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

 

1986. 4. 4. 금새벽

 

본문:창세기 13장 8절∼10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양성원에 학생들이 이번 주간은 사학 공부를 하는데 대단히 좋은 필요 있는 공부를 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한 삼십여 년 전 근 사십 년 전부터 늘 말하기를 공부를 시킬라거든 사학이나 법학을 시켜라 그것을 늘 주장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말을 듣고 사학 공부 한 사람들이 많고 법학 공부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에 깨달음이 지금도 갈수록이 더 생생해지고 정확해지고 옳다고 인정이 되어지고 변동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 공부를 할라고 하면은 그 두 가지가 제일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 하는 것은 다 뭐 때문에 그라는가 하는 그것도 깨닫지도 못하고 어리석다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돈벌이 할 것만 생각합니다. 돈벌이 할 것. 이 두 가지는 사람에 대한 공부요 그 외에 다른 것은 전부 돈벌이에 대한 공부입니다. 물질과 사람의 가치가 차이 있는 것처럼 학문도 그러합니다.

뭐 때문에 사학을 하라 하는가? 사학은 자기의 시야를 좀 넓히란 말이오. 자기가 보는 면을 좀 넓혀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사물적으로나 모든 종별적으로 좀 조부랍지 말고 좀 넓게 봐라. 그래야 그 계산이 맞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소경이 돼 가지고 그만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거 지금 이 사학 공부를 하는데 중요한 걸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을 좀 넓혀야 되고 생각을 넓혀야 되고 견해를 넓혀야 되고 평가를 넓혀야 되고 비판을 넓혀야 됩니다. 이 시간에 가치 있는데 고 시간에 아주 허무하게 되는 것 많습니다. 이 시간에 허무한 것 같으나 그 다음 시간에 보니까 가치가 있는 것 많습니다. 그런 것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된 것을 그런 것을 그저 한 페이지에다가 기록해 가지고 그것을 이렇게 다 망라해서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좀 이 역사 공부를 해라, 교리사나 뭐 교회사나 그런 공부를 해 가지고 좀 자기 있는 데를 좀 넓히라 그 말이오.

율법 공부하라 말은 모든 사람들의 형형 색색의 그 모든 생활의 종류들을 다 망라해서 보고 인간의 그 다대수의 공통성을 좀 알아서 사람 공부를 하라 하는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 공부가 율법을 공부하는 것이 사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이종교학을 공부하는 그런 것은 다 치우쳐서 그거는 하나의 궤변에 지나지 못합니다. 철학은 저희들이 추측과 추론을 가지고서 아마 이럴 것이다, 이렇지 않겠느냐 추상 추론들을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종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분쟁을 일으킨, 크게 해독을 끼친 자 중에 어떤 자가 많이 끼쳤느냐 하면은 종교 창설자가 제일 많이 끼쳤고, 그 다음에는 철학자들이 해를 많이 끼쳤고, 껍데기로 그것들에게 이용당해 가지고서 심부름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정치가들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주간은 말한 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외식을 연구하라 하는 것을 제가 미리 말했습니다. 그것이 다음 주간 공부할 제목입니다. 뭐 제가 한 성구 읽어 놓고 해석하고 하는 그런 것은 다 굼벵이가 꾸불거리면서 기어가는 것이고, 기어가는 것이고 이제 외식에 대해서 네가 성경을 창세기 1장으로부터 계시록 끝장까지를 읽으면서 외식을 거게서 간추려 봐라 하는 것은, 이것은 성경 공부를 날아가는 것입니다. 날아가는 것.

이러기 때문에, 굼벵이 그것이 한 달 내내 가 봤자, 걸어 봤자 얼마 가겠습니까? 날아가는 것은 뻐뜩 날아갑니다. 그런 가속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게 아브라함과 롯에 대해서 이렇게 이 역사적인 이 사실을 읽고 거게서 외식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껍데기와 알맹이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껍데기 알맹이도 말했고 또 사람의 껍데기 알맹이도 말을 했습니다. 여게서 암만 읽어도, 알맹이 껍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거게 대해서는 착안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거게 대해서는 눈을 뜨고 그 면은 보지 못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 면 보지 못하면 그것도 다 헛된 것입니다.

외식은 뭐이 외식인가? 외식은 껍데기가 외식입니다. 껍데기가 외식. 외식의 반대는 뭐인가? 진실입니다. 껍데기의 반대는 뭐인가? 알맹이입니다. 외식은 거짓이라 말이오. 거짓의 반대는 참이라 말이오. 또 외식은 다 그것은 삐뚤어진 거라 그 말이오. 그것의 반대는 바르다 그 말이오. 또 외식과 같은 것들은 뭐이냐 하면은 헛된 것들이라, 허무한 것들이라, 또 참의 것이라, 또 외식과 같은 것들은 뭐이냐? 속는 것들이라, 또 바른 것이라, 또, 외식에 속한 것은 좋은 것 같으나 실상은 나쁜 것이라 그것의 반대는 나쁜 것 같으나 좋은 것이라, 외식은 자기를 해하는 것이라 진실은 자기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라, 외식은 자기를 실패케 하는 것이라 외식의 반대는 성공케 하는 것이라, 외식은 자기의 가는 길을 불통하게 하는 것이라 그것의 반대는 형통한 것이라, 외식은 수치스러운 것이라 진실은 영광스러운 것이라, 외식은 죽는 것이라 진실은 사는 것이라, 외식은 실패라 진실은 성공이라, 외식은 일시의 것이라 진실은 영원한 것이라, 이렇게 이 외식에 속한 것이 많습니다.

외식의 반대, 외식의 반대는 뭐이냐 이것을 생각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마다 이 양면이 있습니다. 양면이 있어서 레위기11장에는 쪽발로 걸어가라, 또 에스겔 1장에도 보면은 그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발은 송아지 발같다, 송아지 발 같다 이래 말했어. 송아지 발 같다 그 말은 다 쪽발이라 그 말이오. 쪽발로 걸어가라.

