버렸습니다. 그분이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집에 백목이 있습니다.' 명베, '백목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이래 쭉 펴면 그만 됩니다. 백목 있습니다.' '그라면 해봐라' 이랬단 말이요, 그랬는데, 그래 이제 밥을 다 안 먹었어. 어느 여가 퍼덕 갔다 오디마는 '써 놨습니다' 써 놨습니다.
하는 보고를 받는데 내 속에서 무슨 불이 확 나가는 것같애. 어떻게 그만 그때부터 그만 대번 딱 내게 오기를 뭐이 오느냐? 그 사람들이 보면, 너희들은 순수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너희는 친미파로서 친미파로서 친미의 운동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볼 것이다. 좀 전에는 그들이 와서 막아도 그저 암만 설교할 때 와 가지고 이래도 설교하는 데 와 가지고서 아 '조금 나오시요' 죽 나오면서 뭐 무기를 들고 이문 저문 다 포위해 가지고서 퍽 놓으면서 철컥 거리면서 '좀 나오시요' 해도 뭐 하거나 말거나 거기에 대해서 하나도 털끝만치도 움직이지도 안하고 우습지도 안하고 두렵지도 안하고 저거 하거나 말거나 우리 할 일이 하지했어. 그라면서, 그러니까 하도 ○○○을 조아 놓으니 ○○○이 꼼짝 못하고 어쩔 수 없어서 기 들어와요, 기 들어오는게 아마 그 사람들 심부름 오는 것같애. 내가 거기에서 고함을 질렀어. '어디를 들어오느냐 들어오기를' 고함지르니까 그만 도로 되돌아 나가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떡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배 드리러 왔습니다.' 아 금방 또 변해 예배드리러 왔대요 또, 이래 설교를 다 하고 이러니까 중간에 또 일어서, 또 내가 계속해서, 거기 앉아 예배보라고 이러니까 또 예 그런다 해 뭐 어떻게 시키는 대로 부드러운지, 이랬었는데 그만 그렇게 그걸 기록하고 난 다음에 내게 그만 그런 믿음이 떠나 버렸어. 하나님이 날 지키신다는 믿음이 떠나고 나니까 어찌 견디느냐 못 견딘다 그거요. 이래서 내가 퍼득 말하기를, 야 저 그 사람들이 지금 저 거기에 지금 거기에서 지키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 예배당에 써 놓은 걸 하마 건너다 봤는지 모르겠다 건너 봤는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내려라, 빨리 가서 내려서 빨리 가서 내루기는 내렸지마는, 건너다 보지도 안했지마는 그만 하나님이 날 지키신다 하는 그 믿음이 떠나 버린 것은 내 속에 양심에서 믿음이 떠나 버린 것이지 그게 그 사람들이 봐서 그런 것 아니라 그 말이요. 그라고 난 다음에 암만 믿을라 해도 믿어져야지. 점심 먹기 전에 믿던 그 믿음을 암만 가질라 해야 안 가져진다 그 말이요. 아무리 믿어질라 해도 안돼. 그러니까 아무리 안심할라 해도 안심이 안 되고 담대하려고 해도 담대해지지를 안해요.
이러기 때문에, 신앙은 계속에서만 능력합니다. 능력이 계속에서만 나오지, 계속되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계속이 어디서 나왔느냐? 계속이 나온 것이 거룩에서 나왔고 진실을 목표하는 데에서 나왔습니다. 거룩은, 거룩, 구별은, 구별은 그것이 지금 이것을 옳고 그른 것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구별의 완성이 되면은 거룩이 됩니다. 구별이 이제 참된 것을 찾아서 거기에 도착이 됐을 때에 그걸 거룩이라 합니다. 거룩이 만들어지는 것은 구별이고 구별이 만들어져 가지고 완성이 될 때에 그걸 가르쳐서 거룩이라 그라고, 거룩을 만든, 거룩을 노력해 가지고서 만들어 놓은 걸 조성하는 순서와 과정의 방편은 똑 끊어 버리 그 나면은 그것이 진실이 돼 버립니다. 진실이 되고 진실을 만든 것이 거룩이고 거룩의 성공 그것을 딱 끊어 놓고 그 성취하는 과정만을 말하면 구별이라 이럽니다. 구별 끝에 거룩이라는 탑의 꼭지가 매고, 탑을 쌓고 탑의 꼭지가 만들어지고, 꼭지가 타들어지는 꼭지만을 말할 때에는 그것은 진실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구별하는 이 습성을 자꾸 들이고 이래 가지고서 본성적으로 구별해야 됩니다. 사람을 들을 때에, 사람을 만날 때에도 사람을 구별해야 되고, 또 말을 들을 때에 구별해야 되고, 눈으로 볼 때에 구별해야 되고, 모든 일을 만날 때에 물건을 만날 때에 구별해야 되고, 또 내 안에서 생각이 나온다고서 그대로 내 생각이라 할 게 아니라 내 안에 나오는 생각을 구별해야 되겠고, 취미를 구별해야 되겠고, 욕심을 구별해야 되겠고, 정을 구별해야 되겠고, 계획을 구별해야 되겠고, 소원을 구별해야 되겠고, 또 인정을 구별해야 되겠고, 사랑을 구별해야 되겠고, 취미를 구별해야 되겠고, 평강을 구별해야 되겠고, 기쁨도 그렇고 모든 것 다 전부, 구별이 없으면 거기에 구별없는 그것을 따라서 이런 낭파가 들어온다 그 말이요.
