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2:26
인내의 말씀-빌라델비아교회
본문 : 계 3:10-11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교회는 약한 교회라 했습니다. 연약한 힘을 가진 교회라. 그러나 일곱 교회 가운데에 제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힘있는 교회가 됐습니다. 연약한 힘을 가진 연약한 교회로서, 제일 연약하다고 이렇게 발표하신 연약한 교회인데 또 제일 칭찬받는 강한 교회가 됐습니다. 그러면 제일 연약한 교회가 제일 강한 교회가 줬다 하는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색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얼마나 강한 교회가 됐는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노니 아무도 닫지 못하리라"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닫지 못하리라" 그러면 그가 가는 그 걸음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또 "네가 성전 기둥이 되리라." "천하에 임하여 시험하는 모든 시험을 다 네가 이길 것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천하 사람을 시험한다 말은 신약시대 전체를 말한 것인데, 신약 시대에 있는 성도들은 자기 현실 현실이 자기를 시련하는 현실이요 또 가르치고 배우고 굳게 세워 갖추게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다 네가 감당하게 되리라.
성전 기둥이 되리라, 모든 새 것은 다 네것이 되리라. 새 예루살렘도 네것, 내 새 역사도 네것, 아버지도 네것,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네것이 되리라. 또 네 앞길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이것을 우리가 참 알고 행하면 지름길로 질러 가는 일이 되겠습니다.
연약한 힘이라, 연약한 힘을 가진 빌라델비아교회라. 그랬는데 가 장 힘있는 교회가 줬다. 그 뭣 때문에 됐느냐? 발표를 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모든 것을 지켜 이루게 하겠다" 이랬습니다.
인내의 말씀이라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인내의 말씀입니다. 인내라 말은 참고 견딘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든지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에 별별 애로가 다 있고 굴곡과 마찰들이 있습니다. 너무 좋아서 어려움, 또 고통스러워서 어려움, 너무 싱거워서 어려움, 너무 지루해서 어려움, 별별 종류의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인도한다는 것, 자기 기분에 좋은 대로도 하지 못하지, 기분 나쁜 대로도 하지 못하지, 자기 욕심 대로도 하지 못하지, 또 자기 하기 싫다고 안 하지도 못하지. 이렇게 모든 것을 조절해서 치우치지 않고 중성이 되도록, 중용이 되도록 이렇게 하는 이 일을 하는 그것이 사막을 무난히 통과하게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은 좋아 죽고 나빠 죽고,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죽고 하고 싶은 대로 못해서 죽고 그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하나 무엇이든지 작정하고 지키려고 하면 이런 별별 애로들이 마찰들이 방해들이 유혹들이 많이 있으나, 이 일 닥치면 그만 집어던지고 또 새로 시작하고 또 저 일 닥치면 집어던지고 새로 시작하고 이렇게 하는 이것은 제가 아무리 강하고 위대해도 소용없고 아주 연약한 힘이지마는 한번 작정한 그것을 변함없이 계속했기 때문에, "내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너에게 말하는 명령은 그만 한 시간 지키고 말고 하루 지키고 말고 찬 달 지키고 말고 일 년 지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거들에게 말한 이 말은 계속 지켜야 하는 것인데 너거가 계속 지키는 요것을 힘을 썼기 때문에 연약한 빌라델비아교회지마는 가장 칭찬받은 위대한 강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지극히 작은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지극히 작은 것 하나 결심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게는 요것이 흠점이다. 내가 이런 습성이 있는 요 못된 습성 있는 요것이 지금 흠점이다.' 자기 습관 자기 버릇, 습성을 하나 고치든지, 또 자기중심으로, 언제든지 비판이나 평가나 자기중심으로 하는 그 자기중심이라는 이것을 하나 고치기로 하든지, 악령이 미혹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령이 미혹주는 옛사람으로 사는 걸 자기가 알 수 있는데 영과 영을 구별해 가지고, 성령과 악령을 구별해 가지고서 '악령 이놈에게는 내가 미혹받지 않겠다' 한다든지, '내가 욕심 가운데에 이런 욕심 저런 욕심 다 있지마는 다른 욕심 다 냅두고 요 욕심 하나를 내가 기어코라도 요 미혹을 받지 않고 요 욕심 요놈을 내가 싸워서 이기겠다' 하는 것이라든지, 무엇이든지, 힘이 없으면 제일 처음에는 자기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 자기가 넉넉히 '이거야 못 해?' 