그러면, 도야지는 쪽발이지마는서도 새김질을 못 하기 때문에 그거는 더럽다. 또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마는서도 쪽발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 쪽발이요 새김질해야 된다 그렇게, 미개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알아듣기 쉽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김질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도리를 듣고만 말 게 아니라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도리를 자기의 과거와, 과거와 생각하고 자기 현재와 생각하고 자기의 미래와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리를 자기의 또 지식과 생각하고 자기의 행동과 생각하고 자기라는 사람과 생각하고 이제 하나님의 도를 이모 저모로 자꾸 생각해 가지고서 대조를 하고 비교를 해서 잘못된 것을 자꾸 간추려 나가는 그런 것이 다 새김질인 것입니다.

또, 이 말씀대로 하면은 어떤 마찰들이 일어날 건가, 이 말씀대로 하면 어떤 대적들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면 이 말씀대로 하면은 무슨 배경이, 무슨 사건이, 무슨 풍랑이, 무슨 환난이, 무슨 마찰이, 무슨 애로가, 무슨 난경이 있을 건가 그런 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 그게 새김질이라 그 말이오.

새김질하고, 쪽발로 걸어가야 된다. 쪽발로 걸어가는 거는 여게는 보자. 어떻게 하면 인본이며 어떻게 하면 신본이며 어떻게 하면 세상주의며 어떻게 하면 천국주의인가, 어떻게 하면 내 주관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인가, 어떻게 하면 성공이요 어떻게 하면 실패인가, 어떻게 하면 수치고 어떻게 하면 영광이 될 건가, 어떻게 하면 일시적이며 어떻게 하면 영원적인가, 어떻게 하면 거짓이며 어떻게 하면 진실인가, 어떻게 하면 껍데기며 어떻게 하면 알맹이인가? 뭐 이게 많습니다. 한없습니다.

이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에 이것도 쪽발로 읽어야 되고, 알기 쉽게 그렇게 하나님이 기억하기 쉽도록 그렇게 해 놨다 말이오. 쪽발로 읽어야 되고, 쪽발로 연구해야 되고, 또 새김질로 자꾸 하나님 말씀을 상관을 가져야 된다 그거요, 새김질로.

이게 아니면 저겁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의 말도 많고 하나님의 말씀도 많은데 이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가득 찼지마는서도 그 수많은 말들이 많지마는 수많은 말들을 딱 쪼개면 두 쪼가리 됩니다. 하나님 말씀도 두 쪼가리요 이 세상 말도 두 쪼가리입니다. 똑 쪼개면 두 쪼가리요.

두 쪼가리인데, 크게 나누면은 하나님 말씀과 사람 말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은 그것은 다 진실에 속했고 생명에 속했고 영원에 속했고 완전에 속했고 유익에 속했고 그거는 불변에 속했고, 그러면 그와 반대인 세상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외에 세상 말들이 있는데 세상 말 그거는 그라면 그것도 또 두 쪼가리인가? 그것도 두 쪼가리입니다.

두 쪼가리로 말하지마는서도 요게서 보면은 요것보다는 요게 유익하고, 또 요것보다는 요게 편리하고 요 두 쪽 같지마는 고 고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고게서 두 쪽만 취하기 때문에 자꾸 두 쪽만 취하는데, 거게서 두 쪽을 취하는데 크게 강령적인 큰 두 쪽을 깨닫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있다. 두,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있다.

지식이 있으면은 하나님의 지식에는 두 쪽 있는 그것이 영원한 두 쪽이지마는서도 인간의 지식은 옳다 나쁘다 하는 것이 이거 많은데 그것만 받고 자꾸 이래 돌아다니는데, 나중에 실컷 가 가지고서 보니까, 가 가지고 보니까 그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지식과 둘을 비교하면 전부가 사망이요 다 삐뚤어진 것입니다. 전부 삐뚤어진 것이오. 요 말 알아 듣겠습니까? 삐뚤어진 것이라.

이러니까, 이 크다란 근본 이 지식이라는 전체에서 나눠 가지고 나눈 그 면을 보고 생각하고 깨달은 사람이 말하기를 지식은 두 가지 지식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배암의 지식 두 가지 지식이다. 배암의 지식이라 하면 사람들이 좀 섭섭해서 분개할 상 바르면은 그만 사람의 지식이라. 그러나 실은 그것이 배암의 지식이라. 타락한 후에는 배암이 사람을 주관하고 사람은 배암에게 주관을 당해 가지고서 악령 그놈이 우리를 미혹시켜서 우리 마음을 악성을 만들었고 또 악령과 악성이 우리 행동을 악습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근본 큰 데 가서 나누니까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이다.

그러면 거게서 보니까 하나님의 지식은 전부 생명의 지식이요 사람의 지식은 전부 사망의 지식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살리는 지식이요 사람의 지식은 전부 죽이는 지식이다. 인제 거게서 말하는 거라. 근본에서 말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거게서 내려와 가지고 사람 지식 속에 파묻혀 가지고서 이래 보면서 ‘여게도 생명도 있고 또 사망도 있고 여게도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그렇게 하기 쉽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범위를 잡아서 이 범위에 아주 말단에 가서 하는 것도 있고 저 궁극적인 면에 가서 말하는 것도 있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때에 이 성구는 범위를 어디다 뒀는가? 그걸 짐작 못 하면 헛일이라.

그거는 예를 들면은 측량하는 사람이 말이오. 측량하는 사람이, 이 지방은 측량할라면은 이 지방을 측량할 때는 여게 제일 기점을 어데다가 뒀느냐, 제일 기점을 어데다 두고 거게서부터 풀어나갔느냐, 그 기점을 바로 찾지 못하면 그 측량은 전부 헛일입니다. 고걸 바로 찾아야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은 자꾸 여러분들을 자꾸 넓히는 말입니다. 자꾸 넓혀서 조부랍지 말고넓어져라. 커져라.