제가 점심 먹을 때에 잠깐 구별하지 안한 거기에서 그만 들어 와 가지고 그것 때문에 한달 동안은 녹아 났습니다. 그라면서도 이미 진리로 알고 있으니까 공산주의가 죽인다 한다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강단을 비울 수는 없고, 이러니까 6·25때에 한달 동안 녹으면서도 강단은 새벽 강단이나 저녁 강단이나 한 번도 뺀 일 없었소. 다만 본 교회에서 수요일 강단 한 번 뺀 것 있습니다. 수요일 강단 한 번 뺀 것 있는 것은, 그것은 저 ○○○목사님 아들이 세상을 떠나서, 웅양이라는 데는 걸어 갈라 하면 멉니다. 거기까지 걸어 가 가지고 지금 이걸 환난 때인데 거기에서 어려움을 당했다고서 나한테 사람이 있는데 내가가지 안하면 그분에게 힘이 없어질 것이고 위로가 안될 터이니까 가야 되겠다 해서 웅양까지 걸어 가는데, 양복을 입고 성경을 들고 걸어 가니까 그때 평안하게 걸어갈 건데 조마 조마해 죽을 지경이라, 양복입은 사람이 없으니까 양복입으면 인민군들이, 저 길로 걸어 가니까 인민군이 모두 총을 들고 저기 오는데, 저것이 오면은 또 어짠 사람이냐 물을 터이지 성경은 가졌지 이러니까 공연히 그렇게 담대하던 사람이 겁이 나 가지고서 못 견뎌서,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수요일을 지키느라고 한 번 뺐고 또 새벽 강단 한 번 빼는 것은 농산 가 가지고서 새벽 강단을, 새벽 예배 한 번 뺐고, 새벽 예배 농산가서 봤지요 예배 봤고 그 뒤에는 한 번도 수요일 예배나 뭐 새벽 예배나 주일 오후 오전 예배나 한 번도 뺀 일 없어, 그 계속하는데 참 한달 동안은 그저 하루에 몇 번 죽습니다. 이제 생명 내놓으면 그냥 평안하고 또 살 생각 가지면 죽을 지경이고 그러니까 하루 몇십 번 죽었다 살아나요. 이제. 이제는 죽나 생명이 내놔 버리면 평안하고 내놓은 생명이 또 내놔집니까? 내놓은 생명이 또 가져지게 된다 말이요. 이제 믿음만 가졌으변 문제가 없는데 믿음 안 가지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게 그렇게 해도 주님이,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야 이놈아 네가 깨어 있어야 되는 건데 깨어 있지 안하고 항상 기도해야 되는데, 여호수아가 묻지 안하고, 하나님께 묻지 안하고 한 행동한 그것이 자기에게 눈에 까시가 됐고 옆구리에 창이 됐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계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계속 없으면 안됩니다. 계속 안 하면 언제든지 그것이 그만한 중량의 무게를 제가 짊어지고 가야 되기 때문에 결국은 계속하지 안하면 못 지고 가고 실패 하고 말지 승리라 하는 것은 못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계속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거룩이라는 요 거룩, 구별하는, 구별하는 걸 놓지 안하면 자연히 필연적으로 그만 계속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은, 그때도 그때지마는 지금은 더군다나 더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기도회에 등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사천 백 구 명입니다. 사천 백 명, 점점 올라서 사천명이 기도록에 등록하고 기도하고 또 여기 등록 안 하고 하는 사람들도 해서, 이렇게 되므로 자꾸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면 회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러면 하나님께서 그 결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은 평강이 올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환난이 안 온다 말 아니요. 환난은 오는데 오나 그 사람에게는 환난이 환난되지를 안해요. 환난이 환난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속에 실력있기 때문에. 뭐 다 같이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지마는 약한 자가 그 쌀 한 가마니에 치어죽지 힘센 사람이야 그 쌀 한 가마니 지는 건 무슨 문제가 있겠소? 더 힘센 사람은 쌀 한 가마니 들고 가도 들고 갈 거니까 그게 무슨 문제가 있겠소? 자기 실력을 길러서 실력을 길러서 어려움이 어려움 안 되는 것이지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을 길러서 어려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권찰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