할 수 있는 그런 일 하나 작정해 놓고 그걸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고, 그걸 계속하든지, 또 자기는 제법 구원을 이루어 나왔으면 자기에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세 가지 있는 사람, 두 가지 있는 사람, 한 가지 있는 사람, 참 바울 같은 이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기를 깨끗하게 정리한 사람들도 있고, 자기가 혹 주님이 섭섭해 하시는 것 하나나 둘 있는 사람 있으면 그것을 하나 착수를 하고, 너무 그런 것이 많으면 다 내비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하나 딱 결정지워 놓고 그것을 변동하지 말고 계속을 하면 마침내, 연약한 힘 가지고 큰것이야 달려들었겠습니까? 아주 쉬운 것 달려든 이 빌라델비아교회, 할 수 있는 것 쉬운 것 그것 하나 작정해 놓고 실행을 하다 보니까 차차 차차 그것이 자라서 하나님이 책임지는 여기에까지 도달해서 이제는 "네가 연약한 힘을 가지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않고 내 말을 지켰도다" 이랬습니다. 여기에까지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허영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 허욕의 종교가 아니오. 할 수 있는 길, 수천 미터의 산을 네가 당장에 날아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한 자욱씩 또박또박 걸어가면 갈 수 있는 요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길, 갈 수 있는 그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고 요구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며칠 전에 '하나 작정하자' 했는데 그것을 또 우리가 잊어버린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너무 시작했다가 자꾸 넘어지니까 그만 낙망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다시 잡읍시다. 다시 잡고, 낙망도 하지 말고 넘어졌으면 일어서고 넘어졌으면 일어서 그것 하나를 지켜 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 하나를 지켜 나가면 나중에 가서 보면 그것 하나 지켰는데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 되어집니다. 그것 하나 지키려고 하면 거기에 요 계명에 거리끼는 그걸 딱 가지고 그것 때문에, 그게 들어서 그것을 지키지 못하게 할 때에 그것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그 계명도 지키게 됐고 그 면도 이기게 줬고 해서 그 하나 놓치지 않고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모든 것을 지키고 이기게 되는 그런 결과가 맺어지도록 하나님이 기묘하시게 역사를 합니다.
우리 환경을 만드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무엇이든지 하나를 지키려고 그것을 딱 결심을 하고 나니까, 연습을 합니다. 이 시간도 다음 시간도 지키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는 거기에 적당하게, 그걸 지킬 때에 환경에 요게 들어서 방해를 하도록 합니다. 그걸 지키지 못하게 방해를 하도록 합니다.
요게 들어서 방해를 하도록 할 때에 그 방해 그것을 이기다 보니까 또 그 계명을 지킨게 됐습니다.
하나 자기가 무엇을 결심을 하고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사람이 가족이 들어서 그걸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족이 들어서 그걸 지키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요것 지키기 위해서 '내가 이제까지 지켜 나왔는데 가족이 들어서 이걸 지키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내가 안 지킬 수 있겠느냐?' 그걸 지키다가 보니까 나중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하는데 가장 미혹이 많은 거기에 지키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돈 문제를 걸어 줍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만들어 우리를 이렇게, 하나만 결심하면 그를 통해서 모든 걸 지킬 수 있도록 요렇게 조화붙여 가지고 환경과 주위를 몰아서 섭리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세밀하게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말하 기를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을 때는 태 안에, 어머니의 태 안에 싸여 가지고 자라는 것처럼 이 세상은 주님의 사랑의 태 속이다. 어머니 아닌 것이 없고 어머니가 나를 길러 주는 태가 아닌 곳이 없다.
아닌 때가 없다.' 이렇게 다 간증을 했던 것입니다.
요 하나를 지키려고 하면 그 지키는 힘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자기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 하나를 지키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하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이 하나가 기억이 납니다.
기도하지 못하면 이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면 하나를 지킬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이 하나를 지키지 못하고 실수한 것을 찾지 못합니다.
기도해야 이 하나를 자기가 생각도 하고,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고, 또 지키지 못한 것도 또 알게 되고, 지킬 힘도 나오고, 지금 계속 지키도록 노력도 나오고, 알고 지키려 하면 그만 쉬운데 그만 이런 미혹에 빠져 가지고 실패한다 그거요.