사람이 제일 원수가 뭐이냐 하면은 자기가 원수입니다. 자기가 원수인 거는 왜 자기가 원수인가? 자기는 자꾸, 자기로 들어가면은 자꾸 좁아집니다. 자꾸 자기를 좁게 만들고 함정으로 몰아 넣는 것이 자기요. 함정으로 몰아 넣는 게 자기요. 또 자기 말고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자꾸 넓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은 자기가 넓어지는데 얼마나 넓어지는가? 넓어지기를 얼마나 넓어지는가? 넓어져 봤자 피조물 넓이밖에는 안 됩니다.

피조물 넓이밖에는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제 넓어질 대로 다 넓어진다 말이오. 무한하게 넓어지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면을 생각하고 깨닫는 사람의 그 깨달음과 이 면을 보지 못하고 깨달은 사람의 깨달음이 모든 깨달음이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은 그 사람은 요 피조물 중에도 요거는 잔디 박사다. 잔디, 요거는 잔디 박사다, 이거는 또 어떤 세균 박사다, 이거는 콩 박사다, 이거는 팥 박사다, 이거는 또 뭐 석류 박사다, 그런 박사가 없는 줄 압니까? 그거 하나 가지고 먹고 사요. 박사인데, 뭐 그런 조부라운 것 고것만, 고것만 가지고도 자꾸 나가서 고렇게만 나가는 그런 것도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자기가 보고 듣고 또 욕망하고 하는 데에서 자기가 넓어지고 좁아지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보고 듣고 욕망하기를 사람들은 뭐를 듣고 보고 하는 그것이 목적이 어데 있느냐?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읽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전부가 다 그의 향방이 어데 있는가, 그의 소망이 어데 있는가, 그 소망이 어데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 그 소망이 어데 있습니까? 그게 다 전부 자기에게 있소. 이래 가지고 배우는 것도 자기, 가르치는 것도 자기, 듣는 것도 자기, 읽는 것도 자기, 생각하는 것도 자기, 어떻게 하면 나를 좀 좋게 할까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 중심 악성이라 그 말이요, 악성.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선성이었는데 타락한 후에 악성이 됐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선성이라 말은, 사람은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의 그 본성을 가졌더랬는데 타락한 후에는 이제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것이 됐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모든 것을 할 때 자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유익되고 전부이 자기 자기 자기 이라다 보니까 자꾸 이제, 두 사람이 있어도 자기, 또 자기에게 대해서도 자기 몸에 대해서도 더 자기에게 더 유익한 것, 자기 이 지체이지마는서도 지체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더 유익한 것 덜 유익한 것, 더 필요한 것 덜 필요한 것 자꾸 이렇게 좁혀 들어들어가니까 자기에게도 그 가치가 더 있고 덜 있는 것이 있으니까 덜 있는 거는 취급 덜하고 더 있는 건 취급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자꾸 좁아져 들어가서 아주 반디 속 같은 함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모든 견해가 다 그래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무슨 비판하든지 평가하든지 할 때에 그 정평 정가를 하지 못하고 그 비판과 평가가 다 좁아지고 삐뚤어지고, 좁아지고 삐뚤어지고 하는 그것이 뭐 때문인지 압니까? 뭐 때문에 좁아지고 삐뚤어집니까? 자기 때문에 그런 거라, 자기 때문에.

그러기에, 구름 같은 간증자들이 둘러 있다 하는 그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고 갔습니다. 살고 갔는데, 현재에 사람들이 어떤 그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천 년이 지나간 그 사건과 백 년이 지나간 사건과 또 십 년이 지나간 사건과 또 현재 닥친 사건과 또 자기에게 닥친 사건과, 그러면, 꼭 같은 사건입니다.

꼭 같은 사건인데, 그러면 그 사건을 천 년 전의 것을 자기가 비판하고 평가해 보고, 백 년 전의 것을 생각하고 비판해 보고, 또 서양 것을 생각해 보고 동양 것을 또 생각해 보고, 또 자기 시대의 것을 또 생각해 보고 또 자기 가정에 그런 일이 있는데 그걸 생각해 보고, 또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쳤는데 생각해 보고 할 때에 어떤 것을 제일 정평 정가를 할 수가 있는 줄 압니까? 어떤 것을 제일 정평 정가가 되지요? 그래. 그것은 자기와 거리가 멀수록, 자기와 상관이 멀수록 거게 대해서 정평 정가가 됩니다. 이러기에, 자꾸 여러분들 넓어지라고 지금 하는 소리야, 내가.

거게서 자기와 관계가 상관이 멀고, 시간적으로 멀든지 공간적으로 멀든지 무슨 관계적으로 멀든지 이해적으로 멀든지 무슨 정적으로 멀든지 자기와 관계가 멀수록 그것이 정평 정가가 되고 차차차차 가까와 올수록이 그것이 정평 정가가 어두워집니다. 어두워져 가지고서 자기에게 딱 당면한 일이면 그것은 사람들이 짐작을 못 하고 정평 정가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는데, 잠깐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왜 그러냐? 아무 상관없는 자기와 상관없는 시대의 일, 자기와 상관없는, 저 관계 없는 멀리 갈수록이 그 일은 보면은 그거는 틀렸다 옳다, 틀렸다 옳다 이렇게 정평하는데 자기에게 가까이 올수록이 거기서 간주가 붙습니다. 단서가 붙어, 단서가. ‘그렇지마는’이 붙습니다. ‘그렇지마는’이 붙어 가지고 자기에게 오면은 그렇지마는이가 ‘안 된다’ 이것이 붙어 버리고 만다 그거요.

그런고로, 번연히, 다 그래요, 아무라도. 다윗에게 나단 선지가 와 가지고서 말하기를 양 한 마리 있는데, 저거 집에서 양이 수천 마리 있는데 남의 집에 양 한 마리 있는 것 그놈을 잡아서 먹고 저거 집에 있는 양일랑 살려 두고 잡아 먹었다 이라니까 ‘그거 어찌 해야 됩니까?’ 이라니까 다윗이 `그런 놈은 당장 죽여야 된다’ 이랬다 말이오. 당장 죽여야 된다 이랬는데, 그래 나단 선지가 ‘그게 내나 왕입니다.’ 이래 놨다 말이오. 우리야 아내 범죄를 경고할 때에.

남의 일로는 그거는 정평 정가를 했지마는 제게 닥치면 어두워지는 거라.

이렇게 사람이 어두워지는 것이 자기 때문에 어두워지고, 사람이 좁아지는 것이 자기 때문에 좁아지고, 사람이 실수하는 것이 자기 때문에 실수하고, 사람이 자기를 망치는 것이 자기가 들어서 자기를 망치고 이 자기가 전부 고장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고장 이것을 철학가들도 좀 깨닫고 나서 이걸 ‘안 되겠다.

이거 자기라는 이게 원수다. 이러기 때문에 자유하는 데는 무아주의가 돼야 된다.

자기를 부인해서 자기가 없는 무아주의가 돼야 된다.’ 이것이 불교라 말이오.

불교에서 무아주의를 말하고 있는 건데, 암만 해 봤자, 나벼봤자 내나 죽은 속에는 나벼봐도 그거 죽은 것만 나오지 뭐, 모래, 모래 가마니 속에서는 암만 뒤벼봤자 모래 나오지 거기서 뭐 쌀이 나오겠소, 어데?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지식이라는 것은 나벼보고, 시야가 넓어서 온 세상 지식이라는 걸 다, 넓어서 이래 보니까 보면 그 속에는 사망뿐이라 말이오.

그래서, 후란시스는 자기가 이 세계를, 우리는 경험해 보고, 십 년 이십 년몇십 년 경험해 보고 아는데 그분은 경험해 보지 안하고 책상 위에서 계산해 봤다 말이오.

책상 위에서 계산을 이와같이 해 보니까 책상 위에서, 인간이 일생 동안 살아보고야 아는 그 모든 것을 책상 위에서 한시에 딱 계산해 가지고 다 그 수지 계산을 딱 결산을 딱 냈다 말이오.

결산을 내고, 자기 이 가정이라 하는 문제는 동굴에 앉았다가 나와 가지고, 눈이 오니까 나와 가지고 눈을 가지고 사람 만들어, 크다랗게 만들어 요거는 우리 마누라, 요거는 우리 큰아들, 요거는 큰딸, 또 전부 이래 쪽 만들어 놓고서 조금 있으니까 햇볕이 드니까 싹 녹아 버리거든. 인제 마누라도 죽고 아들도 죽고 딸도 죽고 다 죽어 버렸다.

이제, 그런 걸 가지고서 모두 다 이 자연이 가르치고 있는, 자연이 가르치고 있는 그 가르침을 직접으로 받아 들이고, 사람은 일생 동안 한 근 칠팔십 년 살아야 사는 그걸 책상 위에 앉아 가지고서 계산해서 그 계산을 다 이렇게 계산 맞춰보고 난 다음에 이제는 나는 영원하신 주님으로 더불어 결혼하고 이제 주로 더불어 짝이 돼 가지고서 산다. 그라고 일생 동안 그대로 성자로 지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그런 소리를 했지마는서도 몰라. 그 는데, 우리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 그러면 십자가 지라 말은 십자가는 뭐가 십자가인고 하니, 십자가는 무슨 고통이 십자가인가? 자기가, 우리 고통되는 것은 두 가지 고통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깨끗게 하는, 깨끗게 하기 위해서 고통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게 하기 위해서 고통당하는 고통이 있으니 그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이 아닙니다. 자기를 깨끗게 하기 위해서 고통당하는 거는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요 그거는 회개의 고통이오. 고통이고, 십자가의 고통은 이제 자기를 깨끗게 해 가지고, 깨끗게 해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이 그것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했느냐 하면은 자기를 거룩하게 한다 이랬어. 예수님이 자기를 거룩하게 어짜든지, 근본부터 죄가 없으시지마는서도 자기를 깨끗이 깨끗이 이래 거룩하게 해 가지고서 이제 십자가 지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순전히 보내신 아버지를 위하고 아버지의 소원인 이 피조물을 구원하는 그 일을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이 그게 십자가의 어려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 말은, 자기 부인하라 말은 자기를 깨끗게 하라 말이오. 자기 부인하라 말은 자기를 깨끗게 하라 말이오. 자기를 깨끗하게 해 가지고서 십자가 질 만한 그 자격을 만들어 가지고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 지는 거는 너를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소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너는 구원할라고 하면은 어려움을 당한다. 그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어려움이 영생이니까 그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어려움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말은 끝마쳤다 말이오. 이거 모양으로 너도 이것으로서 끝을 맺어라 하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게서 외식은 어떤 것이라 알맹이는 무엇이라. 이거 우리 앞에는 반드시 두 길이 있습니다. 두 길이 있다는 걸 알아야 돼. 여러 길로 해석하면 좋은 줄 알아도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 말아요. 걸어갈 때는 반드시 쪽발로 걸어가라 그 말은 이게 아니면 이거다 이게 아니면 이거다 그만 둘로만 생각해야 돼.