그 쉬운 것 지키는 거기에 만능의 성공이 있으니까 그것 뭐 참 얼마나 쉽게 얻는 것입니까? 이렇게 쉽게 얻는 것이지마는 악령은 요것 알기 때문에, 그 쉬운 것 그것 하나 지키다 보면 모든 것을 성공한다는 요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 하나를 지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요런 미혹으로, 조런 급속으로, 조런 비상으로 요렇게 해서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럴 때 그런 것을 마귀가 와서 그렇게 해도 그것 하나를 알고 '아, 요걸 내가 지켜야 되겠다' 하면 지키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못 지킨다 말이오. 알고 지키기만 하면 그것 하나 지키다 보면 모든 게 됩니다. 이러니까 그걸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계속 지킬 마음을 가지고 또 잘못 지켰으면 그것을 깨달아서 '아, 못 지켰다.' 요것을 찾게 되고 새로 시작하게 되고 하는 것이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주님하고 이래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하고 서로 만나기에 주님을 만나면 우리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모든 것이 밝아지고 정신이 까랑까랑해져 버리고 모든 것을 정평 정가해서 암만 바빠도 '요것 지키는 게 크다.' 이걸 알지마는 주님 만나지 못하면 그것보다 큰 일이 많고 급한 일이 많기 때문에 그까짓 거야 그만 집어던져 버리고 크다 싶어서 갔습니다. 크다 싶어서 딴데로 갔지마는 실은 자기는 전능을 뺏겼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도 자기가 며칠 전에 작정한 그것을 다시 찾아서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지켜 나오는 사람은 계속 지키도록, '그것이 뭐 가치없는 일인데 꼭 그것 지킬 것 뭐냐?' 아닙니다. 그것 하나를 꼭 지키려면 제가 기도해야 되지 지키기 쉽다 하는 사람은 지켜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것 하나 지키려고 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을 잊어버렸으면 다시 또 새로 작정하고 계속해 지키면 계속해서 낙망 말고 지키십시오. 왜? 그게 작은 것 아닙니다. 그것 지키면 천하를 얻습니다. 영계도 얻습니다. 하나님도 얻소. 그런고로 너무 그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지 말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그것 하나를 지키도록 하십시오.
또 어떤 사람은 벌써 며칠 전이 아니라 얼마 전에, 몇 해 전에, 몇십 년 전에 무엇을 하나 작정해 놓고 지키는 그런 사람들도 있으리라 합니다. 그런고로 그것을 찾아 가지고 다시 지키고, 지키는 데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들도 보면 아홉시 열두시 세시에 기도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 기도했다.
세 번 기도한 그 세 번 기도만 하고 잊어버린 게 아니고 세 번 특별히 기도하는 것은 기도 시간에서 기도 시간까지 이을 수 있는 그 힘을 얻고, 하나님과 이렇게 친근해지니까,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만나서 친밀해지면 친밀해진 그 정이 며칠 가는 수도 있고 몇 시간 가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 모양으로 하나님 만나서 아주 영교가 친밀해지면 그 영교 친밀이 또 몇시간 갈 수 있다 말이오.
그래도 한 너덧 시간 지나가면 또 안 되니까 '아이구, 또 기도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하다 보니까 하루 세 번씩 기도하게 됐다, 사도들도 세 번씩 기도하게 됐다. 다니엘도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내가 보니까 새벽기도를 꼭 나오던 사람들이 안 나오는데, 계속 나오던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 있는데 구역장은 그런 걸 살피지 않고, 구역장들이 어떤 사람은 일을 거꾸로 디디하게 합니다. 주님이 밉상스럽게 그렇게 합니다.
밉상스레 보도록. 왜? 교회 출석만 하면 그만이오. 숫자 위주의 그것 못씁니다.
그것도 중하지만 그것만이면 안 됩니다.
새벽기도 나오던 사람이 안 나오면 그 벌써 죽습니다. 그게 하나 죽으면 그다음에 그보다 조금 못 믿는 게 죽소. 또 그게 죽으면 그 다음에 그보다 조금 못 믿는 게 죽습니다. 자꾸 거꾸로 죽어 나가요.
이러니까 자기가 맡은 식구의 신앙의 정도를 알아야 됩니다. 어데까지 와 가지고 지금 노정에 와 있다 하는 그걸 알고, 후퇴는 안 됩니다. 후퇴하면, 아주 제일 최고봉에 올라갔던 사람이라도 후퇴하면 즉시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앙 걸음은 자전차 걸음이라, 두 발 자전차 걸음이라.' 두 발 자전차 걸음은 그만 이렇게 가다가 서면 넘어집니다. 빨리 갈수록 힘이 있습니다. 세게 달릴 때는 옆에 사람이 발길로 옆에서 탁 차면 넘어갈 줄 압니까? 안 넘어갑니다. 그대로 갑니다. 그러나 느리게 가는 거야 건드리면 툭 넘어가지요. 서면 넘어가. 또 후퇴는 안 됩니다.
이러니까 자기 맡은 식구 '저 사람은 새벽기도 나오던 사람이 새벽기도 안 나온다' 새벽기도 안 나오면 주일 지키던 사람이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이나 꼭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살피고 그 정도로서 후퇴를 못 하도록만 하면 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