둘로만 생각해야 되지, 이게 아니면 이거다. ‘그렇지마는 거게 뭐도 있지 않느냐?’ 그렇지마는이 헛일입니다. 거기서 간주를 붙이지, 단서를 붙이지 말아요. 좌 아니면 우, 생명 아니면 사망, 인본 아니면 신본, 성공 아니면 실패, 거짓 아니면 참, 이 둘로만 비판해서 가야 되지 그렇게 하지 안하고서, 이것도, ‘참이 아니면 거짓’ 거짓에 `거짓에서도 뭐 있는 게 아니냐? 거짓에도 뭐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거짓에도 뭐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그거는 틀렸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둘로만 생각하라.

가르쳐 보면은 별 사람 다 있어. 가르쳐 봐도 안 되는 사람 있어. 그거는 세월에게 맡겨 버려야 돼. 세월에 맡기면 저절로 그게 알아진다 그 말이오. 어떤 사람은 꼭 요게 있으면서도 반동적인 인물이 있어요. 반동적인 인물 있어.

반동적이며 반항적인 뭐,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하면 ‘그렇지마는 거게 반대되는 게 없느냐?’ 항상 반대적으로 생각하고 반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이거는 쌀가마니다. 이거는 쌀가마니다. 이거는 흙가마니다.’ 이러면 ‘쌀가마니라?' 이라며 자꾸 찾아 보니까 돌이 한 개 나옵니다. ‘돌이 나오는데 쌀가마니라?’ 이 말 알아 듣기가 어려울 것이야.

또, ‘이거는 흙가마니다.’ `흙가마니라니?' 주 나벼 가지고 어째 쌀이 한 개 나왔다 말이오. ‘쌀이 나오는데 흙가마니라?’ 이렇게 하는 그 사람은 아예 그러면 그걸 손을 떼고 냅둬야 됩니다. 암만 가르칠라 해 봐야 안 됩니다. 그거는 하나님께 맡겨 두고, 고만 하나님께 맡겨 두면 세월이 가면은 그게 인제 나중에 가 알게 된다 그거요.

이렇게 우리 앞에는 이 두 길이 있는데 내가 성경 보는 것과, 성경 보는 것도 반드시 그 성경에 껍데기 알맹이가 있습니다. 그 알맹이와 껍데기가 있으니까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해야 될 것이고, 불통을 버리고 형통을 취해야 될 것이고, 실패를 버리고 성공을 취해야 될 것이고, 손해를 버리고 유익을 취해야 될 것이고, 죽는 걸 버리고 사는 걸 취해야 될 것인데 이 두 길이 있으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겠습니까? 성경에 보면은 이 주장을 해 나간 사람도 있고 이 주장을 해 나간 사람도 있고, 그 롯과 아브라함은 둘이 우리 믿음의 조상인데, 고게도 또 둘이라 말이오. 롯과 아브라함이 있으니까 롯은 이 길 취했고 아브라함은 이 길 취했으니까 롯이 취한 거는 외식이요, 껍데기요, 죽는 길이요, 망하는 걸이요, 속는 길이요, 속이는 길이요, 불통의 길이요, 거짓 길이요, 헛된 길이요, 실패의 길이요, 수치의 길이요, 이 아브라함 길은 그와 정반대의 길이라 그거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껍데기 알맹이를 자꾸 가르쳐 놨다 말이오, 껍데기 알맹이를. 그래서, 나는 회개하는 세례를 주지마는서도 성령으로 세례 준다.’ 그거 알맹이고 회개하는 세례는 껍데기라 그 말이오. ‘타작 마당을 깨끗게 해 놓고서 이제 키로 가지고 까불터인데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덩이는 다, 꺼지지 않는 불에 다 태운다’ 이 모두 다 알맹이 껍데기를 말해 놨다 말이오.

또, 사람의 말도 들을 때에, 사람 말을 들을 때에, 사람 말을 듣습니다. 말을 들을 때에 몇 가지로 구별해야 됩니까? 몇 가지로 구별해야 됩니까? 단단히 따라와요.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됩니다. 사람 말을 들을 때에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됩니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되는데,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되는데,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되는데, 그러면 고것만 두 가지로 구별하면 됩니까?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되는데 어데서부터 구별해야 됩니까, 사람 말을 들을 때? 어데서부터?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말을, 요 말을 들으면 이거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인제 그 사람 말을 들을 때 사망이냐 생명이냐 거게서 구별을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 말을 들을 때에서는 어데서부터 구별을 시작해야 되지요? 한번 대답해 봐요. 여기 저 학교 선생.

어데서 구별해야 돼? 사람 말을 들을 때에 구별하면 어데 구별해야 돼? 어데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사람 말을 들을 때에 이거 죽이는 말이냐 살리는 말이냐 이걸 지금 구별해야 되겠는데 어데서부터 시작해야 되지요? 그래. 구별할 때에 사람 말을 들을 때는 구별을 해야 되는데 제일 근원, 구별해서 자꾸 내려가야 되겠다 그거요.

이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사람의 말이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 성령의 말씀이냐 배암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이냐 배암의 말이냐 그것부터 구별해야 돼요. 사람 말을 들을 때는 배암의 말이냐 하나님 말이냐 그것부터 구별해 가지고 그러면 거게서 배암의 말인데도 거게 하나님의 말이 그 안에 섞여 있다 말이오. 이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도 있고 사람 말도 있고 두 말이 섞여 있으면, 섞여 있을 때에는 하나님 말은 듣고 사람 말은 안 듣는다 그거요.

다리오 왕 치하에 있었는데, 다니엘이 다리오 왕 치하에 있었는데 다리오 왕이 하는 말은 다 듣습니다. 다 듣소. 들으면서 거게서 그 다니엘이 듣는데 한번도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말하면은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오만 것 다 잘 들었는데 한 달 동안은 다른 데 기도하지 말고 다리오 왕만 생각해라, 향해라, 기도해라 이랬는데 고 말은 왜 안 듣습니까? 고 말은 왜 안 듣소? 다니엘이 왜 안 듣소, 고거 말은? 예? 배암의 말이기 때문에 안 들어. 고만 그래 생각하면 쉬워. 배암의 말이기 때문에 안 들어. 고때는 다리오 왕의 말을 그랬는데 배암의 말이기 때문에 안 들었다 고만 고라면 제일 맞아요. 배암의 말이니까 안 들었어.

그러면, 이제까지 들은 거는 뭐 뭐인고? 이제까지 들은 거는 배암의 말 아닌가? 이제까지 들은 것은 다리오 왕이 말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다리오 왕을 종으로 잡아 부린다 했거든. 이러니까 종으로 부려서 하나님이 다리오 왕을 통해 가지고서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한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라.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을 때 하나님 말이냐 사람 말이냐 요 두 가지를 구별해 가지고, 내치 하나님 말만 하더니마는 갑자기 배암의 말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한 달 동안 기도하지 말아라’ 이거 배암의 말이라. 딱! 안 된다고 이래 버렸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관직에 있어도, 관직에 있어 이거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배암의 말 듣기 때문에, 배암의 말은 뭐라 했습니까? 배암의 말은 뭐하는 말입니까? 배암의 말은? 속이는 말, 또? 거짓말, 또? 죽게 하는 말, 망하게 하는 말, 자기 앞길이 막히게 하는 말, 자기를 꺾어지게 하는 말, 수치스럽게 하는 말, 자기에게 손해케 하는 말, 절단나는 말, 자기를 끌어내리는 말 이게 전부가 말이지요. 배암의 말은 이 말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 말 들을 수가 없거든.

요걸 알아 가지고 배암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요것만 둘로, 여러 가지 말고 요것만 구별해요.

요것만 구별해 가지고 이래 하면 요새, 우리 기독자들 가운데에서, 우리 한국에서도 지금 정권을 누가 잡느냐 하고서 자기가 정권 잡을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애를 쓰고 있는데 이제 아침에 말한 대로 그 사람은 이 하나님 말씀이냐 사람의 말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사람의 뜻이냐, 하나님의 인도냐 사람의 인도냐, 하나님의 생각이냐 사람의 생각이냐? 요거 둘만 구별하면 정계에 나갔으면 당장 대통령이 된다 말이오.

이랬는데, 내가 언제 말 들으니까 주일날 와 가지고서 시민 회관에서 뭐 했다더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와 가지고 말이지, 정권 잡을라고 말이오. 주일날 와 가지고.

그 일 있었어요? ○○○ 선생 잘 아는데, 나만치도 모르는가배. 시민 회관에서 그날 와 가지고 뭐 했다는데, 주일날. 몰라? 그날 사람들이 뭐 몇십만 모였다던가 꽉 안팎에 꽉 들이 모았다는데. 개헌 서명 운동 그거 하는데 그 안 믿는 사람들은 뭐 주일날 잘 모이니까 좋겠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이 그거 하면은 틀렸다 그거요. 알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그거 하면 틀렸어.

믿는 사람이 주일날, 주일날은 그런 것 하면 안 되는데 주일을 범해 놨으니까, 주일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데 이래 놨으니까 고만 안 됐다 그거야. 벨사살 왕을, 벽에 글이 써붙이기를 뭐라 했소? 데겔이라 말이 무슨 말이지요, 데겔? 저울에 다니까 부족하다 이랬다 말이오. 저울에 다니까 그 중량이 모자라. 중량이 모자라니까 날아가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들, 우리 앞에는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나 닥치는 것이나 이 전부가 죽느냐 사느냐, 망하느냐 흥하느냐,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유익이냐 손해냐, 수치냐 영광이냐, 막히느냐 형통이냐 이것이 꽉 있는데 이거 자꾸 사는 길로만 가면 그만 형통 형통으로 자꾸 이래 되는 건데 이 산다 하면서 자꾸 자살 행위를 한다 말이오.

주님이 나사로 죽은 무덤에 갈라 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막 엉엉 울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겠다고 가슴이, 보니까, 들여다 보니까 그 속이 썩어서 지금 굉장히 상할 만치 이렇게 하면서 울고 이렇게 하는데, 울고 이렇게 뭐, 참 죽은 것을 원통해 하고 마음에 원통해 하고 죽은 것을 원통히 여겨서 이라면서, 이라면서 주님은 믿지 안하고 내나 자기네들을 죽이는 악령 악성 악습, 옛사람, 옛사람 그거는 자기 아닙니다. 옛사람 그놈이 들어서 완전히 죽이는데, 죽이는데 죽은 것을 원통히 울면서도 내나 옛사람 그놈 시키는 대로 내나 그놈으로 주장하고 그놈으로 살고 있다 말이오.

이거 지금 이러니까, 그 옛사람으로 살면 그렇기에 죽은 것인데, 옛사람으로 그거 사는 것은 죽이는 것인데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죽기를 싫어하면서 옛사람 시키는 대로 지금 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 그거라 말이오. 그러니 예수님이 너무 분해서, 요놈 요놈이 사람을 죽이면서도 얼마나 감언 이설로 꾀우든지 죽이는 데도 그게 사는 길인 줄 알고 이거 백성들이 꼬여 가지고 사는 걸 보고서 분해서 일면은 분하고 통분히 여기고 너무 가련해서 눈물이 나왔다 말이오. 예수님이 운 것이 그것입니다.

그만 이제 그만 시간 많이 지나갔으니까, 아브라함과 롯이 이렇게 그 앞에 두 길이 있는데 이 두 길을 아브라함은 생명길을 찾았고 롯은 사망의 길을 찾았습니다.

찾았으니까, 요게 네 가지를 말했는데, 그러면 첫째는, 자기에게 대해서 ‘자기를 어떻게 하노?’ 인간들이, 이것도 여러분들이 가서 명상을 하고 몇 달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 도인이 지금, 예를 들면은 한 십 메타도 못 올라가고 십 메타 있는 데 거기 있는 사람이 천 메타를 올라갈라 하면 얼마나 기어올라가야 됩니까? 자꾸 이거는 명상하고 생각해야 되지 생각하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들어 놓으면 차차차차 때가 되면은 그때 깨닫게 돼. 깨달으면은 그때 들은 것은 간 곳이 없고, 자기가 이상하게 깨달았다는 걸 깨달아 가지고서, 깨달은 걸, 그러면 그거 하나님이 주셔 깨달은 것이나 들어 깨달은 거나 다 좋기는 좋은 것인데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 제가 깨달았다 해 가지고서 교만한 자들 많아.

실컷 배우고 난 다음에, 예를 들면은 배워 가지고 찍해야 일학년밖에는 안 되는 게 가르치기는 벌써 대학까지 다 가르쳐 놨는데 일학년 과정밖에는 모르면서도 그것 깨닫고, 잊어 버린 게 많으니까 이거 겸손하지 안하고서 이거 제가 깨달았다고 일학년 걸 깨닫고 난 다음에 고만 교만해서 제 이상 없는 줄로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앞길은 넘어지고 마는 거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진작은 못 하나 자꾸 기억만 하고 있으면, 자꾸 명상해야 돼요.

이 네 가지인데, 첫째는 뭐이냐? 인간들이 제일 복잡한 문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정력을 차지하고 있는 그 문제가 무슨 문제냐 하면은 자기에게 대한 문제입니다. 자기에게 대한 문제. 자기를 확정을 지우지 못해요.

자기를,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그래도 자기가, 나는, 나는 이 길을 가야 되겠나, 나는 법을 공부해야 되겠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고시 공부를 해야 되겠다, 나는 기술을 배워야 되겠다, 나는 알뜰한 주부가돼야 되겠다, 뭐 자기의 향방이요, 자기의 존재 목적이요, 자기의 소망이요, 자기에게 대한 확정을 지운 사람은 대단히 큰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아주 복잡한 것이 다 없어져 버리고 단순하게 됐고 솔직하게 됐고 확신 있는, 자신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인간에게 제일 복잡하고 많은 시간과 많은 정력과 많은 정신과 많은 총명을 차지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이 자기라는 것이 차지하고 있어. 자기에 대한 문제가 제일 문제가 돼 가지고서 이것이 제일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게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런데, 자기에게 대해서 해결이 돼 버렸어.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내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딱 하나로 결정한 이게 얼마나 큰 일을 추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문제, 자기 문제가 해결이 됐어. 자기 문제가 천도 만도 그 문제가 천 가지 만 가지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 다 치워 버리고 하나.

또, 사람이 접촉하는 사람이 백 명도 천 명도 만 명도 더 넘을 수가 있고 수많은 사람을 접촉할 수 있는데 이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은 이래 말하고 저 사람은 저래 말하니 이거 어떻게 하노, 어떻게 하노? 이것도, 이러니까 사람들이 가다가는 팔방 미인이 됩디다.

팔방 미인이라 말은 창기라 말이오. 쉽게 말하면 창기. 팔방 미인이라면은 이 사람도 맘도 좋게 해야 되겠고 저 사람 마음도 좋게 해야 되겠고 저 사람 비위도 맞춰야 되겠고 이 사람 비위도 맞춰야 되겠고 이 사람하고도 교제를 해야 되겠고 이거 단단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말하기를 너는 팔방 미인이라.

팔방이라.

팔방이라면 여덟 가지 모배기라 말이오. 이 모도 미인 저 모든 미인 이 모두 이 사람에게도 잘 보여야 되겠고 저 사람에게도 잘 보여야 되겠고 모두 잘 보일라 하니까 그 사람은 팔방 미인인데 그 사람을 다른 말로 말하면 창기라, 기생이라, 창기라, 팔방 미인은 창기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거 사람이 많고 사람의 상대가 많고 이 사회에서 살라 하니까 여론이 많고 의견이 많으니까 이거 큰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복잡하다 말이지. 복잡한데 이 복잡한 걸 부지런히 날뜁니다. 나는 아침에는 이 사람, 저녁에는 저 사람, 새벽에는 저 사람, 이 시간에는 저 사람, 또 이 사람은 요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조렇게 말하고 막 수단 있습니다. 날고 뜁니다. 이 사람에게 이 일, 저 사람에게 저 일 자꾸 다 이렇게 하니까 이게 복잡하지마는 제까짓 놈이 다 못 합니다. 이 복잡한 걸 하나로 딱 결정지웠다 말이오. 천 인 만 인이 말하든지 하나님의 뜻 하나, 요게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당신의 뜻 하나만을 찾기로 딱 작정했다 말이오. 수많은 인간의 여론들이 많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뜻 하나, 또, 이거 소돔 들은 물이 좋다, 뭐 여게는 물이 없다, 여게는 풀이 있다, 여기는 풀이 없다, 여게는 자산이다, 여게는 푸른 초장이다, 막 배경이 많지마는서도, 그러니까, 요거보다는 조게 낫고, 저게보다는 저게 낫고, 저것 보다는 저게 낫고 이러니까 평생 좋은 장소 택하다가 맙니다. 항상 부럽기는, 요게 있다면 저게 좋다, 저게 부럽고, 항상 불만과 불평과 부러움이 가득이 찼는데, 그런 가운데에 롯은 이 조건이 좋으나 저 조건이 좋으나 자꾸 조건 좋은 것 그것만 맞췄지마는서도 아브라함은 단순합니다. 이런 조건이나 저런 조건이나 다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축복이면 된다 하는 하나로만, 하나님의 축복이면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 받을 그것만 항상 생각합니다. 그것만.

또, 하나 남은 거는 뭐이요? 하나 남은 건 뭐이지? 또 잊어 버렸나요? 성패, 성패, 성패라도 ‘요것보다는 조게 성공이다, 조것보다는 조게 성공이다, 조것보다는 조게 실패다, 조것보다는 조게 실패다.’ 실패도 종류가 가득 찼고 성공도 종류가 가득 찼으니까 이 실패 종류 그거 다 피해야 되겠고 성공 종류 다 이걸 가져야 되겠는데 어느 걸 선택해 가져야 될지 복잡하다 그 말이오. 이랬는데 아브라함은 단순해. 어쨌습니까? 성패는 어떻게 했소? 어떻게 했소? 그래. 성패는? 나는 몰라.

성공 같으나 실패 있고 실패 같으나 성공 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 대해서는 모른다. 주여, 성패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이 책임져 주십시오. 성패는 당신에게 맡겨 놨다 말이오. 그러면 저 할 일은 뭐이냐? 저 할 일은 앞에 세 가지. 앞에 세 가지는 저 할 일이요 뒤에 성패는 하나님께 딱 맡겨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수월하고 단순하고 쉽고 복잡지 안하고 이런 사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벗어나니까, 어제 아침에도 말했어요. 한 가지 사건에서 고것을 옳게 바로 처리하는 옳은 이치는 몇 개 돼요? 삐뚤어진 이치는 몇 개 돼요? 천도 만도 넘지.

이런 이 사망의 길에서 생명길로 인도하는데 이 마귀란 놈이 꼬와 가지고 이 생명길을 얻지 못하고 자꾸 사망에서 헤매이고 있다말이오.

대구 집회에, 오월 집회 한 번 가 가지고서 이거 하나를 일주간 내, 집회 내내 가르치고 말았더니마는서도 가르치고 나니까 그 배워 가지고 가는 사람이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어데 할 말이 없어서 그걸 일주일 내내 한다고서. 일주일 내내 한다고. 이러니까 너는 인본이다, 너는 인본이라, 그걸 회개해야지 회개 안 하면 끝이 빤하다 그 말이오. 그거 빤해.

지금도 내가 볼 때에 그 인본이 많아서 이게 우리 교회 오면 내가 바짝 붙들어 지금 그만 깨뜨려 좀 주겠는데 그런 데 가면 그게 대가리라고 흔들어 쌓아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바로 고쳐 주지를 못해.

그래, 이제 고걸 말하자면 껍데기과 알맹이가 있다. 알맹이 있으니까 껍데기 취하지 말고 알맹이로 살아라. 그래서 오늘 이 양성원 학생들은 이제 그만 오늘이 지금 끝날이지? 끝날인데 단단히 가서 이다음에, 외식에 대해서 기록하라 할 터이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요게는 요게 외식이며 요게 외식이다. 외식 하나만 기록해도 진짜 나오거든. 그렇지 않아? 이 모르기 때문에. 그거 시험낼 터이니까 고거 다 보고서. 그걸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껍데기 사람은 알맹이 하나도 모릅니다. 껍데기를 몰라요.

이래 가지고 이걸 모르기 때문에 목사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구백 구십 구요, 예? 그만침 외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한 말로, 마태복음 23장에, 오셔 가지고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못 하고, 그러면 다른 데 말씀하시기를 ‘내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해를 받아서 십자가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깨달아서 어짜든지 고치기 위해야 되지 여기 와서도 양성원에 와 가지고 ‘보자. 요 말은 설교할 때 써먹으면 좋겠다.’ `좋겠다.’ 그 설교할 재료를 지금 얻고 지식을 얻을라 하는 고 자가 있고, 고 자는 망할 자고, 여기서 배우는 데에서 나를 대조해서 나를 고쳐야 되겠다, 나를 고쳐야 되겠다, 나도 역사를 볼 때에, 역사에 보니까 내가 이런 사람 되기 쉽겠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겠다, 나를 고쳐야 되겠다, 자기를 고쳐야 되겠다는 사람은 인제 그 사람은 될 거고, 자기 고치고, 자기 고치고, 자기 고치면 뭐 돼요? 자기 고치면 하나님 만나지.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요, 착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하나님 만나 가지고 하나님하고 들어붙으면 되는데 뭐 딴게 뭐 있는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는 할라고 하지 안하고 엉뚱한 외식 껍데기, 하나님 만나지 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안 하고 자기 영광스럽게 할라 하고, 하나님 대우하지 안하고 자기 대우할라 하고, 하나님 대우는 알맹이고 자기 대우는 껍데기지, 그렇지 않소? 하나님에게 인정 받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인정 받는 거 반대는 뭐이요? 하나님에게 인정 받는 거는 알맹이, 사람에게 인정 받는 거는 껍데기, 이러니까 껍데기는 알맹이가 있어야 되고 알맹이는 또 껍데기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은 것은 저 사람에게 인정 받기까지 나와야 되고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은 자꾸 들어가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기까지 들어가야 되고, 알맹이가 생겨 가지고 껍데기가 되는 것 있고 껍데기가 생겨 가지고 알맹이가 되는 게 있다 그거라.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좀 넓혀서 깨어서 살아야 됩니다. 깨어서 살면 왜 우리가 승리를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승리 못 하는 거는 그래도 기도 안 하면 안 돼.

나는 기도를 못 해서 앞으로는 지금 이거 공산주의나 뭐이 오면은 아마 내가 실패한 것 같애요. 실패할 것 같은 거는 자꾸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못 해.

오늘도 안 올 건데 이 양성원 학생들이 있으니까 첫째 여기 와야 되겠다. 그리 안 하면 이거 뭐 재독이나 하나 하고 내가 안 올라 하다가 또 가야 되겠다.

또권찰회가 있으니까 가야 되겠다 이렇지, 좀 기도 좀 하고 좀 이래 좀 들어가면 환한 세계로 자꾸 들어가서 이런 건데, 이거 나와 놓으면 이랄까 저럴까 몰라 그만 방황한다 말이오. 그분 만나면 고만 환하게 갈 길이 쪽 바로 곧게 있다 그거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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